오늘은 양평 지평리에 다녀 왔다.
이곳 지평리에는 전적비가 여러 곳에 건립되어 있는데 이는 1951년 2월 대 중공군 방어전투 즉 지평리전투의 공적을 기념하고 전사한 장병의 영령을 추모하고자 1957년 7월 15일 국군 제5사단 및 양평군에서 건립한 것이다.
지평리지구 전투란 1951년 2월 13일에서 2월 15일까지 미군과 프랑스군이 지평리지구에서 병력과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중공군 5만여 명의 파상적인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전투를 말한다.
그런데 오늘 새로이 알게된 사실이 있다.
당시 프랑스군(프란시스 대대라고 불렀음)의 지휘관 몽클라르 중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 군으로 참전했다. 종전 후 중장으로 예편했는데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프랑스 정부가 대대 규모의 부대를 한국에 파병한다는 결정을 내리자 한국전쟁 참전을 위해 중령계급으로 원대 복귀를 신청했다.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그는 프랑스 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계급은 중령이었지만 유엔군 사령부와 미 제8(2사단)군 장병들은 그의 이러한 배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몽클라르 장군으로 불렀다.
당시의 프랑스는 1948년부터 베트남과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프랑스에 있어서는 당연히 남의 나라 전쟁보다 베트남과의
(제1차 베트남 전쟁:1948~1954년)이 더 중요했다.
게다가 베트남과의 전쟁이 한국전쟁과 같은 시기에 전투가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1952년의 프랑스는 베트남에 해군전함을 포함한 대량의 증원을 행하고 베트남 북부의 완전한 제압을 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한국전쟁에 개입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이 휴전하려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자 프랑스군은 1,000명까지 삭감되고 53년10월에는 본국으로 철수했다.
또 프랑스 해군은 한국에 소형포함 1척을 파견하고 있었지만 이 소형포함도 전쟁 중반쯤 베트남으로 향했다.
프랑스 육군(해군포함)의 피해 규모는
*전사자 : 262명
*전상자 : 1,008명
*포 로 : 12명
*실 종 : 7명이었다.
중앙선 지평역의 옛 모습
새로 신축한 지평역 驛舍
지평역전에 펼쳐진 벌판 저 끝에 프랑스 군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프랑스 군 대대본부가 위치하고 있었던 곳이라는 표석(프랑스, 한국, 미군 참전내용이 표시)
이곳은 해방전부터 지평막걸리 양조장이었는데 6.25전쟁중에는 프랑스 군 대대 CP
현재도 막걸리를 생산하고 있다
지평 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는 미군 참전 전적비
■ 지평리 전투 개요
1951년 1월 25일부터 유엔군은 재반격작전의 일환으로 실시한 썬더볼트 작전과 라운드업 작전의 결과로 서부전선에서 한강선까지 진출할 때, 중공군은 서부전선에서의 후퇴를 만회하기 위해 미8군의 예상을 깨고 그들의 주력을 중부전선으로 이동시킨 후, 2월 13일 횡성을 탈취하고자 공격방향을 지평리로 향했다. 이때 중공군은 횡성전투에서 국군을 공격해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지평리를 공격하면 유엔군이 그 이남으로 철수할 것으로 판단했다. 중공군은 그들의 전과를 확대하기 위해 39ㆍ40ㆍ42군 등 8개 연대로 13일 저녁에 지평리 지역을 점령케 하고, 42ㆍ66군 주력과 120사단으로 하여금 원주 지역까지 진출해 서쪽으로부터 유엔군의 증원을 차단하면서 원주 일대의 유엔군을 고착 견제하게 했다.
중공군이 지평리를 노린 이유는 명백했다. 지평리는 미9군단과 10군단을 연결하는 지점으로서 중부전선에서 서울-양평-홍천-횡성-여주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래서 이곳을 잃으면 서부전선의 아군 측방이 크게 위협을 받게 돼 있었다. 반면 미8군이 지평리를 확보하면 한강 이남의 미1군단·9군단과 대치하고 있는 적을 포위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한편 지평리는 2월 3일 이후 미2사단 23연대전투단의 작전지역이었다. 미23연대전투단은 미23연대를 주축으로 프랑스대대ㆍ1유격중대ㆍ378포병대대ㆍ503포병대대 B포대ㆍ82대공포대대 B포대ㆍ2공병대대 B중대로 구성됐고, 총 병력은 5600명이었다.
또한 지평리 주위는 280미터 내외의 고지가 있어서 직경 5킬로미터의 사주방어를 편성하기에 적합했다.
1951년 2월 13일 밤, 3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나팔 등을 불며 연대의 전 정면에 걸쳐 공격해 왔다. 이에 미23연대는 사전에 매설한 지뢰와 철조망, 그리고 포병화력으로 적을 저지했으나, 적은 분대규모의 병력으로 끊임없이 공격해 왔다. 그것은 마치 파도가 계속 해안으로 밀려오듯이 하는 제파식 공격이었다. 중공군의 이런 공격으로 중대 진지가 한때 돌파되기도 했으나, 전차로 증강된 역습을 통해 이를 격퇴해 나갔다.
특히 프랑스대대가 방어하는 지역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끈질겼다. 전투 개시 다음날인 2월 14일 02시쯤 중공군의 제2파가 피리와 나팔을 불면서 공격해 왔을 때 전투는 절정에 달했다. 프랑스군도 중공군의 나팔 소리에 대한 맞불작전으로 수동식 사이렌을 울리며 적의 기세를 제압했고, 또 적이 진내에 들어와 백병전이 불가피해지자 대대장 몽클라(Ralph Monclar) 중령을 비롯한 프랑스군은 철모를 벗어 던지고 머리에 빨간 수건을 둘러매고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적을 위협해 가며 싸웠다. 이 싸움에서 프랑스군은 결국 중공군을 격퇴했다. 이 공로로 프랑스군은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다.
이처럼 중공군과 미 23연대와의 지평리에서의 치열한 전투는 2월 15일 아침까지 계속됐다. 전투과정에서 중공군의 계속적인 공격에 연대장 프리먼 대령은 예비로 확보해 뒀던 돌격중대까지 투입하며, 적과 똑같이 함성을 지르고, 수류탄을 던지고, 총검으로 맞서며 공격해 오는 적이 질릴 정도로 용감하게 싸웠다.
이때 연대장 프리먼은 부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하며 끝까지 부하들과 함께 싸우며 승리를 쟁취했다.
전투 간 미8군사령관은 지평리 상황을 주시하며 공군과 보급품을 지원했다. 특히 14일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미9군단의 예비인 크롬베즈의 5기병연대를 주축으로 한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를 편성, 지평리에 투입했다. 크롬베즈부대는 15일 아침 항공지원하에 공격을 개시했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출이 어렵게 되자, 병력 160명으로 구성된 1개 보병중대와 전차 23대로 공격조를 재편성해 다시 공격했다. 결국 크롬베즈가 지휘하는 공격조는 중공군의 무차별 공격 속에서 15일 17시쯤 드디어 미23연대와 연결했다. 이렇게 되자 미23연대를 포위하고 있던 중공군이 퇴각하게 됐다. 이때 미군 진지 주변에 흩어진 중공군 시체만 2000여 구에 이르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의 사상자 수는 미23연대 병력인 4946명으로 추산됐다. 반면 미23연대는 전사 52명, 부상 259명, 실종 42명이라는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미23연대는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신속히 공세로 전환해 16일 오전 악천후임에도 불구하고 적을 추격하며 전과를 확대해 나갔다.
■ 지평리 전투의 의의
지평리 전투는 1950년 중공군 개입 이래, 유엔군이 처음으로 중공군 대규모 공격에 물러서지 않고 진지를 고수하며 싸움으로써 승리한 최초의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미 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고립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진지고수 의지와 철저한 야간사격통제, 예비대의 적절한 운용과 역습, 그리고 화력의 우세와 긴밀한 공지합동작전으로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는 3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을 격퇴하며, 적의 2월 공세를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침내 이 전투로 중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그들의 2월 공세에 실패했으며, 유엔군은 중공군이 6·25전쟁에 참전한 이후 최초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게 돼 재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게 됐다. 또한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몰아붙이는 공세가 실패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에 따라 유엔군은 중공군에 대해 자신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후 38도선 회복을 위한 작전에 반격을 가할 수 있게 됐다.
특히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지평리전투에서 유엔군이 중공군과 싸워 처음으로 승리를 하게 되자, 중공군 3차 공세 시 37도선까지 밀려나며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유엔군의 사기를 다시 추슬러 가며 중공군에 대한 공세를 펼치게 됐다. 이에 따라 유엔군은 손에 손을 잡고, 서로 어깨를 맞대며 38도선으로 향해 강력한 공격작전을 전개하게 됐다. 그 결과 유엔군은 서울을 재탈환한데 이어 38도선 일대를 다시 확보하게 됐다. 이것은 모두 지평리전투의 승리를 기점으로 해서 얻어진 값진 결과였다.
첫댓글 프랑스 대대의 막걸리 공장 CP가 인상적이네요.
프란시스 대대의 지휘관 몽클라르 중령의 스토리는 감명적이네요. 특히 베트남과 프랑스와의 전쟁 역사는 이 글을 보고 처음으로 상세히 알았네요.
글을 올리신 물길님께 꾸뻑!
지평리 전투 숨은 이야기 들려줘서 감사합니다 멋있는 참전기행 잘 읽었습니다
전역한 중장이 중령으로 참전한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정신. 우리가 본 받아야 한다.
우리 외가 근처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기록해주어 잘 읽었습니다. 몽크라르 장군의 참전일화는 감동적입니다.
지평리 전적지 소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