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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보낸 파란만장한 시절을 이야기하는 송승준. |
-처음 미국에 간 계기는.
▲1998년에 동대문 야구장에 스카우트들이 와서 경기를 지켜보고 하다가 결국 미국으로 가게 됐다. 처음에는 양키스와 활발히 이야기가 있었는데 뒤늦게 접촉해온 보스턴과 계약금 차이가 있었다. 당시 에이전트 하던 분이 보스턴이 좋겠다고 해서 그쪽과 계약을 했다. 그리고 1999년 4월30일에 미국으로 갔다, 비자 때문에 늦어져 스프링 캠프가 끝나고야 갈 수 있었다.
-만 19세에 가장 아래인 루키 리그부터 시작했는데 처음엔 어땠나..
▲곧바로 포트마이어스의 루키리그에서 시작했다. 마이너에선 계속 성적이 좋았다. 매년 한 한계 이상씩 올라갔다. 2000년엔 로우싱글A, 2001년엔 미들A를 거쳐 하이싱글A까지 갔고, 2002년에는 더블A로 승격됐다. 루키리그에서 구단 최우수 선수로 뽑히는 등 순조로웠다.(송승준은 루키 리그에서 13게임, 9번 선발로 나서 5승5패에 평균자책점 2.29의 성적을 올렸습니다. 55이닝에 삼진도 61개를 잡았습니다. 2000년엔 5승2패, 그리고 2001년에는 8승4패에 1.90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에 큰 변화를 겪었다.
▲7월31일에 (김)선우형과 함께 몬트리올로 트레이드가 됐다. 클리프 플로이드와 2대1 트레이드가 됐는데 정말 아쉬웠다. 보스턴에서 계속 뛰었더라면 당시 유망주 1위였고 40인 로스터에 들어갈 상황이었다. 4년째였기 때문에 보호 명단에 넣는다고 했었다. 그리고 9월에 기회가 올 수도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몬트리올의 더블A인 펜실베니아의 해리스버그로 갔다. 그런데 가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고 시즌 막판에 너무 무리했는지 어깨 부상을 당했다. 근육에 무리가 왔고 시즌을 마감하고 플로리다에서 3주간 재활을 했다. 그래도 시즌을 마치고 40인 로스터에 들어갔다.
-큰 부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게 좀 웃겼다. 구단 더블A 지정병원에 가니까 근육이 찢어졌다며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너무 충격을 받았고 야구를 못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하고 있는데 몬트리올 메이저리그팀 주치의에게 다시 검사를 받으라고 해서 갔더니 괜찮다며 재활을 하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에 왔는데 40인 로스터에 들어갔다는 연락이 왔고, 그래서 2003년부터 메이저리그 캠프에서 시작했다.
-성적도 계속 좋았는데 무엇이 걸림돌이 됐는지.
▲한참 잘 나갈 때가 2002년도였다. 그런데 트레이드되면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심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깨도 다쳤고, 또 2003년 스프링 캠프에서 초반부터 정말 힘을 주고 무리하게 던졌다. 그래서 팔꿈치를 다치고 말았다. 시범 경기에 한번도 못 나가고 불펜 피칭만 계속했다. 그런데 나를 더블A로 다시 보내더라. 나를 잘 아는 보스턴에 있었더라면 조금 더 여유를 갖고 했을텐데 나 역시 내 관리를 잘 못했던 것 같다. 트리프A로 갈 줄 알았는데 또 더블A로 보내 실망도 되고 좌절도 했다.
-그래도 성적은 참 좋았던 것 같은데.
▲거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정말 열심히 했고 성적도 좋았다. 바로 거기서 노히트노런을 했다. 2003년 4월28일 디트로이트 더블A 팀과 경기였는데 우리 팀 세네터스 팀 역사상 8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해리스버그 야구장에 가면 내 사진이 크게 걸려있다. 그래도 미국 어디 한군데 내 얼굴을 남겼다는 것이 기분은 좋다.(더블A에서 성적은 5승2패 2.34로 좋았습니다.)
그리고 6월에 에드먼턴의 트리플A로 승격됐다. 거기 가서도 6승 무패로 시작하는 등 정말 좋았다.
-그 정도면 빅리그에서 기회가 주어질 만한데.
▲몬트리올의 선발진이 차 있어서 9월에 올린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9월 초 트리플A 팀이 플레이오프에 가서 선우형이랑 함께 선발로 나갔다, 아쉽게 새크라멘토에게 졌는데 다른 선수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는데 나랑 타자 중에 터멜 슬레지만 남으라고 했다. 그런데 빅리그로 곧바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 대기를 하라고 했다. 운동을 하고 있으라고 해서 LA로 가서 찬호형 소개로 USC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주일쯤 운동을 하고 있는데 단장에게 연락이 왔다. 구단의 재정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올릴 수가 없다는 거였다. 보통 최소 4~5명은 올리는데 단 한명도 올리지 않았다. 정말 실망했고 마음이 아팠다. 진짜 올라가고 싶었는데........
몬트리올 시절의 송승준(아래)과 김선우. |
-2004년에는 빅리그로 갈 것이라는 예상이 높았는데.
▲시즌을 앞두고 몬트리올이 5선발 자리가 비어서 선우형이랑 나랑 경쟁을 벌일 것이라는 기사들도 많이 나고 그랬다. 그 해 스프링 캠프에서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팀들과 대결을 할 기회가 있었다. 팀에서도 카디널스와 전년도 우승팀 말린스 등 좋은 팀들과의 대결에 계속 기용을 해줬다.
-그때 기억이 난다. 잘 던지다가 홈런을 맞곤 했었는데.
▲그렇다, 진짜 잘 던지다가 어이없이 홈런을 띡 맞곤 했다. 공은 참 좋았는데. 프랭크(로빈슨) 감독은 홈런은 맞을 수 있다며 계속 그런 공격적인 피칭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런데 나도 못하고 선우형도 잘 못하고 해서 구단이 고민이 많았다. 결국은 옵션이 없었던 선우형은 중간 계투로 가고 나는 트리플A로 갔다. 자크 데이라는 선수가 5선발을 차지하고 말았다.
-그 해엔 큰 부상도 있었다. 희한한 부상이었는데.
▲트리플A로 가서 1선발로 시즌을 시작해 3승을 거두는 등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손을 부러뜨리고 말았다. 2004년 5월8일 어버이 날이었으니 정말 죄스러웠다. 타석에서 공을 때렸는데 너무 잘 맞아서 홈런일줄 알고 걸어 나갔는데 공이 펜스 상단에 맞고 떨어졌다. 그래서 1루까지밖에 못 갔다. 바로 다음 타자 때 유격수 땅볼이 나와 2루로 슬라이딩을 했는데 2루수가 송구를 하는 공을 오른손에 맞아 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내가 주자를 살리려고 슬라이딩을 하니까 일부러 맞춘 것 같았다. 그래서 두 달을 넘게 쉬었다. 그리고 돌아오니 공이 예전 같지 않았다. 7월말에 다시 합류했는데 변화구 던질 때도 손목이 안 좋고 날씨가 나쁘면 아프고 그랬다. 그래도 루키리그와 하이싱글A의 재활 등판을 거쳐 트리플A로 다시 올라가 시즌을 잘 마쳤다. 당시 트리플A 팀에 40인 로스터에 들어있는 선수는 나밖에 없어서 9월에 기대를 했는데 이번에는 타자 한명만 달랄 올렸다. 참 배신감도 느끼고 미치겠는데 그러더니 내겐 애리조나 폴리그에 가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참 이해하기 일들이 계속 발생했다.
▲폴리그가 끝나 가는데 갑자기 몬트리올이 나를 웨이버 공시하면서 풀어버렸다. 정말 3일 동안 잠도 못하고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토론토가 나를 데려가면서 40인 로스터에 넣었다. 그래서 이제 토론토에서 다시 야구 인생을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1주일 만에 다시 웨이버 공시로 토론토도 나를 방출했다.
-왜 그런 일이 발생했나.
▲진짜 모르겠다. 스티브 형(당시 에이전트)도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결국 다음 해(2005년) 토론토와 트리플A 계약을 하고 야구를 다시 시작했다. 당시 왕치엔밍과 다시 만나 반가웠던 생각이 난다. 왕치엔밍과는 싱글A 때부터 같은 리그에서 뛰면서 자주 만났고 같은 동양인이라 가까이 지냈었다. 퓨처스 게임도 같이 갔었다.(송승준은 2001년부터 3년 연속 인터내셔널팀 대표로 퓨처스 게임에 출전했습니다. 왕치엔밍은 2002년 멤버였습니다.) 2005년 시범 경기에서 왕치엔밍과 맞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토론토 팀을 떠난 이유가 무엇인가.
▲캠프 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당연히 트리플A에서 시즌을 시작하는 것으로 알았다. 토론토의 트리플A는 뉴욕 주 시라큐스에 있었는데 캠프 마지막 날 투수 코치가 4월8일 2선발로 나간다고 말까지 했었다. 그래서 시라큐스에 있는 교민들에게 연락해 집까지 구했는데 이동을 하려고 짐을 싸들고 가니까 마이너리그 디렉터가 불렀다. 의아해하면서 갔더니 방출이라고 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거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방출됐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 후엔 어떻게 됐나.
▲그래서 LA로 가서 다른 방도를 모색하려고 했다. 스티브 형의 주선으로 다저스와 테스트를 받기로 했다. 비밀리에 테스트를 받고 통과하면 발표할 예정이었는데 국내 한 신문에 그 사실이 먼저 나면서 다저스에서 발끈해 그것도 틀어졌다. 그러다가 샌프란시스코 마이너리그와 연결이 됐다. 정말 우연히 내가 몬트리올때 뛰던 더블A 팀의 데니스 마크맨 감독님과 연락이 됐다. 당시 그 감독님이 샌프란시스코 더블A 감독으로 가 있었다. 그런데 필라델피아 더블A에서 뛰던 (이)승학이 형을 만나 내 소식을 물었다가 내가 방출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해할 수 없다며 LA에서 두 시간 떨어진 자이언츠 싱글A 팀에 가서 공을 몇 개만 던져보라고 했다. 내가 공을 던지는 것을 본 마이너리그 디렉터가 곧바로 계약을 하자고 했다.
그런데 더블A와 트리플A에 당시 자리가 없다면서 싱글A에서 재활 등판 식으로 5게임 정도만 뛰고 다시 승격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참 어이가 없었다. 2~3년 동안 더블A, 트리플A에서 뛰었는데 또 싱글A로 가라니. 그 때 스티브형이 내게 결정을 하라고 했다. 한달 쯤 있다가 다저스의 트리플A로 갈 것인지 곧바로 자이언츠에서 운동을 시작할 것인지. 다저스가 정말 좋아 고민을 많이 했지만 다저스는 보장된 자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싱글A부터 시작했다.
-새 출발도 나쁘진 않았는데.
▲싱글A에서 한달 쯤 잘 던지자(5승2패 1.95) 곧바로 더블A로 올렸고, 또 한달 만에 프레스노의 트리플A로 올라갔다. 더블A 있을 때는 자이언츠의 브라이언 사빈 단장이 와서 보는 경기에서 7이닝 무실점에 3타수 3안타를 기록하자 직접 불러서 계속 지켜볼테니 잘 하라고 격려를 해주며 9월에 보자고도 했다.
그렇지만 9월 승격은 또 없었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2이닝 5실점인가로 망쳐서 평균자책점이 4점대 초반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9월이 되자 내가 아니라 브라이언 쿠퍼라고 예전에 LG에서 뛴 적이 있는 선수를 올렸다. 쿠퍼는 방어율이 6점대였다. 9월에 올리겠다고 말이나 하지 말던지. 미국 사람들 하면 생각나는 말이 ‘두 얼굴의 사나이’다. 정말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 심하다는 느낌뿐이다. 그래서 다시 허탈하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2006년에는 캔자스시티 산하에서 뛰었는데.
▲사실 그 겨울에 오클랜드와 텍사스에서 계속 계약을 하자고 했다. 그런데 투수력이 좀 약한 팀에서 뛰고 싶었다. 그래서 당시 에이전트인 단 노무라 사무실에 그렇게 이야기를 했고, 그래서 캔자스시티에 입단을 하게 됐다. 당연히 트리플A 계약인줄 알고 갔는데 가보니까 더블A 계약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했더니 몇 게임만 하면 트리플A로 올린다고 했다. 믿지도 않았지만 나름대로 또 열심히 했고, 올스타까지 뽑히기도 했다.
그런데 그 때 난 기로에 서 있었다. 나이가 해외에서는 마지막으로 있을 수 있는 해였다. 군대를 가야할 때가 됐다. 자포자기 상태가 되서 경기도 엉망이 됐고, 정말 고민이 많아 머리가 많이 빠질 정도였다. 그러다가 군대를 가기로 결정을 했다. 군대를 빨리 마치고 다시 시작하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곧바로 귀국한 건가.
▲그건 아니다. 8월 초에 군대를 가기로 결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서 짧은 3주 정도는 정말 맘 편하게 잘 던졌다. 팀도 플레이오프까지 올라갔다. 준결승 5차전에서 7이닝인가를 잘 던져 승리했는데 바로 다음날 9회말에 더 이상 던질 투수가 없다며 감독님이 고민을 했다. 그래서 내가 자진해서 등판하겠다고 했다. 이제 적어도 2년 넘게, 어쩜 영원히 그 마운드에서 던질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언제 이렇게 던져보겠다며 9회말 동점에서 마운드에 올랐다. 그런데 경기가 14회까지 갔다. 그리고 14회말에 투아웃 주자 2루에서 바가지 안타를 맞고 패했다.
경기가 끝나면서 참 서럽더라. 그래서 마운드에서 관중도 많았는데 펑펑 울었다. 감독님이 시합에 져서 우느냐고 묻길래 그게 아니라 이제 2년 넘게 여기서는 던질 수 없어서 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프랭크 화이트 감독님에게 한국에 가기 전에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공 한개만 던지고 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다. 패전 처리든 한 타자만 상대하든 상관없다고 했다.
그래서 진짜 감독님이 캔자즈시티 구단에 이야기까지 했지만 구단에서는 안타깝지만 나를 올리자면 40인 로스터에 넣고 다른 선수를 빼야하고 너무 절차가 힘든 일이라고 했다. 어차피 안될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섭섭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정리를 하고 귀국했다.
보스턴 마이너시절 최고 유망주이던 송승준은 몬트리올도 트레이드되면서 모든 것이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
-그런데 롯데로 입단하게 됐다.
▲갑자기 해외파 특별지명으로 작년 초에 제재가 풀리면서 롯데에서 나를 지명해주었다. 그래서 군대는 조금 미루고 다시 야구공을 잡게 됐다. 재활군에 가서 훈련을 다시 시작했는데 한 달도 안돼서 1군에 올라갔다가 다시 2군에서 한 달 정도 몸을 만들고 계속 뛰었다. 힘들었지만 열심히 던졌다. 6월부터 시즌 끝날 때까지 100이닝도 넘게 던졌다.
-현재 몸 상태는 어떤가.
▲작년에 시즌 마치고 일부러 공에 손도 안 됐다. 시즌 때 너무 무리한 것 같아서 쉬면서 러닝과 웨이트만 좀 했다. 이제 전지훈련부터 따뜻한 곳에서 본격적으로 공을 던질 것이다.
-계속 아슬아슬하게 빅리그 진입이 안 됐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나도 그 생각을 많이 한다. 옛날부터 있었던 일을 쭉 돌이켜보면서 왜 안됐을까, 바로 눈앞에 까지 가서 왜 안됐을까. 솔직히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뭔가가 2% 정도 부족했다. 야구가 됐으면 생활적으로 뭐가 부족했던지 둘 중에 뭔가 2%쯤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속으로는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만한데.
▲사람이니까 억울한 것도 당연히 있다. 솔직히 운이 없어서 못 갔다고 호소도 하고 싶다. 그러나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운도 실력이라고 생각하니까 가슴 속으로만 간직하고 있다. 이제 한국 무대로 옮겼으니 여기서 잘 해서 마음껏 펼쳐보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고 있다.
-아직도 미련은 남을텐데.
▲물론 많다. 잠시라도 메이저리그 맛을 봤고 그 분위기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특히 트리플A에서 손이 부러지기 직전에 감독님이 한 번 더 던지면 메이저리그로 간다고 했었다. 당시 리반 에르난데스와 토니 아마스가 몸이 안 좋았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손이 부러지고 말았다. 내 대신 더블A의 션 힐이라는 선수가 올라갔다.
그리고 작년에 한국에 와서 뛰면서 느낌 점도 많다. 한국 야구의 분석이 미국보다 훨씬 심하다. 미국에서도 내가 나의 투구폼이라든지 타자들에 대해 조금 더 연구를 했더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참 미련이 남는 부분은 많지만 이젠 다 지난 일이다.
-분위기 좀 바꿔보자. 미국에 가면 누구나 해프닝이 많은데 기억에 남는 사건들이 있을텐데.
▲조지아주 오거스타에서 싱글A 팀에 있을 때였다. 거기서 유명한 매스터스 골프 대회를 한다는데 타이거 우즈가 온다고 하더라. 그래서 구경을 가려니까 표가 없었다. 그래서 담을 넘어가려다가 경찰에게 잡힌 적이 있다. 오거스타팀 야구 선수라고 해도 봐주지 않더라. 단장님이 오셔서 겨우 풀려난 적이 있었다.
-무장 강도를 당한 적도 있다는데.
▲좀 무서운 이야기인데 2001년 오거스타 때 아파트에서 집에 강도가 들어온 적이 있다. 하루는 몸이 좀 아파서 혼자 집에 갔다. 룸메이트는 원정 갔고 혼자 컴퓨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보니까 복도에 있는 유리창으로 온 몸에 문신을 한 흑인 둘이 들어오는 거다. 너무 놀라서 곧바로 화장실로 도망을 갔다. 그런데 컴퓨터가 켜 있는 것을 본 강도들은 집을 뒤지다가 내가 화장실에 있는 것을 알고 칼로 문을 따려고 하고, 정말 무서웠다.
다행히 화장실에 전화가 있어서 당시 친하게 지내던 프랭크 프란시스코(현재는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뛰고 있습니다.)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내가 평소에 프랭크에게 너무 장난을 많이 치고 해서 이 친구가 강도가 들어왔다는데도 처음엔 믿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리는거다. 그래서 다시 울면서 전화를 했더니 이상한지 사람들이랑 달려왔고 강도들은 도망을 갔다. 그런데 다음날 그 강도들이 또 와서 경찰이 출동해 잡아간 적이 있다.
-힘든 미국 생활을 했는데 미국 야구에 도전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나이 먹고 노장이 되서 후회할 일은 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난 젊으니까 이건 안 해도 된다.’ 그런 것은 없다. 상황마다 단계마다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한다. 그리고 처음에 갔을 때 난 영어를 못해서 정말 고생했다. 통역에도 한계가 있다. 직접 감독님 코치님과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나라의 문화나 여러 가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팀 동료들과도 잘 지내야 한다. 구단에서 늘 지켜본다. 체력 관리도 아주 중요하다. 장시간 차를 타고 다니고 하는데 젊으니까 문제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잠도 많이 자고 야구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동료들과 잘 지내고 하면 결과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
▲한국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 앞으로 야구 인생이 10년 안팎으로 남았겠지만 정말 열정을 다해서 미국에서 보상받지 못한 것을 이루지 못한 것을 해내고 싶다. 은퇴해도 야구를 떠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난 야구를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지도자도 해보고 싶고, 미국 가는 선수들에게 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도 이야기해주고 싶고 도움을 많이 주고 싶다. 실력은 있는데 적응하지 못해 중도하차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19살 때 일요일 쉬는 날이면 향수병에 걸려 하늘 쳐다보면서 정말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당장은 국내 야구에서 최선을 다해 자리를 잡겠다. 롯데가 늘 하위권이라 많이 속상했는데 팀이 포스트 시즌에 갈 수 있도록 꼭 보탬이 되고 싶다, 그리고 15승쯤 거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