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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畊山人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11월 2일 토요일]
『대동야승』 제11권 [기묘록 속집 (己卯錄 續集)] <화매(禍媒)>
화매(禍媒) : 기묘사화를 벌인 간흉한 자들
<심정전(沈貞傳)>
심정(沈貞)은 신묘생인데 자는 정지(貞之)이다. 생원으로 임술년에 급제하였다. 말과 용모가 교활하고 아첨이 넘치며 자칭 꾀를 잘 내고 임기응변을 잘한다 하니, 사람들이 지혜 주머니로 지목하였다.
정국 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여 화천군(花川君)으로 봉해졌다. 을해년 겨울에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탄핵을 당하여 갈리었다. 무인년 4월에, 안 정민(安貞愍 안당(安瑭))이 이조 판서로서 임금께서 친림한 정사에 입시하였었다.
그때에 형조 판서에 결원이 생긴 것은 여러 번 탄핵을 받아 경질되어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때 어떤 보좌하는 동료가 심정을 추천하였다. 이때 정민공(貞愍公)은 말하기를, “심정은 화천군으로서 족하다.” 하고, 끝내 물망에 넣지 않았다.
5월 15일 친림한 정사에 정민공이 들어가 참여하였는데 특별히 우의정을 제수하였다. 그래서 물러나온 뒤에 심정이 형조 판서가 되었다.
이보다 먼저 정암이 부제학으로서 용인(龍仁)에 있는 선형(先塋)에 분황(焚黃)하러 갔었는데, 이날 크게 지진이 일어나 서울 밖에 가옥이 모두 무너졌다. 정암이 말하기를, “오늘 심정이 반드시 형조에 참여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형조 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즉일로 재변에 관하여 두루 방문하며 물었으므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공론에 진 것을 스스로 분하게 여기어 물러가 강정(江亭)에 들어앉아 있었다. 아들 사손(思遜)이 또 주서(注書)로서 탄핵을 받아 파직되니, 모두 불평을 품고 앙심을 먹었다.
드디어 남곤ㆍ홍경주가 와서 일을 꾸며서 가만히 경빈(敬嬪) 박씨의 친정의 문안하는 종을 통하여 도리에 어긋난 말로 교사하여 궁중에 전파하여 당화(黨禍)를 일으켰으니 자세한 것은 사적 가운데에 기록되어 있다. 그 뒤에 형조 판서가 되었는데, 옥송(獄訟)을 처리할 때 곡직(曲直)을 판별하는 것에 힘쓰지 않고 오직 판결만 힘써서 옥이 빈 것만을 들어 궐에 나아가 주달하려 하였는데, 못 잡게 법으로 금한 소를 잡아 그 고기를 가지고 고하는 자가 있었다. 이때 심정은 이를 보고, “사슴의 고기도 늙은 쇠고기와 똑같으니라.” 하였다. 부하 아전이 그 뜻을 알아채고 사슴의 고기로 보고하였다.
그리고 심정은 임금께 아뢰기를, “민중이 성군의 교화를 입어 거의 형벌을 가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은 명하여 그에게 술을 내렸다. 그 임금을 속이는 것이 흔히 이와 같았다.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자 김극복ㆍ이항과 서로 결탁하여 지반을 굳혔다. 경인년에 관작을 삭탈당하고 강서(江西)로 귀양갔다가 조금 뒤에 죽음을 당했다. 아들 사손(思遜)과 사순(思順)은 함께 정축년 문과에 급제했는데, 사손은 만포 첨사(滿浦僉使)로 있다가 정해년에 야인에게 죽었고, 사순은 승지로 있다가 신묘년에 관직이 파면되었다.
그때 마침 비방하는 글을 종루(鐘樓)에 붙인 일이 있었는데, 비방하는 글에 채무택(蔡無擇)ㆍ허항(許沆)의 이름자가 있었다. 중종의 어휘(御諱) 자가 항(沆) 자이므로 항(抗) 자, 역(斁) 자로 되었다. 글에 무군(無君)이란 말이 있고 스스로 주해(注解) 하기를 모두의 마음[皆之心]이라 하였다. 의논을 주장하는 자가 사순의 한 짓이라고 지목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은 명령하여 본가의 서적을 수색하여 필적을 감정하라고 하므로 한 책을 찾아보니, 그 책 표면에, 〈남산에 올라 똥을 눈다[登南山放糞]〉는 시가 있고, 그 시에 이르기를, ‘한 소리 뇌우가 천지를 흔드니 / 一聲雷雨掀天地 향기는 장안 백만 집에 가득하도다 / 香滿長安百萬家
하였다.
중종이 보고 미워하여 여러 번 형벌과 심문을 가하고 두어 달을 가두어 두니 그로 인하여 옥중에서 죽었다. 심정이 통정한 경빈 박씨는 쥐를 그슬려 저주한 변을 만나서 복성군(福城君)과 함께 고향으로 쫓겨나가 있다가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고 죽었으며 당성 위(唐城尉) 홍려(洪礪)도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가정(嘉靖) 정해년(1527) 2월 26일에 동궁(東宮)에서 해방(亥方)이 되는 땅에 그슬린 쥐 한 마리를 달아매고 물통을 만든 나무조각에 비방하는 글을 써서 함께 걸었다. 이때 인종이 동궁으로 있었는데 인종이 해년(亥年)생이고 2월 26일은 탄신일이다. 해(亥)는 돼지에 속하는데 쥐가 돼지 같기 때문이다. 그때 의논이 동궁을 저주한 것이라 하였다.
궁중에서 박빈의 한 짓이라 지목되어 그 시녀와 당성 위의 노복들이 곤장에 많이 죽었고 또한 거짓 자백한 자도 있기 때문에 죄를 입는 데 이르렀다.
<남곤전(南袞傳)>
척언(摭言) : 남곤(南袞)이 판서 홍경주(洪景舟)와 함께 대궐 북쪽 신무문(神武門)을 경유하여 밀계(密啓)하였는데,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밤중에 사람을 명하여 선전관을 보내어 금위군(禁衛軍)을 거느리고 부제학 김정(金淨)ㆍ대사헌 조광조(趙光祖) 등 일곱 사람을 대궐 뜰에 잡아왔다가 의금부에 하옥시켰다.
또, 기묘의 변은 남지정(南止亭 지정은 남곤의 호)이 실상 그 일을 주관하였는데, 승지와 사관을 피하여 후원 북쪽 신무문을 통하여 몰래 아뢰어 그 옥사를 이루었다.
그 뒤에 소년배가 부랑자를 모아 임금의 곁을 깨끗하게 만들겠다는 명목으로 서로 이어 일어나서 목을 바치어 죽음으로 나가면서도 오히려 그치지 않았다. 지정이 속으로 두려운 생각을 품고 매일 어둔 밤에 남이 알아보지 못하는 옷차림을 하고 몰래 이곳 저곳을 떠돌며 잠을 자고 새벽이 되면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기를 1년이 넘도록 하다가 일이 가라앉자 그치었다.
《관물필기(觀物筆記)》에는, “이임보(李林甫)가 잠자리를 옮긴 것이나 남곤이 집을 옮긴 것이 소인의 하는 일로 고금에 동일한 정상이다.” 하였다.
《보유(補遺)》에 의하면, 남곤은 신묘년(1471)에 출생하였고, 자는 사화(士華)요, 갑인년에 급제하였는데 호는 지정(止亭)이다. 일찍이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므로 사대부간에 이름이 높았다. 서로 교유하는 홍언충(洪彦忠)ㆍ박은(朴誾)ㆍ이행(李荇) 같은 이는 모두 한때의 착한 선비였다. 그러나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여러 사람들이 또한 진심으로 마음을 주지 않고 다만 공명의 그릇으로만 여기었다.
하루는 그 여러 사람들이 그 집 북쪽 천석(泉石)에서 놀았는데, 남곤은 그런 천석이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 여러 사람들이 거기에 있는 바위를 대은(大隱)이라 부르고 냇물을 만리(萬里)라 하였으니, 남곤이 명리의 길에 분망하여 산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을 조롱한 것이다. 사문(斯文) 최보(崔溥)가 일찍이 남곤을 소인의 재질이라고 말하였다.
정덕(正德) 정묘년(1507)에 승지로서 친상을 당하여 집에 있었는데, 문사 문서귀(文瑞龜)로부터 김공저(金公著)ㆍ박경(朴耕)등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유자광(柳子光)이 무오년에 옥사를 얽어서 사류들을 모조리 죽이었으므로 드디어 연산군의 살육을 좋아하는 욕심을 마음대로 하게 하였으니 자광을 없애 조금이라도 지하의 원혼들을 위로하여 줌이 낫겠다.”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곤은 서귀가 하는 이런 말을 듣고 변복하고 대궐 문으로 들어가 변(變)을 고하여 옥사가 이루어지자 가선(嘉善)에 승진되었다. 그러나 대간은 남곤의 고변이 공을 바라는 데서 나왔다고 탄핵하고, 공저 등의 처자를 석방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자광이 오래지 않아 죄를 입으니 사람들이 남곤을 나쁘게 여기었다.
계유년(1513)에 대사헌이 되니 조야에서 모두 분하게 여기었다. 그리고 소릉(昭陵)의 회복을 청하여 윤허를 얻었다. 그러나 그때 의논이 남곤을 가볍게 여기어 대제학을 시키려 하지 않았다.
안 정민(安貞愍)은 말하기를, “옛날로부터 재주와 행실이 겸비한 사람이 많지 못하다. 그러니 남곤의 문사(文詞)만은 버릴 수 없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문형(文衡)을 맡게 하니, 한편에서는 기뻐하고 한편에서는 유감으로 생각하였다.
정축년(1517)에 이조 판서로서 찬성에 승진하고, 기묘년 봄에 예조 판서를 겸하였는데, 이때에 대간이 정국훈적(靖國勳籍)에 허위로 기록된 사람을 삭제하자고 청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명령하여 조정 의논에 부치게 하니 남곤은 그 의논을 피하고자 능헌관(陵獻官)이 되어 그 자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뒤에 정암이 대사헌으로서 곤과 함께 경연에 입시하였는데 정암이 앞에 나와 아뢰기를, “근일에 숭품(崇品)인 육경(六卿)으로서 능헌관(陵獻官)이 된 자가 있으니, 그 사람이 분명히 조정의 큰 의논을 피하려 하여 구한 것입니다. 신하 된 사람으로 그 몸을 아낀다면 나머지는 보잘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묻지 않았으나 남곤이 부끄럽고 황공하여 땀을 흘리고 나왔다.
드디어 신 문경(申文景 신용개(申用漑)의 시호)의 집에 가니, 문경이 병으로 집에 있다가 누워 있는 곳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곤은 말하기를, “근일에 의논이 심히 격(激)하다.” 하였다. 문경이 벌떡 일어나며, “공이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격이란 말은 소인이 군자를 모함하고 나라를 망치는 기틀이 되는 것이다.” 하였다. 곤이 표면에 나타내지 않고 물러갔다. 때의 의논이 바야흐로 올바르니 명리와 지위를 스스로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꺼리고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날로 생기어 가시가 등에 있는 것 같았다. 이 해 겨울에 신 문경이 죽자 다시는 거리낌이 없었다. 11월 15일에, 판의금 겸 병조판서 이장곤(李長坤)ㆍ홍경주(洪景舟)ㆍ김전(金銓)ㆍ고형산(高荊山)을 꾀어 초저녁에 북문으로 들어가서 정원(政院)을 속이고 비밀리 아뢰어 당화를 구성하였으니, 모두 남곤이 주장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밤에 이조 판서를 제수받았다. 그리고 곧 물러나왔다. 그러나 정사 때에 두 번이나 명하여 불렀으나 병을 핑계하여 나오지 않았다.
12월에 또 35명을 적어 올려 모두 속속 귀양보내기를 청하였다. 이때 임금이 정부와 대간에게 두루 묻기를, “이 사람들을 모두 귀양보낼 수는 없다. 차등이 있지 않겠는가.” 하고, 광필을 체임시키고 남곤을 승진시켜 좌의정을 삼고, 김전ㆍ이유청을 삼공에 채우고 이어 초계(抄啓)한 사람의 명부를 가지고 면전에서 경중을 의논하여 3등으로 나누어 벌을 주었다. 그리고 아뢰어 청하는 일은 언관에게 맡기었으니, 그 계교는 비록 교묘하나 어찌 주모자인 간웅의 이름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신사년(1521)에 송사련의 옥사가 이루어지자 곤이 스스로 소장을 짓는데, 일부러 형벌과 정사가 엄하지 못하느니, 조정의 기강이 풀렸느니 하는 두어 조목을 들어서 당인들을 얽어 무함하고 교묘하게 꾸며 주장을 늘어놓고 반역에 동조하였다고 지목하여 되도록 엄한 형벌과 준엄한 법을 적용하도록 대간을 사주하여 글을 올려서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변론하고 구원하지 못하게 하려 하였으니, 그 계책이 지극히 간사하고 교묘하였다.
그 뒤 5~6년 동안에 당시에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서로 이어 사망하고 인심을 속이기 어려워서 공론이 저절로 과격하여지자 항상 부질없이 탄식하며 근심을 품고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친족인 젊은 사람을 향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이 나를 어떻다고 말할까?” 하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소인으로 돌아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드디어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 평생에 쓴 원고를 찾아 내어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오직 〈유자광전(柳子光傳)〉만이 세상에 유행하는데 극히 자세하고 주밀하다고 한다. 소인이라야 능히 소인의 정상을 안다는 것이 참으로 거짓말이 아니다.
융경(隆慶) 무진년(1568)에 많은 사람의 여론으로 인하여 관작을 추탈당하였다. 적손으로는 외손만 있고 서자가 뒤를 이었다.
<홍경주전(洪景舟傳)>
홍경주는 □□년에 출생하였고 자는 제옹(濟翁)인데, 신유년(1501)년에 급제하였다.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여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지고 차서를 건너뛰어 찬성을 제수받았다.
이때 사문(斯文) 정붕(鄭鵬)은 홍문관 교리로서 사은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말하기를, “홍경주가 찬성이 되는 것을 보고 심장에 병이 생겨 물러나와서 벼슬에 뜻이 없다.” 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논박을 당하여 체임되자, 불평이 만만하여 원한을 품고 드디어 남곤ㆍ심정과 더불어 서로 좋아하며 맑은 사류들을 없애기를 꾀하였다.
그 딸 희빈(熙嬪)을 시켜 온 나라 인심이 모두 조씨에게로 돌아갔다는 말로 슬며시 임금의 뜻을 움직이고, 금원(禁苑) 나뭇잎에 거짓 참서(讖書)를 만들어 잎을 따다가 임금께 보여 의혹을 자아내게 하여 박빈(朴嬪)의 집 종이 말한 것과 안팎이 서로 맞게 하니, 임금의 뜻이 의혹이 심하여 일마다 놀라고 두려워하여 드디어 밀서(密書)를 경주에게 내려, 이 글을 가지고 은밀히 세력을 잃고 있는 재상들을 사주하여 함께 당인들을 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남곤ㆍ심정과 꾀를 합하고 계책을 결정하여 정원(政院)이 알지 못하게 여러 사람과 북문으로 들어가 합문(閤門) 밖에 이르렀다. 심정ㆍ성운도 번드는 곳으로부터 와서 모였다. 임금께 나와 참석하기를 청하고, 남곤과 함께 친히 차자를 올렸는데, 자세한 것은 사적(事蹟)과 각 전(傳) 아래에 기록되어 있다.
화가 일어난 뒤 이틀 되는 날 곧 18일 경주가 김전ㆍ남곤과 더불어 부름을 받아 입시하였다. 그때 경주는 말하기를, “요즘 인심이 모두 두려워하여 일의 단서를 알지 못합니다.” 하고, 이어 임금 앞에서 스스로 공치사하기를, “신이 하루 전에 김전의 집에 가서 이야기가 사림(士林)의 일에 미치니, 김전은, ‘나이 젊은 무리들이 대신의 반열에 뽑혀 있으면서 늙고 오래된 신하들이 어쩌다 작은 허물이 있으면, 입이 닳도록 배척하여 조정 정사가 비뚤어지고 인심이 불안하니, 내가 아침에 이 뜻을 아뢰고 저녁에 죄를 당하더라도 마음에는 편안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전하의 뜻을 알기 때문에 다 말하였습니다.
또 남곤을 보고 일을 말하니, 곤은, ‘어린아이들이 상감의 융숭한 대우를 믿고 시국의 정치를 극력 의논하여 늙고 오래된 사람들을 전혀 용서하지 않아 조정 정사로 하여금 날마다 틀려지게 하니, 뒷세상에 비록 소인으로서 군자를 죽였다는 이름은 면치 못하더라도 내가 이 뜻을 아뢰고자 하여 이미 조복(朝服)을 갖추었다가 그만두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전하의 뜻을 알기 때문에 감히 숨김없이 말하였습니다.
또 남곤은, ‘이 일을 아뢰자면, 마땅히 먼저 정광필에게 물어서 처리하여야 한다.’ 하고, 그날 곤이 광필의 집에 가서 사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더니, 광필은 굳이 말리며, ‘사림의 화를 일으키려고 하는가. 나는 어리석고 미련하여 계교가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하기에, 곤은 다시 말하지 않고 물러왔습니다. 신이 그 이튿날 또 남곤을 보고, ‘수상이 아무리 말리더라도 우리들은 꼭 하여야 하겠다.’ 하고, 15일 초저녁에 신 등이 북문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이날 또 말하기를, “무사(武士) 정귀아(鄭歸雅)ㆍ박배근(朴培根) 등이 일찍이 당을 모아 사류들을 쳐 없애려 하였으므로 오늘 회의하여 상소하는 것이니, 광조 등을 중한 형률(刑律)에 처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대궐 뜰로 잡아오게 하여 사방 문을 닫고 친히 국문할 것을 명하고 전교하기를, “전날에 홍경주가 이 무리들이 장차 난을 꾸미려 한다고 말하므로 내가 생각하기를, ‘자고로 사림이 화를 입으면 종사(宗社)가 편안히 보전되는 때가 없었으니, 먼저 스스로 죄를 주어서 가만히 인심을 가라앉히는 수밖에 없다.’ 하였다. 그래서 이제 그렇게 하면 이는 광조 등의 복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은 위협하는 말에 유혹되어 급히 저질렀던 것이다.
화를 일으키던 밤에, 먼저 남소(南所)의 군사들을 대궐 뜰에 배열시켰으니, 세희(世熹)와 자임(自任)이 무력과 용맹이 있다는 말에 겁이 나서 그러한 것이었다. 이렇게 간흉한 자들이 남을 두렵게 하여 의혹을 품게 하는 것이 이르지 못하는 데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꾀는 이미 성공했으나 두어 해가 되지 못하여 몸이 죽었으니 과연 무슨 소용이 있는가.
슬프다. 비밀리 유시(諭示)했다는 계교가 옳다면 어찌 감히 무사(武士)의 화를 핑계삼아 먼저 이 제안자를 죄줄 수 있는가. 먼저 무사를 제거하지 못하고 그 제안자에게 형이 미친다는 것은 만번 생각하여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비밀로 한 유시가 누설될까 의심하고 현인들로부터 배척하는 의논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말을 꾸며서 전교를 내린 것이니, 간악한 무리가 임금의 뜻을 엿보고 헤아리는 것이 반드시 한량이 없는 것이다. 일이 심히 간교하고 은밀하여 안팎이 들썩거리고 두려워하니, 탄식할 일이다.
<이항전(李沆傳)
이항은 □□년에 출생하였고 자는 사호(士浩)인데, 젊어서 재명(才名)이 있었고, 임술년(1502)에 급제하여 청환과 요직을 고루 지냈다. 직위가 높아지자 속으로 아첨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품어 방자하게 기염을 부렸다. 기묘년(1519)에 경상 좌도 관찰사를 제수받았는데, 11월에 우도 관찰사 문근(文瑾)과 상주(尙州)에서 모여 잔치하며 취했다가, 사림의 화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계교를 얻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다는 명령을 받고 즉일로 길을 떠났는데, 함양(咸陽) 군수 문계창(文繼昌)이 쫓아 함창(咸昌)현에 이르러 시를 지어 전송하기를,
명공의 이번 감이여, 신선에 오름 같구나 / 明公此去似登仙
서린 뿌리와 얽힌 마디를 날카로운 칼로 끊어 내소 / 盤錯須憑利器剸
사냥한 뒤에 세 구멍을 가진 토끼 어찌 없으리 / 獵後豈無三窟兎
마침내 한 독수리가 푸른 하늘에 오름을 보겠도다 / 會看一 鶚上靑天
하였다.
이항이 기뻐하며 받고 조정에 돌아온 지 수일 만에 다시 논죄하기를 더하여, 여러 현인들을 끌어넣아서 붕당을 짓는다고 지목하여 귀양보내어 추방하고, 연루자를 샅샅이 찾아내어서 눈 한 번 흘겨본 원망도 반드시 보복했다. 병조 판서가 되자, 모든 변방 장수를 제수하는 것이 한결같이 뇌물의 많고 적은 데 따르니,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항이 병판이 된 뒤로부터 첨사와 만호의 값이 높아졌다.” 하였다.
뒤에 박운(朴雲)의 보화와 재물을 받고, 운을 응사(鷹師)로 임명했는데, 그것이 탄로나 대질 신문을 받아 죽음에서 감해져 귀양갔다가 신묘년(1531)에 심정과 동시에 사사되었다. 박운은 곧 원종(元宗)의 아들이다.
<이빈전(李蘋傳)>
이빈은 □□년에 출생하였고 자는 국형(國馨)이요, 임술년(1502)에 급제하였는데, 심사순(沈思順)의 처부(妻父)이다. 천성이 편벽하고 거칠며 괴팍하고 거만하였다. 안 정민(安貞愍)이 일찍이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 나라 서울에 가는데, 이빈이 검찰관(檢察官)이 되어 만 리를 동행하면서도 하루도 함께 앉아 이야기하고 웃은 일이 없었다 하니, 교만하고 망령되고 공손하지 못한 부류였다.
화가 일어나니, 장단(長湍)부사로서 대사간이 되어 항상 남곤과 심정의 매와 개 노릇을 하여 오로지 자기와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임오년(1522)에 이조 참판으로서 어깨 부들기에 등창이 나서 온 등어리가 썩어 문드러져 석 달 만에 죽었다. 자식도 없다.
<성운전(成雲傳) .
성운(成雲)은 □□년에 출생하였고 자는 □□인데, 갑자년(1504)에 급제하였다. 화가 일어나자 참지(參知)로서 밀지(密旨)로 약속을 하고 기한 전에 들어가 번들었다. 처음에 가승지(假承旨)로 임금의 전교를 출납하여 승전(承傳)을 제수받았는데 자세한 것은 이장곤(李長坤) 등의 전(傳)에 기록되어 있다.
뒤에 병조 판서로서 심언광(沈彦光)에게 쫓겨나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하루는 대낮에 가위에 눌려 정신을 잃었는데, 기괴한 형체 없는 귀신과 머리ㆍ얼굴ㆍ사지가 없는 사람들이 좌우에 늘어서 있었다. 놀라고 혼미하여 본성을 잃어서 겁에 질려 중얼대며 눈을 감고 보지 못한 지 심여 일 만에 죽었다.
<이신전(李信傳) .
당적(黨籍)에 이르기를, “이신(李信)은 본래 중인데, 대사성 김식(金湜)이 이학(理學)으로 생도들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곧 머리를 기르고 검을 옷을 벗고 와서, 붙좇아 배우고 물으며 김식의 집 담가에 토실(土室)을 쌓고 몸을 굽혀 부지런히 학문하니 식이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 친자제 대하듯 힘껏 교훈하였다.
김식이 패한 뒤에 식이 제자들을 모아서 대신을 해치기를 꾀한다고 무고하여 옥사가 성립되자, 상을 받았다. 충청도로 돌아가 강도로 연루되어 곤장을 맞아 죽었다. 충청도를 낙안(樂安)으로 고쳤다.
보유: 이신은 낙안(樂安)의 관노(官奴)이니,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가, 퇴속(退俗)한 뒤에 김식의 문하에 수업하였다. 식이 귀양가자, 그는 마침 외지(外地)에 있다가 귀양간 곳까지 쫓아가서 식을 따라 몰래 영산(靈山) 이중(李中)의 집에 이르렀다. 이때 이신을 먼저 내보내어 무주(茂朱)에서 모이기로 약속하였는데, 그는 속으로 도적의 마음을 품고 얽어 씌워 무고하여 옥사를 만들어 천인을 면하고 자기 고향에 돌아와 살았다. 뒤에 말 도둑의 두목으로 잡혀 갇히니, 군수 김문서(金文瑞)가 때려죽였다.
<정상전(鄭瑺傳)
정상(鄭瑺)은 금루학(禁漏學) 인년(麟年)의 아들이요, 관상감(觀象監) 지(漬)의 손자이니, 곧 사족(士族)이요, 어머니는 판관 노공유(盧公裕)의 첩의 딸이다. 정상이 안팎의 서얼로서 상으로 받은 것이 풍족하자, 옷차림과 기구 등속에 외람된 물건을 많이 사용했다.
기유년(1549)에 사헌부에서, 무늬 있는 비단에 자주색 분홍색이 서로 비치는 상복(常服)을 입은 자를 적발하여 금부에 가두고, 죄를 다스리려 하였다. 그래서 정상도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 떠들어 대기를, “밀계할 일이 있다.” 하였다. 그래서 옥관이 상부에 보고하므로, 정원에서 그를 불러 물었다. 이에 정상은 말하기를, “대간이 신사년(1521)에 죄를 입은 사람들의 자제들만의 말을 듣고, 나를 죄 없이 얽어 넣었다.” 하였다.
그러나 대사헌 구수담(具壽聃) 등은 정상의 혐의를 더 들추어 임금께 아뢰기를, “정상이 분수에 맞지 않게 의복을 입어 비난의 대상이 된 지가 이미 오래고, 또 지금 죄수가 되어 있으면서도 고변한다고 핑계삼아 대간을 모함하니, 청컨대 조옥(詔獄)에서 끝까지 고문하소서.” 하였다. 그리고 의금부 동지사 조사수(趙士秀)도 아뢰기를, “정상의 죄는 공론에서 나온 것인데, 도리어 보복이라고 둘러대며 대간을 모함하니, 이제 금부로 옮겨 마땅히 통렬하게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신사년에 죄를 입은 시산 부정(詩山副正) 정숙(正叔)과 동서간이므로 이 자를 다스리는 것을 피하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으나, 피하지 말고, 대간을 놀린 죄만으로 국문하여, 전 가족을 부령(富寧)으로 옮기게 하니, 거기에서 30년 만에 죽었다. 딸 하나가 평원 수(平原守)에게 출가하였는데 아들 덕양 령(德陽令)을 낳았다.
[주-D001] 분황(焚黃) : 고관(高官)이 되면 그의 부ㆍ조ㆍ증조까지 관직을 추후로 내리게 되는데 그것을 증직이라 한다. 이 증직하는 직첩(職牒 사령장)은 반드시 누런 종이에 썼으므로, 그 누런 직첩을 그 본인의 무덤 앞에서 불로 태워서 이런 관직이 내렸음을 알린다. 그것을 분황이라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식 (역) |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