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한시, 루카가 운다. 방을 들여다보니 엄마 아빠가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애쓴다. 할머니 집에 와서 생글거리며 이제 사흘째인데... 열이 39도를 넘는다. 해열제를 먹이고, 옷을 홀딱 벗기고, 찬물로 몸을 씻고... 열을 내리기 위해 애쓴다. 세시나 되어서 아이가 다시 잠이 들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나도 잠 못 자고 왔다 갔다 하며 잠을 놓쳤다. 아침나절에는 열이 내려서 다시 생글거리며 논다. 루카는 만 세 살 사내아이다. 하나뿐인 내 손자. 영국에서 엄마 아빠와 함께 반년 동안 한국에서 지내러 왔다. 엄마의 연구학기에 따라온 거다.
한 밤 중, 또 루카가 운다. 열이 다시 39.5도로 올랐다. 식구들이 다 같이 왔다 갔다 잠을 놓쳤다. 아침이 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고, 노래도 하고, CD 플레이어로 노래도 듣고 잘 논다. 애교 떨고 말도 하고... 오렌지 쥬스와 야쿠르트만 먹으면서도 힘 있게 논다. 밤이 되니 또 열이 오른다. 기침을 하는 것도 아니고, 설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낮에는 열이 내려 잘 노니, 피곤해서 오는 것이겠지 생각했던 것이 잘 못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어 열 내린 루카를 데리고 할머니 아빠 엄마 모두 나서서 소아과에 갔다.
나이가 좀 드신 여자의사 선생님이 친절하게 맞아 주고, 진찰해 보시더니 별일 없을 거라고 하셨다. 선생님께 다녀온 것이 효험이 있는지 열이 싹 내리고, 아이도 기운을 차린 듯했다. 하루 밤. 별일 없이 잘 잤다. 덕분에 식구 모두 며칠 만에 긴 잠을 잤다. 나도 오랜만에 안심하고 일하러 나왔다.
“엄마, 루카 얼굴에 빨갛게 뭐가 돋았는데, 이게 뭐지요?”
원예치료 프로그램을 하러가려고 준비 중인데 딸이 전화를 했다. 가슴이 덜컹한다. 다행히 열은 없단다. 저녁에 들어가 보니 얼굴과 목에 빨간 발진이 가득 돋았다. 알레르기 아니면 열꽃일 텐데 열이 없다니 무엇 잘 못 먹은 것은 없는지 물었다. 먹은 것은 별로 없다하고, 또 밤이 되었으니 속수무책. 발진이 가득 돋은 얼굴을 들여다보아야 소용이 없고....
다음날 아침 의사에게 가자고 하니 루카가 신나게 나선다. 지난번 의사선생님의 인상이 좋았나 보다. 선생님이 배를 보자고 하니 옷도 제 손으로 훌떡 올리고 싱글싱글 웃는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사선생님. 발끝까지 발진이 나고 빠져나갈 것이라고 하신다. 그 말씀대로 다음날부터 발진이 사라지고 밤에 잠도 잘 자기 시작했다.
한국 도착 열흘 만에 아침에 빵을 달라더니 신나게 먹었다. 식욕이 돌아왔다. 주는 대로 먹고 또 달라고 해서 먹고, 시차적응도 된 것 같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영국에서는 집에 없던 TV가 아이의 눈길을 끌었다. 아빠가 찾은 BBC 채널에서 하는 어린이 프로그램에 홀딱 빠졌다. 리모컨을 들고 앉아 TV를 본다. 손에서 리모컨을 놓지 않는다. 옆에는 한국동요 CD를 틀고, 눈으로는 TV의 BBC 어린이 채널을 본다. 보지 못하게 해도 소용이 없다. 울고 떼쓴다. 어른들끼리 의논을 해서 TV를 낮에는 잠재우기로 했다. ‘우리 TV는 저녁에만 일 한다’고 하고 낮에는 연결이 안되도록 조처했다. 기계를 잘 만지기는 하지만 아직 어리니 그것까지는 해결을 못한다. 덕분에 식구들이 시간 날 때 보던 낮 TV를 끊었다. 저녁때가 되면 루카가 “이제 TV가 일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묻는다. 어둑해져 TV를 켜주면 너무 행복해 엉덩춤을 춘다.
다른 문화 속으로 들어온 루카. 엄마 나라 한국에 있는 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