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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졸업생들
금계중학교 5회 졸업생들의 입학년도는 1955년 4월 초순이었다. 80여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입학하였었다.
우리가 입학할 당시 학교 건물은 모두 가건물이었다. 초창기부터 건물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어나갔는데, 모두 네 채였다. 운동장에서 바라보는 좌측 두 채의 교실은 함석지붕이었고 우측 두 채의 교실은 볏짚 이엉지붕이었다. 그리고 좌측에서 우측으로 가면서 교실 규모가 조금씩 컸다. 모든 교실바닥은 맨 흙바닥이었다. 계삼정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선생님들과 1.2.3.4회 선배들의 노작(勞作)의 결실로 이룬 이 교사(校舍)에서 우리는 그런대로 안정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입학했을 때 교실 배치는 서쪽 끝의 제일 작은 교실은 창고 겸 탁구실로 사용하였고, 서쪽의 두 번째 교실은 2학년, 그 다음이 3학년 그리고 동쪽 끝 제일 큰 교실이 1학년 교실이었다. 교무실은 2학년 교실의 동쪽 일부와 3학년 교실의 서쪽 일부를 막아서 사용했었다. 우리가 입학하고 나서 1학년 교실 바로 옆에 정규교실 1채를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공되었다.
풍기로 피난 왔던 사람들은 휴전협정으로 전쟁(6.25)이 끝나자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고향이 휴전선 이북이라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 중에는 이북과 가까운 서울이나 수도권의 연고지를 찾아 떠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정감록을 믿고 풍기를 찾아와서 피난했던 사람들과 북으로 돌아갈 가망이 없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아예 풍기에 생활의 둥지를 튼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이북에서 풍기로 와서 피난했던 분들 가운데 수공업으로 인조견 공장을 운영하는 분들이 많았다. 당시에 인조견 공장 운영의 수입이 좋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 풍기읍 내에는 우후죽순처럼 가내 수공업 직물공장이 생겨났다. 풍기 읍내에는 인조견 짜는 소리가 골목골목 가득 흘러나왔었다. 아침저녁으로 인조견공장근무를 교대하는 시간에는 풍기와 봉현의 각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공장에서 퇴근하는 여인들과 출근하는 여인들이 긴 행렬을 지어 오갔다.
인조견 공장의 직공은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당시에는 돈이 귀했다. 그래서 몇 푼 안 되는 돈을 벌기 위해서 풍기를 비롯하여 풍기 주변의 처녀들까지 풍기 가내직물공장으로 물려들었다. 당시 어떤 신문에 돌, 바람, 여자가 많은 제주도에 빗대어 풍기를 바람이 세고 돌이 많고 인조견 직물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많다 하여 내륙의 삼다도라는 기사가 실린 적도 있었다.
그 당시 부모님들 가운데 식견이 트인 분들은 그러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농촌 부모님들은 남존여비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여자아이들보다 남자아이를 공부시키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모들은 딸을 공장에 보내 힘든 노동을 하고 받은 돈으로 아들의 공부를 뒷바라지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각종학교의 학생들의 구성비를 보면 남학생이 절대다수였고 여학생들은 소수였다. 금계중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신입생 80여명 가운데 여학생은 16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적령기에 입학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전쟁 때문에 2.3년씩 늦은 학생들이 다수 있었고, 수년간 집안 농사일을 거들다가 입학한 황영록 이병호 신법순 김중동 이억성 같은 이들은 큰 형벌되는 사람들이었다.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3년 사이에 중도에 퇴학한 학생들도 많았다. 그 때 똑 같은 이유는 아니었겠지만, 이웃 풍기중학교보다 등록금이 저렴했기 때문에 금계중학교를 택한 사람들이 많았다. 등록금이 저렴했음에도 불구하고 퇴학생이 많았던 것은 당시의 우리나라 농촌 사정이 아주 좋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5회 졸업생은 입학했을 때는 80여 명이나 되었는데 졸업생 수는 54명뿐이었고 그중 여학생은 5명만이 졸업하였다.
학생들 가운데는 학교와 거리가 먼 지역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멀리는 주춧골 너머 상리에서 다니던 이억성 이국성 형제, 추운 겨울 아침에 죽령 재에서 내리치는 세찬 아침바람을 안고 등교하던 안정면의 진현식 진동기 신중영 김영일, 순흥 태장에서 산길을 오르내리며 등하교하던 하재웅 하재탁 하재순 3형제, 수철, 창락, 백신, 전구동, 소미 등지에서 그리고 봉현 샘골과 그 너머에서 등교시간에 맞춰 학교에 겨우 닿아 헐레벌떡 교실로 들어서던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서언하다.
그 때는 포장되지 않은 길이라서 걸어 다니기가 불편했다. 특히 풍기에는 돌이 많기로 유명하여 큰 길에서도 땅에 박혀 길바닥 위로 돌출한 돌과 굴러다니는 돌들 때문에 걷기가 불편하였다. 게다가 산촌에 거주하던 학생들의 통학로는 대부분 오솔길이었다. 여름이면 아침이슬이 맺힌 풀이 욱어진 오솔길에서 바짓가랑이와 운동화가 흠뻑 젖기 일쑤였다.
여러 가지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공부에 대한 열정만은 뜨거웠다. 선생님들께서도 열의가 대단하셨고 학생들도 공부에 목말라했다.
1955년 1학년에서 배운 교과목은 요즈음 교과 내용보다 아주 세분되어 있었다. 국어 말본 작문 공민 지리 동양사 기하 대수 물상 생물(식물) 영어 영어문법 영어작문 등등 이렇게 세분되었던 것이 2학년에 올라오면서 통합교과서로 바뀌었었다. 공민 지리 동양사는 사회로, 기하 대수는 수학으로 물상 생물은 과학으로 영어 문법 작문은 단권의 영어교과서로 통합하였다. 교과 수가 많으니까 한 선생님이 여러 과목을 겹쳐 가르치셨다.
인자하신 계삼정 교장선생님! 미술을 직접 가르치셨다. 이른 아침부터 먼 거리를 통학하던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름에는 점심시간 바로 다음 시간이 되면 졸음에 겨워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런 때는 손뼉을 치시면서 “울밑에 선 봉선화”를 선창하셨다. 그리고는 학급 전원에게 따라 부르게 하여 졸음을 쫓아주고 맑은 정신으로 수업을 이어주셨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우리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니 무엇보다도 근면 성실하여야 하며 자립할 수 있는 힘을 키우고 협동정신도 길러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교장 선생님의 아침 조회시간은 좀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였지만 늘 학생들의 바른 생활 태도를 강조하시면서 특유의 평안도 사투리인 “알갔디요 잉~!”하시면서 말씀을 맺던 일이 지금도 정감 있게 메아리쳐 다가온다. 일생을 금계중학교와 함께 하신 계삼정 교장선생님! 우리들의 금계중학교 시절은 언제나 계삼정 교장선생님과 함께 오버랩 된다.
긴 수염에 흰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셨던 송지향 선생님께서는 중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3년 동안 우리들에게 국어를 가르치셨다. 송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절제와 단정하게 살아야 하는 것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셨던 것 같다. 선생님의 정갈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보이는 듯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1학년 때 학교신문을 만들었는데 선생님께서 힘들게 철필로 원고지를 쓰셔서 등사를 하여 만들었다. 그 학교신문에 내가 쓴 “파리”라는 제목의 시 한편을 선생님께서 가필하셔서 실어주셨다. 그런데 그 시의 제목이 그만 내 별명이 되었다. 70이 훌쩍 넘은 지금도 동창들이 만나면 그 별명을 기억해내곤 한다. 우리의 나이 50대 중반 무렵 선생님을 찾아뵙던 어느 날 한 짓궂은 동창생이 내 별명(파리)을 불렀다. 선생님께서 그것을 기억해 내시고 선생님 특유의 너털웃음으로 껄껄하고 웃으시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우리 선배님들이나 후배님들도 송지향 선생님에 대한 특별한 기억들이 있겠지만, 우리들은 중학교 졸업 후에도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 체취를 느끼면서 무언의 가르침을 받아왔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무엇보다도 두려움과 함께 가장 기대와 설렘을 갖게 하였던 과목은 영어였다. 그 영어교과를 최종로 선생님께서 중학교 3년 내도록 담당하셨다. 1학년 입학 당시 담임선생님은 한진원 선생님이셨는데 1학기 중간에 다른 학교로 가시면서 최종로 선생님께서 담임을 맡았고 2학년까지 담임선생님을 하셨다. 내가 외국에 나갈 때 생존 영어라도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최 선생님의 덕택이다. 선생님께서는 정말로 성심성의껏 우리들에게 영어의 기초를 알차게 다져주셨고 좀 뒤지는 학생들을 위해서 특별지도까지 하시면서도 아주 자상하게 가르쳐주시던 그 열정적인 모습이 지금도 눈에 보이는 듯하다.
우리의 3학년 담임선생님은 김동현 선생님이셨다. 김동현 선생님께서는 1학년 중간에 오셨는데 수학과 과학을 가르치셨다. 선생님은 키가 크고 높은 도수의 안경을 쓰셨는데 카리스마가 느껴지기도 하였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다른 데 정신을 팔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지도하셨으며 책임의식을 늘 강조하셨던 것이 기억에 새롭다. 그리고 선생님의 열정은 참으로 대단하셨다. 대부분 가난한 학생들이라 교과서도 헌책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참고서는 살 엄두도 못 낼 형편들이었다. 그래서 참고서를 대신하여 선생님께서 밤샘을 하시면서 프린트를 하여 진학지도자료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부하여 공부를 시켰다. 선배들의 뒤를 이어 우리 5회 졸업생들도 이런 선생님의 열정에 힘입어 진학성적이 괜찮았다.
안동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면 초등학교 선생님 자리가 보장되었다. 그래서 경북 북부 일대에서 안동사범학교가 경쟁이 가장 치열했는데 이강일 하재웅 권화섭 등 3명이 당당히 합격하였고 전국의 명문고인 경복고등학교에 조운식이 합격했으며 전국 최고의 입학경쟁률을 보였던 체신고등학교에 진영일이 합격하였던 것이다.
김동현 선생님은 음악과 가정을 가르치신 정길현 선생님과 결혼하셨는데 우리가 졸업하면서 정 선생님과 함께 학교를 그만 두시고 서울로 올라가셔서 사업을 하셨다. 서울에 있던 우리 동기생들이 가끔 찾아뵈면 무척 반갑게 맞아 주시곤 하였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운명하셨을 때 우리 동기생들 몇 명이 문상였고, 정길현 선생님과 옛날을 회상하였다.
이종우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의 한문을 지도해주셨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두루마기를 입고 출근하시던 선생님들이 많았다. 계삼정 교장선생님과 김정철 선생님은 두루마기와 양복을 번갈아 입고 출근하셨는데, 이종우 선생님께서는 가끔 양복을 입고 출근하시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송지향 선생님과 함께 언제나 두루마기 차림이셨다.
김정철 선생님께서는 김동현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6,25 동란 중에 평양에서 월남하셨고 풍기에 정착하셔서 금계중학교에 근무하셨다. 2학년 때 수학과 사회 교과를 담당하셨다. 꼼꼼하고 자상하셨으며 늘 단정한 모습으로 학생들이 가져할 몸가짐을 일깨워 주셨다.
한진원 선생님, 김상규선생님, 허윤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1학년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만 두시거나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고, 부부였던 신영길, 천정록 선생님께서도 1학년 중간에 오셨다가 1학년이 끝날 무렵 그만두셨던 것 같다. 농업을 가르치시던 유원희 선생님도 1학년 중간에 오셨다가 2학년 때 그만 두셨는데 우리가 고등학생 때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만나 뵌 적이 있었다. 3학년 때 조영주 선생님께서 군복무를 마치고 학교에 돌아오셔서 우리들의 체육교과를 맡아 주셨고, 곤봉 체조를 지도하셨는데, 풍기초등학교 체육대회 때 곤봉체조로 찬조 출연을 했었다. 그 때는 체육시간에 구기(球技)와 기계체조에 대한 공부도 하였지만 도수 체조와 제식 훈련이 많았다. 제식 훈련은 건강증진과 함께 순발력, 절도 있는 태도와 단체 행동 질서 교육이 강조되었던 시대적 배경과도 관계가 있었던 것 같았다.
한진원 선생님, 신영철 선생님, 김동현 선생님 김정철 선생님 이 네 분은 평양에 있던 중학교에서 계삼정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제자들이라 한다..
물상을 가르치시다가 그만 두신 김상규 선생님께서는 장신에 거구였다. 그리고 장신이신 김동현 선생님이 부임해오시고 한참 후에 김정철 선생님께서 새로 부임하셨다. 그때 우리는 거구에 장신이던 김상규 선생님을 김A, 그리고 역시 장신이며 날씬하였던 김동현 선생님을 김B, 그리고 나중에 부임해 오신 언제나 정갈한 몸가짐의 김정철 선생님을 김C로 구별하여 칭하였었다. 이 세분 선생님께서는 특별히 학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별명이 생겨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의 금계중학교 선생님들은 우리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서 사회생활을 하다가 고향을 찾아가면 꼭 찾아 뵈어야한다는 강박감(?)까지 가지게 하셨던 선생님들이시다.
장난도 심하였다. 남학생들은 펄쩍 뛰어서 상대방을 발로 차서 땅에 넘어뜨리는 “발치기”라는 놀이가 유행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좀 과격한 장난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교실 밖으로 나가서 꾼들끼리 서로 상대방을 발로 가격하면서 몸을 날리면 가격을 당한 사람은 이미 방어태세를 갖추고 용케도 공격을 피하곤 하였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일격을 당하여 곤두박질치기를 당하여 한판의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패자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발치기의 기량을 쌓아갔다. 발치기 명수들로는 김용순 정중모 이국성 황영진 백문기 이정식 권영근 등등의 모습이 떠오른다.
특별활동으로는 전교생이 모두 참가하는 마라톤 축구 배구 농구 등 교내구기대회, 웅변대회, 백일장, 미술실기 대회 등이 있었다. 이를 통하여 특별한 기량을 가진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를 개발해 나갔다. 이강일은 웅변에서 특별한 재주가 있어 각종대외웅변대회를 석권하였다. 또 당수(태권도?)를 배워 학교에서 그 기량을 과시하던 한광운 장사무가 부럽게 보였던 것도 기억에 떠오른다.
졸업식이 가까워오자 우리는 졸업으로 인하여 서로 해어지는 것이 섭섭하고 아쉬워, 이름과 주소를 적고 사인을 한 종이를 나누어 가졌다. 우리가 졸업하던 1958년 전후의 우리 농촌의 경제상황은 자주 어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5회 졸업생들 가운데에는 가정 형편상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졸업생의 반 남짓만이 진학하고 나머지는 바로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진학을 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는 공부를 특출하게 잘하여 다른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계덕용과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들이 진학의 꿈을 접어야 했던 것은 6.25전쟁의 후유증에다가 가난을 극복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던 시대를 만났던 탓이었으리라.
5회 졸업생들 가운데는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 교사로 근무하였던 사람들이 5명이나 된다. 그들은 이국성 진영일 조운식 권화섭 김광수 등이다. 이들은 짧은 기간이나마 모교에서 봉직했고 그 중 이국성은 다년간 모교에서 근무하다가 공립학교로 전출하였다.
이제 우리 5회 졸업생도 모교를 졸업한 지 반 세기를 훌쩍 넘어 모두 70을 훌쩍 넘어섰다. 나이 먹으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중학교 시절의 추억들이 가물거리면서 살아났다가 지워졌다가 한다. 졸업생 명부를 보면서 졸업을 한 이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친구들이 상당한 숫자라는 데에 스스로 놀랐다. 더구나 그 중 어떤 이들은 그 얼굴모습조차 희미하다. 그들을 다시 만나보고 싶다. 모두가 배고프고 춥고 고단하게 살면서 학교에 다녔지만 열심히 꿈을 가꾸며 생활하였던 금계중학교 시절이 그리워진다.
계삼정 교장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잃고 4학년 때 6.25를 만나면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였는데, 다시 초등학교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해주셨고, 금계중학교까지 졸업시켜 주셨다. 그 후에도 계속하여 교장 선생님의 은혜를 입었으면서 단 한번도 그 은혜를 보답해 드리지 못하였다. 내가 교장 선생님을 모시고 금계중학교에 근무하였을 때도 오히려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린 일이 더 많았었다는 때늦은 자책감에 사로 잡히곤 한다. 계삼정 교장선생님의 인자하셨던 모습과 학교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시던 모습이 눈에 서언하다.
나의 금계중학교 학창시절, 조회 때 도열해 있는 학생들 앞에 서계시던 계삼정 교장선생님과 여러 선생님들 그리고 당시의 금계중학교의 모습이 겹쳐 떠오른다.
<◀이 글을 쓰면서 실명을 거명하여 본인들에게 누를 끼친 것은 아닌지, 혹시 사실과 다른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두려운 마음으로 양해를 구합니다.▶>
[졸업생 명단] 황병헌 이정일 진영일 최근식 최윤식 조운식 허만우 김광수 이정식 신중영 최종렬 진동기 하재순 박흥선 진현식 천무영 이국성 백문기 김무웅 정중모
김용순 김두홍 김중복 이강일 박경준 이융민 안영우 우남규 송한호 권영근 황영진 김형일 한광운 하재웅 김태홍 백낙균 계덕룡 권화섭 하재탁 강윤환 강부원 장사무 이억성 김중동 이종갑 김동섭 신법순 박도순 강선창 최영주 김해규 홍혜주 권영자 신영자
첫댓글 그래셨네요 선배님?
글을 읽는 동안 금계의 역사를 숨죽여 더듬어 보았습니다
그 역경의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랑스런 배움터,금계 중학교가 있지않을까고 감히 생각해 봅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저두 동감이요..
감회가 새록새록...^^*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도 있네요(계덕용)
아 선배님 가슴벅찬 감동으로 이글을 읽습니다. 거론 하신 선배님들의 존함을 다시 되새깁니다. 5대 동문회장을 역임하신 이국성 선배님, 초창기 동문회를 구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신 계덕용선배님, 하재웅 선배님은 최근에 재구동문회에도 참석하시는 모습을 사진으로 뵈었습니다. 이강일 선배님은 풍기초등학교에 근무하시던 지금풍기계시는 그 선생님이 맞는지요? 아쉽습니다.. 선배님의 이글이 개교 60년사에 수록되었어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올려주시니 감사하구요.. 모교 역사의 소중한 자료로서 보관하겠습니다...
정성과 추억이 듬뿍담긴 고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故송지향 할아버님의 향이 그립습니다.
모교에 재직한 관계로 선생님들의 존함과 인적사항은 도움이 되었겟지만 김광수 동문님의 탁월한 기억력에 감탄하며~가물거라는 추억을 되 살려줘서 고맙고~수고 하셨소~내가 다닐때는 교사가 새채인지 엿고조영주 선생님은 나의 재학시 재직하셧는데1회인 이모선배가 슈퍼에서 소주한병을 훔쳣는지 어쩐자는 아작도 모르는데 그때문에 조선생께 둘이 다 따귀를 얻어맞고억울해서 만나면 따지려 했더니벌써 고인 되셨기에 용서해 주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