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 (1918년 1월 26일 ~ 1989년 12월 25일)

루마니아 왕국 남부 스코르니체슈티에서 부농의 아들(빈민농가 출신이라는 견해도 있음)로 태어난 차우셰스쿠는
11세에 부쿠레슈티로 이주하여 구두 수선공의 견습생이 되었다.
1932년 당시 불법 정당이었던 루마니아 공산당에 가입하여 지역 당서기를 역임하는 활약하였으며 위험한 공산주의 선동가로
낙인찍혔다.
이로 인해 그는 1936년부터 1938년까지 감옥 생활을 해야만 했다.
출소 이후 그는 1939년에 섬유 공장 노동자 출신인 엘레나 페트레스쿠를 만났으며 1946년에 결혼한다.
1940년 다시 투옥된 차우셰스쿠는 1943년 트르구지우(Târgu Jiu) 강제수용소로 옮겨 수감되었고 철도원 출신 공산주의
운동가인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Gheorghe Gheorghiu-Dej, 1901년-1965년)와 같은 감방을 쓰게 되어 그의 심복이 되었다.
게오르기우데지가 죽은 이후 그는 대통령 신분으로 정권을 차지했으며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루마니아가
소비에트 연방의 영향권에 들어갈 때 그는 1944년부터 1945년까지 공산청년연합 서기관을 지냈다.
1947년 루마니아 공산당이 권력을 차지한 데 이어서 1949년 공산주의 국가인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자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의 스탈린주의 정권하에서 여러 요직을 맡았다.
하지만 차우셰스쿠가 자신의 정적을 제거했다는 사실은 루마니아 정부의 언론 통제로 외부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루마니아 공산당에서 서열 2위에 오르게 된다.
1965년 3월 게오르기우데지의 사망 이후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의 지도자를 승계받았으며 1967년에는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취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가 원수가 된다.
차우셰스쿠는 집권 초기 소련의 공산권 간섭에 당당히 맞서는 독자 노선으로 서방 국가들과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바르샤바 조약기구 활동을 사실상 중단시켰으며(형식적인 참여에 그침)
1968년에는 바르샤바 조약국들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도 참여하지 않고 공개 비난하였다.
이러한 독자적인 외교 정책은 루마니아가 곧 산유국이며, 소련에 의존하지 않아도 독자적으로 외화 획득이나 에너지 자원
확보의 가능성의 토대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1974년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직분에 대통령직을 추가하여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차우셰스쿠는 외교 정책으로는 중소 분쟁 때 중화인민공화국과 옛 소비에트 연방 중 어느 한 편에 가담하지 않는 독자 노선을
걸었지만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민주화에는 저항하였다. 그는 민중들의 표현의 자유와 언론을 통제하고 반대 세력을 용납하지
않는 독재 정치를 하였다.

마오쩌둥 전 중국 국가 주석과 찍은 사진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회의하는 사진.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김일성과 함께
<엽기적 행각들>
-차우셰스쿠는 한 번 입은 양복은 다시는 입지 않았다. 그의 집사가 바로바로 태워버렸다고.
-세균 및 암살에 대한 공포로 영국 방문 시 엘리자베스 2세와 악수한 직후 그 자리에서 손을 알콜로 소독했다. 이게
얼마나 큰 외교적 결례인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음식을 먹기 전에는 꼭 측근이 먼저 시식을 해 독이 없는지 확인한 후 먹었다. 이 짓을 외국의 국빈과 만찬을 가질 때도
한 것은 물론이다.
-신생아 건강을 이유로 모든 영아들에게 수혈을 하도록 했는데 혈액 검사를 제대로 안해서 수백 명이 에이즈에 감염됨.
-서방에서 성경을 지원 받아서는 화장지로 만들었는데 파쇄가 제대로 안 돼서 화장지에서 성경 구절이 보이게 되었다.
-지하철 공사장 자리에 있던 공원을 보고 싶다고 하여 하룻밤만에 복구시켜버렸다.
-국가재정 적자가 심해지자 수입은 안하고 수출만 하는 엽기적인 정책을 밀어버렸다. 흠좀무.
-루마니아 공산당에서 차우셰스쿠의 아내 엘레나에게 부여한 정식 명칭은 "인민의 자애로운 어머니". 한편 같은 시기
그녀는 "인민들은 마치 벌레와 같다. 아무리 먹여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 는 발언을 했다고.
-아내 엘레나는 무식에 한이 맺혔는지 황산의 화학식도 모르면서(...) 권력의 힘으로 국립화학연구소의 소장이 되었으며
논문(!)도 썼고당연히 부하 직원들의 땀을 훔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명함도 신나게 뿌렸다. 물론 공식적인 명칭은
"위대한 과학자이자 화학자" 였다. 또한 엘레나는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명예 박사를 요구했다고.
-또한 화려하게 꾸민 개인궁의 침실 페인트 냄새가 싫다고 단 하룻밤도 잔 적이 없으면서도 청소부가 그 방을 청소를
게을리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카페트 밑에 핀을 숨겨두었고 이를 치우지 않자 즉시 해고했다.
-스스로를 외적에 대항하는 루마니아의 왕으로 생각해 기마병들을 동행하고 성지순례를 하거나 의도적으로 애국주의를
강조하기도 했다.
-차우셰스쿠 일가의 사치를 감당하기 위해 해외에서 빌린 채무가 100억 달러에 이르르자 엘레나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정부가 다른 나라에게 채무를 지고 있다는 것은 국치다" 라는 발언을 했고,
그 국치를 씻기 위해 루마니아 정부는 모든 복지예산을 긴축하고 세율을 올려서 불과 9년만에 100억 달러의 채무를 다 갚음.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지들이 진 빚을 국민들한테 모조리 떠넘겨서 갚았다는 얘기다. 십시일반의 나쁜 예.
-아들 니쿠는 각국의 외교관들이 모인 만찬에서 탁자 위로 올라가서 소변을 갈겨댔다.
-아들 니쿠가 한 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그녀가 탐탁찮았던 엘레나는 니쿠가 잠시 해외로 나간 사이 병사들을
시켜서 그 미녀를 윤간한 뒤 그 사진을 니쿠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탓인지 아들 니쿠도 미쳐 돌아가긴 매한가지. 나디아 코마네치를 검열삭제했다는 의혹도 돌고 있다. 어디까지나
의혹 수준이고 코마네치 자신도 이를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 위 내용들을 보더라도 루머가 루머로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앵무새 중 한 마리가 훈련받은 대로 "니쿠 바보" 를 연발했다. 앵무새는 루마니아 비밀 경찰에 끌려가 심문받은 뒤
사형당했다.
-국민들은 쫄쫄 굶고 있는 상황에도 차우세스쿠 자신의 치적을 기념한답시고 부쿠레슈티 한복판에 인민궁전을 세웠다.
이 건물을 세우기 위해 부쿠레슈티에 있는 유서깊은 석조 건축물들이 대거 철거당했고 근처에 있던 교회는 통째로 35m
옮겨졌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부쿠레슈티 시가지 전체의 약 1/3에 달했다고. 단일 건물 중에선 세계에서 미국의 펜타곤 다음으로
거대한 건물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크기만 컸지 미적인 기준에서는 쓰레기다. 더군다나 이 건물은 미완성이다.
심미안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차우셰스쿠가 기분에 따라 그때그때 설계도면을 싹 다 바꾸는 일을 일삼아 균형미는 찾아볼
수조차 없으며 나중엔 재정난 때문에 대리석으로 반쯤 꾸며진 방을 시멘트로 덮어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심지어 있던 계단을 철거하고 다시 만드는 일까지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세운 철기둥은 그가 사형되자 마자 미관상의 이유로 철거되었다.
여담으로 인민궁전에 있는 모든 건축 자재는 루마니아산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건물은 공산 정권이 무너진 뒤엔 루마니아 국회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북한을 벤치마킹한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모르겠지만 대규모 매스게임을 매년 했다고 한다.
자신을 찬양한 자서전을 써 전국 각지의 매장에서 판매시켰는데 간부들에게 의무적으로 판매했다. 인두세도 아니고...
어쨌든 이로 인해 차우셰스쿠의 자서전은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판매고가 계속해서 상승했다.
-수도 부쿠레슈티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생존자 구조 작업으로 인해 복구가 더뎌지자 구조 작업을 중단하고 잔해는
그냥 불도저로 밀어(!)버리라고 명령했다. 분노한 실종자 가족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자 물론 무자비한 유혈진압으로
대답했다.
-특히 차우셰스쿠의 정책 중 가장 악명 높은 것은 인구 증가 정책이다. 인구가 국력이라고 생각한 차우셰스쿠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인구를 늘리려 했다.
처음에는 낙태와 피임을 금지하고 나중에는 아예 40세 이하의 여성에게 아이를 많이 낳도록 했으며 아예 낳지 않으면
무거운 세금을 물렸다.
그 결과 차우셰스쿠의 바람대로 많은 수의 아이들이 태어났지만 억지로 인구를 늘리려고 했기 때문에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으니 아이들을 양육할 사회 기반이 없었고 자식을 많이 낳은 사람에 대해 경제적인 지원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버려진 아이가 발생하였다.
더 큰 문제는 태어난 아이들이 어른이 되자 일자리가 없어서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그의 우상화를 꾀한 그림.
<종말>
탈냉전 시기 동유럽에서 벌어진 자유화 바람은 루마니아에도 불었다.
1989년을 기점으로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체제를 버리고 민주화의 길로 접어들고
루마니아에서도 만성적인 식량부족과 그의 독재정치로 인해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져가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에 불을 지핀 것이 차우셰스쿠가 자신의 권력의 과시하기 위해 개최한 1989년 12월
티미소아라드(timisoarad) 공개 집회였다.
이 집회에서 시민들의 반정부 집회가 시작되었고, 차우셰스쿠는 이러한 모습에 당황하여 연단을 도망치듯 떠남으로서
루마니아 반정부 시위는 극대화 되었다.
이를 계기로 12월 20일에는 부카레스트(bucharest)에서 10만 명의 시위로 확산, 시위가 격화되자 군인은 반기를 들고
시민측에서 대통령 친위대와 교전하여 루마니아는 내전상태에 빠졌다.
헬기를 타고 도주하려는 차우셰스쿠 부부는 헬기 조종사의 변심으로 인해 체포되었다. 헬기 조종사의 증언에 의하면
차우셰스쿠는 북한으로 도주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차우셰스쿠가 사형이 선고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군인들은 서로 자기가 사형을 집행하겠다고 아주 난리를 부렸다.
잘 알려져 있듯 총살시 사형 집행인들의 정신적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사용되는 소총의 절반만 실탄을 장전하고
나머지는 공포탄을 장전한다. 차우세스쿠 사형 당시 이를 담당한 부대에서도 소총수 열 명에 실탄 다섯 발을 준비하여
사형을 집행하려 했다.
하지만 소총수에 지원한 사람은 당초 모집하려는 인원의 세 배인 30여 명에 이르렀고, 이들은 서로 자기가 죽이겠다고
하며 모두 실탄을 각자 지참해왔다.
결국 160발 이상을 맞아서 순식간에 벌집이 되었다고 한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죽음 소식을 들은 북한의 김씨 일가는 우리들도 인민들에게 죽을수 있다면서
경각심을 나타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