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에서는 이나라 이씨는 전부 경주이씨에서 분파된 것이라고 주장하나
아조 이씨들이 대부분 경이의 분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광이는 경이의 분파가 아닙니다
제가 경이의 족보 6촌 설화의 경이부터 따져서
신라말 이거명부터 시작되는 계보를 보았는데 우리 선조들과 일치되는
것을 보지못했습니다
또한 어느 분은 우리 광이가 궁예의 김씨나 김알지의 김씨가 아닌가 하나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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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집단의 부족들이 모여 살면서 하나의 읍락을 구성하고
읍락의 우두머리를 따라서, 이오는 과정이 소위 오늘날의 성본의 근원입니다.
경주 김알지의 후손인 경주김씨분 들이 많은 것은 김알지의 후손들이 대부분 신라 왕을 하였거나
진골이나 성골 두품제의 벼슬을 하다가 그중 출중한 분들이
어느 지역에 정착 그 지방의 어른이 되거나 하여, 고려조 부터 조선조에 이르는 동안,
파조로 받드니, 경주김씨 분파가 많습니다 오늘날의 성본제도는 대부분 고려시대와 조선에 이르럿고
완전한 정착은 조선조 세종조입니다
세종조 무렵에 세종실록 지리지를 편찬한 바 고을마다 지방의 성본을 수록하게되고, 소위 반가가 생긴 것입니다
반가는 의당 8조고가 있어야 비로서 양반이 되는 것입니다. 즉 유명한 자들이 즉
경이도 마찬가지압니다 경이는 신라 6부족의 촌주로 부터 시작되나 중간의 대수는 실전되고 이거명부터 시작 합니다
이거명 이후부터 후삼국 -고려를 거치는 동안, 출사한자 들이 벼슬을 하거나 지방의 실력자가 되어서
그 지방의 이씨라하여 분파한 자들이 바로 경이 분파이고 전주등등의 이씨가 경이의 일족에서 시작된 것이
대부분이나, 전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씨의 칭호나 유래 에서나 우리나라
성본제도의 시원과 정착의 글을 보면 알것입니다. 그래서
김씨는 전부 김수로나 김알지의 후손이다
이씨는 전부 이거명의 경이의 후손이다라는
단정은 틀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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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가 많은데 수많은 파들인데,진짜로는. 전부, 그 파라고하여,
세종대왕의 효령대군 충년대군의 후손들이 아닙니다
어느 지방에 모여살면 그 당시의 제일 어른 수장 전주이씨의 사람- 대감이 있고
이 대감 밑에는 일하는 몸종, 친지. 이 마을 사람 등등도 전부, 이 대감을 받들게 되고,
그래서 전부 이분들의 자손 전주이씨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광이는
신라 내물왕대 내사령 자성이족인데. 즉
신라 서벌지역의 일족입니다. 따지자면 혹시는 김알지계통이나 이거명계통과
같을수도 있으나.증거가 없습니다.
서라벌지역에서 읍락을 이루던
우리 일족이 당시 수장을 중심으로 모여산 것으로(촌주와 음락민)
직위 높아서 이를 따르는 군대나 사람이나 마을이나 촌민이나 들이 있을 것이고
자성 후손 중에 어느 분이 칠원 일대의 성주가 되었을 시에,
성주 이하 모두가 이 분들의 자손이라 칭하고
칠원성과 이를 지키는 군대와 이 성의 사람들이
고려군에 패하고 성이 함락이되자 주민의
일부와 우두머리인 칠원공 이한희 장군이
왕건군에 의하여 강제로 북상케하여
개경이나 광주나 회안에 정착하였습니다
왕건이 통일을 이룬 근본적인 정책이 각지의 호족과는 회유와 군신관계로 이를 위무하고
일부 호족은 결혼정책으로 척인을 이루어 고려재통일 기반을 구축합니다
우리 이족은 신라 멸망후에 칠원성을 중심으로 장기간에 고려에 항거한 일족으로
무력에 의해 함락을 당했으나 왕건은 칠원공과 일족들을 죽이지는 아니하고
살려두고 일부 이족은 회안의 역리로 이속한 것입니다
왕건의 통일정책의 특징은, 무력으로 정벌한 지방의 호족장들을 죽이지아니하고 살려두고
그 지방의 사심관이나 도독 동정으로 임명, 명예직을 주어서
지방민의 항거심을 잠재우는 위무 정책을 씁니다. 그것이 성주 이순유, 공주의 견휀장군, 강릉 김관창
장군,창원의 김ㅇㅇ에서 보듯이, 군신의 신하로 예유한 것입니다
즉 아라가야와 함안에서 강력한 지지기반의 지지를 맏고 왜, 남해국의 문물교류 중심지인 칠원에
이한희; 자성이족들을 그래도 둔다면, 고려개국의 정비체제 확립에
치명적인 후환을 두기 때문에, 이주정책을 쓴 것이고, 지배자
칠원공 이한희와 많은 일족들을 경기도 한산주 일대인 기내에 살게한 것입니다.
그래서 ,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그러면 자연, 원래부터 그 지역에 오래동안 살던 토착민들도,
똑똑한 칠원성주 칠원공 앞에 모여들게 되고
그래서 자자일촌, 호를 이루는 것으로, 당시에는 칠원공의
회안 이씨라 했을 것입니다/ 물론 순수한 자성의 핏줄은 아니지요
우리 이족은 서벌의 무리, 칠원과 아라가야 사람, 경순왕과 북상한 신라유민, 마의 태자를 따르는 무리들과
혼성 되어 기내나 염현, 광주 여주 이천에 살다가 정착 하였을 것이고, 정착하면서, 회안의 토착민도 합류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이족의 일설에는 마의태자를 따라서 항거하다. 신라왕을 따르다.
염현에서 신라에서 온 유래와 부흥운동을 적고, 조상을 기리다라는 설화를 보았을때, 회안 즉, 기내에
거주한 우리 이씨들이, 마의 태자 추종세력.,기내의 토착민.
경순왕 추종세력.궁예의 추종세력의 혼합 유민및 정착세력으로 보면 됩니다.
회안에 칠원공을 따르는 무리들이 유독 많이 정착하게 되어서 회안이씨가 된 것입니다.
해서
회안 이씨와 오늘의 광주 이씨인 것입니다
기실 본이란, 항상 지도자, 우두머리, 족장, 장군등,
힘이 있는 통솔자의 뒤를 따르는 습속인자라
우리가 경주이씨다 우리가 신라 김알지 계통의 김싸다 라는
분파다라는 것은 무의미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뭉쳐서 사는 자자일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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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작이 된 것이,
조선조 세종조에 이르러,
호구가 정비되고, 반상이 정비되어, 사족들은 반드시 내력이 중요하므로,
족보가 생기고, 족보가 생긴 이후부터는, 전부
순수한 우리 광이 친척이 맞다는 것입니다 즉, 광릉삼익 이후의 족보에 등재된 우리 광이는,
전부 우리의 친족이 맞습니다.
동국의 족보중에서 광이의 족보가 가장 깨끗하다고들 학자들이 평가합니다.
그 만큼 타종족이나, 다른 이족들이 족보에 들어오지못하고, 순수한 광이족만으로
생원공가의 경술 갑진보와 석율암공가의 을사보로 이어져 온 것입니다.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글을 보신 광이분들은 전부 순수한 칠원공의 후예라는 것을
자랑으로 아셔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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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전에는 누가 누구인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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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경장 이후 민적법이 시행이 되고
우리나라는 전부, 호적을 지녀야하고, 호적에 올리면, 본관를 기록하여야하므로,
당시 전주이씨 양반가의 솔거노비와 외거노비와 소작농과 의 몸종, 머슴,
일꾼들은 전부 전주이씨로,. 광산김씨 세도가의 솔거노비와 외거 노비와 소작농과
몸종, 일꾼 ,소작농, 머슴들은, 주인의 본관으로
전부 입적을 하였습니다.
오직하면 흥선대원군이 전주이씨가 갑자기 전국적으로 10만명이
늘어났다고
좋아햇다는 기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