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신앙교리성은 2000년 6월 26일 파티마의 성모님 발현에 관한 "파티마 메시지"(The Message of Fatima)를 발표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신앙교리성 장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작성한 "신학적 해설" 부분에는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의 신학적 위치 그리고 사적 계시의 인간학적 구조에 관한 설명이 실려 있습니다(첨부 파일 참조).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교황청 신앙교리성에서 발표한 "파티마 메시지"에 실린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에 관한 내용을 널리 소개하도록 하였습니다.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 ─신학적 위치 공적 계시는 인류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 행위를 일컬으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모두 그 문학적인 표현이 발견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말씀하셨으므로, 계시는 신약성서에 선포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비가 완성됨으로써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계시가 완결되었다고는 하여도 그것이 완전히 명백하게 드러난 것은 아닙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6항 참조). 그리스도교 신앙은 시대를 살아가며 계시의 내용 전체를 점진적으로 파악해 가야 할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령께서 교회를 이끄시고 이로써 말씀이 성장하는 세 가지 중요한 방법을 지적합니다. 곧, 신자들의 명상과 공부, 영적인 것들에 대한 더 깊은 인식을 통하여 쌓이는 경험, "주교직 계승을 통하여 확고한 진리의 은사를 받은 이들의" 설교입니다(계시 헌장, 8항). 이러한 맥락에서 '사적 계시'의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적 계시란, 신약성서의 완성 이후에 있었던 모든 환시와 계시를 일컫습니다. 사적 계시에 관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른바 '사적' 계시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어떤 것들은 교회의 권위가 인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의 결정적 계시를 '개선'하거나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의 한 시대에 계시에 따른 삶을 더욱 충만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데 불과한 것이다"(67항). 플랑드르의 신학자 E. 다니스에 따르면, 사적 계시에 대한 교회의 승인이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곧, 신앙이나 도덕에 어긋나지 않은 메시지, 합법적 공표, 신자들이 그 계시를 신중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교회 권위의 허가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가 승인한 사적 계시는 우리가 신앙 안에서 시대의 징표를 이해하고 거기에 올바르게 부응하도록 도와 줍니다.
사적 계시의 인간학적 구조 신학적 인간학에서는 지각 또는 환시를 세 가지 형태, 곧 신체적인 외적 지각, 내적 지각 그리고 영적 환시로 구분합니다. 사적 계시는 이 가운데 '내적인 지각'에 해당됩니다. 내적 환시는 주관적인 상상의 표현에 불과한 환상과는 다르며, 감각을 초월하기는 하지만 영혼이 실제적인 어떤 것과 접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적 환시는 영혼에 와 닿는 실제적인 '대상'과 관계가 있는데, 이 '대상'은 우리의 평소 감각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므로, 내적인 마음의 깨어 있음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내적 깨어 있음은 외적인 실재와 영혼을 채우고 있는 오만가지 생각과 표상들의 강한 압력 때문에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어린이들이 이러한 발현의 주된 수신자가 되는 이유를 설명해 줄 것입니다.
*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파티마 메시지" 전문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제16호에 실려 있습니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계간으로 펴내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는 교황 성하를 비롯하여, 교황청,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FABC) 등의 주요 문헌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적계시에 대한 올바른 이해
글_조규만 (주교)
지 난 1월 21일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는 '나주 윤 율리아와 그 관련 현상들에 대한 광주대교구장 교령'을 발표하여 윤 율리아와 관련된 어떠한 행위도 자동 파문 대상이 된다고 천명하였습니다. 이에 경향잡지는 지난 1월호의 '오늘날 우리에게 사적 계시란 무엇인가'에 이어 '사적 계시의 올바른 이해'를 기획하였습니다.
1. 계시란 무엇인가?
인간의 능력으로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神秘와 하느님에 관련된 신비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알려주시는 것을 계시啓示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스스로를 계시종교啓示宗敎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알려주셔야만 인간은 하느님을 알 수 있다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결코 하느님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성과 양심을 통하여 자연 안에서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을 관찰하는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알 수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마태 6,25-30 참조)
교 회도 자연을 통한 하느님 인식을 인정합니다. “거룩한 공의회는 ‘만물의 근원이시며 목적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간 이성의 자연적 빛으로 창조물을 통하여 확실하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계시헌장 6항). 이처럼 대자연과 양심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교리에서는 간접적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는 하느님 자신이 알려주셔야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이를 직접계시라고 합니다. “자연적 이성을 통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업적에서부터 출발하여 확실하게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다른 인식의 질서, 신적 계시의 질서가 존재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1편, 50항)
성경은 인류가 하느님을 알게 된 사실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것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 1-2).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과 그분이 주시고자 하시는 영원한 생명의 신비는 우리 인간의 힘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알려진 것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계시헌장 1항).
이렇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계시의 목적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거룩한 신성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선성과 지혜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당신 뜻의 신비를 기꺼이 알려 주시려 하셨으며, 이로써 사람들이 사람이 되신 말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다가가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도록 하셨다.”(계시헌장 2항) 그리고 그 계시의 방법은 말씀과 행적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이 계시 경륜은 서로 긴밀히 결합된 행적과 말씀으로 실현된다. 구원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신 업적들을 가르침과 그리고 말씀들로 표현된 사실을 드러내고 확인하며, 말씀들은 업적들을 선포하며 그 안에 포함된 신비들을 밝혀준다”(계시헌장 2항).
2, 사적계시란 무엇인가?
가톨릭교회 교리는 하느님의 계시를 크게 직접적계시와 간접적계시 이외에도 공적계시公的啓示와 사적계시私的啓示로 구별합니다. 사적계시를 특별계시特別啓示라고도 합니다. 공적계시란 근원적계시根源的啓示라고도 하며, 이는 인간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거룩한 신성에의 참여, 곧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예언자들이나 사도들, 또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려주신 신비를 의미합니다. 한편 사적계시란 계시를 받은 당사자를 위해서나 일부 지역의 믿음의 공동체를 위하여 알려진 가르침이나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 러나 이러한 사적계시가 공적계시와 모순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만일 사적계시가 공적계시와 모순이 된다면 그것은 거짓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한 사적 계시가 공적계시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것일 수도 없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가 결정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전 현존과 출현으로 말씀과 업적, 표징과 기적으로 특별히 당신의 돌아가심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심, 마침내는 진리의 성령을 보내심으로 계시를 완수하시고 하느님의 증거로 확고하게 하셨으니 … 그리스도의 구원 경륜은 결코 폐기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시기 전에는 어떠한 새로운 공적 계시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계시헌장 4항)
물론 사적계시는 가능합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당신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적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러난 공적 계시를 어느 특정한 시대, 특별한 상황에 처하여 새롭게 강조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미 공적계시로 얻게 된 신앙과 희망을 지역적으로, 또는 시기적으로 생동적이게 하는 기능을 지닐 뿐입니다.
일찍이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적계시의 한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신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우리에게 주실 다른 말씀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유일한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을 동시에 그리고 한 번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 다시 그분의 말씀을 문제시하려고 하거나 또는 어떤 환시나 계시를 바란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 오로지 눈을 돌리지 않고 그분과는 다른 것이나 어떤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어리석은 일일뿐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1)
그 러므로 사적계시는 교회의 승인을 필요로 합니다. 자주 정신적 착란 현상과 혼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거짓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적계시가 교회의 승인을 받았다고 공적계시가 되는 것도 아니요, 모든 신자들이 반드시 믿어야 할 신앙의 내용일 수도 없습니다.
우리 시대의 큰 신학자였던 스힐러베엑스는 사적계시의 교회 승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습니다. “어떤 발현이나 사적 계시에 대한 교회의 승인은 … 그 역사적 진실이나 권위의 절대적인 오류가 없다는 입증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단지 충분한 증거가 조사를 통해서 나왔고 그래서 우리가 이성적 바탕 위에서 발현의 신적 권위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데 조심스럽게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비준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실상 교회는 발현이 일어난 그 장소에서 마리아가 특별한 방법으로 공경을 받을 수 있다는 공식적 허락 이상의 무엇을 주고 있지 않다. …교회가 선언하는 것은 교회의 판단으로 그것이 신앙과 윤리적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이 없고, 그리고 거기에는 인간적 신앙에 의해 이루어지는 조심스러운 승인과 그들의 신심을 위해 충분한 징후들이 있다는 것이 전부이다.”2)
사 적계시, 혹은 발현 등은 정신적 착란 또는 주관적 환시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발현과 사적계시의 승인에 대하여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를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발현이나 사적계시의 진실성 판단이나 교회의 승인은 해당 소속 주교 즉, 교구장에게 있습니다. 이는 일찍이 제5차 라테란 공의회와 트렌토 공의회에서 규정한 것입니다. 교회법 823조 1항은 사회 홍보 매체와 특히 서적 등을 감독하여 신앙과 도덕의 진리를 해치는 것을 배척할 의무와 권리가 교구장에 있다는 것을 명시합니다.3)
우 리나라의 경우 상주 데레사에 관련해서 발표한 1957년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의 교령이나, 나주 율리아에 관련해서 발표한 1998년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의 공지문과 그 후 계속해서 2001년, 2005년, 그리고 최근 2008년 후임자 최창무 대주교에 의해 발표된 공지문과 교령은 모두 교회 규정에 따라 합법적인 권리와 의무 하에 정당한 절차와 권위 하에서 내려진 당연한 조처입니다.
3. 왜 사적계시에 대한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나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사적계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적계시를 자신이나 또 교회 공동체의 선익 이외에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하 느님께서는 언제든지 누구에게든지 자신을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사적계시의 현상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 고르넬리오가 신비오운 영상 가운데 하느님의 천사를 만나 베드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 사실이 그 한 가지 예입니다.(사도 10,1-48 참조)
역사적으로도 성 아우구스티노의 신비 체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비체험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경우는 자주 신비체험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과 교회는 일종의 신비체험으로서의 사적계시를 인정합니다.
사적계시는 어떤 특정한 시기에 개인이나 교회를 안내하는 기능을 담당하기는 하지만, 또 공적계시를 보충할 수도 없고, 대체할 수도 없으며, 교회의 신앙의 유산일 수도 없지만,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특수계시라고도 불리는 사적계시도 공적계시의 목적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희망을 위한 선익이듯이, 공동체에 선익을 주어야합니다. 일찍이 사도 바오로는 신비체험을 통하여 받게 된 은사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오늘날 사적계시를 받은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나 는 여러분이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예언할 수 있기들 더 바랍니다. 누가 해석을 해 주어 교회가 성장에 도움을 받는 경우가 아니면, 예언하는 이가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이보다 더 훌륭합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은사를 열심히 구하는 사람들이니,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그것을 더욱 많이 받도록 애쓰십시오. …그대야 훌륭하게 감사를 드리지만 다른 사람은 성장에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나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보다도 더 많이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교회에서 신령한 언어로 만 마디의 말을 하기보다, 다른 이들을 가르칠 수 있게 내 이성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고 싶습니다.”(1코린 14, 5-19) 사적계시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지만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적계시가 공동체의 선익의 차원을 거슬러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사적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시의 내용이며, 계시를 하시는 분이 계시를 받는 사람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그런데 나주 율리아의 경우나 상주 데레사의 경우 메시지의 내용도 공적계시와 모순이 될 뿐만 아니라, 메시지보다도 전해주는 성모님이, 성모님보다 나주 율리아가 더 중요하게 부각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인정한 루르드의 발현이나 파티마의 발현에서는 발현 체험자였던 베르나데트나 루치아가 자신을 앞세운 것을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교회의 권위에 순명하였음을 봅니다.
광주대교구의 공지문과 교령에 따르면4), 나주 율리아는 교회의 정당한 권위에 순명하지 않았으며, 불순명의 배후에는 돈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직권자는, 곧 해당 교구장은 당연히 재정에 대한 감사를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5) 나주 율리아는 성전 건축을 예고하고 모금하고 있는데 만일 그 모금과 금품수수가 미사예물과 헌금의 형태라면 더더욱 직권자인 교구장의 감사가 절대적입니다,6) 그런데 교령에 따르면, 나주 율리아는 교구장의 회계 장부에 대한 지시사항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는 금전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부분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4. 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는 이러한 이적현상 또는 사적계시에 더 매달리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어떤 표징들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이성만으로 또는 감성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야”(마르 12, 30)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을 인식하고 믿은 데도 이성만이 아니라 감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신앙과 이성은 진리이신 하느님을 향해 날아오르는 두 개의 날개와도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앙과 이성, 서언 참조) 그러므로 이성만을 강조하거나 또는 감성만을 강조함으로써 신앙생활에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합니다. 감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맹목적이거나 맹신적 경향을 띠게 됩니다. 이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마음이 메마르고 무미건조하게 됩니다.
이적현상 또는 사적계시에 매달리는 현상은 마음이 메마르고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에서 충족할 수 없는 종교적 욕구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가톨릭교회가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교리와 제도 중심으로 주지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어서 감성적으로 만족할 수 없는 부분을 사적계시 또는 이적현상으로 충족하고자 합니다. 이를 영적갈증이라고도 합니다.
가톨릭교회가 성령쇄신운동, 떼제 기도 등 여러 가지 프로테스탄의 기도운동을 받아들여 감성적인 부분을 보충할 수 있는 기회를 과거보다 많이 만들어 주고 있는 현실입니다만 그러한 영적욕구를 충분히 채워주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가톨릭신자들이 특별히 신흥종교에 많이 빠지는 경우를 봅니다.
결 국 이적현상이나 사적 계시에 매달리는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부족한 탓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과,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르쳐 주신 말씀과 업적을 통해서도 하느님을 믿기가 어려운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표징을 구합니다.
사 도 바오로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1코린 1,22).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유다인들처럼 표징으로 하느님의 존재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때때로 마음에 감동을 주는 감성적 기도 모임을 통해서 눈물을 흘리고 하느님을 체험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은 날씨처럼 수없이 변하기도 합니다. 감동적일 때가 있고, 무미건조할 때가 있습니다. 그 감정에 따라 하느님이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가 거부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희망은 이성과 감성을 필요로 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두 가지 요소의 역사적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맹신주의와 급진적 전통주의가 이성의 자연적 능력들에 대하여 불신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합리주의와 존재직관주의가 오직 신앙의 빛만이 전해 줄 수 있는 지식들을 자연 이성에 돌리려고 했습니다.”(신앙과 이성, 52항). 그러므로 이 두 가지의 협력을 당부하였습니다. “교회는 신앙과 이성이 ‘서로서로 지지하고 있다’고 깊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각기 상대방에게 순화시키는 비판과 더욱 깊은 이해를 위한 탐구를 계속할 자극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신앙과 이성, 100항).
5. 오늘날 우리는 사적계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사도 바오로는 제자 티모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한 바 있습니다.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 하십시오.”(2티모 4, 3-5)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예언은 그 이후 교회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니체아 공의회를 비롯한 많은 공의회는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소집되었던 것입니다. 그 역사적 체험에서 얻은 지식들이 축적되었습니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하느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자기 자신을 드러내실 수 있다는 점에서 사적계시와 영적체험은 가능합니다.
2) 이러한 사적계시는 어떤 특정한 시기에 개인이나 교회를 안내하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적계시를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3) 그렇다고 사적계시가 공적계시를 보충하는 것일 수도 없고, 교회 신앙의 유산일 수도 없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1편 67항 참조)
4) 그러므로 신비체험을 한 사람들의 메시지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으로 받아들일 의무가 없습니다. (스힐레베엑스, 칼 라너)
5) 사적계시가 유효하려면 공적계시에 부합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공적계시야말로 진리요 모든 계시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6) 사적계시를 받은 사람의 심리적 상태가 정상이고 그들의 신심과 신앙생활이 올바른 것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틀릴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적계시를 받은 사람은 잘못할 수 있습니다. 사적계시나 신비체험은 계시 받은 자의 지식이나 인격적 품위에 따라 걸려지게 됩니다.
일찍이 하느님을 체험한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은 그렇게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서도 당신이 체험한 그 신비를 설명할 길이 없어서 “내가 하느님께 관하여 쓴 모든 글들은 쓰레기에 불과합니다.”라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집필 중이던 「신학대전」을 중단하고 침묵하였습니다. 빛이 어떤 물체를 통과하느냐에 따라 빛은9 다양한 모습으로 전달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7) 사적계시를 빙자하여 잘못된 해석, 왜곡이 가능합니다. 성경은 시몬 마구스가 거짓으로 꾸며내어 사적계시를 주장한 사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사도 8,9 참조)
8) 사적계시는 공동체에 선익을 주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도움을 주는 일이 올바른 사적계시의 한 가지 기준이 됩니다.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이는 자기를 성장하게 하지만, 예언하는 이는 교회를 성장하게 합니다. …누가 해석을 해주어 교회가 성장에 도움을 받는 경우가 아니면, 예언하는 이가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이보다 더 훌륭합니다.”(1코린 14,5) 사실 계시를 받은 자가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선익이 되지 않습니다.
9) 사적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지입니다. 다음으로 성모님께서 발현하셔서 그 메시지를 전달해 주셨다면, 성모님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그 계시를 받은 자가 존경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순서가 잘못되었다면 분명 올바른 사적계시로 보기 어렵습니다. 이제껏 교회가 승인한 성모발현이나 사적계시에서 계시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중요성을 내세운 바 없습니다.
10) 교회가 승인한 사적계시일지라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신앙의 진리에는 등급이 있습니다. 첫째는 삼위일체 신비, 강생의 신비, 성체의 신비 등입니다. 두 번째로 성모님에 관한 믿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교회마다 다르게 주장하는 교리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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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톨릭교회교리서], 1권 65항에서 재인용: 갈멜의 산길, 2, 22.
2) E. Schillebeeckx, Mary, Mother of The Redemption, London 1964, 197쪽 이하(H. Graef, Mary, a History of Doctrin and Devotion, London 1994(4판), vol. 2, 84쪽. 재인용)
3) 제823조 (1) 교회의 목자들은 신앙과 도덕의 진리가 온전히 보존되도록 저술이나 사회 홍보 매체들의 사용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이나 도덕에 해독을 끼치지 못하도록 감독하고, 또한 신앙이나 도덕을 다루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출판할 저술은 목자들의 판단을 받도록 요구하며, 아울러 올바른 신앙이나 선량하 sehejr을 해치는 저술을 배척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4)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는 나주 율리아와 그 관련 현상들에 대하여 1998년 1월 1일, 2005년 5월 5일 두 차례 공지문을 발표하였고 2001년 5월 5일 사목적 지침 발표하였으며, 2008년 1월 21 교령을 발표하였다.
5) 제1265조. (1) 개인은 자연인이거나 법인이거나 누구도 소속 직권자와 교구 직권자의 서면 허가 없이는 어떠한 신심이나 교회 시설이나 목적을 위해서도 모금하는 것이 금지된다. 다만 구걸(탁발) 수도자들의 권리는 보존된다.
6) 교회법 제957조 미사들의 책무가 이행되도록 감독할 의무와 권리는 재속 성직자의 성당들에서는 교구 직권자에게 속하고 수도회나 사도 생활단의 성당들에서는 그들의 장상들에게 속한다. 제958조 (1) 본당 사목구 주임 및 미사 예물을 늘 받는 성당이나 그 밖의 신심 장소의 책임자는 특별한 대장을 비치하고, 여기에 거행할 미사들의 대수, 지향, 제공된 예물 및 거행 완료를 정확히 기재하여야 한다. (2) 직권자는 매년 몸소 또는 타인들을 시켜 이 미사 대장을 감사할 의무가 있다.
- - - - - - - - - - - - - - - - - 경향잡지 2008년 3월호
오늘날 우리에게 사적 계시란 무엇인가?
나주 성모동산의 이적행위들에 대하여
박상경 기자
성모 발현과 사적 계시의 허상
지난해 11월 13일 문화방송(MBC) 시사교양 프로그램 PD 수첩에서는 ‘기적인가 사기인가 -나주 성모동산의 진실’을 방영하여, 신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매우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MBC에서 방영한 나주 윤 율리아 사건을 보면서 문득 1980년대 어느 날 전철에서 본 풍경이 떠올랐다. 한 여인이 화려하게 치장한아기 예수상을 가슴에 안고 전철을 탄 것이다.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수군댔으나 그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음 날 심상치 않은 여인의 행적을 이야기하다가 어디선지 자칭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적 계시 문제와 관련한 문제라면 상주 데레사도 있었다. 그즈음 전주교구 수류성당의 성모상에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에 대한 이야기가 들렸다. 성모께서 발현하셨다는 이야기와 함께 성모상이 움직인다는 거였다. 신부가 관련된 이 발현 이야기는 꽤 신빙성 있게 신자들에게 파고들었다. 주말이면 성모상을 참배하겠다는 순례객들의 관광버스가 줄을 잇는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곧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는 ‘전주교구 수류본당 기도 모임에 관하여 공지’(경향잡지 1992년 2월호 54쪽 참조)를 발표하여, 수류본당에서 일어나는 각종 기도 모임과 신심 행태가 가톨릭의 정통 신앙에서 벗어났음을 명시하였다. 이에 따라서 각종 모임을 금하고, 제작 배포된 출판물과 기타 물품의 사용을 금하면서 이 문제는 매듭지어졌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는 부산 언양지방에서 사적 계시를 받아 자신을 발현한 성모님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나타났고, 이와 관련하여 두 형제 사제가 면직되었다.
이렇듯 그동안 한국 교회 안에는 끊임없이 성모 발현과 사적 계시에 대한 문제가 있어왔고, 이에 따른 신자들의 혼란도 사실상 가중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눈물 흘린다는 나주 성모상, 그러나
이른바 ‘나주 성모 발현’이라는 사적 계시가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켜 온 시점은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6월 30일, 나주의 한 성모상에서피눈물이 흐른다는 윤홍선 율리아씨의 주장이 있었다. 이이야기는 당시 일반 매스컴에도 보도될 정도로 신자는 물론 일반인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얼마 뒤에는 성모상에서 흐른 피눈물이 돼지피였다는 반론 보도도 있었다. 그 뒤 매스컴에 가십 기사로 등장하던 피눈물 흘리는 성모상 이야기는 세간에서는 서서히 잊혀가는 듯하였으나 교회 안에서는 오히려 확산되어 갔다.
나주의 사적 계시현상은 1991년 5월 16일을 시작으로 ‘성체의 기적’을 주장하는데, 2005년 5월 6일까지 24차례의 성체 기적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여 그 절정을 이룬다. 윤홍선 씨는 성체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미사 중 입속에서 성체가 가장자리부터 차츰 피와 살로 변했다는 주장도 한다. 2003년 2월 8일에는 8번의 기적 현상이 있었다고도 하며 예수님에게서, 성모님에게서 수십 차례의 메시지를 받았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성모님 (피)눈물에 이어 성모님 향유, 가시관 고통과 편태 고통, 기적수와 율신액 등으로 인한 기적 치유 등 이상 현상에 따른 다양한 내용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관할 교구인 당시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는 1994년 12월 30일자로 ‘나주본당 윤 율리아와 그의 성모상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과 메시지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이에 대한 조사를 의뢰하였다. 그 뒤 이 위원회는 1995년 1월 9일에 첫 모임을 가진 이래 이른바 ‘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교회 신앙의 빛에 비추어 다각적인 관점에서 주의 깊게 연구하고 관찰(1차 교구 공지문)을 한다. 그해 6월 16일에는 나주 조사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중간 발표문’을 내었고, 이 중간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윤공희 대주교는 나주 기념행사를 금지하고 관련된 사제에게 더 이상 개입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한편, 1998년 1월 1일자로 ‘나주본당 윤 율리아와 그의 성모상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과 메시지에 대한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의 공지’를 발표하였다. 첫 현상이 일어나고 13년이 지나 공식 발표문이 나온 것인데, 발표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주의 성모상’과 관련된 일체의 행위를 금하다
“사적 계시를 유권적으로 해석할 권한은 해당 교구장에게 있다. 이른바 ‘나주의 성모님 메시지’는 인간적이고 인위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어서 그 순수성과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성체의 기적이라고 함부로 주장하는 현상들과 입에 모신 성체가 입안에서 살덩어리와 피로 바뀌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도 성체에 대한 믿을 교리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이러한 기이한 현상들은 신앙적으로 참된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증명할 만한 근거가 없다. 따라서 나주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된 제반 홍보물의 발행과 유포를 금지하고, ‘나주의 성모님 메시지’를 선전하지 못하도록 한 권고가 유효하고, 교도권에 순종할 것을 명한다. 나주의 성모상과 관련된 사적 장소에서 미사 ∙ 전례 ∙ 성사 집전을 금한 이전의 조치가 유효하고 기도 모임과 집회를 금지한다.”
이러한 금지령에도 나주 윤홍선 씨와 그를 따르는 무리는 은밀하게 또는 공공연하게 기적을 떠들어댔고 이에 미혹한 신자들은 순례를 감행하고 있는 현실이다. 국내외적으로 일으킨 기적들, 말을 못하던 이가 말문이 트이고 앞을 보지 못하던 이가 눈을 뜨고 중증장애인이 치유된다는, 그래서 나주의 기적수와 나주 율리아의 오줌을 율신액이라 하여 정기적으로 받아 마시는 성직자가 있다는 데서는 1970년대를 풍미했던 신앙촌의 박태선 장로가 떠올랐다. 당시 박태선 재단의한 학교에서는 그가 발을 씻은 물을 성수라 하여 받아먹는다는 소문이떠돌았다. 마치 율신교라는 새로운 사이비 종교의 탄생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윤홍선 씨의 성모님의 장미 향기 역시 조작한 것임이 드러났다. 한 증언자의 증언에 따르면 한 고위 성직자가 있는 가운데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성체는 윤홍선 씨가 눈속임으로 주머니에서 꺼내 던졌다는 것이고, 입안에서 살과 핏덩이로 변한 성체 역시 조작된 것임을 증언한다. 그전에 교회는 이른바 윤홍선 씨가 주장하는 성체의 기적현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유효하게 서품 받은 사제의 축성에 의해서만 성체가 이루어질 수 있고(가톨릭교회 교리서, 1411조 참조), 그리스도와 그분 성령의 힘은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제의 개인적 성덕과 관계없이 성사안에 성사를 통하여 작용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128조 참조)는 교회의 성체에 대한 믿을 교리에 부합하지 않습니다.”(1차 광주대교구 공지문)
‘나주 성체의 기적’은 믿을 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일련의 일들과 관련하여 광주대교구 후임 교구장 최창무 대주교는 2001년 2차 교구장 공지문 ‘성모성월을 마치며’를 발표하여 1차 공지문의 내용을 재확인하고 교도권에 순명할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하였다. 대구대교구는 광주대교구의 두 공지문을 확인하며, 2003년 5월 21일자로 교구 신부들과 수도회 장상에게 ‘나주 성모상’과 관련된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였다.
2005년 5월 5일,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는 3차 교구장 공지문 ‘나주 윤 율리아와 연관된 일들에 대한 사목권고’를 발표하였다. 직접 찾아가 세 번이나 면담한 사실과 금전출납 현황, 부동산 취득 등에 대한 등기사항과 회계 업무에 대한 투명한 자료 제출 등을 교구가 직접 확인하고 검토할 수 있도록 지시하였지만, 여전히 순명하지 않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또한 교구보다 높은(?) 교황청의 승인이 중요하다는 나주 추종자들에게 공지문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나주 율리아와 관계된 일련의 현상들과 사건들에 대하여 로마 교황청에 두 차례에 걸쳐 보고서를 냈으며, 교황청과 한국 주교단의 동의를 거쳐 1998년 1월 1일부로 나주본당 윤율리아에 대한 공지문을 발표하였다. 따라서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와 신자들에게 참된 신심은 결실 없이 지나가는 일시적 감정이나 허황한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참된 신앙에 있으며, 가톨릭교회로부터 인준된 여러 형태의 성모 신심을 깊이 하는 데 열정을 쏟기를 권고하였다.”
신비현상에 접한 사람의 태도는 겸손해야 한다
1900년부터 2000년까지 100년 동안 교회에 보고된 성모 발현 사건은 200여 건에 이르고, 이 가운데 교회가 공식 인준한 성모 발현 사건은 17건이다. 앞서 광주대교구장 1차 공지문에서도 밝혔듯이 사적 계시를 유권적으로 해석할 권한은 해당 교구장에게 있다.
지금까지 공인된 17건의 성모 발현 사건을 보면 이와 관련한 사람들의 태도가 하나같이 겸손하고 교회에 순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자신이 스타가 된 양 거들먹거리지도 않았고 박해를 받는다며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 하물며 이를 빌미로 개인의 재산을 축적하지도 않았다. 다만 교회의 조사와 판단과 결정에 모든 것을 맡기고 교회의 교도권에 순명하였다.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에서 펴낸 "올바른 성모신심"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을 체험하거나 신비현상에 접한 사람이 취해야 할 가장 첫 번째 태도는 겸손이다. 겸손이 결여된 체험이나 현상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카르멜의 한 수녀가 많은 사람의 찬양을 받았음에도 그것이 참된 영에서 온 것이 아님을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이유로 지적하였다. “첫째, 소유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둘째, 내적으로 미혹될까 하는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 셋째, 자기가 받고 있는 것이 좋은 것이고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남에게 믿도록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자제한다. 넷째, 가장 중요한 점으로 기도의 방법에 겸손이 필요하다. 다섯째, 참된 영은 잘난 체하거나 과장이 없는, 소박한 문체로 가르치므로 그의 글에 소박함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십자가의 성 요한 소품집”에서)
2007년 11월 19일자로 광주대교구는 ‘나주 윤 율리아와 그 관련 상황들에 대한 교구의 입장’을 발표하여 나주의 허황된 실태와 복음적 식별 노력에 대하여 당부하면서 올바르고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바라는 교구의 입장을 재차 표명하였다.
“교구는 세 차례에 걸쳐 발표된 교구장 공지문의 내용을 재확인합니다. 자칭 ‘기적’이나 ‘사적 계시’라는 주장과 선전은 가톨릭교회와 무관하며, 어느 교구 소속이든 성직자와 수도자, 신자들의 방문과 의식행위는 교회법과 교계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임을 분명히 하면서, 방문 금지와 의식행위 금지를 공지합니다.”
사적 계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시대가 혼란스럽고 개인의 삶이 불안할수록 우리는 무엇인가 기적을 바라고 이적 현상에 매달리게 된다. 계시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분명하다. 교회는 구약을 거쳐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적 계시는 온전히 성취되었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우리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은 공적 계시에 담겨있다.
“어떠한 사적 계시도 공적 계시를 보충하거나 대체할 수 없으며, 공적 계시와 어긋나는 사적 계시 또한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기준에 맞는 사적 계시라 할지라도 지역과 시기의 한계를 지닌다. 또한 교회의 공적 가르침과 부합되어야 한다. 교회가 가르치는 신앙의 진리나 도덕성에 상반된다면 잘못된 것이다.”(“올바른 성모신심”) 결코 사적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우위에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이 유출한 기름덩이를 온 나라 국민이 뒤집어쓰고 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이렇게 기적을 보도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기적을 보고 있습니다. 기름띠를 제거하기 위해 이름 없는 지원자들이 20만 명 넘게 방제 작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두 달이 걸릴 방제작업을 단 열흘 만에 해냈습니다. 우리는 그 기적의 현장에 서있습니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아모 5,24) 이러한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이루어가야 할 기적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