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이 비참한 가난 속에서 허덕이던 제정 러시아 시대가 배경으로 나타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작. 추리 소설에 가까운 수법으로 살인 사건을 전개시켜 나가서 스토오리의 흥미가 강하지만 심오한 사상을 통하여 인간 구원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어 소설 문학사상 단연코 불후의 세계적 명작으로 남게 되었다.
여기서 작가가 맨 먼저 제시하고 있는 것은 가난한 삶이 주는 비참한 인류의 모습과 함께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 같은 가난한 삶 속에서 라스콜리니코프라는 대학생이 등장한다. 가난때문에 잠시 대학을 중퇴한 그는 기묘한 이론을 갖고 실천에 옮긴다. 그는 인류를 범인과 비범인으로 구별하고 있다.
범인은 법률에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이며, 비범인은 법률을 만들고 새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들로서 법의 구속을 초월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니포레옹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서도 영웅으로 추대받고 있는 것은 그처럼 역사의 창조자이기 때문이며, 인류에 대한 그 같은 공헌을 하는 인물은 새로운 개혁과 역사적 발전을 위해서 법을 초월할 권리를 지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라스콜리니코프는 드디어 노파를 살해한다. 전당포를 열고 고리 대금업을 하는 노파는 이 사회에 아무런 이익도 주지 않는 불필요한 존재이며 가난하고 우수한 젊은이들이그 같은 돈으로 교육을 받고 사회를 위해서 일해 나간다면 그것이 훨씬 더 유익한 일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기생하는 이와 다름 없는 노파는 죽여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작자는 라스콜리니코프의 그 같은 주장이 얼마나 잘못 된 것인지를 절실하게 통감하도록 사건을 유도해 나가고 있다. 그는 빈틈없는 계획으로 노파를 살해하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여기에 우연성이 개재된다. 우연히 살인 현장을 목격한 리자베타를 보자 그녀마저 죽인다. 그리고 살인 후 라스콜리니코프는 극도의 심리적 불안으로 거의 의식을 잃고 자리에 눕게 된다.
작자는 이론적인 사상성에 앞서서 인간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짓밟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지를 여기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작자는 소오냐를 등장시키고 있다. 그녀에겐 그 같은 지성인의 논리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라자로의 부활]을 읽어주고 자수할 것을 권했던 소오냐는 오직 타인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밖에는 모른다. 비록 매춘부지만 그것은 굶주리는 가족을 위한 희생일 뿐만 아니라 라스콜리니코프가 시베리아로 가게 되었을 때 소오냐도 그 곳에 가서 모든 죄수들에게 최선을 다한 사랑을 베풀어 준다.
그녀는 그로 인해서 스스로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딴 모든 죄수들에게도 기쁨을 나누어 주고 있다. 라스코리니코프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그녀의 기독교적인 정신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 결과는 자기 자신의 삭막한 고독감을 자초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의 지적인 오만은 인류는 물론 자기 자신마저도 구원하는 데 아무 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소오냐의 사랑의 정신을 이해하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게 된다. 작자는 이로써 인류의 비참한 고통을 나타냄과 동시에 당시 제정 러시아 사회에서 유행하던 온갖 진보적인 사상이 지닌 허구성을 비판하고 숭고한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정신과 신에 대한 경건한 마음가짐 없이 인류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우종/덕성여대 교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죄와 벌'이 1860년대 '러시아통보'에 연재되는 동안 모스크바의 한 대학생은 작품 속 주인공이 범한 유사한 범죄를 저질렀다. 불안한 현실과 가난의 고통, 거기서 한 인텔리 청년이 추상적 이념의 골 속에서 악덕 전당포 주인을 살해하는 과정과 이후의 고뇌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당시 러시아 상황 속에서 더 이상 소설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의 문학은 그가 살던,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낡은 봉건질서의 몰락과 서구의 새로운 자유 사조의 물결이 러시아로 물밀 듯 밀려와 소용돌이치는 와중에서 성장했으며, 선천적으로 괴팍한 성격과 사형과 유형이 엇갈렸던 체험, 가난과 역경에 시달리는 생활 속에서 꽃을 피웠다. 나아가 예술적 통찰력과 실존주의적 발상, 그리고 사상적 격동기에 처해 있던 러시아의 사회적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 주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천재적인 독창성을 내포하고 있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다음과 같은 이론하에 살인을 저지른다. 만약 뉴턴 같은 비범한 사람이 전 인류에 공헌할만한 커다란 발견을 했을 때, 수십 명 또는 수천 명의 사람이 그 발견의 공표를 반대한다면, 뉴턴에겐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그 반대자들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작중에서 이 뉴턴은 나폴레옹으로 바뀌었지만, 그 근본 사상에는 변함이 없다. 나폴레옹은 수십만의 사람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영웅으로 받들었다. 이와 같은 영웅이나 권력자에게 사람들은 아무런 보상을 요구할 수 없다. 그들은 비범인(非凡人)이기 때문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을 나폴레옹과 같은 비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가난을 벗어나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이런 때에 인간 생활에 백해무익한 고리 대금 업자 노파를 죽이고, 그 돈을 빼앗아 목적을 달성한 후에 사회에 나아가 선행을 베푼다면, 그 정도의 작은 범죄는 용서받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계획을 짜서 완전 범죄에 가까운 범행을 저지른다. 그것은 고리 대금 업자 노파를 죽이는 일로, 생각보다 쉽게 실행된다. 그러나 양심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 것과는 달리 그는 심한 가책을 느끼게 된다. 살인을 저지른 이후부터 그의 생활에서 평온이라는 것은 사라지게 된다. 양심의 가책에서 오는 불면과 환상과 그를 미칠 지경으로 괴롭히며 그의 생활과 정신은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져 흔들린다. 이 때 그는 기독교 정신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소냐를 만나게 된다. 소냐는 신이 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도덕과 양심을 기준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죄값을 치르도록 라스콜리니코프를 인도한다. 라스콜리니코프 마침내 자수를 하고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 때에서야 비로소 라스콜리니코프가 나폴레옹과 같은 인간이 되려면 피도 눈물도 없는, 다시 말해 청동으로 만든 인간이 된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 전체 줄거리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사회적으로 무익한 존재인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그의 재물을 탈취하여 그것으로 사회적으로 유명한 청년이 그의 재능을 발휘하여 사회에 기여한다면, 그의 이러한 범죄 행위는 오히려 사회나 인류를 위하여 공헌하는 선행이 될 것이라는 공리주의를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에는 영웅 중심주의가 뒷받침되고 있었다. 초인 혹은 영웅은 평범한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법률, 도덕, 윤리 등)을 짓밟고 넘어서서 인류 진보를 위한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 낼 권리를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다. 뉴턴과 같은 비범한 천재가 인류를 위해 공헌할 수 있는 위대한 발견을 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방해했다면, 뉴턴은 감히 인류 복리를 위해 그들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주인공의 주장이다.
나폴레옹은 수없이 인간을 살육했지만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인류 문화를 파괴했는데도 불구하고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는 것이다.
"… 온 인류의 예를 들어 건설자나 입법자를 보더라도 태고적부터 오늘날까지 리쿠르고스, 솔로몬, 모하메드, 나폴레옹 같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 같이 새 법률을 반포하고 그 법률에 의해 종래 사회가 신봉해 오던 구법을 파괴한 그 하나만으로도 범죄자인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를 위해서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 처하면―무고한 피도 있고 옛 질서를 위해 흘린 비장한 피도 있지만―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이러한 그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하여 아무런 존재 가치도 없는 노파를 죽이게 된다. 그런데 선량한 그녀의 여동생까지 살해하는 이중 살인의 결과로, 그의 이념과 그것을 실현했던 현실과의 사이에는 커다란 괴리가 생긴다. 그는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와 불안과 공포, 그리고 밀어닥치는 고독감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가 자신을 나폴레옹으로 환상하면서 첫 발을 내딛던 순간에 이미 초인이 되기는커녕 자신도 노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냉혹한 이성과 인간성과의 갈등에 찢기며 번민과 고뇌 속을 방황하게 된다.
이 소설은 추상적인 이론이 인간에 가한 학대와 그것에 대한 인간성의 엄격한 보복의 과정을 형상화했으며, 이성을 초월한 인간성과 종교적 심리의 소중함을 말해 주고 있다. 인간성을 흐리게 하는 이러한 극단적인 자아의 주장을 부정하고, 결국 양심과 신의 섭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세기말의 경제 공황과 이념적 혼란이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 현실과 이념의 숲에서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고민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방황은 어쩌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지 모른다.
논점
라스콜리니코프는 스스로를 나폴레옹이라는 영웅과 비교하여 범죄를 자행한다. 그러나 양심이라는 것은 그를 그대로 놓아 두지 않는다. 결국 그는 그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자수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와 눈물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그의 본성은 양심의 견제를 이기지 못하고 자책했다는 것으로 선하다고만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가 이기지 못하는 양심을 제도화시킨 윤리라는 것은 인간 삶에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吳在國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 중의 하나며, 그의 최초의 장편소설인 《죄와 벌》은 1865년에 집필되었고, 다음해 1월부터 12월까지 <러시아 통보>지에 연재한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그의 후기작품 중의 대표작의 하나가 된다. 그는 이 작품의 구상을 이미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시작했으며, 그것을 집필하게 된 시기는 작가의 생애에서 가장 곤궁에 빠져 있던 때였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소설 창작도 시의 창작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여기엔 우선 정신적인 안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감옥에 처넣겠다는 협박을 받으며 채권자의 시달림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여러 가지 소설 형식을 시도했다. 일인칭에 의한 주인공의 고백, 법정에서의 진술 형식, 살인 후 8년만에 출옥하여 회상하는 형식으로 된 것, 그리고 끝으로 실현된 방법이 삼인칭의 현재의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그의 작품 《백치》《악령》《카라마조프네 형제들》과 함께 살인사건을 다룬 범죄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서, 때는 1860년대의 경제공황의 시기이며, 장소는 대도시 뻬쩨르부르그의 빈민가로 하고 있다. 거기 오층 집 지붕 밑 방에는 가정교사 자리를 잃고, 대학에도 다니지 못하는 가난한 학생 라스꼴리니꼬프가 살았다. 그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며, 그의 고향에는 노모가 망부의 보잘것없는 연금과 푼돈벌이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여동생은 어느 지주집 가정교사로 있었으나 그 집주인이 그녀를 좋아해서, 그 집을 쫓겨난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이러한 자기 가족을 구하고, 자기 자신도 이 지겨운 가난을 면하여, 대학도 마치고 출세의 길을 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돈이 필요했고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돈을 강탈했다. 그러나 의외로 노파의 여동생까지 순간적으로 살해하게 된다. 이 뜻밖의 제 2의 살인은 그의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했고, 악몽에 사로잡히게 된다. 여기서 복잡한 자기 내면의 싸움과 함께, 예심 판사와 경찰을 상대로 하는 외적, 심리적 싸움이 시작된다. 예심판사는 증거가 거의 없는 완전범죄의 이 사건의 범인에 대하여 심리전을 시도하면서 최후의 대면에서 범인의 자수를 권유한다. 한편 순결한 마음씨의 창녀 쏘냐로부터 그가 자수할 것을 또 권유받게 된다. 그는 드디어 예심판사의 논리적 영향과 쏘냐의 도덕적 감화에 굴복하여, 스스로 고통을 감수하고, 그 죄값을 치를 것을 결심하면서 시베리아 유형 길로 떠난다. 그를 뒤쫓아 간 쏘냐는 감옥 가까이에 살면서 그의 갱생의 길을 돕는다.
이러한 통속적인 소재가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해서 그의 천재적인 예술성에 의하여 불후의 명작으로 승화된 것은 그의 문학의 독특한 창의성과 깊은 예술적 통찰력에 있다고 하겠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처음 이 작품에서 사건의 유도를 한 인텔리 청년의 범죄적 동기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시작했다. 라스꼴리꼬프는 사회적으로 무익한 존재인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그의 재물을 탈취하여 그것으로 사회적으로 유망한 청년이 그의 재능을 발휘하여 사회에 기여한다면, 그의 이러한 범죄행위는 오히려 사회나 인류를 위하여 공헌하는 선행이 될 것이라는 공리주의적인 설정(設定)을 하게 된다.
이러한 논리에는 또 〈초인사상〉이 뒷받침을 하고 있었다. 그는 초인(비 범인)에게는 평범한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진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법률·도덕·윤리 따위―을 짓밟고 넘어서서 인류의 진보를 위한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낼 권리를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다. 뉴턴과 같은 비범한 천재가 인류를 위하여 공헌할 수 있는 위대한 발견을 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방해했다면, 뉴턴은 감히 인류의 복리를 위하여 그들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이 무신론자이며 전형적인 니힐리스트인 주인공의 주장이다. 나폴레옹과 같은 거인은 수없이 인간을 살육했지만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아무런 기여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류 문화를 파괴했는데도 불구하고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범한 인간에게는 어떠한 보상도 요구 할 수 없다는 것은 그가 단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로 모든 것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하여, 또 자기의 인간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하여 아무런 존재 가치도 없는 노파를 죽이게 된다. 그런데 선량한 그녀의 여동생까지 살해하는 이중살인의 결과로, 그의 이념과 그것을 실현했던 현실과의 사이에는 커다란 괴리가 생긴다. 그는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와 불안과 공포, 그리고 밀어닥치는 고독감에 사로잡히고 만다. 무엇보다도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은 현실과 자아, 특히 사랑하는 가족이나 주위의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단절을 초래한 사실이었다. 그가 자신을 나폴레옹으로 환상하면서 첫발을 내디딘 순간에 이미 초인이 되기는커녕 자신도 노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냉혹한 이성과 인간성과의 갈등에 찢기며 번 민과 오뇌 속을 방황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이 작품의 가장 심각한 문제성을 던져주는 부분이 전개된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이러한 사상적 파탄의 구원이 의외로 창부 쏘냐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녀는 가족의 호구지책으로 치욕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더럽히지 않은 마음의 순결함을 지녔으며, 그리스도적 사랑의 화신으로 묘사됐다. 한편 라스꼴리니꼬프의 〈제 2의 자아〉인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기존사회의 제약을 무시하는 데는 주인공과 같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그가 천성적인 악인이며, 자기 범행에 대한 조금의 후회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를 통해서 라스꼴리니꼬프는 자기 자신 속에 숨겨진 추악하고 비열한 일면을 찾음으로써 자수하게 된다. 그는〈거룩한 창부〉의 감화와 자기 내면의 갈등으로 인해서 마침내 자수하게 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지는 않았다. 영웅, 권력자 또는 초인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자기 이론의 오류는 인정치 않고, 단지 자기가 나폴레옹이 될 수가 없다는 것만 단정을 내린다.
이 소설은 결국 추상적인 이론이 인간에 가한 학대와 그것에 대한 인간성의 엄격한 보복의 과정을 형상화했으며, 이성을 초월한 인간성과 종교적 심리의 소중함을 말해 주고 있다. 인간성을 흐리게 하는 이러한 극단적인 자아의 주장을 부정하고, 결국 양심과 신의 섭리(攝理)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죄와 벌》은 이성과 이념에 대한 신성과 양심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그래서 강렬한 자아의식을 가진 주인공이 철저한 개인주의와 권력의지의 사상은 논리적으로 완벽했지만, 그 반면에 신과 양심에는 이론적 뒷받침이 거의 없었고, 주인공의 사상이 용두사미로 끝나게 된 점을 비난하는 평론가도 많았다. 사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심리적인 압박이나 양심의 가책이외에 더 정확한 반론과 부정을 찾으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는 자기 결론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무신론적 개인주의에 의한 합리주의 사상을 끝까지 추구함으로써 그것을 증명해 내고 만다. 결국 주인공의 패배와 파멸의 필요성을 묘사해 냄으로써 그 사상의 근본적인 오류를 설파했던 것이다.
《죄와 벌》이 잡지에 처음 연재되자 독서 계에는 폭발적인 선풍이 일게 되었으며, 특히 노파가 살해되는 장면이 게재될 무렵, 모스크바의 한 대학생이 이와 유사한 범죄를 저지른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어, 항간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깊은 예술적 통찰력에 감명을 크게 받기도 했다.
《죄와 벌》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경탄하리만큼 정확한 심리 묘사에 뛰어난 심리적 관념소설의 극치를 이룬 작품이며, 이만큼 극적인 스릴과 서스펜스가 깃들여 있는 작품도 다시없을 것이다.
작가는 1860년대의 러시아 사회의 사상적 혼란기에 청년층 속에 번진 사상적인 갈등과 도덕적 기준의 동요 가운데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고 어두운 현실에서 방황하는 데 착안하여 청년 라스꼴리니꼬프의 인간형을 창조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그의 문학의 대명사와도 같은 상징적 인물의 하나로서 우리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고 하겠다.
혼의 리얼리즘의 극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에프 톨스토이와 쌍벽을 이루는 19세기 러시아문학의 거성으로, 세계적인 문호의 한 사람으로 칭송 받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의 문제성과 독특한 그의 문학세계는 날이 갈수록 더욱더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의 예술적 통찰력과 실존주의적인 발상, 그리고 그의 기구한 생애와 사상적 격동기에 처해 있었던 러시아의 사회적 현실의 와중에서, 천재적인 독창력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에는 고질인 간질(癎疾)과 병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도박벽, 낭비와 무절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또한 시베리아 유형의 고난과 시련, 사형 대에서 느꼈던 공포와 죽음의 심연, 그러한 체험을 통한 그의 특유한 예술성은 그의 독자적인 수법에 의하여 작품 속에 깊고 울창한 숲과 웅대한 준봉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멀리서 또 가까이에서 새롭고 신비한 그의 문학세계를 조금씩 맛보고 있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0월 30일(러시아력) 모스크바의 마린스끼 빈민병원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미하일은 군의관 출신으로, 이 병원 의사였다. 그는 귀족이었지만, 생활은 보잘것없는 서민적인 것이었다. 그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성품을 가졌으며, 곧잘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야는 모스크바 상인의 딸로 상냥한 분이었으며 남달리 신앙심이 두터웠다. 작가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교회나 수도원을 다니던 기억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그가 열 살이 되던 해, 뚤라 현에 조그마한 영지를 사서, 매년 여름을 교외의 자연 속에서 지내게 됐다. 이것은 우울한 병원의 어두운 구석에서만 살던 그에게 그의 생애를 통하여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추억을 남겼으며, 농민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깊이 간직하게 되었다는 것이 작가의 전기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의 만년에 잡지 〈작가의 일기〉속에 실린 여러 편의 소품들은 그 당시의 기억을 소재로 하고 있었다.
열세 살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형 미하일과 함께 모스크바의 체르마크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 무렵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많은 고전들을 읽었고, 그 중에서도 스코트, 주꼬프스끼, 푸슈킨의 작품들을 주로 탐독했다.
열 여섯 살 때, 그는 처음으로 인생의 슬픔을 처절하게 느끼게 되었다. 이 해에 그는 어머니를 잃었고, 존경하던 러시아 시인 푸슈킨이 결투로 죽은 사실이 그를 미칠 듯한 슬픔에 잠기게 했다.
이듬해 그는 아버지의 강요로 뻬쩨르부르그 육군 공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문학에 열중하고 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전통적으로 엄격한 군대 규율에 싫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지가 않아서 별로 부자간의 서신 연락도 없었다.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혼자 방에 들어앉아서 푸슈킨, 고골리, 쉴러, 스코트, 발자크, 조르즈 상두 등을 읽으며 문학세계에 탐닉하는 일밖엔 없었던 것이다.
고골리를 제외한 러시아 문학에서 도스토예프스키만큼 리얼리즘에 짙은 로맨티시즘의 그림자를 남긴 작가도 없을 것이며, 이러한 경향은 이 시기부터 형성되고 있었다.
어머니의 별세 후 그의 아버지는 영지에 은거하면서 농노들의 원한을 사게 되어 그들에게 참살되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사건은 감수성이 강한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으며, 그의 만년의 대작 《까라마조프네 형제들》의 살인 소재가 되었다. 자기 영지의 사랑하던 농노들이 이러한 잔학한 범죄를 저질렀던 사실은 도스토예프스키로 하여금 그의 문학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인 작중 인물의 이중적 성격, 즉 인간 내부에 잠재하고 있는 신과 악마 (선과 악)의 대립되는 모순을 파헤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창작의 주제로 삼게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학교를 마친 뒤 장교로 임관되어 공병학교에 남게 되었으나, 근무에는 취미와 의욕이 별로 없었고, 문학에 대한 열망이 더해갈 뿐이었다. 결국 그는 가난과 불안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군에서 제대를 한 뒤 창작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이 무렵 그의 지병인 간질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약간의 발작을 일으켜, 우울증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다음해 그의 처녀작인 《가난한 사람들》을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그의 학교시절의 동창이며 일찍 문단에 데뷔했던 그리고로비치가 읽고 감동하여 발표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시인 네끄라쏘프는 이 원고를 읽고, 너무나 감동되어 “새로운 고골리가 나타났다!”고 외치면서, 당시 문단을 주도하던 비평가 벨린스끼에게로 전하게 되었다. 그도 작가의 재능을 극찬하면서 “자기의 재능을 귀중하게 간직하고 꾸준히 재능에 충실하면 대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삼십 년 뒤, 이때를 회상하면서 “내 생애에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었다. 이 중편소설은 다음해 1월에 네끄라쏘프가 주간 하는 <뻬제르부르그 문집>에 수록되어 독서계의 일대 선풍을 일으켰으며, 도스토예프스키의 화려한 데뷔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 최초의 성공으로 그는 사교계에 출입하면서 투르게네프와 같은 저명한 작가들과 교우를 가지며, 또한 계속 신작을 발표함으로써 활기찬 전도 유망한 문인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갑작스러운 성공은, 경륜이 얕고 신경질이 심한 청년작가에게 좋은 결과만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자만과 자부심을 가지게 했고, 그것은 자연히 동료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드디어 벨린스끼와의 사이도 나빠지고, 잡지사에서 빌린 돈으로 도박과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뒤 4년 동안에 그는 《분신》《쁘로하르찐 씨》 《주부》《백야》와 같은 수십 편의 중·장편소설을 발표했지만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했고, 도리어 처녀작 이후에 나타난 병적 심리에 대한 흥미나 신비주의에 만족은 고사하고, 심한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 러시아 인테리 청년들 사이에는 서구의 공상적 사회주의의 새로운 사조가 스며들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뻬뜨라셉스끼가 중심이 되어있는 서클에 참가하게 됐다. 당시의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자유사상가에 대한 탄압은 극심하였으며, 도스토예프스키를 포함한 서클의 동료들이 체포되어 뻬뜨로 빠블롭스끄 요새 감옥에 8개월간 감금됐다가, 그해 12월에 21명의 동료와 함께 사형이 선고되어 형장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이것은 황제가 꾸민 참혹한 연극이었다는 것이 뒤에 알려졌다. 처음 세 사람이 기둥에 묶여 사형집행 병사들이 총을 들어올린 순간, 황제의 칙사가 달려와 사형을 사면하고, 유형으로 감형한다는 새로운 선고가 내려졌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겪은 몸서리칠 만한 작가의 체험은 뒤에 《작가의 일기》나 《백치》에 묘사되고 있다.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을 옴스끄 감옥에서 보내면서, 얼굴에 낙인이 찍힌 죄수나 살인범들과 함께 어울린 고통스러웠던 생활을《죽음의 집의 기록》에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제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이라고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참다운 인간적인 가치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형지에서 신경의 질환과 간질병이 심해지고, 정신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는 성서를 읽으며 종교적인 구원을 기다렸으며, 형기를 끝마친 그는 다시 병졸로 시베리아 국경 수비대에서 또 4년을 복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학교 교사였던 마리야 드미뜨리예브나 이사예바와 첫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녀는 아이가 있는 기혼녀였으며, 결혼 전까지의 그들의 열애는 많은 고난을 겪게 했다. 그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기 희생적 행동의 연유를 이런 곳에서도 찾을 수 있겠다.
그후 십 년만에 도스토예프스키는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무렵 수도 뻬쩨르부르그에는 개혁에 부푼 기대가 팽배하여 문단에 복귀한 그는 맹활약을 하기 시작했다. 형 미하일과 공동으로 잡지 <시대>지를 창간하고, 《아저씨의 꿈》《학대받는 사람들》《죽음의 집의 기록》등 병역 근무 중에 집필하거나 구상했던 작품들을 계속 발표하여 문단에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죽음의 집의 기록》은 시베리아 옥중의 체험을 서술한 것으로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시기의 그의 사생활은 암담했었다. 아내 마리야의 지병인 폐병은 날로 심해졌으며, 그들의 불화는 더욱 심해만 갔다. 작가 자신도 지나친 과로 때문에 건강이 나빠져서, 1862년과 다음해 두 번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의 서구여행을 떠나게 되며, <시대>에 게재된 스뜨라호프의 폴란드 문제에 관한 논문 <운명적인 문제>가 말썽이 되어 당국의 발행정지 처분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그는 지성적인 신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아뽈리나야 수슬로바를 사랑하고 있었고, 외국 여행중인 그녀를 찾아 떠나게 되며, 여행 중 그는 여자와 도박에 열중한 나머지 경제적인 곤경에 처하게 된다. 뒤에 소설 《도박자》는 이 때의 체험이 소재가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서구 여행 중에 어려서부터 동경하던 서구의 여러 나라를 순방하면서 오히려 환멸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서구의 문화도, 파리의 이채롭고 상쾌한 분위기도, 독일의 음악이나, 알프스의 장관, 스웨덴의 미소짓는 듯한 아름다운 호수, 피렌체의 미술품도 그에게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했다. 그는 서구문화를 부르주아적이며 퇴폐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오래지 않아 무너질 것이라고 확언하기도 했다. 그가 밀라노에서 보낸 편지에는 "나는 여기서 둔해지고 편협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와의 접촉도 끊겨져 갑니다. 나에게는 러시아의 공기와 러시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는 점차 슬라브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면서 러시아인의 뛰어난 독창성에 대한 신념을 굳히게 되었다.
여행에서 귀국하여, 발행이 금지됐던 <시대>지 대신으로 <세기>지를 발행하면서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년)를 지상에 연재했다.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예술활동에 있어서의 하나의 커다란 전기가 되는 아주 중요한 작품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을 경계로 해서 그 전기의 작품에서 보여주던 가난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그들의 마음속에 간직된 인간성의 발견이라는 인도주의 테두리를 벗어나, 보다 폭넓은 사회·윤리·도덕·철학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독자적인 사색의 경지로 확대해 나갔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인간의 의식이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높은 곳으로부터 깊은 심연 속에 이르기까지 깊이 추구함으로써 새로운 제 2의 우주를 창조해 갔으며, 《죄와 벌》에서 《까라마조프네 형제들》에 이르는 일련의 위대한 사색소설을 창작하기에 이른다.
작가의 생애에서 가장 우울한 시기는 아내 마리야의 죽음과 형 미하일의 급사, 그리고 오랜 문우이며 잡지의 유력한 동인이었던 그리고로비치의 이따른 죽음이 있었던 때이다. 잡지의 폐간은 불가피했으며 그로 인한 막대한 부채와 형이 남기고 떠난 많은 가족의 부양책임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는 이러한 곤경을 타개하기 위해 자기의 모든 저작의 판권을 출판인 스쩰롭스끼에게 3천 루우불에 팔아버렸을 뿐만 아니라, 일정 기한부로 신작 장편을 쓸 것을 아울러 약속하게 되었다. 만일 이러한 약속이 지켜지지 못할 경우, 장래의 모든 그의 저작권까지도 넘겨주어야 하는 가혹한 강요를 감수해야 했다. 그는 부득이 여자 속기사를 고용하여 구술 필기하는 비상수단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젊은 속기사 안나 스니뜨끼나를 다음해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으며, 그녀의 속기로 《도박자》를 기한 내에 완성할 수 있었고, 이 해에 《죄와 벌》이 발표되었다.
신혼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채권자들의 성화나 부양해야 할 친척들의 무거운 짐을 피하고 창작활동에 주력키 위하여 아내와 같이 다시 서구 여행의 길에 올랐다. 그들은 그 뒤 4년간을 각지로 전전하면서 장편 《백치》《악령》그리고 중편 《영원한 남편》을 완성했다. 그러나 이 여행 중에도 그의 도박벽과 간질의 발작, 궁핍한 생활은 계속되었지만, 그의 영리하고 성실한 아내의 조력에 의하려 점차 가정의 경제 생활이 안정을 찾게 되었다. 외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아내가 계획했던 자비 출판의 저작 집을 간행하고, 그 것이 적중됨으로써 부채의 청산은 물론 별장까지 가지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성격상의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는 작가였으며, 자신도 자기 결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허영심과 시기심이 많았고, 이기적이며 남을 곧잘 의심하는 편협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그의 작품에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알렉쎄이 카라마조프나 성인과 같은 조씨마 신부를 창조해냈다. 또한 그는 인정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거지나 친구가 돈을 달라는 것을 거절하지 못했고, 자신이 곤궁에 처하고 있을 때에도 돈을 긁어모아 형의 가족과 주위의 매달린 친척에게 화도 내지 않고 주기도 했다. 그의 공식 전기를 썼던 친구인 스뜨라호프는 이렇게 썼다.
"……저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착한 사람이나 행복한 사람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는 질이 좋지 못하고 타락하고 시기에 가득 찬 인간이었습니다. 일생을 두고 정욕의 불길에 농락되었으나. 만일 그가 지성이 부족하거나 그처럼 심술궂지 못했다면, 오히려 우스꽝스럽고 보잘것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1876년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는 개인잡지 <작가의 일기>를 간행하기 시작했다. 이 잡지는 예상외로 독자의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재판, 삼판의 증판 사태까지 일어났다. 잡지에는 주로 사회비평을 써왔으며 많은 소품과 수상을 발표했다. 그의 사상적 전환은 1861년 농노해방 이후 자유주의적 사상가들이 점차 퇴조되어 우경화하였으며, 새로운 급진적인 청년층이 형성되기에 이르렀으나,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전자에 속하고 있었다. 그는 급진주의자들을 맹렬히 공격하면서 그들이 제시하는 러시아의 갱생의 길과 처참한 국민에 대한 구제책에 대하여 "고난을 이상화하고 그 속에서 살길을 찾아야 하며, 개혁 대신에 종교적인 위안, 신비로운 위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작가의 일기>를 통하여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서신을 받고 그들의 질의에 해답을 줌으로써 그는 차츰 인생의 교사로서 또 지성인의 지도자로서 추앙되기에 이른다. 더욱이 188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푸슈킨 동상 제막식에서 푸슈킨을 찬미하고, 러시아 문화와 역사적 운명에 대해 논술한 그의 연설은 만장의 청중들에게 열광적인 감격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마치 도스토예프스키를 위한 축제가 되어 버렸다.
그 해 가을에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대작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을 완성하였으며, 다음해 1881년 60세기를 일기로 영면하고 말았다. 그의 장례식은 문학자로서는 거의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성대한 것이었으며, 수만의 군중들이 거리를 뒤덮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세계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세계는 일종의 독특한 세계라 말할 수 있겠다. 그의 모든 작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소재인 삶의 모습을 외면적으로 묘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특유한 프리즘에 의하여 분광하여 재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리얼한 현실과 추상적인 내면세계가 교착되는 새로운 세계를 이룩하고 있으며, 그는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하고 있는 무한한 관념을 그의 독특한 수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초인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될 수 있다는 관념을 가지고 살인을 범하게 했으며, 《악령》의 끼릴 로프는 자살에 의하여 자기를 극복할 수 있고, 신이 될 수 있다는 사상에서 그를 자살케 한다. 이러한 작중인물은 그의 독특한 관념의 구상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나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의 이 반 카라마조프는 이지와 합리주의의 구상이며, 스비드리가일로프와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육욕주의를, 《백치》의 무이쉬낀과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의 알렉세이는 그리스도적인 사랑으로 구상화되고 있다. 이러한 인물들 사이에 일어나는 증오와 사랑의 이합, 갈등들은 바꾸어 말해서 관념이나 감정의 움직임이라 하겠다.
그는 작품의 작중 인물들을 발자크나 디킨즈와 같이 다양한 인물들을 창조하지는 못했고, 소수의 유사한 인물을 여러 작품에서 되풀이하여 등장시켰다는 비난도 받고 있기는 하다. 물론 그의 작품들의 등장 인물을 몇 개의 갈래로 나누어 볼 수도 있으며, 실존의 모델에 결부시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그의 작중 인물들이 단순한 객관적인 존재로서 설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은 깊은 내면세계, 잠재된 다양한 인간성의 표현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작중 인물들이 성격의 다면성을 지니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그것은 오히려 변화무쌍한 인간심리의 묘사에 충실한 나머지 독자로 하여금 금방 친숙할 수 있는 인물로 느껴지지 않고 혼란한 감을 주기도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부조리한 심리 탓으로 보아야 하겠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솔직한 심리묘사의 탁월한 점이라 할 수 있으며 그의 문학이 추구한 그의 독창성의 가장 주요한 요소가 되었다.
또 그의 소설에서 전개되는 사건이 소설적인 심리 묘사에 의하지 않고, 극적인 대화를 통해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에서 대화가 장황하게 길어지는 것은 복잡한 심리 묘사나 심오한 감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움직이는 사건을 대화를 통하여 독자의 마음속으로 유인하여 감동을 휘몰아 일으키는 독자적 수법이라 하겠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푸슈킨,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같은 귀족적 문학 수법과 다른 특징의 하나는 그의 작품의 도시성에 있다. 그들의 문학 속에 묘사된 인물과 성격, 자연 묘사와 시화된 목가적인 풍경을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는 찾지 못한다. 그의 작품에는 자연 묘사나 세련된 인물의 용모나 외관의 묘사 따위는 없다. 그의 작품은 그가 살던 어두운 도시, 찢긴 생활, 소용돌이치는 사건처럼 그의 소재도 역시 숨막히는 생활과 흥분·신음·초조의 어두운 도시의 뒷골목으로 끌고 돌아간다. 그리고 이런 도시 환경 속에서 짓누르고 있는 중압에서 벗어나려는 공상의 세계로 나래를 펼친다. 다시 말하면 현실 생활에서 실컷 학대받는 그들이 환상의 세계에서 비로소 자아와 자유를 찾기 위하여 몸부림치게 된다. 이러한 도시인의 심리적 경향은 그이 심리주의의 근본이 되어 그의 문학의 독특한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창작의 주제와 수법은 작품 구성에서도 천부의 재능을 보였다. 그의 일생을 통해 단 한 편의 희곡도 없지만, 작품 구성에 극적 다이너미즘이 유효적절하게 활용됨으로써 긴장감을 고취하고 있다.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를 살해하는 장면의 묘사나, 이반 까라마조프가 자기의 고민하는 하는 양심과 대면하는 장면은 어느 작품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독자를 감동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보통 그의 작품에는 몇 개의 병행하는 줄거리가 있으며, 그것들이 여러 겹으로 중첩되어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또 그 하나하나에 각각 사건이나 논쟁, 생각이나 대화가 배치되고, 클라이맥스가 있으며, 한 줄거리의 긴장된 장면에 또 다른 줄거리가 그것을 이어가는 드릴을 느낄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은 그가 살던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낡은 봉건 질서의 몰락과 서구의 새로운 자유 사조의 물결이 러시아로 물밀 듯이 밀려와 소용돌이치는 와중에서 성장했으며, 선척적으로 괴팍한 성격과 사형과 유형이 엇갈리던 체험, 생지옥과 같은 유형지의 생활, 가난과 역경에 시달리는 생활 속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퇴비를 듬뿍 준 나무의 과일이 더 단맛이 있듯이,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에 성숙과 향기를 불어넣었으며, 그를 세계적 문호의 한 사람으로 만든 독창성의 원천은 그가 처했던 여건과 그가 지닌 좋은 소양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나쁜 소양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이 뿌리박은 대지에는 역시 그가 굳건히 설 수 있는 러시아 문학의 유산이 있었다. 그의 예술적 온상은 고골리였다. 고골리는 레르몬또프와 푸슈킨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기의 독자적 문학의 영역을 이룩했다. 푸슈킨의 아포리즘적 주류에서 벗어나 고골리의 반역적 고민의 예술이 형성되었으며, 이 지류가 도스토예프스키에 이르러 암석을 부수려는 격류가 되어, 소용돌이치는 깊은 심연으로 된 것이다. 고골리는 만년에 예술과 종교의 일치를 시도하여 고민과 고행을 감수했으며, 이 자기분열과 이중성이 곧 도스토예프스키의 예술을 뒷받침하였으나, 그는 선배들이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영역까지 깊이 파 내려갔다. 이렇게 도스토예프스키의 독창적인 문학세계가 형성되면서 그의 모습이 거대한 산맥고도 같이 우뚝 솟아올랐던 것이다.
오늘도 그의 작품 속에는 아직도 다 파헤치지 못한, 날이 갈수록 더욱 많은 매장량이 추정되는 무진장한 광맥이 남아 있다. 그 광맥 속에서 메레즈곱스끼는 종교를 찾았고, 셰스또프는 불합리를, 프로이트는 상호병존심리를, 앙드레 지드는 무상참여를, 헤세는 아시아적 철학을, 카뮈는 부조리를 파내어 자기 문학의 초석으로 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