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 박영선, 조주석 박영선 목사 그의 삶과 신앙 설교를 말하다
은혜의 설교자 박영선 목사,
들어가는 말
......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빚어 가시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이에게서는 긍정과 꿈, 성실과 헌신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면, 또 다른 이에게서는 부정과 의혹, 갈등과 절망의 몸부림을 통해서 당신의 목적을 이루어 내십니다. 저는 후자에 속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이제까지 한국교회의 신앙적 평가로는 점수를 얻을 수 없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길도 하나님의 은혜의 길이었음을 지나온 삶을 통해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깊으심이 어떠한 것인지 실감하게 됩니다. 부요함과 승리의 길로 가든 곤고함과 의혹의 길로 가든,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도 어떤 운명의 장난도 아닌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신비로우심에 속하는 문제였습니다. 그 모든 길은 결국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입니다.
저는 이 책이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는 너비와 깊이에 대한 증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분명히 제가 커 온 당대 한국교회의 보편적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배운 신앙은 확신과 모범의 길이었으나, 저는 고민하고 생각하는 길로 인도되었습니다. 거부하고 의심하는 것 역시 신앙에서 중요한 과정이며 내용임을 깨닫습니다. 그런 일 역시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과 신자라는 존재가 우리의 생각보다 크고 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분명한 신앙뿐 아니라 모호함과 의혹 또한 하나님이 통치하시며 자신을 알리시는 영역이었습니다. 고민과 고통, 절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더 깊은 신앙의 내용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목차
들어가는 말_박영선
추천의 글
"나의 지음(知音) 박영선 목사는 평생 하나님의 부재(不在,deus absconditus)로 시달려 왔다. 그의 선조들은 순교에서, 선배들은 부흥에서, 친구들은 구원의 확신에서, 동료들은 전도와 선교에서 하나님의 임재(臨在,deus revelatus)를 체험했지만, 그만은 부흥도 확신도, 그 어떤 외적 사역도 임재에 대한 설득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영적인 실재를 부인할 수는 없었다. 성경의 욥처럼,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어둠에서 출발하며, 친구들의 의(義)를 부인하는 데악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진정한 임재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친구들이 주장하는 임재에는 설복되지 않았다. 자신의 의뿐 아니라, 모든 의를 부인하는 것 같았다. 육십 평생을 거의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이제 와서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일하신다"며 너스레를 떤다. 그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경험한 부재가 임재였음을 비로소 발견했다. 어둠 속에 살았다고 생각했지만,그의 하나님에겐 어둠이나 빛은 같은것이었다. 그가 경험한 부재는 시간 속에서 단지 연기된 임재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제 그는 부재 속의 임재를, 혹은 부재인 임재를 편안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비로소 모든 의(義)를 자신이 의와 뒤섞지는 않지만 수용한다. 그래서 그는 편해졌다. 그가 편해지니, 나도 편해진다. 아마 온세상도 편해질 것이다. 이제 와서 되돌아보니, 박영선은 영성가(靈性家)였다. 그렇지만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정반대로 모든 유비를 거부하는 무념적(無念的, apopathic) 영성에서 출발하여, 유념적(有念的, katapathic) 영성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그는 성화를 평생의 과제로 삼았는데, 목회의 정점(定點)에서 그 숙제를 끝냈다고 하니,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박영선 목사의 독특한 설교를 빚어낸 영혼의 깊은 갈등과 고뇌와 몸부림의 속내가 드러나는 진솔한 고백을 듣게 된다. 그는 자신의 설교를 신앙과 지식의 균형을 전혀 갖추지 못한 시대의 산물이며, 선진들의 신앙에 '뭔하 하나 더한 몫'에 불과한 것이라고 스스로 평한다. 그러나 그 몫은 '하면된다'는 메시지가 전황하던 한국교회에 '아무리 해도 안 되는'가련한 실패자들의 대변인이 되어 그들을 위로하고 부축해 준 상처받은 치유저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박영선 목사는 의호과 갈등을 통해서 아름답게 연단된 신앙인의 삶과 해체로 들어가 정통으로 나오는 도전적 셜교를 통해서 전통 교회에 식상한 그리스도인들로 복음의 참신한 맛을 보게 해주십니다. 이 책을 통해서, 아픔을 통한 성숙과 해체를 통한 건설을 새롭게 보게 될 것입니다." - 권성수(대구동신교회 담임목사)
박영선
본문 중에서
* 어떤 이에게서는 긍정과 꿈, 성실과 헌신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면, 다른이에게서는 부정과 의혹, 갈등과 절망의 몸부림을 통해서 당신의 목적을 이루어 내십니다. ...너무나 쉽게 정의된 기독교 신앙과 인생에 대한 기준들 밖에 서서 서성거려 온 적지 않은 신앙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이 책을 내놓습니다.
신앙의 성숙을 다루는 그의 성화 설교에는 여러가지 내용이 들어있다. 신앙인에게는 의심과 갈등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는 것인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실패할 때가 더 많은데 그 실패란 무엇을 말하는것인가? 그 실패란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인가?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데 그 은혜가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인가? 그는 이십년이 넘는 설교 사역을 통해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제시해 오고 있다......
조주석 어떤 책인데요? 박영선 '마더 테레사, 나의 빛이 되어라'라는 책입니다. 그 사람은 극심하게 하나님과 단절을 느꼈어요 조주석 자서전인가요? 박영선 자서전 아니에요. 나중에 그 사람 죽은 후에 그의 편지를 공개한겁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 같은 사람이 여기도 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평생 그에게 답을 안 주시는 겁니다. 이 사람이 하도 하나님과의 단절감이 커서, 신문에도 났듯이, 기도도 못하겠고 믿음도 없고 기쁨도 없었어요. 가톨릭의 좋은 점은 하나의 교회가 전통으로 남아 있어서 누적된 경험과 지혜가 많다는 겁니다. 주임신부나 대주교가 한 위로가 뭐냐면 '당신만 그런게 아니라 성자들 중에도 그랬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위로합니다. 이 사람이 무엇으로 신앙을 확인하냐면 '자기 신앙을 회의하지만 그럴지라도 하나님에 대해 갈망은 멈출 수 없다'에요. 조주석 정말로 실존의 맨 밑바닥으로 내려갔군요. 박영선 이 사람이 자신의 편지를 영적으로 아주 가까운 사람들한테만 해요. 지도자들한테만 써요. 그리고 나중에 죽기 전에 내 편지를 다 없애 달라고 부탁해요. 누가 보고 오해할까봐 없애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아니다' 생각하고 남긴 겁니다. 그 사람들이 훌륭한 겁니다. 이런게 다 필요합니다. 조주석 목사님은 밝은 쪽보다는 어두운 쪽에 서서 신앙생활을 점검해 오신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설교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박영선 ...율법은 다른게 아니라 '하면 된다'입니다. 그리스도의 필요성이 없어집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자신의 종교성과 도덕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밖에는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아요. '자신의 절망을 확인한 사람만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은혜를 제대로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적으로 매우 깊은 경지에 있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이 놀이 문화도 제대로 소화 못해요. 기술적으로 말고 인격적으로 멋있게 못 져요. 바둑 같은 걸 두면 어떻게 되지요? 바둑을 두면서 왜 자존심 상하는 줄 아세요? 그게 지능 싸움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머리가 나빠서 지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 바둑을 두고 지고나서 '잘뒀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이 말을 못해요. 그걸 가르치자는 겁니다. 아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게 얼마나 크고 넉넉한 것인데, 그게 잘 안나와요. 결사각오라는 치열함은 확보했지만, 그 넉넉함이라는 것은 전혀 훈련이 안되어 있어요.... 내가 '하나님의 열심'을 쓴 이유가 뭔데요. 밤낮 설교가 '아브라함은 백 살에 얻은 이삭을 바쳤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하나님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난 그 두가지 설교를 백 번도 넘게 들었어요. 내가 던진 질문은 이겁니다. '나도 그러고 싶습니다. 그런데 난 안 됩니다.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그 믿음, 그 실천할 믿음을 갖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답을 안주시는 겁니다. 밤중에 일어나서 기도도 해보고 기도원도 가보고 별거 다 해봤는데 안되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사적으로 가장 진실하게 추적한 사람들은 거의 다 이단으로 넘어갔어요. 주류가 아니었단 뜻입니다. 신학적으로 어느게 옳으냐는 굉장히 애매해요. 내가 신학적으로 분명하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나는 개혁신앙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점 흠이 없는 신학과 논리를 만들려고 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제한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논리를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전에 박정희 정권 때 고속도로 뚫고 제철소 만들겠다고 할 때 다 웃었어요. 그런데 그거 다 필요해요.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었다는 겁니다. 좀 더 문화적인, 정신적인 측면의 투자가 아쉬웠다는 겁니다. 이제 지나와서 그걸 배운겁니다. 우리 앞의 선배들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데, 어떻게 평생을 그렇게 신앙인답게 사셨는지 놀랍거든요.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거의 순교자적 자세로 살아오셨잖아요. 그들이 무식하다 유식하다고 이야기 하는 건 안됩니다......
조주석 목사님은 우리가 나누는 이런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가질 것 같습니까? 박영선 나는 이런 생각이 있어요. 조 목사님이나 내가 관심을 갖는 건 소수의 사람만의 일이에요. 이걸 다수화하려고 의도하지 말자고요. 우리의 이야기들이 모두에게 알려져서 한국교회가 너그러워지고 서로를 이해하겠다는건 꿈도 꾸지 말자고요. 이 책을 읽으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이 책은 누가 봐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절대 안 봐요. 그걸 각오하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릴 어떻게 인도했나 보자고요. 조 목사님이나 나나 모두 실패자로 인도했어요. 우리는 '이게 아니다'라고 하는데 전 생애를 쓴 사람들이에요. 일하는 사람들, 곧 주류 세력들은 평생을 쓰임 받는 사람이니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군가에게는 이건 아니구나 하는 것으로 전 생애를 소위 허비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우리 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이해하는 걸 장악하려고 합니다. 그냥 파편적으로 놔 둬야 해요. 이 사람은 이런 부분도 있고, 이런 말도 했고, 이렇게도 살았다. 등, ... 우리 모두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지식인으로 한 시대에 대해서 책임을 가지면 어떻게 되느냐 할 때 그 다음에는 욕심을 내게 돼요. '내가 이야기하고 내가 진심을 기울인 것은 좀 따라와 다오' 그렇게 되기 쉬워요. 그런데 그렇게 돼서는 안 돼요.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거든요......
'기독교인들은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다'라는 것에 대해서 저는 긍정합니다. 인간이 가지는 꿈과 비교할 수 없는 신적 약속 안에 있는 자의 가능성, 열려있는 영광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정당한 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구체적으로 자기가 사는 시대와 환경에 연결되어 있는 것도 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비전을 인간적인 의욕이나 욕심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비전 성취를 통해 자기를 증명하려 하거나 기독교 신앙을 보이는 증거로 제시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때 수단화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나의 항복을 받아 내는 것이 나의 인생이고 이를 아는 게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신앙 자세요 비전입니다. '나를 어디에 어떻게 보내도 나는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한다는 것을 기독교 신앙이 약속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살 것이다'라고 하는 모든 꿈이 비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아니라 세상 앞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실재하시고 지금 역사하신다는걸 세상적으로, 즉 보이는 것으로 증명하고자 합니다. 저는 그 문제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하는 겁니다......
조주석 교회 안에서 신앙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잖아요. 남을 가르치려 드는 율법 선생이 되려고 하는 것 말입니다. 박영선 율법은 바울 사도의 표현에 따르면 돌비에 쓴, 의문에 속한, 돌에 쓴 글에 불과합니다. 예수와 대조할 때 율법은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거나, 무슨 인격을 가지거나 도울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법칙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면 그것을 지켜야 될 사람이 어디까지 지키느냐에 달린 문제이지, 율법이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거나 방해를 하는게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는 우리를 돕습니다. '예수를 믿어라'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게 간섭을 하시죠. 그러니까 율법의 선생이 된다는 것은 마우 도움이 되지 않고 율법을 들이대기만 하는 겁니다. 그것을 위해서 본인이 희생을 하거나 섬기거나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지는 않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도 하시니까요. 그래서 막 뭐라고 하고 싶지 않아졌어요. 그냥 내 몫만 할 작정입니다......
저도 오늘 이야기 하는 가운데 (한국교회에 대한) 많은 불만과 걱정을 나타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실패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일 겁니다. 우려를 해야 마땅하고 위험하다고 진단해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기이하신 인도하심이 중단된 시기라고 어떻게 감히 말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결론적으로는 어?든 믿음을 가지고 낙관론을 펴야 옳습니다......
박영선: 밖에서 나를 볼 때는 유능한 사람으로 볼 겁니다. 특히 설교에 관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난 전혀 그렇지 않아요. 내 설교는 거의 절규였어요.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기독교가 너무 값싸게 소개되어서 악썼다고 했잖아요. 그때도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이해해서 그런 게 아니라 최소한 악쓰는 것이요 절규요 성질 부리기였습니다. 이렇게는 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경험시키고 증언시키는 부분은 설교에 있습니다. 내가 항상 이야기하듯이, 무엇을 하자든가 할 수 있다든가 하는 쪽은 나한테는 없어요. 쭉 듣다시피 난 언제나 실패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안 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럼, 기독교에서 소망이란 뭡니까? 기독교에서 소망이란 자신을 근거로 해서만 자신과 운명을 이해하지 않기로 하는 것 아닙니까? 구체적으로 ‘천국을 간다’, ‘승리할 것이다’, 성공할 것이다‘, 이렇게 붙이는 것은 싫어요. 그건 너무 단순한 차원으로 내려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기독교의 소망은 ’나‘라는 존재와 운명에 대해서 내 책임과 내 능력의 범위를 벗어난다고 믿는 겁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소망이란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을 근거로 해서 차곡차곡 뭔가 쌓아서 그것의 결과로 미래의 영광이 내게 오는 게 아니니 인과법칙을 벗어나는 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보면 사실 여러 가지 일로 신앙인답지 않게 사는 까닭에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절망 가운데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붙들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심으로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믿음을 알게 해주십니다. 그러니 믿음 안에 있을 때 우리가 만나는 절망이란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소망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지 않겠어요? 우리에게 주신 소망이라는 것은 사실 영광이요 승리요 자랑스러운 영광입니다. 우리의 인과관계 확인법으로 한다면 지금의 나로부터 저 약속된 지점까지 상승곡선을 그려야 할 겁니다. 물론 우리의 인생 속에서 들쭉날쭉 하는 게 있다 하더라도, 업 다운이 있다 하더라도 상승곡선을 그려야 하는 데 그게 없더라는 겁니다.
신학적으로 어느 게 옳으냐는 굉장히 애매해요. 내가 신학적으로 분명하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나는 개혁신앙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점 흠이 없는 신학과 논리를 만들려고 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제한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논리를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중에 우리 것이 제일 낫습니다. 왜 낫냐고 물으면 우리가 여기서 커서 그래요. 다른 것과 비교해 가지고 우리가 더 낫다가 아니에요. 일차적으로 우리가 여기서 커서 그런 겁니다. 그건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겁니다. 나는 우리 신학이 좋은데, 하나님 주권 사상이라는 것과 내가 일치하는 겁니다. 하나님 주권 사상을 놓고 인간의 책임이 0.1퍼센트라도 들어가 있으면, 난 신앙생활을 못하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다른 신학 논리를 갖고 있는 쪽이라고 해서 우리보다 신앙이 못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테레사 수녀의 도움을 받았다”라고 하면 개신교에서는 감탄하지는 않을 겁니다. 또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란 책은 감리교 목사가 썼습니다. 얼마나 잘 썼어요. 우리와는 다른 신학을 가졌어도 말입니다. 신앙생활 속에서나 설교에서나 하나님은 자존심을 버리고 우리한테 오십니다. 기복적 요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처럼 설교하는 건 싫고 자존심 상할 수 있지만, 거기에 구원이 없다고 말 못합니다. “그건 영 아니다” 싶은 설교로 비춰질까 창피해 자존심이 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용섭 교수가 설교 비평한 건 가장 크게는 자존심이 걸린 겁니다. 본인은 자신의 설교 비평 작업을 거룩한 분노라고 했어요. 그 거룩한 분노라는 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자존심이라고요. “기독교가 이것밖에 안 되는 줄 알아? 그렇지 않다.”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한 자들을 들어 쓰신다는 말씀을 생각하면 말문이 막힙니다.
승부욕을 접고 마음이 편해지는 게 아니라, 승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누구한테 말하거나 포기하지 못한 자신의 승부욕의 결과를 보고서 이제 승부욕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지면 억울하고 분하지만 그것을 감당하는 겁니다. 우리는 평화와 확신을 생각할 때도 짐이 모두 없어진 상태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유라는 것도 어떤 짐을 다 벗고 아무것도 지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자유라는 것은 자기가 져야 할 고통, 짐을 당연시하는 겁니다. 우리는 오해 받는 것, 억울한 것, 외로운 것을 제일 못 참습니다. 이런 것을 다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자기 자신을 납득시켜서 짐을 벗어 버리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뭐라고 하셨어요? 기적을 많이 행한 고을들이 믿지 않음으로 저들을 책망하신다고 “아버지여, 이 일을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신 다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이렇게 나갑니다. 모든 것을 보이는 것으로 확인하려고 하거나 자신이 근거가 되려고 하는 헛된 어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고, 어린아이들에게 허락됐다는 것은..... 물론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나는 무능해. 난 뭘 만들 수 없어” 하는 자들이나, 자신이 연구하여 결과를 만들어 내려고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무능한 자들을 모두 망라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시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 짐을 벗어 던지는 것을 원하는 것으로는 예수한테 못 배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짐 지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짐을 져야 돼요. 끊임없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으로 이웃들에게 확인받고 점검받고 싶지만 짐을 져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질지라도, 지금의 현실과 장래의 약속 사이에서 위로 올라가는 어떤 상승곡선을 안 주십니다. 나는 끊임없이 어린아이로만 존재합니다. 순진하다는 차원이 아니라 무능하다는 차원에서 짐을 다 지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겟세마네 동산까지 가신 것처럼,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으로 나타난 것 같은 갈등과 고통이 있어요.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이니까 기꺼이 순종하셨고 당연히 평안해지셨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았잖아요. 갈등과 고통을 지신 겁니다. 그걸 져야 해요. 그게 예수님이 말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주석: “기독교 신앙이란 주체의 차원에서 보면 신앙의 내용을 내가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채우신다, 이렇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신앙의 내용이란 자기 의를 꺾고 하나님만 의존하는 자리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어요(‘성화의 신비’). 따라서 나의 열심과 자기 의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게 성화에서 아주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파악됩니다. 이제까지 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좀 말씀해 주시죠.
박영선: 이제 이쯤 와서 보면, 신앙생활을 참 쉽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고민하고 갈등하고 좌절하는 것으로 배워온 사람들에게는 그게 정말 경이롭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그 사람들은 잘 믿고 있는데 내가 나무라고 있더라니까요. (웃음) 예전에 같이 자라난 사람이 나 예수 잘 믿고 있는데 나한테 구원받았냐고 물었을 때 놀랐던 것처럼, ‘이 사람도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데 내가 뭐라고 그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이제 중요하게 이해가 되는 것은, 댑분 그렇게 쉽게 이해가 되는 사람들은 전체 삶을 바치진 않습니다. 전체 삶을 바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면, 그들은 본인의 인생을 거의 고민하지 않는 스타일로 삽니다. 자기 인생 자체를 대부분 시대적이고 환경적인 것에 순응하며 살아요. 그가 사는 삶에서 신자 된 도리를 지키는 데 있어서 쉽게 할 뿐이지 다양하고 깊이 있는 데까지 책임을 지고 있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전 영역에 담아내라고 요구하시더라 이겁니다. 기독교 신앙이 복음주의 진영에서 자꾸 반지성적 성격을 띠는데, “지성적으로 가면 자꾸 비판적이 되니까 반발이 있었다. 그래도 나는 지성으로도 하나님을 믿고 싶었습니다”라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공감이 가지 않습니까? 우리는 의지나 감정뿐 아니라 지성도 동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전 영여겡 걸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실제로 그렇게 주권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단지 어느 부분, 너무 쉬운 단순한 부분만 하나님께 바치고, 더 많은 더 깊은 내용의 인간의 삶에 등장하는 고민들까지는 나아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 깊은 데까지 나아가서 하나님을 설명하거나 증언하고 있지 않다는 데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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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건강한 기독교 신앙생활을 위한 커뮤니티 원문보기 글쓴이: 좋은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