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식 정원의 예술=풍경화’ 같은 풍경
베르사유 궁(Château de Versailles)에서의 화려한 삶은, 당시 많은 유럽 군주나 귀족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절대적 권력과 보편적 이성을 상징하는 듯한 규칙적이고 대칭적이며 기하학적인 형태의 건축과 정원은 많은 사람의 감탄을 자아내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극단적 프랑스식 정원(jardin à la française)의 사례인 베르사유 정원이 모든 사람들의 감성을 만족시키는 것은 아닐 수 있다. 베르사유 정원을 직접 경험한 현대인들의 평가도 다양할 수 있다.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는 프랑스식 정원이 매우 아름답다고 공감하는 이들도 있지만, 때로는 너무 인위적이며 경직된 형태적 특성에 답답함을 호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후자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숲에서 편안함과 아늑함, 심지어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다. 특히 동양인의 경우 더욱 그럴 수 있다. 유럽에서도 감성의 차이는 존재한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와 같은 남쪽 유럽과 오스트리아나 독일, 영국 그리고 북쪽 유럽은 서로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정서적 차이를 지닌다. 이러한 차이를 유럽의 정원 예술을 대표하는 프랑스식 정원과 영국식 정원(English Garden 혹은 English Landscape Garden. 불어: jardin à l’anglaise)의 차이와 연관 지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게르만 문화권의 오스트리아 출신으로서 라틴 문화권의 베르사유 궁에서 살게 된 마리-앙투아네트(Marie-Antoinette, 1755~1793)는 과연 어떠했을까.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
마리-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Franz I)와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여제의 딸로, 빈의 호프부르크 성(Hofburg)에서 태어나 자랐다. 1770년 14살의 나이에 오스트리아의 오랜 적대국인 프랑스의 왕자 루이 16세(Louis XVI, 1754~1793)와의 정략결혼이 결정된다. 갑작스럽게 고향을 떠나 옮겨 온 베르사유에서의 생활은 당시 모든 어린 소녀들의 꿈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외교적인 이유로 정략결혼을 한 마리-앙투아네트의 경우는 마냥 환상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정치적 상황이 돌변하는 순간 인질로 전락해 버릴 수 있는 위험이 항시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베르사유 궁은 그녀에게 천국이자 감옥이 될 수 있었다.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그 오스트리아 여자(L’Aturichienne)’로 불리기 시작했던 것처럼, 미래의 프랑스 왕비는 영원히 적국 출신의 이방여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될 것이었다. 남편 루이 16세는 1774년, 선왕 루이 15세의 서거와 동시에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즉위한 해, 국왕은 그의 젊은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부인, 당신은 꽃들을 좋아하지요. 내, 당신에게 선물할 꽃다발이 있소. 바로 프티 트리아농이오."1)
앙주 자크 가브리엘(Ange-Jacques Gabriel, 1698-1782),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 1762-1769, 베르사유 정원 내부 <출처: (CC BY-SA) Starus@Wikimedia Commons>
애정의 증표2)로서 꽃다발로 비유되며 마리-앙투아네트의 소유가 된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 1762~1769)은 베르사유 정원 내부의 북쪽 지역의 새로운 건물이었다. 그 이름(petit: 작은, 예쁜)에서 알 수 있듯, 어여쁜 젊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지닌 아담한 크기의 궁전이었다. 선왕 루이 15세의 명령에 따라 건축가 앙주 자크 가브리엘(Ange-Jacques Gabriel, 1698~1782)이 계획한 프티 트리아농은, 신고전주의(Neo Classicism)의 대표적 사례이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먼저 건설한 그랑 트리아농(Grand Trianon)3)과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으며, 베르사유 정원 깊숙이 건축된 사적인 공간들이었다. 그랑 트리아농이 규칙적인 기념비적 열주들의 대리석 궁전으로 남성적이며 외향적인 국왕의 공간이었다면, 프티 트리아농은 정사각형의 정갈한 평면에 단아하면서도 우아한 규칙적 입면을 지닌 보석과 같은 건축으로 여인의 은밀한 삶을 담아내는 공간이었다.
쥘 아르두앙 망사르(Jules Hardouin-Mansart, 1646-1708), 그랑 트리아농(Grand Trianon), 1687-1688, 베르사유 정원 내부 <출처: (CC BY-SA) Remi Jouan@Wikimedia Commons>
그랑 트리아농과 프티 트리아농은 규칙적이고 대칭적이자 기하학적인 형태를 고수하며, 베르사유 궁 전체의 형태적 원칙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프티 트리아농과 후정은, 베르사유 궁과 정원의 조합을 축소한 미니(miniature)라 할 만하였다. 중심 축을 따라 대칭으로 펼쳐진 기하학적 형태의 나무들과 화단들은, 건축의 파사드를 향한 원근법적 공간을 창출해 내고 있다. 형태적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는 프랑스식 정원이 여기서도 분명하게 선언되고 있다.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과 후정, 베르사유 정원 내부 <출처: (CC BY-SA) BECARD @Wikimedia Commons>
출처:(건축과 미술, 남성택)
2023-11-17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