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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4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교회 이야기’ - 2. 호감을 사야하고 부흥해야 하는!
본문 : 사도행전 2장 46~47절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새번역>
2010년 ‘줄리아 로버츠’라는 여배우가 전 세계에 새로운 도전과 희망찬 용기 그리고 몽글몽글한 사랑의 기운을 불어 넣었던 영화가 있습니다. 아마도 보신 분들이 많이 있으실 텐데 바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라는 영화입니다. 사실 저는 이 영화를 보기도 전에 이 영화의 제목을 보면서 이미 이 영화에 빠져들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목이 교회에 대한 설명인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교회야말로 함께 먹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사랑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뒷받침 해 주는 구절이 바로 오늘 함께 읽었던 사도행전 2장 46~47절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사도행전 2장 46~47절A, 새번역>
날마다! 열심히 모이고! 빵을 떼고!(성찬을 나누고), 먹고! 찬양하고! 이 모습이 초대 교회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이는 것이 당연했고, 주를 기억하며 성찬을 나누는 것이 당연했고,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이 당연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당연했던 공동체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줄리아 로버츠의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결말이 해피엔딩이었던 것처럼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교회의 당연함의 결과도 해피엔딩이었음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사도행전 2장 47절B, 새번역>
정말 너무도 부러운 구절입니다. ‘모이고! 떼고! 먹고! 찬양하고!’의 결과가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고,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호감이라는 표현 대신에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존경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들로부터 존중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부러운 평가입니까?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반드시 회복해야 할 구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인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이 교회에 대한 호감일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교회에 호감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 구절이 부럽게 느껴지고, 간절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러움이 끝이 아닙니다. 진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사도행전 2장 47절C, 새번역>
할렐루야! 교회가 교회로서의 존재를 가장 인정받는 때가 언제입니까? 교회가 에덴동산이요, 구원의 방주요, 복음의 통로요, 축복의 통로가 되어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만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모이고! 떼고! 먹고! 찬양하는!’ 모습의 결과로 ‘부흥’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교회들이여, 당장 모이고! 떼고! 먹고! 찬양해야 할 것 같지 않으십니까?
교회는 호감을, 그 것도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교회는 날마다 구원받는 이를 더하여 주시는 축복을 받은 곳이었습니다. 죄송하게도 과거형으로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살 수 있는 교회일까요? 지금 우리 교회는 날마다 구원받는 이를 더하여 주시는 축복을 받는 곳일까요? 저부터 자신이 없고 우리의 현재가 아닌 것 같았기에 감히 현재진행형으로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한 소망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호감을 살 수 있고, 부흥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 말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깊이 기도하며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체 호감을 사고, 부흥을 했던 초대교회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첫째,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자!
첫 번째 처방전부터 쉽지 않습니다. 특히 날마다 모이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교회’라는 공동체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니 저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저 교회가 하루 일상의 시작과 끝에 있던 일상이었습니다. 학교를 가기 전에 들러 새벽기도회나 아침 기도회를 드렸고, 학교를 마치거나 일을 마치며 잠시 교회에 들러 기도로 마무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가 아니더라도 어느 교회라도 문이 열려 있었던 시절이라 가능했습니다. 지금 저는 경기도 광주시 문형동에 위치한 저희 교회에 날마다 한 마음으로 열심히 모이자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매일 매일, 한 마음으로, 성전을 생각해 주시는 것으로라도 모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가능하면 수요일이나 주일에는 가나안 성도도 되지 않고, 인터넷 성도도 되지 않고, 모이기에 힘씀으로 교회에 모이려는 노력은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직접 모일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너튜브라고 하는 가상의 공간이든, 홈페이지이든, 가정이든, 여러분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도 충분히 모이기에 힘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관심과 사랑 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연인들이 왜 날마다 한 마음으로 그렇게 열심히 만날 수 있습니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바로 같은 이유로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사랑과 관심은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을 향해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를 위한 기도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장년부인 코람데오를 위해, 청년부인 메시를 위해, 다음 세대인 중고등부와 서현이 지후에 이르기까지 사랑과 관심을 최소한이라도 보이고 있습니까? 서로를 위한 중보기도가 있습니까? 서로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까? 지금 서로의 상황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마음은 있습니까? 같이 아파하고, 같이 웃고, 같이 나눌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래서 지난 주 나누었던 ‘한 마음’이 새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공동체로,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즉 2024년 표어 ‘사랑과 관심을 실천하는 교회’에 대한 한 마음이 있으면 호감도, 부흥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매일 매일, 한 마음으로, 교회를 향한, 동역자를 위한, 서로를 위한 최소한의 관심과 연락, 기도와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둘째,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다!
먼저 ‘집집이 돌아가면서’ 라는 구절에 집중해야 합니다. 어느 한 집에서만 계속 모인 것이 아닙니다. 모임의 횟수도, 장소도 평등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에게는, 동역자에게는 서로의 집을, 나아가 서로의 삶을 오픈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현재 2024년에는 정말 너무도 어려운 적용입니다. 앞으로 더 힘든 적용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 바로, ‘대심방’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예전에는 ‘대심방’이라고 하면 반드시 집으로 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권사님은 춘계대심방, 추계대심방 덕분에 대대적인 집청소를 1년에 두 번은 한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시기도 했습니다. 동역자들이 자신의 집에 오는 것을 반기며, 청소하며, 음식을 차리며, 대접하며 함께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특히 손님을 대접하기 좋아했던 문화와 맞닿아 정말 대심방은 교회에서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대심방은 까페 예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더 이상 집으로 찾아오는 일은 ‘프라이버시 침범’과 ‘부담’이라는 개념 아래에서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집을 공개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바로, 동역자들 사이에도 ‘경계선’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혹시라도 오해하실 수 있을까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지금 저는 무조건 집을 오픈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오픈한다는 것은 심리적인 측면으로 볼 때 진짜 큰 친밀감을 나타내는 현상으로 볼 수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동역자들 사이에도 친밀감이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친밀감이 생기지 못하면 공동체가 되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의심과 의구심과 관계에 대한 불편함이 계속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집집이 돌아가면서 특별히 ‘성찬’을 나누었다는 것을 현재 우리가 다시금 깊게 묵상해 봐야 할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함께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님이 허락한 믿음의 축제에 한 가족으로, 한 몸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열 수 있는 동역자가 먼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열어준 마음을 다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몸과 피를 나누며 서로 사랑하겠노라 매일을 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자리가 아닌 성찬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복음 13장 34절, 새번역>
그렇게 성찬을 함께 나누었다는 것은 이제 한 가족, 한 공동체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조금은 마음을 열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 한 걸음 더 다가서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서로 온전한 하나와 공동체가 되도록 서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동역자들 간의 친밀감으로 이어질 때, 그럴 때 호감을 사는 교회, 부흥하는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자!
어느 식당에 돼지고기 이상 소고기를 사주면 의심해 보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돼지고기까지는 순수한 의도로 사주거나 대접할 수 있는데 소고기를 사줄 때는 무엇인가 대가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을 대접할 때, 음식을 대접받을 때 어떤 대가도, 의도도 없이 먹는 것을 바로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먹는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나누고 싶어서, 대접하고 싶어서, 사주고 싶어서, 함께 먹는 것이 행복해서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입니다. 조금의 의심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담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순전한(순수한) 마음입니다. 콩 한 쪽도 나누어 먹고 싶은 의도이지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쁘게 나눠 주고, 기쁘게 대접하고, 기쁘게 대접받으며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사교제가 가능했던 초대교회가 얼마나 분위기가 좋았을지 혹시 상상이 되십니까? 행복한 집의 특성이 행복한 식탁에서부터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부모가 음식을 차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음식을 먹을 때, 그리고 자연스럽게 축복의 언어를 주고받으며 웃음과 기쁨이 넘치는 식탁을 소망하지 않는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가능하다면 교회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보더라도 교회에서의 식사는 행복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특정 누군가만 땀 흘려 준비하고, 누군가는 언제나 먹기만 하는 불평등한 식사 준비가 아니어야 합니다. 차리는 이도, 먹는 이도 서로 아끼며, 감사하는 마음일 때 그러한 태도는 회사와 학교, 다른 공동체에 가서도 이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달리 행복한 식탁을 만드는 사람, 같이 밥 먹고 싶은 사람이 여러분이라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에서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먹는 여러분으로 인하여 행복한 식탁이 되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교회에서부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먹는 식탁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넷째, 하나님을 찬양하라!
초대교회의 중심은 너무도 탄탄했습니다. 모이고, 떼고, 먹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임과 성찬과 식탁 이 후에 함께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임에서, 성찬에서, 식탁에서 그 누군가가 불편해지고, 힘들어진다면 결코 이어질 수 없는 것이 찬양이고, 예배입니다. 모이는 것으로, 떼는 것으로, 먹는 것으로, 사랑하지 못했다면 사랑하게 되고, 다툼은 용서되었고, 다시 하나가 된 준비를 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초대교회는 이 모든 것에 성공한 후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교회가 모여서, 성찬과 식사 후 다른 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우리는 새삼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그 찬양하는 모습만으로도 얼마든지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살 수 있고, 교회가 부흥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해야 하는 곳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간단한 답이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과 예배가 일치되었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고, 교회로 발걸음을 옮길 충분한 이유였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는 지금 찬양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찾고 있습니까? 가능한 한 모일 때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찬양하고자 합니까? 정말 잘 체크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대화가 주를 이루는 우리들만의 모임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는 모임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교회입니까? 모이고, 떼고, 먹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았습니까?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그래서 교회 안에서 ‘감사’가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모이게 해 주신 것도 은혜이고, 잠시 후 점심 식사가 준비될 것도 은혜이며, 그렇게 나를 위해, 나를 대신해 준비해주는 동역자가 있음도 은혜이며, 식탁 교제에 이어 소그룹 모임까지 이어져 갈 수 있는 것도 은혜이기에, 모든 것이 생각해보면 은혜이기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먼저 우리 안에서 감사라는 이름의 찬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 감사가 흘러, 내가 속한 공동체로 흘러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 감사의 열매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교회가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받을 수 있는 공동체라고 말씀 하십니다.
교회에게 주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다음 4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서로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둘째, 동역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선을 허물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셋째,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먹을 수 있는 식탁 교제를 해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부터 우리 이 4가지를 꼭 실천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가, 이 땅의 교회들이,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사고,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심을 경험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 소망으로 오늘도 믿음으로 기도를 선포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가 모든 이들에게 호감을 사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둘째,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에 날마다 구원 받는 사람의 수가 더하기를 원합니다.
셋째, 한 교회로 부르심 받았기에 서로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실천하기 원합니다.
넷째, 동역자들에게라면 내 마음의 경계선을 허물고, 마음을 열기 원합니다.
다섯째,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나누는 식탁 교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섯째,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