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안병철
*본관:죽산, 연창위파, 세종대왕의 부마(駙馬)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님의 32세손
*출생지: 경기도 용인 기흥 외가집에서 출생
*출생년월일: 1958년 3월15일(음) 일주일 밤 낮을 빌어 저녁밥 먹을때쯤 태어났다함.
*태몽: 모친가라사대 "대궐같은집 열두대문을 열고 한없이 들어가다 깨어났다"
*학력: 고려대 경영대학원 졸
경희대 산업정보대학원 지역개발행정학과 졸
인하대 공과대학 항공공학과 졸
University of Hawaii at manoa Education
유신고등학교 졸
복지중학교 졸
경의국민학교졸
*경력: 시사ESL어학원 원장
세계노인복지대학 이사장
수원시학원연합회 회장
경기도학원연합회 자문위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운영위원
보이스카웃 경기연맹 이사
유신고 총동문회장
고려대경영대학원 간사
경희대산업정보대학원 석사 원우회장
국민신당 경기도지구당 부위원장
제15대 국회의원 출마 수원시장안구
민주자유당 중앙상무위원
한국청년지도자연합회 수원시지회장
한국환경경영연합회 경기도 지부장
수원경찰서청소년선도위원회위원장
수원시장애인협회후원회장
한국웅변가협회경기도지부장
88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개폐회식 운영위원
경기도청 명예감사관
경기도교육청 교육행정모니터요원
포천시국제협력분과위원장
청주문화원 운영위원 등등...
*성장배경: 1.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출생 안경승(1934년 9월2일생)과 경기도 용인군 기흥읍 출생 엄재섭(1938년 3월16일생)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나 아버지의 군복무관계로 네살까지 외가의 동내 꼭대기집에서 성장함.
아버지의 군 제대와 동시 네살의 나이로 인천으로 이사가며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아들~ 손을~잡고~'라는 당대의
인기가요 '유정천리'를 목청껏 완창해 지인들의 심금을 울렸다함.
인천시 용현동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꿀꿀이죽을 배급받아 끌여먹던 그 시절을 회상함. -허연 왕건이가 죽 안에 있기에 냉큼 집어 먹으려다, 아버지가 뺏어버려 못내 서운한기억을 간직했었는데-, 성장해서 듣고보니 미군부대에서 쓰던 키친 타올이었다니,,,,, 밀가루 배급받아 수제비만 먹던시절, 가끔 배급받아 푹푹 끓여먹던 꿀꿀이죽은 그래도 별미 였는데,,,
여덟살 되던 해, 인천서림국민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 1학기만 공부하고, 아버지 직장을 따라 미2사단이 있는 동두천 광암리
로 이주한다. 동두천 송내국민학교로 2학기부터 전학, 첫날부터 촌놈들 텃세에 한바탕 주먹다짐하고 동네를 평정함(?)
덕분인지 2학년부터 반장으로 등극. 리더의 꿈을 펼침^^
3학년시작 첫날 서정옥 선생님이 직권(?)으로 '동종원'이란 잘 사는집 애로 반장을 갈아치움.
다행히 친구들 도움으로 어린이회장이 되어 명예회복은 했으나 아직도 서정옥 선생님의 행동에 멍든 동심은 풀어지지 않음.
5학년을 마칠즈음 봄방학에 또 다시 의정부 경의국민학교로 전학, 초등학교를 세곳이나 다니는 진기록을 세움.
2. 처음으로 중학교 추첨제가 시작되던 해, 기독교 재단인 경민 중학교에 배정되었으나 불교집안을 이유로 신생학교인 복지
중학교로 지원하여 제1회 입학생이 되었다. 국민학교는 2회로 졸업했는데 말이다.체육시간마다 돌 줍고 공차고 청소하고 공
차고,,, 규율부에 지원하여 나름대로 바르게 살려고 애썼다. 졸업식에는 전교 몇등안에 들었다고 국회의원 표창도 받았다.
학교에 기부금 내라는 소리에 "국회의원이 뭐 대단하다고 상 준다고 기부금을 내냐, 다 필요없다고 해라!"고 아버지의 노여움
을 샀고 졸업식에서 상받던 사진 가져온 사진사 아저씨도 사진도 안받고 그냥 쫓아 보내려던 아버지가 그때는 왜 그리도 야 속 했는지...
3. 그 당시 의정부에서는 대학 가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라 진학을 고심하던 차에 유신고속과 아주대학교를 그룹으로 하는
수원의 유신고등학교에서 전국에서 신입생을 모집한다하여 시험에 응시하게 되었다. 깨끗한 시설에 기숙사까지 겸비한 학
구열 높은 학교 였으나, 30분 거리에 외가가 있어 방은 따로 얻고 식비는 드리기로 하고 외삼촌댁에서 3년을 신세를 졌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여 2학년 중간고사에는 학급석차 1위도 기록했으나 항상 수학과 화학의 이해도가 부족하여 걱정이
많았다. 영어나 국어, 생물과 같은 과목만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에도 지도부 활동도 열심히 하고 좋은 친구들도 만나고...
인격과 몸이 함께 성장하는 시기에 많은 추억을 만든것 같다. 지금도 그 친구들은 오랜만에 만나도 변함없이 나를 반기
고...... 하여튼, 수학에 자신이 없으면서도 배고프던 어린시절이 떠올라 배 곯지 않으려면 공대를 가라던 어느 소설가의
글을 읽고 이공계를 지원하다니 참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 하다.
4. 인하대 항공공학과에서 항공우주공학에 대해 열심히 탐구하여 항공기사1급 자격을 취득하고 중등학교 교원자격증도 함께
취득해 두었는데 후일에 교육자의 길을 가게 될줄은 그 시절엔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다.
졸업 후 대한항공에 취업하게 되었는데, 병역의 의무를 마치지 못한 우리 대학동기 9명이 함께 기술사관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 후 광주보병학교를 마치고 진해에 있는 육군 수송학교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 우리 동기들의 후원으로 학생장이 되어 교관과 사관후보생 사이의 가교 역활을 하였다.
5. 팬티차림 알몸에 철모 쓰고, 군화를 신고, 선착순 집합을 수시로 하던 뜨거운 여름밤의 빰빠라...
살을 에이는 듯한 겨울철 칼바람에 진해 앞바다에 잠수하고 나와 비행장 활주로에 누워 목터져라 구호를 외치던 우리의
동기들 . 인생을 살아가며 위기가 닥쳤을때도 사관후보생 시절을 회상하며 거뜬히 그 어려움을 극복했던것 아닌가..
6. 우수한 성적으로 육군소위에 임관하고 수송사령부 예하 항만운용단에 소대장으로 배속된 뒤 6개월만에 항만 운용단
운용장교로 영전했다. 이것이 다 평소에 영어공부를 틈틈히 해 두었던 덕을 본것이다.
덕분에 미군들과 대화할 기회도 많아지고 점심식사 후 30분간 장교식당에서 장교 하사관을 대상으로 영어 강좌도
진행하게 되었다. 안병철이 진행하는 "민병철 생활영어". 나름대로 보람있고 자기 발전의 기회로 삼았던 시절이었다.
"부산항에 "미드웨이 또는 코럴씨 항공모함"이 들어오면 관람객 안내를 하러 나가 민간인을 위해 통역도 맡아서 해주고
진해에 탄약등 보급물자가 들어오면 적게는 일주일에서 많게는 한달동안 육로와 철로를 이용해서 배에서 내린 탄약들을
주야로 열심히 전방으로 보내곤 했다.
7. 이웅평 소령이 북에서 미그기를 몰고 남하했을 때도 우리는 열심히 탄약을 수송하는 작전중이었다.
난데없이 사이렌이 울리고 전시비상사태방송이 메스컴을 통해 알려 졌을때도 우리는 더 열심히 탄약을 전방으로 보내자고
결의했다.
그후 몇개월뒤 사령부의 명령으로 수송사 교육장교로 명 받아 전국 TMO를 돌며 교육 평가를 수행했고,
이런저런 사건 사고를 겪은 뒤 전역을 하게 되었다. 부하를 진심으로 배려하는 성준상 중령 같이 참으로 좋은 상관들도
많았지만, 조용희 대령처럼 근무시간에 주식 투자나 하러다니고, 고소령처럼 근무시간엔 빈둥빈둥 놀다가 퇴근시간에 맞추어 다음날 업무보고 준비하라고 사람 붙들어 놓고는 늦게 까지 근무하는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 기회주의자도
여러명 보았다. 하여튼, 그런 기회 주의자들이 싫어 전역을 결심했다.
8. 사회에 나와 '시사영어사', 서독 벨기에 합자회사 '아그파 게바트'등의 회사를 다녀 보았지만 사업을 배우고 싶어
그릇장사, 수박장사도 해보았다. 기회가 되어 교육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어 학원연합회장을 비롯해 여러가지 감투를
쓰게 되었다.
9. 학업에 대한 열망이 커져 꿈에 그리던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입학하여 열심히 시간을 쪼개 무사히 졸업을 하게
되었으며. 경희대 대학원에서 지역개발행정학을 전공하며 석사과정 원우회장으로 기억에 남는 시절을 보냈다.
10. 정치인의 꿈을 꾸다
민정당 교육분과 중앙위원, 민자당 중앙 상무위원, 한국청년지도자연합회 수원시지회장, 수원시학원연합회장,
유신고총동문회장.한국웅변가협회경기도지부장,한국환경경영연합회경기도지부장등 이런저런 감투에 힘입어 정치인의
꿈을 꾸던터에 제16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되었다. 당시 민주당후보로 출마를 권유 받았으나
여,야당 모두 신뢰를 얻지 못하던 때라 무소속을 결심하였으나 워낙 제약이 많던 시절에 혼탁 금권선거는 나의
청렴한 젊은 패기에는 맞지가 않았다.
당시 이호선 수원시장의 외부 차량용 앰프 지원, 당시 수원시의회 의장이셨던 김재봉님(김원훈 동창 부친)이 사용 했던 이동용 앰프, 자동차정비학원 송원장의 선거유세차량및 현수막, 유신고 동문 선후배의 모금운동,
태권도지도자협의회 관장들의 적극적인 홍보지원,
세계노인대학 학생들의 진심어린 후원등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상대편 후보진영의 하루10만원의 선거운동원 수당에는 하루 1만원의 적법한 절차를 고수하는 우리진영이 당할수가 없었
다. 우리진영의 선거운동원들이 난리가 났단다. 우리도 하루 10만원씩 달라고....
어떤이는 15일간의 수당 15만원도 받지 않으며 후원금으로 다시 내놓는데 말이다.
하기야 외숙이란 분도 커피값이 없으면 선거운동을 안해준다고 했으니 이해도 될만했다.
하지만, 선거법을 고수하겠다는 나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으며, 결과는 실망으로 끝이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탁금은 돌려 받았지만........
안병철은 선택받았다 그리고 위대하다.
1. 왜구의 침입을 막아 나라를 편안하게 한 공으로 安國之臣의 칭호를 받고 편안安씨 성을 하사받은 조상의 자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며, 세명의 청빈한 선비가 살았다는 三淸洞 국무총리
공관에는 '安家之基' 즉, '안씨가문의 터' 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우리의 선조가 청빈한 선비란 뜻으로 그 자손인 안병철도 위대하다는 것이다.
2. 세종대왕의 딸인 정의공주와 결혼하여 조선시대 제4대 임금님의 사위가 되신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할아버지의 제 32세손인 안병철은, 죽산 안씨 연창위파 31세손 안경승과 영월 엄씨가문의 외동딸 엄재섭과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3.고려시대 명문가를 꼽자면 "안정박이김최"라 하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이정박 안김최"로
조금은 변화가 있었다. 이씨가 왕권을 잡은시대에 안씨가 맨앞에 자리를 하면 기분이 썩 좋지않을터, 명문가의 서열에도 안씨와 이씨가 자리바꿈을 하는것은 당연한 이치로 여겨졌다.
4.어른들에게 강직하고 고집이 세기로 유명한 성씨를 대라면 "안 강 최" 라고 서슴없이 말씀들을 하신다.
최씨하면 최영장군이 떠오르고 강씨하면 강감찬 장군이 떠오르는데 성리학의 대가이며 공자 맹자에 버금가는 안자로 추앙받던 안향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어찌하여 성격이 강하고 고집센 세 가문에 들어 갔을까요?
첫댓글 육군수송학교를 검색하다가 퍼 왔습니다.회원분들중에 혹시 이사람을 아시는분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