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여자
권정숙
모자 쓰고 장갑 끼고 긴팔의 남방입고 완전무장을 한다.
빨갛게 잘 익은 고추 한 소쿠리 따서 그늘에 늘어놓고 풀을 뽑기 시작했다. 찌는 듯 더운 팔월의 뙤약볕아래 내 남편 팔이 아파서 방치해둔 옥상 채소밭에 김을 매고 있는 것이다. 흐르는 땀에 눈이 따갑기도 하고 그을려 얼굴 미워질까 봐 걱정되기도 했지만 말갛게 속살을 드러내는 부드러운 흙이 많아질수록 기쁨도 그만큼 커지는 걸 느꼈다.
우리 집 옥상은 보물창고다. 집지을 때 트럭 몇 대의 흙으로 조성된 꽤 너른 채소밭은 철따라 고추 배추 상추 깻잎 오이 가지며 쑥갓까지 웬만한 건 다 제공해 준다. 두 식구 살면서 마눌님(?)에게 싱싱한 무공해 채소 맘 놓고 먹이려는 부지런한 남편덕분에 언제나 싱싱하고 맛있는 채소로 식탁은 늘 푸짐하고 풍성하다.
줄 장미 아름답게 흐드러지고 정원의 꽃들이 제각각의 색깔로 한껏 화려하게 치장을 할 때쯤이면 예쁘게 가꾼 맛있는 상추로 친구들을 위한 삼겹살 파티가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강원도로 2박3일 여행간 남편이 돌아와서 보면 얼마나 놀랄까? 아마도 입이 귀에 걸리겠지?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고단한 줄도 모르겠다. 평소에 물 한번 주지 않던 여자가 어떻게 이런 기특한 생각을 했나싶어 새삼 자신이 너무 대견해진다.
“그래! 난 정말 괜찮은 여자야!”
마누라가 목에 걸려 사왔다는 영덕대게를 쪄서 마음 맞는 친구부부를 불러 맛있게 먹었다.
며칠 동안 밀린 이야기들을 주고받기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채소밭에 풀 뽑은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산다는 게 별 거냐? 싶다.
서로 아끼고 신뢰하며 작은 일에도 배려하는 마음, 그게 부부 아니겠는가?
비록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가진 것 별로 없어도 이렇게 가슴가득 따뜻한 사랑을 받고 사는 나는 분명 부자이다. 행복한 부자. 그래서 감사한다. 멀리 있는 착한 내 아들들에 감사하고 암수술 후에도 건강한 내 남편에게 감사한다. 늘 마누라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에 특히 감사한다.
어젯밤엔 대게로 포식을 하더니 아침엔 백합구이로 호강을 한다. 조개대장인 날 위해 사온 백합을 직접 구워주는 남편. 조개 때문에 며칠은 더 많이 행복할 것 같다.
바보 같은 여자! 난 가끔 회의에 젖는다. 착하면 바보라 했던가? 욕심 부릴 줄도 의심할 줄도 제 것 챙길 줄도 몰랐던 너무나 어리석은 여자! 좀 더 영악했어야 했다. 영악까진 않아도 말리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앙탈도 부렸어야 했다. 그랬으면 그 빌어먹을 보증 같은 건 서 주지도 않았을 것이고 내 아이들이 그 오랜 시간동안 고통 속에 살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적어도 연이은 빚보증에 부도에 재산 날리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건 눈 한번 질끈 감고 모른 체만 했어도 우린 풍족하게 떵떵거리고 잘 살았을 것이다. 차마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던 잘못생각의 대가는 우리가족에게 오랫동안 너무나 큰 희생을 강요했다. 감사한 줄도 미안해할 줄도 모르는 것 같은 그런 사람에게 말이다. 생각할수록 그게 더 팔짝뛰게 기막히고 화가 나는 부분이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일이 있다. 선함의 결과가 좌절과 절망으로 되돌아올 때 느껴야하는 지랄 같은 자괴감이 얼마나 큰지를!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어려울 때 서로 도와가며 살아야 한다고. 정말 좋은 말이다. 그러나 정작 어려워지면 팔 걷어붙이고 도울 사람 과연 몇 명이나 되며 진심으로 마음 아파할 사람 몇이나 될까? 행여나 손 벌릴까? 혹시 내게 불똥 튈까? 거리 두는 사람들. 남의 불행 딛고 자기행복 꿈꾸며 속으로 은근히 즐기는 그 이중성.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프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님을 통절히 느끼고 또 느껴야 했다.
가까운 사람한테 받은 상처는 몇 갑절 더 아프고 세월가도 치유되기 어려운 것을!
안쓰러운 사람! 그래서 병까지 났던 사람! 좌절의 갈피에서 아주 작은 희망하나 건져 올릴 수 있다면 나로 인해 한번이라도 더 웃을 수 있다면 마음 다해 잘해주고 싶다.
이담에 저승 갔을 때 세상살이 어떻더냐? 물으면 서러운 세상에서 괜찮은 여자만나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다왔다고 내 남편 대답할 수 있을까? 웃는 얼굴로 아양도 떨고 정성들여 맛있게 식사를 준비해야지. 난 요리하는 걸 좋아하고 내가 만든 음식 맛있게 먹어주면 그 또한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옛날엔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고 여자를 무시했다지만 그래서 요즘은 땅값이 올라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어 여자가 큰 소리 친다지만 하늘같은 남편으로 떠받들지는 않아도 적어도 흉내는 내니 괜찮은 여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잘못된 일을 두고두고 바가지 긁지 않으니 그 또한 괜찮은 여자 아닌가? 남편 기죽여 얻는 게 뭐있다고 큰소리 칠 생각은 더더구나 없으니 말이다. 앞으로는 정말이지 내 남편 얼굴에, 그 일로 단한 번도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않았던 착한 내 아들들 얼굴에 늘 웃음이 가득했음 싶다. 그래서 덩달아 행복한 여자이고 싶고, 볼수록 괜찮은 여자이고 싶고 살아가면서 오래도록 같이하고 싶은, 참 괜찮은 여자로 기억되고 싶은 거다.
“바보 같은 여자 파이팅!”
대낮에 불 켜진 가로등을 보면 가슴 아프고 대중목욕탕에 목욕물 쓸데없이 철철 흘러넘치면 가슴 아프고 술 취해 길가에 쓰러져 자는 사람 보면 가슴이 아프다. 소수가 아닌 다수가 잘 사는 나라! 언제쯤 그런 나라가 올까? 위정자들은 제 밥그릇 챙기기에만 급급하고 민생은 뒷전에 연일 피터지게 싸움질인데 과연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모두가 네 탓이라고 책임 전가에다 날선 공방으로 흠집 내기에만 열심인 것 같아 마음 씁쓰레 해진다.
헐뜯기에 앞서 한 발짝만 서로 물러나고 양보하고 배려하면 그 좋은 머리로 중지를 모아 국익에 힘쓴다면 우리도 명실상부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텐데......
아름다운 금수강산 우리나라는 그래도 살기 좋은 세상인 것을!
서늘한 바람이 분다. 매미소리 더 자지러지고 풀벌레 극성스럽다.
머잖아 가을이 오겠지. 많은 걸 예쁘게 수확하는 나의 가을도 분명 그렇게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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