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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함께 피어난 전설 8 - 배롱나무(목백일홍) and 초본 백일홍
학명 1: Lagerstroemia indica L.(배롱나무)
학명 2: Zinnia elegans(백일홍)
이번 글의 주제는 ‘백일홍’이다. 다들 잘 아는, 백일 동안 핀다는 그 꽃. 화사한 붉음으로 유명한 그 예쁜 꽃송이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읽으며 당신이 떠올리고 있을 그 백일홍의 형태가 궁금하다. 나무를 생각하고 있나요? 아니면 풀꽃이 떠오르나요?
그렇다. 괜히 위에 학명을 두 개나 적은 게 아니라는 뜻이다.
백일홍은 두 종류가 있다. 쉽게 말하면 초본인가, 목본인가의 차이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둘을 똑같이 ‘백일홍’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누가 백일홍 얘기 꺼내면,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한다. 풀 말하는 거야, 아니면 나무 말하는 거야?
마루 앞에 한 그루 백일홍이 피었는데
쓸쓸할사 그윽한 빛 시골집과 흡사하다
번갈아서 피고 지며 백일을 끌어가는데
백 가닥의 가지마다 또 백 가지 뻗었네
- 장유
위의 한시와 함께 나온 사진이 목백일홍 배롱나무 되시겠다.
속씨식물 쌍떡잎식물강 도금양목 부처꽃과 배롱나무속에 속하는데, 원산지는 중국 및 한국 등 아시아 지역이다. 배롱나무 백일홍의 한자명은 ‘자미화’라고 하며, 당나라 때 중서성에 많이 심은 데에서 유래하여 우리나라에서도 관상용으로 가꾸고 병풍이나 도자기의 문양 소재로 많이 활용되었다. 나무껍질을 긁으면 흔들린다는 속설 때문에 ‘파양수’라고도 하는데, 문학에서는 곧잘 부끄러운 여인으로 비유되기도 했다.
보통 5m 정도 자라며 나무 수피는 연한 보랏빛을 띄는 붉은색으로 매끄러운 게 특징이다. 잎은 마주나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며 잎자루가 없다.
배롱나무 백일홍은 조선시대 사간원을 상징하는 꽃으로 여겨졌는데, 그 까닭은 매일마다 쉽게 벗겨지고 날마다 다시 재생되는 수피로 인한 것이었다.
‘사간원’은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인사와 언행, 치세 등 역사를 전하는 관청이었다. 즉, 그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을 엮고 펴낸 관리들이 근무하는 부서였다는 거다. 역대로 청사의 기록을 두려워하지 않은 왕들이 없으니, 외압이나 은근한 협박이 잦은 관청이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의 사간원들, 벗겨져도 또 돋아나는 배롱나무 수피처럼 압박 무시하고 꿋꿋하게 청사를 남겼으며, 붉은 빛깔이 오래도록 남는 백일홍을 닮은 기록을 후대에 전하였으니. 사간원의 상징화가 배롱나무 백일홍인 이유가 다 있었음이라.
한편 청념함을 상징하기도 해서 서원이나 향교, 사찰, 정자 등에 많이 심었다. 그래서 ‘양반꽃’이란 이명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반가의 마당에는 잘 심지 않았는데 수피가 워낙 잘 벗겨지고 그 자리에 하얀 자국이 생겨서 ‘남자의 상상력’을 부추긴다는 이유에서였다. 거 왜 있지 않은가. 사춘기 혈기 넘치는 남자애들이 몽정 같은 거 할 때 하는 그런 상상들.
글쎄, 나는 꽃나무 보고 그런 상상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참신하다. 댁들 머릿속은 무슨 구조냐? 욕구 불만도 유분수지!
배롱나무 백일홍은 보통 붉은색의 꽃이 7~9월에 원추꽃차례를 이루어 피는데, 위의 사진처럼 하얀 꽃이 피는 흰배롱나무도 있다고 한다. 또 분홍색, 연분홍색, 홍자색, 연보라 등의 색상을 가진 꽃도 피운다고 한다. 꽃잎은 6장이며, 수술은 많으나 가장자리의 6개는 다른 것에 비해 길며, 암술은 1개이다.
참고로 배롱나무 백일홍은 초본 백일홍과는 전혀 다른 식물이다. 그냥 개화기가 길다는 부분이 서로 겹치다 보니, 꽃의 이름이 같아졌고, 초본이든 목본이든 혼용되어 쓰이고 있을 따름이다.
배롱나무 백일홍은 양지바른 곳을 좋아하며, 빨리 성장하고 가지를 많이 만들어 쉽게 키울 수 있다는 특성이 있다. 하지만 내한성이 약해 주로 남쪽 지방에서 잘 자란다. 서울 근처에서는 겨울에 짚으로 나무줄기나 나무 전체를 감싸주어야 한다.
배롱나무의 꽃은 식용 및 약으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요즘은 꽃을 따서 얼려 꽃얼음으로 만들어 홍차나 오미자 음료에 띄워 먹는 게 유행인 듯하다. 맛은 모르겠지만 운치 하나는 끝내줄 듯.
한편 약은 주로 소아 기침, 백일해, 월경 조절, 대하증 등의 질환에 활용되었다는 모양이다. 임산부는 사용을 금하고 있으니 기억해두자!
한편 초본 형태의 백일홍은 속씨식물 쌍떡잎식물강 초롱꽃목 국화과 백일홍속으로, 원산지는 멕시코 및 북아메리카 지역이다. 본래는 잡초 취급을 받았으나 독일사람 진이 발견하고 꽃이 예뻐서인지 프랑스와 영국의 화훼가들이 개량하여 현대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기록에 의하면 ‘초백일홍’이란 식물이 등장해서 그 꽃이 백일홍과 같은 것이라 여기고 있으나 언제부터 초본 백일홍을 한국에서 심기 시작했는지, 또 그 초백일홍이 이 백일홍이 맞는가 하는 의문에는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없다.
초본 백일홍은 배수가 잘 되고 부식질이 많은 참흙(모래와 찰흙)에서 잘 자란다. 배수가 나쁘면 뿌리가 쉽게 썩으므로 화분에 심을 때나 여름철에는 배수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 크기는 약 50~90cm이다.
꽃은 6~10월에 줄기 끝에서 지름이 5~15cm쯤 되는 두상꽃차례를 이루어 피는데, 100일 정도 피므로 백일홍이라 한다. 꽃의 빛깔은 진홍색, 다홍색, 노란색, 흰색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줄기 가장자리에 암꽃인 혀 모양 꽃이 8~20개가 피고, 가운데 부분에는 양성 꽃인 꽃부리 끝이 5갈래로 갈라진 관 모양의 꽃이 핀다.
잎은 길이 4~6cm, 폭 3~5cm이다. 끝이 뾰족하며 밑 부분은 심장 모양이다.
초본 백일홍은 꽃의 크기와 생김새 및 색에 따라 여러 품종으로 나뉜다. 우선 꽃의 크기가 15cm 정도 되는 것을 대륜계, 4~5cm 정도 되는 것을 중륜계, 그리고 3cm 정도 되는 것을 소륜계로 구분한다. 또 꽃의 생김새에 따라 선인장처럼 생긴 캑터스형, 다알리아처럼 생긴 다알리아형, 꽃에 무늬가 있는 무늬천엽형, 꽃이 공처럼 둥그렇게 달리는 폼폰형으로 나뉜다. 초본 백일홍의 쓰임새는 뭐니뭐니 해도 관상용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목본 백일홍과 초본 백일홍을 혼용하며 둘 다 백일홍으로 부르고 있어서 그런지 둘의 꽃말도 엇비슷하다. 사실 개화 시기도 비슷하고, 꽃이 길게 핀다는 것도 유사해서 그렇지 싶다. 여하튼 꽃말은 배롱나무의 경우 ‘떠나간 벗을 그리워하다’와 ‘행복’ 등이고, 초본 백일홍은 ‘웅변’과 ‘그리움’ 등이다.
* 백일홍 전설
백일 기다림 끝에 핀 붉은 꽃, 백일홍 전설 - 우리나라
까만 하늘이 스산했다. 고양이가 사악 할퀸 듯한 삭월이 전부, 기이할 만큼 별빛 하나 없었다. 파도의 포말마저 을시년스러웠다.
휘이이~
간기 머금은 바람이 동굴 입구를 헤집었다. 그 안에는 정체 모를 짐승의 비린내가 가득하고, 흉악한 독기도 무겁게 깔려 있었다. 매캐한 공기 헤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오색 헝겊이 축축 휘늘어진 제상 앞에 곱게 단장한 처녀 하나가 앉아 있었다. 울기라도 하는 것일까. 조그맣게 어깨를 옹송그린 채 동굴 입구를 외면하듯 등을 돌린 모습이었다.
화라락.
순간 제상을 밝힌 촛불이 너울댔다. 벽에 비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무언가 다가드는 양, 음영이 엄습하고 처녀의 몸은 한층 작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기척이 바로 등 뒤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쉐애액~
처녀의 상체가 크게 휘돌았다. 잔뜩 옹송그렸던 어깨가 펼쳐지고 치맛자락이 크게 펄럭였다. 동시에 날카로운 섬전이 공기를 갈랐다.
“...... 꽤나 거창한 환대인데요.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스치듯 베인 옷자락이 팔랑팔랑 바닥으로 떨어졌다. 목숨이 날아갈 뻔한 사람답지 않게 침착한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비록 다소 경직되었으나 서슬퍼런 쇠붙이 앞에서 그 정도야 당연했다.
“이런, 이무기 대신 에먼 나그네 목을 칠 뻔했네요. 괜찮습니까?”
처녀의 음성에 낭패감이 어렸다. 작은 체구, 화사한 치마와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손에 들려 있었다. 서늘한 예기를 품은 검날이 촛불에 빛났다.
“전, 이무기 사냥하러 왔다가 목 떨어질 뻔한 거군요.”
나그네는 어깨에서 조금 흘러내린 활을 추슬렀다. 허리춤에 활통은 제법 길이 잘 든 것이었다. 그의 시선이 처녀를 살폈다.
“그건 웬겁니까?”
“그야, 순순히 죽어 줄 수는 없으니까.”
대강 사태 파악이 되었다. 남해 근방 마을, 머리 셋 달린 이무기가 나타난다고 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절어 무구한 목숨을 갖다 바친 것이리라. 처녀는 말하자면 산제물이었다. 물론 순순히 당해줄 요량은 없어 보였으나, 그래도 이무기한테 대항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의 눈빛이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왜, 여자가 무슨 검이냐는 소리 하려고요? 그럴 거면 입 다무는 게 좋습니다.”
뭔가 오해한 것인지 목소리가 톡 쏘는 듯했다. 그는 애써 유들하게 말을 받았다.
“또 목이라도 배시렵니까?”
“천만에. 턱을 날릴 생각이죠.”
눈앞으로 불쑥 야무진 주먹이 다가들었다. 어안간 그의 입매가 피식 호선을 그렸다.
“퍽 작은 손인데요.”
“작은 고추가 매운 법이죠. 풍문에 의하면, 턱은 잘못 맞으면 뇌가 흔들려 균형 실조가 오기도 한다던데. 어떻게, 들은 이야기를 견학할 사례가 되어줄 의향이 있는지?”
“정중히 고사합니다. 그저, 이런 용기를 가진 아가씨가 신기해서 그런 것뿐이라서.”
그녀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아마 촛불 탓만은 아니리라. 스르릉, 검이 얌전히 제 집으로 들어갔다.
“당신 대답은 무척 참신하네요. 마음에 듭니다.”
순간 그의 미간이 설핏 굳었다. 밖에서부터 묘한 기척이 전해진 까닭이다.
“그래서 말인데, 도움을 구할 게 있는데요.”
별안간 저고리 옷고름이 잡혔다. 훽 당기는 힘이 다소 거칠었다. 그녀의 눈썹이 사납게 꺾였다.
“..... 해명 제대로 못하면, 이번에야말로 명줄 끊어버릴 겁니다.”
“아, 죄송. 급한 마음에. 이무기가 지척에 온 것 같거든요. 옷 좀 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래는 적당히 숨어서 처리할까 했는데, 아가씨도 있고 하니 제물인 척 위장했다가 손을 쓰는 게 낫지 싶어서요.”
상황이 급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의 말이 뒤로 갈수록 낮고 빨라졌다. 그러나 처녀는 당돌하게 사냥꾼의 손을 쳐냈다.
“됐어요. 이제 와서 숨어 있을 생각 없거니와, 차라리 내가 미끼가 되죠. 당신이야말로 저기 제단 뒤에 있다가 활이나 쏘십시오. 무엇보다 그 체구에 이 옷이 어디 가당키나 합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체격은 건장한 편이었다. 그녀의 체구는 아담했고 말이다. 옷을 입는 게 아니라 대충 두루고 있어야 할 판이었다. 위장이 될지 의심스러웠다. 이무기가 소경도 아니지 않은가? 결국 사냥꾼은 순순히 아가씨의 제안을 따랐다.
“햐햐햐햐햐~! 보기도 좋은 게 먹기도 좋다지만.”
“이햐햐햐햐~! 이렇게 한입거리도 안 돼서야. 간에 기별이라도 가겠나.”
“우햐햐햐햐~! 배가 안 차면 또 내놓으라고 하면 되지.”
마침내 마을의 흉물, 머리 셋 달린 이무기가 바다에서부터 동굴로 들어왔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생사의 경계에서나 날 법한 웃음소리가 동굴 벽을 후려쳤다.
“글쎄. 간에 기별은 모르겠지만, 경추가 짜릿하긴 하겠군요. 너, 몸뚱이 하나 주제에 머리가 너무 많아.”
치맛자락이 펄럭이고 섬전이 솟았다.
촤악~
액체가 바위를 넓게 적셨다. 무언가 허공을 날았고, 이무기가 목을 젖히며 포요했다. 두 몫의 메아리가 동굴을 울렸다. 제물 주제에 건방진 것이! 눈이 붉게 타올랐다. 감히 내 머리를! 턱이 쩌억 벌어진 목이 돌진했다.
시익~
동시에 얇고 빠른 빛살이 바람을 갈랐다. 이무기의 울부짖음이 귀를 때렸다. 눈을 잃어 발광하는 서슬에 돌가루가 후두둑 떨어졌다.
“머리 셋이나 되니, 꼭 세 배만큼 똑똑할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한 개 분량의 뇌가 머리 세 개에 나눠서 든 것이었군요. 그저 힘만 센 돌연변이일 뿐이었어.”
사냥꾼과 아가씨의 활약으로 이무기가 마침내 저세상으로 떠났다. 기이하게도 몸뚱이가 딱딱하게 굳어 바위로 변했지만 어쨌든 더 이상 이무기는 없었다. 이제 마을에서 더는 제물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아이고야, 그야말로 죽다 살았네요. 꼴이 만신창이인데.”
“반면에 댁은 멀쩡한 편이군요. 좀 밉상스러운데.”
물론 몸 성하게 끝나지는 않았다. 특히 아가씨 쪽이 많이 망가졌다. 그래도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여태 배우기만 했지 실전은 처음이었다고요. 아무도 이렇게 엄청난 피멍과 근육통이 올 거라고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실전이 처음인데, 그 정도였던 겁니까. 아가씨 이름이랑, 스승이 누구인지 궁금해지는데요.”
“자미. 스승은 아버지시죠. 전직 내금위 종사관이셨고, 은퇴 후에는 소소하게 쇳물일을 하셨고. 당신 이름은?”
“해무입니다. 보시다시피 이무기를 찾아 떠도는 나그네이자 사냥꾼이고.”
좌우간 상황 종료겠다, 몸도 추슬러야하겠다, 자미와 해무는 일단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마을에서 외떨어진 둔덕, 뻘쭘하게 서 있는 대장간이 아가씨의 집이었다. 손님의 발길이 과연 이어질까 싶은 위치지만 지금까지 망하지 않은 거 보면 어떻게 수요가 있는 듯싶었다.
“이제 보니 제가 찾던 명검으로 유명한 대장간이었네요. 마침 쓰던 게 부러져서 부탁을 할까 했는데.”
“응. 하지만 거절해서 유감입니다. 잇해 전 부친께서 졸하셨거든요.”
자미네는 외지인이었다. 어느 날, 부친과 함께 흘러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뿐. 마을 사람들의 텃새가 장했다. 그나마 부친 생전에는 쉬쉬하며 암암리로 부렸으나, 부친이 가고 은근 심해졌다. 그리고 이무기가 나타나면서 연고 없는 외지인인 자미를 제물로 삼게 되었다.
“도망을 가지 그랬습니까? 그만한 검술이면, 허섭한 장정 몇은 상대가 아니었을 텐데.”
“가면? 문제가 해결된답니까? 나 아니면 또 누가 바쳐질 판인데. 게다가 검은 일반인 상대로 세우는 거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해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올곧은 말이었다. 옳은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간에서는 지켜지지 않는 정론이다. 그러나 자미는 그 정론을 충실히 따랐다. 그는 눈부신 것을 보듯 눈시울을 더욱 조프렸다. 그것이 이 처녀의 대단한 점이었다.
“이무기도 처리했겠다, 당신은 이제 어쩔 겁니까? 의뢰주에게서 포상이라도 받나요?”
“이무기 사냥은 업이라서, 물질적으로 주어지는 건 없습니다. 단지, 죄가 조금씩 가벼워질 뿐이죠.”
해무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의 내력을 밝히기로 했다. 자미의 성품이 얕은 인연으로 끝내기 아쉬웠기 때문에. 뭍을 떠돈 지 오래건만 이런 마음은 처음이었다. 그는 툭 던지듯 말을 쏟아냈다.
“용족이거든요, 제가. 벌 때문에 사람의 몸으로 나진 것 뿐이지.”
“어, 뭐요? 용이면...... 그, 머리에 뿔 두 개 있고, 수염도 늘어지고, 울음소리는 나각과 같다는?”
“구름을 몰고 비를 이끌기도 하죠. 지금은 못하지만.”
밤새도록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주고받는 대화 속에 정리가 켜켜이 쌓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빌려주는 겁니다. 그러니, 돌려주러 와요.”
자미는 불쑥 검을 내밀었다. 그녀 아버지가 썼고, 이제는 유품이 된, 간밤 자미가 이무기 앞에서 휘둘렀던 검이었다. 왜? 누군가 그렇게 물으면 그녀는 선뜻 답하지 못한다. 그냥...... 마침 검도 없다니까. 또 어쩐지 헤어지기 아쉽기도 하고 말이다.
“당신 오는 날에, 그때 나도 같이 갈 예정이니까.”
해무는 다른 이무기를 사냥하러 떠나야 했다. 이 마을 이무기가 수컷인데, 근방에 암컷 이무기 또한 둥지를 틀었다. 하필 둘이 부부이고, 부창부수라고 둘 다 성질이 포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을을, 떠날 작정입니까?”
“있어봤자 좋은 소리 못 들어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여검사로 당신 일이나 돕죠 뭐. 그리고, 남의 옷고름 거의 풀었으면서 책임은 지셔야죠?”
자미는 지난밤 동굴에서, 계획으로만 끝났던 일을 상기시켰다. 해무가 멋적은 헛기침을 토했다.
“...... 잘 쓰고, 돌려주러 오죠. 그때까지 몸 추스르고 있기를.”
해무는 망설이다가 그것을 받았다. 그와 함께 돌아올 것을 기약했다. 자미는 간밤 격전의 후유증으로 인해 동행하는 건 무리였다.
“난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이나 몸 조심하십시오.”
“음, 이렇게 할까요? 배에 돛으로 표시하는 거죠. 무사하면 흰색, 아니면 붉은색으로.”
“그런 거 신경 쓸 시간에 빨리 오기나 해요.”
그렇게 둘은 잠시간 이별했다. 그리고 다음 만남을 기다렸다.
“늦네요. 몸 추스른 지가 언제인데.”
해안가 절벽에 서서 손차양을 만들어 눈에 댔다. 바다는 티 한 점 없이 그저 잔잔했다. 떠가는 배라고는 없다. 자미는 눈살을 찌푸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가 떠나간 지 벌써 100일이었다.
“저기 있다!”
그때였다. 마을 사람들이 단체로 우르르 몰려왔다. 저마다 얼굴이 불그죽죽하고 뭐 때문인지 성이 난 기색이었다.
“자미 아가씨, 당신 짓이요?”
“물으나 마나지! 이무기에 홀려서...... 그냥 동굴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그래, 그럼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인데.”
누구는 욕을 하고 누구는 눈을 부라리며 삿대질을 했다. 자미는 이 상황이 뭔가 싶어 고개를 기울였다. 여느 평범한 처녀라면 아연하게 질려 굳어 있을 일이지만, 그녀가 자라온 환경은 남다른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그저 그런 의문만 떠올랐다.
“여기서 도망친 이무기가 다른 마을에서 난리를 쳤다는데 설마 모르지는 않겠지!”
이무기는 죽었다. 이제 이 마을은 안전했다. 그러나 증거가 없었다. 사체는 온데간데없이 돌로 변했고, 때문에 그녀의 말을 믿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살아 돌아온 처녀를 재앙이라 믿었고 화근이라고 생각했다. 뭐, 대충 예상은 했지만. 자미는 한숨을 꿀꺽 삼켰다.
“대체 이 소리를 몇 번이나 하는지 헤아리기도 귀찮지만. 이무기는 죽었어요. 이 세상 이무기가 아니라고. 다른 마을에 출몰한 놈은, 그 정체가 짐작이 가긴 합니다만. 여하튼 이제 불안해할 필요 없다고요.”
자미는 또렷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물론 이번에도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고 믿지 않았다. 되려 또 헛소리를 한다며 비아냥거렸다. 그녀는 사람들의 악귀 같은 시선이 지긋지긋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배를 보았다. 돛이 붉은, 아니 흰데 붉은 배였다. 군데군데 남은 하얀 얼룩이 원래 돛의 색깔, 지금의 붉음은 분명 돛이 누군가의 피를 먹은 것이었다.
“뭐여, 웬 배라냐. 처음 보는 배 같은데?”
“배에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것 같아. 서, 설마 저것이 말로만 듣던, 그 유령선?”
“흐익! 귀신 붙은 배라는 거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지레 놀라 더는 자미를 추궁하지 않았다. 순간 그녀의 뇌리로 그와의 마지막 대화가 스쳤다.
‘배에 돛으로 표시하는 거죠. 무사하면 흰색, 아니면 붉은색으로.’
자미의 눈이 흔들렸다. 그때 자신은 뭐라 답했던가? 그녀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아니야, 무사히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분명, 그렇게 약속했어!”
발치에서 자갈이 굴렀다. 절벽에서 떨어져 푸른 바다로 사라졌다.
“자미 아가씨! 조심하......!”
저, 저런!”
“실성을 한 게야. 그렇지 않고서......”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옷자락 붙들 새도 없었다. 죽은 이 앞에서는 미운 마음도 넉넉해지는 법이라 했던가. 사람들은 자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런 마음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여쁜 처녀는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희게 부서진 파도 너머로 사라졌다. 팔랑거리는 치맛자락이 푸른 바다에 섞였다.
“미쳤습니까! 같이 떠나기로 했잖아! 그런데 웬 자살이야!”
희고 붉은, 기괴한 돛이 펄럭이는 배에서 해무의 고함이 울렸다. 그는 막 물에 뛰어든 자미를 건진 참이었다.
“그건 무슨 억측이랍니까? 자살을 왜 해?”
온몸에서 물이 줄줄 흘렀다. 짭짤한 바닷내도 진동했다. 자미는 물기 가득한 머리칼을 걷으며 해무를 살폈다.
“그럼 방금 내가 본 건 뭔데?”
“그거야 입수지. 빌려준 검 빨리 돌려받고 싶어서 지름길을 택한 것뿐입니다.”
“뭐?”
해무의 얼굴에 황당함이 번졌다. 자미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서 중얼거렸다.
“뭐, 걱정이 되기도 했고. 또, 보고 싶기도 했고.”
푸른 하늘 아래 파도가 넘실거렸다. 그리고 해무와 자미의 마음도 너울거렸다. 두 사람의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미의 시신을 끝까지 찾지 못했다. 그래서 가엾은 처녀의 넋을 기리며 무덤을 세웠다. 그들이 자미라는 처녀를 잊을 무렵, 가묘에서 이름 모를 꽃이 피었다. 붉은색 꽃은 꼭 100일간 피고 지었다. 훗날 사람들은 그 꽃을 백일홍이라고 불렀다.
감상: 자고로, 백일홍 하면 이 전설이다. 찾아보니 목본 백일홍이든 초본 백일홍이든, 이야기가 유사하다 못해 일난성 쌍둥이만치 닮았다. 그래서 두 전설을 잘 버무리고 적당히 현대적인 입맛에 맞게 각색도 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단편소설 비스무리한 게 위의 이야기 되시겠다.
듣기로 백일홍의 꽃잎이 족두리를 닮았다고 하는데, 그게 초본 백일홍인지 목본 백일홍인지 모르겠다. 직접 만져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출처 1: 문화콘텐츠닷컴
출처 2: 다음백과
출처 3: 도서 《꽃 따라 전설 따라》 - 저자 기억나지 않음(어릴 적에 책꽂이에 있었던 시리즈 아동용 도서)
자료 모음 및 편집/각색: 카페 작은 도서관 사서
사진 협찬(초본 백일홍): 현재 금산에서 사업 중인 귀촌 경영자
PS. 아래 동영상은 그분이 꾸민 텃밭 겸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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