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승과 추락, 떠나는 자와 남는 자, 굳은 악수와 냉정한 돌아섬, 그리고 이변과 반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대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바야흐로 정치동네에 봄이 왔다.
지난 19일에도 정치의 마을에서는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 한화갑 민주당 고문의 대선경선 후보 사퇴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당 내분사태 수습을 위한 긴급기자회견이었다.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묘하게도 발표 시간대마저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그 성격은 정반대였다. 하나는 `버림'이었고, 하나는 `집착'이었다.
버리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을 사람들은 아름답게 받아들인다. 그것은 떠남이 동반하게 마련인 묘한 울림과 비장미와도 연관된 듯하다.
그들의 의연함 뒤에는 소망했던 것을 이루지 못하고 포기하는 자의 고통과 슬픔이 배어 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상처입은 맹수의 고통스런 으르렁거림도 느껴진다. 그 비장감은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전염돼 가슴에 잠시 비를 내리게 한다.
따지고 보면 그런 느낌은 `함정'일 수 있다. 그들은 버리지만 결코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냉정한 정치적 계산 끝에 나온 일보후퇴일 뿐이다. 어느 때 카드를 던져야 가장 이득이 될지를 아는 동물적 후각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들에겐 당권이라는 다음의 목표가 있고, 차차기에 대한 야망이 있다. “이젠 쉬고 싶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도 없다. 현혹은 금물이다.
그럼에도 버림의 정치적 미학이 갖는 덕목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것은 비록 자신들에게는 아프지만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기꺼이 끌어안으려는 마음가짐이다.
민주화 운동의 적자이자 당내 개혁세력의 대표주자임을 자부하는 김근태 민주당 고문에게 진보표의 이탈은 아마 받아들이기 어려운 치욕이었을 것이다. 수십년간 풍찬노숙을 함께 해 왔던 광주지역 당원들의 등돌림은 한화갑 고문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분노와 아픔을 삭이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반란'을 인정했다.
이회창 총재의 내분수습 방안은 좋게 말하면 `물이 반쯤 찬 병'과도 같다. 총재권한대행 체제 도입이라는 `포기'와, 총재직 유지에 대한 `갈망'이 적당히 버무려진 종합편집이다. 이 물병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거기서 파격이 아닌 집착을 읽는다. 일사불란함에 대한 향수와 미련도 감지한다. 그래서 감동과 울림이 다가오지 않는다.
이 총재에게 당 내분 사태는 흔연히 모든 것을 버리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의 최대 약점인 가진 자, 기득권층, 협량의 이미지를 떨쳐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버린 뒤, 더이상 지킬 것이 없는 자의 편안함으로 싸움에 임하는 게 오히려 유리하다는 주변의 충고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집착의 마지막 끈을 놓지 않았다. 당내 일부세력의 반란을 `아름다운 반란'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자신이 납득하기 힘든 괴로움에 스스로를 친화시키려는 노력 보다는 현실이 자신을 따라와야 한다는 고집도 느껴진다.
그는 버림을 `정치미학적 허세'로 여긴 것일까. 아름다움이란 허망한 것이니, 순간적인 감정의 덫에 빠지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사즉생 생즉사'는 듣기 좋은 허언이며, 냉혹한 정치의 세계에서는 `사즉사 생즉생'만이 유일한 법칙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버린다고 모든 것을 잃는 게 아니고, 집착한다고 모든 것을 얻는 것도 아니다. 또 버림이 새로운 수확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며, 강한 집착이 원하는 결실로 이어지는 때도 있다. 그것은 이 총재나, 사퇴한 민주당의 두 후보 뿐 아니라 대선의 길목에 서 있는 모두에게 해당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