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와 마르타(루카 10,38~42)
루가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가르침이다. 그러나 루카는 자기만의 고유한 사상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사회정의와 구원의 보편성 확대이다. 따라서 이것을 전하기 위해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자신만의 고유한 본문들을 배치하고 있다. 바로 루카 복음 10장이 그렇다. 루카는 이 본문에서 세 개의 비주류인 집단과 하나의 주류 집단 이야기를 전개한다.
첫 번째는 익명의 제자단 이야기이다. 루카는 두 차례의 사도 선발과 파견을 제시한다. 1차는 갈릴래아 호숫가 지역을 중심으로 열두 사도 선발과 파견이다. 모두 실명으로 소개되고 신분도 정도 차이가 있지만 소개가 뒤따른다.(5,1-32;6,12-16;9.1-6). 예수님의 복음 운동은 반대의 표징도 컸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이제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에서도 전해야 한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일꾼이 너무 적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2차 제자들을 선발한다. 이들은 일흔두 명이다. 일흔두 명의 숫자는 노아의 아들 셈, 함, 야펫의 자손들로 세상의 모든 민족을 이룬 수와 일치한다.(창10,1-32). 구약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도 일인 지도력의 한계를 절감하며 일흔 명의 협조자를 뽑아 함께 활동하였다.(탈출 18,1327;민수11,24-30) 일흔두 명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일흔 한 명, 일흔 세명도 다 중요하다. 핵심은 인생도 구원도 소수 정예가 아닌 ‘함께 더불어’로 비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2차 선발된 제자들의 이름과 신분은 모두 익명이다. 실명인 열두 제자와 비교하면 비주류이다. 이들은 열두 제자와 달리 둘씩 짝을 지어 파견하셨다. 열두 제자 파견 때보다 당부와 활동 지시 사항도 훨씬 많고 자세하다. 조직과 활동이 훨씬 체계화되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게다가 예수님은 파견식을 거행하시면서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 언중유골로 콘크리트를 친다. 이들의 활동 보고를 보면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예수님도 매우 기뻐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에 대해 그 너머를 더 알고 계신다. 바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스스로 자처하는 이들, 즉 유대인들 그중 율법 학자들은, 주님을 보고 들어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임을. 그러나 유식하지도 뛰어나지도 못한 철부지 제자들과 백성들이 먼저 주님을 알아본다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했다. 이 사람은 당대 주류 계급의 사람이다. 비록 대사제직을 독점하는 사두가이파 집단만큼은 못 했지만. 일흔 두명의 예수님 제자에 비하면 비교불가의 주류이다. 주류가 묻는다. “어떻게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라고. 교육자중 교육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외려 산파술로 반문한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있고,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바리사이가 말로만 정답을 말씀드리자, “그렇게 하면 네가 영원히)살 것이다”라고 답변하신다. 정답을 찾고 칭찬까지 받아 한껏 고무된 현자 율법 교사는, 짐짓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고자 실은 거듭되는 무지와 이기적 본성을 드러내는 줄도 모르고 다시 질문한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러자 그 유명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가 제시된다.
사마리아 사람, 두 번째 비주류 이야기이다. 다윗에 의해 통일된 이스라엘 왕국은 르하브암 왕 때(BC933) 남북으로 나뉘었다. 사마리아는 고대 이스라엘 북 왕국에 속하는 지역으로,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제국에 멸망되었고, 주변 이민족들과 섞여 살면서 민족적 종교적 순수성을 상실했다. 이후 스스로 정통으로 자처하는 남 유다인들에게 무시와 배척을 받고 살아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 이웃사랑 실천에는 더할 나위 없이 민첩하고 훌륭한 비주류의 제자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마리아 사람이 다 훌륭한 것은 아니다. 바로 앞 본문에서 어떤 사마리아 마을은 예수를 복음을 거부했다(루카 9,51-56). 물었으니 주님은 정답을 주신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세 번째 비주류, 여성 제자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 이야기다. 예수님 시대 여성은 확실하게 비주류였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상당 수준 그렇다. 암튼 이 본문에 많은 성경 전문가들이 주옥같은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주로 신앙생활의 영)정신 활동과 육체)존재를 구분하고 대조하는 해석이다. 마르타는 활동을, 마리아는 기도와 관상을 대표하는데, ‘우선(先)’과 ‘통합’으로 제시한다. 신앙과 인생에서 우선과 중요성의 수순과 분별 선택은 정말 중요하다. 사람의 일도 하느님의 일도 우선되고 본질적인 것이, 차선이고 부수적인 것에 앞서야 한다. 우선과 본질이 잘 통찰되고 정립되면 부수적이고 차선인 것은 대개 저절로 따라오고 이루어지는 법이다. 삶이든 신앙이든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역逆은 드물거나 대체로 성립되지 않는다.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의 길!’, 주님을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은 다양하게 반응한다. 마르타와 마리아에 대한 본문은 그저 다섯 줄에 불과한데 참으로 많은 가르침을 품고 있다. 루카 복음에서 마리아는 세 번(성모 마리아 예외) 등장한다.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뒤 예수님의 복음 활동에 투신하던 막달레나 마리아(8,2).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10,39), 주님의 무덤을 찾아 가장 먼저 부활을 확인한 여인중 마리아 막달레나(24,1). 그런데 죄 많은 여자로 소개되는 여인(7,38)이 같은 인물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정황상 같다고 보인다. 마르타의 집은 교회였다. 주님이 설교)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마리아는 처음부터 작정하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가르침을 경청하는 일을 선택했다. 어디든 사람이 모이면 두 가지 양식이 있어야 한다. 배우는 일과 먹어야 하는 일이다. 더구나 주님을 모신 자리다. 먹는 것과 관련하여 어린 시절 나는 ‘사람이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것도 맞는 것 같고, 저것도 맞는 것 같고.....여러 사람이 모인 교회)집,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에 집중했고 분주했고 혼자 동분서주하다보니, 주님 발치에서 말씀만 듣고 있는 동생 마리아가 부당해 보였다. 본인이 직접 말하면 더 좋으련만 에둘러 예수님을 재판관으로 부탁한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신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마리아의 태도는 제자의 행동이다. 복음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루카 저자가 에둘러 표현하는 속 뜻 그윽한 보편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모두 제자이다. 또한 왜, 일흔 두 제자의 선발과 활동에 이어 배치되고 마무리되는가? 왜, 사마리아 사람인가? 왜, 더 좋은 몫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사람이 남성 제자 중 한 명이 아닌 여성이며, 그것도 과거사를 지닌 마리아인가? 마리아는 과거 예수님의 뒤쪽 발치에서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며 회개해야만 하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제자가 된 뒤로는 주님의 앞쪽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다. 복음서에는 제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 주님의 발치 앞에서 말씀을 경청한 사람으로는 마리아가 유일하다. 그런 그녀이기에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위대한 믿음과 용기로 이어졌을 것이다.
위대한 복음 저자 루카는 기록된 말씀과 스승 예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읽고 알아들었기에, 이렇게 비주류 사람들도 구원자 반열에 그리고 제자로 과감하게 포함시킨다. 시대를 뛰어넘은 탁월한 그의 정의와 보편사상 통찰과 기록에 감탄을 넘어 겸허한 감사의 마음이다. 2000년 전 그 아득한 시대에. 그들은 이름이 없고 그들은 천대받고 무시받는 집단이며, 그들은 여성이고 심지어 한때 어둠의 여인이다.
신앙생활을 하다 어려움이 생기면 가장 먼저 버리는 분은 하느님이다. 거룩한 독서 성서백주간을 하는 중에 자주 목격되는 것이 있다. 가정과 개인에 어려움이 생기면 가장 먼저 버리는 것은 말씀이다. 하느님이 말씀이고 말씀이 하느님인데. (요한1,1). 우리 가운데 여전히 마리아보다 마르타가 많다는 간접 증거다. 마르타 없는 마리아는 거짓 신앙일 수 있고, 마리아 없는 마르타는 맹목 신앙일 수 있다.
마리아가 되면 마르타는 따라오지만, 마르타를 하면 마르타마저 버리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물론 경우에 따라 마르타가 더 선행되어야 할 때도 분명히 많다. 그러나 신앙과 인생에 분명 우선과 중요의 순서가 분별되고 선택되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