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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尹瓘)은 자가 동헌(同玄)이며 파평현(坡平縣) 사람이다. 고조(高祖)인 윤신달(尹莘達)은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공신(三韓功臣)이 되었으며, 아버지 윤집형(尹執衡)은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을 지냈다. 윤관은 문종(文宗)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습유(拾遣)·보궐(補闕)을 역임하였으며, 숙종(肅宗) 때 동궁시강학사 어사대부 이부상서 한림학사승지(東宮侍講學士 御史大夫 吏部尙書 翰林學士承旨)로 여러 차례 승진하였다.
여진(女眞)은 본디 말갈(靺鞨)의 유종(遺種)으로 수(隋)·당(唐) 사이에 고구려[勾高麗]에 병합되었으며, 나중에 취락(聚落)을 이루고 산택(山澤)에 흩어져 살면서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였다. 정주(定州)·삭주(朔州) 근처의 국경에 거주하는 자가 비록 간혹 내부(內附)하기도 했으나 잠시 신하노릇을 하다가 갑자기 배신하기도 하였다. 영가(盈哥)와 오아속(烏雅束)에 이르러 서로 이어서 추장(酋長)이 되니 자못 무리의 인심을 얻어 그 기세가 점차 사나워졌다. 이위(伊位)의 경계 위로 산이 잇달아 연결되어 있는데, 동해안으로부터 우뚝 솟아 우리의 북쪽 변방에 이르기까지 매우 험하고 황량하여 사람이나 말이 넘어갈 수가 없었다. 틈새로 길이 하나 있고 속칭 병목[甁項]이라 하였는데, 출입하는 구멍이 하나뿐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공을 세우려는 사람이 때때로 의견을 올리기를, 그 길을 막아버리면 오랑캐의 길이 끊어질 것이니 군사를 내어 그들을 평정할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숙종〉 7년(1102)에 여진이 정주관(定州關) 밖에 주둔하니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까 의심하여 추장(酋長)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꾀어 잡아 광주(廣州)에 가두고 고문하였는데, 과연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었으므로 마침내 〈그들을〉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마침 변장(邊將) 이일숙(李日肅) 등이 아뢰기를, “여진은 허약하여 두려워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손에 넣지 않고 기회를 잃으면 후에 반드시 골칫거리가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오아속이 또 별부(別部)의 부내로(夫乃老)와 사이가 벌어져 군사를 일으켜 그를 공격하려고 국경 근처에 와서 주둔하자, 왕이 임간(林幹)에게 명령하여 가서 대비하도록 하였다. 임간이 공을 세우는데 급급하여 병사를 이끌고 깊이 들어갔는데 그들에게 공격을 받아 연달아 패배하여 죽은 자가 거의 절반이었다. 여진이 승세를 타고 정주(定州) 선덕관(宣德關)의 성에 난입하여 죽이고 노략질 한 것이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윤관을 임간 대신으로 동북면행영도통(東北面行營都統)에 임명하고 부월(鈇鉞)을 주어 보냈다. 윤관이 적과 싸워 30여 급(級)을 베었으나, 우리 군사도 싸우다 죽거나 다친 자가 절반이 넘어 군세(軍勢)가 부진하니, 결국 언사(言辭)를 낮추어 강화(講和)하여 맹약을 맺고 돌아왔다. 왕이 분노하여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고하기를, “원컨대 은밀하게 도움을 주어 적경(賊境)을 소탕하게 해주시면 그 땅에 불우(佛宇)를 지어 바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윤관이 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 겸 태자빈객(叅知政事 判尙書刑部事兼太子賓客)으로 승진하자 아뢰어 말하기를, “신이 적의 기세를 보건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굳세니, 마땅히 군사를 쉬게 하고 군관을 길러서 후일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또 신이 싸움에서 진 것은 적은 기병(騎兵)인데 우리는 보병(步兵)이라 대적할 수가 없었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윤관이〉 건의하여 처음으로 별무반(別武班)을 만들었으니, 문무산관(文武散官)과 이서(吏胥)로부터 상인(商賈)·복예(僕隷) 및 주부군현민(州府郡縣民)에 이르기까지, 무릇, 말[馬]이 있는 사람은 신기(神騎)를 삼고, 말이 없는 사람은 신보(神步)·도탕(跳蕩)·경궁(梗弓)·정노(精弩)·발화(發火) 등 군(軍)을 삼되, 20세 이상 남자로 과거 응시자가 아니면 모두 신보에 속하게 하고, 서반(西班)과 여러 진(鎭)·부(府)의 군인은 사시(四時)로 훈련하였으며, 또 승도(僧徒)를 선발하여 항마군(降魔軍)을 삼았다. 드디어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을 비축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다. 중서시랑 동평장사(中書侍郞 同平章事)로 승진하였다.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숙종의〉 상사(喪事)로 인하여 출병시킬 겨를이 없었다. 〈예종〉 2년(1107)에 변방의 장수가 보고하기를, “여진(女眞)이 매우 사나워 변방의 성을 침입[侵突]하고 있습니다. 그 추장이 조롱박 하나를 꿩 꼬리털에 매달아 여러 부락에 돌려 보이면서 의논하고 있으니 그 마음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라 하였다. 왕이 그것을 듣고 중광전(重光殿)에 나아가, 불감(佛龕)에 감추어둔 숙종(肅宗)의 발원문을 양부(兩府) 대신에게 보였다. 대신들이 받들어 읽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성고(聖考)의 남기신 뜻이 이처럼 깊고 간절하시니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이에 상서(上書)하여 선왕의 뜻을 이어 여진을 정벌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하고 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에게 명령하여 태묘(太廟)에 가서 점을 치게 하였는데, 감(坎)의 기제(旣濟)를 얻으니 드디어 출병하기로 의논을 정하여 윤관을 원수(元帥)로 삼고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았다. 윤관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선왕[聖考]의 밀지를 받들었고 지금 또 엄명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삼군을 통솔하여 적의 성채를 깨뜨리고, 우리의 강토를 개척하고 나라의 수치를 씻지 않겠습니까.”라 하였다. 오연총이 자못 의심이 나서 가만히 윤관에게 말하였는데, 윤관이 태연한 기색으로 말하기를, “공과 내가 아니면 누가 만 번 죽을 땅으로 나아가 국가의 수치를 씻겠는가? 계책은 이미 결정되었는데 또 무엇을 의심하겠는가?”라 하니, 오연총이 잠자코 있었다.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위봉루(威鳳摟)에 가서 부월(鈇鉞)을 하사하고 그들을 보냈다.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이 동계(東界)에 이르러 장춘역(長春驛)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무릇 17만으로 20만이라고 칭했다. 병마판관(兵馬判官) 최홍정(崔弘正)·황군상(黃君裳)을 정주(定州)와 장주(長州) 2주에 나누어 보내고 여진(女眞) 추장에게 속여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돌려보내고자 하니 와서 명령을 들으라.”고 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다. 추장들이 그것을 믿어 고라(古羅) 등 400여 인이 이르니 술을 마시고 취하게 하여, 매복해 있는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그 가운데 건장하고 교활한 자 5, 60명은 관문에 이르러 의심을 품고 들어오지 않았다.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부필(金富弼)·녹사(錄事) 척준경(拓俊京)에게 길을 나누어 매복하게 하고, 또 최홍정에게 정예 기병을 이끌고 그들에게 응전하도록 하였는데, 포로로 붙잡거나 죽인 것이 거의 태반이었다. 윤관이 스스로 53,000명을 이끌고 정주 대화문(大和門)으로 나가고, 중군병마사 좌복야(中軍兵馬使 左僕射) 김한충(金漢忠)이 36,000명을 이끌고 안육수(安陸戍)로 나갔으며, 좌군병마사 좌산기상시(左軍兵馬使 左散騎常侍) 문관(文冠)이 33,900명을 이끌고 정주 홍화문(弘化門)으로 나갔다. 우군병마사 병부상서(右軍兵馬使 兵部尙書) 김덕진(金德珍)이 43,800명을 이끌고 선덕진(宣德鎭)의 안해수(安海戍)·거방수(拒防戍)의 2수(戍) 사이로 나가고, 선병별감 이부원외랑(船兵別監 吏部員外郞) 양유송(梁惟竦), 원흥도부서사(元興都部署使) 정숭용(鄭崇用), 진명도부서부사(鎭溟都部署副使) 견응도(甄應圖) 등이 선병(船兵) 2,600명을 이끌고 도린포(道鱗浦)로 나갔다. 윤관이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을 지나 한나절을 행군하니, 여진은 〈고려의〉 군세가 굉장히 강한 것을 보고 모두 도망쳐 달아났으며 기르던 가축만 들판에 흩어져 있었다. 문내니촌(文乃泥村)에 이르자 적들이 동음성(冬音城)으로 들어가 지킬 뿐이었다.
윤관이 병마령할(兵馬鈴轄) 임언(林彦)과 최홍정을 보내 정예 병사를 거느리고 급습하여 파괴시키고 패주시켰다. 좌군이 석성(石城) 아래에 이르러 여진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통역자인 대언(戴彦)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니 여진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한 번 싸워 승부를 결정지을 것인데, 어찌 항복을 말하는가.”라 하였다. 드디어 석성으로 들어가니 〈적이〉 막아 싸우는데 화살과 돌이 비가 내리는 듯하여 군사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윤관이 척준경에게 말하기를, “해가 저물면 일이 급하게 될 것이니, 너는 장군(將軍) 이관진(李冠珍)과 함께 그들을 공격하라.”고 하였다. 〈척준경이〉 말하기를, “저는 일찍이 장주(長州)에서 일을 보았는데, 잘못하여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공이 저를 장사(壯士)라고 하면서 조정에 용서해 주실 것을 청하였으니, 오늘 제가 몸을 희생하여 은혜를 갚을 때입니다.”라 하였다. 드디어 석성(石城) 아래 이르러 갑옷을 두르고 방패를 잡아 적진 한 가운데 돌입하여 추장 여러 명을 때려 죽였다. 이에 윤관의 휘하들이 좌군과 합세하여 〈여진을〉 공격하고 죽을 각오로 싸워 크게 무찌르니 적은 혹 바위에서 투신하기도 하였으며 남녀노소를 모두 섬멸하였다. 척준경에게 능라(綾羅) 30필을 상으로 주었으며, 또 최홍정과 김부필, 녹사 이준양(李俊陽)을 보내 이위동(伊位洞)을 공격하니 적이 역습(逆襲)하였으나 오래 싸운 끝에 이겨 1,200명의 목을 베었다. 중군(中軍)이 고사한촌(高史漢村) 등 35개 촌을 격파하여 380명의 목을 베고 230명을 사로잡았으며, 우군(右軍)은 광탄촌(廣灘村) 등 32개 촌을 격파하여 290명의 목을 베고 300명을 사로잡았다. 좌군(左軍)은 심곤촌(深昆村) 등 31개 촌을 격파하여 950명의 목을 베었으며, 윤관의 군대는 대내파지촌으로부터 37개 촌을 격파하여 2,120명의 목을 베고 500명을 사로잡았으며 녹사 유영약(兪瑩若)을 보내 승리를 알렸다. 왕이 기뻐하여 유영약에게 7품의 벼슬을 내리고 좌부승지 병부낭중(左副承旨 兵部郞中) 심후(沈侯), 내시 형부원외랑(內侍 刑部員外郞) 한교여(韓皦如)에게 조서를 내리도록 명령하였으며, 두 원수와 여러 장수들에게 차등 있게 물건을 하사하여 격려하였다. 윤관이 또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 지계(地界)를 획정(劃定)하였는데, 동쪽으로는 화곶령(火串嶺)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궁한이령(弓漢伊嶺)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에 이르렀다. 또 일관(日官) 최자호(崔資顥)을 보내어 몽라골령 아래의 땅을 살펴 성랑(城廊) 950칸을 짓고 영주(英州)라고 불렀으며, 화곶령(火串嶺) 아래에 992칸을 짓고 웅주(雄州)라 불렀으며,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74칸을 짓고 복주(福州)라고 불렀으며, 궁한이촌(弓漢伊村)에 670칸을 짓고 길주(吉州)라고 불렀으며, 또 호국 인왕사(護國仁王寺)와 진동 보제사(鎭東普濟寺) 두 절을 영주성(英州城) 안에 창건하였다.
이듬해(1108)에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이 정예병사 8,000명을 거느리고 가한촌(加漢村) 병목[甁項]의 작은 길로 나갔다. 적이 나무가 우거진 곳 사이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윤관의 군대가 이르기를 기다려 갑자기 공격하니 〈윤관의〉 군사가 모두 궤멸되고 간신히 10여명만 남았다. 적이 윤관 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고, 오연총은 화살에 맞아 형세가 매우 위급하였다. 척준경(拓俊京)이 용사 10여 명을 이끌고 와서 그들을 구원하려 하였다. 척준경의 동생인 낭장(郞將) 척준신(拓俊臣)이 만류하며 말하기를, “적진이 견고하여 깨뜨릴 수 없으니 헛되이 죽는 것이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척준경이 말하기를, “너는 돌아가서 늙은 아버지를 모셔야 하지만 나는 몸을 나라에 바친 것이니 의리상 그만둘 수 없다.”라 하고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적진으로 돌진하여 10여 명을 때려 죽였다. 최홍정(崔弘正)과 이관진(李冠珍) 등이 골짜기에서 병사를 이끌고 와서 구원하니 적이 포위를 풀고 도망하였는데, 추격해서 36명의 머리를 베었다. 윤관 등은 날이 저물자 돌아와 영주성(英州城)으로 들어왔다. 윤관이 울면서 척준경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지금부터 나는 너를 아들과 같이 여길 것이니, 너도 당연히 나를 아버지처럼 여기라.”고 하였다. 〈윤관은〉 왕의 분부를 받들어 〈척준경을〉 합문지후(閤門祇候)에 제수하였다.
추장 아노환(阿老喚) 등 403명이 진영 앞에 이르러 항복을 청하였으며, 남녀 1,460여 명이 또 좌군(左軍)에 항복을 청하였다. 적의 보병 20,000명이 영주성 남쪽에 와서 진을 치고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싸움을 걸어오자 윤관과 임언(林彦)이 말하기를, “저 무리는 많고 우리는 적어서, 세력이 대적할 수 없으니 마땅히 굳게 지킬 뿐이다.”라 하였다. 척준경이 말하기를, “만약 나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적병은 나날이 늘어날 것이고, 성 안에 식량이 다하고 밖에서 도움이 오지 않는다면 장차 어찌할 것입니까? 전날의 승리를 여러 공들이 보지 않았습니까? 오늘 또 나가 죽을힘을 다하여 싸울 것이니, 청컨대 여러 공께서는 성에 올라 보십시오.”라 하였다. 이에 죽음을 감수한 병사를 이끌고 성을 나가서 싸워 19명의 목을 베니, 적이 패전하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척준경이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돌아오니 윤관 등이 누각 아래로 나아가 맞이하여 손을 잡고 서로 절하였다.
윤관과 오연총이 여러 장수를 이끌고 중성대도독부(中城大都督府)에 모였다. 권지승선(權知承宣) 왕자지(王字之)가 공험성(公嶮城)에서 병사를 거느리고 도독부(都督府)로 오다가, 갑자기 오랑캐의 추장 사현(史現)의 병사를 만나 싸우다가 패하고 타고 있던 말까지 잃어버렸다. 척준경이 즉시 굳센 병졸을 이끌고 가서 구원하고 적을 물리쳤으며 갑옷 입은 말까지 잡아서 돌아왔다. 여진(女眞)의 병사 수만 명이 와서 웅주(雄州)를 포위하였다. 최홍정이 군사들을 타이르니 무리가 모두 싸우기로 생각하고, 즉시 네 곳의 문을 열고 동시에 나아가 힘을 다해 공격하니 적이 크게 패하였다. 80명을 잡아 목을 베었으며, 병차(兵車) 50여 량과 중차(中車) 200량, 말 40필을 노획하였으며, 나머지 병장기는 〈일일이〉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때 척준경이 성 안에 있었는데, 주수(州守)가 말하여 이르기를, “성을 지키는 것이 오래되어 군량이 떨어질 것 같은데 밖에서 도움이 오지 않으니, 공이 만약 성을 나가서 군대를 거두고 돌아와 성 안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사졸이 한 사람도 남지 않을까 두렵습니다.”라 하였다. 척준경은 병사의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밤에 줄을 타고 성에서 내려왔으며, 정주(定州)로 돌아가 군사를 정돈하여 통태진(通泰鎭)을 통과하고 야등포(也等浦)에서 길주(吉州)까지 적을 만나 싸워 크게 패배시켰으니, 성 안의 사람들이 감격하여 울었다.
윤관(尹瓘)이 영주(英州)·복주(福州)·웅주(雄州)·길주(吉州)·함주(咸州) 및 공험진(公嶮鎭)에 성을 쌓고, 드디어 공험진에 비(碑)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 그 아들인 윤언순(尹彦純)을 보내 하례하는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덕은, 진실로 천지에 합당하여 인의(仁義)의 군사가 이미 오랑캐를 평정하였으니, 장수와 병졸은 이미 환호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동여진(東女眞)은 오지(奧地)에 잠복하며 추악한 무리들이 번성하였으니, 옛날부터 그 조상대대로 일찍이 우리 조정의 은혜를 입어왔으면서도, 이리 같은 탐욕에 물들어 배반하는 마음을 길렀으며, 개가 짖어대는 것처럼 자주 문 밖에서 으르렁거리면서 국경의 요새를 침범하고 사민(士民)을 약탈하였습니다. 관대하게 통제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노략질하기 쉽다고 말하였으며, 야욕을 품은 뜻이 방자해져서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선황(先皇)께서 분노하여 〈그들을〉 토벌하고자 하셨으며, 폐하께서는 그 뜻을 막 이어받아 도모하셨으나 전쟁은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결정하여 실시하기를 꺼렸고, 계책이 여러 가지였기 때문에 마침내 지체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승부를 결정하는 것은 숙련됨에 있으니, 변통(變通)을 아는 자는 때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일의 기틀이 〈승세를〉 탈 수 있게 되었으니, 성지(聖智)가 홀로 밝아 먼저 우리 사졸(士卒)을 쉬게 하여 쓸 수 있는가를 관찰하고, 저들의 허실을 계속 생각하여 반드시 사로잡을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이에 원수(元帥)에게 명령하시어 빨리 가서 모두 죽일 것을 명령하셨으며, 신이 절월(節鉞)의 명령을 받고 정고(征鼓)를 들고 떠나게 하시었습니다. 기운은 군사를 움직이고 위세는 적에게 더하시니, 강물이 쏟아져 내리니 한 치의 아교로 막아낼 수 없고 돌덩이가 봉우리에서 굴러 내려오니 속 빈 알이 깨어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포로로 잡은 것이 5,000명[半萬]을 넘으며, 잡아서 목을 벤 것은 5,000명에 가깝습니다. 쌓아둔 곡식은 마을마다 흩어졌고, 바쁘게 도망가는 사람은 도로에 엇갈렸습니다. 산천이 험악하여 성과 해자[城池]도 높고 깊었으며, 평야가 기름지고 비옥하여 밭도 갈고 우물도 팔 수 있으니, 옛날부터 사람들이 구하고자 했으나 얻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하늘이 주어 이미 이것을 얻었으니 위로는 종묘와 하늘에 계신 영령에게 족히 감사할만하며, 아래로는 조정의 해묵은 수치를 충분히 씻을 만하였습니다. 또 저 주(周)의 왕이 험윤(玁狁)을 정벌한 것과 한(漢)의 황제가 흉노(匈奴)를 정벌한 것은 영토를 개척하고 변방을 넓혀서 민(民)을 위해 해로운 것을 제거한 것이니, 오늘과 비교한다면 마땅히 한수 아래입니다. 이 어찌 미천한 신(臣)의 얕은 지혜와 노둔한 재능으로 큰 효과를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실로 폐하의 성스러운 지략과 신묘한 계책에서 비롯하여 멀리 앉아서 평정한 것입니다. 진실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역사에 기록하도록 명령하여 무궁히 빛나게 하소서.”라 하였다.
왕이 내시 위위주부(內侍 衛尉注簿) 강영준(康英俊)을 보내, 윤관 등에게 양(羊)과 술을 하사하고, 아울러 군인들에게도 은사라(銀鐁鑼) 1개[面]와 은병(銀甁) 40개[事]를 하사하였다.
윤관(尹瓘)이 또 임언(林彦)으로 하여금 그 일을 기록하게 하고, 영주(英州) 관청의 벽에 쓰게 하여 말하기를,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약한 것은 본디 강한 것을 대적할 수 없으며, 작은 것은 본디 큰 적을 대적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내가 이 말을 외운 것이 오래되었으나 지금에서야 〈이것을〉 믿게 되었다. 여진(女眞)은 우리나라보다 강함을 따지면 약하고 많은 것을 따지면 적어 그 기세가 아주 다른데, 변방을 엿보다가 숙종(肅宗) 10년(1105)에 틈을 타 난을 일으켜 우리의 사민(士民)을 많이 죽였고, 포승으로 묶어 노예로 삼은 것이 또한 많았다. 숙종께서 분노하여 군사를 모아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그들을 토벌하려 하였는데, 애석하게도 그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지금 임금〈예종〉께서 왕위를 이어 상복을 입으신지 3년이라 이제 막 대상(大祥)과 담제(禫祭)를 마치시고 좌우에 말하기를, ‘여진은 본디 고구려[勾高麗]의 부락으로서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면서, 대대로 공직(貢職)을 바치며 우리 조종(祖宗)의 깊은 은혜를 깊이 입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무도(無道)하게 배반하니, 선고(先考)께서 크게 분노하였다. 일찍이 듣건대 옛사람이 말하는 큰 효도라는 것은 그 뜻을 잘 계승하는 것일 뿐이라 하였다. 짐이 지금 다행스럽게도 달제(達制)를 마치고 국사(國事)를 보게 되었으니, 어찌 의로운 깃발을 들어 무도함을 정벌하여 아버지의 치욕을 완전히 씻지 않겠는가?’라 하셨다. 이에 명령하여, 수사도 중서시랑평장사(守司徒 中書侍郞平章事) 윤관을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로 삼고, 지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 翰林學士承旨)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정병(精兵) 30만 명을 거느리고 정벌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윤관은 일을 하는데 뛰어난 사람으로 일찍이 김유신(金庾信)의 사람 됨됨이를 사모하여 말하기를, ‘김유신은 6월에 강을 얼게 하여 3군을 건너게 하였으니, 이것은 다름 아니라 지극한 정성일 뿐이다. 나 역시 그렇게 하지 못할 사람이겠는가?’라 하였으니, 지극한 정성에 감응하여 신이한 행적이 여러 번 들렸다. 오연총이 그때 명망이 뛰어나 천성이 진실하고 근면하여 일에 닥쳐서는 반드시 세 번 생각하여 좋은 계획과 큰 계책이 적중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두 공이 일찍이 이것에 뜻을 두어 명령을 듣자 분격하여 군사를 데리고 동쪽으로 갔다. 군사가 출발하는 날에 몸소 갑옷을 두르고 맹세하기도 전에 눈물을 흘리며 모두 명령을 따랐다. 적경(賊境)에 들어서서는 3군이 분격하여 소리치며 일당백으로 싸우니, 마른 나무를 꺾고 대나무를 쪼개는 것처럼 말할 것이 못될 정도로 쉽게 깨우쳐 주었다. 6,000여 명의 머리를 베었고 그 활과 화살을 싣고 진(陣) 앞으로 와서 항복하는 자는 50,000여명이었으며, 그 흙먼지를 보고 혼이 빠져 북쪽 끝까지 달아나는 자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아! 여진이 완악하고 어리석어, 강약(强弱)과 중과(衆寡)의 기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스스로 멸망으로 간 것이 이와 같았다. 그 땅의 둘레는 300리로 동쪽은 대해(大海)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개마산(盖馬山)이며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정주(定州)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고구려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무릇 고구려가 예전에 잃었던 것인데 지금 임금께서 그 후에 얻은 것이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에 6성(城)을 새로 설치하였으니, 첫 번째는 진동군(鎭東軍)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로, 병민(兵民)이 1,948정호(丁戶)이다. 두 번째는 안령군(安嶺軍) 영주방어사(英州防禦使)로 병민이 1,238정호이다. 세 번째는 영해군(寧海軍) 웅주방어사(雄州防禦使)로 병민이 1,436정호이다. 네 번째는 길주방어사(吉州防禦使)로 병민이 680정호이다. 다섯 번째로 복주방어사(福州防禦使)로 병민이 632정호이다. 여섯 번째는 공험진방어사(公嶮鎭防禦使)로 병민이 532정호이다. 현달하여 어질고 재주가 뛰어나 그 책임을 감당할 만한 인물을 선발하여 그곳을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울타리가 되고 담장이 되어 왕실의 번병(藩屛)이 된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편안하게 높은 베개를 벨 수 있게 되었고 전쟁의 근심[東顧之憂]이 없어졌다. 원수가 나에게 말하기를, ‘옛날 당(唐)의 재상 배진공(裴晋公)이 회서(淮西)로 출정하여 평정했을 때, 막객(幕客)인 한유(韓愈)가 비석을 세워 그 일을 널리 알렸다. 후대 사람들은 헌종(憲宗)이 장엄하며 남보다 뛰어난 덕이 있음을 알고 그를 칭송하였다. 네가 다행히 이 일에 종군하여 그 본말을 자세히 알고 있으니, 기문(記文)을 지어 우리 성조(聖朝)의 전에 없는 위대한 공적을 무궁토록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임언이 명을 받고 붓을 잡아 그것을 기록한다.”라 하였다.
윤관(尹瓘)이 포로 346구(口)와 말 96필, 소 300여 마리(頭)를 바치고 의주(宜州)와 통태진(通泰鎭)·평융진(平戎鎭)의 2진과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吉州)·복주(福州)와 공험진(公嶮鎭)에 성을 쌓고 북계(北界) 9성이라 하였으며, 모두 남계(南界)의 민(民)을 이주시켜 성을 채웠다.
왕이 윤관(尹瓘)에게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 判尙書吏部事 知軍國重事), 오연총(吳延寵)에게는 협모동덕치원공신 상서좌복야 참지정사(協謀同德致遠功臣 尙書左僕射 叅知政事)의 벼슬을 내렸는데, 내시낭중(內侍郞中) 한교여(韓皦如)를 보내어 조서(詔書)와 고신(告身) 및 자주색으로 수놓은 안장 일체와 내구마(內廐馬) 2필을 가지고 웅주(雄州)로 가서 나누어 내려주게 하였다.
싸움에 이기고 돌아오자 왕이 고취(鼓吹)와 군위(軍衛)를 갖추어 그들을 맞이하도록 명령하고, 대방후(帶方侯) 왕보(王俌)와 제안후(齊安侯) 왕서(王偦)를 보내 동교(東郊)에서 위로연을 베풀었다.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이 경령전(景靈殿)에 이르러 복명(復命)하고 부월(鈇鉞)을 바치니, 왕이 문덕전(文德殿)에 나아가 〈그들을〉 불러 보고 변방의 일을 물었는데, 밤이 되서야 끝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진(女眞)이 또 웅주(雄州)를 포위하니 왕이 오연총(吳延寵)을 보내 그들을 구원하게 하고 다시 윤관을 보내 그들을 정벌하였다. 윤관이 수급(首級) 31개를 바치니 곧 윤관을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 식읍 2,500호, 식실봉 300호에 책봉하였고 오연총에게는 양구진국공신(攘寇鎭國功臣)의 호를 더하였다.
또 그 다음 해(1109) 여진(女眞)이 길주(吉州)를 포위하니 오연총(吳延寵)이 전투에 참여하였으나 크게 패했다. 왕이 또 윤관(尹瓘)을 보내 그들을 구원하게 하고, 근신(近臣)에게 명령하여 금교역(金郊驛)에서 전별하게 하였다. 윤관과 오연총이 정주(定州)로부터 병사를 이끌고 길주(吉州)로 가다가 나복기촌(那卜其村)에 이르니 함주사록(咸州司錄) 유원서(兪元胥)가 말을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여진의 공형(公兄)인 요불(褭弗)과 사현(史顯) 등이 성문을 두드리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어제 아지고촌(阿之古村)에 당도하였는데, 태사(太師) 오아속(烏雅束)이 강화를 청하고자 하여 우리로 하여금 〈고려의〉 병마사(兵馬使)에게 알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병사가 교전중이라 감히 관문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우리가 있는 장소에 사람을 보내 준다면 태사가 말한 바를 상세하고 확실하게 전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윤관 등이 그것을 듣고 돌아와 성으로 들어왔다. 다음날 병마기사(兵馬記事) 이관중(李管仲)을 적장(賊場)에 보내어 여진 장군 오사(吳舍)에게 말하기를, “강화를 하는 것은 병마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공형 등을 보내어 들어와 조정에 아뢰도록 할 것이다.”라 말하니, 오사가 크게 기뻐하였다. 요불과 사현 등이 다시 함주(咸州)에 이르러, 아뢰어 말하기를, “우리들이 입조(入朝)하기를 원하지만, 지금 한창 전쟁 중이라 의심스럽고 두려워 감히 관문을 들어가지 못하겠으니 관인(官人)을 인질로 교환하기를 바랍니다.”라 하였다. 윤관이 공옥(孔沃)·이관중·이현(異賢) 등을 인질로 하니, 요불 등이 드디어 와서 9성 지역을 돌려주기를 청하였다.
처음에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병목 지역을 차지하여 그 길을 막으면 오랑캐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없어질 것이라고 하여 이때 이르러 공격하여 빼앗았는데, 물과 뭍으로 도로(道路)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전에 듣던 것과 매우 달랐다. 여진이 이미 그 소굴을 잃자 보복하고자 맹세하며, 땅을 돌려달라는 것을 빌미로 여러 추장들이 해마다 와서 다투었다. 간사한 속임수와 여러 무기가 이르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성이 험하고 굳건하여 갑자기 빼앗기지는 않았으나 싸워서 지키는 임무를 맡아서는 우리 병사들을 잃은 것이 또한 많았다. 또 개척한 땅이 크고 넓으며 9성 사이의 거리가 아득히 멀고 시내와 골짜기가 험하고 깊어서 적들이 여러 차례 매복하여 오고가는 사람들을 노략질하였다. 나라에서도 군대를 움직이는 것이 많아서 안팎으로 소란스럽고 어지러운 데다가 기근과 전염병까지 더해졌으니, 원망과 한탄이 마침내 일어났으며, 여진 또한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의논하여 끝내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으며, 전쟁에 쓰이는 도구와 군량을 내지(內地)로 옮기고 그 성에서 철수하였다.
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김경용(金景庸)과 참지정사(叅知政事) 임의(任懿), 추밀원사(樞密院使) 이위(李瑋)가 선정전(宣政殿)에 들어가 왕을 뵙고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에게 패배한 죄를 물을 것을 극론(極論)하니, 왕이 승선(承宣) 심후(沈侯)를 보내 길에서 그들의 부월(鈇鉞)을 거두어들여 윤관 등은 복명(復命)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재상(宰相)과 대간(臺諫)들이 그들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간신(諫臣) 김연(金緣)과 이재(李載) 등이 대궐 문 앞에 엎드려[伏閤] 굳이 간쟁하여 말하기를, “윤관 등이 함부로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키고도 싸움에 져서 나라에 해를 끼쳤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하옥[下吏]하도록 하소서.”라 하였다. 왕이 심후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타이르게 하며 말하기를, “두 원수(元帥)가 명령을 받들어 군사를 내었으며, 옛날부터 전쟁에는 이기고 지는 것이 있는데 어찌 죄라 하겠는가?”라 하였다. 김연 등이 또 간쟁을 그치지 않으니, 왕이 어쩔 수없이 관직을 그만두게 하고 공신칭호를 박탈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관(尹瓘)에게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 門下侍中 判兵部事 上柱國 監修國史)의 벼슬을 주었으나 윤관이 표를 올려 사양하였다. 왕이 윤허하지 않고 말하기를, “짐이 듣기로는 옛날에 이광리(李廣利)가 대완(大宛)을 정벌하여 겨우 준마(駿馬) 30필만을 노획하였으나, 〈한〉 무제(武帝)는 〈이광리가〉 만리(萬里)를 정벌하였다고 하여 그 잘못을 기록하지 않았다. 진탕(陳湯)이 질지(郅支)를 토벌할 때 황제의 명령을 함부로 꾸며내어 멋대로 군사를 일으켰으나, 〈한〉 선제(宣帝)는 사방의 오랑캐에게 위엄을 떨쳤다고 하여 제후로 봉하였다. 경이 여진(女眞)을 정벌한 것은 선왕[先考]이 남긴 뜻을 받들고, 〈그것을〉 본받으려는 과인을 생각한 것이었다. 직접 칼과 화살을 무릅쓰고 적의 성채에 깊숙이 들어가 적의 목을 베고 포로로 잡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리고 100리의 땅을 개척하고 9주의 성을 쌓아 국가의 오래된 수치를 씻었으니, 즉 경의 공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랑캐가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 배반하거나 항복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그 남은 무리들이 의지할 곳이 없는지라 추장이 항복하고 강화를 청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좋은 기회라 여겼고 짐 또한 차마 할 수 없어 결국 그 땅을 돌려주었다. 해당 관청에서 법에 따라 자못 논핵(論劾)하여서 갑자기 그 직책을 빼앗았으나 짐이 끝내 경을 허물하지 않은 것은 맹명(孟明)이 다시 강을 건넌 것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지금 짐이 경에게 주는 것은 경의 옛날 관직이었으니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짐의 이와 같은 마음을 알고, 속히 와서 직무를 맡도록 하라.”고 하였다. 윤관이 다시 표문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또 윤허하지 않았다.
〈예종〉 6년(1111)에 〈윤관이〉 죽으니, 시호를 문경(文敬)이라 하였다. 윤관(尹瓘)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니, 장상(將相)이 되어 비록 군중(軍中)에 있으면서도 항상 오경(五經)을 가지고 다녔으며, 어진 이를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기니 당대에 으뜸이었다. 인종(仁宗) 8년(1130)에 예종(睿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수릉(綏陵)의 휘(諱)를 피하여 시호를 문숙(文肅)으로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