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8:26-35
찬송가 32장 "만유의 주재“
예레미야 46–51장은 열방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권자이심을 선포하는 커다란 주제 안에서 전해집니다. 그리고 48장은 모압이라는 나라에게 임할 최후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이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모압의 관계에서 읽어야 합니다. 오늘은 특히 본문에 선명하게 드러난 ‘교만’이라는 키워드를 중점으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모압의 교만(26-30)
(26) 모압으로 취하게 할지어다 이는 그가 여호와에 대하여 교만함이라 그가 그 토한 것에서 뒹굴므로 조롱거리가 되리로다
오늘 본문은 모압의 ‘교만함’이 그의 멸망을 가져왔다고 말합니다. 교만함이라는 단어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니, ”잘난 체하며 뽐내고 건방짐“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 간의 관계에서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는 구약에서 말하는 교만함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잠언 16장 18절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라고 말하는데, 이는 사람 간의 관계보다 먼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말씀입니다. 모압이 단순히 자신감이 넘쳐났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오늘 본문 29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29)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한 교만 곧 그의 자고와 오만과 자랑과 그 마음의 거만이로다
오늘 모압의 교만을 본문은 무려 다섯 단어를 써서 표현합니다. ”교만“, ”자고“, ”오만“, ”자랑“, ”거만“입니다. 구약 선지서 가운데 이렇게 한 절에 교만을 다섯 번이나 다른 단어로 반복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이 단어는 얼핏 보기에는 다른 단어들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높이다“, 혹은 ”높아지다“의 의미를 가졌다는 점입니다. 즉 오늘 본문의 교만함은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와는 달리, 누군가를 높이는 문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구약에서 높음은 단순한 위치가 아니라 권위와 통치 영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높아짐은 보통 하나님을 대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 113편 4절을 보면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단순히 피조물인 인간 보다 높으신 분이 아니라, 피조 세계인 하늘 보다도 더 높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찬양 가사에서는 하나님을 높이는 내용이 많습니다. ”주님만이 높임을 받으시옵소서“, ”주님만 찬양을 받으시옵소서“라고 우리는 주님을 높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인다고, 과연 그분이 더 높아지시는가.“ 이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가장 높으신 분이십니다. 피조물 된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높인다고 그분이 더 높아지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답문은 이렇습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추가한다는 뜻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인정하고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즉, 주님을 높이는 것은 무엇인가를 더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인정해드리는 것, 모든 영역에서 그분의 통치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즉 오늘 본문이 말하는 교만함은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위치의 문제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계셔야 할 가장 높은 자리에 인간이 올라가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고는 사실, 구약에서 계속 되어 왔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도 피조물의 자리에서 창조주의 자리를 넘보는 것이었고,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 역시 그랬으며, 애굽의 바로, 이스라엘의 사울,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등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이 교만함은 인간을 집요하게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모압이 그 대상으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에서 수천 년간 등장했던 이 교만함이 아담의 후손인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여전히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교만함에 마음을 빼앗긴 자의 삶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30절은 이것이 가져다주는 허망함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3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의 노여워함의 허탄함을 아노니 그가 자랑하여도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였도다
”자랑하여도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였다." 참 인상적인 구절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랑을 해야할 때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세상에서는 높아질수록 칭찬과 칭송을 받습니다. 세상에서는 높아짐이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이런 인간의 높아짐은 아무 의미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가장 높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없는 인간의 높아짐은 끝내 허무함을 줄 뿐입니다. 언젠가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때가 오게 되며, 이 세상에 처음 왔던대로 이 세상을 떠날 때 모든 것을 두고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모압에게도 몇 가지 자랑거리들이 있었습니다. 32절과 33절은 특히 그들의 대표 산업이었던 포도 산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모압의 자랑(31-34)
(32-33) 십마의 포도나무여 너의 가지가 바다를 넘어 야셀 바다까지 뻗었더니 너의 여름 과일과 포도 수확을 탈취하는 자가 나타났으니 내가 너를 위하여 울기를 야셀이 우는 것보다 더하리로다 기쁨과 환희가 옥토와 모압 땅에서 빼앗겼도다 내가 포도주 틀에 포도주가 끊어지게 하리니 외치며 밟는 자가 없을 것이라 그 외침은 즐거운 외침이 되지 못하리로다
포도는 모압을 번영으로 이끌어준 산업이었습니다. 고원 지대에 위치하여, 적절한 일조량 덕분에 당도가 높은 포도를 재배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십마의 포도는 매우 유명했으며, 가지가 바다를 넘었다는 표현은 국가의 대표 수출품이라는 것을 시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모압에게 이제 이 산업은 무의미해졌습니다. 33절의 표현처럼, 이것은 더 이상 자신들의 것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압은 원수 바벨론에게 이 모든 산업을 내주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어주었던, 경제적 뒷받침을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이처럼 교만함은 우리가 일궈 놓은 것들을 가져가 버립니다. 우리의 노력과 애씀도 주님 앞에서 교만한 자는 더 이상 자랑할 것이 없는 빈손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말입니다. 35절은 이들이 교만할 수 있었던 마지막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모압의 우상(35)
(35) 여호와의 말씀이라 모압 산당에서 제사하며 그 신들에게 분향하는 자를 내가 끊어버리리라
모압이 교만하게 된 마지막 이유는 그들의 우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모스라는 신을 섬긴 그들은 포도산업만큼이나 그모스에 대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모스는 그들을 지켜줄 힘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는데, 오늘 본문의 시작은 교만이었는데, 끝은 우상숭배로 맺어진다는 점입니다. 교만과 우상숭배. 이 둘은 별개의 죄가 아닙니다. 구약에서 교만함은 결국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가 칼빈은 인간의 마음을 "우상 공장(Factory of idols)"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대상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모압은 자신들의 성읍, 요새, 포도원, 그모스가 자신들을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에게 안정과 기쁨을 주었던 대상들이 결국 이들에게 우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쯤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도 여전히 우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만은 단순히 성공했을 때만 드는 마음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이 없어도 라는 전제가 드는 순간 우리의 우상은 이미 제작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우리는 "내가 열심히 해서 여기까지 왔다." "내 경험이면 충분하다." "내 판단이 맞다." 라고 생각하고는 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하나님이 없어도 이것만 있으면 괜찮다." 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것이 하나님보다 높아진 것이요. 또 다른 우상을 만들도록 교만이 부추긴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는 언제 우상을 만듭니까. 리디머 교회 팀 켈러 목사님을 우상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잃어버리면 삶이 끝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우상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해 좀 더 깊이 다가간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우상을 쉽게 만들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내 재산이 전부 없어진다면, 만약 나의 소중한 사람이 나를 떠난다면, 만약 내가 일궈온 사회적 위치가 의심받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두려움에 쌓일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 내 삶의 일부가 무의미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이렇게도 바꿔볼 수 있습니다. ”나는 현재 어떤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가.“ 우리가 현재 느끼는 두려움이야말로 우리의 우상의 위치를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잃은 두려움이 하나님보다 큰 사람에게는 돈이 지금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잃은 두려움이 하나님보다 큰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잃지 않는 한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완전하시며, 충만하시며, 영화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없이도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하나님을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욱 겸손히 낮추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 삶의 가장 높은 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가“를 말입니다. 내가 앉아 있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다른 것이 앉아 있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성경은 인류의 최초의 타락의 이유를 교만함으로 지적하였고, 이것의 유혹은 오늘날에도 여전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담대히 교만과 맞서 싸워야합니다. 높으신 주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는 나의 교만의 신을 벗고, 피조물로서 오늘도 그분의 통치하심을 모든 영역에서 인정하며 나아가길 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모압의 교만함을 보며,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나의 능력과 경험을 의지하며, 내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여겼던 교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를 우리가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며, 오늘도 우리의 삶의 가장 높은 자리에 주님만 모시게 하옵소서. 주님은 이미 가장 높으신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높이는 것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인정하고, 우리의 자리를 바르게 찾는 것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만 높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모압이 멸망한 이유는 무엇이며,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교만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2. 내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우상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봅시다.
3.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무엇이며, 나는 하나님의 통치를 얼마나 인정하며 살아가는지 돌아봅시다.
4.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내 마음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작성: 김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