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18장에 빌닷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논쟁은 점점 더 치열해 집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누워서
침 뱉기입니다. 아담 안에 태어난 인간은 스스로 안팎이 고발과 변명으로
계속 다투다가 필연적으로 무너지고 마는 것과 꼭 같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이 자유의지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말한 겁니다.
4절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욥은 그렇게 되길 원하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산천은 그대로인데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계속 바뀌는 겁니다. 땅은 언제나 새로운 주인을 기다립니다.
5절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빌닷의 말을 다 들어보면 욥에게 ‘너 때문이야!’ 하는 이야깁니다.
언젠가 제게 빌닷과 같이 도전해 오는 분에게 그에게 한 말이 하나님이
언제 돌아가셨느냐 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끝이 난 줄로 생각하느냐는 뜻입니다.
빌닷의 말의 총론은 욥을 보고 너는 없어져 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평안하면 현실에 안주합니다. 자기가 한 일을 생각하고 자기에게 상을 줍니다.
이를 자랑도 합니다. 지금 어떤 목사가 아침마다 기가 막히는 말들을 하고
있는데 바로 그 수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곤란해지면 왜 이런 결과가 왔느냐
하고 서로 탓하며 떠넘깁니다. 빌닷의 말은 다 이치에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빌닷은 욥으로 하여금 과거로 돌아가도록 합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겁니다.
욥기 19장은 욥의 강변입니다.
1절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절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말로 꺾고 있고 말로 짓밟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욥이 귀로만 듣는 하나님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의 친구 세 사람에 대한 말에 아무런 대꾸할 가치를 찾지 못했을 겁니다.
그야말로 똥개는 짖어도 열차는 달린다 하고 달릴 겁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탄다는 것 자체가 아직 땅에 속한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세상에서도 사람의 말을 타는 사람을 큰 인물로 여기지 않습니다.
3절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 구나”
우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생각나게 하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 말로
상처를 긁어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깨닫도록 버려둬야 합니다.
안 그러면 나중에 욥의 세 친구들과 같이 대속의 제사를 드려야 할 겁니다.
이 말은 그 사람에게 사과할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4절 “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
그래 내 문제가 맞아 그렇다고 나만 문제를 가지고 있냐 넌 없냐 하는 항변입니다.
5절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만하며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증언하려면 하려니와” 이 말은 너희가 한 번 증명을 해 보라는 뜻입니다.
6절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여기는 잘못된 주권사상입니다.
맞는 말이지만 잘못하면 틀린 말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입으로만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말하는 욥의 트랩에 갇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7절 “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8절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
9절 “나의 영공을 거두어가시며 나의 관모를 머리에서 벗기시고”
10절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희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나는 죽었구나 나는 이제 간다 하고 자조하는 욥입니다. 사실 이러면 안 되죠.
11절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같이 보시는구나”
12절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돋우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을 쳤구나”
고난당하는 사람을 볼 때에 그 고난이 인간사이의 문제인가 아니면
신앙의 문제인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는 개입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과 관계이면 아말렉과 같은 요소가 있을 터인 즉 반드시 천벌을 받아야죠.
이건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반드시 당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한 스님이
기독교로 넘어와서 10년 동안 죽을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승려가
회심을 했다고 해서 전국에서 초청을 받아 한 동안 큰 호응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속에 든 것을 빼 내시기 위해 10년 동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 하도록 하셨다는 말을 듣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기 처리가 되는 과정이 누구나 꼭 필요합니다.
이는 선택과목이 아니라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필수선택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밤이 왔으면 왔나보다 하고 잠을 자야 합니다. 설치면 안 됩니다.
롬5:3절 환난은 인내를 이룹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풀리고, 인간과 인간의
문제가 풀려야 합니다. 풀리면서 사방으로 다가오는 어떤 기운을 느끼게 됩니다.
각국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중국 사람은 꾸준하지만 더럽다고 말합니다.
한국 사람은 3개월만 하면 자신이 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설치는 저력이 있습니다.
LA의 멕시코에서 이민 온 자는 7년을 바지만 다림질 한답니다. 마냥 그 자리입니다.
과거를 기반으로 현재의 자신을 만들고 현재의 자신으로 미래를 꿈꾸어야 합니다.
꿈(vision)은 반드시 현실이 되더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더군다나 그리스도 안에
약속으로 받은 믿음의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도의 견인입니다.
욥19장은 욥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10절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희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내 소망을 나무를 뽑듯이 뽑으셨다고 말하는데 사실 이건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23절 이하는 욥도 한 사람의 예언자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5절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그러나 현재 욥의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뿐입니다. 그 속에 구속주의 개념이
없습니다. 다만 군데군데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반짝 계시입니다.
예를 들면 마16장의 베드로의 고백과 같습니다.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맞췄지만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하시니 그리하지 말라고 꾸짖듯
대들다가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 호되게 당합니다. 베드로에게도 일종의 비전입니다.
그 비전이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후에 다윗과 같은 믿음으로 승화가 되었습니다.
욥의 소망도 이와 같은 겁니다. 욥은 구원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가졌습니다.
일반계시를 가진 종교적인 신앙과 계시적인 신앙은 차이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신앙은 죽은 후의 세계를 바라보고 계시적인 신앙은 하나님을
살아서 육체 안에서 만납니다. 그게 바로 욥42장입니다.
부활이 죽은 다음이냐? 영생 안에 있는 복으로 보느냐?
이는 종교적인 신앙이냐? 산 신앙이냐? 분깃점이 됩니다.
13절 이하는 산 소망을 뽑아버린 결과입니다.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14절 “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
15절 “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16절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간청하여야 하겠구나”
자신의 종도 말을 듣지 않아 간청해야 할 지경입니다. 종에게 사정합니다.
자신의 말이 사람들에게 먹히지 않으면 얼른 조짐을 깨닫고 엎드려야 합니다.
17절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 내 몸에 난 자식들마저 비참하게 봅니다.
18절 “어린아이들까지도 나는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어린 아이 조차도 조용해 이 거지야 하고 조롱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늙고 병이 들어 요양원에 가 있다고 하면 목사나 일반이나
똑 같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가 됩니다. 요양원 같은데서 환자가
어린아이 같은 대접을 합니다. 이건 가히 취급이지요. 그래서 말년에 그런
비극을 당하지 않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따라 하늘의 것을 구해야죠.
19절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
20절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뿐이로구나”
21절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하나님이 치셨으면 하나님께 빌어야지요.
22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 욥의 소망은 모든 상황에서 회복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삼손 수준입니다.
부자들의 유혹은 누군가가 자꾸 높여줘야 좋아하는데 있습니다.
16절 같은 부분에서 종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상황이니 참으로 비참해 졌습니다.
‘게 누가 있느냐’ 하면 일렬로 쭉 섰을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들은 척도 안 합니다.
중요한 것은 왜 다른 사람이 인정해 줘야만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가입니다.
양로원에 있는 노인들의 푸념은 자식과 사회와 동료가 알아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22절과 같이 무시와 조롱과 핍박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새로 지음을 받는 정체감을 가져야죠. 남의 인정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요?
어느 교사가 스승의 날의 선물의 질과 양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인 줄 알더군요.
어떤 기업체 사장은 일부러 입원했는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대접을 받고 싶어서
그랬답니다. 정말 유치한 당신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23절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절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자기의 기념비가 새겨졌으면 하는 이야깁니다. 자서전이나 일대기를 말하는 거죠.
근데 사실 자기 말대로 욥기서가 기록이 되었습니다. 다만 욥의 소망과는
달리 욥의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결론으로 맺게 되는 것입니다.
25절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구속자 곧 구약에서는 기업을 무를 자입니다.
문제는 26절 이하입니다. 욥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말합니다. 원문과
영어 번역은 한글 성경과 다릅니다. 사실은 '육체 안에서'(in my flesh)입니다.
육체로부터 벗어난 상황은 사람이 죽고 난 다음이거나 성령에 의해 사도 요한처럼
천국을 보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 이루어진 지금은 우리가 육신 안에서 독생자의
영광을 보며 그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 구원의 복을 받았습니다(고후3:17-18)
27절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욥은 그의 말대로 되지 않고 육체가 있을 때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육체의 고난을 통해 자신을 포기한 겁니다. 마5장 8복은 채근담의 격언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하나 다 실감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것이요’ 육신 안에
임하신 독생하신 하나님이십니다(요1:14) 질그릇 속의 보화이신 그리스도입니다(고후4:7)
욥의 소망은 헛된 영광입니다. 모든 사람의 칭찬, 인정, 대접, 문안을 회복하는 겁니다.
잘못하면 이와 같은 욥의 트랩에 갇힌 목사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백짓장보다
더 얄팍한 자아와 욕심의 벽이지만 그러나 철옹성보다 더 두꺼운 벽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 가로 놓인 큰 구렁입니다(눅16장) 하나님을 만나고 인생을
쉽게 살려면 자신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돼지우리는 금방 부숴버릴 수 있지만
사람이 일단 살고 있으면 대통령이 와도 그 주거지를 쉽게 부수지 못합니다.
해체하는 절차와 과정이 아주 복잡합니다.
지금 욥의 구원은 자신의 상황을 회복할 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의 메시야관이며 지금의 유대인의 메시야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줄은 알았으나 끊임없이 식민지에서 해방시킬 메시야를 바랬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붙잡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어느 때이니이까’ 묻습니다.
25절에 욥은 ‘두고 봐라’ 하는 식의 말로 욥19장은 끝이 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두고 보라는 말씀은 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셔야 하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구원의 문제로 두고 보라 하지 않고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나 상황역전에 대해서 하나님이 회복하실 것으로 믿고 두고 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욥의 신앙이 아니라 욥의 인내를 들었다고 말합니다(약5:11)
은행에서 번호표를 뽑고는 1번 창구로 오라는 말은 듣지 못하고 4번 창구에서
끝까지 기다리다가 결국 안내를 받아 업무를 마친 것 같이 자신의 상황에서
구원 받기를 바라다가 귀로 들은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는 욥의 인내입니다.
|
첫댓글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진실로 주님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진리를 알게 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