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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보강사 이기성
246__자메이카와 김원규 교장
볼트는 16살 때부터 단거리 달리기에서 기록을 세우기 시작했다. 자메이카에서는 축구를 제외하고는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가 육상이다. 우사인 볼트(Usain St. Leo Bolt)는 1986년생. 남자 육상 단거리 세계 기록 보유자이다. 2016년 8월 15일,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100m 결승에서 9초 81로 저스틴 게이틀린을 제치고 금메달을 차지함으로써 올림픽 3연패를 이루었다. 또한 200m 경주와 400m 릴레이에서도 3번째로 우승하여 올림픽 역사상 3종목 3연패를 이룩한 첫 선수가 되었다.
육상 이외에도, 자메이카는 팝음악에 의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많은 유명한 가수들이 레게(reggae)라고 불리는 음악을 통해 세계에 자메이카의 음악을 알려왔다. 레게음악이 일반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독특하지만 재즈나 칼립소 등의 음악도 널리 연주된다. 멕시코 동부, 미국 플로리다 아래에 있는 자메이카는 1494년 콜럼버스가 발견한 섬으로 16세기 초반에 에스파냐인들이 이주하였다. 1509년에 환데 에스키벨이 원주민인 아라와크족을 정복하였다. 지하자원, 특히 금이 발견되지 않아 식량 생산을 주로 하는 농업 개발이 진척되었는데, 이에 동원된 원주민 인디언들의 혹사로 인구가 불과 몇 년 만에 격감하였다. 그 공백을 아프리카계 흑인 노예가 채우게 되었다. 에스파냐의 식민지 시대에는 남아메리카와 에스파냐간의 중계지점이 되었다. 1655년 영국 크롬웰의 파병으로 섬이 영국에 점령당한 뒤로는 영국의 식민지 쟁탈전 기지가 되었다(두산백과).
자메이카는 1830년대에 서인도제도에서의 노예제도가 폐지되기까지 노예무역의 중심지였으며, 그 당시까지 40만 명의 아프리카 흑인노예가 매매되었다. 섬은 이 노예제도의 기반 위에서 18세기에 사탕수수 재배의 플랜테이션을 형성, 번영하였는데, 노예해방과 1848년 영국의 자유무역제도 채택에 따라 쇠퇴하였다. 1866년 총독이 행정권과 입법권을 가지면서 영국의 직할식민지 형태가 되었다. 1930년대말 대공황 결과 영국 직할식민지 체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폭동이 일어나고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자결(自決)에 대한 요구가 거세어졌다. 이후 영국연방 내의 식민지로서 1944년 의회를 설치하고 새로운 헌법도 제정하였는데, 양원제의 입법부, 내각제의 행정부, 성인의 보통참정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1953년에는 내각정부(內閣政府) 제도를 수립하였으며, 1959년에는 완전한 내정자치권을 획득하여 자치정부를 구성하였으며, 1962년에는 영국 연방 내의 독립국이 되었다.
페북 친구 Jey Choi의 글을 빌려왔다. 2021년 3월 23일. [블루마운틴 카피를 마시며 자메이카 이야기]. Jey Choi와 친구 L의 이야기. 이곳 미국의 자메이카 친구 L이 준 ‘블루 마운틴 커피’를 내려 마시는 중인데 그 L에게서 걱정스런 문자가 왔다. “괜찮은 거지? 이번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Hate Asian 사고에, 너 아는 한국인 중 다친 이는 없는 거니?”. “응 없어”.
초콜릿색 피부(L의 표현에 의하면)를 가진 L은 오래전 자기 고향인 자메이카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온 미 백인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한 L은 미국에 정착. 미시간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좋은 일자리를 구했고, 정치학을 전공했던 아내는 민주당의 정치인이 되었다. 검은 피부로 백인 아내와 미국에서 살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L은 담담하게 들려줬는데, 포복졸도하게 웃기면서 슬프고 기막힌 일들이 많았다. 그래도 명랑하고 인종차별에 대한 시각을 묵살한다. “속상하지 않아?”. 그 사람들이 못나서 그런 거지. 내가 못나서 그런 게 아니잖아. 못난이들이 그러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해?
L은 내가 미국에서 만난이 중 손에 꼽을 만큼 지적이고, 의식이 열려있는 사람이다. 그는 내가 '역사 마니아' 란 걸 알고 눈동자를 빛냈다. 자메이카의 역사에 대해 중남미 역사와 식민지 역사에 대해 그는 서가를 뒤진들 쓰여진 책도 없고, 인터넷엔 더욱 더 안 나오는 내용이라며 L은 무겁고 놀라운 이야기를 해 줬다. 그 이야기 중 기억나는 몇 이야기. 자메이카가 속한 카리브해의 도미니카 공화국 등의 몇몇 나라는 토착원주민이 하나도 없다. 스페인 군대가 원주민을 다 죽여 인종청소를 했다고 한다. ‘그럼 지금 있는 사람들은?’. 99퍼센트 아프리카인이다. 중국인이 더러 있다. 바하마와 자메이카의 지하자원은 금도 은도 나오지 않고 알루미늄이 조금 나온다. 금에 미친 스페인에겐 아주 쓸모없는 땅인 셈이다. 그럼 그냥 가버렸음 좋았을 텐데. 악랄하게도 적극적인 창조경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강력하게 대응하는 원주민들을 죄다 죽이거나 자살시키고 바하마 섬들(자메이카 포함)을 미대륙 침탈의 중간기지로 삼았다. 덕분에 스페인은 플로리다 땅을 침략해서 아주 쉽게 스페인 깃발을 꽂는다. 한편으로,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다 날라 자메이카에 내려놓고 노역을 시킨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바하마와 자메이카의 원주민은 피부가 그리 검지 않고 몸의 비율도 너무나 완벽하게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 후 백인들의 창조경제는 영국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산의 무성한 숲을 몽땅 불태워 커피농장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세계최고의 커피라는 '블루 마운틴' 자메이카 커피다. 1960년에 독립했지만 지금껏 부를 거머쥔 농장주인들은 모두 백인이고 정치 경제 문화 모두 식민지시절 백인 끄나풀 들이 다 하고 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무기도 군대도 없다고 한다. 국방부도 군인도 없는 나라다.
내가 가장 놀란 것은 그가 남몰래 하고 있는 일이었다. L은 교육만이 국가의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거의 모든 수입을 자메이카 학생들의 교육발전 비용에 기부하고, 뛰어난 아이들을 미국대학에 입학시키고 후원하는 일을 한다. 게다가 원격으로 가정이 어렵고 학업 성적이 우수한 몇몇 애들을 직접 온라인으로 공부도 지도하고, 학비와 생활을 도와주는 멘토를 하고 있다. 난 이런 L에게 진심어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L아. 넌 내가 미국에서 만난 사람 중 최고로 훌륭한 사람이야 ~”. 고마운 말이지만 나로선 나를 위한 일이야. 내가 얼굴도 모르는 외할머니는 스페인 병사의 행진을 보다가 돌을 던졌다고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어. 우리 엄마는 백인의 하녀를 하면서 몰래 글자를 겨우 깨친 후 나를 가르쳤고, ...
김원규 교장
[오마이뉴스] 2021년 3월 19일자에 ‘감옥소라고 불린 고등학교의 놀라운 서울대 진학률’이란 제목의 보도를 백창민, 이혜숙 기자가 썼다. 서울고등학교가 '감옥소'라고 불렸을 정도로 엄한 교육을 해서 놀라운 서울대 진학률을 기록한 김원규 교장의 이야기. 1946년 2월 김원규는 '서울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서울중고교 교장에서 1957년 4월 경기중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김원규(金元圭) 교장. 김원규는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1925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29년 3월 그는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 영문과를 졸업했다. 당시 히로시마고등사범은 도쿄고등사범과 함께 일본에서도 입학하기 어려운 학교로 유명했다. 조선으로 돌아온 김원규는 1929년 함흥농업학교와 1932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여고)에서 교사로 일했다. 김원규는 경성여고보 재직 시절인 1934년 11월 양부미와 결혼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그는 경기도 학무과장으로 일했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서울시 교육국장을 겸임한 시기에는 중학교 6년제를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의 '3-3제'로 바꿨다.
김원규 교장은 기라성 같은 인물을 선생으로 모셔오고, 학생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누구보다 일찍 학교에 나왔다. 서울고 교정을 자기 집처럼 '티끌 하나 없이' 가꿨다. 서울고를 '한국의 이튼'으로 키우는 것이 김원규의 꿈이었다. "워털루의 승전은 이튼스쿨의 교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The battle of Waterloo was won on the playing-fields of Eton). 이튼 출신으로 나폴레옹을 격파한 웰링턴의 말이다. 김원규 교장은 '웰링턴 공작'이라 불린 아서 웰슬리(Arthur Wellesley)의 말을 학생들에게 자주 들려주곤 했다. 천하 준재의 요람을 꿈꾼 김원규의 말. "어디 가서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라"
신생 학교인 서울고 학생들을 혹독하게 가르쳤다. 그에게 배운 제자들은 그의 교육이 '스파르타식 교육'이었다고 회고한다. 한때 서울고는 '신문로 감옥소'라고 불렸다. 이런 말이 돌 정도였다. "서대문에는 형무소가 둘이 있다. 하나는 영천에 있는 서울형무소(지금의 서대문형무소)이고, 또 하나는 경희궁터에 있는 서울중학교다." 1회 졸업생의 98%, 2회 졸업생의 96%가 서울대학교에 진학했다. 김원규 교장이 입시를 위한 '공부'만 강조했을 듯싶지만, 학생의 예체능 교육도 신경 썼다. 예능과 체육 분야도 신경을 써서 반드시 특별활동으로 한 가지씩 배우도록 했다. 서울고 출신 중에 문화·예술인이 유난히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배우 이순재, 오현경, 심양홍, 가수 서유석과 이장희, 영화감독 이장호와 배창호, 소설가 최인호가 서울고 출신이다. 배우 이순재는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중학교 은사인 김원규 선생을 꼽았다.
1957년 김원규 교장의 경기고 전임 소식이 알려지자, 서울고 교정은 울음바다가 되고 경기고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 김원규 교장의 전임 소식 자체가 장안의 화제였다. 당시 서울의 양대 명문은 경기고와 서울고였다. 전통의 명문 경기고 조재호 교장과 신흥 명문 서울고 김원규 교장이 자리를 맞바꿨기 때문에, 세인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우리나라는 물자도 없고 돈도 없는 가난한 나라다. 없는 돈은 다른 나라에서 빌려올 수 있지만, 사람만은 남의 나라 사람을 빌려다가 우리나라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사람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우리나라를 구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들을 어디서 찾겠느냐. 제군들이 곧 그 사람들이다." 김원규 교장이 경기고등학교 교지인 <주간경기> 1958년 2월 28일 자에 쓴 글이다. 경기고 졸업식에서 그가 했던 말도 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있어서는 안 될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꼭 있어야 할 사람이다. 여러분은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서울고에서와 마찬가지로 김원규 교장은 경기고에 와서도 입시 공부는 물론 예능과 체육 분야에도 신경을 썼다. 영어/수학/문학 공부만 잘하는 줄 아는 경기고가 펜싱부, 아이스하키부, 기계체조부, 역도부, 산악부, 럭비부, 야구부, 미술부, 밴드부 등 각 분야에서도 이름을 내기 시작했고, 특히 60회의 야구부는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까지 했다. 2000년 7월 4일자 [동아일보]에서 유명 야구 해설자 허구연은 “공부 잘하는 수재들의 대명사였던 경기고는 특기생들이 없어 성적이 부진했으나, 60년대 후반 언더핸드스로 변재혁 투수를 앞세워 다른 팀의 간담을 서늘케 할 정도로 실력을 갖춰 주목을 받기도 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홈런왕 박현식 코치하에 변재혁과 콤비를 이룬 서현석, 주해룡, 한용희 등 야구부원은 스타였다. (당시 야구부원은 댓글로 자기 이름을 올려주시면 여기 명단에 추가하겠습니다).
김원규 교장은 아침 등교 시간에 경기고를 둘러싼 담장 옆에서 지켜 섰다가, 몰래 개구멍으로 들어가는 지각생을 발견하고 쫓아가다가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 도망치던 학생은 교장 선생님이 넘어져서 못 일어나자, 되돌아 와서 책가방을 내려놓고 김원규 교장을 들쳐 업고서 병원으로 달려갔다는 일화는 유명했다. 인재 양성에 헌신했던 김원규는 '도서관'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1958년 10월 18일 경기고등학교는 316석의 열람실을 갖춘 도서관을 개관했다. 당시 국내 학교도서관 중 '으뜸'이었던 이곳은 제물포고등학교를 비롯해 수도권 학교도서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울교육박물관 1995년 서울시는 중부교육청 중부교육박물관, 정독도서관, 덕수초등학교 덕수기념관에 나뉘어 있던 교육 사료를 정독도서관으로 합쳤다. 정독도서관 부설 ‘서울교육사료관’은 이렇게 탄생했다. 서울교육사료관은 2011년 2월 28일 ‘서울교육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서울교육박물관 건물이 경기고 시절 도서관으로 쓰인 곳이다.
김원규 교장은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5일 경기고를 떠나 삼성중고등학교와 북인천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후임에 양재휘 교장이 부임했다. 그러나 뛰어난 통솔력과 훌륭한 교육 철학의 김원규 교장에 비해 전혀 다른 리더십의 양재휘 교장은 학생은 물론 선생님에게도 인기가 없었다. 심지어 조회 시간에 ‘양재휘 교장 물러나라!’라는 스트라이크가 일어나는 등 학교가 혼란스러웠다. 우리 경기 60회도 이 스트라이크를 직접 겼었다. 당시 국어 과목을 가르치시던 우인섭 국어 선생님의 중재로 가까스로 더 큰 소란을 막을 수 있었다.
김원규 교장은 1964년 2월 4일 서울시 교육감이 되었다. 큰 기대를 모았지만, 안타깝게도 김원규 교육감은 이른바 '무즙 파동'으로 알려진 중학교 입시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65년 7월 5일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1964년 12월 서울지역 중학교 입시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이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자연 과목 18번 문제다. 정답은 '디아스타제'로 발표되었다. 그러자 학생과 학부모가 반발했다. 또 다른 보기 항목인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부 학부모는 '무즙'으로 직접 엿을 만들어 서울시교육위원회를 찾아가 항의했다. 이 문제 때문에 명문중학교에 떨어진 학생과 학부모는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고등법원은 '디아스타제'와 '무즙'을 모두 정답으로 인정했다. 이 문제로 탈락한 학생들은 경기중 같은 명문중학교에 재입학할 수 있었다. 이른바 명문중학교 진학을 위해 초등학생조차 '입시'를 치러야 했던 시절의 풍경이다.
서울시 교육감에서 물러난 후 김원규는 1966년 5월 3일부터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지금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정년을 1년 앞둔 그는 실습 교육을 위해 일본 출장을 떠났다. 일본 출장 중이었던 1968년 12월 10일, 김원규는 심장근육 장애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4세였다. 김원 교장 선생님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경기 60회는 행운의 사나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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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한겨레, 자메이카.
http://www.hani.co.kr/arti/sports/sports_general/756811.html#csidx8bf0319f33ac4988686a962b1311c40
[참고]
오마이뉴스, 김원규. 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306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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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메이카와 김원규 교장, 경기60회칼럼, 이기성 한국전자출판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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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g60.kr/cmnt/2342/boardInfo.do?bidx=762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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