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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한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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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샘가족 이야기방 스크랩 목회자의 기록문
musical 추천 0 조회 75 09.09.27 23: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강은영 목사(1905-1950)


강은영은 1905년 음력으로 2월 30일 전라북도 정읍군 신태인읍 구사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서당에 나가 한문을 읽다가 전주 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 성서학원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 2학년 때 부터 원효로에 교회를 개척 성공적인 목회에 돌입했다.
그의 힘있는 설교는 성령의 은혜가 넘치고 이웃교회에서 부흥회 인도를 부탁할 정도로 학생부흥사이기도 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개척한 교회를 후배목사에게 일임하고 해주로 내려가 해주제일교회 조사로 시무하다가

1941년 평양신학교에 편입했으나 김인준교장 등 교수 전원이 신사참배 거부로 페교조치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는 해주제일교회를 떠나 평안남도 강서로 내려가 대안리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장로교가 아닌 감리교

서부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신암리교회, 신덕교회, 온정리교회, 삼화읍교회를 전전하며 목회를 했다.
그가 여러교회를 전전한 이유는 신사참배강요에 있었다.
신사참배에 타협처인 감리교회의 태도와는 달리 강은영목사는 교단의 허락한 문제였지만 십계명에서

지시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강은영목사는 일제하에서 경찰서 유치장을 여러차례 들락거리다가 해방을 맞았으나 기독교도연맹의 음모로 공산당

내무서원에 의해 철저하게 협박당했다."
동무 그렇게 독불장군처럼 까불다가는 어느 귀신이 잡아갈지 한번 생각해 보았소?" "어느 귀신은 어느 귀신이겠소

 예수귀신이겠지 오히려 나는 그 귀신에 사로잡히기를 바라는 바요."
그가 신암리교회 목회할 때 장터에가서 사과상자를 연단으로 하고 복음을 증거했다.
그는 앉으면 기도 서면 전도한다는 목표가 생활화 되었다.
새벽기도는 3시부터 교회 강단에 나가 먼동이 트는 7시까지 되어서야 일어났고 평일 낮에는 산기도에 올라가

깊은 기도에 잠기기도 했다.
강목사는 해방 후 전국을 돌아치며 부흥회를 인도했고 부흥회에는 젊은 청년들이 많이 몰려와 회심하는 특징을 나타냈다.

 

해박한 한문지식과 위트와 유모어가 넘치는 달변때문에 많은 젊은 청년들이 몰려와 회심을 하는 것이었다.
글씨도 미문이어서 부흥회하는 교회에 족자를 남기기도 했고 교회 간판이 시원치 않으면 송판을 구해다가 친히 써서

달아주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인간미를 보여주었다.
그는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가 삼화읍교회에 시무시에 1949년 새벽송 도는 청년들을 안면방해로 구금시켰을 때에 내무서장을 찾아가서

내무서장을 쏘아보며 비수같은 항의를 쏟아놓았다.
"진리의 탄생을 축하하는 사람을 잡아 가둔다면 이 땅 위에는 비진리의 어둠의 세력만 판치라는 소립니까?

하나님의 무서운 징치가 있을 것이라" 항의했다.
강목사의 눈에서는 불이 펄펄 일고 있었고 그의 항의가 주효했던지 모두 풀려나와 크리스마스 예배를

은혜롭게 보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강목사에 대한 감시는 이때부터 본격화 되어 내무서원이 주택에 상주했다.
성도들 집에 피해 있으라는 교인들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일이나 수요일이면 교회에 나타나 예배를 인도했다.
1950년 6월 24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나오는 강목사를 두사람의 내무서원이 팔을 끼어 끌려가

용문동 굴속에 몰아넣고 강제 노역에 처했다.
4개월간 소식 한자 없던 강목사가 8월 14일에 정치보위부 한교선과 사택에 나타나 "여보 때가 되었오

겨울 내복을 주시요" 하고 부억에 따라 들어가 배가 고프다고 하며 사모에게 밥한 그릇을 차려먹고

"여보 갱도안은 너무 추우니 오바를 주시오"하고 겨울 오바를 꺼내다 주는 아내를 애잔한 눈으로 지켜보다가

한교선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1950년 9월 맥아더 장군의 북진이 계속되고 사화읍이 국군통치하에 들었을때 한교선이 잡혔다.

그는 피모르 장거리 숲속에 죽여 매장한 것을 실토했다.
당시 강은영 목사를 위시하여 장로교목사 등 탄부감리교회 남전도사 등 14명이 순교했다.
교회는 이들을 모두 교회 과수원에 가매장을 했다.
후예로는 사모 윤성란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강신일목사와 강신평목사가 그들이다.

 (이하 글 출처- http://kcmma.org/)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태어났다.
1910년 부모의 신앙을 따라 어렸을 때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으며 1925년 배재학교를 졸업하였다.
1928년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윤희성과 결혼하였다.
1933년 4월 중부연회에 허입한 후 첫 목회지로 경성지방의 창동교회에 파송 받아 목회하였고,

1935년에 창동교회가 동부연회로 편입됨에 따라 그의 소속도 동부연회로 옮겨지게 되었다.
1937년에는 철원지방 연천교회를 이듬해인 1938년에는 창도교회를 그리고 1939년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정회원에 허입한 후 철원지방 철원제일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철원제일교회를 담임한 그는 열심히 봉직하였고 그로 인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하매 교인은 물론 일반 불신자들에게도

존경과 신임을 받았다. 따라서 일본 경찰은 교회 행사에 일일이 간섭하고 방해하며 강종근 목사를 호출하여 방해하곤 하였다.
1940년 철원제일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령”에 의해 구속되어

1년형을 선고받은 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받은 고문으로 신병이 약해지자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아내 윤희성 사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주를 따라간다.
마음이 기쁘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때가 1942년 6월 3일 이었다.  윤희성 여사는 아현동에 신성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당을 건축하였으며

장로로서 충성을 다해 교회를 섬겼다.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 한국에 남아있는 가족이 없었던 고 강 목사는 지난 8년간 강 목사의 제자이자

장남 서웅 씨의 친구인 이창건 박사의 노력 끝에 2003년 8월 15일 뒤늦게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그리고 2006.11. 국립대전현충원에 유해를 안장하는 예식이 거행됐다.

예식을 치룬 뒤 이 박사는 “오늘 뜻 깊은 자리까지 오게 돼 감격스럽다”며

“고 강종근 목사를 위해 감리교회 모두가 기도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준의목사(백낙준박사와 동창)는 1893년 6월 26일 평북 선천에서 9남매중 4남으로 태어났다.
신성중학교 보성전문을 졸업한 후 평양신학교 1924년 제17회로 졸업하고 장로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욕을 먹으면서도 지적하고 시정해야 마음이 풀리는 대쪽같은 성격의 소유자이면서도

사랑이 넘치는 부드럽고 인자한 그의 모습앞에서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마련이었다.
그분의 불같고 뜨거운 정렬은 일제당시 독립운동과 관련하며 항일투쟁에 앞장서게 했으며 이것 때문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1926년 문맹퇴치 운동을 통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영명학원(보통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15년간 봉사하였고 기독교 실업인들의 많은 후원을 받으며 교육에 힘썼다.
수업에 앞서 모든 학생과 함께 애국가를 불렀기 때문에 일본 경찰에 의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수난을 겪어야 했고

1939년 강목사가 출타한 틈을 타서 일경의 사주를 받은 비류들에 의해 영명학원은 불타버렸다.
그는 중국어에 능통하여 중국에 지하교회를 설립하여 복음을 전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1940년에 노량진 흑석동에 조선기독교장로교회를 개척하고 1944년 신사참배 반대로 교회를 사임하고

강원도 영월 마차리 탄광촌 골짜기로 가서 노동자로 들어가 같이 일하며 복음을 전하고 마차리 교회를 개척하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서울로 복귀하여 3백만 부흥운동에 손양원목사와도 손을 잡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말씀대로 자신의 일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
아내도 자녀도 심지어 목숨까지도 복음을 위하여 배설물처럼 여겼다.
6.25동란중에도 쉬지않고 복음사역에 앞장서 활약하던 중 공산당에게 수난을 받게 되었으며 6.25사변 당시 신임하던

장로의 아들이 자신의 부친과 강목사를 밀고하여 강경으로 체포 부여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복음을 전하다가

인민군 패잔병들에 의해 몸이 결박된채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1950년 9월 20일 장남 강태문(하바드 신학대학 졸업반)에 의하여 시신이 모시밭에서 발견되었을때에 손과 발목이 잘려 있었다.
충남 논산군 광석면 서울에서 1시간 가량 가면 이사리 신촌동 비석도 없이 풀만 무성한 묘지를 만나게 된다.

살아생전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 그는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토레이 박사의 "완전한 사람" 이란 말이 생각난다.
우리 하나님은 피의 소리를 들으시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순교한 순교자들의 피가 오늘날 발전된

한국교회의 터전의 역할을 하였 음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한다.

 

“김구와 이승만의 卒徒(졸도) 기주복을 타도하자” 시뻘건 글씨로 플랭카드를 만들어 든 젊은 공산당원들이

곡산읍교회 사택 앞으로 몰려와 소리를 질렀다.
1946년 11월 8일 새벽 2시 온 식구들은 그 서슬 퍼런 기세에 몰려 잠이 깨었다.
그때 젊은 공산당들은 손에 망치와 삽 괭이를 들고 있었다.
얼마만큼 구호를 외치다 이제는 대문이며 방문을 짓부수고 광기어린 몸짓으로 집안을 부수고 수라장으로 만든 후

기주복목사를 잡아갔다.
기목사는 “11월 3일 선거 안한 것은 주일이기 때문이요 보시오 이게 민족해방을 외치는 붉은 당원들의 모습이란 말이요 ----”

기목사는 1897년 10월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대정리 두대동 뒤주터에서 기형달 영수와  정영애 여사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주일날 낳기 때문에 주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졸업반 때인 1919년 2월 서울에서 올라온 민족대표들이 3월 1일 만세운동을 부르기 위해 태극기제작 독립선언서

복사등 준비를 시켰다.
기주복은 황해도 수안의 만세운동을 책임지고 고향으로 파견되어 구두 밑창에 독립선언서를 깔고 다시 못질을 해서 신었다.
고향에 와 아버지 기영수와  교회대표들과 상의하고 동리의 뜻을 같이할 동지들과 협의했다.
그들의 결의는 대단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첩보 제공자에 의해서 주동자인 기영수의 집은 경찰에 포위되고 기주복은
그 어머니가 쌀독밑에 넣고 쌀로 덮어놓아 발각되지 않았고 기주복 부친 기영수는  잡혀가고 기주복은 동생과 함께 간도로 갔다.
이듬해 동생이 돌림병으로 죽자 어머니의 간청으로 귀국해서 숭실중학교 선생으로 일했다.
교육위원회에 자격상신을 했고 저녁에 집에와서 식사를 할 때 일경이 들어닥쳐 그에게 쇠고랑을 채웠다.
죄목은 수안면 3.1운동 주모자 평양감옥에서 2년형기를 치루었다.
형기를 마친 후 곡산학원 교사로 봉직했다가 부름을 받아 평신에 입학했고
1932년 제27회 절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천곡대정리 교회를 시무하다가 봉산군 사인면 계동교회로 옮겨 시무하였다.
계동교회 기목사 주관으로 강병석목사를 강사로 모시고 5개교회가 야유회로 정방산 대성사를 구경하게 되었는데

대성사 안에 일본 천황의 영정을 보고도 고개한번 끄떠김 없이 지나친 강병석 목사의 일로 주지승과 다투다가

기목사가 책임지기로 했는데 몇일 후 황주경찰서에서 기목사를 연행해 천황불경죄로 해주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다.

해방후 목회현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946년 11월 3일 주일 선거를 안했다는 이유로 반동분자가 되었고 감시대상이 되었다.
타도 주기복을 외친 것도 이같은 연유였다. 처남이 남한으로 피난가자고 했지만 교인이 다 간 후에 가겠다고 했는데

1950년 6월 24일 평양에서 전보가 왔다.
“위독속래 평양 아들”평양에는 기목사의 장남이 있었는데 그 아들에게서 보낸 공산당들의 술책의 전보였다.
그날 새벽 기목사가 조반을 먹고 있었는데 평양에서 사모님께 전화가 와서 받으라고 해서 사모님이 나갔다 돌아오니

기목사는 공산당에게 끌려가고 보이지 않았다.
공산당들은 요시찰 인물들을 미리 잡아 감금함으로 후환을 없애려 한 것이고 그후 기목사는 소식이 없다

그를 잡아 평양으로 압송했던 이인형은 남한에서 붙잡혀서 죄값을 치루었다.
기주복목사의 뒤를 이어 아들 기현두목사는 2008년 현재 새온교회 담임목사로 충성하고 있다.

 

1900년 4월 6일에 전남 장흥에서 김문오의 외아들로 출생 1927년 5월 20일 안장례씨와 결혼하고 같은 날부터

목포 양동교회 출석 예수를 영접하였고 그 교회 민족주의자 박연세목사 밑에서 신앙행활을 하고 세례를 받았다.
일본사람들을 상대로 어묵을 만들어 사업에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었다.
교회를 봉사하든 중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하면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감명을 받아 순교하기 까지

유년주일학교 교장으로 섬겼다.
조실부모하고 외로움을 경험한 그는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부모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교회학교 교사로 또는 밤 늦게 박연세 목사의 뜻을 받들어 부녀자들과 청년을 위한 야학당을 개설하여

나라를 구하고자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1929년 박연세목사의 목회 지침에 의해서 목포 동쪽 연동교회를 기도처로하여 출석하여 봉사하고

1934년 초대 교역자 문명록 전도사부임 초대목사 이남규목사가 부임 교회가 부흥하고 김개수는 여러 집사들 틈에 끼어

스데반 처럼 살겟다고 다짐한 일등 집사였다.
1946년 6월 장로임직 이남규목사의 영향을 받아 애국적인 신앙인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자리잡았다.
신사 참배에 항거하다가 박연세 목사, 김창옥 장로, 이남규 목사 등 20여명이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순교 등 고문을 당했고

김개수장로는 조선교 조선교단으로 부터 목사직을 박탈당한 이남규목사를 모시고 30리 밖에 시골인 무안군 일로면

상리교회로 출석하면서 신사참배 없는 예배를 드렸다. 해방 후 정부수립을 위해 많은 역할을 해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철저한 반공주의로 국방장관 표창을 받았고 해방 후 첫번선거를 공정하게 치른 공로로 국회의장의 공로표창을 받기도 했다.
해방 후 무법천지에 동네 파출소를 손수 지어 6명의 순경을 두어 악습에 빠진 청년들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기도 했다.
당시 연동교회를 시무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옷도 벗어주는 자애롭고 경건한 최명길 목사를 존경했고

최목사는 김장로를 든든한 동역자로 여겼다.
그는 행동하는 애국자이면서 신앙인이었다.
그의 강연은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유모어와 탁월한 설득력이 있어 청중을 사로잡아 이끄는 거인이었다.
그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식구까지 불러모아 가정예배를 드리는 가정에도 모범이 되고 자녀들을 철저한

신앙의 사람으로 양육하며 아브라함이나 고넬료를 흠모하였다.
6.25전란으로 애국청년단체의 단장으로 숙청대상 1호였다.
제주도는 이미 빨지산에 수중에 들어가고 목포도 시간문제였다.
연동교회 당회가 모여서 교인들을 어디로 피난을 시켜 보호할 것인가를 의논하다가 특별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회의를 마치고 문밖에서 김개수 장로가 최명길 목사에게 "그러면 우리 잘 죽읍시다"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최명길 목사도 김개수 장로를 붙들고 "그래요 우리 잘 죽읍시다."하고 인사를 하면서 헤어졌다.

김개수장로는 최목사와 약속한대로 총칼로 무장한 공산당들에 의해 연행되었으나 그의 신앙을 조롱하는 자들에게

담대하게 예수를 전하고 갖은 고문을 당했으나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에 애국청년단의 일에 대해서도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변호하고

1950년 음력8월 16일 밤중에 대박산으로 끌려가 기도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집단 처형 당해 순교했다.
장남 김옥남 목사. 차남 김승남 목사. 장녀 김옥금권사.
차녀 김순자 김갑배목사부인.(장남 김종현목사 차남 김종철목사) 삼녀 이순이 권사.

사녀 김순옥 권사 국제어린이 재활원 원장. 

 

김규흥장로는 1894년 5월 6일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죽률리에서 김경환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믿음의 동기는 부친이 병환중 먼저 믿고 교회 어른들이 자주 와서 기도해 주시는 동안에 아버지를 위한 교인들의

따뜻한 사랑에 감화되고 전하는 설교말씀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독실한 신앙을 간직하게 되었다.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상청 설치문제로 문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를 맞으면서도 끝내 버티어 신앙으로 이겼다.
그 후 뜻한바 있어 서울협성신학교에 입학 2년 수료하고 고향에 돌아와 청년 전도사로 교회를 위해 봉사하였다.

군자 거무게교회를 세워 목회하니 교회는 부흥되고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 원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한편 피 압박 민족의 쓰라린 비운을 누구보다 더 가슴 아프게 느낀 김장로는 민족이 살길로 삼대목표를 세웠다.
1. 하나님께 대한 믿음. 2. 신학문교육. 3. 농촌 자립경제,
그는 신학문과 특별히 여성교육을 강조하고 동네 문맹 부인들을 모아 손수 가르쳤고
농촌경제를 위해서 농업협동조합을 조직하여 생필품을 싸게 구매하고 농사개량과 축산장려 신생활 운동에 앞장 서는 등

강습회를 통해 계몽하는 한편 각종 도서를 구입하여 청소년 교양 및 후진 양성에 힘썼다.
신앙생활과 논촌계몽운동으로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는 그는 요시찰 인물로 주목받아 어려움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1945년 해방 후 논현동에 교회를 개척하고 전임목사를 모시는 등 동민의 복음화와 복지사회를 위하여 전력하게 되었다.
1950년 8월 19일 안선재 권사와 함께 내무서원에게 끌려가던 중 수수밭에 이르렀을 때 안선재권사를 피신하게 하고

김장로는 그를 살리기 위해 그대로 저들의 손에 끌려 영원히 사는 길로 갔다. 유자녀로는 김태선장로로

대원건설 대표이사이고 김연화권사와의 사이에 4남 1녀를 두었다.
큰 딸 김갑순은 송재수목사의 부인이 되어 미국에서 목회하고 있고 둘째딸 김신덕권사는 진남덕 집사의 부인이고,

세째딸 김과숙권사는 한강교회 정운상 목사의 사모로 교회봉사를 하고 있다.

 

일제시대와 6·25동란을 거치며 한국교회는 숱한 순교자를 배출했다.
교회의 탄압을 온몸으로 막아낸 ‘믿음의 투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 이외의 절대신이 있을 수 없다며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성수주일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다.
이 가운데 해방후 행방불명돼 순교한 김길수목사(金吉洙·1905∼1949)는 복음전파 뿐 아니라
민족운동과 청년운동, 교육사업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고 또 교회의 미래를 내다보는 선각자적인 삶을 살다간 목회자였다.
김목사의 신앙엔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었고 주일을 바르게 지키기 위해 공산정권과 맞선 것이 결국 순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평남 용강군 양곡면 남동리. 유복한 유교가정에서 출생한 김길수는 소학교를 마친뒤 일본으로 유학, 와세다대학 중학부를 마쳤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하기 직전 부친의 별세로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오랫만에 본 조국의 모습은 일본과 비교해 너무 피폐했다.
“지금 우리 민족에 필요한 것은 민족정신이며 청년들이 바로 서야 나라가 설 수 있다.
공부보다 민족·청년운동이 더 절실하다” 20대 초반의 청년 김길수는 고향에서 남동(南桐)학교를 개교해 청년들을

중심으로 민족의식과 바른 사고를 깨치는 일에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조만식선생과 이상재선생등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들의 사고(思考)를 주도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신앙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뒤 스스로 기독교인이 될 것을 다짐한다.
김길수의 개종은 집안에 큰 파란을 일으켰지만 그는 오히려 평양고등성경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에 입학함으로

기독교에 더 몰입한다. 진남포 비석리교회, 평양 남문밖교회 등의 전도사를 거쳐 42년 목사안수를 받은 뒤

부임한 곳이 평양 신암교회였다.
당시 일제는 41년에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을 모두 강제출국시킨 뒤 조선기독교 통리직을 만들었다.

 

교단적 특징을 없애고 하나의 교회로 만들어 마음대로 통제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강사였던 선교사들이 떠난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열심히 목회하던 김목사는

항상 청년들에게 소망과 비전을 주는 메시지를 전했다.
45년 8월15일.식민지 아래에 있던 민족의 해방은 지하에 숨어 은밀히 신앙생활을 하던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더할 수 없는 기쁨을 주었다.
잃었던 교단을 재건하고 복음전도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3·8선 이북을 맡은 소련군정과 김일성이 교회탄압을 시작했다.
당시 목사와 성도들은 세가지 부류로 나뉜다.
처음은 무조건 공산정권의 교회탄압에 대해 항거하고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자는 파와 공산당과는 대화가 되지 않으니

무조건 피해 남한으로 내려가자는 파, 셋째는 강단을 지키며 현실을 인정하고 신앙을 유지해 나가자는 파 등이었다.

김길수목사는 첫번째 파에 속했다.
김목사는 45년 12월,장로교 이북5도연합노회를 발기하는데 앞장섬으로 처음 공산정권의 눈총을 받았다.
또 46년 3월1일은 해방후 처음맞는 기념일이어서 강양욱이 주도하는 기독교연맹은 평양역전에서 기념예배를 갖기로 했다.
그런데 김목사는 바로 이날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3·1절기념예배를 갖는다고 공포했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장대현교회 예배를 중지시키려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허사가 되었다.
5천여명이 성도가 모인 이날 행사로 인해 김목사는 ‘인민의 적’으로 간주되며 정치보위부의 철저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47년에 김목사는 더 큰 일을 냈다.
11월3일로 확정된 인민위원회 총선거를 주일성수를 이유로 반대한 것이다.
담판을 짓기 위해 김일성까지 만났던 김목사는 결국 선거가 예정대로 주일에 치러지자 성도들을

토요일 오후 모두 교회로 불러 모은 뒤 철야예배를 드리게 하고 다음 주일날 저녁 예배후까지 데리고 있다 귀가시켰다.
당시 결의문을 쓴 김목사는 “신자의 주일성수는 생명이며 정치와 종교는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고

어디에서든 집회와 신앙의 자유가 확보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치보위부는 김목사에 대해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았다.
48년도에 체포돼 1년간 심한 옥살이를 하다 49년 3월에 잠시 석방 되었고 곧바로 다시 연행돼 행방불명이 되고 밀았다.
당시 신암교회 당회원들이 대동강에 배를 준비하고 남하할 것을 권유했으나 “양을 놓아두고 목자가 어떻게 도피하느냐.
한사람이 있어도 교회를 지키겠다”고 말한 일화가 유언처럼 남아 있다.


공산당에 의한 납치로 아무로 모르게 죽임을 당한 김길수목사.
복음전파와 후진양성으로 일관된 그의 삶은 오늘의 우리에게 주일성수의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키며 신앙의 귀감이 되고 있다.
김길수목사는 부인 김화연권사(85년 소천)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다. 장남 김만용목사(76·평양신학원학장)와

차남 김완용집사(73·영락교회)는 모친과 남하해 순교자 유족으로서 풍성한 믿음의 열매를 맺고 있다.

특히 김만용목사는 부친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어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이야기를 듣는다.
일본중앙대학에서 수학,평양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김만용목사는 남하해 1951년부터 학교법인 숭의학원 설립의

산파역을 맡아 교육일선에 일생을 헌신해 왔다.
53년에 교회장로가 된 그는 지난 92년 부친의 유업을 잇기 위해 숭의학원장직을 떠나 뒤늦게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부친이 제자를 가르치던 신학교육의 맥을 이어 현재 서울 홍익동에 있는 평양신학원 학장을 맡고 있다.
“목회자 가정은 누구나 들여다 보기에 유리와 같은 것이라며 항상 언행에 조심할 것을 당부하시던 부친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어려울 때마다 아버님의 말씀이 삶의 큰 지침이 되었습니다.부친은강양욱과 절친한 사이였으나

정권과 타협치 않으셨고 이윤영목사님이 월남할 때 동행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이것도 거절하셨습니다”

김만용목사가 부친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49년,26세 교사시절이었다.
“지방의 연합집회인도를 위해 집을 나선 뒤 이후의 소식을 아는분이 아무도 없습니다.
당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교회의 진리를 사수하신 부친의 신앙을 유산처럼 생각하며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습니다 ”

김목사는 교육자로 이제 목회자로 무탈한 삶을 살았고 1남4녀의 모든 자녀들이 신앙안에서 훌륭하게

성장해 제몫을 다해주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긴다며 남을 후진양성에 더욱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글 출처- http://www.ihappy99.com)

 

1945년 만주에서 서울로 귀국한 김동철은 오갈데 없는 많은 귀국동포들을 불쌍히 여겨 세운 교회가 서소문 교회이다.
1899년 출생하면서 부터 부모를 따라 만주 용정땅에서 애국지사들의 학교인 명동학교를 졸업하고

영안학교 교사를 하든 중 소명을 받았다.
서울에 돌아와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만주땅 용정으로 돌아가 용정교회 부담임으로 일하면서

용정교회 소년학관의 사감을 보았다.
용정교회에서 수련과정을 거친후 신경시로 옮겨 신경입선정교회를 개척하고 목단강 가에서 국적없는

한국이들이 걸인처럼 부랑하는 이들을 예수의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서울에 돌아와 만주 용정, 신경, 하얼빈에서 귀국한 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돌보는 일을 시작한 것이

서소문교회가 되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식구들만 피난시키고 교회에 남아 갈곳 없는 교인들과 함께 숙식을 하다가

인민의 적으로 몰아 인민군에게 8월 23일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형무소에 끌려가던 새벽에 그는 설교에서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는 남다른 생의 경험을 했습니다.

일제치하에서 갖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일본 헌병들에게 착취당했고 공산 비적들에게 물건을 빼았겨 가면서 살았고 중국 본토인들에게도 갖은 천대를 받았습니다.

공산당은 서울을 점령하고 민족해방군임을 선전합니다. 6.25전 미군은 자기들이 세계의 경찰이 되겠다고 큰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이들을 믿는 이가 없습니다. ----- 고통과 역경에서,

수난과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신 이는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공산당도 신뢰하지 맙시다.
미군이라고 천사라고하지 맙시다.
주님만 의지하고 삽시다" 외세나 환경에 전혀 동요할줄 몰랐던 김목사는 오직 주님의 옷자락만을 붙잡고

헐벗고 굶주린 이웃의 벗이 되기를 기도하다가 공산당의 채찍에 쓰러져 하나님 나라로 이적해 갔습니다.
김동철목사의 유족으로는 부인 안마리아 권사, 장남 김창국목사가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교하리에 교하교회(기장)를 개척했고, 차남 김창렬은 YMCA총무를 역임했고 사남 김창덕은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집사로,

김창길은 미국 뉴저지 한인 장로교회 목사로, 육남 김창림은 내과 의사며 미국인교회 집사로 순교자

선친의 순교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1906년 3월 25일 전북 남원군 대강면 풍산리에서 김창원의 3남 1녀중 장남으로 출생.
예수를 믿기 전 무속에 빠져 교회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그가 첫 아이를 잃고 아내를 동부교회에 나가라고 하여

아내가 교회에가서 목사님의 기도중 마귀 잡귀를 일체 틈타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말을 듣고 무릎을 치면서

나도 교회에 나가야겠다고 하고 그 다음주부터 동부교회에 출석하다가 친구들의

권유로 전주 중앙교회로 옮겨 극진히 봉사하였다.
1943년 일제 말기에 징용병으로 일본 북해도 북단 아오모리 광산지구에서 강제 노역을 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선을 타고 오던 중 부산 앞바다에서 어뢰에 난파되어 기름 바다를 헤치며 가까스로 생환했다.

1949년 6월에 전주 중앙교회에서 제 6대 장로로 임직하며 기쁨에 넘쳐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할것을 결의했다.
1950년 6.25전쟁 발발로 교회시설에 '중앙교회'라고 페인트로 표시하는 등 마지막 순간까지

교회를 사랑하며 목회자를 섬기고 자신의 직임에 충성을 다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부산으로 피난을 가다가

교회의일이 마음 놓이질 않아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전주로 돌아와 지하실에서 살다가 인민위원회

사무실에 끌려가 민주인사들과 줄줄이 묶여 개처럼 끌려다니며 가두시위를 했다.
전북 토목관구사무소에서 인민재판을 했는데 학살에 가담한 자들은 술을 마셔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삽과 곡괭이를 가지고 쳐죽이는 천인 공로할 만행을 저질렀다.
공산주의자들은 김장로에게 "너는 믿는 사람이니 어디 죽여도 사나보자"고 조롱하면서 마지막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할 때

김장로는 "죽으면 천국에 갈터이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만 다만 아쉬운 것은 나는 일흔이 넘으신

어머님이 계신데 내가 먼저 죽는것이요.
또 하나는 마지막 죽는 자리에서 사랑하는 교우들과 함께 고별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죽는 것이다."라고 대답하며

손을 모으고 머리 숙여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곡괭이와 삽에 찍혀 순교했다.

그는 평소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완전히 변화된 생을 살다가 간 사람으로 교회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했으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몸으로 살아 낸 사람으로 후손들에게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라"는 유언과 몸소 그런 삶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기도중에 1950년 9월 28일에 순교하였는데 전주시 효자공원묘지에 모셨다.

유족으로는 아내 김복순 권사는 81세를 일기로 1994년에 소천했고 장남 용신은 집사로 차남 용희, 삼남 용문,

사남 용운은 열심히 교회에 충성하고 있다.
손자중 장손자 손녀 정곤 승곤 형균 옥현 중 김정곤씨는 현재 '군산한일교회' 담임목사로 시무중이다.

 

1914년 11월 5일 전북 전주시 겨원동에서 김만성의 3남으로 출생했다.
전주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농업과 상업을 하였고 영상교회(전남산교회) 교사 성가대 안수집사로 봉사하였음.
청년시절에 입교하여 전도에 불타 많은 결실을 맺었고 친구 박복수집사와 교회학교 교사, 성가대를 섬기며 안수집사로 섬겼다.
당시 친일파 세력들이 공산주의자가 되어 애국청년들은 거의 애국심이 불타는 신자들이었음.

송지동교회에서 안수집사로 봉사하던 중 잡혀 황산지서에서 수많은 고문을 당하고 영상교회로 넘겨져 10명이 사형당하기전

하늘가는 밝은 길을 찬송부르고 하늘나라에서 만납시다.
인사한 후 1950년 8월 10일 스데반처럼 순교하였음

유족으로는 아내 김길례 권사. 자 금은식 목사. 자부 성경례 사모. 손자 김성국 김성진 김성일 이 순교신앙을 지키고 있음.

 
1919년 3.1운동시 3월8일 대구 장날을 기해 계성학교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평양신학교 재학중 신사참배 강요에 정면 대치한 것이 일경의 노여움을 사 투옥당했다가 1935년에 출옥하여

안악읍교회 조사로 봉사하다가 1938년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안수받고 안악읍교회 담임으로 부임.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몇번의 옥고를 치루었지만 교회는 그때마다 다른 목사를 두지 않고 기다렸다가 김목사를 다시 당회장으로 환영하기를 몇차례 목회경력이 16년에 이르렀다.
1945년 해방 후 황해노회 노회장으로 노회를 재건 교회확장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안악읍교회는 대지가 1200평 본당규모 160평 화강암 석재건물로 장년만도 500-600명이었다.
성전아래층을 교육관으로 하여 완벽한 여성훈련의 도장으로 만들었고 당시로선 생각지도 못한 선견자적 목회자였다.
교회운동장에는 정구 코트와 운동시설을 갖추어 놓고 앞서가는 모범교회상을 심었다. 청년회로 하여금

밴드부를 조직케하여 월 1회 정기연주회 겸 노방전도를 벌려 시민들의 눈을 교회로 돌리게 했다.
교회학교내에 고등성경학교를 개설해 스스로 교장이 되어 농어촌 교역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

1946년 조직된 기독교도연맹 가입에 거절하자 시시콜콜 박해를 받았으나 이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선한목사는

양들을 버릴 수가 없다'는 이유로 월남하지 않고 탄압을 견디었다.
1950년 6.25동난 하루전 공사군에 체포당해 해주형무소에 감금당했다.
전쟁이 길어지고 유엔군이 북진이 이루어지게 되자 공산당은 감옥에 반체제 목사들을 위시해서 반공인사 반동지식인들을

반공호에 몰아넣고 수류탄을 터뜨려 죽이거나 우물에 넣어 생매장을 하고 손도끼로 찍어 죽이기도 했고

해주형무소에 불을 지르고 도망쳐 나오면 해주 앞바다 용당포에 던져넣어 수장을 시켰다.

김영윤목사는 고문에 온 몸이 상하고 찢어졌는데도 원래 건강하다보니 끝까지 견디었지만

용당포에 던져 넣을 때 던지워 한많은 세상을 떠나 하나님나라로 옮겨갔으니 49세였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김신덕권사. 장남 김정식장로는 뉴져지주 의사. 차남 김정환장로는 해성여상 교감을역임.

현재 평양신학 신학연구원 교학처장.
삼남 김정권 장로는 와싱톤 거주 기독교사상 편집국장 역임. 장녀 기정순권사는 계성고교 교목실장 이삼열목사의 사모.

차녀 기정심권사. 삼녀 김정실집사 등 선친의 순교신앙을 전승하며 각 분야에서 선한열매를 맺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김이준은 1912년 8월 1일 충청남도 금산에서 출생했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굶기를 밥먹듯했다.
가난한 그의 부친은 남보다 높은 향학열을 가지고 있어서 아들 이준을 그곳 소학교에 보내서 공부를 시켰다.

남아이며 최소한도 자기 이름자는 쓸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였다.
겨우 소학교를 졸업할 때 죽어도 땅을 파다 죽을 각오를 하고 부친을 따라 남만주지방으로 이민을 갔다.

임자 없는 땅을 부지런히 파혜쳐 생활이 낳아지자 부친은 아들 김이준을 용정에 독립투사들이 설립한 중등학교에 보냈다.
고향에서부터 예수를 믿은 그의 가족은 만주에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유지 하게 되었다.

일제 탄압에 못 견디고 외국까지 밀려 고생하는 동포들을 볼때 가슴이 쑤시는 아픔을 느낀 김이준은 중등교육을 마치는 대로

 "내 동포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자가 되리라 ."
결심하고 만주신학교에 입학하여 1940년에 제 1회로 졸업을 하고 목사가 된 김이준은 재만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독교 자체를 항일 독립군으로 보는 일제의 시각은 애국운동을 하기 위하여 망명한 애국지사들의

집결지 용정에 기독교를 그들이 세운 괴뢰정권을 통해 교회를 탄압하였다.
김목사가 신학교를 졸업한 1941년은 장. 감. 성 교파의 독자성이 무너지고 만주조선기독교도연맹에 통페합되어

있었음으로 교회의 독자적인 신앙행위도 인정을 하려하지 않고 중앙에서 명령하는 처지였다.
감리교는 일찍부터 신사참배를 국가의 의례로 받아들였지만 김이준 목사는 달랐다.

신사에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완강히 거절하고 교회에서도 신사참배를 죄라고 가르쳤다.
일경은 김이준 목사를 국헌위반자로 체포하여 죽음보다 못한 옥살이를 시켰고 고문과 영양실조 정신적인 압박속에 건강하던

김목사도 견디어내지를 못하고 끝내 쓸어졌다 1945년 8월 1일이었으니 그의 나이 33세였다. 

김철훈은 1904년 10월 7일 경기도 양평에서 독립유공자 김경덕 목사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일본 헌병에 검속되어 4년의 옥고를 치렀다.
부친의 옥살이로 일경의 요시찰 인물로 지정되어 김철훈은 하루 세끼 식사하는 것 마저 자유스럽지 못했다.
그러나 민족지도자가 되기위해서는 배워야했기에 숭실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4년의 옥고를 치룬 부친을 지켜보면서 감수성이 예민한 김철훈은 한으로 얼룩진 민족애를 배웠다.

그리고 고학을 결심하고 평양을 택했는데 이는 부친 김경덕 목사의 친구인 선교사 곽안련 목사의 도움이 있었기 가능했었다.

숭실전문학교 시절인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 의거사건이 발생하여 서울을 거처

동년 12월 14일 숭실전문학교로 번저 평양시에 독립운동의 격문이 붙기 시작하여 진행되었다.
겨울 방학 시 잠시 주춤하다가 1930년 1월 21일과 22일 양일 숭실전문학교 종교부장이던 김철훈 학생과

그의 친구 강태민 학생이 주동이 되여 숭실전문학교 전교생과 평양시 12개교 학생이 참가하는

대규모 학생 만세 사건을 일으켜 140여명이 검거되었다.
이때 김철훈은 최초의 1개월의 옥살이가 시작되었다.
뼈가 꺾이고 갈비뼈가 우골 드는 고문 속에서 그는 이를 다물고 예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예수를 만나는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한 후 평양신학교로 진학한 것이다.
1936년 3월 목사안수 후 숭실중학교 교목으로 채용되었으나 학생시절 평양 학생만세사건으로
옥살이 하던 자에게 학생을 맡길 수 없다는 이유로 수업 중 일본 경찰에 끌려가 숭실중학교 교목으로 부임 후

3개월 만에 면직되었다.
1936년 8월에 용강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년여 기간이 지났을 때 당국에서 교회 뜰에 일장기를 계양하고

예배 전에 일본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를 낭독하도록 강요한 것을 김철훈 목사의 강직한 성격은

즉각 거절하고 그 교회를 사임하였다.
1938년 2월에 송산리교회 목사로 부임하여서 당시 일본 식민정책으로 조선인의 목을 조이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가혹한 옥고를 치루고 9개월 만에 출옥했다.
동년 11월 의성교회 시무했던 유재기 목사가 평양신학교 학생시절 배민수, 박학전, 송영길,

김철훈 등 10여명을 상대로 농우회(農友會)를 조직하고 졸업 후에도 이를 유지해왔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위장

단체라 하여 일경이 평소 감시하던 김철훈 목사를 농우회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국내 사정이 악화되어 만주로 가려고 시무하던 송산리교회 까지 사임했다.

 

1939년 3월 삼성리교회 장로들의 간청에 이끌리어 삼성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지나던 중

1942년 3월에 성서조선 잡지 158호의 수필부분에 “조와”를 문제 삼아 폐간시킬 의도로 독자인 김철훈 목사를

그 잡지의 필화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의심하여 8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고대하던 일본의 강점에서 해방되자
1945년 9월에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인 고당 조만식 옛 스승을 보필하게 되여 고당은 김철훈 목사를 밀사로

평남건국준비위원회의 공문을 휴대 월남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여운형 선생을 만나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1945년 10월에 800여명의 교인이 출석하는 동평양교회에 부임하였고 총회를 잠정 대행(통일될 때까지)하는

이북5도(16개 노회) 교회연합회 서기를 맡아 연합 사업을 했으나 공산당의 교회탄압은 날로 가중되고 있었다.
1947년 강양욱은 기독교연맹을 조직 가입을 권고했으나 이를 거절하였고 동년 11월 3일 주일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기독교인을 앞장세우려 했으나 이북5도 회장 김진수 목사와 김화식, 김길수,

김철훈 목사 등이 반대하자 교회탄압에 광분하기 시작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를 배출한 산정현교회는 해방 후

온건파와 강경파로 내분되어 1947년도에는 7개월 동안 강단에 공백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 유계준 장로를 중심으로 산정현교회를 평양노회에 복귀시켰다.
일본의 탄압과 교회분쟁으로 인해 교인은 1000명에서 200여명으로 줄고 교회사정은 몹시 어려웠다.

이때 유계준 장로는 김철훈 목사를 방문 간청함으로 편안한 동평양교회를 뒤로하고 어려운 산정현교회를 택하고 김철훈 목사는 산정현교회를 위해 죽으라는 하나님의 계시의 메시지로 알고 1948년 2월에 부임해 오직 교회의 부흥과 선교에만 매진하다가

그해 6월 25일 서평양역 근처에서 공산당에 체포당하여 어디론가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유족으로는 연금봉 사모가 2009년 현재 101세로 건강하며 아들 김기영 목사와

딸 김명희 권사(사위 이금세 장로) 김성희 장로(산정현교회, 유치원장)가 그의 뒤를 이어가고 있다.

 김화식 목사(1894- 1947 연행)    


김화식은 평양의 숙천에서 김찬성 목사의 두 아들중 맞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김찬성목사는 평양신학교 2회 졸업생으로 슬하에 두 아들도 목사가 되었다.
첫째 아들이 김화식이요 둘째 아들이 김성여 목사였다.
1919년 김화식의 나이25세가 되던 해 아버지 김찬성목사는 평안북도 안주군 안주읍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그때 3.1운동을 맞아 부자는 3.1만세운동에 가담하여 시위를 벌리다 아버지 김찬성목사와 함께 부자가

일경에 체포당해 주동자로 2년 6개월 선고를 받고 옥살이를 했다.
김화식은 감옥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옥중에도 전도해 목사가 되게 한 이만 8명이 되었고

그중에 33회 총회장을 지닌 이원영목사가 그 중 한사람이다.
김화식목사의 목회는 경건주의 일변도로 수면하는 만큼 독경을 해야한다고 강조했고 성경연구에도 조예가 깊었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빌립보서 강해와 두권의 강도집을 갖기도 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총회적으로 결의할 때

주기철 이유택 등과 함께 묘향산에가서 기도하고 힘을 합해 저지하려고 했지만 감옥에 끌려갔다.

일제하에 감옥을 안방 드나들듯 하며
고통의 세월속에 해방과 함께 장대현교회로 강단을 옮겼다.
이북교회의 중심인 장대현교회에서 시무하며 기독교이념의 실현을 위하여 무실론 이데오로기인 공산당과 싸우기로

결심하고 평양의 염혈 목사들과 기독청년들을 규합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김화식목사가 결성한 기독교자유당은 1947년 9월 23일 유엔총회에서
한국의 남북통일 문제가 협의되고 난 후 국제 사회에 본격적으로 여론화시켜야 한다는 급박한 사정 때문에

고한규장로를 당수로 추대하여
1947년 11월 19일 결당 날짜를 정했는데 하루 전 11월 18일 내부고발로 창당도 못하고 40여명 전원이 연행되어

중형선고를 받았고 김목사도 13년 형을 선고받고 이들은 시베리아 아오지 탄광에 강제노동에 처해지고

김목사를 위시한 몇 목사들은 총살형에 처해져 기독교의 인맥을 끊으려 했다.

김희서 교사(1878-1918)


김희서는 1873년 충청남도 부여군 양화면 원당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여에서 양반, 뼈대있는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한학을 읽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그가 어릴 때 돌아가시고 형님의 집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그의 안에 내재한 문학성이 발휘된 것은 너무도 외로웠기 때문이다. 그런던 그가 예수를 만난 것은 1895년이었다.

그는 서당 시절에 두보의 시를 좋아했다.
1895 당시 익산 난포에 내려가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든 중 서양여자 두사람이 서당에 찾아와 전해준

한문성경을 등잔불 밑에서 펼쳐 읽고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빛이 스며옴을 느껴 그는 밤을 밝혀 창세기를 다 읽었다.
여자선교사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전할 때는 "무부무군의 사교를 믿으라고 하느냐"고 얼굴엔 노여움이 서리었던

그가 밤새 성경을 읽고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 당신이 내게 오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을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노여움을 사고 창세기를 다 읽은 후 "희서야 너는 내것이니라. 교회로 가서 가르침을 받으라"는 음성을 듣고

무작정 걸어서 난곡침례교회 앞에 갔고 불이 밝혀져 있는 대문을 밀치고 들어가 갓을 쓴 외국인이 나와 정중히 맞았고

전날 낮에 서당을 찾았던 여가가 있었고 그들은 희서를 보며 부르던 찬송을 계속했다.
그가 신앙을 고백한 것은 1895년 그의 나이 22세 때였다.
1908년 그는 부여 칠산교회에 부임해 교역자생활을 시작했으며
1915년 목사 후보인 교사 직분을 받고 함경북도, 간도를 중심하여 만주일대르 선교지로 삼아 순회전도를 했다.
1918년 원산대회에서 시베리아 선교를 명받았는데 조장은 박노기 목사 부조장은 김희서 교사였다.
김교사는 시베리아 선교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면 목사로서 안수받기로되어 있었다.

조장과 부조장 전영태 총찰과 최응선 감로 넷이서 함께 러시아 선교를 위해 수청 연추지방을 향하여 항해하게 되었다.
1918년 10월 20일 그들이 탄 선박이 노영 보시엘해 모커우 지점에 이르렀을 때 돌풍을 만나 끝내 파선하므로

네 사람도 파선하는 배와 함께 풍랑에 휩쓸려 순교했다. 김희서의 45세되는 생일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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