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의 역사]
들어가기- 비잔티움이란 무엇인가?
살아남은 로마 제국
많은 사람에게 비잔티움은 친근하지 않은 세계이다. 영어 ‘비잔틴(byzantine)’은 매우 복잡한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고, 프랑스어 ‘비잔틴스러운(c’est Byznce)’은 매우 고급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이런 표현들은 오해가 소지가 있을 수 있지만, 벽돌과 반석들을 한번 들여다보자. 비잔티움 제국의 유산은 크게 교회와 성벽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교회는 수적으로 훨씬 많고 훨씬 큰 주목을 받아 왔다. 그 존재는 비잔티움이 교회의 신앙을 절대적으로 중시한 국가라는 생각을 뒷바침해 주는 듯하다. 교회를 장식하는 모자이크화, 프레스코화, 성화 그리고 화려한 대리석 장식물은 이곳을 찾는 이를 시공간을 초월한 어떤 존재와 이어 준다.
반면 성벽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자세히 들여다불 것도 별로 없는 데다가 거의 똑같아 보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름의 장점이 있다. 성벽은 기나긴 역사를 지닌 이 제국의 상징인데,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적과의 끊임없는 전쟁이 이 나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성벽은 주요 도시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다. 그리고 도시의 중심지가 확장됨에 따라 때로는 허물어지거나 계속 보수되었고, 성벽을 건설한 사람들을 기념하여 비문으로 장식했다. 즉 성벽은 이 제국과 사람들이 그저 기도만 하며 지내지는 않았다는 사실과 그 역사를 말해준다.
이 책의 목표는 기본 지식을 모아 꾸밈없이 냉정하게 설명함으로써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고정 관념에 도전하며, 중세 유럽과 중동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 제국이 어떤 존쟁였는지를 밝혀 그 위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비잔티움은 대부분의 시기 동서양에 걸쳐 존재했음에도 동서양은 서로 다른 길을 걸은 탓에 종종 이 제국이 간과된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유럽 역사에 없어서는 안 되는 매력적인 부분이며, 우리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 점이 내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이 짧은 글에서도 우리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관습과 습관에 젖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름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여기에서는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이 문제이다. 비잔티움(그리스어로는 비잔티온)은 아테네 인근 도시 국가 메가라의 식민지였던 고대 도시를 가리킨다.
비잔티움은 기원전 7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이다) 즉 지금의 이스탄불에 세워졌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나라의 이름인 ‘비잔티움’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6세기의 일이다. 따라서 그 도시에 살았던 사람 중에서 비잔티움이라는 말을 들어 본 사람은 극소수였을 것이고,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더욱 적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프랑스를 ‘파리 국가’, 대영 제국을 ‘런던 제국’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우리가 비잔티움이라고 부르는 나라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로마인[212년 로마 제국의 카라칼라 황제가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효한 이후, 로마 제국에 복속된 사람들은 종족이나 언어를 불문하고 차츰 본래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로마인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로마 사람들은 4세기 이후 자신의 나라를 로마니아 (Romania) 즉 ‘로마인의 땅 또는 로마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이 이름은 실질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이 그리스어권에 한정된 10~11세기부터 공식 국명처럼 사용되었다.]으로 여겼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아우구스투스의 고대 로마 제국과 그들의 제국 사이에는 어떤 정치적 단절도 없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이 제국의 통치자들은 스스로 고대 로마 제국의 대를 이은 황제로 자처했다.
동방의 이웃이자 적이던 셀주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 역시 이 제국과 지역을 룸(Rum, 로마)이라고 불렀다[중세 이슬람 세계의 학자들은 비잔티움 제국을 로마 왕국(muluk al-Rum) 또는 그리스도교 로마 왕국(muluk al-Rum al-Mutanassira)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대 그리스, 최소한 20세기 말까지 로미오스(Rhomios)[비잔티움사 학자 피터 하라니스(Peter Charanis)에 따르면 1912년 그리스 군대가 오스만 제국의 림노스섬을 점령했을 때 그리스어 화자인 섬 주민들은 그리스 군대를 ‘그리스인(Ellenas)’이라 부른 반면 자신들은 ‘로마인(Rhomios)’이라고 하여 별개의 정체성을 드러냈다고 한다.]라는 정체성이 살아 있었다. 하지만 발칸 반도와 많은 국가들은 이 제국을 그리스라고 불렀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만한다. 800년 프랑크의 왕 카롤루스 마그누스(샤를마뉴로 알려져 있다)가 교황에 의해 ‘로마인의 황제’로 대관식을 치르자, 다른 제국들은 더 이상 로마라 부를 수 없었기에 그리스 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을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부르는 것은 퍽 노골적이었다. 이는 제국의 권위와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을 잠재적으로 그 수도로 한정하고 ‘로마 제국’이라는 표현에 담긴 보편성을 부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는 훨씬 문제가 많다. 동방에서 그리스어가 지배적인 언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부정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스는 언젠가부터 이교도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리스도교 국가가 저주나 매한가지인 이름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는 없었다.
비잔티움이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으나, 서기 300년 이후에는 ‘로마’라는 말을 쓰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 차이를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 형용사가 도입되었다. 예를 들어 동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은 동지중해 세계와 레반트[레반트(Levant)는 ‘해가 뜨다’라는 프랑스어 ‘르베(lever)’에서 유래한 말로서 처음에는 해가 뜨는 동쪽을 의미하다 점차 동부 지중해 연안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중세 유럽에서 레반트는 동부 지중해 연안의 이슬람 세계를 지칭했으며, 동지중해에 위치한 비잔티움 세계는 레반트보다는 ‘로마인의 땅’이라는 뜻의 로마니아로 불렸다.]에 중점을 둔 명칭으로, 자연히 이탈리아어에서 비잔티움 제국이 오랜 기간 보여 준 존재감을 지워버린다.
최근에는 로마 가톨릭과 유사한 ‘로마 정교회’라는 용어가 등장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중점을 둔 인상을 준다. 이 용어는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올바른 믿음을 의미하는 ‘정교’는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가 주장하는 속성이었다. 정교가 동유럽과 중동 일부 지역에서 그리스도교인을 가리키는 용법으로 사용된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이므로 중세 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비잔티움이라는 관례적인 용어를 사용하지만, 독자는 이 용어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유념하기 바란다.
이름 문제가 일단락되면 이번에는 또 다른 중대한 문제인 연대 구분에 직면한다. 1453년 5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점령됨으로써 비잔티움 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그 시작은 명확하지 않아 여전히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다. 좀 더 장기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이들(나 역시 여기에 속한다)은 비잔티움 제국을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년)의 통치와 함께 시작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비잔티움의 자기 인식에 따르고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세운 직후 이 도시는 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그 역할을 1453년 정복되는 시점까지 유지했다. 굳이 비잔티움 제국 역사의 시작을 더 뒤로 잡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4세기에 세워진 국가가 1천 년이라는 기간 동안 변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제국이 경험한 변화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될 만큼 급진적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제국이 멸망하는 시점까지 법체계는 로마 제국의 그것에 기초했다. 수도, 기념비, 황실, 기관, 의식 등은 과거와 연결되는 핵심 요소들을 항상 의식적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만약 콘스탄티누스 1세가 타임머신을 타고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를 방문한다면 분명 제국과 수도가 처한 슬픈 상황에 놀랄 테지만, 자신이 세운 수도의 몇몇 역사적 장소 같은 많은 익숙한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은 오랜 시간과 많은 공간 속에 존재햇다. 파도의 움직임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영토는 긴 역사 동안 꽤 자주 변동을 겪어야 했다. 로마 제국은 영국에서 오늘날의 알제리까지, 포르투갈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약 40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했다. 395년 로마 제국은 행정적으로 동서로 나뉘었는데, 동쪽은 약 140만 제곱킬로미터의 면적을 차지하고 베오그라드에서 현재의 리비아에 이르는 노선의 대략 동쪽으로 뻗어 있었다. 그러나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탈리아와 스페인 남부, 지금의 튀니지, 알제리, 리비아를 재정복하여 지중해를 다시금 로마 제국의 내해로 만들었지만, 수복한 영토는 그리 넓지도 안정적이지도 않았다.
565년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은 뒤 제국은 이탈리아의 많은 부분과 스페인을 상실했고, 620년에는 이집트와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페르시아인들에게 일시적으로, 630년대에는 아랍인들에게 영구적으로 빼앗겼다. 그동안 발칸반도 남부, 특히 그리스 지역은 실질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통제를 벗어났다. 7세기 말에는 북아프리카마저 상실하여 제국에 남은 영토는 이탈리아 일부(사르데나,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나폴리, 로마와 로마의 배후지, 리미니에서 달마티아 연안까지 이어지는 가느다란 아치형 땅)와 에게해 양안에 불과했다. 제국은 영토의 거의 절반을 잃었다. 다음 3세기 동안 비잔티움은 점차 아랍의 맹공격을 저지하고 어느 정도 국경 지역을 고정한 다음 발칸반도에서 영토를 회복한 뒤 마침내 소아시아와 시리아에서 동쪽과 남쪽으로 진격했다. 영토 획득은 그리 극적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안정적이지도 않았다.
11세기 후반에는 이탈리아의 노르만인과 셀주크인이라는 두 강력한 적이 나타나 비잔티움 제국의 변경을 갉아먹더니 제국을 핵심지역인 발칸반도 남부와 소아시아 일부 지역으로 몰아넣었다. 제1차 십자군(1096~1099년)은 레반트 지역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고 이를 이용해 비잔티움은 소아시아와 시리아로 확장했다.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영토를 수십 개의 작은 주로 분할했을 때 영토 확장은 저지되었다.
1261년 재정복은 꽤 빠르게 이루어졌으나, 비잔티움 제국은 마지막 2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축소되어 갔다. 14세기 초 오스만 제국이 소아시아를 집어삼켰다. 발칸반도의 영토도 곧 그 뒤를 따랐고 비잔티움 제국은 마지막 50년간 도시 국가 몇 개만으로 구성되었으며 그나마 서로 바다로만 이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