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산페드로에 있는 '우정의 종 / 김동일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 나라 종이 중국산, 일본산 및 서양종보다 “은은한 종소리에 있어서나 또 아름다운 조각적인 미”에 있어서 더욱 우수한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예로 박물관 관계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의 고고학자인 켈멜박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중장한 성덕대왕신종(약칭 에밀레 종)을 보고 <독일에 이와 같이 훌륭한 종이 있다면, 이 종 하나만 갖고도 훌륭한 종이 될 수 있다>고 감탄하였고, 또한 에밀레종 앞에 있는 설명문에 <한국 제일의 종>이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고 <이 종이야 말로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제일의 종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평가는 에밀레 종이 실제로 <아름다운 미에서나, 장엄한 종소리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금속공예품>이기 때문이다.
이상 염영하 저 한국의 종 서문에서

종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절에서 꼭 갖추어야 할 사물은 범종, 법고, 금고(은판), 목어 등인데 이 중에서 첫 번째가 범종이다. 범종은 유주, 무주 외로운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법음의 소리를 전하고, 살아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들을 천도하는 소리이다. 또 번뇌를 버리지 못하는 모든 중생들에게 휴식을 안겨주는 부처님의 법음의 소리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규모가 작은 미주한국사찰들도 비록 조그마한 법당이라도 조그만 범종을 놓고 의식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종은 한국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한국불교와 함께 한국 역사속에 깊이 자리 잡은 종이 미국의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되어 현재 LA 근교 산 페드로에 있는 우정의 종이다.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동양권 불교국가 중에서 조형미가 우수하고 예술적 가치가 있는 종을 예나 지금이나 만들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한다. 특히 크기가 큰 종은 중국과 일본도 만들고 있으나 조형미가 한국 것에 비하여 현저하게 떨어진고 한다. 한국 종의 이러한 우수성 때문에 우리나라 종이 일본 사람의 약탈 또는 불법반출로 일본내의 사찰이나 신사(神社) 및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약 60구 있다. 그 중에서 26구의 종이 ‘소리와 미’에 있어 그 질이 우수하여 높이 평가되어 일본국보 또는 중요문화재(한국보물에 해당)로 지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내에서 국보종 및 보물종으로 지정된 11구 보다 훨씬 많은 숫자이다 --이상 염영하 저 한국의 종 서문에서 한국종의 역사에서 가장 크고 소리가 좋아 단연 최우수 종은 앞에서 말한 성덕대왕신종으로 에밀레 종이라고도 불리운다.“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불교가 가장 왕성하였던 것은 성덕왕, 효성왕, 경덕왕 시대이다. 성덕왕이 승하한 후 효성왕 2년(738년)에 성덕왕의 명복을 기원하는 사찰을 건립하였고, 경덕왕도 선왕의 명복을 받들려는 효성에서 청동 12만근을 모아 주종사업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하였다. 그 다음 혜공왕이 뒤를 이어 혜공왕 7년 (771년)에 이 종의 완성을 보았다. 즉 사찰건립에서 범종의 완성까지 무려 34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 이것의 무게는 19톤이고 관수로는 5천 관이다. 이 범종 안에는 500자 정도의 명문이 있다.

범종제작과정
범종 제작 과정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김동일 거사에 의하면 범종의 제작은 “주로 진흙만 있는 곳을 골라서 사각으로 땅을 판다. 그리고 이 한 복판에 옹기 항아리 모양의 속 틀을 앉히게 된다. 틀의 속은 철이고 겉은 진흙이다. 범종 주조방법은 신라시대에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 신라, 고려나 이조시대로 내려오면서 주물공법은 똑 같다. 달라진 것은 완성된 종을 운반시 사용되는 현대식 기증기 만 달라졌다.”
종 겉은 유두와 유각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4면이 비천상으로 조성되어 있고 맨 밑 하단둘레에는 당초무늬로 조각되어 있다. 또 비천상 사면에 구름모양이 있고 보살이 공양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종 제작의 기후는 봄이나 가을에 한다. 습기가 있고, 물기가 있으면 기포가 생겨서 제작할 수 없다.
종을 만들때는 많은 시주자들이 동참하고 종에 동참자들의 이름을 새긴다. 종이나 불상 제작시 비철 금속(금,은 주석)이 17%, 구리가 83% 혼합되어 용해가 되었을 만든 불상과 범종을 청동불상, 청동범종이라고 한다. 쇠물을 틀에 부을 때 끊는 온도가 1,300도라고 한다. 범종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의 이름은 영원한 위패의 의미가 있다. 옥돌이나 화강암을 쪼아서 석공들이 불상을 조성을 하는데 청동불상이나 목불 조성하는 조각가의 상이 원만한 사람이 조성하여야 부처님의 상호가 원만하게 나온다고 한다. 박색인 사람들이 조성한 것은 이상하게 나온다.
한국의 범종사와 성종사
해방이후까지도 종 만드는 사람들은 공장도 없이 이론과 실기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절 주변에서 만들었다. 당시에 종 만드는 공장은 없었다. 해방이후 한국에서 종 만드는 두 개의 회사가 있었다고 김동일씨는 증언한다. 1972년도에 불국사 종을 범종사에서 만들 때 황수영, 진홍섭, 김원용, 염영하 박사등 불교금속학 대가들의 자문과 고증을 받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절에서 사용하는 범종이외에 기독교에서도 종을 사용한다. 김동일씨는 “원래 교회 종을 성종이라고 한다. 1970년대 초에 교회가 번창하여 마을 곳곳에서 종을 쳐 대니까 사회문제가 되어 박정희 특명으로 종 치는 것을 금지 시켰다. 한국에 있는 성종사를 설립자는 원국진이고 기독교 신자였다. 이 사람 밑에서 원광식이라는 현 성종사 대표가 성종을 만들었다. 국가에서 금지시키자 이 사람이 범종사로 1972-3년도에 왔다. 범종사로 와서 범종 제조법을 배웠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성종 만드는 사람들이 범종으로 방향을 틀었다. 해방이후 종 제조시에는 기술있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절 경내에서 만들었다 종을 전문으로 만드는 범종사라는 회사 설립이후 최초로 종을 제작한 것은 불국사 종으로 이때가 범행스님이 주지로 있을때인 1970년대 초로 불국사 뜰 즉 경내에서 만들었다. 불무질을 하고 쇠를 녹혀 옛날 신라시대인 모습으로 무명옷을 입고, 짚세기 신고 광목으로 머리 띠를 하고 불무질을 하면서 종을 만들었다. 이때 시주자가 대한항공 한진 회장인 고 조중현씨였다. 이 종을 만든 것이 범종사로서는 최초였다. 범종사는 스님출신 김연택거사와 현 범종사 회장인 김 철호거사가 공동으로 범종사를 설립하였다. 원광식씨는 범종사에서 기술을 배워 성종사를 설립하여 두 개의 회사가 경쟁회사가 되었다.
우정의 종 이야기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서 프랑스에서 제작 된 것이 자유의 여신상이고 1976년 7월 4일 미국 독립 200주년 인데 이것을 기념해서 만든 한국정부에서 에밀레종을 모델로 하여 만든 것이 LA 근교 산페드로에 있는 우정의 종이다.
뉴욕항의 리버티섬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원래는 '세계를 비치는 자유(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로 불렸다. 프랑스 국민이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서 기증한 것으로, 1875년에 조직되었던 프랑스·아메리카연맹이 기금을 모금하고, 프레데리크-오귀스트 바르톨디(Frederic-Auguste Bartholdi)가 동상의 고안을 맡았다. 두꺼운 동(銅)을 늘여서 만든 연판제(延板製) 동상으로 1884년 프랑스에서 완성하여 해체해서 미국으로 옮겨졌고, 1886년 10월 28일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의 주재로 헌정식을 하였다. 대좌석 위에 세워진 이 여신은 오른손에 횃불을 쳐들고, 왼손에는 '1776년 7월 4일'의 날짜가 적힌 독립선언서를 들고 있다. 무게 225t, 횃불까지의 높이 약 46m, 대좌 높이 약 47.5m이다. 내부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머리부분 가까이 까지 오를 수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우정의 종은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범종사에서 제작하였다. 김동일 씨에 의하면 이 종을 만드는 장소는 서울 양재구 말죽거리 부근 경부고속도로 진입로 부근으로 한국정부에서 이곳에 공장을 지어주었다. 이 종 주조가 끝난 후 그 공장은 그린벨트 지역이였기 때문에 아까운 시설이었지만 철거하였다. 이 종을 만드는 동안 몸과 마음을 청결해야 하기 때문에 집에도 보내지 않고 작업장에서 보냈다. 1975년 봄에 시작하여 1976년 6월에 완성되어 부산에서 배편으로 LA 롱비치 항구에 도착하여 당시 LA 브래드리 시장이 이 종을 받았다. 이 종의 제작에는 일반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흥미있는 실화를 김동일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어렵게 모든 것을 준비하여 쇠물을 부었지만 용두부근에 와서 쇠물이 모자랐다. 종은 종 뚜껑(용두)를 거쳐서 음관으로 넘쳐야 완성이 된다. 이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부랴 부랴 녹여서 부었다. 15일 후에 종을 올렸지만 뚜껑부분이 떨어져 버려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종을 다시 벽돌 크기로 다시 잘라서 이것을 용해하였다. 그후 벽돌만한 금 500, 동, 주석, 은 등을 넣었다. 이 작업을 하는 동안 500명이 투입되었고 문공부 국장이 나와 입회하여 금 넣는 작업을 직접 참관하면서 감독하였다. 이렇게 하여 달아보았지만 무게를 달아보니 17톤 밖에 나가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명으로 무게, 크기를 에밀레 종과 똑같이 20톤으로 하려고 했지만 되지 않고 17톤으로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대적인 공법으로 하였지만 천년전의 신라시대 종만 큼 만들수가 없었다. 이 부분이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 였다. 첨담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 왜 천년전의 작품이 나오지 않은 것은 불가사의 한 부분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산 페드로에는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나라가 1976년에 기증한 '우정의 종'이 한국식 보신각 건물과 함께 자리 잡고 있는데(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에 배경으로 잠시 등장하기도 한다), 바로 이 종이 에밀레종을 그대로 본 따 만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서울의 종로 보신각에 걸려있는 종 역시 에밀레종을 그대로 재현하려 한 것이지만, 이 종들은 둘 다 에밀레종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신비한 소리를 전혀 들려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연유가 있기 때문에 독립기념일날 해마다 우정의 종을 13번 친다. 13주 있을 때 독립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8.15행사때 문화원, 영사관 주관으로 종을 치면서 8.15행사를 하고 있다. 이 종은 한미우호를 상징하는 뜻에서 보냈고 이 명문이 있는데 월탄 박종화 노산 이은상씨가 공동으로 명문을 제작하였고, 문양은 무궁화 꽃 문양으로 장식했고. 비천상 대신 한복을 입은 여성이 자유의 여신상을 켜안고 네 면에 서있다.
LA 한국불교계에서도 추석무렵 이곳에서 남가주사원연합회 주최로 망향성묘제를 지내고 있다. 우정의 종의 공덕으로 북핵문제도 잘 풀리고 한민족과 미국민들이 선린의 관계가 지속되기를 기원한다.
LA에서 오랜 동안 살다가 현재 뉴욕에 살고 있는 김동일씨는 종 제작에 참여한 공이 있다고하여 김동일 씨시가 이 종이 있는 곳에서 1985년도 5월 15일날 도안스님을 주례로 하여 한국 혼례복을 입고 혼례를 할 김동일씨는 종 제작에 참여한 공이 있다고 하여 김동일씨가 이 종이 있는 곳에서 1985년도 5월 15일날 도안스님을 주례로 하여 한국 혼례복을 입고 혼례를 한다고 하여 LA타임즈와 한국일보에 크게 보도되어 하객이 천명 정도 왔다. [미주현대불교 2005년 7월 181호]
미주현대불교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