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부의 세번째 장편소설은
작가의 말과 10%의 진행에서 긴 시간 멈춰 있네요.
무엇보다 열정이 부족한 탓이 첫번째겠지요.
각자의 손에 들려져 있는 미디어의 발달과 웹툰들,
짧은 글들의 난무 탓은 어쩌면 건방진 핑계일 터입니다.
사회문화잡지 '유네스코꾸리에'한국어판을 발간보급하면서
폐간이 결정되었을 때 참 많이도 서운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돈이 절대 목표처럼 치닫는 자본주의의 흐름이
점점 더 심화되고 고착되어 인간의 본분을 해하는 형국이니
'소설은 죽었다'에 치졸하게 공감하며 뜨거워지지 않는 심장이
언제 다시 뜨거워질지 요원하여 가슴이 허할 뿐이외다.
<장편소설>
살면 사는 거지
작가의 말
산다는 건 대단한 게 아니라고 위로하며 살았다. 지나가는 감기처럼 시간에 흘려보내면 이겨질 것이라고 치부했다. 자살 앞에 결코 목숨이 아깝다거나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단지 살아만 있어도 남편노릇, 아비노릇이겠거니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것이 부도를 맞고 세상을 살아온 과거의 기억이다.
희망은 없었고, 빈곤의 굴레는 이겨내려는 의지보다 힘겨웠다. 기억에도 없는 네 살 적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 주저앉을 때마다 꾸짖으며 꿈속에 찾아올 만도 한데 아니었다. 운명에 당당해야 했고, 무릎을 꿇고 유연함을 터득해야 했다. 저절로 스쳐가는 순간은 없었고, 굳이 망각하고 싶은 시간들이 많았다. 그렇게, 그렇게 많은 시간들이 흘렀다. 이제 조금은 견딜 만하다. 작고 초라하지만 숱한 비굴함으로 얻어진 소박한 삶이다.
한줄기 햇볕조차 없던 암흑을 용하게도 탈출해 왔지만 상처는 남았다. 쉽사리 치유되지 않았고 여전히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다. 너무 아파서였을까, 쉰 살이 훌쩍 넘은 나이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충주중학교 시절부터 문학 소년이었던 유년의 꿈을 더듬으며 스스로를 치유해야만 했다. 첫 장편소설 “끝섬_사랑하기 전에 이미 그리움” 에 이어 장편소설 “사랑, 장마로 오다”가 치유의 편린이다.
그래, 살면 사는 거지. 산다는 것은 결코 대단한 게 아니려니...... 세번째 장편소설 “살면 사는 거지(가제)”는 그렇게 또 다른 치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