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분노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한 인물을 희생양으로 삼아-
최태명 부산외고 교사. 논술담당.
엘리엇은 학교에서 이유 없이 맞는 아이이다. '왕따'인 엘리엇이 맞을 때 도와주면 왕따가 된다는 것을 아는 다른 아이들은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학교에서 죽도록 맞던 엘리엇은 우연한 기회에 전학을 가게 된다. 전학 간 학교에서 엘리엇은 왕따가 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변한다.
엘리엇은 모아둔 돈으로 머리카락도 단정히 자르고, 비록 재활용품센터에서 샀지만 말끔한 교복도 스스로 준비한다. 또한 겁먹은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서 거울을 보며 연습하고 말 한마디도 조심하는 신중한 아이로 변한다.
전학간 학교에서 엘리엇은 '새로운 엘리엇'이 된다. 엘리엇은 폼을 잡고 당당하게 행동하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히 전학 간 학교에는 이미 왕따 들이 있었기 때문에 엘리엇은 왕따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은 불안한 예감 속에서 온갖 가면을 쓰면서 대중 속에 자신의 존재감을 적당히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엘리엇으로 변모한다. 그레이엄 가드너의 소설 '새로운 엘리엇'의 내용이다. 우리나라 초. 중. 고등학교 벌어지는 왕따 현상은 소설 새로운 엘리엇의 내용 못지않게 심각한 수준이다.
'왕따'란 왕 따돌림의 준말로 두 명 이상의 폭력적인 학생이 한 학생을 집중적으로 괴롭히며 집단적으로 따돌리는 행위나 따돌림을 다하는 학생을 말한다. 이런 왕따는 '이지메르' 즉 '괴롭히다', '들볶다'라는 의미의 동사가 명사화되어 생겨난 일본의 이지메, 서구사회의 '동료 희생시키기(peer victimization)'에 상응하는 말로서 '집단 따돌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왕따의 본질은 무엇이고 왕따가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왕따'에 대한 심층적이고 근원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프랑스의 문학평론가 겸 문화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83)가 저술한 '폭력과 성스러움'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폭력과 성스러움'을 읽어보면 왕따는 요즘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현상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초기부터 있었던 희생제의에서 벌써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희생양은 왕따를 당한 '따돌이'혹은 '따순이'에 해당되고, 타인을 왕따 시키는 행위는 희생제의 상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희생양가 희생제의 왜 생겼는지 이해할 수 있다면 왕따가 왜 일어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희생제의는 인간 욕망의 모방적 성격 때문에 일어난다. 르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이 보여주는 근본적인 성질이 모방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지라르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욕망과 본능을 구분해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지라르는 음식과 섹스를 향한 본능은 아직 욕망이 아니라고 한다.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인 본능적 충동이 어떤 모델이 되는 인물을 모방함에 따라 욕망이 된다고 한다.
욕망이 모방적이라는 것은 욕망하는 주체가 그의 모델이 소유하거나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즉 욕망은 내 옆의 누군가가 가진 것을 나도 가지려고 할 때 생긴다.
돈키호테가 이상적인 기사가 되려고 한때 '아마디스'라는 전설적인 기사담의 주인공을 모델로 삼는다. 아마디스를 모방함으로써 이상적이 가사가 되려는 욕망이 작동하는 것이다. 만일 그 모델이 욕망하는 주체와 다른 세계에 속해있는 존재라면 갈등은 생기지 않는다. 우리의 욕망의 모델이 할리우드의 영화배우라면 그와 우리 사이에는 아무 갈등이 일어날 수가 없다.
그와 반대로 우리가 우리의 모델과 같은 환경에 살고 있다면 다시 말해 모델이 우리의 친구나 동료라면 그가 소유하거나 욕망하는 대상을 우리도 소유하고 욕망할 수 있게 되며 이러한 모방적 관계는 끝없이 더 격렬해진다.
이런 경쟁관계가 뜨거워지면 욕망의 대상은 사라지고 만다. 이때 경쟁자를 사로잡고 있는 유일한 목표는 대상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곧 상대방을 이기는 것으로 바뀐다. 이렇게 되면 경쟁자들은 갈수록 서로 비슷비슷한 사람이 되어 서로간의 차이가 사라지며 이때 모방위기가 일어난다. 모방위기는 무차별화의 위기이며 주체와 모델이 상호 경쟁할 때 이 같은 무차별화가 생겨난다. 무차별 화는 점점 더 격화되고 그 주위를 전염시키며 퍼져나간다.
이렇게 되면 영국의 정치학자 존 흡스(John Hobbs)가 '만인(萬人)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하는 상태가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위기를 중지시키고 공동체를 자기파멸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만장일치로 채택된 희생양이 된 인물에게 그 공동체의 분노와 원한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모방적 폭력의 광기들은 공동체의 한 구성원에게로 수렴되는데, 사람들은 그들 자신들이 직면한 무질서한 사태의 유일한 원인으로 간주한다. 그는 격리되며, 결국에는 모두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그가 다른 사람보다 죄가 큰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공동체 전체는 그가 최가 있다고 믿는다. 냉혹한 사실이지만 희생양 살해는 위기를 해결하는데, 그것은 이 살해가 만장일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희생양메커니즘은 이렇듯 집단적 폭력을 자의적으로 선택한 공동체의 한 구성원에게 집중적으로 향하게 한다. 그러면 이 희생양은 집단 전체의 적이 되며, 이리하여 맨 끝에 가서는 집단은 다시 화해한다. 사회의 반목과 불화가 위험수위에 이를 때 특정한 대상을 지목해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희생양으로 삼음으로써 내부의 화평을 끌어내는 것이 희생제의라는 집단적 폭력행위다.
학생의 가치가 오직 그 학생의 시험 성적에 의해서 결정되는 상황에서 모든 학생은 상호 모방적 경쟁관계에 돌입하게 된다. 학생들은 경쟁에서 열등한 인간으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상대방을 이기려고 경쟁을 학된다.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공부하게 되는 것이다 .
지속된 경쟁과 긴장상태는 학생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쌓이게 한다.
이와 같은 스트레스를 느끼는 학생들이 한 학급의 다수를 차지하게 됨ㄴ, 이러한 스트레스는 일종의 집단적이 형태를 띠게 된다. 이른바 '모방위기'가 도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위기를 해소할 길이 없는 학생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왕따를 만들게 된다.
이때 왕따가 되는 학생은 외모나 신체상의 약점이 있거나 성격이 내성적이고 소극적이 아이들이다. 지라르는 신화를 인용하면서 희생양들은 대부분 불구나 장애를 가진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 사회에 낮춰 이방인 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이 꼭 희생양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희생양으로 선택될 우선적인 징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불구라는 이 불유쾌한 특징은 유죄의 징후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런 특징이 유죄가 되는 것은 물론 부당한 일이다. 희생양은 무고한 것이다. '새로운 엘리엇'에서 엘리엇은 또래보다 유난히 키가 작고, 집이 가난해 재활용센터에서 교복을 사 입었다. 외모나 신체상의 약점을 가졌거나 장애가 있거나 성격이 내성적이고 소극적이 ㄴ것도 죄도 아니고 잘못도 아니다. 단지 왕따를 시켜 희생양으로 만들었을 때 보복 당할 위험이 없다는 점이 그들로 하여금 희생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약하게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전학을 가서 피나는 노력을 하여 더 이상 왕따를 당하지 않게 된 엘리엇에게 새로운 시련이 닥쳐 있다 . 왕따에서 벗어나자 누군가를 왕따 시켜야 하는 입장에 처한 것이다. 처형할 피해자를 결정하는 가해자가 되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왕따를 당할 것인가 왕따를 시킬 것인가?
르네 지라르는 우리가 희생양의 무고함을 알자마자 우리는 더 이상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완벽한 자각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늘 모방적 욕망에 사러 잡혀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 가열되는 모방적경재 시스템에 우리 자신이 일조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벗어나고 싶은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가할 수 없다고 생각한 엘리엇이 용기를 내어 교장실 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엘리엇은 희생양 메커니즘을 자각하고 자신이 져야 할 책임으로부터 도피하지 않은 것이다.
엘리엇은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엘리엇'이 된 것이다.

첫댓글 그냥 요사이 아이들의 학교를 생각하며 글을 읽다보니 이해가 되네요. 하지만 마지막에 나오는 교장선생님은 과연 경쟁이나 모방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물일까 싶네요. 아이들의 왕따는 결국 어른들과도 맞물려 들어가는 얘기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