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1일 가을비가 내렸다.
가을비가 내리자 최헌의 '가을비 우산속' 노래가 흥얼거려졌다.
가수 최헌이 잠들어 있는 분당메모리얼파크로 이동했다.
공원 묘원으로 가는 동안에도 비는 멈추지 않았다.
고 최헌의 무덤을 찾은 것은 2012년 9월 12일 장례식 때 처음 찾아가고 두 달 만이었다.
빈 공간으로 남아있던 묘비석에 대표곡인 '가을비 우산속’ 가사가 적혀 있었다.
“그리움이 눈처럼 쌓인 거리를 나 혼자서 걸었네
미련 때문에 흐르는 세월 따라 잊혀진 그 얼굴이
왜 이다지 속눈썹에 또 다시 떠오르나
정다웠던 그 눈길 목소리 어딜 갔나
아픈 가슴 달래며 찾아 헤매이는 가을비 우산 속에 이슬 맺힌다”
최헌 1949.3.12~ 2012.9.10 상석에 쓰여 있었다.
최헌은 194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 성진에서 출생했다.
1960년대 미8군 무대에 오르며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
히식스(He6)'의 멤버로 스카우트되어 리듬기타를 치며 인기를 끌었다.
히식스는 〈초원의 사랑〉과 〈초원의 빛〉으로 명성을 얻었다.
1974년 최헌은 새로운 멤버 7명으로 '검은나비'를 결성했다.
최헌은 허스키하면서도 구수한 목소리로 김홍탁 작곡의 〈당신은 몰라〉라는
곡을 발표해 당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1976년에 그룹 '호랑나비'를 새로 결성한 뒤 〈오동잎〉으로
다시 한 번 대중들에게 최헌을 각인시키며 국민가수의 발판을 마련했다.
1977년에 솔로로 전향하여 1978년에 〈앵두〉라는 곡과 1979년 〈가을비 우산속〉이라는 곡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고,
그 인기에 힘입어 서울 종로 단성사 극장에서 최초로 리사이틀을 한 가수가 됐다.
그 뒤 활동을 접었다가 1984년에 '불나비'를 결성하여 미국 팝가수인 버티 히긴스의 〈카사블랑카〉를 번안,
발표해 재기하였으며, 2000년대에는 〈돈아돈아〉라는 곡으로 인기를 얻었다.
2011년 5월 식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2012년 9월 10일 6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2012년 9월 12일 장례식장을 찾았다.
가족과 지인들은 깊은 슬픔으로 고인과 작별했다.
서울추모공원으로 들어섰다.
화장으로 모셔졌다.
故 최헌 씨의 친구 김용철(65) 씨는 “대학 1학년 입학식 때 만나서 친했다.
친구는 선이 굵고 배려심이 컸다. 최헌은 대학 때부터 그룹 활동을 했다.
내가 군대 갔다 휴가 오면 용돈과 차비를 챙겨주었다. 모든 친구들에게 그렇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
구질구질한 거 싫어하고 불의를 보면 못 참는 멋진 친구였다”고 회고했다.
최헌이 떠나기 3일 전 자기 아내에게 “다음 세상에서 만나면 나와 다시 살아줄래?
당신이 나를 가장 잘 아니까 다시 살아줬음 좋겠다”고 해서 아내가 “좋다”고 했다며
부부금슬이 좋고 자녀들에게 다정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다고 회고했다.
연예인장례위원장 염덕광(67) 씨는 “10년 넘게 장례위원장을 맡으면서
고운봉, 계수남, 현인, 김창남, 김형곤, 황해, 백설희, 반야월 선생 등 많은 분들을 모셨는데
연세가 많으신 분들도 서운한데 이렇게 젊은 분이 떠나면 마음이 너무 안 좋다”고 했다.
“최헌 씨는 후배들에게 자상했고 윗사람들이 잘못하면 올바른 소리를 했다.
깔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가을이면 오동잎이 떨어지는데 10대 가수상을 받은 국민가수인데
좀 더 좋은 노래 불러주고 갔으면 좋겠는데 너무 안타깝다.
아픈 거 다 내려놓고 근심걱정도 내려놓고 편안한 곳에서 쉬기를 바란다며
비가 오면 참 많이 생각날 거 같다”며 최헌을 추모했다.
홍영주(64) 씨는 “최헌이 가수왕이 되기 전에도 여자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시민회관에서 그룹사운드 경연대회를 했는데 최우수상을 받았다.
시민회관에서 노래를 부르면 여성들이 환호성을 질러서 크리프 리차드가 왔을 때 같았다”며
“명동거리를 나가면 몇 걸음을 못 걸을 정도로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그는 “고인은 절대 타인에게 폐를 안 끼치고 식당에 가도 남이 계산하기 전에 번갯불처럼 먼저 했다”며
“허스키하면서도 깊어서 누가 모창을 할 수가 없다.
젊은이들의 우상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 아쉽다”며 떠난 친구를 그리워했다.
고인과 같은 프로덕션에서 편곡을 했던 김기표 씨는 “고인은 뒤끝이 없고 남자다웠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가요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전에는 미 8군에서 흑인음악을 많이 했고
노래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했었다”며
“'히식스(He6)' 끝나고 검은나비, 호랑나비, 불나비로 이어지는
나비시즌 할 때까지 같이 했다”며
“주위를 잘 챙겼고 건강해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에 기절하는 줄 알았다.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며
오랜 음악동료이자 친구로서 깊은 슬픔을 표했다.
고인은 가족들의 깊은 애도 속에 분당 메모리얼파크 묘원에 묻혔다.
사위가 마지막으로 장인어른 께 담배를 드렸다.
2012년 11월 11일 가을비가 내리는 분당 메모리얼파크에 갔을 때 무덤 건너편에서는
또 다른 사람의 장례식이 있었다. 세상은 끝없이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간다는 생각을 했다.
붉은 단풍잎 사이로 장례를 모시는 모습을 보았다.
언덕 위로 올라가 보았다.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서면 바람이 잦고 그윽해졌다.
단풍 이불을 덮고 있는 무덤들이 아름다웠다.
사람이 살다 떠나는 것, 그저 편안한 일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 마주쳐도 가만히 손 내밀고 미련 없이
털고 일어설 수 있도록 늘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꽃그늘 밑에 꽃잎들을 이고 있는 주인도 편안하기를 빌었다.
노래가 갖는 힘은 대단하다. 어떤 기억을 떠올릴 때 우리는 종종
그 당시 들었던 노래를 들으며 한순간에 그 시대, 그 장소, 누군가와 나눴던 그 공간으로
이미 들어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2012년 9월 12일 나는 고 최헌의 장례식을 사진에 담았다.
대구에 사는 친구는 노래교실에서 선생님과 학생들이 최헌의 오동잎과 가을비 우산속 등 그의 노래들을 부르면서
추모했다고 한다.한 시대를 그의 노래를 듣고 각자 다른 추억들을 담았기에
노래교실 선생님과 학생들은 최헌의 노래를 부르면서 목이 메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했다.
어떤 이는 사진을 담고, 그를 추억하는 다른 이들은 그의 노래로 그가 세상 떠나는 순간을 아쉬워했다.
가수 최헌은 너무 일찍 떠나서 아쉽지만 그러함에도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그렇게 끝없이 기억해준다는 것,
그가 사람들에게 깊은 위로와 추억들을 주었던 것에 대한 보답이라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의 노래를 가만히 따라 불렀다.
최헌의 영면을 기원했다.
첫댓글
70년대 신길동
없이 살아도 정이 넘치던 우물가
일 가신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 아이
쌀 씻던 아줌마랑 빨래하는 누나들이
가끔씩 사준 과자를 먹으며...
앵두를 맛있게 불렀죠.
십여 년 전 모 노래자랑
'오동잎'으로 대상 받고...
가을 밤 고인을 추모하며
한 잎 따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