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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완구 전 울산시장을 비롯해 동천학사 울산출신 인사들이 지난해 11월 해석 정해영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울산 중구 남외동 정지말 공원에 기념비를 세웠다. 울산사람들은 해석의 정치활동을 높이 평가하지만 이에 못잖게 그가 서울에 동천학사를 건립해 어려운 울산출신 학생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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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울산 출신의 정치인 해석(海石) 정해영(鄭海永)의 높은 뜻을 기리는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다. 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중구 남외동 정지말 공원이었다. 이날 기념식에는 최형우, 심완구, 안우만, 최병국 등 울산 출신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하는 동안 해석의 도움을 받았다. 3대 총선에서 여당인 자유당 후보로 정계에 발을 들여 놓았던 해석은 7선 의원으로 8대 국회 때는 국회부의장까지 지내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그가 정작 울산에서 금배지를 단 것은 3대와 5대 두 번뿐이었다.
울산 사람들은 정치인으로 그가 울산 발전을 위해 펼친 각종 지역활동을 존경하지만 이에 못잖게 3대 국회의원 시절 그가 성북동에 동천학사를 지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울산출신 대학생들에게 도움을 준 것을 고마워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려면 하숙비가 비싸 울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서울 진학을 포기하고 대신 가까운 부산과 대구로 진학했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을 안 해석이 1955년 서울 성북동에 동천학사를 지어 울산 학생들에게 최소한의 실비만 받고 밥을 먹이고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지역구인 을구서 동남신문 발행 5·16때 사전검열단에 의해 폐간
서울 성북동에 ‘동천학사’ 지어 지역의 많은 인재 서울진출 도와
최근 중구 정지말공원에 기념비 ‘야당으로 7선’표기 잘못된 기록
울산 인물 중 동천학사 출신들이 적지 않다. 최형우, 심완구, 안우만, 최병국씨는 물론이고 김태호, 차수명, 김채겸, 차화준, 이규정씨 등 울산 정치의 획을 그었던 많은 인물들이 학창 시절 동천학사에서 공부했다. 따라서 울산 사람들은 동천학사를 ‘울산 인재의 산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해석은 4·19 후 5대 국회의원 시절에는 ‘동남신문’을 발간했는데 이 신문의 독자가 해석의 지역구인 울산 을구로 한정되었지만 울산지역민을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신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유당 정권이 집권을 하는 동안 언론통제를 위한 입법 조치와 경향신문 폐간 등 무리수를 두어 민심을 잃은 것을 본 민주당은 4·19 후 그동안 허가제였던 신문발행을 등록제로 전환했다. 이러다 보니 한꺼번에 신문이 많이 쏟아져 오히려 국민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민주당 시절에는 울산만 해도 우후죽순 격으로 신문지사가 많이 설립되고 지사장들이 기자증 발급을 난립하는 바람에 민폐가 컸다. 이 때문에 5·16이 일어난 후 울산에서는 70여명의 기자가 해직되었다.
해석이 동남신문을 발행한 것은 5·16전 민주당 시절이었다. 동남신문이 처음 창간된 것은 울산에서 해석의 정치 활동을 도왔던 당원들의 요청 때문이었다. 당시 지역에서 정치활동을 했던 당원들의 가장 큰 어려움은 선거만 시작되면 시도 때도 없이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것이었다.
당시 경찰들은 선거 때만 되면 여당 후보의 지원 세력이 되어 야당 후보 운동원들의 손발을 묶었다. 실제로 4대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여당인 자유당의 김성탁 후보와 선거전을 벌였던 해석의 선거운동원들은 이유없이 경찰서에 잡혀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당시 야당 선거운동원들이 경찰조사를 받지 않는 방법은 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해석을 도왔던 당원들이 기자증을 갖기 위해 해석에게 신문 발행을 요청했고 해석은 당원 보호차원에서 신문을 발행했다.
창간은 이렇게 당원 보호차원에서 시작되었지만 동남신문은 나중에는 해석의 정치 활동과 지역 행사를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고 해석 역시 신문을 통해 지역 여론을 수렴할 수 있었다. 신문 크기는 일반 신문 형태였고 4페이지로 연 2회 발행을 원칙으로 했지만 지역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는 따로 특집판을 내기도 했다. 신문 발간에 소요되는 비용은 해석의 세비로 모두 충당했는데 5·16전까지 여러 번 발행되었다.
편집장은 이우태씨가 맡았고 실무는 최종두씨가 담당했다. 나중에 <남부군>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이태’라는 가명으로 독자들에게 더 잘 알려진 이우태씨는 남로당 출신으로 해석과는 특이한 인연을 가졌다. 1922년 충북 제천 출신으로 대학 졸업 후 서울에서 일간지 기자생활을 했던 그는 6·25가 터지면서 본의 아니게 빨치산이 되어 지리산 이현상 유격대장 아래서 일했다.
<남부군>은 그가 지리산에 있을 때 본 빨치산 활동을 실화형식으로 소설화한 것이다.
이후 토벌대에 체포되어 옥중 생활을 했던 그는 출옥 후 연탄장사가 인연이 되어 해석과 알게 되었다. 기자 생활을 해 글 솜씨가 좋았던 그는 해석이 세계일주 여행을 했을 때 여행기를 조선일보에 대필했는데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 1957년부터 해석의 스피치 라이터가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6대 국회 때는 비례대표 국회의원까지 지냈던 그는 해석이 울산에서 선거를 치를 때면 직접 울산에 와 일선에서 선거를 지휘하기도 했다.
동남신문은 논설 등 주요기사는 이씨가 썼고 일반기사는 최씨가 집필했다. 사무실은 서린동 서린호텔 옆에 있었고 인쇄는 서울의 인쇄 골목으로 알려진 오장동에서 했다.
최종두씨가 해석을 알게 된 것은 1960년 5대 총선 때였다. 이 때 해석은 울산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민주당 후보였던 김택천 후보와 어려운 선거전을 치러야 했다. 이 선거는 정씨의 승리로 끝났지만 개표과정에서 당시 김 후보를 도왔던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이 정 후보의 금권 선거에 항의해 개표장으로 몰려가 투표함을 불태우려고 했다. 이 때 정씨의 선거요원이었던 최씨가 앞장서 이를 막아내었는데 이를 고맙게 여긴 해석이 선거 후 최씨를 서울로 데리고 가 이우태씨와 함께 신문 제작에 투입했다.
해석이 최씨에게 신문제작을 맡긴 것을 보면 이 때 이미 최씨의 글 솜씨가 뛰어났던 것 같다. 나중에 울산 MBC 상무를 거쳐 경상일보 사장을 지냈던 최씨는 방송인이면서도 글재주가 좋아 문필가로 오랫동안 활동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방송은 논리를 강조하는 신문과는 달리 스토리를 중시하기 때문에 방송인이 글을 잘 쓴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최씨는 예외라고 볼 수 있다.
동남신문이 폐간 된 것은 1961년 5·16 직후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다. 혁명정부는 혁명 후 신문 발간을 사전에 검열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따라서 서울에도 시청에 혁명정부의 언론대책반이 설치되었고 이 대책반이 서울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을 사전 검열했다.
5·16 직후 해석과 이우태, 최종두씨는 모임을 갖고 국회 해산을 지역민들에게 알리는 방안을 협의했다. 이 때 해석은 혁명정부 아래서는 신문 발행이 어렵다고 판단해 개인 서신을 통해 이 사실을 지역민들에게 알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씨와 최씨가 국회해산은 정 의원의 개인 편지보다 신문기사를 통해 알리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해 신문을 제작했다.
그리고 사전 검열을 받기 위해 최씨가 교정쇄를 들고 시청 검열단으로 갔다.
“내가 교정쇄를 들고 갈 때만 해도 동남신문은 일간지가 아닌 특수지이기 때문에 검열단이 까다롭게 검열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혁명정부의 실세로 검열단 단장이었던 이석제 소령이 내가 내민 교정쇄 내용 중 특히 해석 선생의 인사말을 한참 읽어 보더니 ‘국회가 없어진 마당에 정 의원이 지역민들에게 인사말을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면서 ‘인사말을 삭제한 후 신문을 발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니 화가 나 ‘해석 선생이 어렵게 쓴 인사말을 왜 빼라느냐’면서 내가 대들었더니 이 소령이 총에 손을 댄 후 ‘정 그렇게 고집을 피우면 신문을 폐간하겠다’고 소리쳐 교정쇄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동남신문 같은 비 정기간행물은 검열단의 판단에 따라 그 자리에서 폐간될 수 있을 정도로 검열단의 힘이 막강했습니다.”
이후 동남신문은 다시 발간되지 못했다. 이 신문이 비록 울산시민 전체가 아닌 해석의 지역구인 울산 을구의 지역민을 위한 신문이었고 또 신문이 처음에는 당원 보호차원에서 발행되었지만 이 때 이미 신문을 통해 자신의 의정활동을 지역민들에게 알리고 지역 여론을 수렴하려 했던 해석의 높은 안목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런데 해석의 기념비 중 잘못된 내용이 있다. 기념비 뒷면에 있는 해석의 정치 경력 중 ‘울산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3대 민의원에 당선되어’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해석이 정치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954년 3대 총선 때다. 그런데 3대 때는 무소속이 아니고 여당인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해석의 출마를 보면 3대 때는 울산에서 여당인 자유당 후보로 당선되었고 4대 때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했고, 5대 때는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6~7대 때는 비례대표로 정계에 진출했는데 6대는 민정당 후보로, 7대는 신민당 후보로 각각 당선되었다. 이후 선거구를 부산으로 옮긴 그는 8~10대는 야당인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금배지를 달았다.
이러다 보니 뒤에 나오는 ‘야당으로 무려 7선 의원을 하시는 동안’과 ‘야당으로 국회 7선을 이룸이여’의 문장이 모두 틀린 기록이 된다.
우리나라 헌정사를 보면 해석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야당의원이 틀림없지만 정치 시작은 여당의원으로 했는데 이에 대한 언급 없이 ‘야당 7선 의원’이라고만 표기한 것은 잘못이다.
기념비문은 모 대학의 명예교수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비문이 나중에 해석의 정치 행보를 고증하는 주요 사료가 되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실수는 없어야 할 것이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