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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뚝솟은 봉수산 푸른 기슭에-금마초등학교 제5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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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지식인 스크랩 칭기즈칸 : (18) 컨스피러시
미루나무 추천 0 조회 200 12.04.29 14: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테무진to the칸

 

 

(18) 컨스피러시

 

 

intro

 

 

 

위험에 빠진 테무진, 부활을 꿈꾸는 천재 자무카, 배신자 옹 칸, 조국의 백성과 재산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적지에 뛰어든 쿡세우 사브락, 그리고 상처 입은 늙은 전사 톡토아 베키... 배신과 복수로 점철된 1202(혹은 1203년 초) 몽골초원의 겨울. 과연 이들에게 봄은 올 것인가? 1203년은 이들에게 어떤 해가 될 것인가? 두둥~

 

 

1

 

(전편에 이어) 테무진을 배신하고 도망가는 옹 칸의 게르에 홀연히 나타난 자무카... 자무카는 옹 칸에게 얼핏 보면 맥락이 없는 황당한 말을 한다.

 

저는 붙박이 종달새입니다. 테무진은 철이 되면 떠나는 종달새입니다.”

 

 

 

 

테무진은 철새란 뜻이었다. 이어 자무카는 기괴한 논리를 편다.

나는 테무진이 옹 칸 형님과 함께 이동하지 않고 남은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나이만 군에 가담하기 위해 남은 것입니다.”

 

아니 이게 대체 뭔 소리란 말인가? 옹 칸은 겁을 먹어서 비겁하게 테무진을 배신했다. 그런데 테무진이 옹 칸을 떠나는 철새라... 옆에서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커레이트족의 귀족 하나가 자무카를 비난했다.

 

그대 자무카여, 테무진은 올곧은 사람이다. 왜 그런 사람을 아무 근거도 없이 헐뜯는가?”

 

이 말은 사실 옹 칸은 비난한 것이나 다름없다. 테무진이 올곧다고 했다. 커레이트 귀족들은 테무진에 대해 도덕적인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동적으로 그런 테무진을 배신한 옹 칸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된다. 한마디로 자신이 모시는 군주의 도덕성이 쪽팔린다는 뜻이다. 이런 얘기를 옹 칸하고 단둘이 있을 때도 아니고, 중요한 손님이 있을 때 날린 거다. 커레이트 부족 내에서 옹 칸의 권위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어쨌든 이 양반은 눈치가 어지간히 없었다. 자무카가 전후상황을 몰라서 이런 얘기를 한 게 아니다. 옹 칸이 무슨 바보도 아니고, 겁이 나서 테무진을 배신한 걸 자기 자신이 그 누구보다 잘 아는데 뜬금없이 테무진이 사실은 철새였다는 얘기가 와 닿을 리 없다.

 

자무카도 바보가 아니다. 자무카는 옹 칸이라는 인간과 한두 번 엮인 사이가 아니다. 그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을 터. 자무카는 옹 칸이 죄책감과 자괴감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양심 수준도 아니고, 이젠 낯짝의 문제였다. 인간은 누구나 나쁜놈이 되기 싫어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자기가 나쁘나는 걸 아는 사람일수록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속이곤 한다.

 

예컨대 악덕 사장일수록 자신이 노동자들을 돌봐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불황에 직업의 기회를 줬다는 식이다. ‘부동산 투기 안 한 사람이 바보라는 저 유명한 말도 그렇다. 자기가 부도덕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정직한 사람들이 바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범죄자들이 피해자의 옷차림(미니스커트 따위)에 책임을 전가하는 건 흔한 패턴이다. 이런 핑계를 대는 이유는 악인이 되기 싫은 두려움이 잠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을 전혀 못 느끼면 사이코패스가 되는 거고.

   

자무카는 옹 칸에게 심적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핑계를 제공해주었다. 옹 칸 스스로 자신을 정당화하기 뭐하니 친절하게도 대신 해준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핑계가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핑계거리가 있는지, 핑계에 기댈 준비가 되어 있는지만 중요하다.

 

그런데 옹 칸이 자무카가 던져준 핑계에 마음을 온전히 맡기려면, 그 핑계가 허무맹랑한 음해가 아니라 사실임을 입증해야 한다. 다시 말해 배신자테무진을 응징해야 한단 얘기다. 그런데 옹 칸 혼자 어떻게 테무진을 상대한단 말인가? 방법이 있다. ‘붙박이 종달새자무카가 있지 않은가. 자무카의 발언은 테무진에게 뒤지고 있는 경쟁구도를 뒤집기 위해 옹 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정치적 신호였다.

 

그러나 옹 칸에게는 마음이 흔들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2

 

나이만의 쿡세우 사브락이 평범한 장군이었다면, 당연히 떠난옹 칸이 아니라 남겨진테무진을 공격했을 것이다. 이럴 때는 상대가 반토막으로 줄었네, 하고 자신감을 얻어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는 심산으로 덤비기 십상이다. 그러나 쿡세우 사브락은 다르게 생각했다.

 

육식동물이 사냥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크고 건강한 그래서 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초식동물을 고를 거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아프리카 초원을 뒤덮은 얼룩말과 들소, 누우 떼는 뷔페가 아니다. 초식동물은 온 힘을 다해 도망가고 저항하기 때문에, 육식동물 입장에서도 배를 채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건강한 수소의 뒷다리에 맞기라도 하면 죽거나 불구가 되기 십상이다. 야생의 사자는 노상 굶는다. 거의 언제나 위산과다에 시달리는 상태다.

 

육식동물은 되도록 약하고 병들고 어린, 혹은 늙은 초식동물을 사냥감으로 낙점한다. 집단사냥을 하는 동물들은 미리 설정된 희생양을 무리에서 떨어뜨리는 것으로 사냥을 시작한다. 아프리카의 사자나 리카온은 물론 초원의 늑대도 마찬가지다.

 

 

 

쿡세우 사브락은 백전노장이었다. 노련한 육식동물은 사냥감 중에 누가 약한지 기가 막히게 알아본다. 쿡세우 사브락은 테무진-옹 칸 연합군이 반으로 줄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강한 개체와 약한 개체가 분리되었다고 판단했다. 당연히 약한 개체는 먼저 도망간 옹 칸이었다.

 

사실 전쟁은 도박이다. 연합군과 싸우면 나이만군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빼앗긴 나이만의 재산과 백성을 모두 되찾느냐 아니면 2차전에서까지 져서 나라 전체가 안드로메다로 가느냐 하는 도박을 감행하기보다는, 반이라도 확실히 회수하는 편이 현명하다. 쿡세우 사브락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테무진 대신 옹 칸을 추격했다.

 

옹 칸, 조때따. 기껏 양심을 팔아 은인인 테무진을 쿡세우 사브락에게 던져놓고 혼자 도망왔더니... 배신의 대가로 외려 테무진 없이 혼자 쿡세우 사브락에게 걸린 것이다. 쿡세우 사브락의 판단을 예상치 못한 옹 칸은 나이만 군에 불시에 따라잡혔다. 전투의 결과는 독자여러분들도 쉽게 예상이 가리라. 옹 칸의 군대는 사정없이 린치당했다.

 

 

 

 

나이만 군이 자기네 백성과 가축, 재산을 회수했음은 물론이다. 헌데 그걸로는 모자랐다. 테무진과의 싸움을 포기했으므로 절반의 회수에 불과하다. 커레이트의 백성과 재산도 약탈해 벌충해야 했다. 옹 칸의 커레이트족은 쿡세우 사브락에게 처절하게 약탈당했다.

 

누차 말하지만 초원에서는 백성과 가축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군대와 함께 이동했다. 커레이트족에 억류되어 노예 처지가 된 메르키트의 여왕과 왕자, 그들의 백성들도 당연히 옹 칸의 쿠리엔에 속해 있었거나, 쿠리엔 주변에 있었다. 이들은 메르키트족 구원군과 은밀하게 통신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메르키트족 왕자들은 옹 칸의 군대가 쿡세우 사브락에게 탈탈 털리고 있는 틈을 타 여왕과 백성들은 물론 자신들의 원래 재산, 포로가 되면서 커레이트족의 소유가 된 자기네 가축 등을 모두 챙겨 커레이트족 쿠리엔을 탈출했다. 커레이트족의 재산과 가축도 옮길 수 있는 한계치만큼 털어 갔을 것이다.

 

메르키트족 포로들은 약속된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던 구원군과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포로가 되었던 처자식과 만난 톡토아 베키의 심경은 실로 감격적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고래들의 싸움에 끼는 건 어불성설이다. 상봉의 기쁨을 나눈 메르키트족은 갈 길을 찾아 재빨리 전장을 떠났다.

 

배신의 대가는 참으로 쓰라렸다. 전쟁에서 얻은 이익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던 옹 칸은 얼굴에 똥칠을 했다. 전리품은 물론 전쟁 이전에 갖고 있던 노예와 물자, 가축까지도 잃었다. 이제는 커레이트족의 원래 재산과 백성까지도 약탈당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이대로 가다간 절멸이다..!

 

 

3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에서 옹 칸을 도와줄 사람은 테무진 밖에 없었다. 그런데 도와줄 리가 없잖은가. 또 옹 칸도 낯짝이 있지, 어떻게 이제 와서 테무진에게 또 손을 벌린단 말인가. 그러나 아들인 셍굼이 위기에 처하자 자존심이고 뭐고 가릴 판이 아니었다. 예전에 설명했듯이 셍굼은 장군(將軍)’의 초원식 발음이다. 셍굼도 독자적으로 군사를 지휘했다는 뜻. 필시 아버지에게 자기만의 쿠리엔을 분양받았을 것이다.

 

셍굼은 쿡세우 사브락의 밥이었다. 그는 자신의 백성은 물론이고 처자식까지 포로로 빼앗긴 채 벼랑 위까지 도망갔다. 옹 칸은 테무진에게 사자를 보내 애걸복걸했다.

 

아들, 한 번만 살려주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딱 한 번만...”

 

 

 

 

옹 칸은 염치없게도 테무진의 최고 인재 8명의 절반인 네 마리 말을 세트로 보내달라고 했다.

 

“... 네 명의 준마를 보내주면 안될까. 제발 내 처자식과 백성만이라도 살려줘!”

이 뭐... 테무진은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테무진은 한 번 더 바보가 되기로 결정했다. 어찌 보면 기회였다. 이 지경에서까지 동맹자를 돕는다면 테무진은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완전한 도덕적 우위에 설 수 있다.

 

테무진은 네 마리 말인 보르추, 보로쿨, 칠라온, 무칼리에게 군사를 주고 셍굼을 구출해 오라고 명령했다. 네 마리 말의 기분은 어땠을까? 내가 이들 중 한 명이었다면 정말 싫었을 것 같다. 충성심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충성심이 강하기 때문에 선뜻 따르기 힘든 명령이다. 우리더러 당신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저 배신자를 도와주라고?

 

게다가 셍굼은 지위에 걸맞지 않게 재능과 실력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인품도 별로여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전장에서는 대충이란 게 없다.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모든 걸 쏟아 부어야 한다. 겨우 셍굼 따위를 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한단 말인가.

 

노예계급이었다가 전격 발탁된 무칼리와 나이가 어린 보로쿨이 테무진에게 반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신참이었던 칠라운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반면 네 마리 말의 리더인 보르추는 테무진과 친구사이였다. 친구로서 화가 날 법도 했다. 테무진의 결정을 말리는 과정에서 고성이 오갔을 가능성도 있다.

 

역사는 보르추가 테무진에게 말을 빌려달라고 요구한 대목만 기록한다. 테무진에겐 그가 엄청나게 아끼는 애마가 있었다. 초원에서 말은 단순한 가축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말은 전사와 운명공동체다. 그냥 말도 아니고 애마라고 할 정도면 우리가 상상하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훨씬 넘어선다.

 

테무진은 그 중에서도 극성이었다. 기록을 보면 문제의 애마는 백마이거나 흰 바탕에 얼룩이 진 말이었다. 테무진은 이 말한테 단 한 번도 채찍질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애지중지하는 걸 내놓으라고 한 걸 보면 보르추가 테무진의 명령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 자네도 이만큼의 성의는 보여라, 는 뜻이니 말이다. 한편 역시 보르추와 테무진이 친구사이였다는 점을 재확인할 수 있다. 친한 친구가 아니라면, 어떻게 신하가 감히 군주의 말을 빌릴 생각을 한단 말인가.

 

 

 

테무진도 그냥 보내기 미안했던지 보르추에게 선뜻 말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주의사항을 전달하는 건 잊지 않았다.

 

내가 이 말을 너무 애지중지 키워서 말야... 내가 이녀석한테는 단 한 번도 채찍을 쓴 일이 없거든? 얜 다른 말처럼 대하면 사람이 뭘 원하는지 몰라.”

 

아니 채찍을 쓰지 않으면 뭘로 말을 듣게 하는 거야?”

 

시범을 보여주께. 여기 이 말의 땀을 훑어주는 주걱으로 말야, 이렇게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면서... 막 쓸면 애가 싫어해... 친절한 목소리로 가자하면 앞으로 달려갈 거야.”

 

거참 징하다... 어쨌든 보르추는 테무진의 말을 타고 세 명의 동료와 함께 셍굼을 구출하러 갔다. 셍굼은 사망 직전이었다. 그가 타던 말이 뒷다리에 화살을 맞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이내 포로가 될 판이었다. 상황이 어찌나 급박했는지, 보르추는 직접 셍굼을 구해오려고 했다.

 

... 그런데 급한 마음에 테무진의 주의사항을 잊어먹고 말았다. 그는 평소 버릇대로 테무진의 애마에 채찍질을 했다.

 

이랴! 달려라!”

 

하지만 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좋은 대접 받다가 채찍을 처음 맞아본 애마도 이게 뭔 일인가 싶었을 것이다.

 

아니 급해 죽겠는데 이 말새끼가 왜 말을 안 들어 쳐먹어!”

 

보르추는 보스의 애마가 말을 안 듣자 채찍으로 디립다 두들겨 팼다. 한참을 패고 나서야 테무진이 한 말이 생각났다. 아차 이 말은 채찍을 맞아본 적이 없지...(어쩌면 고의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테무진에게 풀 화를 말에게 대신 풀었는지도 모르겠다. 하극상이었다면, 참 귀여운 하극상이다. 나중에 테무진은 보르추의 공을 칭찬하고 상을 줄 때, 보르추가 자기 말을 두들겨 팬 일을 굳이 끄집어내 아주 자세히 거론한다. 잊지 않았다는 뜻인데, 물론 언급만 하고 끝냈다. 이것도 무척 귀여운 복수다.)

 

보르추는 채찍 손잡이로 말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면서 앞으로 가자고 했다. 그제야 말은 셍굼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보르추는 빗발치는 나이만군의 화살을 뚫고 셍굼을 구출해 돌아왔다. 네 마리 말은 역시 능력이 탁월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전세를 뒤집어 포로가 된 커레이트의 왕족들과 백성들까지 구출해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모험을 감행하진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쿡세우 사브락도 현명했다. 이미 설욕전의 목표는 달성했다. 그는 눈앞에서 능력을 증명한 네 마리 말과 싸우는 도박을 하지 않았다. 테무진-옹 칸 연합군과 나이만의 전쟁은 옹 칸만 피박을 뒤집어쓴 채 끝났다. 그나마 가족들이 무사한 게 다행이었다.

 

 

4

 

이제 옹 칸은 책임을 져야 했다. 테무진에게 받은 은혜를 드라마틱하게 갚지 않으면 초원에서 사람 취급을 받으며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실제로 반성도 한 모양이다. 사실 무진장 고맙긴 했을 거다. 옹 칸은 공식적으로 기도를 드렸다.

 

옛날, 테무진의 아버지인 예수게이가 내게 나라를 되찾아준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기이의 아들인 테무진이 내 아들 셍굼과 그의 백성을 구해주었습니다. 이 은혜를 갚는 일을 천지신명께서 주관하소서!”

 

옹 칸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천지신명을 믿을 리가 없다. 이는 몽골족 기록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개념 중에 유일신교의 신(God)과 가장 가까운 것을 차용하느라 쓰인 표현이 확실하다. 한마디로 옹 칸은 공개 기도회를 열어 하나님 앞에서 테무진에게 은혜를 갚기로 맹세한 것이다.

 

옹 칸은 쿠릴타이를 열어 선언했다.

 

나도 이제 퇴물이다... 이제 곧 죽을 텐데, 내가 없으면 누가 커레이트를 다스릴 것인가?”

 

옹 칸은 셍굼이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기로 했다. 그는 쿠릴타이를 열어 일부러 셍굼의 주가를 떨어뜨렸다.

 

내 아들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셍굼 뿐이다. 테무진 아들을 셍굼의 형으로 만들어 두 아들을 갖게 된 뒤 쉬어야겠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명백하다. 테무진을 셍굼의 형으로 인정하면, 테무진이 옹 칸의 적장자가 된다. 옹 칸은 사후에 커레이트를 테무진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테무진의 선택이 옳았다. 지치지 않는 우직함이 교활함을 굴복시켜 버린 거다.

 

이런 선물을 받았으니 테무진도 화를 풀지 않을 수 없다. 옹 칸의 선언대로 그의 자리를 상속받아 커레이트족을 흡수통합하게 되면, 나이만을 제외한 초원의 거의 전부를 테무진이 다스리게 된다. 테무진과 옹 칸은 툴라 강변의 카라 툰(검은 숲)에서 부자(夫子)가 되는 의식을 치렀다. 테무진이 자무카와 세 번째 안다 의식을 치른 곳이다. 데자뷰. 마치 앞날의 일을 예견하는 듯하다.

 

 

몽골의 숲

 

옹 칸이 죽고 나서 커레이트족을 보다 자연스럽고 평화적으로 흡수하려면 미리 준비를 해야 했다. 이럴 때 피를 섞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 테무진이 커레이트 왕족을 자신의 가문에 끌어들이면, 훗날 커레이트 출신 백성들의 입장도 간편해진다. 자신들의 왕족 가문을 따르는 것이 되므로 충돌할 이유가 적어진다. 테무진은,

 

친한 위에 겹으로 친하게 되자!”

 

며 셍굼의 누이 ‘차오르 베키를 큰아들 주치에게 시집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오고가는 게 공평해야 하므로 셍굼의 아들 토사카에게 자신의 큰딸인 코진 베키를 시집보내겠다고 했다.

 

 

 

분위기 참 훈훈하다... 하지만 테무진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다. 바로 셍굼이었다.

 

 

5

 

셍굼은 테무진에게 자신의 후계자 자리를 빼앗긴 일로 악에 받쳐 있었다. 옹 칸은 2류 군주였다. 다시 말해 3류는 아니었다. 그에 반해 셍굼은 군주는커녕 한 명의 남자로서도 보통 이하였다. 오냐오냐 큰 도련님이어서 그랬는지 보르추에게 구조되어 간신히 목숨을 구한 일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셍굼은 테무진이 제안한 혼사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셍굼의 기득권은 전적으로 혈통에 기인한다. 테무진 가문과 혈통이 섞이면... 셍굼과 그의 가족은 초원 반 이상의 정세를 주도하고 있는 테무진의 키야트-보르지긴 혈통에 휩쓸려버릴 것이다. 셍굼은 혼사를 반대하며 이런 말을 했다.

 

우리 가족이 테무진 집안으로 가면 하인 취급을 받을 것이다. 거꾸로 테무진의 가족이 우리 집안에 오면 상석에 앉아 우리를 내려다 볼 것이다. 이 결혼은 무효다!”

 

하지만 아버지 판단할 일을, 감히 아들이 끼어들어 대신 결정할 수 있을까? 있다. 테무진은 커레이트족과 연합하고 화해했지만, 그건 모두 옹 칸 개인을 통해서였다. 커레이트족 안에서 옹 칸의 권위는 폭삭 주저앉아 있었다. 테무진에게 한 일을 생각해보라. 부족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린 군주를 누가 존경하겠는가?

 

커레이트족 내 권력의 무게추가 셍굼에게로 이동하고 있었다. 셍굼도 믿을 만한 인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창 나이다. 늙은 옹 칸은 얼마 더 살지 못한다. 셍굼이 주목받는 건 당연하다. 여기까진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흔하디흔한 현상이고,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옹 칸이 테무진에게 약속한 대로 장차 커레이트족이 테무진 울루스에 흡수된다면, 커레이트의 귀족들은 기득권을 잃어버리게 된다. 기득권을 보장해주던 흰 뼈검은 뼈로 강등된다. 여기에 테무진의 평등정책이 더해지면 커레이트 출신 귀족들은 무늬만 귀족이 될 터. 이런 상황에서 발언권을 가진 귀족들이 도련님 셍굼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건 당연하다.

 

셍굼의 뜻대로 혼사는 취소되었다. 이 일로 테무진은 옹 칸과 셍굼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나 같았어도 정말 기분이 잡쳤을 것이다. 하지만 테무진은 옹 칸과의 연합은 계속 유지했다. 열받은 건 열받은 거고, 약속은 약속이다. 약속대로라면 옹 칸의 후계자는 테무진이었다.

 

 

테무진은 ‘계약의 인간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약속을 믿고 지키는 것만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일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파악하는 이 떨어질 수 있다는 얘기. 반면 자무카는 테무진 울루스와 커레이트족 사이에 생긴 균열을 예민하게 포착했다. 그러잖아도 레이더, 아니 을 세우고 있던 터다.

 

 

 

 

자무카는 옹 칸에게 가지 않았다. 옹 칸도 그리 어려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만만한 셍굼을 택했다. 자무카가 움직이자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함께 움직였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은 알탄과 코차르다.

 

두 사람은 타타르와의 전쟁에서 귀족의 권리를 행사한답시고, 테무진의 명령을 어기고 제멋대로 전리품을 챙겼었다. 테무진에게 불법취득한 전리품을 몰수당한 후 자존심이 상한 알탄과 코차르... 두 왕족은 자존심도 물론 상했겠지만, 무엇보다 테무진과 함께 있으면 타고난 기득권을 제대로 행사하며 살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느꼈을 것이다.

 

알탄과 코차르는 자무카에게 귀순했다. 테무진이 자무카의 대안인 것처럼, 자무카는 테무진의 대안이었다. 다시 말해 나이만과 커레이트를 제외하면 초원에서 테무진의 여집합은 자무카였다. 자무카는 이런 식으로 점점 초원 귀족층의 입장을 대변하게 된다.

 

이는 자무카 본인이 아니라 테무진이 만들어낸 결과다. 두 안다-의형제-는 전쟁에서는 각각 11패였지만, 정치는 테무진이 주도하는 형국이었다. 지난 기사에 자세히 설명했지만, 테무진은 초원의 투쟁을 <혈통집단들끼리의 투쟁>에서 <계급투쟁>으로 바꿔놓았다. 반면 자무카는 <자신이 초원의 중심이 되느냐, 마느냐의 투쟁>을 벌였다.

 

 

 

둘 다 혁명가지만, 테무진이 더 급진적이었다. 정치는 재능과 카리스마로 하는 게 아니다. 끈기와 일관성, 성실함으로 하는 거다. 이거야말로 테무진의 장기였다. 자무카는 한 번도 보수주의자였던 적이 없지만, 결과적으로 보수주의를 대변하게 되었다.

 

자무카는 알탄, 코차르와 함께 셍굼의 마음을 요리했다. 그냥 요리가 아니라 찜쪄먹은 수준이다. 자기 자리를 빼앗겨 억울해 죽을 지경인 도련님이다. 다루기가 무척 쉬웠을 것이다.

 

테무진은 나이만의 타양 칸과 작당을 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능력으로나 커리어로나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테무진을 셍굼이 밀어내려면, 테무진이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무카의 저 황당한 말은 셍굼 도련님의 마음을 적절히 후벼팠으리라.

 

“... 셍굼, 네가 테무진에게 출정하면 우리가 측면에서 협공을 해 주마.”

 

특히 귀족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알탄과 코차르는 복수심에 가득 차 있었다.

 

헐룬 에케(대모, 大母)의 자식들, 큰형 테무진과 그의 동생들을 우리가 살해해주마.”

 

우와. 사람들이 명분을 만들어준다. 편도 들어준다고 한다. 응석받이 셍굼은 이 신나는 일을 당장 아빠 옹 칸에게 알렸다. 아 글쎄 사람들이 다들 이런 말을 한다니까요? 그치만, 다시 말하지만 옹 칸은 2류 군주였다. 3류는 아니었다고. 옹 칸은 양심은 몰라도 최소한 낯짝은 있는 인간이었다. 옹 칸의 대답은 그의 품성이 그렇게 저질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테무진과 나는 부자의 연을 맸었다... 너희들은 왜 그렇게 나쁜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나는 이제까지 테무진에게 숱하게 은혜를 입었다. 여기까지 와서 다시 배신한다고? 그러면 하늘이 우리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하늘이라는 말로 기록되었지만, 옹 칸이 기독교인이었음을 상기하자. 그는 유일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했다. 그 정도로 도덕적 부담감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옹 칸은 지는 태양이었다. 셍굼은 아버지를 계속 압박했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다~ 테무진이 죽일 놈이라고 말하는데, 왜 아버지 혼자만 그 인간을 두둔하는 겁니까? 이제 억지는 그만 부리시죠?”

 

이런 전갈을 두세 번이나 더 보낸 것이다. 물론 옹 칸은 테무진을 치자는 셍굼의 계획에 족족 반대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셍굼은 아버지 옹 칸의 게르를 직접 방문했다.

 

아이 씨, 아부지, 다 늙어서 왜 이러는 거유! 아부지가 우유에 사래가 들 정도로 늙고, 고기 조각에 목이 매일 만큼 쇠약해지면...”

 

그래도 부모자식 사이였으니 차마 “죽으면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왕창 늙으면이라는 가정인데, 사실상 옹 칸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임에 틀림없다. 하여간 불효자식의 포스가 풀풀 풍긴다.

 

“... 그러면, 누가 이 커레이트족을 다스려야 합니까? 자랑스러운 조상님들이 물려준 이 울루스를 다른 집안사람(즉 테무진)에게 맡겨야 한다는 겁니까?”

 

드디어 본심 나왔다. 자기한테 울루스의 통치권을 달라고 노골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어쨌든 옹 칸은 한 번 더 버텼다.

 

테무진을 또다시 배신했다간 하나님이 우릴 사랑하지 않을 텐데...”

 

셍굼은 대답 대신 게르의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버렸다. , 아들이 아버지한테 이런 짓을 할 수도 있다. 사람 버르장머리란 게, 어른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되지 않으면 그닥 좋은 게 아니다. 나도 질풍노도에 심신을 내맡긴 청소년 시절에는 아버지의 훈계에 이렇게 반응했던 적이 있다(아버지 서재의 문고리가 덜렁거려서, 내가 문을 쾅 닫자 뚝하고 떨어졌다. 당연히 그걸 고치는 게 내가 받은 벌이었다.).

 

하지만 셍굼은 이미 중년이었고, 옹 칸은 평번한 아버지가 아니라 군주였다. 셍굼의 행동은 심각한 하극상이었다. 그리고 옹 칸은 이제 왕자의 하극상에 적절하게 대처할 처지가 못 됐다. 기력이 떨어진 옹 칸은 드디어 굴복하고 말았다.

 

글세 난 잘... 모르겠다... 너희들이 능력껏 알아서 해라...”

 

 

6

 

1203년 봄. 협박 반 응석 반으로 아버지의 승인(?)을 받은 셍굼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론 테무진과 정면대결을 할 자신은 없었다. 셍굼은 악랄한 수를 생각해냈다.

 

우리가 취소했던 혼사를 다시 맺자고 연락하자. 그리고 혼사를 기념하는 잔치를 열었다고 해서 테무진을 초대하는 거야. 기껏해야 가족과 부하 몇 명만 끌고 오겠지. 오면 우리가 바로 죽여 버리자!”

 

이는 삼국지에 숱하게 등장하는 계책이니, 지략이니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행동이었다. 초원 문화에서 잔치는 어디까지나 평화적이고 관대해야 한다. 원수일지라도 잔치에 참가한 이상 해쳐선 안 된다. 원수일지라도 잔치에 오라는 초대를 거절해선 안 된다. 그 옛날 타타르족 전사들이 자기네들 잔치판에서 예수게이를 독살한 것도 초원에서는 수치스러운 배신행위에 속한다. 자기들이 초대한 것도 아니고, 예수게이가 알아서 끼어들었는데도 말이다. 그나마 잔치의 룰을 어기는 게 부담스러워서 바로 쳐 죽이지 못하고 몰래 독을 먹인 거였다.

 

셍굼의 계획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겁했다. 도덕에는 분명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절대적인 요소가 있다. 살인과 절도를 용인하는 문화는 드물다. 하지만 도덕은 상대적이기도 하다. 초원에는 정주문명에 사는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윤리적 관습이 많았다. 어쨌든 자기가 사는 문화권의 사회적 통념을 배신하는 사람은, 인류의 보편적인 도덕률도 잘 지키지 못한다. 셍굼의 품성이 저질이었다는 얘기다.

 

물론 폭력이 지배하는 초원에서 예의와 명예는 사치일 수도 있다. 배신은 편리한 지름길이다. 상대의 뒤통수를 치는 일은 확실히 비용 대비 효과가 짭짤하다. 그러나 존경할만한 인격을 보여주지 않으면 장기적인 정치를 할 수가 없다. 테무진은 정치인이었다. 그는 초원 대중에게 신뢰할 가치가 있는 군주로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게 테무진과, 셍굼을 포함한 다른 이들의 차이였다.

 

 

 

 

한편 자무카는 셍굼이 알아서 진흙탕을 뒤집어쓰니 무척 편했을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자무카는 잔인하긴 해도 비겁한 모습을 보이진 않는 타입의 남자였다. 테무진이 제거되는 건 좋은 일이지만 자신의 명예까지 실추시킬 순 없다. 그래서 자무카는 셍굼의 계략에 끼지 않고, 멀찌감치서 구경만 했다. 영리하다.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까맣게 모르던 테무진은 셍굼이 보낸 사자의 말을 아무 의심없이 믿었다.

 

“...그래서 저번에 얘기했던 결혼 건, 그걸 다시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기념잔치에 한 열분 정도의 자리를 마련해두었으니 와서 즐겁게 먹고 마시며 일가족이 된 걸 함께 축하하자는 말씀이십니다.”

 

이 인간들이 그래도 반성을 했나보다.’

 

테무진은 수행원 몇 명만 데리고 죽음의 잔치판을 향해 출발했다. 테무진은 가던 길에 아버지 예수게이의 부하였고, 이제는 자신의 부하이자 친한 아저씨인 뭉릭의 게르에 들렀다. 다시 말하지만 초원은 넓고 게르는 뚝 뚝 떨어져 있다. 자신이 속한 울루스의 쿠리엔을 벗어나는데도 말로 며칠이 걸릴 수 있다. 울루스는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가 아니다. 테무진은 초원의 상당부분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길에 부하의 게르에 들르는 건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뭉릭은 테무진보다 의심이 많았다.

 

테무진 칸, 이상하지 않아? 저번엔 난 이 결혼 반댈세 하다가, 이제 와서 다시 결혼하자고? 왜 이랬다 저랬다야?”

 

, 사람 마음이 그렇게 한결같을 순 없죠...”

 

열 사람만 오라는 것도 마음에 걸려. 배신을 밥 먹듯이 하던 작자들이야. 옹 칸의 외아들 셍굼의 인간성도 믿을 만하지 못하고. 만약, 만약에 말야, 저자들이 자네를 함정에 유인하는 거라면?”

 

에이, 설마...”

 

아니라는 보장 있어? 칸이 죽으면 우리 울루스는 끝장이네. 백 번 조심해도 모자랄 것 없어.”

 

나는 보르추를 보내서 셍굼을 구해주기까지 했는데요.”

 

셍굼의 인간성을 믿나? 지 애비보다 상태가 훨씬 안 좋은 놈이야.”

 

하지만 이미 초대를 받았습니다. 거절하는 건 명예롭지 못한 일이에요. 거절할 명분도 없습니다. 애초에 제가 제안한 혼사 아닙니까.”

 

그렇게 따지면 저쪽도 잔치가 열리는 시간과 장소를 협의도 안하고 자기들끼리 정해버렸잖아. 게다가 잔치에 참석하는 우리 쪽 일행의 숫자도 제멋대로 결정했어. 그냥 잔치야 초대받으면 걍 가면 되지만, 이건 결혼이라구. 뭐가 됐든 두 가문이 밀고 당기며 같이 정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이쪽은 일방적으로 통보를 받았으니까 나름 빠져나갈 핑계가 있어.”

 

아니 뭐라고 핑계를 댑니까?”

 

마침 지금이 봄이지 않나? 가축들이 여위어서 돌봐야 할 계절이야. 가축떼 몰고 다니랴 풀 뜯기랴, 유목하기도 바쁜 때 아닌가. 이럴 때 칸이 남이 마련한 잔칫상에 앉는다고 울루스를 비울 수는 없다고 핑계를 대자구. 나중에 여유 좀 생기면 다같이 뻑적지근하게 먹고 마시자고 해. 그렇다고 이왕 초대받은 걸 거절할 순 없으니 딱 두 명만 보내서 분위기를 파악하고 오게 하는 거야.

어차피 하게 될 결혼이라면 지금 가서 술 한 잔 안 해도 하게 돼 있어. 이보게 테무진 칸, 조심해서 나쁠 거 하나 없어.”

 

클타. 단순하다. 조심해서 나쁠 거 없다. 테무진은 뭉릭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뭉릭의 조심성이 없었다면 우리가 테무진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 테무진 대신 그의 부하 두 명이 달랑 와 테무진의 말을 전하자, 셍굼 패거리는 당황했다. 온다던 테무진이 안 왔다. 이유가 뭘까? 설마 정말 가축들을 돌보려고? 그럴 리가 없다. 테무진이 우리의 계략을 알아차린 것이 분명하다! 최소한 의심은 하고 있는 모양이다. 테무진은 어떤 행동을 할까... 일단 엄청 빡이 돌았을테고... 음 테무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당연히 전쟁을 벌이려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얼른 군대를 소집해 먼저 치는 게 상책이다!

 

 

7

 

한편 이왕 뭉릭네 집에 마실나온 테무진은 속 편하게 뭉기적거리고 있었다. 에이 설마 저사람들이 그래도 배신을 할라구, 하면서. 반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판단한 커레이트족은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옹 칸은 테무진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양심이고 낯짝이고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테무진을 파멸시켜 살아남아야 한다.

 

옹 칸과 셍굼은 즉각 전쟁을 결의했다. 커레이트족은 전면전을 위해 재빨리 그리고 남몰래 정규군을 준비하는 한편, 테무진을 살해하기 위한 유격대를 조직했다. 테무진은 뭉릭의 집에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슬렁슬렁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테니 전사들이 추격하면 따라잡히게 되어 있다. 테무진을 죽이고 전쟁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테무진 울루스를 덮친다는 계획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군사들을 보내 테무진을 추적하도록 하자. 네르제(사냥감을 추적, 원형으로 포위해 일시에 사로잡는 사냥법)를 하는 방식 그대로 토끼몰이를 해서 포위해 잡아버리자!”

 

 

 

반() 테무진 연합이 결성되었다. 옹 칸-셍굼 부자(夫子)에 자무카가 합세했다. 자무카는 비겁한 암살에 낄 생각은 없었지만, 전쟁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는 전쟁터의 주인공이었다. 자무카를 중심으로 알탄과 코차르 등 몽골족 귀족층이 결집했다. 그 외 자무카를 지지하는 씨족/부족들이 합류했다.

 

가장 한심한 건 몇 번이나 테무진을 배신하고, 테무진이 잘 나가면 눈치껏 기어들어가 선처를 구했던 테무진의 막내숙부 다리타이다. 그는 자신이 세치기한 전리품을 조카가 몰수해갔다는 이유로 어느새 도망쳐 자무카 편에 섰다. 정말 답이 없는 인간이다.

 

반 테무진 연합군의 귀족층은 정보를 통제했다. 초원은 소문이 빠르다. 백성들 사이에 전쟁계획이 퍼지면 테무진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가 대비할 기회를 줄 수 있다. 평민층이 테무진을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문제도 있었다. 이 시점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룰루랄라 집으로 돌아가던 테무진의 운명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케 체렌이라는 입이 가벼운 인물이 없었다면...

 

헷갈리지 말자. 예수이와 예수겐의 아버지인 타타르족 칸 예케 체렌과 동명이인이다. 이 예케 체렌은 옹 칸을 따르는 장군이었다. 몽골 왕족인 알탄과 사촌지간이었다고 하므로, 알탄이 옹 칸과 연합하면서 그를 따라갔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예케 체렌은 전략회의 쿠릴타이에 참석하고, 오후에 집에 와서는 아내 알락 이드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상세히 설명했다.

 

“... 이렇게 해서 테무진을 없애버리기로 한 거야.”

 

<몽골비사><집사>에 기록된 아내 알락 이드의 반응은 대략 이렇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소리에요? 그 말을 누가 믿겠어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맥락이 다소 불분명한데,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알락 이드는 테무진을 죽이기로 한 계획이 어처구니없다고 느꼈을 수 있다. 도덕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현실 가능성이 없다고 믿었을 수도 있다. 남편이 농담을 하는 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너무 중요하고 은밀한 정보라, 게르 안에서 발설하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해 남편을 질책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반 테무진 연합 수뇌부의 아내가 놀랄 정도면, 얼마나 은밀히 계획이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다. 아마 알락 이드는 반 테무진 연합이란 게 결성된 사실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마침 예케 체렌을 모시고 있던 ‘바다이라는 양치기 평민 사내가 말젖을 가지고 게르 안에 들어왔다.

 

어이쿠 나으리, 분부하신 말젖 대령했습니다~”

 

, 그래. 거기다 놔. 그러니까 여보, 우리가 테무진을...”

 

바다이는 전혀 의도하지 않게 상전 부부의 대화내용을 듣고 말았다. 지금 테무진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고? 바다이는 얘기를 못 들은 척 하고 태연히 게르를 빠져나왔다. 그는 자신의 절친인 키실릭이라는 사내에게 달려가 자기가 들은 걸 얘기했다.

 

“...과연 사실일까? 테무진 칸을 죽이려는게?”

 

글쎄다... 이번엔 내가 가서 알아보마.”

 

키실릭이 예케 체렌의 게르에 다가갔을 때, 예케 체렌과 알락 이드의 아들인 나린 케엔이 부모에게 역정을 내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게르 밖에서 화살을 깎다가, 부모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기겁했던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제발 조용히 좀 하십시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큰 소리로 얘기하는 겁니까? 그런 중요한 비밀을 왜 집에서 떠드는 겁니까! 여기 귀가 몇 개인 줄 아세요? 그러다 잘못되면 혀를 뽑히겠습니다 그려!”

 

어라... 아들내미가 저렇게 반응할 정도면, 그 얘기가 진짜란 말이야? 게다가 이 도련님, 화살을 깎고 있다. 사냥이 아니면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다.

 

허허 도련님~ 일이 있어서 지나는 길인데... 뭐 분부하실 건 없습니까요?”

 

, 키실릭, 마침 잘 됐네. 내가 아끼는 백마 있지? 그리고 입이 희고 색깔이 누르스름한 말하고. 그 녀석들 좀 준비해 놔. 내일 아침 일찍부터 써야 하니까.”

 

군용마를 두 마리나 준비한다 - 그렇다면 한 마리는 예비마다. 이제 확실해졌다. 테무진은 내일 죽게 됐다. 키실릭은 바다이에게 뛰어갔다.

 

, 네가 한 말이 진짜였어.”

바다이와 키실릭은 목숨을 걸고 테무진에게 위험을 알리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몽골비사><집사> 모두 애매하게 기록하는 부분이 있다. 두 사람이 마치 테무진에게 후한 상을 받길 바라는 마음에 편을 바꾸기로 했을 가능성을 묘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두 친구가 먼저 상 얘기를 꺼내진 않았다.

 

정작 테무진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테무진은 인생 최대의 위기에 빠진 채였다. 자기 주군을 배신하고 적을, 그것도 불리한 저치의 적에게 귀순한다는 건 보통 모험이 아니다. 물론 모험에 성공해서 테무진에게 상도 받고 잘 먹고 잘 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만에 하나 성공했을 때 얘기다.

 

바다이와 키실릭, 두 평민 남자의 행동은 테무진이 초원의 일반 대중에게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두 친구가 자신의 주군이 아니라 테무진을 선택하는 과정엔 갈등이 전혀 없다(바다이와 키실릭은 원래부터 커레이트족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알탄이 테무진을 배신하면서 커레이트족으로 넘어온 몽골족 평민이었을 수도 있다. 후자였다면 테무진의 평등정책을 이미 경험해봤을 것이다.).

 

지금이 저녁이니까... 이쪽 군대가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고 하니까, 우리는 오늘 밤에 바로 출발하자. 그래야 테무진 칸이 안전하게 도망갈 시간을 벌지.”

 

말은 어떤 말을 타고 갈까?”

 

아까 나린 케엔이 준비하라고 했던 말 두 마리 있잖아. 백마하고 누르스름한 말. 아따 궁뎅이에 살이 찰지게 붙은 게 잘 달리게 생겼더만. 그놈들을 나눠타고 가자.”

 

바다이와 키실릭은 재빨리 새끼 양 한 마리를 잡아 비상식량을 준비했다. 테무진을 만날 때가지의 식량만 있으면 되므로 더 이상은 필요 없었다. 깜깜한 밤이 되자 두 친구는 상전의 고급 군용마를 쎄벼타고 테무진이 있는 곳을 향해 내달렸다.

 

 

outro

 

다음날 밤. 쉬지 않고 말을 달린 바다이와 키실릭은 집으로 돌아가던 테무진을 따라잡았다. 테무진도 처음엔 뭔 일인가 싶었을 것이다.

 

? 너희들은 뭐하는 자들인데 나를 불러 세우는 거냐?”

 

이윽고 바다이와 키실릭의 입에서 터져나온 그 참담한 배신의 실상에 테무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으리라. 하지만 분노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이미 그날 아침에 출발한 적의 군대가 말로 달려서 6~7시간 차이로 테무진을 추격하고 있었다. 이 차이가 울루스 전체를 평시에서 전시로 바꾸고, 대전투를 준비할 시간 전부였다.

 

테무진과 자무카의 세 번째 정면 대결, ‘카라칼지드 사막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다음편 '사막의 폭풍'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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