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은 다양한 효능을 가진 약재로 알려져 있다. 다른 나라에서도 인삼을 재배하긴 하지만, 한국의 인삼이 유명한 이유는 한국이 인삼 생육의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인삼 식물은 60cm의 크기로 자라며, 아랫부분의 줄기는 작고 가늘며, 뿌리부문은 중국 도라지와 흡사하다. 4월에 연녹색의 꽃을 피우는데, 꽃은 시들면서 동그란 빨간빛을 띄는 작은 열매로 변한다. 한국에서 재배되는 인삼과 다른 나라에서 재배되는 인삼을 구분하기 위해 한국산 인삼에는 ‘고려인삼’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야생에서 자란 인삼은 산삼이라고 불리는데, 현재는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고, 더구나 잘 발견되지도 않는다. 고려인삼의 명성은 산삼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과거에도 산삼을 찾아내는 것은 전국의 온산을 돌아다니며 정신적인 고난을 이겨내야 하는 일로 여겨졌다. 오늘날에서 산삼을 찾아 떠도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 사람들을 심마니라고 부른다.
인삼은 근본적으로 식물학적 특성이 재배적지에 대한 선택성이 강하여 기후토질등 자연환경에 적당하지 않은 곳에서 인삼을 적응 생육시키는 것은 아주 어려운데 옛 고구려시대부터(37B. C-A. D 668)고려인삼은 아시아의 극동 지방에서만 자생하여 한국, 만주지역, 연해주 지역에서만 산출되고 있다. 재배되어 세계시장에서 상품으로 유통되고 있는 인삼종은 미국 및 캐나다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는 Panax quinquefolium L. 및 중국남부에서 생산되고 있는 Panax notoginseng F. H. Chen, 일본에서 생산되는 Panax ginseng japonicum Meyer 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인삼들은 한국에서 재배되고 있는 [Panax ginseng C. A. Meyer]라는 식물명을 가지고 있는 고려인삼종과는 틀린 것이다.
1590년 출간된 반초강목 52권에 보면 인삼의 산지, 품질을 비롯하여 그 약효와 응용 등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었고 야생 인삼의 자생지 등 인삼에 대한 유래도 밝히고 있다. 한국은 신라시대 때 인삼이 재배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되며, 고려의 고종( 1213-1259)때부터는 널리 재배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많은 한의서에 인삼의 약효와 처방 예가 기술되어 있으며, 인삼은 처방의 중심적 역할을 하는 상약으로 되어 있다. 상약은 평상시에도 병에 걸리지 않게 함은 물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복용하는 생약으로서 무독해서 다량 복용하거나 장기간 복용해도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는 약을 의미 한다. 연구에 따르면 고려인삼의 기본적인 약효는 사포닌의 함량에서 오는데, 사포닌은 가장 풍부한 생체 내의 비특이적인 저항능력을 증대시키는 것이며, 생체의 전반적인 저항능력을 크게 함으로서 생체의 기능을 강화시키는 성분이다.
또한 인삼은 혈압을 낮추어 주고, 호흡을 촉진 및 인슐린의 활동을 보조해 주며, 적혈구와 헤모글로빈 생성 및 소화를 촉진시키는 작용도 가지고 있다. 실제로 현재의 과학도 인삼의 효능을 뒷받침 하고 있으며, 동양의학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약재로 분류된다. 한국인은 현대 의학이 존재하기도 전에, 탁월한 효능을 지닌 인삼을 차나 술로 응용해서 복용해 올 만큼 지혜로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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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한국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산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단연 설악산이라는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죽순처럼 뾰족뾰족한 봉우리가 구름을 뚫고 솟아있는 모습이나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비취처럼 맑은 물이 골짜기마다 못을 이루고 폭포를 이룬 모습을 보면 그 말이 그다지 지나치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한국의 뚜렷한 사계를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이 또한 설악산이다. 봄의 설악산은 철쭉, 산철쭉, 진달래, 털진달래, 벛꽃류가 만발하여 현란한 조화를 이루고 식물마다 특색있는 색조를 나타내어 그림같은 모습이다. 여름이면 잎의 여물고 푸른 빛은 짙어간다. 산과 계곡은 온통 녹색의 의상을 입고 녹색 장막으로 덮인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다가오면 설악은 단풍으로 불이 탈 것 같은 장관을 이루며, 겨울은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산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신성하고 숭고한 산이라는 뜻에서 예로부터 설산, 설봉산, 설화산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렸고, 설뫼라고도 하였다.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금강산, 남쪽으로는 오대산과 마주한다. 최고봉은 대청봉이다. 대청봉 남쪽에 한계령, 북쪽에 마등령,미시령 등의 고개가 있다. 설악은 최고봉인 대청봉(1,708m)을 중심으로 인제군 쪽을 내설악, 동해를 향한 바깥쪽을 외설악, 그리고 양앙군의 오색일대를 남설악이라 구분한다.
내설악 지역은 백담계곡과 수렴동계곡, 가야동계곡, 용아장성, 백운동계곡, 귀때기골, 십이선녀탕계곡 그리고 장수대 지역의 대승폭포, 옥녀탕 등이 대표적인 경관이며, 외설악은 천불동계곡을 비롯하여 울산바위, 토왕성폭포, 비선대, 금강골, 귀면암, 오련폭포 등이 대표적인 경관이다. 남설악 지역은 옛날부터 오색약수와 온천이 유명하고 주전골 일대의 용소폭포, 십이폭포도 유명하다. 식생 분포도 다양해 온대 중부지방의 대표적인 원시림 지역으로 꼽힌다. 특히 대청봉에 군락을 이루어 자라는 눈잣나무와 눈주목은 남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북방계 고산식물이다.
그밖에 소나무,벚나무,개박달나무,신갈나무,굴참나무,떡갈나무,눈측백,금강초롱꽃,금강분취 등 총 939종의 식물이 분포하며 이 가운데 65종이 특산식물, 56종이 희귀식물이다.
동물은 사향노루,산양,곰,하늘다람쥐,여우,수달 등 희귀종을 포함하여 총 25종의 포유류와 62종의 조류 및 각종 11종류의 파충류,9종의 양서류,40 종의 어류,360종의 곤충 등이 서식한다. 설악산 국립공원은 1965년에 '천연보호구역'으로 1970년 국내에서 다섯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설악산 일대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생물의 분포서식지로서 1982년 유네스코에 의해 한국 유일의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세계적인 보존지역,관광지로 이름이 높다.
외설악의 문화유산으로는 신흥사와 계조암을 들 수 있다. 신흥사는 신라 진덕여왕 때인653년에 자장율사가 노루목 동쪽에 창건하면서 석가세존의 사리를 봉안한 9층탑을 세워 향성사라 하였고 이후 조선 인조때 이르러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신흥사로 개칭하였다. 경내에는 극락보전, 보제루, 명부전, 향성사지 3층 석탑, 경판등이 보존되어 있고 계조암, 내원암, 안양암등의 부속암자를 두고 있으며 강원도 북부 일원의 40여 사암을 관할하고 있다.
소공원에서 신흥사를 거쳐 울산바위로 오르는 길목에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천연의 바위동굴에 암자를 창건한 계조암이 자리하고 있다. 계조암이 들어 앉은 바위가 목탁바위인데 이 절은 목탁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다른 절에서 십년이 걸려 수도하여도 득도하기가 힘든데 이곳에서는 몇년만 수도하여도 도를 얻을 수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동산, 지각, 봉정, 의상, 원효 같은 큰 스님이 계속해서 나왔다고 해서 계조암으로 불린다고 한다. 백담사는 내설악을 대표하는 절로 신라 진덕여왕(647)때 자장율사가 한계리에 창건하면서 한계사로 칭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잦은 화재로 인하여 절터와 절 이름이 여러번 바뀌어 오다가 조선 세조때 백담사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이외에도 기암절벽과 폭포가 어우러진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코스인 천불동계곡, 오색 등의 코스도 찾을 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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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문화유적
한국인들은 세계 역사상 인쇄술에 관한 뚜렷한 업적을 자랑하고 있다. 한국의 목조인쇄는 8세기부터 발견되고 있으며, 세계최초의 금속활자의 발명도 서양최초로 알려진 독일의 구텐베르크의 것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이다. 문자가 생기기전의 인류는 기록을 보존하기 위해 여러가지 상형기호들을 돌이나 나무에 새김으로써 기록을 보존하고자 하였다. 울산 유적지의 유물은 한반도 원시사회의 조상들 역시 동일한 방법을 이용해 기록을 보존하고자 하였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372년 한국에 불교가 도입된 이후 삼국시대에는 불교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의 종이와 활자술의 발전이 가속화 되었으며, 이는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한국에 목판본의 인쇄물이 8세기 초반부터 존재했었다고 한다.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에 보관되었다고 하는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 이 경문은 불국사가 완공된 751년 이전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측 할 뿐이다. 신라시대의 학자인 최치원이 당나라 칙사편에 신라시대의 운문집들을 보내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신라시대에 인쇄술이 널리 활용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인쇄술은 고려시대(918-1392)에 와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11세기 중엽부터 국가기관이 인쇄,출판업무를 관장하여 서적점,서적포 및 서적원 등의 기관이 존재하였다. 고려시대는 불교의 영향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리려는 목적의 대장경이 두 차례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간행되었다.
먼저 간행된 구판대장경은, 1011년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려는 발원에서 시작하여 1087년까지 무려 77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그 무렵으로서는 중국의 장경에 견주어 내용이 완벽한 것이었다.
그러나 부인사에 봉안된 이 구판 대장경은 고종 19년인 1232년에 몽고군의 방화로 그만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뒤인 1236년에 다시 본격적으로 대장경 간행 불사를 추진하여 1251년에 그 완성의 결실이 바로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이다.
한국에서 금속활자가 발명된 것은 12세기 고려시대였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앞선 인쇄술을 자랑하던 고려인들은 몽고의 잦은 침략으로 수많은 목판과 서적들이 소실되자 보다 효율적인 인쇄방법을 찾게 되었고 마침내 해동통보를 부어내는 방식으로 동활자를 만들었다. 금속활자를 만든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아 일부학자들은 11세기에서 12세기라고 추측을 할 뿐이다. 1239년에 목판본으로 인쇄된 문헌상으로도 1232년 이전에 금속활자가 존재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남명천화상송증도가 1234년~1241년 사이에 고금상정예문을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의 재상이었던 이규보는 그의 저서인 동국이상국집에 상정예문(조정의 의례에 대하여 쓴 책) 28권이 금속활자로 인쇄가 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책은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된것으로 당시 고려에서는 지방 사찰에서 까지도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책을 인쇄하였을 정도로 활자인쇄술이 발달하였다. 조선시대( 1392-1910)에는 금속, 목판, 심지어는 도자기를 이용한 인쇄술도 이용하였다. 금속활자는 주자라고 불리웠으며, 활자판의 원료는 구리, 아연, 철 및 다른 금속 등이었다. 고려의 인쇄술 계승하여 많은 책을 인쇄했다. . 조선시대에는 주자소, 교서관, 정음청, 실록청, 조지서 같은 국가기관이 종이제작, 인쇄, 출판 및 서적보급을 담당해 왔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사회가 안정되고 문화가 발달하여 편찬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활자가 발명되는 등 인쇄술이 발전하였다.
먼저, 태종 때에는 청동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계미자는 여러 가지 단점이 많아 더욱 개량될 필요가 있었다. 활자 주조술의 한계로 자형이 고르지 못하고, 인쇄법도 밀랍이 깔린 동판 위에 활자를 꽂아 넣고, 다시 그 위에 밀랍을 녹여 붓는 방식이어서, 글자의 행간이 고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글자가 흔들리기 쉬워 하루의 인쇄량도 대단히 적었던 단점이 있었다. 이러한 단점들을 개량한 것이 1420년대 세종 때에 만든 경자자였다. 경자자는 활자의 크기를 모두 같게 만들었는데, 이로써 활자와 활판이 서로 맞아 틈이 생기지 않아 조판이 매우 쉬워졌으며, 인쇄 속도가 빨라졌을 뿐 아니라 인쇄가 선명하고 능률도 크게 향상되었다.
그 후, 1434년에는 글자체를 개량하여 갑인자를 만들었다. 경자자는 인쇄 기술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만든 것인 반면, 갑인자는 보다 아름다운 자체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던 것이다. 갑인자의 주조로 같은 크기의 활자로만 인쇄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크고 작은 활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서 조판할 수 있데 되었다. 그러나 금속활자를 최초로 사용한 한민족은 오늘날 출판과 인쇄에 있어서는 수입국이 되어있다. 따라서 후손으로서의 한국인은 과거 조상들의 영광을 회복해야 하는 사명감을 지니고 인쇄, 출판 분야에 대한 진보를 이루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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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한국의 긴 역사와 함께 뿌리 깊은 문화전통을 자랑하는 한국 도자기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있다. 도자기는 한국인의 생활 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도기류에는 토기, 도기, 석기, 그리고 자기 등이 있다. 역사자료에 의하면, 인간이 처음으로 토기을 만들기 시작한 때는 약 10000에서 6000 BC 사이이다.
한국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토기 중 가장 오래된 종류는 6000 에서 5000 BC 시대의 것인데, 이는 점토를 600-800℃, 심지어 100℃에서 구워 만들어진 것이다. 그중엔 발사하지 않고 건조시키기만 한 것들도 있다. 시간이 흘러 인간의 창의력이 발달하자, 점토의 반죽방식이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발사할 시 필요한 열을 견딜수 있는 가마도 만들어지기 시작됐다. 도기는 900℃에서 1000℃사이의 온도에서 점토를 구은 후, 유약을 칠하여 만들어진다. 석기는 산소가 최소한으로 제한되는 1000℃ 이상의 가마에서 구워진다. 어떤 석기들은 유약으로 칠해진다. 자기는 매우 순수한 흰 점토로 만들어지는 세라믹 제품이다. 장석으로 모양과 윤을 낸 후, 1300℃-1350℃ 사이의 온도에서 구워진다. 그런 이유로 색은 반투명이다. 한국인들은 7000-8000년 전 신석기 시대부터 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삼국시대 (57BD- AD668)에 이르자 한국인들은 매우 높은 온도에 구운 정제된 버젼의 토기들을 생산해냈다. 특히 신라와 가야의 토기들은 1200℃도 이상의 구어진 매우 질 좋은 것들이었다. 이 토기들의 표면은 회청색이고, 철과 같이 단단하다.
통일신라시대 (668-935)에 이르러 자기 생산지가 세워지자, 도공들은 곧 청자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고려시대(918-1392)에는, 청자를 만드는 기술이 크게 향상되어 상당히 높은 질의 청자들이 생산되었다. 또한 고려청자 외에도 철유약과 흑유약을 잎힌 도기들도 생산되었다. 청자만의 독특한 색은 11세기에 처음 발명된 적은 산소를 가지고 발사하는 어려운 기술을 통해 만들어 진것으로, 이후에도 계속 정제되었다. 12세기에는 순수청자가 최고급 청자로 인정받아서, 주로 귀족집안과 불교 사찰 등에서 사용되었다. 고려의 도예는 12세기 전반에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인종의 재위시절(1122-1146), 신비로운 청색 혹은 비취색을 띄는 도자기를 만들어낼 정도로 발사 방법이 발달했는데, 이는 세계 그 어디에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했다. 의종의 재위기간(1146-1170)에는 청자 위에 그림을 그리는 상감기법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기술을 독창적으로 개발해냈다. 이렇듯 고려청자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곡선의 조형미와 은은하고 안정감을 주는 반투명의 비취색을 내세우며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도자기로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청자의 시적인 상감무늬와 기교적으로 빨강색으로 보여지게 하기위해 상감세공된 구리 기술 등은 세계최초로 사용된 기술로, 그 당시 고려자기의 정점을 대표한다.
13세기 몽고의 고려침략에 의한 한국 자기의 쇠퇴는 청자의 색깔, 모양, 그리고 문양 등에 변화를 가져왔다. 청자의 색깔은 대부분 어두운 녹색과 불투명을 광택을 띄게 됐고, 우아한 모양은 그 형체를 잃게 되었다. 상감문양도 아예 그리지 않거나 거칠게 그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 절정에 달했던 고려청자는 조선시대(1392-1910)에 이르러 새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선의 자기는 두 종류로 나뉘어 있는데, 분청사기라 불리는 석기들과 백자가 그것이다. 조선초기에 만들어진 것이 분청사기인데, 당시 서민들에게 널리 사용된 한국민속예술품 중 하나이다. 고려말기에서 조선초기에 이르기까지, 청자는 다양한 상감기술을 바탕으로 한 분청사기에 밀려 자취를 감췄는데, 분청사기의 유약은 밝은 청색에 모양도 청자와 달랐다.
13세기 말과 15세기 사이, 청자와 고려백자의 변종인 조선백자도 생산되었다. 또한, 전통적인 고려자기와는 매우 틀린 새로운 버젼의 조선자기도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분청사기와 새로운 버젼의 조선백자는 고려자기와 함께 16세기까지 한국 도기류의 주류를 형성했다.
분청사기는 백자와 모양과 여러 특징에서 확연히 다르다. 분청사기는 장식용 문양이 다양한데 반해 백자는 흰 점토로만 만들어지고 어떤 문양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전반적으로, 조선 도자기는 색이 흰 경향이 있다. 하지만 16세기 후반의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침략은 한국 도자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많은 가마들이 파괴되었고, 많은 한국의 도공들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 이는 한국의 도예 발전에 퇴보를 유발함과 동시에, 끌려간 한국 도공들은 일본 남부의 도자기 산업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일본 침략자들에 의한 파괴가 조선시대의 중요한 도예 양식 중 하나인 분청사기 생산의 사실상 파멸을 가져왔다.
15세기에 이르러 분청사기 생산이 더 많아지긴 하였지만, 조선시대의 태조 재위 첫해(1392)부터 인조 27년(1649)까지 분청과 백자는 한국 도자기의 주요 흐름을 구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16세기 후반이 되자 분청사기의 생산은 점점 줄어들다 사실상 1592-1598년 임진왜란이 나기전 생산이 완전 중단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분청사기는 하나도 생산되지 않았다. 분청은 고려청자와 근본적 형태와 모양에서 닮아있다. 하지만, 특징적으로 분청은 활발하고 대담하면서도 종종 유머러스하며 품위있는 선들을 나타낸다. 조선초기에 생산된 고급의 백자는 신비로운 푸른 빛을 내는데, 이 고요하면서도 기품있는 아름다움은 가히 세계 최고라 말할 수 있다.
17세기 중반에 이르자, 자기에 그려진 유약의 문양들은 더 단순하고 기교적이게 되었고, 식물, 국화 등의 꽃, 그리고 용들이 주로 묘사되었다.
이 디자인들은 모두 전형적 한국의 미를 나타낸다. 백자는 조선 중기에 모양과 문양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당시에 생산된 백자는 점차 순백색을 띄게 되었다. 또, 유약 무늬의 정교함이 줄고, 인상주의적 형태를 갖추게 되어 색상과 모양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15세기 중반에는 기교적인 문양들이 그려진 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그 장식용 문양들은 점차 단순화 됨과 동시에 독특한 기술로 주제 표현을 강조하게 되었다.
영조 28년인 1752년부터 조선왕조 말기의 19세기 후반까지, 더욱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들이 생산되었다. 하지만, 19세기 말, 일제가 한반도를 명백히 점령하기 시작하자 대량의 일본 도자기들이 한국 시장에 쏟아져나왔다. 계속하여, 자본이 많던 일본은 대규모의 도자기 공장을 설립함으로써 한국의 도자기 공예를 쇠퇴시켰다.
일본이 한국에서 대량생산해 낸 도자기들은 대부분 기계로 만들어 낸 예술성이 떨어지는 자기품들로, 그전까지 한국에서 손수 만들어져 가마에 구어진 전통자기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도공들은 계속해서 물, 간장, 김치 등을 담는 전통 단지들을 꽤 많은 양 생산해냈다. 오늘날, 한국의 도공들은 새로 만들어진 가마를 이용하여 예전의 질 높던 전통 도자기들을 다시 만들어 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가마들은 전라남도 해남군, 광주군, 이천군, 그리고 경기도 지방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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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양
문양은 집이나 매일 쓰이는 옷, 가구, 수공예품 등을 장식하기 위해 생겨났다. 문양은 장식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철학적, 미학적 추구를 상장하기 위해서도 유용하며, 형상문자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주위 환경에 대한 느낌이나 기본적 욕구를 표현할 수단으로 시작된 문양은 점차 장식 예술의 우주적 형태로 발전했다. 문양은 기하학문양, 식물문양, 동물문양, 그리고 다른 자연문양의 네가지 주요 타입으로 나뉘어진다. 기하학문양은 점?선?면 등으로 이루어져 대칭적 모양을 형성하고 있다. 삼각형, 정사각형, 다이아몬드, 지그재그, 격자문양, 만자문양, 나선, 톱니, 원, 달걀꼴, 동심의 원 등이 이에 속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기하학전 문양들은 원시 종교적인 생각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한 예가 격자문양인데, 원시사회에서 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이 문양은, 그들의 강우를 위한 기도를 나타냈다.
삼각형은 번식, 출산과 여성의 생식기를 상징한다. 식물문양 중 가장 자주 등장하는 주제는 나무,꽃,과일, 풀이다. 돌이나 뼈에 새겨진 동물 도안은 사냥이나 낚시 등과 관련이 있다. 석기시대의 조각들은 물고기, 고래, 호랑이, 인간 등의 흥미로운 동물 도안을 다양하게 다뤘다. 자연의 물체로는 풍경, 바위, 파도, 구름 등이 있다. 청동시대의 의식용 도구, 무기, 개인용 장식품 등에는 발달된 기술로 더욱 다양한 문양가 만들어졌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의 유물에서 이들 초기 문양의 자취가 발견되곤 한다. 하지만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서야 일상적 물체들에 문양이 사용되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있다.
신석기시대 토기의 빗문양이 가장 오래된 예이다. 삼국이 건국되기 이전에 한반도에는 중국의 철기문화가 들어와 있었고, 뒤이어 전래된 불교는 특히 한국문양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신석기시대로부터 내려오던 기하학적인 선조문양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전래 이후 나타난 장식문양은 삼국시대뿐만 아니라 통일신라, 고려 및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형태로 변형되면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그 건국 연대의 차이는 있으나 문화적인 배경이 동일한 삼국의 문양의 표현양식은 형식상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그 쓰이는 내용에 있어서는 거의 동일하다.
고구려에 있어서 장신구에 많이 쓰이는 문양은 대개 초화문, 인동문, 용문, 봉황문, 당초문 등을 볼 수가 있는데 백제나 신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무기류에는 주로 용문이나 구문, 또는 봉황문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옹기류에는 격자문, 연화문, 산경문, 당초문, 조문 외에 기하학적인 여러가지 형태의 선조문이 사용되고 있으면 와당에는 연화문, 인동문, 귀면문이 주로 사용되는데 이것은 불사의 건축용이었던 관계로 불교적인 것이 많이 쓰인 까닭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는 미술문화의 대부분을 백제로부터 영향 받은 바가 크다. 그러나 양식적인 면에서 본다면 고구려적인 것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대체로 백제적인 것이 더 많다. 따라서 예술적인 면에서 보면 신라는 외래의 모든 문화를 충분히 소화한데서부터 나타나는 이지적인 면모가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신라는 삼국중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인 나라이지만 이 외래문화를 가장 잘 이용하였기 때문에 최약소국으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통일신라는 당나라의 발달한 문물을 직접 받아들일 수가 있었고 멀리는 서역까지도 직접 왕래하면서 우리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서양미술에 있어서 희랍의 미술이 자연의 이치를 발견하여 인간과 자연이 행복한 친화관계를 맺어 완전한 사실적 표현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나라 미술사에 있어서 통일신라의 미술이 바로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시문(施紋)과정에 있어서 정교함이나 표현에 임하여 화려함은 이 시대 장인들의 탁월한 미의식의 발로일 뿐만 아니라 신라인들의 소박한 생활감정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의 미술을 대표하는 것은 불화와 도자기이다. 고려는 건국초부터 국교를 불교로 정하였던 까닭에 불교미술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통일신라에서와 같이 거국적인 미술을 오늘에까지 남기지 못하고 몇 폭의 불화만을 전하는 것은 수차에 걸친 외침의 원인도 있었겠지만 귀족계급의 형성으로 인한 개인의식의 발로가 더욱 가까운 이유이다. 이것은 집단적인 예술의욕을 형성하지 못하고 특별 계급의 취미 수용에 부응하는 예술형태를 낳게 하였으니 여기서 발달을 보게된 것이 도자기이다. 도자기란 원래 인간의 상용생활에 있어서 무엇을 담고 운반하는 수단으로서의 물리적인 가치를 갖는 것으로 만족하다. 그러나 인간의 미의식이 차츰 미발상태에서 발달하여감에 따라 이러한 물리적인 가치체 외에 심리적인 만족 즉, 미적 가치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이면에 여러가지 문양을 장식하게 되고 형태도 보다 새롭게 고안하게 된다. 이리하여 심리적인 가치와 사용적인 가치가 적당한 균형을 유지하는데서 우리는 그 시대 사람들이 생활감정이나 미적 의식을 읽어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심리적인 만족의 요구가 더욱 강하여 질 때 도자기의 미적인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사용적 가치를 무시해 버리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의 예술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문양의 표현 소재나 형식이 다양하게 발달을 보게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화적인 요구에 의하여 고려청자에 나타난 문양을 보면 종류가 다양하다.
조선왕조는 소수의 양반계급들로 대표되는 귀족들에 의하여 지배되어온 왕가로서 고려조와다른 점은 그 문화 배경이 불교가 아니라 유교라는 데 차이가 있다. 이 배불숭유사상은 소수의 선비계급들만에 의하여 그 문화가 유지 발전되었기 때문에 시민계급의 형식이나 그 문화적인 발생을 보지 못하고 오직 문인들의 기호에 부응하는 공예적인 예술로서 나타나게 되었다. 이 시대에 주로 사용되어온 문양은 건축에 있어서는 연화문이 퇴화하면면서 용문, 봉황문, 귀면문, 초화문, 당초문 등이 사용되었으며 조선조 문양의 특색을 나타내는 것은 도기예술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조선조 도자기는 청화백자로 대표되는데 이것은 도자기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순수 감상용으로 애용되면서부터 그 예술성을 높이기 위하여 회화적인 장식이 가하여진 까닭이다. 따라서 도안적인 장식문양 이외에 순수회화가 문양화로서 시문되기 때문에 다양한 성격을 띄게 된다. 그것은 당시대의 회화가 문인, 사대부의 취미, 기호에 따라 소재가 선택되기 때문에 문양화의 내용도 여기에 일치하여 산수도, 사군자, 동물 및 십장생 등이 사용되었다. 우리의 조형예술에 나타난 문양의 특징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첫째 우리의 문화는 역사적으로 볼 때 발생문화가 아니라 수용문화였다. 그러나 지난 어느 시대를 보더라도 외래의 것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우리의 것으로 전이변용시켜서 독자적인 것으로 발전시킨 것이 특색이다. 신라의 불교전래는 화랑을 낳아 삼국을 통일하였고, 조선의 숭유정책은 주자학의 완성을 본 것이 좋은 예일 것이나 여기에 우리 문화는 창조성을 갖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형예술에 있어서 그 장식요소인 문양도 외래적인 것이었지만 그 표현형식과 내용에 있어서는 조화와 통일을 꾀하여 우리의 생활감정을 담은 문양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둘째, 과거 우리 문화의 사상적인 지주였던 불교와 유교 및 선가신앙은 한국인의 인생관을 소박하게 만들었고 게다가 지리, 풍토적인 자연 조건은 우리의 인생을 더욱 순박하게 길렀으니 여기서 우러나오는 생활감정 또한 순진하여 그 문양의 표현에 있어서 기교를 모르고 수다스럽지 아니하며 단순한 조형미를 추구하되 그 속에는 아졸한 해학미가 들어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셋째로 정치적인 지배와 문화적인 지배는 항상 저항의식을 기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역사상 많은 외침과 외래문화의 영향은 어떠한 역경에서라도 견디어낼 수 있는 강한 의지력을 길러냈으니 이것이 곧 자주정신이다. 따라서 우리의 예술이 허다한 병화에 의하여 파괴되고 소실되었지만 그 전통성을 오늘에까지 계승하고 있는 곳에 문화와 예술의 영속성이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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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
바탕천에 여러 가지 색실로 문양를 수놓아 장식하는 공예미술. 자수는 인류가 동물의 모피나 식물의 껍질과 잎 등을 원시적 재봉용구로 꿰매고 엮어 옷을 지어 입었던 선사시대에 기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고기나 짐승의 뼈 등으로 만든 바늘로 짐승의 가죽을 꿰매어 옷을 해입는 등의 원시단계에서 점차 문명이 발달되어 옷감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금속바늘이 출현하면서 자수가 시작되었다.
즉, 인류생활이 점차 문명화되면서 옷이나 직물제품에 계급 표시 등을 목적으로 장식 또는 자수를 도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자수는 직물의 표면을 장식하는 조형예술로 발전되고, 각 민족의 생활환경,풍습,신앙 등에 따라 독자적 양식을 이루고 있다. 우리 나라의 자수 역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시대의 변천에 따라 우리 민족의 미적 특질을 표현해왔다. 자수는 길쌈,바느질 등과 함께 바늘 한땀한땀의 정성을 통해 일상생활 곳곳에 섬세한 솜씨로 아름다움을 가꾸워왔으며, 아울러 민족의 정서를 그 속에서 꽃피웠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흙이나 돌로 만든 방추차와 크고 작은 뼈바늘,돌바늘 그리고 바늘집 등이 출토되고 있다. 이와 같은 방적용구와 재봉용구가 출토됨으로써 그 당시에 이미 직조와 바느질을 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 뒤이어 철기시대에 이르러서는 철로 만든 농기구가 등장하여 농업이 현저하게 발달되었다. 이에 섬유재배기술이 발전되고 직물생산이 증대되었다. 이 무렵의 우리 나라에서는 마와 뽕나무를 재배하고 누에고치를 길러 면포를 비롯하여 마포, 그리고 합사하여 짠 교직물인 겸포도 생산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직물의 발달은 자수발달의 기본요건이다. 삼국시대에는 생산도구와 생산기술이 전반적으로 발달되어 생산력이 향상되었다. 이에 방직기계도 개량되고 직조술도 발전되어 직물의 종류가 증가되고 품질도 좋아졌다. 따라서, 옷이나 각종 직물제품에 자수장식도 성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수에 관한 문헌이 희소하고 자수유물도 아직 발견된 예가 없어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
경주 천마총의 출토 유물 중에서 옷자락에 금실로 수놓은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옷은 물론 가마나 말안장, 일상용품에 이르기까지 자수로 장식되었고, 불교자수도 상당히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흥덕왕 9년(934)에는 골품에 의한 직물 사용을 엄격하게 규정하기 위하여 의복제한이 내려졌다. 이같은 금령이 시행된 것으로 보아 당시 귀족사회에 팽배해 있던 사치성에 의해 고급직물과 자수에 대한 수요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불교가 크게 일어나 많은 귀족들이 다투어 절에 토지를 비롯하여 불상(佛像)?불구(佛具) 등을 시주하였다. 이같은 물자낭비를 막기 위해 애장왕은 새로 절 짓는 것을 금하고 수리만을 허용하였다. 또, 금실로 불사하는 일도 금하였다. 이는 법당의 장식에까지 고급비단과 자수가 쓰였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한편, 이 시대에 길쌈과 염색, 바느질 등의 일을 전담하던 여러 공방이 있어 직물공예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자수와 관련되어 있는 공방을 보면 장인들이 중국으로 비단을 수출하자, 당시의 염색 기술도 크게 발달 됐다. 이러한 염색법의 발달은 자수의 기본재료인 직물과 실에 다양하고 미묘한 색상을 연출할 수 있게 하는 주요 요인이 되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자수는 편의상 복식자수, 기용자수, 감상자수, 불교자수로 분류될 수 있다. 복식자수는 의복을 장식하기 위해 수 놓은 자수를 말한다. 당시에는 귀족층의 복식 사치가 심하여 당국에서는 이같은 사치풍조를 없애기 위해 자주 금제조처를 취하였다. 1034년(덕종 3)에는 “모든 신하는 아내가 금비녀를 머리에 꽂지 못하게 하고, 수놓은 비단은 찢어버리고 앞으로는 이러한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라. ”는 금령을 내린 바 있다. 10년 후인 1043년(정종 9)에는 남녀 백성이 용봉문양을 비단에 수놓거나 금박장식하는 것을 금하였다. 또한, 1144년(인종 22)에는 사치가 심하여 내외공사의 옷에는 반드시 금수를 사용하고 그릇에는 옥을 사용하므로 이를 근절시키라는 왕명이 있었다. 이같은 몇 가지 사실로 미루어 당시의 복식자수가 섬세하고 세련됨이 지나쳐 사치한 귀족취향의 장식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왕비와 귀부인은 그림 또는 자수 문양으로 장식한 붉은색의 옷을 즐겨 입었고 왕을 호위하는 친위군은 대개 오색의 꽃이나 새 문양을 수놓은 비단옷을 입었으며, 허리띠에 오색의 꽃을 수놓아 장식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군복에까지 자수가 장식된 점으로 미루어 귀족이나 일반평민의 복식에도 자수장식이 성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기용자수는 왕의 궁궐의 다양한 장식들을 수 놓았는데, 고려자수에서 주목할 사항은 미적 감상을 목적으로 제작된 감상자수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자수미의 완상을 목적으로 한 감상자수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자수의 영역이 확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수요 범위가 넓어서 장막뿐만 아니라 안방이나 거실 등의 실내에도 보급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자수는 불교에 관계되는 자수이다. 불교는 전시대에 이어 국가와 왕실의 흥륭을 꾀하는 호국신앙으로 육성되었고 여성의 생활에도 깊이 스며들어 생활습속화되었다. 이에 어느 시대보다도 각종 용도의 불사용 자수가 번성하였다. 당시 상당수의 화승이 불사용 그림에 참여했던 점을 감안할 때, 불교자수에 전념하던 승려와 비구니 및 여신도가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일본 등지에 남아 있는 고려 불화의 양과 질로 미루어 불교자수도 이에 비견됨에는 틀림없다. 다만 현존작품이 거의 없어 앞으로의 발굴을 기대하고 있다. 조선의 건국 초기에서 15세기 후반에 이르는 시기에는 정치,경제,사회 등의 각 방면에 걸쳐 일대변혁이 이루어져 조선문화의 잠재력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는 중농주의와 상공업억제를 기본정책으로 삼았기 때문에 초기에는 민간수공업이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농민층은 식량생산을 주업으로 하였고, 수공업은 부업으로 삼게 되어 의료의 생산에 치중하였다. 따라서, 의료생산에 관계된 직조,염색 등의 직물공예는 주로 여성이 담당하고, 여공을 적극 권장하여 생산의욕을 높이고 일반여성이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임을 강조하였다. 조선왕조 초기에 제정된 흉배제도는 일종의 공용자수로서, 이 시대의 자수변천사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관청수공업조직은 삼국시대부터 발달하여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인 15세기 무렵에 가장 발달하였다. 여기에 동원된 장인은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 배속되어 담당기술분야에 종사하였다. 장인조직 중 자수와 관계깊은 중앙공장의 예를 보면 장인층의 전담 생산물이 왕족과 고급관리층에 소용되었던 옷가지와 기타 직물제품 및 자수장식에 연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같은 공장조직과는 별도로 궁내에는 왕족일가의 복식 및 기타 용품의 자수장식을 전담하던 ‘수방’ 조직이 있었다. 이곳에는 10세 전후에 입궁하여 소정의 교육과 기술을 습득한 여성이 적을 두고 있었다. 이들은 궁내수요의 자수품 제작에만 종사하였다. 이처럼 여러 공장조직과 수방이 상호 연관되어 궁중자수, 즉 ‘궁수’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그 결과, 궁수는 한말까지 그 전통이 지속되었고 규범화된 양식과 고도의 기능에 의해 자수품이 제작되었으므로 작품의 수준이 고르고 기법이 정교하고 치밀하다. 이같은 궁수에 대비되는 것이 민간이 제작한 자수, 즉 ‘민수’이다. 이처럼 궁수와 민수의 이중구조는 비단 조선시대에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며, 사회계층이 분화된 이래 지속되어온 필연적인 귀결로 생각된다. 민수는 전문화?분업화되어 있는 궁수와는 달리 씨족적?지방적 가사전통에 의해 습득된 기능으로 일가의 여성이 전담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궁중의 정착화된 규범에 따른 궁수에 비해 민수는 자수인 각자의 개성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우리 나라 전통자수의 독특한 개성미는 민수에서 창출된 바가 적지 않다.
조선시대의 자수양식은 그 기능에 따라 병풍,복식,생활,불교자수로 분류된다. 병풍자수는작품의 규모와 수준으로 보아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자수이다. 병풍의 용도는 시간적으로는 사람이 평생 치러야 하는 주요 행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돌?생일?혼인?회갑잔치를 비롯하여 각종 축하연 및 상사와 제사에 걸쳐 두루 이용되었다. 공간적으로는 안방과 거실 및 서재 등의 실내는 물론 궁궐을 비롯한 역사?객관?서원등의 내부공간과 사찰?신당 등의 신앙장소에도 두루 비치되었다. 이렇듯 병풍은 시간적?공간적으로 개인?집단?공공에 연계되어 있다. 자수병풍은 이러한 범주 안에서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그 유형을 보면 화조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십장생과 수복류이다. 화조는 모란,국화,연꽃,매화,오동나무 등과 한 쌍의 꿩,원앙,봉황,오리 등이 함께 묘사되어 단란한 가족생활을 상징하고 있다. 십장생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오래 산다는 열 가지의 자연물상 (해,구름,산,물,소나무,대나무,학,사슴,거북,불로초)을 장수(長壽)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또 많은 자수들은 교화적 주제를 담은 것이 많았는데, 이는 시간이 경과하는 동안 점차 본래의 의도가 퇴색하고 그림이나 자수의 표현주제로 양식이 고착되었다. 그러기에 교화적 의미보다는 작품의 조형적 아름다움이 눈길을 끄는 것이다. 자수병풍의 꾸밈새는 그림병풍과 마찬가지로 8폭이 가장 많고 12폭,10폭,4폭,2폭 등의 순이다. 예외적으로 〈만인송덕병〉처럼 20폭짜리도 있다.
복식자수는 옷과 장신구에 장식한 자수문양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복식은 미분화되어 있었다. 왕족을 포함한 상류층은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 일반평민은 재래의 전통을 고수하였다. 궁중복식은 높은 신분과 위의를 나타내기 위해 금박이나 색사로 장엄을 다하는 것이 상례였다. 자수형식에는 옷의 표면에 직접 수놓은 것과 자수장식물을 표면에 부착한 것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국왕의 대례복과 왕족일가의 각종 예복이 해당된다. 후자에는 흉배를 비롯하여 기타 복식장식물이 포함된다. 궁중여성의 예복인 활옷 등에는 모란,국화,불로초 등의 꽃문양와 각종 길상문자와 장생문양가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다. 이와는 달리 왕족 남성이나 관리는 옷 표면에 자수장식을 하지 않고 상복의 가슴과 등에 학이나 호랑이문양를 수놓은 흉배를 부착하였다. 왕과 비빈이 착장하던 표장은 흉배와 구별하여 보라고 일컫고 용이나 봉황을 수놓았다. 현존하는 흉배의 실물은 대개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들인데, 제작시기가 비교적 오래된 것은 규격이 크고 은은한 색조의 꼰실로 치밀하게 수놓아져 있다. 민간의 복식자수로는 혼례복인 활옷이 다수 전하고 있고, 이 밖에 어린이용의 굴레?쾌자?조끼?허리띠 등이 있다. 어린이용의 복식자수는 동심에 어울리게 색상과 문양이 천진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생활자수는 일상생활에 쓰이는 일용품에 장식된 자수를 말한다. 생활자수는 그 종류를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직물제품 전반에 걸쳐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베갯모?버선본집?안경집?쌈지등이다. 사찰 등을 장식하던 불교자수는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정성과 기술을 다하여 제작에 임하기 때문에 일반자수품에 비하여 그 기법이 꼼꼼하며 제작시간도 많이 든 격조높은 작품이 대부분이고, 많은 작품이 현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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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기
보자기(짧게는 보)는 사물의 포장, 보관, 운반을 위해 사용한 다양한 크기, 색상, 모양의 정사각형 천들을 뜻한다. 보자기는 일상 생활에 실용적이고 다재다능한 물건일 뿐만 아니라 매우 예술적이다. 보는 한국인들이 일상 생활의 가장 평범한 관점에서 찾은 예술성의 증거라 할수 있다. 한국 보자기의 역사는 아주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고, 역사자료에도 보자기의 그 다양한 쓰임에 대해 나타나 있다. 비록 보자기가 일상적 사용을 위해 생겨났지만, 다양한 의식에서도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특히 조선왕조 때에는, 보의 문양와 모양은 다채롭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보자기가 발달하게 된 까닭은 무엇보다도 주거 공간의 협소함에 있다. 보자기는 펴고 접을 때마다 용적의 신축이 자유로워, 보관하거나 운반할 때는 용적을 최대한 이용해서 사용하였고, 사용하지 않을 때는 작게 접어 둘 수 있으므로 가재 도구로서 기능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한국문화 속의 보자기는 물건을 싸두는 것은 복을 싸두는 것과 같다고 믿은 고대민속신앙에서 시작됐다. 특히 각종 예물을 싸던 혼례용 보자기는 공들인 바느질로 신랑신부의 행복을 바라는 이러한 상징적 의미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하겠다. 기워맞춘 누비 보자기는 한국의 예술적 재능을 반영한다.
하지만 보자기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감을 마련하지는 않았다. 당시 귀중했던 옷감으로 옷을 짓고 남은 천의 자투리를 버리지 않고 보관해 두면 이것이 곧 아름다운 보자기의 재료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보자기는 조선 여인들이 쓰다 남은 옷감 자투리의 조화인 셈이다. 시간이 흐르자 기워맞춤 자체가 독창적이며 매우 예술적인 공예가 되었다. 다양한 그림과 특징의 자수도 보자기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높인다. 수공예는 종종 예술적 성취단계의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다. 수가 놓여진 보자기는 수보라고 하는데, 여기서 “수”는 자수를 뜻한다. 수보의 문양으로는 나무, 꽃 문양이 가장 많고 이에 곁들여 학, 봉황, 공작 등의 서조와 나비, 풀벌레, 각종 잡새들이 시문되어 있다. 수보 문양 가운데 가장 빈번히 사용된 것은 나무인 바, 나무는 한국인에 있어서 특별히 신성시된 자연물 가운데 하나로서 길사에 쓰이는 보자기에 영험있다고 믿어지는 자연물이 대표적으로 많이 수놓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밖에 꽃은 복을, 열매는 다산, 특히 다남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전체적으로 보아 수보의 문양은 복락기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보의 기본 색상은 청,홍,황,백,흑으로, 음양오행설이 말하는 자연계의 기본색상인 오색이 주조색상으로 쓰이고 있다. 이를 통해 보자기는 한국인들의 일상적 믿음과 행동에 밀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자기는 간편하고 안전한 운송기이자 보호대로써 서양의 가방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더욱 기능적이었다. 가방과 상자는 물건에 따라 흔히 정확한 크기와 형태를 요하고, 일정한 규격이상의 물건은 가방이나 상자에 들어 갈 수가 없으나, 한국에서 사용하는 보자기는 2차원으로 되어 있다가 어떤 물건을 싸느냐에 따라 적합한 크기를 선택하면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3차원의 크기와 형태가 정해져 대상, 크기, 형태에 대응하는 여유가 있고 다양한 융통성이 창출될 수 있다. 또한, 가방의 단일한 용도와 달리 보자기는 `보관과 정리', `오염방지', `선물포장`, '운반` 등 다양한 용도적 특성을 갗추고 있다. 경작에 기원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은, 경작공동체 속의 평화로움 안에서 쾌활함과 가장 평범한 사물들 안에서 미를 찾으려하는 경향이 있다. 보자기문화의 다채로움은 그들의 일상과 즐거움을 결합한 결과 중 하나다. 오랜 세월이 흐르자 숙련기술은 더욱 더 정교하고 다양해졌으며, 보자기는 한국인의 일상 속의 예술적 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보자기의 다양한 쓰임은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다. 1. 상용보 (매일 사용하는 보)
전대보 : 공사용의 문서와 물건을 전할 때 사용하던, 길고 양쪽 끝이 터진 자루 모양의 보자기를 말한다. 보부상보: 보부상이란 보상(보따리 장수, 여자 행상)과 부상(등짐장수, 남자 행상)을 말하는데, 이들이 팔 물건을 싸서 갖고 다닐 때 쓴 보자기다. 밥상보: 여름용은 통풍이 잘 되도록 사지나 모시로 만들어 꼭지를 붙여 밥상에 덮어 파리나 먼지 등을 막았다. 겨울용은 두터운 천으로 겹보를 만들거나 솜을 두어 보온에 유의했다. 그리고 보자기의 네 귀에 끈을 매달아 밥상을 옮길 때 편리하게 만든 것도 있다. 밥상보에는 한쌍의 주발보가 딸려 있기도 한테, 이것은 부부용이며 청홍색으로 부부를 구별했다. 밥상보에는 식지를 쓴 경우가 많다. 이불보 : 일명 자리보라고도 하는데, 때가 덜 타고 눈에 잘 띄지 않게 하기 위해 아청색이나 검정색 무명과 굵은 모시 등을 주로 사용하여 만들었다. 여기에 장생문이나 화문을 수놓은 가오리연 모양의 띠를 둘러 장식하기도 했다. 이불보에 싼 이불은 대개 반닫이에 얹어 두었다. 빨래보 : 뺄랫감을 싸는 보자기로, 다듬이질과 다리미질 전에 빨래를 싸서 발로 밟는 과정에 쓰기 때문에 쉽게 닳았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주로 질긴 천인 베나 굵은 모시 등속을 보자기 감으로 썼다. 버선본보 : 보선보 주머니라고도 하는데, 반주머니 형태로 네 귀 중 두 귀는 접어서 꿰매고 두 귀는 매듭단추를 달아 끼우도록 했다. 이 속에 한지로 오려 만든 버선본을 보관했다. 책 보 : 학동이 서당이나 학교에 다닐 때 책을 싸서 허리춤에 매던 보자기를 말한다. 횃댓보 : 간짓대를 잘라 두 끝에 끈을 매어 방 벽에 매달아 옷을 걸 수 있게 한 것을 횃대라 하는데, 여기에 걸어 둔 옷가지를 덮는 데 쓴 커다란 보자기를 말하며, 장생문이나 화문 등을 수놓아 장식했다. 간찰보 : 간찰(편지)을 은밀하게 전달할 때는 한지로 싼 다음 다시 보자기에 쌌는데, 이 때 사용한 보자기를 말한다. 경대보 : 경대를 씌워 거울을 보호하고 장식을 겸하는 데 썼고, 대개 고급 비단에 수를 놓아 만들었다.
2. 혼례용보 함보 : 혼례 때는 물론 일상 생활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던 함을 싼 보자기로, 함 운반시 훼손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썼다 기러기보 : 보통 청홍색 천으로 겹보로 만들며, 네 귀는 금색 종이인 금전지로 마무리했고, 곡식의 이삭을 상징하는 삭모를 달아 장식하기도 했는데 삭모는 여러 가닥의 색실로 꾸몄다. 혼례식 때 나무 기러기를 이 보자기에 싸서 신랑이 신부 어머니에게 건네 주어 상 위에 놓는데, 이 예식을 존안례라 한다. 기러기의 목을 밖에 내놓고 꼬리가 보이도록 형식적으로 쌌는데 이는 산 기러기를 상징한다. 예단보 : 신부가 시댁에 대한 첫인사 표시로 신랑의 직계 가족에게 보내는 예단을 싸던 보자기로, 청홍색 비단으로 만들었다. 크기는 보통 2~3폭이나 가세에 따라 크기가 달랐다. 폐백보 : 혼례식을 마친 후 신부가 시댁으로 들어가서 웃어른들께 인사드릴 때 차려 놓는 음식물을 싸 가는 청홍색 보자기를 말한다.
3. 불교 의식용보
마지보 : 사시보라고도 하는데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인 사시에 스님이 예불할 때 차려 놓는 밥이나 쌀을 덮는데 사용한다. 공양보 : 불자가 부처님게 공양 드릴 때 과일 및 음식점을 펼쳐 놓는데 쓰는 보자기로, 대개 깨끗한 백색 천으로 만들었다. 경전보 : 불교 경전을 싸 두었던 보자기다. 전주 전 시립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수보도 고려 시대 만들어진 것을 추정되는 경전보의 한 예이다.
4. 특수용보 명정보 : 관을 덮는 홍색 보자기로서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자의 품계, 관직, 성명 등을 썼다. 영정봉안도 : 조상의 영정을 싸는 내보와 이것을 보관하는 함을 싸 두는 외보가 있다. 기우제보 : 10폭 정도의 큰 보자기로 기우제를 지낼 때 제단 뒤에 치거나 앞에 펼쳐 놓는 보자기로서 당채로 용문,운문,이문, 백호문 등을 그려 넣어 장식했고 천은 주로 배를 사용하였다. 제기보 : 제사에 쓰는 각종 제기를 싸 두는 보자기로, 베와 무명을 많이 사용했다. 보자기는 또한 색상, 재료, 모양, 혹은 사용하는 사람의 계급에 따라 분류되기도 한다.
1. 사용자에 따라 분류 민보 : 평민들이 사용했다. 궁보 : 궁안에서 사용됐다.
2. 꾸밈새 홑보: 홀겹으로 꾸민 보자기이다. 겹보: 안감을 대어 이중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솜보: 안에다 솜을 두고 겹으로 만든 보자기로서 깨지거나 다치기 쉬운 물건을 보관하는 데 사용했다. 조각보: 작은 천 조각들을 모아 바느질하여 만들었다; 식지보: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기름종이로 만들어졌다. 누비보: 솜을 두고 누벼서 만들었다.
3. 색 청보, 홍보, 청홍보, 오색보, 아청보, 등등.
4. 직물 사보: 가볍고 얇은 비단으로 만들어졌다. 명주보: 특별히 부드러운 비단으로 만들어졌다 항나보: 비단 가제로 만들어졌다. 모시보: 모시 직물로 만들어졌다.
5. 도안
화문도: 꽃 그림 수목문도: 식물과 나무 그림 용문도: 용 그림 운문도: 구름 그림 위에 명시된 보자기의 다양성을 통하여 볼때, 일상 생활에 보자기는 언제 어디에나 있는 필수불가결인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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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풍습
세시풍습이란 한해동안 규칙적으로 반복되어지는 의식적인 행위들을 말한다. 세시란 우리가 그 다음 해로 넘어갈 수 있도록, 우리의 생활에 자극을 주고 한 해의 생활 주기 리듬을 촉진시켜주는 역활을 하는 축제의 날들이다. 세시풍습은 태음력에 기반을 둔다. 태양은 계절을 관찰할 수 있는 특징들을 보여준다고 믿어지지 않았지만, 반면에 달은 커짐과 작아짐을 통해 이러한 계절의 특징들을 보여준다고 믿어졌다. 그 결과 달의 변화에 대한 자세한 관찰에 기반을 두며 계절의 변화를 보고 그리고 평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농사는 24절기 혹은 “전환기”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농사가 24 태양기에 기반을 두었다면, 세시풍습은 달의 변화단계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이다. 세시풍습은 신관, 주술성, 전복속, 그리고 민속놀이와 연관 되어졌다. 신들로는 하늘의 일월성신, 산천신, 용왕신, 서낭신, 그리고 가신이 있었다고 믿어졌다. 이들 신들은 그들이 인간의 운과 행운을 조작할 수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에 숭배되었다.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행하여 지던 날들이 축제의 날들이었고, 사람들은 신들의 보호와 악령의 퇴치를 위해 기도 하였다. 행운 그리고 민족 전체의 안전을 위해 기도 하는 방식으론 “부럼까기”, “모기 쫒기”, “다리 위 걷기”, 혹은 “쌀주머니 걸기”등이 있었다. 한국과 같은 경작사회에선 돌아오는 수확이 좋은지 나쁜지를 예측하기 위해 예언의식이 실행되었고, 그 예언에 의존하여 풍작을 기원하곤 했다. 따라서 태음력의 첫번째 달엔, 동물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날씨의 변화들을 측정하며 예언의식을 행하였다. 구정의 날 혹은 첫번째 달의 15번째 날에 암소들이 시끄럽게 울거나 날씨가 온화했다면, 풍년이 온다고 믿어졌다. 태양의 새빨갈 때는 가뭄이 온다고 믿어졌다. 북쪽으로 향하는 바람은 좋지 않은 년을 의미했고, 남쪽으로 향하는 바람은 풍족의 년을 의미했다. 민속오락인 윷놀이와 줄다리기를 통해 한해의 운을 예측하기도 했다.
그 결과, 세시풍습은 국가의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동시에 한국인들의 특색과 그들의 의식의 구조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현재 서부 문화의 영향과 생활 양식의 변화들로 인해 세시풍습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정월 초하루에 한국인들은 조상을 기리는 기념패를 사당에 모시고 차례를 지낸다. 차례는 축제의 날들에 음식과 술을 가지고 조상을 기리는 의식이다. 보통 뒤로 4대까지의 조상들을 위해서만 제사가 지내졌다; 더 오래된 조상들을 위해선 일년에 한번씩만 그들의 무덤에서 제사를 지냈다. 새배는 연소자들이 신년의 문안인사로써 연장자들에게 하는 절이다. 새배는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절하는 것이다.
새배가 끝나면, 성묘를 한다. 성묘는 조상의 무덤을 찾아가 절을 하고 새해의 인사를 하는 것이다. 성묘는 마치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새배하는 것과 동등한 풍습이다; 그것은 자손들에게 있어선 절대적으로 필요한 에티켓의 풍습이었다. 정월 초하루와 첫번째 달의 첫 열흘동안엔 한해의 행운을 위해 기도하기도 했다. 그 열흘동안, 각 가정은 복조리를 구입해 가락 사탕, 성냥, 혹은 돈과 함께 벽에 걸었다. 첫번째 달의 15일의 전날 밤엔 중이라고 불리는 빨대 형상이 만들어졌고 물의 흐름 속으로 던져졌다. 이것은 불운한 운명을 버리고 행운이 깃든 새해를 맞이하기 위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15일 아침에는, 귀를 씻기 위해 술을 마셨고 호두까기를 하였다. 딱딱한 껍질을 가지고 있는 견과류(밤, 호두, 혹은 은행과 같은)를 섭취 함으로써 궤양을 예방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귀를 씻기 위해 와인을 마심으로써 한해동안 좋은 소식만 듣을 수 있기를 소망하였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세시풍습 중 하나는 15일 전후에 행하여지던 다리 건너기였다. 저녁에 자신의 나이 수 만큼 다리를 건너면 한해동안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믿어졌다. 중요한 세시풍습 중 하나는 점술이었다. 월간 운세의 설명이 보편적으로 정확했기 때문에 가장 널리 퍼졌던건 토정비결이었다. 태음력의 첫번째 달엔 의식적인 행사인 동제가 각 도시마다 행하여졌다. 산신제, 별신제, 그리고 용왕에 대한 숭배로 동제를 지냈다.
봄의 시작인 입춘은 대게 2월 초에 온다. 각 가정에선 봄의 시작을 맞이하는 시를 써서 기둥이나 정문에 붙였다. 두번째 달의 첫째 날은 영등이라고 불린다. 바람의 여신인 영등은 딸과 며느리를 데려온다고 믿어졌는데, 바람이 분다면 딸을 데려온것이었고 비가 온다면 며느리를 데리고 오는것이라고 생각되어졌다.
3번째 달의 3번쨰 날은 제비들이 돌아가는 날이라고 생각되어졌다. 봄이 오면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꽃모양의 떡을 먹었다. 4번째 달의 8번째 날은 석가탄신일이다. 이날 사람들은 사원을 방문하여 죽은자의 행복을 위해 기도했다. 5번째 달의 5번째 날은 단오이다. 이 날에 여성들은 청포에 머리를 감았고 그네를 탔으며, 남성들은 씨름을 했다. 6번째 달의 15번째 날은 유두이다. 이 날에 사람들은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서 머리를 감았고, 새로 수확한 과일과 떡을 가지고 조상을 숭배했다. 6번째 그리고 7번째 달 사이엔 한여름의 더위가 왔다. 7월 7일은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났던 칠석이다.
아내들과 아이들은 우물에서 기도를 했으며 집안의 번영과 풍족을 위해 칠석제를 지냈다. 7월 15일은 백정 혹은 중원이라고 불린다. 이쯤에는 다양한 과일과 채소들이 풍부했다. 8월 15일은 추석, 즉 추수감사절이다. 정월 초하루와 함께 추석은(혹은 한가위 보름달 축제) 한국인의 가장 중요한 휴일이다.
모든 가족이 함께모여 참깨, 콩, 팥, 혹은 호두가 들어갔던 송편을 솔잎과 함께 쪄냈으며, 가장 잘 만든 이는 아름다운 배우자를 만날 수 있다고 믿어졌다.
또한 소놀이, 거북놀이, 강강수월래, 그리고 씨름대회가 열렸다. 9월 9일은 중구이다. 중구에는 모기들이 사라지고, 제비들이 남쪽으로 날아가며, 뱀과 개구리가 동면을 위해 땅속에 들어간다고 믿어졌다. 10번째 달은 달이 가장 높게 빛나기 때문에 상달이라고 불려졌다. 사람들은 시루떡을 만들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 기원했다.
11번째 달은 동짓달이라 불렸고 사람들은 팥죽을 만들어 먹었고, 또한 거짓과 악령을 퇴치하기 위해 정문과 벽에 팥죽을 뿌리기도 했다. 마지막 달의 마지막 날은 제야라고 불렸고, 새해를 위해 남은 빚을 값는 날이기도 했다. 여자들은 정초를 위해 음식을 준비했고, 남자들은 집안밖을 청소했다. 제야의 밤에 잠이 들게 된다면, 눈썹이 희게 된다고 믿어졌고, 사람들은 밤새 깨어있었다. 한국의 세시풍습은 생활의 경험안에서 뿌리내린 것이다. 그래서 세시풍습은 태생의 지혜의 풍족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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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혼상제
인간은 삶에서 많은 다양한 단계를 거쳐가게 된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가족을 만들고, 늙어가고, 그리고 죽은뒤엔 자손에 의하여 기억된다. 한국에선 개인이 거쳐가는 이런한 변화들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혼상제라 불리는 일련의 의식들을 통해 도움을 준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인 한국에서 관 의식은 개인이 공식적으로 사회의 책임있는 구성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결혼은 사회의 기본적인 요소인 가정의 중요함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가족의 죽음을 애도하고 구성원간의 단일성과 조화를 강조하는 상례는 엄숙하고 복잡한다. 제례는 조상에 대한 예를 강조한다. 남자 아이가 20살이 되는 해에는 머리를 위로 따고 갓을 썼다. 여자 아이가 15살이 되는 해에는 비녀를 꽂아 머리카락을 묶다. 소년은 마을의 정해진 바위를 들어올림으로써 성인으로서 인증된다. 결혼은 두 집안의 어른들에 의해서 정해졌고, 결혼이 합의가 된다면 신랑의 가족은 신부의 가족에게 신랑의 사주팔자를 보낸다. 그러면 신부의 가족은 결혼날짜를 정해 통보하고, 다시 신랑의 가족은 신부에게 결혼예복과 선물등을 보낸다. 중국 그리고 일본과는 다르게, 전통적인 한국의 결혼식은 신부의 집에서 열린다. 결혼식이 시작되면, 신랑은 신부의 가족에게 한 쌍의 목제 거위들을 바친다. 신랑과 신부가 서로에게 절을 하고, 술을 마신다. 결혼식 후에 신랑신부는 두세달을 신부의 가족과 함께 보내게 된다. 결혼에 의해 생기는 가족은 사회 생활의 기초로 여겨졌고, 번창하는 삶을 살기위한 사회적 의무였다. 유교사상의 뿌리를 내린 조선시대의 상례는 가족뿐만이 아니라 전체 일가가 참석하는 정교한 것이었다. 상례후 애도기간은 2년이었고, 여러가지 의식들이 계속 수행되었다. 완전한 장례식을 구성하는 다양한 순서들은 다음과 같다.
1. 임종 임종은 운명이라고도 하는데 환자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것을 말한다. 이때는 평상시 거쳐하던 방을 깨끗이 치우고 환자의 머리를 동쪽으로 해서 방 북쪽에 조용히 눕힌 다음 요나 이불을 새 것으로 바꾸고 옷도 깨끗한 것으로 갈아 입힌다. 옛날의 예법에는 남자는 여자가 지키고 있는데서 숨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 이와 반대로 여자는 남자가 지키고 있는데서 숨이 끊어지지 않게 한다고 사상기에 기록되어 있다. 가족들은 집 안팎을 모두 깨끗이 청소한 다음 조용히 운명을 지킨다. 2. 수시 우선 고인의 명복을 빌고 눈을 곱게 감겨주고 시체가 굳기전에 고루 머리와 팔 다리를 주물러서 반듯하게 편 다음, 고인의 몸 전체를 깨끗이 씻기고 햇솜으로 귀와 코를 막은 다음 머리가 방의 윗목으로 가도록 하여 머리를 높고 반듯하게 괸다. 그리고 백지로 얼굴을 덮은 후 희고 깨끗한 홑이불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덮는다. 남자는 왼손을 위로 여자는 오른손을 위로 하여 두 손을 한데 모아 백지로 묶는다. 이는 사지를 뒤틀리지 않고 반듯하게 하기 위함이다. 수시가 끝나면 병풍으로 가리고 그 앞에 고인의 사진을 모시고 양쪽에 촛불을 켜고 향을 사른다. 3. 고복 고복은 곧 초혼이다. 남자의 초상에는 남자가, 여자의 초상에는 여자가 죽은 사람의 상의를 가지고 동쪽 지붕으로 올라가 왼손으로는 옷의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옷의 허리를 잡고서 북쪽을 향해 옷을 휘두르면서 먼저 죽은 사람의 주소와 성명을 왼 다음에 "복!복!복!"하고 세 번을 부른다. 이는 죽은 사람의 혼이 북쪽으로 하늘로 가고 있다고 하여 혼이 다시 돌아오도록 부르려는 것이니 이렇게 해도 살아나지 않아야 비로소 죽은 것으로 인정하고 곡을 하는 것이라 했다. 이때 죽은 사람의 벼슬이 있으면 모관 모공이라고 벼슬 이름을 부르고, 벼슬이 없으면 학생모공이라 한다. - 사자밥 : 밥상에 밥 세 그릇, 술 석잔, 백지 한권, 명태 세 마리, 짚신 세 켤레, 동전 몇 닢을 얹어 놓고 촛불을 켜서 뜰 아래나 대문 밖에 차려 놓는다. 임종한 사람을 데리러 온다고 믿어진 저승사자를 대접함으로써 편하게 모셔가 달라는 뜻에서 이 상을 차린다. 4. 발상 사람이 죽은 후 초상을 알리고 상례를 시작하는 의식 절차를 말한다. 수시가 끝나면 가족은 검소한 옷(상복이 아님)으로 갈아입고 근신하며 슬퍼한다. 이때에 근조(謹弔)라고 쓴 등, 기중(忌中)이라고 쓴 종이를 대문에 붙인다. 5. 상제 고인의 배우자와 직계비속(자녀, 손자, 손녀)은 상제가 된다. 우선 상주와 주부를 세우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큰 아들이 상주가 되지만 큰 아들이 없는 경우 장손이 상주가 된다. 아버지가 있으면 아버지가 상주가 된다. 또 아버지가 없고 형제만 있을때는 큰 형이 상주가 되고 자손이 없을 때에는 최근친자가 상례를 주관한다. 6. 전 전이란 고인을 생시와 똑같이 섬긴다는 의미에서 제물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시신의 동쪽위에 집사자가 포와 젓갈을 올려 놓는다. 다음으로 축관이 손을 씻고 잔에 술을 부어 제상 위에 올린다. 7. 호상 상중에는 호상소를 마련한다. 모든 초상 범절에는 주인은 슬퍼서 일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호상은 친족이나 친지중 상례에 밝고 경험이 있는 사람이 하는데 상주를 대신해서 장례절차, 진행, 부조, 조객록, 사망신고등의 모든 일을 주관한다. 8. 부고 돌아가신 분의 사망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9. 염습 습은 시체를 닦고 수의를 입힌 뒤 염포로 묶는 절차로서 염습 또는 습렴이라 한다. 먼저 향나무 맑은 물이나 쑥을 삶은 물로 시신을 정하게 씻기고 나서 수건으로 닦고 머리를 빗질하고 손톱과 발톱을 깍아 주머니에 넣는다. 이것은 대렴을 할 때 관 속에 넣는다. 이것이 끝나면 시신을 침상에 눕히고 수의를 입히는데, 옷은 모두 오른쪽으로 여민다. 다음으로 습전이라 하여 제물을 올리고 주인이하 모두가 자리에서 곡한다. 이어 시신의 입속에 구슬에 쌀을 물려 주는데 이를 반함이라 한다. 염습의 절차가 끝나면 사자는 이불로 시신을 덮는다. 이를 졸습이라 한다. 이때 화톳불을 피우고 영좌를 꾸민다. 교의에는 혼백을 만들어 얹고 명정도 만들어 세워 놓는다. 이 의식이 끝나면 친족 친지들이 들어가서 곡한다. 10. 소렴 소렴은 시신을 옷과 이불로 싸는 것을 말한다. 죽은 다음날 아침 날이 밝으면 집사자는 소렴에 쓸 옷과 이불을 준비해 놓는다. 머리를 묶을 삼끈과 베끈을 준비하고 소렴상을 마련하고 시신을 묶을 베와 이불과 옷도 준비한다. 이것이 끝나면 제물을 올린 다음에 소렴을 시작한다. 우선 시신을 소렴상에 눕히고 옷을 입히는데 옷은 좋은 것으로 골라서 입히고 이불은 겹으로 한다. 옷을 입힐때는 왼편으로부터 여미되 고름은 매지 않으며, 손은 악수로 싸매고 면목으로 눈을 가리고 폭건과 두건을 씌운다. 이불로 고르게 싼 다음 장포 두 끝을 찢어 각각 매고 속포로 묶는다. 이때 속포 한쪽 끝을 세갈래로 찢어서 아래로부터 차례로 묶어 올라간다. 11. 대렴(입관) 대렴은 소렴이 끝난 뒤 시신을 입관하는 의식으로서 소렴을 한 이튿날, 즉 죽은지 사흘째 되는 날에 한다. 날이 밝으면 집사자는 탁자를 가져다가 방 동쪽에 놓고, 옷 한벌과 이불 둘을 준비한다. 시신을 멜 베는 세로는 한폭을 셋으로 쪼개서 소렴때와 같이 하고 가로는 두 폭을 쓴다. 다음으로 관을 들여다가 방 서쪽에 놓고 입관하는데 제물을 올리는 것도 소렴때와 같이 한다. 이때 자손과 부녀들은 손을 씻는다. 대렴금으로 시신을 싸되 먼저 발을 가린 다음 머리를 가리고 또 왼쪽을 가린 뒤에 오른쪽을 가린다. 장포와 회오순으로 맨 다음 시신을 들어서 관속에 넣고 천금으로 덮은 다음 풀솜이나 고인의 유물중에 넣을 것이 있으면 넣어 양 옆을 채운다. 이때 염주, 십자가 등을 종교에 따라 넣기도 한다. 입관을 마치면 관보를 덮고 그 위에 관상명정을 쓴다. 관보는 흰색, 검정색, 노란색으로 하고 천은 비단이나 인조견등 형편에 따라 덮는다. 12. 영좌 입관을 하고 관보를 덮은 다음 관을 제자리로 옮겨 병풍으로 가린다. 그 앞이나 가까운 대청 정결한 위치에 영좌를 마련하여 고인의 사진을 모시고 촛불을 밝힌다. 영좌의 앞에 향탁을 놓고 향을 사르며 영좌의 오른쪽에 명정을 만들어 세운다. 13. 상복 입관을 하면 상복을 입는데 이때 상복을 입는 절차(성복제)는 지내지 않는데 상복은 주로 삼베로 만든 옷을 입는 경우가 많으며, 한복일 경우 흰색 또는 검정색으로 하고 양복은 검정색으로 하는데 왼쪽 가슴에 상장이나 흰 꽃을 단다. 보통 일반 가정에서 상복을 입는 기간을 장일을 지나 5일째 탈상까지로 한다. 14. 치장 옛날에는 석달만에 장사를 지냈는데, 이에 앞서 장사를 지낼만한 땅을 고른다. 묘자리를 정하면 이어 장사 지낼 날짜를 잡는다. 날짜가 정해지면 영역(산소)에 산역을 시작하고 토지신에게 사토제를 지낸다. 15. 천구 영구를 상여로 옮기는 의식으로 발인 전날 행한다. 이때 오복의 친척들이 모두 와서 각각 자기 의복을 입고 참례한다. 이때 조전을 올리는데, 축관이 혼백을 받들고 앞서 가서 사당 앞에 뵈면 집사는 제물을 진설한다. 다음에 명정이 따르고 복인들이 영구를 들어 모시면 상주 이하는 모두 곡하면서 그 뒤를 따른다. 조전을 올릴 때 집이 좁아서 영구를 모시고 출입하기 어려우면 혼백으로 영구를 대신해도 된다. 그럴 때에는 제물이 앞서 가고, 그 다음에 명정 혼백의 순으로 간다. 사당 앞에 도착하면 북쪽으로 향해 혼백을 자리 위에 모신다. 이어서 영구를 다시 마루로 옮기는데, 이때 집사가 마루에 포장을 친다. 축관이 혼백을 받들고 영구를 안내하면 주인 이하 모두가 곡 하면서 뒤따른다. 마루에 도착하면 영구를 마루에 깔린 자리 위에 놓고 축관은 영구 앞에 제물 올랄 상을 마련한다. 이것이 끝나면 모두가 제자리에 앉아 곡한다. 해가 지면 조전을 올리고 이튿날 날이 밝으면 영구를 상여로 옮긴다. 16. 발인 영구가 장지를 향해 떠나는 것을 말한다. 이때 견전이라 하여 조전 때와 같이 제물을 올리고 축문을 읽는데 이것을 요즘은 발인제라 한다. 영구가 상가 또는 장례식장을 떠나기 직전에 그 상가 또는 장례식장에서 한다. 발인제는 고인의 신분에 따라 구분되는데 사회장, 단체장, 가족장등이다. 축관이 술을 따라 올리고 무릎을 끓고 축문을 읽고 나면 상주 이하는 모두 곡하고 절한다. 제사가 끝나면 집사가 포를 거두어 상여에 넣는 경우도 있다. 이는 효자의 마음에 잠시라도 차마 신도가 의지할 곳이 없게 되면 어쩔까 염려하여 행하는 일이다. 17. 운구 영구를 운반하여 장지까지 가는 것을 말한다. 영구가 떠나면 방상이 앞에 서서 길을 인도해 간다. 방상이란 초상 때 묘지에서 창을 들고 사방 모퉁이를 지키는 사람을 가리킨다. 운구하는 도중에 상주 이하 모두 곡하면서 따른다. 행렬순서는 사진, 명정, 요여, 요여배행, 영구, 영구시종, 상제, 조객의 순으로 한다. 요여배행은 복인이 아닌 친척이 하는것이 예이며, 영구의 시종은 조카나 사위가 하는 것이 예이다. 18. 하관 하관할 때 상주들은 곡을 그치고 하관하는 것을 살펴본다. 혹 다른 물건이 광중으로 떨어지거나 영구가 비뚤어지지 않는가를 살핀다. 하관이 끝나면 풀솜으로 관을 깨끗이 닦고 나서 구의와 명정을 정돈해서 관 한복판에 덮는다. 집사자가 현훈을 가져다가 상주에게 주면 상주는 이것을 받아서 축관에게 주고 축관은 이것을 받들고 광중에 들어가 관의 동쪽, 즉 죽은 사람의 왼편에 바친다. 이때 상주가 두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나면 모든 사람들이 슬피 곡한다. 현훈이란 폐백으로 쓰는 흑색과 홍색의 비단을 말하는데, 이것은 동심결로 묶는다. 19. 성분(봉분) 흙과 회로 광중을 채우고 흙으로 봉분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지석을 묻는 경우에는 묘지가 평지에 있으면 광중 남쪽 가까운 곳에 묻고, 가파른 산기슭에 있으면 광중 남쪽 몇 자쯤 되는 곳에 묻는다. 이때 제주라 하여 신주를 쓰는데, 집사자가 미리 영좌 동남쪽에 책상을 준비하면 축관이 미리 준비한 신주를 꺼내 놓고, 글씨 잘 쓰는 사람을 시켜 쓰게 한다. 다 쓰고 나면 축관이 신주를 받들어 영좌에 모시고 혼백을 상자에 놓고 그 뒤에 놓는다. 이어 향을 피우고 주인 이하 모두 두번 절하고 슬피 곡한다. 성분했을 때 제물을 올리고 제사를 지낸다. 이때 축문을 읽고, 신주를 쓴 뒤에는 향만 피우고 축문을 읽는다. 이 절차가 끝나면 혼백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온다. 20. 반곡 장례가 끝난 뒤 상주 이하가 요여를 모시고 귀가하면서 곡하는 것을 말한다. 집대문이 보이면 다시 곡을 한다. 집사는 영좌를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상주가 집에 도착하면 축관으로 하여금 신주를 모시게 하고 신주 뒤에 혼백함을 모신다. 그러면 상주 이하가 그 앞에 나아가 슬피 곡을 한다. 장지에서 혼백을 다시 집으로 모셔 오는 것을 반혼이라 한다. 21. 초우(반우제) 초우는 장례를 지낸 날 중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만일 집이 멀어서 당일로 돌아올 수가 없을때는 도중에 자는 집에서라도 지내야 한다. 이때 상주 이하 모두가 목욕을 하지만 머리에 빗질은 하지 않는다. 이 초우부터 정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기 때문에 제물 이외에 채소와 과일도 쓰며, 제사를 지내는 동안 상제들은 방 밖에서 상장을 짚고 서며, 그밖의 참사자들은 모두 영좌 앞에서 곡한다.
초헌과 아헌 종헌이 끝나고 유식을 하고 나면 상주 이하는 모두 밖으로 나가고, 합문과 계문이 끝나면 다시 모두 들어가서 곡한다. 이러한 절차가 끝나면 축관이 혼백을 묘소 앞에 묻는다. 이로써 장례는 끝나게 된다. 이러한 장례식의 순서들 말고도 한국인들은 조상들을 존경하는 많은 종교의식들을 통해 부유한 전통을 상속했다. 서쪽의 사람들과는 달리, 한국인들은 사후의 세계과 결코 현생의 세계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믿었다. 조상들을 숭배하고 자손을 통해 전통을 이어가는게 아이들의 주요한 책임이라고 생각되었다. 오늘날도, 독실한 유교사상가들은 그들의 부모, 조부모, 그리고 조부모의 조부모에게 까지 의식을 제공한다. 때때로 이들 의식들이 씨족과 배타주의를 키운다고 말해지지만 그것은 또한 세대간의 유대관계와 자부심을 양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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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한국의 정원들은 언덕과 물의 흐름등의 자연적인 풍경을 다시 만들려고 시도한다. 부피면에서는 작지만, 정원은 자연과 인간의 이상적인 조화를 추구한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자연 그 자체는 이미 완전하고 절대적인 생명소이기 때문에, 정원의 목적은 주위환경에 가능한 한 적은 동요를 주면서 구조물을 자연과 함께 동화시키는 것이다. 예로부터 인공의 요소들을 순수한 공간에 더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위반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한국의 정원은 자연 그 자체보다 더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도록 하는데 취지를 두고 있다. 한국은 정원에 대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역사는 주목할 만한 건축학의 발전을 보였던 삼국시대(57 B. C. ~ A. D. 668)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의 이른역사를 보여주는 한국사기는 고귀한 궁전 정원들에 대한 정보들을 제공한다. 정원의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던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의 궁전 뜰안에는 불가사이한 공작들이 떼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장수왕 통치 하 2년째 되는 해(414) 역시, 기묘한 새들이 궁전안으로 무리를 이루었다고 삼국사기에 묘사되어 있다. 백제(18 B. C. ~ A. D. 660)의 무왕(660 ~ 641) 역시 8킬로미터나 떨어져있는 연못을 연결해주는 상수도 역할을 하는 정원을 궁전의 남쪽에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연못의 네 모서리에는 버드나무들이 심어졌으며 그 중앙에는 도교의 불사신들이 살고 있다고 믿어지던 중국의 전설속의 산의 이름을 딴 축소형의 섬이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현재 궁남지 혹은 궁전의 남쪽 연못이라 불리우던 그 연못의 유적은 백제의 옛 수도였던 부여에서 볼 수 있다.
또한 655년에 의자왕이 자신의 궁전의 남쪽에 위치한 왕세자의 궁전과 망해정이라 불리우던 가건축물을 새롭게 복원했다고 한다. 여기서 바다는 주궁전 남쪽에 위치한 버드나무에 둘러싸인 궁남지를 의미한다고 추측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57 B. C. ~ A. D. 935)의 시조인 백혁거세는 32 B. C. 경 수도인 금성, 오늘날의 경주, 에 궁전을 건설했다고 한다.
또 삼국사기에 의하면, 첨해 이사금왕 지배아래 궁전의 동쪽에 위치한 연못과 남쪽에 위치한 버드나무로부터 용이 나타났다고 한다. 고대의 정원 가운데 가장 잘 유지된 궁전 정원으로 요즈음 발굴과 복구를 위해 배수된 경주의 안압지연못을 들 수 있다. 문무왕 지배아래 왕세자의 분리된 궁전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진 이 인공연못은 1,330미터를 초과하는 연못가를 따라 만들어진 5개의 건물을 가지고 있었으며, 각 건물로부턴 연못전체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다섯개의 건물들 중, 세개만이 오늘날 복구되어 있다. 연못의 가운데에는 도교의 성지들을 의미하는 세개의 작은 연못들이 있다. 섬들 주위의 물가에는 돌로 만들어진 인공 해변들이 위치하고 있다.
1975년 안압지가 처음 배수되고 발굴 되어졌을 때, 통일신라(668~935)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연못 바닥의 전체는 물을 깨끗하게 하기위한 조약돌들로 덮여 있었다. 전체 지역이 풍경화법의 효과를 위해 배열되어 있었다.
경주의 다른 하나의 중요한 신라의 정원은 남산 남쪽 골짜기안에 분리되어 위치한 궁전에 있다. 1157년 고려시대(918~1392)의 의종왕은 마치 요정의 나라같은 다양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지었다. 조선의 정원문화는 창덕궁의 후원정원에서 볼 수 있다. 궁정 재산 전체의 405,636미터중의 300,000미터에 이르는 정원은 가건축물, 바위, 다리, 계단, 그리고 연꽃 핀 연못 등으로 구성된 한국 전통 정원의 기본적인 요소들로 되어있다.
Korea's World Cultural & Textual Heritage (한국의 세계문화 유산) 국제사회는 불과 몇십년 만에 이루어낸 한국의 활약상을 경이적인 눈으로 응시해 왔다. 한국전쟁 후의 폐허로 인한 제로베이스의 경제력으로부터 선진공업사회로 경제구조를 지닌 선진국가로의 도약은 국제사회로 부터 “한강의 기적”, “아시아의 네 마리의 용” 이라는 찬사를 자아내게 하었다. 1988년 한국의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다시 한 번 세계는 한국의 저력에 감탄을 보냈지만, 아직 한국의 진정한 모습이 이러한 피상적인 성공만으로는 다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강산, 뚜렷한 사계절, 풍부한 문화유산, 예술과 평화를 사랑하는 서민들이 어루려져 만들어 내는 일상들, 그리고 유교사상이 깃든 교육 이념, 효도 정신 등의 이 모든 것들이 오늘날의 한국을 만들어 나가는 진정한 위상들이기 때문이다. 한국 민족은 반만년의 역사 동안의 어떠한 고난과 역경의 순간에도 협동 단결 정신을 잃지 않아왔고, 꿋꿋히 견뎌내온 자랑스런 민족이다. 한국은 아직 우리의 세계 이웃들에게 기여할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는 숨겨진 많은 저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 그 안에 내재된 아름다움을, 살아숨쉬는 힘을 조금이나마 이 글을 읽으면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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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와 불고기
김치와 불고기는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음식이다. 발효음식인 김치는 밥과 함께 매일 한국인의 식단에 빠지지 않는 부식인 반면, 양념된 고기를 불에 구워먹는 불고기는 손님을 접대하거나 행사등에 등장하는 특별한 음식이다.
외식 메뉴로 불고기는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선호하는 음식이다. 불에 굽는 고기란 뜻인 불고기는 코리안바베큐로 외국인들에게는 알려져 있으며, 실로는 돼지고기, 닭고지, 양, 오징어 등 다양한 고기 종류가 동일한 양념에 의해 양념된 것들이 다 불고기라고 통칠될 수 있으나, 통상 양념된 쇠고기가 불고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인들은 불에 구워먹는 불고기와 상추를 곁들여 쌈을 싸먹는데, 상추쌈을 먹으며 곁들이게 되는 마늘이나 고추장, 된장 등은 항암효과가 탁월하며 비타민과 미네랄 섭취도 함께할 수 있어 건강에도 좋다.
김치는 건강식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채소에는 칼슘, 구리, 인, 철분, 소금 등의 무기질이 풍부하여 비타민 C는 물론이고 밥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필요한 비타민 B의 흡수를 돕는다.
주재료인 마늘과 고추 생강등은 몸에 좋은 약리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김치가 익으면서 나오는 젖산균은 해로운 세균의 작용을 억제하며 새콤한 맛을 낼 뿐 아니라 창자속의 다른 균을 억제하여 이상발효를 막아주고, 병원균을 억제한다
과거의 김치류는 무를 주원료로 한 동치미, 짠지,장아찌가 주를 이루었다. 오늘날과 같은 통배추와 고춧가루를 주원료로 한 김치류는 16세기에서 17세 일본에 정박하던 포루투갈 상인에의해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보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김치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삼국지』「위지동이전」고구려조로 "고구려인은 술빚기,장담그기, 젓갈등의 발효음식을 매우 잘한다"고 씌어 있어 이 시기에 이미 저장발효식품을 생활화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규보(1168-1241)가 저술한 문헌에 의하면 초기의 김치에는 ‘마늘과 고추가 사용되지 않았고, 채소를 소금물에 담근다'는 기록을 볼 수 있고 이 의미의 '침채 '팀채', 혹은 '딤채'의 발음이 구개음화로 인해 '짐치'가 되었다가 오늘날의 '김치'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1600년에 쓰여진 김치 여리법을 보아도 고춧가루를 사용한 흔적이 없고, 1765년에 쓰여진 문헌에서야 김치에 고춧가루를 사용했다는 요리법을 발견한 수 있다. 지금과 같은 우리 김치의 형태가 시작한 것은 외래 채소들, 특히 배추가 도입 재배되어 이를 주재료로 사용하면서부터이다. 고추는 임진왜란 이후에 우리나라에 도입되었으나 200년이 지난 18세기에 와서야 김치양념으로 적극적으로 쓰였다. 조선후기에 고추를 조미료로써 사용하면서부터 김치의 담금이 다양해지고 이때부터 김치는 빨간색을 지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배추김치는 배추를 썰지 않고 통째로 절여 잎 사이에 소를 넣어 담그는 동절기의 김치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담가 먹는 김치이다. 절인 배추를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로 버무린 무채로 속을 넣는 김치는 지방에 따라 특색이 있다. 기후에 따라 추운 북쪽지방과 더운 남쪽지방으로 나뉘는데 북쪽은 싱거우면서 맵지 않고 남쪽은 짜고 매우며 국물없이 담근다. 중부지방은 간도 중간이고 국물도 적당하다. 북쪽에서는 소를 많이 넣지는 않지만 고운 체에 양념을 진하게 하고 하얀 배추속 사이에 드문드문 넣으며 중부지방은 무채를 넉넉히 하여 켜마다 넣고 남쪽에서는 진한 젓국과 찹쌀풀을 넣어 전체에 바르는 식이다.
김치는 또한 다양한 요리의 재료가 될 수 있다, 돼지고기와 김치를 재료로 한 김찌찌개가 가장 대표적이며, 그 외에도 두부와 곁들여도 좋으며, 김치부침개의 재료로도 활용된다. 한국인은 누구나 김치없는 식단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도 김치를 사랑한다. 이러한 김치는 한국인 뿐 아니라 세계인에게 널리 알려져 각광받고 있으며, 1998년 월드컵의 공식음식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김치는 한국의 대표음식인 동시에 세계음식으로써 널리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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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제례
한국인들은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조상의 업적을 기리고 조상들을 추모하는 의식을 예부터 간직해오고 있다.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봉행하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주관하는 종묘는 나라를 건국한 왕실과 그 조상들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로 한국인의 이러한 전통 의식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종묘제례악은 종묘에서 제사를 드릴 때 의식을 장엄하게 치르기 위하여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춤을 말한다. 종묘제례란 종묘에서 행하는 제향의식으로, 조선시대의 나라제사중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종묘대제라고도 하며,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나라에 공적이 있는 공신들의 신주를 모셔 놓은 사당으로, 사직과 더불어 국가의 근본을 상징하는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이다. 종묘 정전의 19개 신실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으며, 영녕전 16실에는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하고있다.
종묘제례악은 제례가 진행되는 동안 각각의 절차에 따라 보태평과 정대업 11곡이 서로 다른 악기로 연주된다. 정전 앞 계단 위(상월대)에서 노랫말이 없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은 등가라 하고, 계단 아래 뜰(하월대)에서 노랫말 있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은 헌가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의 등가는 창을하는 사람 한 명과 36인의 연주자들로, 헌가는 72명의 연주자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현재의 악단은 둘 다 50여명 정도의 연주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종묘제례악은 편종, 편경, 방향과 같은 타악기가 주선율이 되고, 여기에 당피리, 대금, 해금, 아쟁 등 현악기의 장식적인 선율이 부가된다. 이 위에 장구, 징, 태평소, 절고, 진고 등의 악기가 더욱 다양한 가락을 구사하고 노래가 중첩되면서 종묘제례악은 그 어떤 음악에서도 느끼기 어려운 중후함과 화려함을 전해준다.
종묘제례는 조선 세종때(1418-1450) 궁중희례연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보태평과 정대업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세조 10년(1464) 제례에 필요한 악곡이 첨가되면서 종묘제례악으로 정식 채택되었다. 종묘제례악은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일시적으로 약화되었으나 광해군때 점차 복구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보태평과 정대업의 간결하고 힘찬 노래는 위대한 국가를 세우고 발전시킨 왕의 덕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종묘제례악이 연주되는 동안 문치와 무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용인 문무와 무무가 곁들여 진다. 문무는 역대 선왕들의 문덕을 기리는 춤으로 보태평지악에 맞추어 왼손에는 피리종류인 약을 오른손에는 깃털을 단 적을 들고, 무무는 선왕들의 무공을 칭송하는 춤으로 정대업지악에 맞추어 나무로 만든 칼과 창, 활과 화살을 들었다.
종묘제례는 제사를 지내는 예법과 예절에 있어서 모범이 되는 의식이기 때문에 제례는 매우 엄격하고 장엄하게 진행된다. 종묘제례의 절차는 신을 맞이하는 절차, 신이 즐기도록 하는 절차, 신을 보내드리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절차를 보면 선행절차, 취위(제사가 시작하기 전에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됨), 영신(조상신을 맞이함), 신관례(왕이 제실까지 가서 향을 피워 신을 맞아들임), 진찬(음식과 고기를 드림), 초헌례(초헌관이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문을 읽음), 아헌례(신에게 둘째 술잔을 올림), 종헌례(마지막 술잔을 올림), 음복례(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철변두(제상에 놓인 고기나 과일을 거둠), 송신(조상신을 보냄), 망료(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를 태움), 제후처리의 순서로 진행된다.
종묘제례는 왕실에서 거행되는 장엄한 국가제사이며, 임금이 친히 받드는 존엄한 길례였다. 유교사회에서는 길례, 흉례, 군례, 빈례, 가례의 다섯 의례 중 길례인 제사를 으뜸으로 여겼으며, 이를 '효' 실천의 근본으로 삼았다. 유교가 국가의 근본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도 조상에 대한 숭배를 인간의 도리이자 나라를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법도로 여겨 제사를 특히 중시하였으며, 예로부터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나라를 건국하고 번영시킨 왕과 왕실의 조상과 국가 발전에 공헌한 문무대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다.
종묘제례는 크게 정시제와 임시제로 나뉘며, 계절에 따라 햇과일이나 곡식을 올리는 천신제도 있었다. 정시제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첫달인 1월? 4월?7월?10월과 납일(12월에 날을 잡아 지내는 섣달제사)에 지냈으며, 임시제는 나라에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을 때마다 지냈다. 종묘제례는 해방이후 한때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1969년부터 전주리씨대동종약원이 행사를 주관하여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봉행하였으며 2003년 부터는 5월 넷째 일요일에 봉행하고 있다. 종묘제례는 최고의 품격을 갖추고 유교절차에 따라 거행되는 왕실의례이며, 이를 통해 동양의 기본이념인 '효'를 국가차원에서 실천함으로써 민족공동체의 유대감과 질서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와 함께 종묘라는 조형적인 건축공간에서 진행되는 종묘제례의 장엄하고 정제된 아름다움은 자연과 어우러진 동양적 종합예술의 정수이며, 5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우리의 소중한 정신적 문화유산이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와 제1호로 지정되어 보존, 전승되고 있으며, 2001년 5월 18일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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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현재 전세계에서 널리 보급되어 있는 태권도는 한국 고유의 전통 스포츠이다. 태권도는 주로 손과 발을 많이 사용하며, 육체 뿐만 아니라 정신의 수양도 함께 강조하는 격투기다.
오늘날의 태권도와 비슷한 무예의 발자취는 부족국가 시대부터 발견되는데, 영도, 무천, 동맹과 같은 종교적인 고대 행사에서부터 고대 한국인들은 육체적 수양을 위한 훈련을 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러한 것에서 부터 태권도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태권도가 전통 격투기로서의 확고한 위상을 갖추게 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고구려의 유물인 남만주 지역에 존재하는 무용총 벽화에는 태권도의 겨루기를 하고 있는 두 젊은이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신라시대에 이르러 태권도는 화랑제도에 의해 더욱 발달될 수 있었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신라의 원동력은 바로 화랑도에 있었다. 화랑도는 택견이라는 무예를 익혔으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태권도가 발전되었고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택견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으며 무예로서 뿐만아니라 구체적인 규칙을 가진 스포츠로서 행해졌다. 의종때의 문헌에 의하면 고려의 장수인 이의민이 택견을 통해 자신을 단련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으며, 또한 최충헌은 연회를 배풀어 중방의 장수들로 하여금 택견을 겨루게 하였다는 기록도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태권도는 국민적인 무술과 스포츠, 레크리에이션 활동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뿌리를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체력 단련, 군사 훈련 등에 관한 관심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태조는 국교였던 불교를 유교로 바뀌었고, 따라서 지배 계층의 인생관 및 정치, 문화관까지 모두 유교적으로 바뀌게 되어 당시의 태권도는 인기를 잃었으며 당연히 그 기술은 퇴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겪으면서 격투기를 장려하기 위하여 훈련도감이라는 기관이 세워지게 되면서 다시 고유의 무술을 장려하게 되었다.
일제침략기에는 군사 훈련, 집단 스포츠, 무예 또는 기타 모든 문화 활동이 엄격히 규제, 탄압되었다. 그러나 1945년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자 태권도의 발전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대다수의 뜻있는 사범들이 일제하에서 파생된 다양한 형태의 한국 무예를 개선, 단일화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즉 외세의 영향으로 변질된 무술들의 난립을 우리의 전통적인 한국형 맨손격투기로 재정립, 통일시켜 국가적인 스포츠로 발전시키자는 데에 의견을 수렴하게 되었던 것이다. 62년 6월 태권도 협회는 대한체육회에 가입하고, 1971년 태권도는 무도 스포츠로서 그 가치와 우월성을 인정받아 우리나라의 국기로 지정되었다. 그런 가운데1972년 국기원의 개관은 한국 태권도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았다. 현재 세계 태권도 연맹의 가입국은 153개국에 이르며 3000명의 사범을 전 세계에 파견하여 5천만이상의 수련자들을 길러내고 있다. 한국의 전통 무술인 태권도는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시범 종목으로서 첫 선을 보였으며,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태권도의 연마기술은 기본동작, 품새, 겨루기, 대련, 호신술로 구분된다. 태권도의 경기는 몸무게에 따른 체급의 구별이 있으며, 시간은 3분 3회전, 휴식은 각 회 사이 1분이다. 경기장은 목재 또는 탄력이 있는 정사각형매트이다. 경기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머리보호대를 비롯해 도복 위에 몸통보호대, 샅보대, 그리고 팔?다리보호대 등을 착용한다. 심판원은 주심 1명, 부심 4명, 배심 2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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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와 석굴암
신라왕조( 57. B. C-A. D935)의 수도였던 경주시에서 남서쪽으로 12km떨어진 곳에 위치한 불국사는 한국에서 아름답고도 큰 절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토함산의 경사진 곳에 자리한 불국사는 심오한 환경과 인간이 만든 조형물과의 조화를 잘 표현한 예술가의 혼이 깃들여 있는 건축물이다.
불국사의 기원은 신라의 23대 왕이 여왕에게 하사한 사찰에서 비록되며, 이것은 왕국의 번영과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를 목적으로 건축된 절이었다.
이것을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 때의 제상이던 김대성이 부처님의 이상적인 피안의 나라를 천명하며 재건축에 들어가 서기 774년 신라 혜공왕때 완공시켰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불국사이다. 불국사의 건축은 두 개로 나누어져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청운교, 백운교, 자하문, 범영루, 자경루, 다보탑과 석가탑, 무설전 등이 있는 곳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안양문 등이 있는 곳이다.
불국사 전면에서 바라볼때 장대하고 독특한 석조구조는 창건당시의 유물이고 그 위의 목조건물은 소실되어 18세기에 중창한 것이며, 회랑은 196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불국사의 석조 구조는 길고 짧은 장대석, 아치석, 둥글게 조출된 기둥석, 난간석 등 잘 다듬은 다양한 형태의 석재로 화려하게 구성되었는데 특히 연화교와 칠보교의 돌기둥과 둥근 돌난간은 그 정교함, 장엄함과 부드러움 때문에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대웅전 앞마당의 뜰에는 두 개의 아름다운 탑이 자리하고 있다. 756년에 만들어진 석가탑과 다보탑이 그 것인데, 높이 8. 3m의 삼층석탑인 석가탑은 각 부분의 비례와 전체의 균형이 알맞아 간결하고 장중한 멋이 있으며, 높이 10. 5m의 다보탑은 정사각형 기단위에 여러가지 정교하게 다듬은 석재를 목재건축처럼 짜맞추었는데 복잡하고 화려한 장엄미, 독특한 구조와 독창적인 표현법은 예술성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불국사위 뒤쪽에 위치한 석굴암과 그 안에 위치한 불상은 신라시대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며,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인도의 것과 흡사하나, 동굴에 조각한 것이 아니라 750m의 해수면의 산위에360여 개의 넓적한 화강암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천체를 상징하는 둥근 공간에 이르면 한가운데에 높이 3. 5m의 부드러운 모습을 지닌 석가모니 대불이 동해를 향해 앉아 있다. 특히 주실내에 봉안되어 있는 굽타양식의 본존불 석가여래불은 고요하고 결가부좌한 모습, 가늘게 뜬 눈, 온화한 눈썹, 미간에 서려있는 슬기로움, 금방이라도 말할 듯한 입과, 코, 길게 늘어진 귀 등 모든 것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숭고한 마음을 자아내도록 조성된 것으로서 세계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미를 대표하고 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1995년 유네스코에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해인사장경판전과 종묘 역시 세계문화유산의 목록에 올려져 있다.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프로그램은 유산의 복구 및 보호 활동 등을 통하여 보편적 인류 유산의 파괴를 근본적으로 방지하고, 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의 보호를 위한 국제적 협력 및 각 나라별 유산 보호활동을 고무하기 위한 것으로써, 세계문화유산 위원회가 석굴암과 불국사의 역사, 과학, 예술적 관점에서 세계적 가치를 비로소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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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예술가들
전세계의 미디어들은 한국 골프 돌풍을 몰고온 골프 스타 박세리나 미국에서 투수로 활약하고 있는 박찬호를 대서특필하고 있다. 또한 세계 스포츠팬들의 이목 역시 그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세계 무대에서 기여하고 있는 분야를 굳이 꼽으라면, 음악과 미술을 비롯한 문화계에서의 활약이라 할 수 있겠다. 바이올린 연주가인 장영주는 클래식 음악계의 신이내린 음악 천사사는 칭송을 받고 있는 뛰어난 연주가 중의 하나이다. 장영주는 이미 8살의 어린나이에 음악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세계적인 지휘자 주빈 메타 주재의 오디션을 통해 바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였다. 데뷔이후 장영주는 아시아, 유럽, 미국등을 순회하며 공연을 해오고 있으며 그 때마다 세계의 거장 지휘자의 바통아래서 유명 오케스트라들과 협연을 하고 있다. 장영주는 빈번한 TV을 통한 협연 중계와 인터뷰, 그리고 앨범을 통해 널리 알려져 전 세계의 팬들에 의해 사랑받고 있다.
그녀의 첫번째 앨범인 'Debut'에서 그녀는 사라사테, 파가니니, 엘가, 프로코피에프 등 대가의 소품들을 선보였는데, 이 앨범을 녹음할 당시 장영주의 나이는 9세였고, 1/4 사이즈의 바이올린을 연주해 녹음을 했다. 이 앨범은 1992년 대단한 인기를 모았고 단숨에 빌보드 차트의 클래식 분야 1위를 차지했다. 그녀의 최근 앨범으로는 1998년 발매된 것이 있다. 장영주는 1993년 그라모폰 상 중 "올해의 젊은 음악가" 부문을 수상했고, 같은 해 독일의 "에코 음반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1993년에 로열필의 음악데뷔상, 1994년 국제고전음악상의 "올해의 신인음악가" 부문을 수여받았다. 한국에서는 1991년 한국의 최고음악가들에세 수여하는 난파상을, 1992년에는 최연소 에버리피셔장학금 수상자가 되었다. 또다른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는 정경화이다. 그녀는 25년을 넘게 꾸준히 국제무대에서 활동해 왔고, 최고의 공연을 하는 연주자로 찬사받아 왔다. 현재 영국 런던에서 가족과 거주하고 있으며, 런던의 선데이타임즈지는 그녀을 영국문화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문화인사라고 소개하고 있다. 12세때인 음악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아드 예비학교에 입학했고 65년 리벤트리트 콩쿠르에서 1위에 입상하며 화려한 음악인생을 시작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2년뒤인 67년 리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우승, 정상의 연주가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그동안 아시아, 유럽, 북미를 비롯한 세계 무대를 돌며 한해 120회 이상의 공연을 펼쳐왔으나, 최근에는 가족과의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 공연을 한해 60회로 제한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 발매된 여러 음반이 골고루 사랑받고 있으며, 음반으로 그라모판 상등 여러 주요상을 획득한 바 있다. 첼리스트인 정명화는 피아니스트이자 세계적인 지휘자인 정명훈, 자매인 정경화와 함께 공연하며 정트리오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정트리오는 유엔 마약대사로 임명되는 영광을 안기도 하였다. 줄리아드를 졸업하고 1971년 제네바 국제콩쿨에서 첼로부문 1위에 입상하여 런던로얄필, 베를린 라디오 필등의 세계적인 오케스틓라와 협연하며 연주활동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을 맡아 세계적인 지휘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정명훈은 7살의 어린 나이에 피아니스트로서 서울시향과의 협연으로 데뷔하였다. 뉴욕 매네스 음악학교에사 피아노를 공부했으며, 1974년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피아노부분 2위에 입상한후1978 미국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지휘를 공부하였다. 이후 지휘자로서의 변신을 시도한 정명훈씨는 78년 LA필의 부지휘자로부터 베를린필, 뮌헨필, 암스테르담필, 런던필, 파리오케스트라의 객원지휘자,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이탈리아 피렌체오케스트라 수석 객원지휘자에 이르기까지 지휘자로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89년에는 프랑스의 자랑이자 세계 정상의 오페라단인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단 음악총감독 겸 상임지휘자가 됨으로써 세계 정상급의 오페라단을 지휘하게 된 첫번째 한국인으로 기록됐다. 1995년 유네스코에서는 그를 올해의 인물로 지정하였고, 1996년음악 분야에서의 세계적인 공헌이 인정되어 대한민국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세계적인 지휘자로 한국을 대표해 온 음악가 정명훈씨는 동양인이라는 불리한 입지를 극복하고 세계정상의 오페라단 상임지휘자를 지내는 등 해외에서 활발한 음악활동을 펼쳐왔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명예대사로 임명받아 음악을 통한 세계인의 협력과 화합을 위해 힘쓰고 있기도 하다.
소프라노 조수미는 세계적인 지휘자 카라얀에 의해 신이내린 목소리로 찬사받으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카라얀의 지휘로 순회하며 전세계의 오페라 무대를 수놓았다. 그동안 많은 음반을 발매했으며, 1993년 음반은 이태리 비평가들에 의해 올해의 최고의 소프라노라로 지목되는 영광을 가져왔다. 1983년 이태리로 가 로마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에서 공부했고, 5년의 학업코스를 2년만에 마쳤다. 86년 이탈리아 베로나 콩쿠르와 바르셀로나 콩쿠르등 4개의 주요 이태리 콩쿠르에서 1위에 입상했으며, 그녀는 최근 유럽의 예술가곡과 한국가곡과 민요, 뮤지컬에도 진출해 레퍼토리를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세계음악계에 잘 알려져 있는 윤이상( 1917-1995)은 남북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상황을 뛰어넘었으며 동시에 동양과 서양음악을 잘 조화시켰다는 평을 받는 작곡가이다. 비록 고국이 아닌 외국에서 반평생을 넘게 보냈지만, 그는 유럽의 현대음악과 한국음악 및 동양음악을 융합하는 작곡세계를 펼쳐나갔다. 그는 한국음악에 대한 연상작용을 통해 작곡하기도 했는데, 그의 한국음악 관련성은 한국음악의 조성이나 리듬 등 금방 알아챌 수 있는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음향적으로 이루어졌다. 음향적으로 착상된 그의 한국음악관련성은 우선 쉽게 눈에 띄는 것으로는 한국의 악기의 음색을 서양악기로 옮기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오보에는 피리를, 하프는 가야금을, 플루트는 대금을, 바이올린은 해금을 대신하여 소리내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1935년 부터 1943년까지 첼로, 음악이론, 작곡을 공부했고 이후에 한국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1956-1957년 동안은 프랑스로 건너가 빠리 음악원에서, 이후 1958-1959년을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이후에 독일에 정착하였다. 그후 유럽의 여러 음악제에서 참여하여 이름이 알려졌고 1969-70년에는 하노버 음악대학에서 강사로, 1972년부터는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명예교수로, 1977-87년에는 베를린 음악대학의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1992년 75세을 맞은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독일, 스위스, 일본, 네덜란드, 북한 등의 주요 도시들에서는 그가 작곡한 음악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한국인이 존경하는 또 다른 작곡가는 대한민국의 국가인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1905-1965)이다. 해외에서는 반만년 역사를 간진해오며 그 동안 한국인들이 격었던 고난과 영광을 서사시로 표현한 한국환상곡으로 잘 알려져있을 것이다. 그의 곡은 1938년 아일랜드 국립 심포니에 의해 연주되었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 첼로를 전공했다. 1930년 미국 신시내티 음악학교에서 배우며 신시내티 교향악단의 첼로 주자를 지냈고 필라델피아 심포니 클럽 보조지휘자로서 지휘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에 부다페스트의 음악학교에 입학하였고, 1937년을 즈음하여 안익태는 비엔나로 가서 R. 슈트라우스에게 지휘를 배우면서 세계적인 교향악단들을 지휘했다. 그 이후 그는 전세계 200여개 이상의 오케스트라를 돌며 초청 지휘자로도 활약하였다 김덕수가 이끄는 사물놀이패는 농악가락 연주에 기반을 둔 것으로 꽹과리에, 장고, 북, 징으로 구성된다. 이 사물놀이패는 사물놀이를 통해 우리 선조들의 음악의 우수성을 대변하고 있고, 단순한 민속음악이나 전통음악의 연주단체가 아닌 창조적인 뉴뮤직 연주단체로서의 면모를 세계에 과시하고 있다.
1978년 창단공연이 이후, 82년 미국 세계 타악인대회에서 세계의 모든 타악인들을 놀라게 만들었던 이들은 이들의 연주에 감명을 받은 재즈 아티스트들과 'SXL'이라는 연주 단체를 조직하여 세계적 재즈 페스티발에 초청되었으며 Chick Corea, Herbie Hancock, Miles Davis Group, Steve Gadd 등의 일류 아티스트들과 함께 공연하는 성과를 얻었다. 그 결과 이제 사물놀이는 미국, 일본, 독일 등지의 재즈 페스티발에서 사물놀이는 단골 초청 대상이 되었으며 세계적인 문화축제에서 빼놓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이 낳은 비디오아트의 대부인 백남준은 놀랍게도 동경대학에 입학하여 음악, 미술사, 미학을 두루 공부했고, 독일 유학을 통해 작곡을 공부했다. 백남준은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면서 동양의 선사상에 기반을 둔 케이지의 영향으로 서구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TV의 매스 미디어에 대한 초기 예술적 탐구는 1963년 독일 부퍼탈의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있었던 첫 개인전 '음악전람회-전자 텔레비전'에서 이루어 졌다. 비디오 아트의 탄생을 알리는 놀랄만한 이 첫 번째 전시를 통해 백남준은 작곡가이자 행위 미술가에서 새로운 미술 형식의 발명가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후에 그는 새로 개발된 비디오 매체를 통해 정보 소통 구조에 대한 예술적 대안을 모색하는 등, 새로운 미디어 아트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실천은 계속되었고, 텔레비전과 움직이는 영상에서 미학적 담론을 제기하는 새로운 아티스트세대의 중심인물이 된다. 그는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의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파리, 취리히, 바젤 등지에서 세계적인 작품전을 열게 된다. 1993년에는 세계3대 비엔날레 중 하나로 꼽히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하여 세계 최고의 예술가로 인정받으며, 계속적인 활발한 작품 활동을 통해 독일의 경제월간지 '캐피탈'지에서 해마다 서구미술계 주요 작가로 매년 선정됨으로써 세계적 예술가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하게 된다. 음악가는 아니지만 이문열은 연속되는 화제의 베스트셀러 작품들 출간에 의해 최근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소설가이다. 1994년 출간된 그의 소설에 기반한 뮤지컬 마지막 황후가 1997년 뉴욕의 링컨센터에서 막을 올린 이후 그의 작품들은 세계의 여러 언어로 번안되어 해외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또다른 세계의 이목을 끌고있는 작가로는 서정주를 들 수 있다. 그의 시는 미국, 독일, 스페인, 프랑스 등지에서 출판되었다. 지금까지 열거한 예술가들은 한국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는데 공헌을 한 예술가들 중의 일부일 뿐이다. 한국 예술가들의 독창성과 끊임없는 실험정신, 뛰어난 업적들, 바로 이것이 한국을 이끌어가는 자존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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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전통악기
대략 60개의 전통악기가 세대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전승되었다. 12현의 가야금과 6현의 거문고는 6세기 이전부터 존재해온 가장 오래된 한국전통악기이다. 이 외에도 통일신하의 3현3죽, 조선시대의 향악기 그리고 여러가지 악기들이 현재까지 연주되고 있다. 한국전통악기는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로 구분하는 분류법을 사용한 한다. 음악의 계통에 따라 분류하는 방법으로는 아악, 당악, 향악 등 음악의 계통에 따라 분류하던 방법이 쓰이기도 한다.
현악기
1. 아악 - 가야금: 가야금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현악기이다. 12줄의 실이 머리 쪽의 12담괘와 양이두에 줄을 감아 만들었고 이 악기는 가야국에서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신라 진흥왕때에 우륵에 의해 신라에서 크게 발전하였다고 한다. 가야금에는 그 쓰임에 따라 비교적 근세에 와서 만들어진 산조가야금과 신라때부터 전하는 보다 고형의 풍류가야금의 두가지가 있다. 풍류가야금은 산조가야금보다 크기가 크고 줄과 줄 사이가 넓어서 영산회상같은 정악의 연주에 적합한 반면 산조가야금은 크기가 보다 작고 현과 현사이가 좁아 산조, 시나위 등과 같은 빠른 민속음악을 연주하기에 적합하다.
- 거문고: 거문고는 가야금과 함께 전통악기 중 가장 중요한 악기의 하나로 취급되어온 현악기이다. 6개의 줄이 16개의 괘에 얹혀져 있고 제1현과 5현, 6현은 가야금과 같이 기러기발 모양의 안족위에 얹혀져 있다. 거문고는 그 소리가 그윽하고 은은하여 예로부터 선비들이 애호하던 악기로 영산회상, 가곡 등과 같은 정악은 물론 산조 같은 민속음악에까지 널리 쓰이고 있다.
2. 당악 - 해금: 해금은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이 악기는 넓은 음역을 가진데다가 여러가지 음악적 효과를 낼 수 있는 풍부한 표현력 덕분에 정악과 민속악에 매우 폭넓게 쓰인다. 중현과 유현이라는 두 줄 사이에 활대를 끼워넣고 이를 문질러서 연주하는 찰현악기이다.
- 아쟁: 아쟁은 7현을 가진 정악아쟁, 요즈음은 음역확대를 위하여 15현의 대쟁 아쟁도, 산조나 시나위 음악을 연주하기에 적합한 보다 작은 크기의 8현의 산조아쟁이 있다. 대쟁은 현재 사용되지 않으나 과거 중국음악을 연주하던 조선시대에는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3. 향악 - 금: 금은 줄의 수가 모두 일곱이고 울림통 위에 자개로 만든 13개의 '휘가 박혀있는 데 휘는 붙어 있는 위치에 따라 손으로 현을 짚으면서 원하는 음을 찾을 수 있도록 고안된 일종의 좌표인 셈이다. 고려 때부터 우리나라에서 쓰여지기 시작한 이 악기는 현재 문묘제례악에 편성하여 사용하난 실제적으로 연주하지는 않고 다만 편성될 뿐이다. - 슬: 슬은 모두 25현이다. 슬 역시 금의 경우와 같이 <무묘제례악>에 편성만 될 뿐 그 주법을 잃어 버렸다.
4. 기타 - 양금: 양금은 음 높이가 같은 네 가닥짜리 구리 철사 14벌이 두 괘에 의하여 울림통 위에 좌, 우, 중앙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대쪽으로 만든 채로 쳐서 소리를 낸다. 18세기 때부터 사용된 이 악기는 영산회상과 가곡 반주에 많이 쓰인다.
관악기
1. 아악 - 대금: 대금은 중금, 소금고 더불어 신라 말기의 삼죽 가운데 하나이다. 삼죽 가운데 가장 크기가 큰 악기로 역사가 오래된 악기 가운데 하나이다. 예부터 대금은 관현 합주를 할 때 모든 악기의 음 높이를 정하는 표준 악기로 구실을 해왔다. - 소금: 신라 삼죽 중 가장 작은 악기이다. 높은 음고를 갖고 있어 젓대보다 한옥타브가 높다. 소금은 조선시대에 가장 활발히 사용되어 왔고 시대에따라 모양이 많아 바뀌었다.
- 향피리: 7개의 공이있고 영상회상과 같은 정악을 연주할 주선율의 구실을 하는 중추적인 악기이다. - 초적: 초적은 서민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던 것으로 풀의 줄기날로 만들어진 것이다.
2 당악 - 당피리: 당피리는 향피리보다는 크기가 작지만 관은 크다. 이 8공의 피리가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다. - 퉁소: 퉁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지공이 뒤에 1개, 앞에 5개가 있고, 청공이 없는 것과 또 하나는지공이 뒤에 1개, 앞에 4개가 있다. 전자는 성악반주 등에 사용되며후자는 민요나 시나위 등의 반주에 쓰인다. - 태평소: 14세기 후반에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다. 매구북이라고도 한다. 8개의 공이 있고 농악과 민속무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3. 향악 - 생,유,화: 3개의 피리로 엮어진 것은 같으나 관의 수가 틀리다. 생은 17개, 유는 36개 화는 13개의 관를 가지고 있다. 현재는 생만이 중국음악이나 전통음악을 연주할 때 쓰이고 있다. - 소: 12개, 16개 24개의 의 죽관을 가진 3종류가 있다. 지금은 16개의 관을 가진 소만 문묘제례악에 쓰인다 - 훈: 저울추 모양의 관악기로 --지은 대금,중금,소금, 당적과 함께 횡적에 속하는 죽관 악기이다. 지금도 문묘제례악에 쓰인다 - 약: 약은 지공이 3개밖에 없다. 이 악기는 지금도 문묘제례악의 연주에 쓰이고 있다. - 적: 퉁소보다 작고 지공이 뒤에 1개,앞에 5개, 모두 6개가 있고 아래 끝에 2개의 허공(虛孔)이 있다. 지금도 문묘제례악에 쓰인다.
4. 기타 - 단소: 지공이 뒤에 1개, 앞에 4개가 있다. 조선왕조 후기에 생긴 듯하며 영산회상과 같은 관현 합주에 사용되고 관현합주 외에 독주에도 얘용된다. - 세피리: 향피리와 생김새는 동일하나 크기가 조금 작다. 또한 제도와 음역도 향피리와 같다. 이 악기는 가곡, 가사, 시조 등의 반주용으로 쓰인다. 또 비교적 음량이 작은 거문고, 양금과 같은 현악기가 중심되는 줄풍류에 편성된다.
타악기
1. 아악
- 징: 쇠로 만든 금속성의 타악기로 원래 군대에서 사용되었으며 종묘제례악, 불교음악, 무속음악 그리고 농악에 이르기까지 실로 사용범위가 다양하다.
- 꽹과리: 징과 비슷하나 크기가 작다. 땡땡한 음색에 높은 소리가 나고 농악이나 무속음악 등에 쓰인다. - 풍물북: 장고와는 달리 농악에 쓰인다. 양쪽 북을 구성하는 판의 재질이 같고 나무로 만는 막대기로 두드려 소리를 낸다.
- 소리북: 풍물북을 개조한 것이다. 크기는 더 작지만, 북의 머리판 가장자리에 금속테가 들어간 것이 특징이다. 판소리에 많이 쓰인다. - 풍물장고: 잡가나 농악등에 쓰이며, 양손에 각각 한개의 막대기를 북의 머리판에 두드려 소리를 낸다.
2. 당악
- 박: 여섯 개의 단단한 나무조각을 엮어서 만든 타악기이다. 한쪽 끝을 가죽 끈으로 묶여 놓았기 때문에 반대쪽을 잡고 부채를 펴는 것처럼 벌렸다가 닫으면서 치면 크고 단아한 소리가 난다. 대부분의 궁중음악에 편성되는 이 악기는 음악의 시작과 끝, 그리고 음악상의 중요한 변화가 있을때 치는데 음악을 시작할 때나 중요한 변화를 알릴 때는 한번, 끝날 때는 세번 친다. - 장고: 우리나라의 북 계통의 악기를 대표하는 매우 중요한 장단연주 타악기로 고려이전부터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몸체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으며, 중국음악과 전통음악 연주에 사용된다.
3. 향악
- 편종과 특종: 편종은 고려때 중국의 송나라에서 들어온 악기이다. 16개의 종을 가졌고 종 크기는 같으나 종의 두께가 얇으면 소리가 낮고,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그 소리가 높아진다. 종은 2단으로 된 나무틀에 각 단에 8개씩 벌려서 건다. 특종은 종이 하나이다. - 편경과 특경: 편경은 편종과 함께 사용된 돌로 만든 진귀한 악기이다. 세종 때에 편경을 제작하기 이전까지는 편경과 편종을 중국에서 들여왔다. 편경은 'ㄴ'자 모양으로 경돌을 깎아서 만들며, 경돌들을 음률순으로 배열하거 특경은 경돌이 하나이다.
- 축: 고려때부터 우리나라에서 사용해온 타악기의 하나이다.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가 같은 제례음악에서 탁탁쳐서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데 주로 쓰이는 악기이다. - 어: 축과 함께 고려때부터 사용해온 타악기의 일종이다.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모양을 한 나무조각의 등부분에 27개의 톱니를 길게 깎아놓고 호랑이의 머리부분과 톱니부분을 대나무 채로 쳐서 소리낸다. 어는 축과 함께 제례음악에 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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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
단청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왔고, 예전부터 발달되온 그 숙련된 기술들은 지금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단청은 아름다움과 위엄을 전달하기 위해 빌딩이나 물건들 위에 사용돼온 한국식 장식용 채색이며, 다양한 문양와 그림으로 나타낸다. 빨강, 파랑, 노랑, 검정, 그리고 흰색의 다섯가지 색이 기본적으로 사용된다. 장식용 기능 외에도, 단청은 건물의 생명연장, 재질의 단점보완, 그리고 건물이나 물체의 계급을 강조하는 등 실용적인 면에서도 사용되었다. 또한 단청은 일정한 전통에 부합함과 그 전통 안에서의 다양성을 동시에 제공하기도 했다. 대개 단청은 목조건물들에 그려진 그림을 가리긴다. 하지만 석조건물, 조형물, 공예품 등 에도 단청이 발견되기도 한다. 현존하는 고대건축유산이 없기 때문에, 한국 단청의 역사는 삼국시대 (57BC-AD668)의 고분에서 발견된 벽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특히, 고구려제국(37BC-AD668)의 고분벽화에는 다양한 색깔의 문양들이 남아있어, 당시 단청의 생김새와 건축상의 특징들을 알아 볼 수 있다. 벽화들과 함께 고분에서 발견된 그림들 역시 단청의 요소들을 보여준다. 삼국시대의 역사자료를 보면, 고대신라(57BC-AD668)에는 성골(왕이 될만한 자격을 갖춘 왕가의 사람)계급을 지닌 귀족만이 단청의 다섯가지 색을 쓸 수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단청으로 꾸며진 그 시대의 건물은 현존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발견된 건축흔적의 증거들만이 당시의 단청이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웠다는 것을 추론해준다.
12세기의 중국인학자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인들은 궁궐을 짓는 것을 즐겼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왕이 머무르던 궁궐의 구조는 둥근 기둥들과 네모난 두공으로 만들어져 있고, 지붕의 끝은 다채롭게 장식되어 있으며, 연이은 대마루는 하늘로 날아갈 듯 했다고 전한다. 이를 보면 12세기에 존재하던 고려왕조(918-1392)의 궁궐이 얼마나 크고 위엄있었는지 알수 있다. 또한 서긍의 책에는 단청의 호화로움에 대해 “난간은 붉은 칠을 하고 동화(銅花)로서 장식하였고, 단청의 문양과 채색이 매우 힘차고 아름다워서 다른 전각들보다 뛰어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존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건물은 밝고 부드러운 색을 띄고 있어 삼국시대의 단청기술이 고려시대에 이르러 더욱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시대(1392-1910)에는 한국의 단청은 더욱 개발되고 다양화 되었는데, 문양들과 구성형식이 고도로 세련되고 빈틈없이 짜여져 색채의 사용이 매우 표현적이며 으리으리할 정도로 다채롭고 명랑해졌다. 따라서 의장문양와 색채의 화려함이 더해져 더욱 다양한 단청이 선보여졌다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청의 문양들은 구조적 특징과 장식의 구성속 위치에 맞춰 일관되게 모루초, 별지화, 비단문양, 단동문양 이 네가지로 분류된다. 모루초는 머리초라고도 하며 평방,창방,도리,대들보 등 부재의 양쪽 끝과 기둥머리 서까래 및 부연 끝 등 부재의 귀퉁이에 놓는 문양이다. 모루초의 문양는 시대와 건물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녹화문양?연꽃문양?석류문양?방울문양를 순서에 따라 배열한 다음 휘문양를 붙인 것이 기본형식이다. 휘는 고려시대의 단청에서는 나타나지 않았고, 18∼19세기에 이르러 매우 다양한 형태를 띠고 발전하여 우리 나라단청의 특징을 잘 이룬다. 한 건물에서 모루초는 동일한 부재의 모든 부분들에 한 본을 가지고 되풀이되므로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장식에서도 눈에 가장 잘 띈다. 그리고 모루초는 어떤 건물의 단청에서나 거의 빠짐없이 적용되는 기본문양이다.
별지화는 창방?평방?도리?대들보 등 큰 부재의 양끝에 모루초를 놓고 중간 공백부분에다 회화적인 수법으로 그린 장식화를 말한다. 별지화는 건물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데 궁궐건축에서는 쓰이지 않고 주로 사찰건축에 사용된다. 별지화의 내용은 용,기린,말,사자,학 등 상서로운 동물과 사군자나 불교경전에 나오는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사찰건축의 별지화 중에는 경전과 관계없는 세태풍속을 그린 건물들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비단문양는 진귀하고 미려한 물체를 도안하거나 기하학적인 도안을 그려 다채롭게 채색한 것이며 부재의 각 부분에 쓰이고, 특히 불사의 단청에 많이 볼 수 있다. 단독문양는 화초 또는 동물을 단독으로 도안화하거나 기하문양 기타 문양를 한 구획 안에 단독으로 넣는 것이다. 우물반자의 격간?궁창(문의 밑에 댄 널),국리대(착고) 또는 개판의 일부에 주로 쓰이며 건축부재의 부리(마구리)에 쓰이기도 한다.
단청색조는 시대성을 반영하여, 고려시대에는 외광을 강하게 받는 부재인 기둥과 같은 곳에는 붉은색을 칠하였고, 외광을 받지 않는 추녀나 천장부분에는 녹청색을 칠함으로써 장식의 명도를 높여 상록하단의 원칙을 지켰다. 조선시대의 경우는 색조를 주로 장단,주홍,양청,황,양록,석간주 등을 많이 사용하였고, 이들 색채들을 흰색과 먹색 및 기타 색깔과 배합하여 여러 가지 다른 색깔을 만들어 썼는데, 색계열과 색계열 사이에는 하나하나 백분으로 구획선을 그어 문양의 윤곽과 색조를 두드러지게 하였다. 또한 단청의 색조화는 주로 이색과 보색을 위주로 하였으며,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을 서로 엇바꾸어 색의 층단을 구성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단청색조의 특징을 꼽는다면, 건물 내외의 장식에 따라 외부 단청은 밝은색계통의 등황색을 현저하게 증가시켜 장식의 명도를 높였고, 내부 단청은 광선의 명도가 낮은 것을 고려해 주로 녹청색으로 처리한 점 등이다. 전통적으로 단청에 쓰여진 전형적 안료는 어두운 청색이나 곤색으로, 이들 안료들의 발랄함, 내구성, 그리고 상대적 청명함 때문에 선호되었다. 또한, 점토로부터 생산된 주홍색 안료는 중국 서부에서 수입되어 왔으므로 높이 평가되었다.
단청의 그림은 단청장이고 불리는 숙련된 장인이 그렸다. 단청장은 여러 이름으로 언급되었는데, 화사, 화공, 가칠장, 단청이 그것이다. 단청장이 수도승일때에는 금어나 화승이라고도 불리었다. 궁전의 단청은 경공장이 속해있는 선공감에서 맡아 수행하였다. 선공감에는 도채공 이라는 단청 화공이 있어 궁전을 비롯한 객사, 관아, 사묘, 누정 등의 단청을 도맡아 색칠하였다. 사찰의 단청은 사찰대로 자기들의 단청 화공 집단을 가지고 있었고 큰 절의 경우는 단청공이 한명씩 있었다. 그러나 사찰 단청공은 단청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찰 안에서 필요한 불상이나 불화, 조각 등의 제작도 겸하였다. 이처럼 궁전 단청과 사찰 단청은 화원들이 구분 되었지만 단청을 시공하는 기술적인 공정이나 문양의 체계, 색조는 서로 통하였다.
단청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사주가 단청 화원들 가운데서 편수를 선출한다. 선출된 편수는 해당 건물의 단청 형식을 선정하여 문양를 선택하고 색을 배합하여 시공 과정을 지도하며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 선택한 문양를 해당 부재면에 옮기기 위해서 한 개씩의 도본을 만드는데 이 과정을 출초라고 한다. 각 부재들에 해당하는 도본을 하나씩 만들고 이것을 반복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단청은 체계적이고 규칙적이 되므로 장식의 산만성도 제거되고 시공의 신속성도 보장할 수 있다. 초지 문양를 건물에 올리기 위해서는 우선 전체 부재면에 청록색 흙을 바른다. 청토를 바른 다음 도본을 해당한 부재면에 대고 아연화를 넣은 분(粉) 주머니를 가지고 두드리면 송곳 구멍으로 분가루가 나와 문양가 박히게 된다. 이 문양를 찍어내는 작업을 타초(打草)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타분 작업이 끝나면 그 본에 따라 채색을 입히는 일이 시작된다. 채색 작업에서는 단청 화공들이 각기 한 가지의 색을 분담하게 되는데 채색 작업에서 인원은 최소 한도로 출초한 대본에 나타난 색깔의 수에 따라서 배치하면 된다. 이런 식의 체계적인 과정을 통해 보다 능률적이고 신속한 작업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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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구
장신구란 장식을 목적으로 사용되는 다양한 물건들을 말한다. 한국의 장신구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것 뿐만 아니라 행운을 가져다주고 악운을 몰아내는 용도로 쓰였다. 장신구는 또한 사용자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기도 했다. 장신구의 고대시대부터 사용되어져 왔다. 동물의 뼈들로 만들어진 관모양의 비취와 목걸이들이 신석기 시대의 유적에서 발견되었고, 금, 은, 그리고 금빛의 청동으로 절묘하게 만들어진 삼국시대(57 B. C. ~ A. D. 668)의 장신구들도 발견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한국의 장신구들에는 머리장식 그리고 머리카락 악세사리, 목걸이, 귀걸이, 가슴 조각, 팔찌, 모자, 반지, 그리고 팬던트 등이 있다. 신라왕국의 무덤으로부터 발견된 빗은 래커칠해진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고, 빗날은 얇고 긴것이 특징이었다. 백제의 무령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머리 물림쇠는 하늘을 나는 우아한 새의 모양을 닮았으며 소용돌이치는 새의 꼬리처럼 생긴 세가닥의 긴 가지도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중국신화인 불사조가 조각된 더욱더 정교하고 우아한 머리핀들도 존재했다.
남성들의 머리에 사용되던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상투도 고려시대의 유물에서 발견이 되었다. 조선왕조에 이르러 개인적인 장신구들의 사용에 한정을 주는 국가 정책이 생겼다. 금과 은의 제한된 사용은 장신구들의 예술적 가치와 일반적인 숙련기술 가치의 악화를 초래했다. 하지만 그 결과, 금과 은을 제외한 다른 물질의 사용이 증가했다. 고귀한 신분의 여성들은 금, 은, 진주, 비취, 그리고 산호로 만들어진 막대 핀을 사용했으나, 평민들은 나무, 뿔, 니켈 합금, 그리고 놋쇠등으로 만들어진 것을 사용해야 했다. 재질 뿐만 아니라, 막대 핀의 모양도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랐다.
상류층의 여성들은 용과 불사조의 모양이 새겨진 머리핀을 사용했으나, 평민층의 여성들은 평범하거나 버섯의 형상을 한 머리핀을 사용했다. 머리핀들의 모양들 그리고 재질들은 또한 계절에 의해 달랐다. 첩지와 떨잠과 같은 의식적인 머리카락 장신구들이 소개되었고, 조선시대에는 비녀와 댕기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불사조 혹은 개구리 모양을 한 첩지는 여성들이 의식을 위한 옷을 입었을때 보다 낳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사용되어 졌다. 불사조의 모양을 한 핀은 왕비만이 사용할 수 있었고, 나머지의 여성들은 개구리 모양의 핀을 사용했다. 떨잠은 상류층의 여성들의 의식 때에 사용되어졌다.
비녀는 뾰족한 끝을 가지고 있었고, 실용적인 것들은 심지어는 귀후비개로도 사용되었다. 국화, 연, 살구꽃, 그리고 나비같은 대중적인 모양들이 조각되어졌고, 비녀의 끝은 산호, 비취, 진주, 그리고 여러가지 귀한 보석들로 장식되어졌다. 금수가 놓여진 댕기는 여성들의 머리를 받혀주는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리본들은 여러가지 모양들 그리고 크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머리 장신구들 뿐만아니라, 한국인들은 귀걸이와 같은 장신구들도 애용해왔다.
동물 뼈들이나 구부러진 비취로 만들어졌던 귀걸이들도 선사시대부터 사용되어져 왔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화려해지고 정교해져갔다. 저만큼 이른 시대에도 한국의 귀걸이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발견된 유물들이 뒷받침 해준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귀걸이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사용되어 졌다는것이 흥미로운 사실이다. 삼국시대의 귀걸이는 모양에 의해 세 종류로 구분됩다; 단일 고리 모양, 고리가 귀걸이 몸체에 붙어있는 모양, 그리고 여러개의 고리들이 섞여있는 모양이다. 귀걸이는 금, 은, 그리고 금빛의 청동으로 만들어졌고, 그중 금이 제일 대중적이었다.
고려왕조의 유물 중엔 순수한 금으로 만들어진 귀걸이도 있다. 조선시대에 있어서의 귀걸이의 사용이 그리 대중적이지 못했던 반면에, 그것들이 사용되는 방식의 주목할만한 변화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 변화에 따라 귀를 뚫지 않고도 귀걸이를 귀에 걸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국인의 목걸이 사용 역시 선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대에 사람들은 동물의 이빨, 뼈, 관형의 비취, 그리고 비취등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사용했다. 3세기부터 7세기까지, 목걸이의 사용은 현저하게 대중화가 됐다.
대중적인 물질인 금과 비취등으로 목걸이를 만들었다. 가슴 장식품들은 장식용의 목적을 위해 가슴에 입혀지는 것들이었고, 목걸이와는 길이면에서 다르다. 선사 시대에는 조개들에 구멍을 뚫어 실로 연결하는 것으로 가슴 장식구들이 만들어졌다. 신라시대에 이르러 가슴 장식품들은 더욱 더 화려해지고 정교해졌다. 특히, 금녕총에서 발견된 가슴 장식구는 아주 화려하고 아름다웠으며 무려 152개의 구슬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가슴 장식품은 금, 은, 유리 그리고 비취로 절묘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한국의 역사내내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던 장신구들 중의 하나는 바로 팔찌다. 처음의 팔찌들은 조개껍질로 만들어졌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청동, 비취, 그리고 유리와 같은 다양한 물질들을 사용해 만들게 되었다.
가락지 역시 한국의 대중적인 장신구들 중의 하나다. 선사 시대 때부터 한국인은 장식용의 목적으로 반지들을 사용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선사 시대의 유물에서 발견된 청동 접시로 만든 반지가 그 증거다. 신라시대의 무수한 은반지들도 발견되었고, 그들의 정교함은 그 시대의 뛰어난 숙련기술을 나타내준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반지는 문석과 풀빛의 원석들로 장식된 금반지 다. 조선왕조에는 팬던트와 더불어 반지가 가장 대중적인 장신구였다. 조선시대의 반지들은 금, 은, 비취, 문석, 진주, 그리고 청동을 주 재료로 만들어졌다.
궁정의 모자와 왕관등은 왕과 정부의 간부들에 의해 사용되어졌다. 그것들의 장식적인 목적 이외에도, 모자들은 사용자의 사회적 지위도 나타냈다. 사람의 지위가 더 높을수록, 모자는 더욱 더 화려했다. 삼국시대의 각 왕국들은 다양한 사회적 구조에 따른 그들만의 독특한 모자들을 만들어 냈다. 타는 듯한 불꽃의 형상을 본따 만든 금관은 고구려의 독특한 문화를 나타낸다. 백제의 가장 인상적인 왕관은 무령릉의 안쪽에서 발견되었다.
왕과 왕비에 의해 사용되어졌던 이들 왕관들은 아주 얇은 금으로 만들어 졌고 원광의 모양을 본따 만들어졌다. 신라의 유명한 왕관은 5개의 장신구들이 좁은 테두리에 붙어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앞쪽에 있는 3개의 주장신구들에는 잔가지들을 닮은 장식들이 있는데, 이것은 작은 산의 형상과 비슷하다. 고려시대의 왕관은 중국의 문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조선 중기에는 말꼬리털로 만들어진 한국만의 독특한 갓이 등장했다. 조선시대의 개인적인 장신구중엔 팬던트도 유명하다. 여성들에 의하여 겉옷이나 치마의 둘레에 걸치듯 사용되어졌던 팬던트들은 매우 대중적이었다. 팬던트의 재료로는 금, 은, 청동 그리고 비취, 문석, 다이아몬드 원석과 같은 원석등이 사용되었다.
다양한 동물들의 모양의 펜던트들이 만들어졌으며 또한 식물들을 닮은 모양의 팬던트들도 인기가 있었다. 종종 일상적 생활속의 병, 종, 모래시계등의 모양을 띈 팬던트들도 만들어졌다. 여성들이 지니고 다니던 물건 중 하나는 비수였다. 비수들은 장식용의 목적 뿐만 아니라, 자기 방어를 위하여도 사용되었다. 원통 단검 그리고 " Z " 모양, 정사각형, 혹은 8각형의 모양을 한 비수들이 이 시대에 존재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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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공예
한국인들은 몇세기에 걸친 종이공예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랜 시간동안 고품질의 토착 종이를 사용하는 것을 즐겼다. 한국의 가장 오래된 종이는 마지인데, 대마로 만들어졌다. 마지는 다음의 과정을 거쳐서 생산된다: 대마의 한 조각들 또는 모시천을 잠시 물안에 담근 후 작은 조각들로 찢는다. 숫돌안에서 이 조각들을 갈면 끈적끈적한 펄프가 생긴다. 이 펄프를 찌고 난 후, 물로 헹군 뒤 다시 갈아서 탱크 안에 놓는다. 이 원료를 프레임 위에 누르고 햇볕에 말리는 동안 하얗게 변한다. 이러한 방식의 종이 만들기는 삼국시대에 가장 대중적인 방식이었다. 삼국 중 하나였던 백제에서는, 이렇게 만들어진 종이가 4세기 후반의 역사를 기록하는데 주로 쓰였다. 고구려의 불교승이자 화가였던 담징은 610년 (고구려 연양왕 21년) 에 종이만드는 기술을 일본에 소개했다. 이렇게 이른 7세기부터 한국에서 발달된 종이 만드는 방식이 개발된것을 볼수 있다. 고려시대에 한국인들은 당나무 껍질로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고, 11세기에는 중국에 종이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인종 23년과 명정 18년 사이에 당나무가 한반도 전역에 재배되기 시작했다. 개인 제지 공업이 번성하는 사업이 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지서라는 정부 기관을 만듬으로써 당나무 재매와 제지공업을 촉진했다. 후에, 고려는 두껍고 튼튼한 종이를 만드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이 종이는 양면이 매끄럽고 맨들거렸다.
한국의 제지 기술은 날로 발달해서, 전통적인 한국의 종이인 한지의 생산에 이르렀다. 제지기술의 놀라운 발전과 함께 한국은 종이의 다방면한 쓰임에 뿌리 깊은 전통을 확립했다. 종이공예의 많은 전통품 가운데에는 옷, 찬장, 상자, 서예책상, 필통, 촛대, 커튼, 매트, 방석, 빗통, 쟁반, 뚜껑달린 병 등이 있었다. 또, 담배쌈지, 안경 케이스, 화살, 군복, 우산, 신발, 모자, 조화, 랜턴, 연 등도 대중적인 종이공예였다. 한국인들이 정확히 언제부터 가정용으로 종이를 대량 생산하게 되었는지는 알수 없다. 하지만 역사적 문서들을 보면 종이의 대중화가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것을 볼수 있다. 당시에, 한국은 제지기술을 일본에 소개했고, 많은 양의 한지를 중국에 수출했다. 흥미롭게도, 유명한 삼국유사에 한국인들이 종이로 만든 연날리기를 좋아했다고 나와있는데, 이것은 당시만해도 종이공예가 한국에선 이미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초기, 태조재위 때에는 검소를 강조하는 법령이 선언되었다. 그에 따라, 궁궐과 개인집에 있던 모든 꽃장식들을 종이로 만들어진 조화가 대신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조화는 밀랍 또는 비단 천으로 만들어졌다. 세종대왕의 재위 시절에는 조화의 사용이 불교 의식과 축제에까지 사용되었다. 종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자, 세종대왕은 제지를 위한 특별한 관청을 만들었고, 이로 인하여 종이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조선초기의 황실은 북방의 군사들에게 지갑이라고 하는 특별한 종이로 만들어진 갑옷을 공급했다. 이 갑옷은 방수뿐만 아니라 군사들을 겨울의 추위로부터도 보호했다. 더 중요한것은, 이 갑옷은 화살, 창, 칼 등의 무기를 막을 수 있는 보호막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인조시대에 지갑은 꾸준히 개선되어, 종이조각 등을 원료로 사용했다. 지갑은 또 특정한 종이로 만들어진 민간인 복장의 발명에도 일조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종이는 점점 더 넓은 폭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서, 한국의 귀족들 사이에서 자주 쓰이는 비단으로 만들어진 부채는 종이로 대신 만들어졌다. 조선 중기에 담배가 수입되기 시작하자, 종이로 만든 담배갑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에게 검약은 일상생활의 미덕이라고 생각돼 왔다. 그 이상에 맞춰, 한국인들은 종이조각들을 다시 쓸수 있는 많은 방법들을 제안해 왔다. 재활용된 종이들은 방 벽에 대기 위한 안감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끈으로 만들어서 문고리나 빨랫줄로 사용하기도 했다.
18세기 초, 한국인들은 여러 색깔로 물들인 종이 끈으로 짜서 만든 방석과 돗자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계속하여, 종이 끈으로 만든 다양한 가내용품 및 개인용품이 생겨났다. 한국 민속에 의하면, 구정날 밤 빗에서 머리카락을 모아 자신의 집 대문 밖에서 그것을 태우면 병과 악이 떨어져 나간다고 한다. 이 민속 덕분에 기름종이로 만들어진, 머리카락을 보관하는 가방이 만들어졌다. 같은 이유로 빗상자의 인기도 많았다. 오얏 껍질로 만든 종이는 대부분 전통종이공예에 쓰였다. 전통종이들은 다양한 색으로 물들여졌다.
한국의 전통종이공예는 제작기법에 따라 종이를 일정하게 썰어서 꼰 다음 직조하듯 만든 것으로 주로 바구니, 망태, 그릇, 상 등을 만든 지승 공예가 있고, 종이를 두껍게 여러 겹 덧붙여서 그릇이나 가구의 골격을 이루는 지호기법등이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색으로물들인 종이를 오려서 무늬를 만들고 기물에 장식하는 지도 기법 등으로나누어지는데 다양한 제작 기법만큼이나 민속에서 만들어 사용했던 지공예품 종류도매우 다양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예품으로는 담배쌈지, 바구니, 바늘쌈, 빗 상자 등 다양하다. 또한 여러겹의 종이를 대나무 본 위에 붙여 만든 가방 등의 제품들도 이 범주에 속한다.
색종이는 대체적으로 여성복이나 가방을 만드는데 쓰였다. 대중적인 색은 청, 홍, 황, 녹, 보라색 등이었고, 이들은 모두 집에서 생산된 자연염색약으로부터 습득된 색이다. 종종, 색종이들을 오려내서 나비, 박쥐, 원앙새, 한자 복, 불교 상징 등을 만들어 공예품에 붙이며 행복을 기원하기도 했다. 지호기법은 뚜껑 달린 그릇이나 사발 따위의 부엌살림을 만들기 위해 종이죽을 이용한 기술이다. 종이죽은 종이조각들을 물에 적셔 아교와 섞어 뭉개 만든 것이다.
지승기법은 종이 끈을 엮어서 바구니나 그물가방 따위의 가내용품을 만드는 기술이다. 이 기술로 필통, 돗자리, 방석, 커튼 등을 만들기도 했다. 지승기법으로 만든 것 중 작은 서예책상이나 쟁반은 나무 받침을 만들어 무게를 견딜 수 있게 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이 독특한 기법은 쓸모없는 종이조각들을 유용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할 때, 한국의 종이 공예는 오랜 역사 끝에 국가의 독창적이고 다방면인 민속 문화의 뛰어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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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화
민속화는 이른바 실용적인 그림들로 구성되어 있고, 옛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장수와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에 집장식용으로 널리 쓰였다. 풍경화나 꽃, 새 와 같이 민속화는 대부분 정통 회화와 비슷한 주제로 그려졌으나 좀더 단순하고 익살스러웠으며 삶의 순수하고 해학적인 모습을 묘사했다. 민속화는 옛부터 내려오는 한국의 전통 풍습을 잘보여준다. 그림의 반복되는 주제는 한국민들의 생활방식과 그들의 꿈, 소망 등이 한국 특유의 예술성으로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다. 단순한 구성과 틀에박힌 주제, 그리고 원색적인 색감으로 인하여 민속화는 일반적으로 예술적인 가치를 받지 못했으나 이 유형의 모든 그림이 다른 회화에 비해서 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지로 민속화는 궁중 화공들이 그린 작품서 부터 떠돌이 승려, 그리고 무명 화공들이 그린 직 같이 폭넓은 종류를 자랑한다. 어떤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예술성을 지닌 반면 어떤 그림들은 그만큼 솜씨가 숙련되거나 정교하지 못할때도 있다. 민속화의 시초격인 민화의 유래는 선사시대까지 올라간다. 민속화풍의 그림과 문양은 신석기시대 돌 조각물이나 청동기시대의 유물, 그리고 고구려시대(37 B. C-A. D. 668) 무덤과 벽화에서 부터, 고려 (918-1392), 조선 (1392-1910) 시대에 유물들에서 까지 널리 발견되고있다. 민속화는 동굴벽에 그려진 동물 모양이나, 무덤벽화에 그려진 사대천왕과 그 외 신들, 십장생의 그림들, 풍경화가 새겨진 벽과 사냥이 묘사된 그림 등 에서 부터 유래되었다고 전해내려오고 있다.
민속화는 신분이 뚜렷이 낮은계급의 화공들이 주로 만들었으나 왕족에서 부터 승려, 그리고 농부들에게까지 모든이에게 사랑받았으며 불교, 도교, 유교, 그리고 민속신앙 등등 모든 종파의 종교의식에 쓰이기도했다. 사람들은 민속화를 주로 소원성취와 귀신을 쫓는 도구로 쓰거나 도덕적 개념과 일상적 풍습을 일깨우기 위해서 쓰기도 했다. 그 결과로 민속화는 크게 두가지 분류로 나뉘게 됬다: 종교적 그림과 비종교적 그림으로. 종교적 그림은 미신적, 도교적 그리고 불교적 주제로 부터 조상숭배와 도덕적 규율을 강조하는 유교적 주제까지 다루었으며 비종교적 그림은 풍속화나, 인물화, 삽화, 지도, 달력 기타등등 여러가지 주제와 용도로 만들어졌다. 풍속화는 이 두가지 뿐만아니라 여러가지 주제로 쓰이기도 한다:
1. 도교신앙적 회화
장생: 십장생의 그림들은 민속화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회화중하나다. 태양, 구름, 산, 물, 바위, 소나무, 학, 사슴, 거북이, 그리고 불로장생의 약 으로 이루어진 십장생은 흔히 한 그림에 모두 묘사가 되있다. 장수를 의미하는 또다른 상징으로 그림에 많이 쓰이는 생물은 소나무와 학, 또는 사슴등이 있다. 옛 왕실에 배경으로 해와 달이 오봉산에 뜨는 회화가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수호신 과 십이지도: 고대 민속화들은 흔히 다섯방향을 대표하는 수호신과 동물신들을 상징하는 십이지도를 행복을 가져다주고 귀신을 쫓는다는 이유로 수없이 묘사가 되있다. 수호신 은 서쪽의 청룡과 동쪽의 백호, 남쪽의 주작, 북쪽의 현무, 그리고 중심에는 황제가 있다. 시대가 지날수록 주작은 봉황이나 기린이란 신화적 동물의 모습으로 묘사되었고 현무는 거북이로 그려졌다. 십이지도는 십이지신의 모습을 문양으로 한 것으로 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의 모습을 상징한다.
호랑이: 호랑이는 민속화에서 끊임없는 주제로 널리 사랑받았다. 동쪽에 수호신인 백호로부터 유래했을 호랑이는 한국신화에서 자주 인격화 되었다. 한국 전통 민속전례에서 호랑이는 무서운 짐승으로 표현되기 보다는 친근한 동물로 묘사되었으며 가끔 무식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호랑이는 수없이 많은 민속화에 온순한 친구로 나왔으며 소나무에 까치와 닭 그리고 사자와 자주 등장한다. 까치는 길조의 상징으로 좋은 소식을 가져다 준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불사신: 도교적 신앙의 의하여 자연과 조화의 상징으로 묘사되는 불사신은 한국 민속전통의 중요한 주제로 수세기동안 쓰여왔다. 불사신은 종종 산에기거하는 신선으로 그려졌고 인간들에게 좀 더 나은 삶과 부, 건강, 그리고 자손 번창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산신령과 용왕: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주제로, 산신령과 용왕은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들인 단군과 문무에서부터 유래되었다. 단군은 한국민들의 선조로서 노년에 산신령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고 신라의 왕이었던 문무는 사후의 용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시체는 유언에 따라 동해바다에 수장되었다고 알려져있다. 민속화에서 산신령은 흰수염을 가진 자비로운 노인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그의 곁에는 호랑이 모습의 사자가 지키고 있다. 용왕은 주로 용맹하게 짐승을 타며 구름 한복판과 높고 거친 파로사이를 날아다니는 신으로 묘사되있다. 산신령과 용왕을 주제로 그려진 그림들 대부분은 산과 바다근처에 지어진 사당에 평화와 국가번영의 수호신으로 자리잡고있다. 민속화에 또한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 수많은 도교적 그리고 토속신앙적 신들과 유명한 왕과 장군, 그리고 대신등이있다.
2. 불교 회화 전국 각지에 있는 절이나 암자는 민속화의 관한 풍부한 기록을 갖추고 있다. 의식을 위한 큰 초상들은 유명한 중들과 그들의 초상화 등은 경문과 기문 들을 예시하는데 쓰였다. 이와 같은 절의 회화는 간단한 구성과 밝은 색채를 사용한 기법들이 주목된다.
3. 공자 회화 유교 즉 공자의 그를 따르던 이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신조는 한국의 중요한 학문적 그리고 도덕적인 체계를 형성했다. 이는 국가의 독특한 무당 및 도교적인 조상을 섬기는 개념과 자연을 존중하는 개념에 편입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분류의 민속화는 존경심과 효도, 명성이 높은 학자의 인생을 담은 회화, 그리고 잉어가 강을 타고 용이 되어 승천하는 그림과 같은 대중적인 주제가 캐릭터 디자인의 바탕이 되며 널리 퍼져있는 현저한 학구적인 달성과 성공적인 관리 직위를 바라는 염원을 상징한다.
4. 장식적인 회화
현재까지 물려 내려온 대다수의 옛날 민속화들은 장식적인 용도로 쓰였다. 이러한 그림들은 대개 대중적인 주제를 반복하며 상대적으로 서투른 기법을 사용하지만 국가의 정교적 전통을 증언하며 샤머니즘 도교 불교 그리고 유교와 같은 여러 가지 믿음을 화합 시켜주었다. 고대 한국의 민속화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나타낸다: 첫째, 민속화는 명백하게 행복을 위한 열망을 보여준다. 이러한 것들은 모든 사람들의 욕망인 악귀를 쫓아내고 건강을 축복 받은 오랜 생을 즐기고, 부유와 높은 관직 을 상징한다. 둘째로 민속화는 한국인의 순진함과 진실함을 증명한다. 민속화는 정제되어있지 않고 때때로 유치하고 거칠기도 하다. 그럼에도 민속화는 한국인의 본질인 순수하고 수수한 경향을 나태 낸다.
셋째, 민속화는 한국인들의 자연, 인류와 신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준다. 민속화는 정통적인 그림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인간애, 평화와 따스함이 풍부하다. 넷째로, 민속화는 그들의 대담한 구성과, 강력한 화법 그리고 열정적인 색채는 굴복하지 않는 의지와 농민 사회의 용기와 계층 전쟁과 외부 침략을 맞서는 용맹성을 그려준다. 다섯번째, 민속화는 유머와 풍자가 풍부하다. 민속화는 한국인의 상당한 정신력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현명함을 증명한다. 민속화는 슬픔과 고통은 기쁨과 행복함으로 풍부한 유머와 풍자를 통해 승화한다. 여섯째, 한국 민속화는 한국인의 고유 미술적 능력으로부터 유래된 독특한 양식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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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머니즘
샤머니즘은 오직 샤먼만이 선과 악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민속적인 종교이다. 샤먼들은 의식들을 수행하는 전문적인 영혼의 중재인이다. 무당은 대게 여성 샤먼들을 일컫고, 백수무당은 남성들을 일컫는다.
샤먼들이 춤을 출 때, 그들은 무아지경에 빠지고 그들의 영혼은 육체를 빠져나와 영혼들만의 세계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영혼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대변인으로써 초자연적인 힘과 지식을 갖게 된다. 이러한 샤먼들의 비상한 재능은 사회로부터 그들을 구분짓다. 고대의 사회속에서의 샤먼은 리더의 역할을 했거나 부족의 공통관심사를 위해서 그들의 신비한 힘을 사용했다. 보통의 인간들보다 우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샤먼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들이 샤먼이라는 천직을 갖기 위해선 마치 병과도 같은 영혼의 고통을 경험했음이 틀림없다. 그들의 초자연적인 힘은 영혼이 그들을 선택했다는 것과 같고, 그들이 겪게되는 병적인 고통은 그들의 저항력을 깨버려 샤먼이라는 천직을 받아들이게 한다. 둘째, 샤먼은 샤머니즘의 필수적인 요소인 의식들의 집행에 유능해야 한다. 셋째, 샤먼은 사회의 정신적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종교적인 지도자가 되어야한다. 넷째, 샤먼은 산신, 칠성신, 지신, 그리고 용신과 같은 특정한 영혼들을 숭배하며 도와야하고, 역사속의 유명한 왕이나 장군들도 받든다. 샤먼이 입는 의복은 12개에서 20개 정도로 다양한다. 타악기가 빠르게 연주되면 샤먼 후보자들은 춤을추고 대게 기절하며 환상을 보게된다. 신병이라고 불리우는 신내림을 받고나면 그들은 8년에서 늦으면 30년동안이나 정신적인 병에 시달려야 한다. 하지만 마침내 병의 고통에서 해방된다면, 그들은 샤먼이 된다. 샤머니즘에서는 다양한 목적들을 위해 의식들이 수행된다.
첫째, 행복을 염원하기 위해 의식들이 수행된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고려 왕조에는 나라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 10개의 신전이 세워졌다고 한다. 둘째, 샤먼의 의식들은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수행된다. 병은 영혼들의 정신적인 지배에서 유래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샤먼의 역할은 중요했다. 가정 집에서는 마마 혹은 손님이라고 불리우던 두려움의 대상인 천연두를 쫒기 위한 의식들도 행하여 졌다.
셋째, 죽은 영혼들을 바른길로 인도하기 위한 의식들이 수행되었다. 병이나 사고로 죽은 인간들의 혼을 달래어 그들의 죽음을 초래한 사악한 요소들을 제거하며 바른길로 인도하는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샤먼의 의식들은 양식에 의하여 세 종류로 분류된다. 가장 간단한 형태의 의식은 기도이다.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샤먼은 영혼들과 대화하며 의식을 수행한다. 샤머니즘의 세계관에선 인간들이 몸과 영혼(심지어는 여러개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 몸을 위해 생명력을 제공하는 영혼은 결코 죽지않는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영원히 살아가거나 새로운 형태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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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
한국 전통의 레슬링인 씨름은 두 선수가 삿바를 끌어 잡고 다양한 테크닉을 사용하여 상대를 땅에 넘어뜨리는 경기이다. 씨름의 역사는 사회의 공동체들의 형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예로부터 씨름은 육식동물이나 다른 족속들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발달되어졌고, 그로인해 다양한 테크닉도 생겨나게 되었다. 사람들의 지혜, 정치, 그리고 경제적인 발전과 함께 씨름은 벌써 고구려시대(37 B. C. ~ 668 A. D. )의 시작과 함께 군대 무술로 발달했다. 4세기에 만들어졌다고 보여지는 각조총(씨름인들의 무덤)의 벽화들이 그 근거가 되었다.
씨름은 고려시대(918 ~ 1392)에도 계속되었다. 고려사기에 따르면 14세기 중반의 왕인 Chunghye는 연회를 열어 씨름경기를 즐겨 보았다고 한다. 씨름은 조선시대(1392 ~ 1910)에 더욱 큰 인기를 얻었다. 김홍도의 그림들을 보면 씨름경기의 장면들이 자주 묘사되어져 있다. 많은 씨름 대회들이 단오와 여러 다른 휴일동안 열렸다. 씨름경기가 열릴 때면, 윷놀이와 보통때는 금지되었던 도박들이 허락되었고, 농악놀이가 열렸다. 씨름은 씨름판위에서 열린다. 씨름판이 모래로 만들어진 이유는 씨름꾼들이 다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다. 씨름경기의 우승자에게는 황소가 수여되었다. 황소는 힘의 상징이기도 했으며, 한국과 같은 농경사회에서는 커다란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씨름에는 개인전과 단체전이 있다. 경기의 순서는 제비뽑기로 결정이 되며, 우승자는 3판 2승제로 경기 위원회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
삿바는 오른쪽다리와 허리를 둘러싸고 있어야하며, 오른쪽 허벅다리의 중상선을 따라서 위치해 있어야 한다. 경기시작 전에 선수들은 상대방의 삿바를 잡고, 30 센티미터의 거리를 유지하며 무릅을 꿇는다. 선수들이 상대방의 삿바를 잡는 순간 경기는 시작된다. 만약 삿바를 놓치거나 씨름판의 원 밖으로 선수들이 밀려 나가게 된다면, 재 시합이 열린다. 하지만 고의적으로 상대방 선수가 삿바를 잡는걸 방해하거나 원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반칙이 적용된다. 두 번의 반칙은 하나의 경고를 뜻하고, 두 번의 경고를 받는다면 그 선수는 경기 참가자격을 박탈 당하게 된다. 초등부와 중등부의 씨름경기는 보통 2분동안 진행되며, 승부가 나지 않는다면 1분의 휴식뒤에 재시합이 이뤄진다. 고등부와 더 높은 수준의 시합에서는 3분동안 시합이 진행되며, 승부가 나지 않는다면 역시 1분의 휴식 후에 재시합을 하게 된다. 첫번째 경기에 승부가 나지 않았다면 두번째 경기에서의 우승자가 시합의 우승자가 되며, 두번째 경기에 승부가 나지 않았다면 첫번째 경기의 우승자가 시합에 이기게 된다. 두 시합 후 승자가 나오지 않았다면, 반칙이나 경고를 받은 선수가 경기에서 지게 된다. 양쪽 선수 다 경고를 받지 않은 상태라면, 체급이 가벼운 선수가 승자가 된다. 무릎 이상의 몸이 땅에 닿았을 경우, 그 선수는 경기에서 지게된다.
정당한 힘겨루기로 상대방을 원밖으로 밀어냈다면, 그 선수는 경기에서 이기게 된다. 목을 조르거나, 머리를 치고, 팔을 꺾거나, 발로 차며, 눈을 가리는것은 자격 박탈 행위이다. 씨름경기엔 한명의 주심판과 세명의 부심판들이 있다. 주심판은 씨름판의 원 안팎으로 돌아다니며 경기를 주관하고, 부심판들은 시합의 공정성을 위하여 주심판의 결정과 경기를 관찰한다. 경기의 진행이 사고로 인하여 불가능하게 될 때, 승자는 주심판과 부심판들의 종합적인 결정에 의해 발표된다. 주심판은 호루라기를 사용해 경기의 시작과 끝을 알린다. 주심판이 이름을 세번 부를 때 까지 선수가 씨름판의 원 안에 대기하고 있지 않다면, 그 선수는 경기를 자동적으로 포기하게 된다. 폭력의 사용, 욕설의 사용, 혹은 알맞지 않은 행동을 함으로써 경기의 규정을 지키지 않는 선수는 자격 박탈이 된다. 계속적인 규칙과 가이드라인의 발달과 함께, 씨름은 전통적인 민속운동으로부터 오늘날의 대중적인 스포츠로 발전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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