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중학교! 내가 1971년 2월 첫 부임한 학교 이름이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평택군 오성면 숙성리라는 낯설고 물 설은 동네에 첫발을 내딛고 오성중학교에서 근무를 시작으로 내 평생 36년간의 교직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보릿고개라는 먹고 사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절이었고 변변한 기반 시설이나 공장이 없는, 농업이 주류를 이루던 농경사회에서 직장을 잡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입에 풀칠하기도 쉽지 않은 시절에 힘들게 대학 졸업을 하고 취직도 못한 채 일 년 동안 백수로 보내던 나로서는 시골이라는 지역은 전혀 상관없이 다만 직장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맙고 감사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출근을 하는 것이 여간 즐겁지 않았고 더구나 어린 학생들과 생활한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하였다. 그 시절 만 해도 우리 민족의 고유한 순수성과 농촌이라는 순박함이 살아있어서 비록 20대의 젊은 선생이지만 학부모님들은 선생을 만나면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고 대접을 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고맙기도 하고 한편 미안하기도 하는 경우를 많이 체험을 하면서 아끼는 제자들과 하루하루를 즐겁고 보람되게 보냈던 기억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첫 직장이라 그런지 그 때의 추억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고 쉬 잊혀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오성에서 처음 만났던 선생님들과 너구리 클럽이라는 등산 팀을 만들어 봄, 가을 농번기 가정 실습 때면 달랑 배낭 하나 짊어지고 속리산, 덕유산, 수덕사 뒷산으로 산행을 다니면 젊음을 만끽하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그 시절 그 때를 생각하면 꿈같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기에 많이 아쉬울 뿐이다.
36년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퇴직한 지도 15년이 지난 지금도 때때로 첫 경험의 추억을 되 뇌이며 혼자 실없이 웃기도 하며 가슴 뿌듯함에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곤 한다.
2월 한 달은 수습기간으로 봉사를 하고 3월부터 정식 발령을 받아서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평준화 시책 첫 해로 고등공민학교에서 정식 중학교로 승격이 되어 학생 배정을 받게 되니 한 학년이 세 학급이 되고 남녀 비례가 맞지 않아서 1반은 남학생, 3반은 여학생, 2반은 남녀 합반으로 편성하여 성적이 좋은 아이들로 구성하였는데 내가 우수반인 2반 담임을 하게 되었다.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들으며 모두가 선생님의 말을 잘 따라 주어서 정말로 재미있고 즐겁게 근무할 수 있었다. 평준화 첫해라 고교입시가 학교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에 평택군내의 다른 학교, 특히 시내학교에지지 않으려고 보충수업과 야간 자율까지 하면서 힘들었지만 의욕적으로 정말로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며 사명감을 불태우는 중에 때로는 아이들과 인근의 농장으로 가서 딸기나 토마토를 사먹기도 하고 채소나 과일을 가지고 와서 선생님 드시라고 어머니가 주셨다며 등굣길에 가지고 오는 친구들도 있었는가 하면 반찬이나 콩대를 가지고 온 친구 등, 지금 생각해도 시골학교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행복한 날들이었다. 그런 친구들 중에 지금도 연락을 하고 종종 만나는 제자들이 있는데 벌써 나이가 70을 바라보고 손주들이 나보다 빠른 녀석들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끼며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하곤 한다.
화엄사 흑매 앞에서
2022년 12월, 미국에서 목회를 하는 여자 제자가 연락이 와서 몇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며 김포의 신도시에 있는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서 오산에 사는 제자가 집 앞까지 차를 가지고 와서 같이 김포로 가니 신*자라는 제자가 식당 개업을 하였다고 하여 그 식당으로 찾아가니 마침 목사님을 모시고 개업예배를 드린 다음 식사 기도가 끝나고 막 식사를 시작하는 중에 들어가서 보니 몇 년 만에 보거나 졸업 후 처음 보는 제자도 있어서 얼른 알아보지 못하고 어리둥절하며 살펴보고 대충 인사를 하고 같이 식사를 한 후 차를 타고 ‘포지티브 스페이스’라는 까페로 가니 1층에는 각종 다양한 빵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접시를 가지고 알아서 먹을 만큼 담아서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차를 주문하여 빵과 차를 들고 2층, 중층, 3층의 수많은 자리들 중에서 원하는 곳에 자리를 잡아 빵을 먹고 차를 마시는 엄청나게 넓고 큰 까페로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규모가 커서 놀라울 정도였다. 정말로 세상이 이렇게 급격히 바뀌는구나 하면서 내심 놀라울 뿐이었다. 3층 한쪽에 자리를 잡고 한참을 기다리니 송파에서 목회를 하는 황*배라는 목사 제자가 와서 1973년 1월에 졸업을 하고는 딱50년 만에 처음 만나게 되니 얼른 알아보지는 못하였지만 반가운 마음은 숨길 수가 없었다. 황*배 목사, 신*자. 이*자, 조*실 목사, 조 목사 남편, 최*화, 서*경, 나를 포함하여 모두 8명이 모였는데 두 명은 목사요, 두 명은 장로며 또 두 명은 권사요, 한 명은 천주교 신자에 마지막 한 명은 불신자로 남자 4명, 여자 4명이었다. 그 중에 세 명은 졸업 후 딱 50년 만에 만나는 친구로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회적으로 나름대로 성공을 하고 잘 사는 모습을 보니 대견하고 마음 든든하였고 같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5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않고 연락을 하고 찾아주는 제자가 있어서 가슴 뿌듯한 행복감과 큰 보람을 느끼며 해거름에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였다.
천 년 된 태백산 주목
도시에서는 보기 드문 각 학년 한 학급인 미니 중학교, 그것도 2월에는 3학년이 졸업을 하고 중학교 1, 2학년만 남은 상황이다 보니 1학년이 60명 정도요, 2학년은 50명 정도로 참으로 한적한 시골학교였다. 새학기가 되면서 평준화로 신입생 세 학급이 생겨 모두 5학급의 시골 중학교에 스레트 지붕의 소박한 단층 건물에 강당이 있는 건물과 기술실과 가사 실습실을 끼고 있는 건물, 모두 세 동의 나지막한 건물에 아이들이 공을 차면 담장을 넘어서 주택가로 떨어질 정도의 넓지 않은 운동장, 그런데 학교를 둘러선 울타리에 코스모스가 필 때면 넓은 평택평야의 황금벌판과 푸른 하늘이 조화를 이루어 너무나 한가롭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 참으로 즐거웠고 행복했었다.
그렇게 대도시 학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가족적인 분위기에 대부분 같은 동네나 이웃동네로 몇 년간 같이 몸으로 부대끼며 학교를 다니는 시골학교 출신들만이 느끼는 우애와 정을 그들을 가르쳤던 나도 같이 느끼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정이 들어서 오래도록 잊지 않고 찾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개업한 제자가 싸주는 게장과 시루떡 보따리에 또 제자들이 십시일반으로 준비한 선물을 받고 보니 미안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고맙기도 하며 제자를 둔 교육자로서의 가슴 벅찬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