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이용원 서울신문 칼럼 2009.01.22 (목) 오전 4:21
[제14회] 2부작 대발견! 미륵사 사리장엄 |
▣방송 :2009. 3. 14 (토) 21:40~22:3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류지열 PD
▣글 : 김윤양 작가
우리 역사에서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사랑, |
▲ 미륵사 사리 봉안기 |
“서동과 선화 공주의 1400년 사랑이 흔들리다” 미륵사 서탑 사리 봉안기 속 여인, 사택왕후 |
지난 1월, 백제 무왕 때 왕비인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미륵사에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특히 세 개의 탑중 유일하게 남은 서탑의 사리 봉안기에서 우리가 알던 것과는 뜻밖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삼라만상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 |
그것은 사택왕후라는 새로운 이름과 그녀의 발원사실, 그리고 639년이라는 건립연대 였다. 당시 사택씨 집안은 백제 8대 성중의 하나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사비 백제시대에서 정계의 중심이었다. 이것은 사택지적비문에도 확인할 수 있는데, 금으로 불당을 세우고 옥을 다듬어 보탑을 세웠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 사택가문의 경제력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선화공주의 소원대로 연못을 메워 미륵사를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허구일까? |
“서동요는 서동의 적나라한 구혼가인가?” 무왕과 선화공주 사랑의 진실 |
무왕은 재위 42년 간 12차례나 신라와 전쟁을 벌인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선화공주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서동요가 허구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러나 고대국가 왕실에서 결혼은 철저히 정략적인 것이었다. |
“동성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니 신라 소지왕은 이찬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냈다. 1년 뒤 신라가 살수전투에서 고구려에 패하자 백제가 3000명을 보내 포위를 풀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
실제로 493년, 백제 동성왕과 신라 이찬 비지의 딸이 결혼을 하여 60여년 간 두 나라간의 돈독한 관계가 유지 될 수 있었다. 또한 서동의 구혼가인 서동요를 당시 신라의 개방적 성풍속과 어문학적으로 보았을 때, 당시의 어떠한 사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에 선화공주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삼국사기 특유의 서술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왕의 자식들을 따로 기록하지 않고, 왕의 부모를 항상 먼저 소개하고 있는데, 이러한 까닭으로 진평왕의 큰 딸인 선덕여왕과 김춘추의 어머니였던 둘째 딸 천명부인은 기록될 수 있었지만 선화공주는 기록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 밖에 실제로 서동이 마를 캐던 지금의 김제 지역은 금(金)이 들어가는 지명이 많을 정도로 사금이 많이 나는 곳이다. 선화와 서동이 들렀다는 사자사도 실제로 존재한다. 현재 발굴된 미륵사의 구조는 3월 3금당으로 역시, 기록과 일치한다. 무왕시대인 639년의 완성 사실 기록 역시 창건주체를 제외한다면 오히려 삼국유사 무왕조 기사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
“서동은 용의 아들인가?” 무왕 출생의 비밀과 백제 혼란의 정치사 |
“백제 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그는 그 못의 용과 관계하여 그를 낳았다.” <삼국유사 권2 기이 무왕> |
삼국유사에는 이처럼 무왕이 용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보통 묘비명에는 왕실의 가계도가 담겨있다. 그러나 무왕의 손자인 부여융의 묘비명에는 할아버지 무왕은 나타나 있지만, 증조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것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무왕의 아버지가 법왕이라는 기록이 정확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실제 무왕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백제의 강력한 귀족 정치는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살해된 뒤, 위덕왕 이후, 즉위 한 지 고령으로 1년 만에 죽은 혜왕과 그의 아들 법왕까지 이어진다. 특히 법왕은 효순태자 시절 오합사를 짓는 등 강력한 불교정치를 추구했음에도 즉위 1년 만에 갑작스럽게 죽고 만다. 이것을 통해 법왕의 재위기간동안 귀족층과 마찰이 있었을 가능성을 볼 수 있다. 결국 당시 백제 왕실의 혼란 속에서 왕족이면서 정치적 기반이 대단히 취약했던 서동은 백제의 지배귀족들에게는 딱 알맞은 인물이었다. 결국, 용의 아들인 서동은 익산지역에 근거를 둔 몰락한 왕족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
“서동의 백제의 왕으로 살아남기” 익산경영과 정략결혼의 의미는? |
▲ 해체 이전의 미륵사지 석탑 |
무왕은 자신을 왕으로 옹립한 귀족층의 끊임없는 왕권견제로 익산으로의 새로운 경영을 계획한다. 익산지역은 무왕이 태어나고 자랐을 뿐만 아니라 낮은 구릉과 넒은 평야 지역으로 물산이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익산경영 틀의 중심에 미륵사 창건이 있었다. 그것은 용의 아들인 자신을 미륵불 동일시하여 자신을 세상을 구해줄 미륵불로 인식시켜 왕권을 강화하려 한 의도가 있었다. 그런데 미륵사의 사택왕후 명문기는 미륵사상이 아니라 석가불을 모시는 법화사상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미륵사에는 왕이 신봉하는 미륵신앙과 제1 귀족세력인 사택 집안이 신봉하는 법화경이 공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그렇다면 선화공주와 서동의 결혼은 단지 서동의 계략에 의해 결혼이 추진된 것일까? 무왕 재위 초기,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고, 무왕은 약해진 왕으로서의 권위를 외부에서 찾을 필요가 있었다. 결국 양국의 필요성이 맞아 떨어져 무왕과 선화공주의 정략결혼이 추진되었다. 실제 무왕 재위 42년간 12차례나 신라와 전쟁을 벌이지만 즉위년인 600년부터 611년 사이에는 두 나라 간에 단 한차례의 공격만 있었다. 결국 서동요는 백제와 신라의 갈등의 역사 속에서 선화공주와 서동의 슬픈 사랑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노래인 것이다. |
최근 국보 제11호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 및 보수하는 과정에서 백제 30대 왕인 무왕의 왕후가 재물을 희사하여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의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따르면 그 왕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신라의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아니라 당시 백제 조정의 실력자인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기록돼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일부 사학계에서는 서동(薯童, 훗날의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맨스를 전하는 서동설화가 허구일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선화공주도 실존이 아닌 가공의 인물이라는 주장도 더욱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서동과 선화공주가 혼인 과정을 다룬 서동설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합니다. 이에 대하여 이전부터 여러 학자들이 반론을 제기했었습니다. 이것은 당대의 백제와 신라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라 양국의 왕자와 공주가 혼인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당사자인 무왕대에도 신라와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인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특히 미륵사 창건에 대해서는 무왕이 왕후와 함께 용화산 못가를 걷고 있을 때 미륵삼존이 못에서 나타나자 왕후가 큰 사찰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여 이를 무왕이 들어준 것이라고 하는데, 서동설화가 의심받자 이러한 미륵사 창건 배경도 함께 의심받았습니다.
또한 서동설화를 무왕의 6대 선왕인 동성왕이 신라와의 결혼동맹으로 신라 이찬 비지의 딸을 비로 맞은 사실을 후대에 적당히 윤색했다는 해석으로 인하여 미륵사 창건도 무왕이 아닌 동성왕 시기라는 추정을 하는 학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리봉안기의 발견으로 미륵사는 무왕 시기에 창건했다는 사실은 확실해졌습니다. 그리고 서동설화를 자세히 분석하면 서동이라는 백제의 청년이 신라에 몰래 들어가 '서동요(薯童謠)'를 퍼뜨려 선화공주라는 신라의 규수에게 그러니까 요즘 말로 작업이 들어가 성공한 겁니다. 이것은 왕실의 결합이라는 엄숙한 명분이 아닌 젊은이들의 러브스토리에 더 가깝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서동설화의 존재 가능성이 더욱 커지며, 선화공주도 허구의 인물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사리봉안기에 왜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적덕의 딸이 기록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그것은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사리봉안기가 발견된 미륵사지 석탑의 보유지인 미륵사가 무왕이 등극하고 약 40년(640) 정도 되는 시기에 완공되었다는 유력한 학설에 근거하면 실마리가 풀립니다. 선화공주는 무왕이 등극하기 전에 혼인했으므로 그 때의 보령을 아무리 적게 잡아도 50대 후반입니다. 그런데 당시 신라인의 평균수명은 40살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미륵사가 완공되기 이전에 사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택적덕의 딸은 선화공주 사후에 들인 계비(繼妃)로 추정하여 미륵사의 완공시에 선화공주 대신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선화공주의 존재를 의심한다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향가인 서동요를 의심하는 것이 됩니다. 거기엔 분명 선화공주가 언급되어 있고, 이것이 신라의 민간에서도 널리 회자되어 신라 왕실에서 선화공주를 폐출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즉, 선화공주가 없었다면 서동요도 존재의 가치가 엄청나게 떨어집니다. 물론, 선화공주의 행적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심에 있는 선화공주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렇듯 엄연한 역사적 근거가 확실합니다.
그러나
선화공주퇴출?어림없다
선화공주가 퇴출 위기에 몰렸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보수하는 과정에서 창건 과정을 밝힌 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봉안기에 따르면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의 왕후가 재물을 희사, 미륵사를 지어 639년 완공했다. 문제는, 그 왕후가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가 아니라 당대의 세력가인 사택씨 집안 따님이라는 사실이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서동요’가 허구일 가능성이 높으며, 선화공주도 실존 인물이 아닐 것이라는 보도를 쏟아냈다.
그렇다면 서동(무왕의 아명)과 선화공주의 로맨스는 빛을 잃는가. 또 선화공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비록 미륵사 완공 당시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해도 ‘미염무쌍(美艶無雙)’인 그녀의 역사적 지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서동과 선화공주에 관한 기록은 유일하게 ‘삼국유사’에 등장한다. 삼국유사 ‘무왕’조는 서동의 출생-선화공주와 결혼-등극-미륵사 창건으로 이어지는 한 덩어리의 기사이다. 그런데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이 기사를 신빙성이 없다고 무시해 왔다. 그 근거는 의외로 단순하다. 이 시기에 백제·신라는 빈번히 전쟁을 벌였으므로 양국의 왕자·공주가 결혼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런 학자들-고 이병도 박사가 대표적이다-은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맨스를, 무왕의 6대 위인 동성왕이 신라 왕녀와 혼인한 사실에 훗날 살을 붙여 만든 설화라고 본다. 그 연장선상에서 미륵사도 동성왕 재위시(479∼501년) 창건했으리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이번에 봉안기를 발견함으로써 삼국유사 관련 기록의 정확성이 입증됐다. ‘무왕’조 기사의 뒷부분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앞부분인 서동·선화공주의 사연 또한 ‘사실’로 인정하는 게 마땅하다. 결론적으로 봉안기는 선화공주의 실존성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더욱 강화해준 셈이다.
게다가 서동은 신라 땅에 홀로 들어가 선화공주를 빼낸 뒤 백제로 돌아와 혼인한다. 양국관계가 우호적인 시기라면 왕가끼리의 혼사가 이처럼 이상하게 진행될 리 없다 .그 별난 과정이야말로 둘의 사랑이 적대적인 상황에서 꽃피웠음을 웅변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왜 봉안기에 등장하는 왕후는 다른 여성인가라고 의문을 가질 만하다. 미륵사는 무왕 재위 40년째에 완공됐다. 같은 시대 왕흥사 건립에 35년 걸렸음을 감안하면 규모가 훨씬 큰 미륵사 창건에는 더 긴 세월이 소요됐으리라. 무왕이 선화공주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미륵사를 지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계산해 보자. 무왕 즉위시 선화공주의 보령을 20세로 추정하면 미륵사 완공시에는 60세쯤 된다. 당시 신라인의 평균수명은 40년쯤이었다. 완공을 보지 못하고 타계했더라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사택씨의 딸은 계비(繼妃)일 것이다.
그래도 미심쩍다면 국문학자들의 학설도 소개한다. 현존하는 신라향가 14수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진평왕 때 나온 ‘서동요’와 ‘혜성가’이다. 둘 중에서도, 향가의 발전과정을 짚어 보면 ‘서동요’가 먼저 나왔다는 데 이론이 없다. 곧 ‘서동요’는 진평왕 당대의 작품이라는 뜻이다. 진평왕이 다스리는 신라 땅에서 ‘있지도 않은 왕의 딸(선화공주)’을 등장시킨 노래가 유행하고 역사에도 남을 수 있을까.
선화공주 퇴출? 어림없는 소리이다. 선화공주는 건재하고 앞으로도 ‘민족의 연인’으로서 계속 사랑받을 것이다.
출처 : 이용원 서울신문 칼럼 2009.01.22 (목) 오전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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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서동요는 백제와 신라의 갈등의 역사 속에서 선화공주와 서동의 슬픈 사랑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노래인 것이다.
서동요에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로맨스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문제가 숨어있었군요!! 새롭게 알고 갑니다^^
선화공주가 일찍 죽고 무왕이 세력가의 딸과 재혼을 했었군요! 새로운 사실을 알게 .잘읽었습니다~
웬지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씁쓸해지네요ㅠㅠ
서동설화가 허구라고 보는 입장이 많은 가 봅니다. 서동요의 내용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상상되어지는 선화공주와 무왕의 러브스토리 인데 말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서동요에 얽힌 배경설화가 많네요. 어느것이 확실한지 알수는 없지만 각 이야기마다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흥미롭네요
"선화공주와 서동의 결혼은 서동의 계획에 의해 추진되었다. 무왕재위 초기에 신라는 고구려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고, 무왕은 약해진 왕의 권위를 외부에서 찾았다. 결국 양국은 무왕과 선화공주의 정략 결혼이 추진되었다. 결국 서동요는 백제와 신라의 갈등의 역사속에서 선화공주와 서동의 슬픈사랑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노래인 것이다." 저는 이 글을 읽고 선화공주의 슬픈사랑도 아프지만, 지금도 집안의 명예와 재력을 위해, 정략결혼이 이어져 오는 풍습이 더 가슴 아프게 와닿네요.~~
자료의 제목들이 참 눈에 띄게 재밌네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