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어라는 낱말
국어라는 말은 나라말이라는 뜻이니 임자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제각기 나라말을 가지는 것이기에 세상의 모든 말은 국어다. 따라서 국어란 어느 한 나라의 말을 짚어서 뜻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나라말 또는 '우리' 나라의 말, '우리' 겨레의 말을 뜻하고자 하면서 국어라고만 해서는 그런 뜻을 담아낼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무엇을 뜻하는가? 휴전선 남쪽에만 통치력을 미치고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을 뜻하는가? 우리 정부의 행정력도 미치지 못하고 딴 나라에서도 대한민국이라고는 인정하지도 않는 북녘을 우리나라에 넣는 것이 마땅한가? 만약 국어라고 하면서 말을 바탕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정부의 통치권에 관계없이 북녘도 우리나라라고 할 수 있다면, 배달말을 일상생활에서 쓸 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배달말을 가르치고 우리 한글로써 신문과 잡지를 펴내는 만주 땅의 조선인 자치구나 일본이나 미국이나 러시아 교포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 밖에도 온 세계에 널리 퍼져 살면서 배달말을 쓰고 있는 우리 교포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이처럼 말을 두고 우리나라를 뜻매김하려고 할 때에 부딪히는 공간의 문제만도 생각해 보면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역사로 이어지는 시간의 문제도 마찬가지 어려움을 안고 있다. 말을 잣대로 보지 않고 우리나라라고 했을 때에는 시간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를 세운 1948년 8월 15일부터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말을 잣대로 우리나라를 매김하려고 할 때에는 광복 뒤에 세운 대한민국만을 우리나라라고 하기가 어렵다. 말이란 그것을 쓰는 사람들의 동아리가 그대로 있는 동안 어느 날에 금을 그어 가를 수가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어라는 말을 살피자고 우선 우리나라라는 말의 뜻매김이라도 해 보려고 하면 공간과 시간부터 얼안을 올바로 지우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말이란 애초에 어떤 나라와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디 겨레와 맺어져 있는 것이고, 말이 겨레를 만들고 겨레가 말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어라는 말을 버리고 한국어라 하자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은 남의 나라 사람들이 배달말(배달은 우리 겨레를 이르는 말이다. 지난날 조상들이 줄곧 쓰던 낱말인데 일제 때에 갑자기 줄어지고 광복한 뒤로 거의 쓰지 않았다. 배달겨레란 그러니까 배달임금(단군)을 한 할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겨레를 뜻하는 낱말이다.)을 가리키거나, 우리가 딴 나라 사람에게 배달말을 가리키면 어울리는 말이지만 우리가 우리의 배달말을 뜻하면서 우리끼리 쓰기에는 마땅하지 않다. 그뿐 아니라 우리 겨레는 같은 말을 쓰면서 나라가 갈라졌다고 말의 이름까지 한국어, 조선어로 다르게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바람대로 겨레의 통일이 오는 그날에는 어느 쪽을 버리고 어느 쪽을 쓸 것인가? 어느 쪽은 버리고 어느 쪽은 쓰고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고민 끝에 내세우고 싶은 말이 '배달말'이다. 배달말은 국어나 한국어나 조선어를 모두 뛰어넘어 남북이 함께 영원토록 우리말의 이름으로 쓰기에 마땅한 낱말이다.(이치는 마땅하지만 당장 '국어'나 '한국어'나 '조선어'를 버리고 '배달말'로 바꾸어 쓰자니 망설임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치가 마땅하다면 누군가는 앞장서 써 버릇해야 옳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이치를 따져보고 써 버릇하면 말과 세상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
2. 세 가지 몸
말이란 세 가지 몸으로 탈바꿈해 왔다. 입으로 내는 소리에다 신비스럽게 뜻을 담아 실어 나르는 입말, 손으로 그리는 글자에다 입말을 담아 실어 나르는 글말, 전자를 기계로 부려서 입말과 글말을 함께 담아 실어 나르는 전자말이 그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 국어, 곧 배달말에서도 마찬가지다.
1) 입말
우리 겨레의 입말은 어떻게 흘러 오늘 우리에게 닿았을까? 우리는 이런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몇몇 국어학자들이 우리 겨레의 입말 흐름을 밝히려 애썼으나 그들은 거의 오늘 우리가 쓰는 입말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를 세운 다음부터 이루어진 것이라 하고, 어쩌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있던 시절에도 저들 세 나라 사람들이 서로 입말을 주고받았다는 자취가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겨레가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입말을 쓰면서 동아리를 이루어 살아온 역사는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임을 알 수 있다. 고고학에서 찾아내는 유물과 유적과 겨레의 신앙이었던 무교의 굿이나 도교의 초례에 담겨 살아남은 서낭이야기(신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우리는 고고학의 유물과 유적에 힘입어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곧 부족과 씨족을 아울러 고대 국가로 나아가던 그때부터 하나의 문화를 누리며 겨레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되었다. 고인돌과 비파꼴 청동칼로만 이야기하더라도 우리 겨레는 적어도 오륙천 년 이전부터 동북아의 드넓은 땅을 자치하고 하나의 문화를 누리는 동아리를 이루어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두머리의 주검을 한결같은 고인돌 무덤으로 장사지내고, 불에 녹인 청동으로 한결같은 무기와 도구를 만들어 문화를 일구어내며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하나의 말을 쓰지 않았겠는가?
우리 겨레가 같은 입말을 쓰면서 동북아 넓은 땅을 주름잡던 시절의 역사는 앞으로 고고학과 인류학과 신화학의 도움으로 밝혀야 할 일로 남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단군이 고조선을 세워 다스리기 시작한 사오천 년 이전부터 겨레의 입말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길을 걸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적어도 청동기 이천 년 동안에 걸쳐 배달겨레의 입말은 서로 주고받기 어렵지 않을 만큼 하나의 말로 자라났으리라 믿는다. 다만 끝까지 그 터전과 삶을 고스란히 그대로 이어받지 못하고 동아리가 흩어지고 땅을 빼앗기는 역사를 겪으면서 말도 다시 흩어지고 갈라지지 않을 수 없었을 따름이다.
2) 글말
우리 겨레의 글말은 어떻게 흘러 오늘 우리에게로 왔을까? 이 물음에도 우리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그런대로 알고 있는 것은 고조선이 무너지고 열국으로 흩어졌다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일어나던 즈음부터 중국의 글자를 끌어들인 다음의 자취다. 그 시절부터 우리 겨레의 지도자들은 중국의 글말을 빌려서 고구려에서는 『유기(留記)』, 백제에서는 『서기(書記)』, 신라에서는 『국사(國史)』같은 책에다 삶을 담았다.
그러나 뜻있는 사람들은 중국 글말이 우리 입말에 맞지 않아 괴로워하며 맞추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그것이 이두·향찰 같은 이름으로 우리 입말을 적는 글자로 탈바꿈까지 했다. 향찰은 우리 입말의 노래를 적는 데까지 나아갔으나 중국 글말에 맛들인 지도자들이 팽개치고 한문에 매달렸기 때문에 고려로 넘어와서 자취를 감추었고, 이두는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하급 관리들이 부려 썼으나 왕조가 무너지면서 사라졌다.
중국 글자를 우리 입말에 맞추려는 일천오백 년의 싸움 끝에 하늘이 내린 세종대왕의 힘으로 한글을 만들었다. 제 겨레의 입말에 맞추어 이만큼 온전한 소리글자를 제 손으로 짧은 기간 안에 만들어 낸 사람들이 인류 가운데 우리 말고는 달리 없다. 뿐만 아니라 하려고만 하면 어떤 겨레의 입말이라도 소리 그대로 적어 글말로 바꿀 수 있는 것이 한글이다. 소리를 내는 입 안의 곳곳이 소리를 낼 때에 움직이는 모양을 그대로 본떠서 글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탄스러운 것은 이처럼 훌륭한 글자를 만들고도 오백 년이 지나도록 지배 계층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여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썩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뿐 아니라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잘났다는 사람들이 한글의 값어치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한자에 매달리거나 로마자를 떠받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재벌, 국회, 정부, 법조, 대학, 교육, 언론을 막론하고 상층 사람들의 이름쪽지(명함)를 받아보면 한글로 적어 다니는 사람을 백에 하나도 찾기가 어렵다. 앞에는 한자로 뒤에는 로마자로 적어 다니는 것을 떳떳하고 자랑스럽다고 여긴다. 신문들이나 책들을 훑어보아도 한글과 한자와 로마자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길거리에 나서서 내걸린 상점의 간판을 둘러보아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3) 전자말
우리 겨레의 전자말은 어떤 모습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전신, 전화, 확성, 녹음, 방송, 영화, 텔레비전까지만 해도 전자말은 새로 나타난 말이라는 생각을 크게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컴퓨터가 나타나고 인터넷이 나타나고 손전화가 나타나면서 사람들은 전자말을 참으로 놀랍고 새로운 말로 알아보게 되었다. 전자말의 모습은 나날이 새로워지는 전자 기기의 발전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탈바꿈하며 내달릴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우리가 “국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에 올바로 대답하려면 무엇보다도 배달말의 몸, 곧 소리(입말)와 글자(글말)와 전자(전자말)의 쓰임이 어떤 길을 걸어왔으며 걸어가고 있는가를 제대로 꿰뚫어 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3. 토박이말과 들온말
어느 겨레의 말이든 모든 말은 토박이말과 들온말로 이루어져 있다.
토박이 말이란 애초에 우리 겨레에게서 생겨난 말이다. 그것은 쉼없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들온말이란 본래는 다른 겨레의 말이었으나 우리에게 쓸모가 있거나 좋아 보여서 끌어들인 것이다. (‘들온말’은 흔히 일본식 한자말 ‘외래어’라는 그것이라 보기 쉽다. 그러나 외래어란 외국어와 달리 남의 말이 들어와서 배달말로 익어버린 것을 뜻해야 올바르다. 일테면 ‘백채’가 ‘배추’로 되었다든지 ‘다바꼬’가 ‘담배’로 되었다든지 ‘노 텃치’가 ‘노다지’로 되어서 그것이 본디 남의 말이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배달말로 읽기는커녕 생판 외국어인 그대로를 배달말에다 뒤섞어 쓰는 말들이 사태를 이룬 속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이런 것들, 곧 배달말로 익어버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두루 싸잡아 ‘들온말’이라고 했다.) 들온말은 토박이말의 모자름을 메우려고 하는 것이지만 낱말뿐 아니라 월을 짜는 낱말의 차례나 짜임새까지도 토박이말의 그것들을 바꾸게도 하는 것이다.
토박이말은 애초에 생겨나면서 우리 겨레의 느낌과 생각과 뜻과 얼에 어울리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사람들 사이를 더없이 매끄럽게 오고 간다. 이러한 토박이말의 매끄러운 흐름 속으로 들온말이 끼어들면 크든 작든 배달말은 아픔을 겪게 마련이다. 그러나 들온말이란 이미 있는 배달말의 모자람을 메우려 끌어들이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배달말의 세계가 더욱 넉넉해질 수가 있다. 그러므로 들온말을 제대로 부리려면 먼저 우리 배달말을 좀 더 잘 알고 우리 배달말의 좋은 세계는 다치지 않으면서 모자람을 기우고 메울 수 있도록 한다는 뜻을 살려야 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우리가 풀어내야 할 매듭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남의 것을 무턱대고 부러워하는 마음, 곧 우리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하고 업신여기기까지하는 마음이다. 아마도 발해(대진국)가 무너지던 어름부터 부쩍 자라나서 지난 일천여 년 동안 뿌리내린 모화 사대 정신, 곧 중국의 삶은 우리네 삶보다 훌륭하다고 믿고 그것을 섬기며 본뜨려던 마음에서 가장 크게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사대 모화 정신은 지금도 우리 겨레의 마음 구석구석에 두루 배어 있고, 가장 깊이 배어 있는 구석의 하나가 바로 말이다. 우리 토박이말은 상스럽고 뭇되어서(‘뭇되다’는 말은 지난 세기 중엽까지 적어도 우리 고장에서는 널리 쓰이던 토박이말이다. 사람이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에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이르는 그림씨(형용사)낱말이다. 한자말로 ‘천박하다’ ‘조잡하다’같은 말들과 비슷하지만 거기에다 ‘순박하다’는 말이 보태어져야 좀 더 가까운 뜻이 된다.) 할 수 있으면 쓰지 말아야 하는 말이요, 중국서 들온말은 점잖고 아름다우니까 될 수 있으면 많이 써야 하는 말이라고 여기는 그것이다.
토박이말들이 한자말에 짓밟혀 죽어가고 있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일테면 ‘오누이’는 ‘남매’에게, ‘말’은 ‘언어’에게, ‘뫼’와 ‘가람’은 ‘산’과 ‘강’에게 짓밟혀 우리들 눈앞에서 죽을 지경이 되어 있는 것들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토박이 말의 이름씨(명사) 낱말은 지난 일천여 년 사이에 한자말에 짓밟혀 수업이 잡아먹혔다.
지금 당장 학문에 쓰이는 토박이말이 모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배달말 탓이 아니다. 지난날 학자들이 한문으로만 학문을 하면서 토박이말을 부려 쓰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학문에 쓰이는 말이 없다. 왕조가 끝나고 일백 년이 되었지만 그 동안의 학자들도 토박이말로는 학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학문하는 데 쓸 만한 토박이 말이 없는 것이다.
말도 모든 자연물과 마찬가지로 많이 쓰면 살아서 불어나고 쓰지 않으면 시들어서 죽는다. 우리 토박이말은 농사짓고 고기잡이 하는 일에 많이 쓴 까닭에 그쪽에는 아주 푸짐하고 가멸지다. 일테면 쌀농사를 적게 하는 서양 사람에는 ‘쌀’이라는 낱말 하나로 여러 뜻을 싸잡는데, 우리 토박이말은 그것을 이름씨만으로도 ‘씻나락’,‘볍씨’,‘모’,‘벼’,’나락‘,’짚‘,’우케‘,’쌀‘,’겨(왕겨,등겨)‘,’뉘‘, ‘싸라기’, ‘밥’, ‘메’, ‘고두밥’, ‘죽’, ‘미음’ 같이 놀랍도록 가려서 낱말을 마련해 쓴다. 거기서도 ‘벼’와 ‘쌀’과 ‘밥’과 ‘죽’은 또 더욱 자잘하게 나누고 가려서 쓴다. ‘찹쌀’, ‘멥쌀’ ‘쌀가루’ ‘쌀겨’ ‘쌀기름’ ‘쌀눈기름’ ‘쌀깻묵’ ‘쌀뜨물’ 같은 것은 모두 ‘쌀’에서 어떤 속살을 다잡아 나타내는 낱말들이다. 이처럼 우리 토박이 말은 마음을 갖고 부려 쓰기만 하면 그 어떤 학문이라도 넉넉히 감당하고 남을 만큼 얼마든지 또렷하고 섬세한 뜻을 담아낼 수 있는 말이다.
학문이란 마음의 어둠을 밝히고 삶의 길을 넓히려는 일이지만 마음을 밝히고 삶을 넓히는 학문은 말로써만 할 수 있다. 우리 마음을 밝히고 우리 삶을 넓히려는 학문이라면 우리 마음을 담고 우리 삶을 다룰 수 있는 배달말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손쉽다고 들온말로 하는 학문은 우리 마음과 우리 삶을 제대로 다룰 수가 없다. 학문하는 말이라고 해서 애초부터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하는 사람들이 학문의 뜻을 담아 쓰다 보면 저절로 학문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입말(구어)’ ‘글말(문어)’ ‘들머리(서론)’ ‘마무리(결론)’ ‘갈래(쟝르)’ ‘놀이(극)’ ‘노래(시가)’ ‘이야기(서사)’ 같은 낱말은 이제 우리 국어국문학자들 사이에 제법 널리 쓰이는 학문의 말이 되었다.
옛날에는 중국 쪽으로 바라보던 사대주의가 오늘날에는 미국쪽을 바라보게 되어 그 방향만 바꾸었다. 이제는 미국말이 중국말보다 한층 더 위에 자리 잡고 위세를 부린다. ‘집과 건물과 빌딩’, ‘소젖과 우유와 밀크’, ‘밥집과 식당과 레스토랑’, 이렇게 배달말이 세 겹으로 눌리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토박이말보다는 한자말이 더 좋은 것을 나타내고, 한자말보다는 서양말이 더 좋은 것을 뜻한다고 생각하면서 이층의 들온말을 모시게 되었다. 말뿐만 아니라 글자조차 그렇다. 한글보다는 한자, 한자보다는 로마자를 우러러보는 풍토가 판을 치는 현실이니 지난날 한문을 자랑스럽게 쓰던 선조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토박이말은 떳떳하게 제 몫을 다하지 못한 채 주눅이 들어 있고, 들온말은 으스대고 뽐내며 활개를 치고 있는 상태에서는 겨레의 얼과 삶이 살아나기 어렵다. “배달말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에는 반드시 토박이말이 알맹이며 노른자위라는 사실을 먼저 알고서 대답해야 한다.
4. 사투리와 대중말
대중말이란 말의 동아리인 겨레에서보다 정치 동아리인‘나라’에서 사람들이 더 나은 말살이를 하도록 거울로 삼는 말이다. 나라에서 국민이 두루 막힘없이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약속하고 가꾸는 말이 대중말이다.(‘대중말’은 ‘대중어’가 아니라 표준어를 뜻하는 토박이 말이다. ‘대중’은 잣대라는 뜻으로 ‘대중없다’느니 ‘눈대중이 맵다’느니 하면서 아직도 쓰는 토박이말이다.) 사투리란 흔히 어느 지역이나 계층 안에서만 쓰는 말이라 한다. 그러나 대중말에 싸잡히지 못하고 그 바깥에 남은 말 모두를 뜻한다.(나라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어느 한 지방에서만 쓰는, 표준어가 아닌 말’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일부러 사람이 손을 대서 가꾸거나 다듬지 않아서 자연 그대로 살아 숨 쉬는 말이고, 대중말의 뿌리와 바탕이며 고향이고 어머니인 말이 바로 사투리다.
사람의 삶이 얼마쯤의 좁은 지역 안에서만 갇혀서 이루어지던 원시 사회의 기나긴 세월 동안에는 자그마한 동아리들이 나름대로 자기들의 말을 조물주로부터 허락받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이 넓어짐에 따라 작은 동아리들이 뭉쳐지고, 더욱 큰 동아리를 이루면서 드디어는 나라 동아리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인류 역사의 기나긴 흐름 안에서 말도 또한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 애초에는 따로 떨어졌던 말의 동아리들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몇씩 뭉쳐지면 그 가운데서 크고 앞선 동아리가 임자 노릇을 하면서 그들의 말이 뭉쳐진 동아리 모두의 대중말로 쓰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밖에 다른 동아리들이 예부터 써 오던 그들의 말은 저절로 사투리로 밀려나게 된다. 그러니까 사람의 말이란 애초에는 모두 사투리였던 것이고, 그런 사투리 가운데 하나가 대중말이 되어서 동아리를 하나로 묶게 하는 것이다.
나라라고 하는 커다란 삶의 동아리가 이루어지고 나면 여러 가지 까닭으로 해서 다져진 하나의 대중말이 절실해진다. 커다란 동아리 안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굳게 뭉쳐 하나로 어우러져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말이 온전한 하나로 굳혀져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도록 말의 통로가 잘 가다듬어져 있으면 그 동아리는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말의 통로를 마련하려고 나라마다 ‘대중말’을 가다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겨레는 일찍이 이런 대중말을 마련해 보려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신분 제도를 두고 여러 계층으로 나누어 하나 되는 통로를 막으려 애썼고, 까다로운 중국 글자와 글말을 들여와서 아래 층 사람들이 지배층을 넘보지 못하게 막았다고 해야 옳다. 지배층 사람들은 겨레 동아리가 하나 되어 뛰어난 힘을 떨치는 것보다 지배권을 오래 지키는 것을 더욱 소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겨레는 점점 힘이 빠지고, 만주벌 드넓은 땅을 세월이 흐를수록 중국에게 빼앗기고, 이십 세기에 들어와서는 남은 땅덩이 모두를 일제에게 빼앗기는 길로 역사가 굴러 떨어지는 빌미가 되었다. 나라를 빼앗기니까 나라의 값어치에 눈을 뜨고, 나라의 값어치를 깨달으니 저절로 나라말과 대중말을 걱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주시경 선생이 씨를 뿌리고 그것이 조선어학회라는 나무로 자라나서 우리 겨레 생기고는 처음으로 1936년에 일제의 등쌀 가운데서 ‘대중말’을 마련한 까닭이 거기 있다. 그리고는 광복을 하고, 나라를 다시 세우고, 국민 교육을 해 온 지가 사십년이 되어서야 겨우 우리나라로서는 처음으로 ‘표준어 규정’을 마련하였다.
대중말이 힘차고 푸짐하고 넉넉하려면 모든 사투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갖가지 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투리를 아끼고 사랑하며 북돋우고 가꾸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사람을 하나의 동아리로 묶어 서로 사랑하게 하려면 의사소통에 머무는 말로는 모자란다. 살을 맞대는 것과 같은 느낌과 마음이 오고 가야 하고 나아가서는 얼의 깊은 속살까지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말로써 사람을 그런 경지까지 하나 되게 하자면 토박이말의 뿌리인 사투리에 기대지 않을 수 없다. 사투리와 대중말은 한쪽을 아끼면 다른 쪽도 사랑하게 되고 한쪽을 키우면 다른 쪽도 자라게 되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5. 있어야 할 말과 있는 말
오늘 우리가 쓰고 있는 배달말은 입말이든 글말이든 전자말이든 지난날 ‘있었던 배달말’이며 그것의 자람이기 때문에 ‘있는 배달말’은 ‘있었던 배달말’을 싸잡게 되고 만다는 말이다.(‘있었던 배달말’을 생각할 때에 한문에 대하여 다시 짚어두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조상들이, 우리 땅에서, 우리 삶을 적었으니 ‘있었던 우리 글말’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입말을 적으려고 중국 글자를 빌렸던 우리 글말은 ‘향찰’이다. 향찰은 한자를 우리 입말을 적는 기호로 쓴 것이지만 ‘한문’은 중국 입말을 적은 글말일 뿐이다. 거기에는 우리의 학문과 예술이 있어서 우리의 유산이지만 어디까지나 외국어로 적힌 유산이다. ‘있었던 배달말’로서 ‘있었던 글말’ 안에 넣을 수 없고, 배달말 유산과는 달리 외국어로 적힌 유산이라는 사실을 또렷하게 가려 보아야 한다.)
그런데 배달말이라면 앞으로 있어야 할 배달말, 이상이며 바람인 배달말도 반드시 함께 싸잡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로서 있는 배달말이 아니라 겨레의 얼 안에, 겨레의 마음 안에, 겨레의 머릿속에 예언자처럼 꿈과 등불로서만 있는 것이다. 겨레의 얼과 마음이라는 자궁 안에서 태어날 때를 기다리며 자라고 있는 배달말이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배달말’은 어떤 것인가? 첫째는 입말과 글말과 전자말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온 겨레가 글 쓰듯이 말하고 말하듯이 글 쓰고 말하며 글 쓰듯이 보이는 것이 ‘있어야 할 배달말’의 첫째 모습이다. ‘말하듯이 글 쓰는 자리’에 가려면 글자가 한글 아닌 한자나 로마자일 수가 없다. ‘버스’라고 말하면 ‘버스’라 쓰고 ‘학교’라고 말하면 ‘학교’라 쓰는 것이 ‘말하듯이’ 쓰는 첫걸음이다. ‘버스’라고 말했는데 ‘bus'라 쓰고, ’학교‘라 말했는데 ’學校‘라 쓰는 것은 입말과 글말이 아직 하나 되지 못한 자리다.
둘째는 토박이 말을 배달말의 알맹이로 살려 쓰는 것이다. 토박이말이 가장 알맹이며 들온말은 가장자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데까지 들온말을 줄이고 이미 들어온 말이라도 토박이말을 찾거나 만들어서 그것과 바꾸어 가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옛날에 쓰이다가 짓밟혀 죽어버린 토박이말을 되살려 쓰는 슬기도 있어야 한다. 토박이말은 거칠고 더럽고 품위가 낮아서 쓰기가 부끄럽다는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아야 한다. 농어촌 전통 사회에 아직도 근근이 살아 있는 토박이말들을 모두 떳떳하게 되살려 쓰는 교육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소젖’보다는 ‘우유’가 좋고 ‘우유’보다는 ‘밀크’가 더 좋다는 생각을 바뀌어 ‘밀크’보다는 ‘우유’가 낫고 ‘우유’보다는 ‘소젖’이 훨씬 좋은 것으로 대접받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셋째는 사투리와 대중말을 함께 일으키고 드높일 일이다. 소리결이 아름다운 중부 지역 교양 있는 사람들의 사투리를 대중말로 삼았으면서 더욱 넉넉하고 아름다운 대중말이 되도록 쉬지 말고 힘써 가꾸어야 하겠다. 이제 ‘표준어 규정’이 마련되었으니 끊임없이 토박이말과 사투리를 찾아 살려 내어 그 모자람을 기우면서 대중말을 늘려 나가야 한다. 이렇게 하자면 학교 교육의 틀을 크게 고치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곧바로 모든 교과에서 대중말로만 적힌 책을 들고 공부해야 하는 현실을 바꾸어야 한다. 적어도 초등학교 중급까지는 삶터의 사투리를 마음 놓고 부려 쓸 수 있도록 해야 하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차차 대중말에 맛들이며 익히도록 해야 한다.
이미 말의 값어치를 잘 깨달아 자기네의 국어를 아름답게 가꾸어 온 서양 여러 나라들이 일찍부터 애써온 길도 반드시 넘겨다보아야 할 듯하다. 서양 사람들이 닿고자 하는 말의 모습은 네 가지다. 첫째는 쉬운 말이다. 겨레의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마음대로 주고받을 수 있는 말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어렵지 않고 까다롭지 않아야 한다.
둘째는 또렷한 말이다. 뜻이 어름어름하거나 소리가 흐리멍텅한 말은 쓰지 말고, 바로 거기에 꼭 들어맞는 말을 제대로 찾아 또렷하고 똑똑하게 쓰도록 해야 한다.
셋째는 올바른 말이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 말법에 어긋나는 말을 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넷째는 아름다운 말이다. 배달말 안에 감추어진 아름다운 소리와 뛰어난 힘을 찾아내고 드높여야 한다. 음성학과 수사법 같은 학문이 일어나서 우리 입말 소리의 속살을 더욱 넓고 깊게 밝혀내고 우리 글말 쓰기의 속내를 더욱 넓고 깊게 펼쳐내야 한다. 배달말의 아름다움을 깊숙이 파헤쳐 밝히는 학문도 힘써 일으켜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말꽃을 힘써 가꾸고 드높여야 한다. 말꽃이야말로 말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에게 ‘있어야 할 배달말’을 생각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한글 글자의 자모 체계다. ‘표준어 규정’에 따르면 배달말에는 열아홉의 닿소리(자음)과 스물하나의 홀소리(모음)가 쓰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 글자의 자모 체계는 자연의 이치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말소리를 만들어내는 이치가 홀소리를 닿소리보다 더 갖가지로 소리 낼 수는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닿소리는 목소리를 소리 내는 곳에 닿게 해서 갖가지로 다르게 만들어 내는 소리지만 홀소리는 그렇게 갖가지로 달리 만들어진 닿소리를 드러나게 해주려고 밑에서 떠받치는 소리다. 닿소리의 소리를 밀어주고 드러내주는 지렛대 노릇을 하는 소리가 홀소리다. 혀와 입술의 모양을 바꾸어 홀소리도 여러 가지로 달리 내기는 하지만 그것은 닿소리에 견주면 더없이 단조롭다. 한 마디로, 닿소리란 말의 소리를 가려 쓰도록 하려는 차별인자이고, 홀소리는 그런 닿소리를 드러내도록 받쳐주는 도움 인자이다. 그러므로 어떤 겨레의 말이라도 하나의 홀소리에 여러 낱의 닿소리가 달라붙어서 소리덩이(음절)를 만든다. 따라서 사람의 말은 홀소리의 수가 닿소리의 수보다 훨씬 적게 마련될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그런 이치는 우리 입말에서 나는 실제 소리에서도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말의 소리를 따라 적으면서 오늘의 로마자에까지 다다른 서양의 소리 글자 역사에서도 그 사실을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다. 저들이 뜻글자를 버리고 소리글자로 넘어오던 처음에는 오랫동안 닿소리를 나타내는 글자밖에 만들어 쓰지 못했다. 그때 저들의 귀에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닿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던 까닭이다. 닿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으므로 닿소리글자만을 만들었던 것은 바로 닿소리가 소리를 달리 내게 하는 자질을 그만큼 크게 지닌 때문이었다. 홀소리는 훨씬 뒤에야 소리로 확인되었고, 따라서 홀소리글자도 뒤늦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물론 변별 자질이 그만큼 흐릿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 ‘표준어 규정’의 글자 체계는 홀소리를 닿소리보다 더 많도록 마련해 놓고 있으니 자연의 질서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우리는‘표준어 규정’에서 내놓은 홀소리 모두를 제대로 소리 내어 쓰지도 못할 뿐 아니라 여러 홀소리의 소리가 비슷해서 또렷하게 가려 내지도 못한다. 소리 내는 기관을 골고루 써서 더욱 뚜렷하고 아름다운 갖가지 소리를 내는 우리의 ‘있어야 할 배달말’을 바란다면, 우리 한글의 자모 체계도 곰곰이 짚고 따져 보아야 한다. 그래서 있는 글자를 버릴 수도 있고 없는 글자를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그런 일을 해내야 한다.
6. 뜻매김
"배달말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한마디로 대답할 수가 없다.『표준국어대사전』처럼 “한 나라의 국민이 쓰는 말” 또는 “우리나라의 언어”라고 책임없이 대답할 수도 없고, 「국어기본법」처럼 “대한민국의 공용어로서 한국어를 말한다.”하고 좁디좁게 분질러 대답할 수도 없다 .
배달말을 연구하는 학자나 배달말 가르치기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런 정도의 뜻매김을 마음에 새기고 일을 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런 물음을 일으키고 이만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의 삶은 깊고 넓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배달말 가르치기는 마땅히 그럴 수 있도록 힘을 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