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6월 경북교육삼락회 문화유적답사 계획
일시 : 2016년 6월17일(금)
장소 : 수원화성. 용주사. 융건릉
반월당(08:00 출발) - (264.4km.3시간12분) - 수원화성연무대주차장(11:12 도착. 관람1시간30분. 수원행궁주차장에서12:42 출발) - (15.3km. 27분) - ** 점심 : 용주사부근식당가(1:09 도착. 식사 1시간.2:09 출발) - (1.7km.4분) - 용주사(2:13 도착. 관람 1시간. 3:13 출발) - (1.8km. 3분) - 융건릉주차장(3:16 도착. 관람 1시간30분. 4:46 출발) - (272.9km. 3시간) - 반월당(7;46 도착)
* 현지 사정에 따라 현동 될 수 있습니다.*
* 신청 : 남무열문화유적답사팀장 010-3510-4950(선착순 40분 모십니다) *
수원 화성(水原 行宮)
수원 화성(水原 華城.사적 제3호.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1-2번지)
수원 화성(華城)은 조선후기 정조(正祖)시대 성곽과 많은 부속건물, 도시기반시설과 생산기반시설들의 총화로 이루어진 자족적(自足的) 계획도시의 건설이었다.
화성성역(華城城役)은 조선후기 변화하는 세계정세 속에 외래문화를 수용하면서 주체적이고 실용적인 태도, 전통적인 것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창안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을 거울삼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의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1794년 1월 7일 돌을 채취하는 것을 시작으로 26일 총리대신(總理大臣)에 우의정 채제공(蔡濟恭 : 1720~ 1799), 감동당상(監董堂上)에 화성유수 조심태(趙心泰 : 1740~1799)를 임명하여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국왕으로부터 신료와 일반 백성의 노력이 결집되어 2년여 만인 1796년(정조20) 9월에 공사를 마친 뒤, 10월 16일 낙성연(落成宴)을 열고 완성하였다.
사적 제3호로 지정된 화성은 전체 길이 5,744m로 대부분을 돌로 쌓았으며, 일부 중요한 방어 시설은 벽돌로 쌓았다. 4개의 성문과 5개의 암문, 2개의 수문, 2개의 은구, 2개의 장대, 2개의 노대, 3개의 공심돈, 4개의 각루, 5개의 대포를 설치한 포루, 5개의 포루, 1개의 봉돈, 8개의 치, 3개의 포사, 용도 등의 시설물이 있다.
화성성역은 국왕 정조의 장기적 정치 구상에 따라 훗날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웅거할 정치적․군사적 거점으로 추진되었지만, 이는 조선왕조의 발전방향이나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면서 새로운 상업과 농업, 교통과 상품 유통의 중심도시로 건설되었다. 이 원대한 구상은 신민(臣民)의 협조와 참여에 힘입어 실현될 수 있었다. 신도시를 건설하는 실제적 구상과 작업과정에는 중흥을 맞았던 조선 문화의 세련된 수준이 충분히 반영되었으며, 정조의 의지 외에 여러 신료의 학문과 경륜, 민(民)의 호응, 그리고 조선정부의 충실한 재정과 운용능력 및 조선왕조의 경제적 문화적 역량 등이 총체적으로 투입되어, 왕조 중흥과 왕권 강화의 표상이라고 할 위대한 민족문화유산의 창출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 신도시를 둘러싼 시설인 화성 성곽은 조선의 고유한 성곽 특징을 잘 갖추고 있으면서도 조선 후기까지 축적된 전통적 성곽이다.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水原 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보물 제14호.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3-1번지)
이 비는 창성사에서 운명한 진각국사 천희(千熙, 1307~1385)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우왕 11년(1385)에 만들어졌다. 천희는 13살의 나이에 불교계에 들어섰다. 57세라는 늦은 나이에 중국 유학을 결심하여 1364년부터 2년간 원나라에서 선종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국사에 봉해져 부석사를 중수하는 등 고려 말에 활약하였다. 본래 광교산 기슭의 창성사 폐사지에 있던 것을 1965년 6월 9일 화성의 방화수류정 옆으로 이전하고 보호각을 설치하였다. 비(총 높이215cm)의 형태는 장방형 대석 위에 비신(높이150cm, 폭85cm, 두께13cm)을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었다. 비문은 이색(李穡, 1328~1396)이 짓고, 승려 혜잠(惠岑)이 글씨를 새겼다.
수원 방화수류정(水原 訪花隨柳亭. 보물 제1709호.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51번지)
방화수류정은 1794년(정조 18) 10월 19일 완공되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訪花隨柳)”라는 뜻을 지닌 방화수류정은 독특한 평면과 지붕형태때문에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화성에서 가장 뛰어나며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 서북공심돈(水原 西北空心墩. 보물 제1710호.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332번지)
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살핌과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로 수원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1796년(정조 20) 3월 10일 완공된 서북공심돈은 3층 건물로 아래쪽 부분의 치성(雉城)은 석재로, 위쪽 부분의 벽체는 전돌로 쌓았다. 내부는 전투에 편리한 구조를 갖추었으며 계단을 통해 오르내렸다. 1797년(정조 21) 1월 화성을 방문한 정조는 서북공심돈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효과적인 재료 활용을 보여주는 서북공심돈은 역사적, 학술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수원 화서문(水原 華西門.보물 제 403호.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334번지)
화서문은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이다. 1795년(정조 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1월 8일 마쳤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수원 팔달문(水原 八達門. 보물 제402호.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가 138번지)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했다고 한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5일에 완공하였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팔달문동종(八達門銅鐘.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9호.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가동)
고려 1080년(문종 34) 2월, 개성에서 주조되어 수원 만의사에서 사용되다가 숙종 13년(1687) 3월, 만의사 주지승 도화가 다시 주조되었다. 정조 때 화성축성과 함께 파루용의 기능으로 전락하여 화성행궁 사거리(종로)에 종각 설치 후 이전되었으나 1911년 일제에 의해 정오 및 화재경보용으로 팔달문 누상으로 다시 이전·설치되어 팔달문동종으로 불리게 되었다. 1976년 7월 3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서남암문(경기 수원시 팔달구 교동 6-197)
서남암문은 서암문의 남쪽 367보 되는 곳에 있는데 용도(甬道)가 실지로 시작되는 곳이고 화양루의 통로가 된다.
벽돌로 된 홍예는 안쪽의 너비가 7척 높이가 8척 5촌이고 바깥 너비 6척 높이 8척이다. 위에는 안팎으로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으며 그 안에다 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포사(鋪舍)이다. 서남포사는 암문 위에 있어 높은 곳에 의거해서 멀리까지 볼수 있기 때문에 군졸을 두어서 경보를 알리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집의 제도는 사방 1간이고 높이는 8척 5촌이다. 여기에 온돌 을 놓고 사면에 판문(板門)을 설치하고 그 바깥 쪽에 짐승의 얼굴을 그리었는데,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다
북포루(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332)
북포루는 북서포루의 서쪽 129보 5척의 거리에 있다.
치(雉)가 성 밖 19척까지 튀어 나왔다. 외면의 너비 27척, 5량 집을 지었다. 사방 2간인데, 구조는 동북포루와 같다.
3면의 평평한 여장은 누의 바닥과 이어지며, 각각 포를 쏘는 구멍을 내었고 안쪽에 나무사다리를 설치했다.
북암문(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60-45)
북암문은 동북각루의 동쪽 40보 되는 벽돌로 쌓은 성 사이에 있다.
안과 밖의 홍예 역시 벽돌로 쌓았다. 안쪽은 너비가 4척 6촌 높이가 6척 5촌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4척 높이가 6척이다.
문위에는 둥근 여장을 설치했는데 제도는 동암문과 같다. 홍예 사이에는 돌계단을 설치하여 들어가는 곳은 높고 나오는 곳은 낮게 만들었는데, 지세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북서포루(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320-2)
북서쪽에 위치한 북서포루는 검정 벽돌을 쌓에 치성과 같이 성밖으로 돌출시키고 내부는 나무판을 이용하여 3층으로 구획하였으며 포혈을 만들어 화포를 감추어 두고 위와 아래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북서포루는 성밖으로 약 8.8m 돌출되어있으며 지붕의 형태가 성안쪽은 맞배지붕형식, 바깥쪽은 우진각 형식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북서적대(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319-2)
북서적대는 장안문의 북서쪽 약 62.5m 지점에 있으며 1795년(정조 19년) 화성 축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적대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비치해 두는 한편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물이다.
화성 축성 때에는 이미 총포가 전쟁에 사용되던 때이지만, 옛날의 축성법에 따라 적대를 만들어 창과 활 대신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총안을 마련하였다. 이 적대의 규모는 높이 6.7m 성곽의 성가퀴와 가지런히 쌓되, 반은 성 밖으로 나가 있고, 반은 안으로 들어와 있다.
아래 부분의 넓이는 7.8m이고 위는 좁아져서 6.4m인데, 거기에 현안 3개가 나왔다.
좌우의 아래 넓이는 8.8m 위는 7.3m로서, 이 적대의 상부는 凸자 모양으로 성가퀴를 둘러 쌓고, 밖에 3면에는 높이 1.5m에 두께 85㎝의 성첩 11개를 쌓은 다음, 총안을 뚫어 놓았다.
또한 전면의 좌우에도 넓이 2.4m의 성가퀴를 쌓고, 그 안에 1.5m 폭의 공간을 만들어 적대위로 통과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북동포루(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135-3)
북동포루는 화홍문 서쪽 124보 3척쯤 되는 거리에 있다. 루는 대체로 5좌(座)가 있는데, 그 구조는 모두 똑같다.
성의 몸체에 凸 자 모양을 붙여 치성과 비슷하게 하고 집을 지었는데, 높이는 포(鋪)와 같다. 3층으로 하여 그 가운데를 비운 점이 마치 공심돈의 구조와 비슷하다.
모두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아래 넓이나 위의 줄어든 넓이가 모두 옛날 제도의 재돌(再突)하는 형세를 따랐다. 화포를 많이 감추어두어 위 아래에서 한꺼번에 쏘게 하였다. 지대(地臺) 위에다 벽돌을 쌓고 집을 지었는데 5량을 성 밖으로 나오게하고 3영(三楹)으로 길게하였다. 바깥 쪽 아래 너비 각각 24척, 위의 줄어든 너비 20척, 좌우의 아래 너비 각각 29척, 위의 줄어든 너비 27척, 높이 27척 5촌, 3면 벽두께 6척, 높이는 들보와 이어져 있고, 두께는 처마 두께와 비슷하다. 바깥 쪽 지대의 위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서 대포 혈석 2개를 놓았다.
좌우 면에도 사이에 3개의 혈석[혈은 사방 각 1척]을 놓았다. 벽돌로 쌓은 공간 안에는 평지에서 위로 5척 되는 곳에다 벽에 의지해서 3면에 포판을 두르고 총혈 15개[사방 각 9촌]를 내었다. 또 포판을 두른 곳에서 10척 쯤 위에는 3간 누판(樓板)을 깔고 누의 위 3면에는 총안 15개를 뚫어 놓았다.
외면의 총안 위에는 또 전안 4개를 뚫었다.
좌우면에는 위쪽으로 벽돌을 뚫고 작은 판문 셋을 설치하였는데, 밖에는 짐승 얼굴을 그리고, 각각 전안을 뚫었다. 문 사이 벽면에는 쌍으로 전안을 뚫어 놓았다. 안쪽은 성탁(城托)에 의지하여 전부를 돌로 쌓고, 그 위에 판문을 설치하였다.
문지방 안의 청(廳)의 끝은 사방 4척쯤 비워서 별도로 덮개판을 설치하여 밀고 당겨 여닫게 하였다. 거기에다 나무 사닥다리를 대어서 아래쪽 공간으로 통하게 하였다. 누 위의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고 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북동적대(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136-1)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이다.
포루와 치성은 성곽 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이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적대는 성곽보다 높게 만들어서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였으며 총안 등을 만들어 유사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북동적대는 장안문에서 동쪽으로 관통하는 도로를 건너있으며 1969년에 보수한 바 있다.
적대의 돌출길이는 8.9m 이고 폭은 6.55m이며 높이는 6.7m에 여장은 옥개부 밑까지 1.24m 이고 두께는 80cm 이다.
남측면에 돌계단 3 단을 두고 사방에 전돌로 여장을 둘렀다.
여장의 중심간의 길이는 남북으로 12.1m, 동서로 5.75m이며 凸형 여장이다.
성벽 전면에는 현안 3 개소를 두었다.
봉돈(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153)
봉돈은 일자문성(一字文星)의 위에, 동2포(東二鋪)와 동2치(東二稚)의 사이에 있는데 행궁을 안조(案照)한다.
4성을 쌓고 나서 파수(把守)를 설치하여 정찰할 임무를 맡긴 것은 척후(斥候)의 의미를 가진 것이니, 멀리 육지나 바다에 대한 경보를 알리는 것을 더욱이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드디어 철성(凸城)의 제도에 의거하여 비로소 봉돈을 설치하였다. 벽돌로 쌓아올려 성의 몸체 위에다가 벽돌로 다시 높게 쌓았으며, 성 밖으로 18척이나 튀어 나오게 하여 마치 치(雉)처럼 생겼으면서도 그 보다 크다.
외면의 돌로 쌓은 것이 5층, 벽돌로 쌓은 것이 62층으로 전체 높이 25척, 너비 54척, 현안 2구멍을 뚫었다.
내면은 굴곡이 지게 하여 3층으로 만들었는데, 제1층의 높이 4척, 두께 8척으로 5개의 화두(火竇)를 설치하였다.
화두의 밑둘레 각 17척 2촌, 위의 줄어든 둘레 11척 5촌, 높이 11척으로서, 성가퀴 위로 6척이나 올라갔다.
거구(炬口)는 허리 쯤 높이에 있는데, 길이 각각 3척 1촌, 너비 1척 5촌, 위로는 꼭대기까지 뚫어지게 하였는데, 꼭대기 부분 지름이1척이다. 5화두의 사이에는 성가퀴를 붙였고, 양쪽 끝은 구부려 안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3면에 포혈 18개를 갖추었다.
아래 두 층의 벽돌 층계는 너비 각 1척 4촌이고 높이 3척 3촌인데, 이것도 또한 휘어 구부려 3면 벽성을 만들고, 총안 18개와 누혈1개[사방 1척]를 내었다. 좌우의 구부러진 돌층계를 거쳐 위로 올라가서 거로(炬路)로 통하게 되었는데, 층계가 각 10층이다.
양쪽 가장자리의 층계 끝에는 벽돌로 지은 집이 이어졌고, 용마루 없이 기와로 덮었다. 남북에 각각 한 간씩 있는데, 남쪽에 있는 것은 온돌로서 지키는 군졸이 거처하는 곳이고, 북쪽 것은 판자를 깔았는데 기계 따위를 넣어둔다.
봉돈에서 성내로 들어가려면 이 2곳의 모퉁이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좌우 것이 모두 길이가 16척이다.
돌층계의 등에 기대어 하나의 네모진 성을 만들고, 층계 위에는 짧은 담을 3 층으로 만들었는데, 아래는 2집으로 이어지게 된다.
전면의 2간은 벽돌로 쌓은 담인데, 길이가 18척 6촌이고, 한 가운데에 작은 문을 홍예로 틀었다.
담의 높이 13척으로 높이가 집과 같다. 담의 안쪽 등의 아래에 해당하는 곳은 남북이 32척이고 동서가 21척이다.
저녁마다 남쪽의 첫째 횃불 구멍에서 횃불 하나를 들면 동쪽으로 용인 석성산(石城山)의 육봉(陸烽)에서 봉화로 응하고, 서쪽이 없으면 횃불을 들지 못하게 되어 있다. 다만 흥천대의 바다 봉화는 너무 멀어서 곧 바로 전하기가 어려우며 또 다시 화성부의 서쪽 30리 서봉산(棲鳳山) 위에 새로이 간이 봉화를 두어 여기에서 오는 봉화를 이 곳에서 전담하도록 하였다. 서봉산 사이 봉화는 또한 다섯 개의 화두(火竇)를 잡석대(雜石臺)위에 설치하였는데, 화두의 높이 11척이고, 아랫 둘레 13척인데, 돌로 쌓고 회를 발랐다.
그 꼭대기는 허리 쯤의 높이로 하였고, 모두 횃불 아가리가 있는데, 동쪽으로 화성부 봉돈의 봉화에 준하고 있다. 대 아래 산 허리에 4간의 곳간을 지어 군대 물품을 저장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수직청(守直廳)을 지었다.
동이포루(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8-1)
포루는 성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지음 목조건물이며 초소나 군사대기소와 같은 곳이다.
동이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 (정조 20)7월 3일에 완공되었다.
평탄하고 넓은 지형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돈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서북쪽의 포루와 다르게 성벽에서 많이 돌출되었으며 판문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동포루(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153)
동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 동일치와 동이치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정조20) 7월 16일에 완공되었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로 치성의 발전된 형태이다.
화성의 포루는 모두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공심돈과 같이 안을 비워 적을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공격할 수 있게 하였다.
동일치(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153)
치(雉)는 8곳이지만, 실제로는 16곳이나 된다.
위에 집을 지은 것을 포(鋪)라고 하는데, 8곳 치 가운데 포가 5곳이나 된다. 가운데를 비우고 벽을 친 것을 돈(墩)이라고 하는데, 돈이 2곳이나 된다. 위에 노수(弩手)를 매복시키는 곳을 노대라고 하는데, 대가 곧 8개의 치 중 그 하나이다.
그러니, 위에 집을 얹지 않고 여장만 있는 것이 치성 본래의 제도이다. 지금 8군데의 치라고 하는 것은 대(臺)와 포(鋪) 사이에 있으며, 그 간격은 대략 비슷하다.
옛 법에는 50타 만큼 씩 하나의 치를 둔다고 하였다. 꿩(雉)은 제 몸은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 하는 까닭에 이 모양에서 취한 것이다. 만약 적이 쳐들어와 성벽에 붙게 되면 우리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을 쏠 수도 없게 되고, 상대편의 갈고리나 몽둥이가 이미 성의 밑바탕을 허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좌우로 마주하는 치에서 탄환과 화살촉[丸촉]이 번갈아 날아온다면 비루(飛樓)나 운제(雲梯)를 어찌 설치할 수 있겠는가?
치의 제도는 凸 모양을 성면(城面)에 붙인 것인데, 높이는 성과 같이 하고, 긴 쪽의 너비가 대체로 3장(丈)쯤 되며, 바깥쪽으로 현안 구멍이 1개 있다. 그 둘레의 길고 짧음은 지세에 따라 각기 차이가 있다.
대체로 성은 굽고 꺾인 데가 많아서, 모퉁이와 마주치거나 문이 있는 곳에 이르면 스스로 치의 형상을 이루어 정성(正城)을 보호하게 마련이다. 이런 까닭에 타를 따지고 봇수(步數)를 계산하는 방법이 옛날의 제도에 기준할 수 없다. 북동치는 북동적대의 동쪽에 있는데 적대와 서로 이어져 있다. 3면이 여장이고, 5개의 첩(堞) 으로 나누어 지었으며, 각각 방안 3구멍을 뚫어 놓았다.
동암문(경기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60-44)
동암문은 동장대 서쪽 166보 되는 곳에 있다. 동쪽에 자리 잡고 북쪽을 향하여 있으며 벽돌로 안과 밖의 홍예를 만들어 말 한필이 지나갈 수 있다.
안쪽 너비는 7척 높이는 8척이고 바깥은 너비가 6척, 높이가 7척 5촌이다. 문 위는 벽돌을 깔았고 누는 세우지 않았다. 다만 오성지와 한 개의 큰 둥근 여장을 설치하였는데 마치 나무로 만든 전붕(戰棚)의 제도와 같다. 좌우는 각각 비예를 갖추었고 안쪽은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다. 나머지는 남암문과 같다.
동북포루(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산27-18)
동북포루(東北鋪樓)는 각건대(角巾臺)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방화수류정 동쪽 135보 4척쯤 되는 거리에 있다. 지세가 별안간 높아져서 용두(龍頭)를 눌러 굽어보고 있다.
『성서(城書)』에 이르기를, "치성의 위에 지은 집을 포(鋪)라 한다"고 하였다. 치성에 있는 군사들을 가려 보호하려는 것이다.
치성이 성 밖으로 18척 5촌이 튀어 나왔는데, 외면의 너비는 24척이고, 현안(懸眼) 1구멍을 뚫었다. 5량으로 집을 지었는데, 판자를 깔아 누를 만들었다. 7영(七楹) 3간이고, 높이는 여장 위로 6척 8촌이 솟았는데, 전체 높이는 13척이다.
여장의 3면은 모두 벽돌을 사용하였고, 여장 안은 벽등()을 이중으로 쌓았는데, 아래 위에 네모난 총안 구멍 19개[사방 각 9촌], 누혈(漏穴) 11개[사방 각 4촌]을 뚫어 놓았다.
누의 위 4면에는 판문을 설치하고 외면과 좌우에는 사안(射眼)을 내어 놓았다. 내면에 벽돌 층계를 설치하여 오르내리게 하였다.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고, 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동북노대(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57)
동북노대는 창룡문의 북쪽 96보의 거리에 있다.
치(雉) 위에 벽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었는데, 대 아래의 석축 높이 13척, 대의 높이 18척이다. 벽돌로 쌓는 방식은 사각형이지만 모서리를 깎아 벌의 허리처럼 만들어서 모를 죽인다. 안쪽 너비 17척 4촌, 바깥쪽 너비 19척, 성밖으로 나온 부분이 25척 5촌, 2개의 현안을 뚫었고, 위에 둥근 여장을 만들었다.
3면에 각각 1타씩이고, 바깥 쪽 2모퉁이에는 둥근 타구를 굽게 접히게 설치하였는데, 모두 방안(方眼) 3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타구마다 좌우에 凸모양의 여장을 끼고 있다.
안쪽 두 모퉁이는 평여장으로 굽게 접었는데, 모두 높이 6척 5촌, 가운데에 벽돌 계단을 돌계단과 이어지게 하였고 대 위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다. 담장 안의 남북의 너비는 14척, 동서 길이는 벽돌 계단까지 11척이다.
동북공심돈(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57)
동북공심돈은 노대의 서쪽 60보쯤 되는 거리에 있다.
성탁(城托)의 위 성가퀴 안에, 요동(遼東)에 있는 계평돈(平墩)을 본떠서, 벽돌로 쌓아서 둥그렇게 돈(墩)을 만들었는데, 겹으로 둘렀다.
높이 17척 5촌, 바깥 원 둘레 122 척,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척, 안쪽 원 둘레 71척, 내원과 외원 사이에 가운데 4척 5촌의 공간을 비워두고, 2 층 덮개판으로 둘렀다. 아래 층 높이 7척 3촌, 가운데 층 높이 6척 5촌인데, 모두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하였다.
바깥 쪽으로 총안을 뚫어서 밝은 빛을 끌어들이는 구실을 겸하게 하였다. 위 구멍은 26개, 아래 구멍은 14개[사방 각각 1척]이다. 위 아래 덮개판 위는 진흙과 회를 섞어 쌓았다.
아래 층 공심에서 구불구불한 벽돌 사닥다리를 거쳐 위로 올라가면 위층에 이르게 되어 있다. 그 규모는 기둥 6개를 세웠는데 길이 12척이고 너비 10척이며,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다.
평평한 여장을 둘렀는데 높이 5척, 위 아래에 포혈 23개와 누혈 6개를 뚫어 놓았다. 아래 층 안쪽에는 벽돌로 만든 홍예 모양의 작은 문을 설치하였다. 또 문 동쪽으로 공심을 막아서 온돌 한 간을 지어 놓았는데 방안(方眼)을 창으로 삼아 군사들이 출입하게 하였다.
남포루(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교동 6-197)
포루(砲樓)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치섬과 유사하게 축조하면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 그 안에 화포 등을 감추어 두었다가 위. 아래와 삼면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성곽시설물 중에서 가장 중무장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화성에는 벽돌을 사용하여 모두 5개의 포루(남포루, 서포루, 북서포루, 북동포루, 동포루)를 만들었는데, 서포루만 약간 작고 4개의 포루는 동일한 규격이다. 포루는 3층으로서 지대 위에 혈석(穴石: 대포발사를 위해 구멍을 뚫은 돌)을 전면 2개, 좌우 3개씩 놓았다. 그 위에 벽돌을 쌓았고 안쪽으로 판자를 잇대어 2층으로 구분하였으며, 총혈 15개를 만들었다. 지대 위에 뚫은 혈석은 포루(砲樓)에서만 볼 수 있는 시설이다. 상부에 문루 3칸을 만들어 총안과 전안을 뚫어 놓았고, 문루 바깥 면에는 짐승그림을 그렸다. 처마는 납도리 홀처마에 우진각지붕이다.
남포루는 팔달문에서 화양루(서남각루)에 이르는 방어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현재 팔달산 남쪽 중턱의 홍난파노래비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남포루는 1796년 7월 9일에 완성되었으며, 만드는데 3,203냥의 비용이 들었다.
북수문(화홍문. 경기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 190)
북수문은 편액에 화홍문[사인(士人) 유한지(兪漢芝)가 썼다]이라 되어 있다. 방화수류정의 서쪽 44보 되는 곳에 있다.
광교(光敎) 언덕을 대천(大川)이 가로로 자르며 흐르고 있어, 여름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하였다. 넓혀서 소통을 시키고 7간의 홍예로 된 돌다리를 하천 위에 걸쳐서 설치하였다. 그 동서로 3간은 아래 너비가 8척 높이가 7척 8촌, 가운데 한 칸은 너비가 9척, 높이가 8척 3촌이다. 7개의 안팎 홍예 사이에는 각각 좌우에 돌기둥 4개를 세웠다. 홍예가 서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잠자리 무사를 붙였다. 중앙에는 장군형 무사를 덧붙였다. 거기에 다리 놓을 돌을 깔고 다리 위 바깥 쪽에는 장대석(長臺石)을 설치하였다.
아래의 전석에서부터 다리 밑까지 높이는 8척 7촌, 다리의 두께는 1척 9촌이다. 장대는 높이 1척이고 다리는 너비가 31척 길이 95척이다. 장대 위에는 누조(漏槽)[각각 너비 1척 깊이 5촌] 7개를 설치하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첩을 설치했으며, 타구는 설치하지 않았다. 높이는 5척 4촌 두께는 4척 8촌이고, 아래에는 방안 대포 구멍[사방 각 1척]을 뚫었다. 위에는 소포 구멍 14개[사방 각 7촌]를 뚫었다. 안쪽은 장대만을 두고 누혈(漏穴) 6개를 뚫었다.
동서 양끝에는 8면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를 새겼다. 서쪽 기둥의 북쪽과 동쪽 기둥의 동쪽에는 짧은 담을 쌓고 전판문(箭板門)을 설치하여 동쪽 성의 길과 통하게 하였다. 다리 위 북쪽 편에 누각 6간을 지었는데, 동서로 가로 너비가 3간이고 남북으로 세로 길이가 2간이다. 모두 널빤지를 깔았는데 첩의 위로 높이 솟아나오게 하여 사면에 분합을 달고 동서남 삼면에는 연잎을 새긴 난간을 붙였다. 난간 아래에는 벽돌을 둘러서 담장을 만들고 남쪽 한 가운데 1간을 비워서 들고 나는데 편하게 하였다.
방사(放射)하는 제도는 포루와 같다. 다리 위에서 널판지 깐 데까지 높이가 6척 2촌이다. 북쪽 분합 밖으로 물려깐 널위에는 전붕(戰棚)을 설치하였고 판문 아래에는 벽돌로 된 첩과 이어지게 하였는데, 바깥 쪽에 짐승의 얼굴을 그리고 전총안(箭銃眼)을 뚫었다. 단확은 녹색을 바탕으로 하고 진채(眞彩)는 사용하지 않았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다. 누 남쪽 다리 위의 길은 너비가 5척이고 다리 아래 7개의 홍예에는 각각 쇠로 만든 전문(箭門)을 설치하였다. 줄로 양선(兩扇)을 걸어 당겨서 교면(橋面)의 석안(石眼)까지 꿰뚫고 지나가게 하였으며, 거기에다 고리를 설치하고 자물쇠를 달았다.
문 안의 양쪽 석축은 각각 길이가 6보 높이가 4척 5촌이고, 문 밖의 석축은 각각 길이가 5보 높이가 5척 5촌인데, 위로 성의 몸체와 이어져서 전체 높이는 16척이다. 이것이 실지로 내의 동쪽과 내의 서쪽이 서로 마주 서서 휘어 꺽여 원성(元城)이 되었다.
두 끄트머리는 전붕과는 좌우로 각각 29척이 떨어져 있는데, 여기에 또 좌우의 벽돌로 된 첩 위에 타구가 셋인 여장을 설치하여 담과 이어지게 하였다. 높이는 각각 4척 4촌이고 두께는 2척 2촌이다.북수문은 편액에 화홍문[사인(士人) 유한지(兪漢芝)가 썼다]이라 되어 있다. 방화수류정의 서쪽 44보 되는 곳에 있다.
두 끄트머리는 전붕과는 좌우로 각각 29척이 떨어져 있는데, 여기에 또 좌우의 벽돌로 된 첩 위에 타구가 셋인 여장을 설치하여 담과 이어지게 하였다. 높이는 각각 4척 4촌이고 두께는 2척 2촌이다.
창룡문(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3-1)
창룡문[편액은 판부사 유언호(兪彦鎬)가 썼다]은 성의 동문이다.
서남으로 행궁과 1,040보 떨어져 있고, 유좌(酉坐) 묘향(卯向)이다.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각각 아래 너비가 30척 높이 18척 5촌이며, 좌우의 와장대(臥長臺)는 길이가 각각 20척이고 돌계단은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이다. 바깥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이며, 안팎 홍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각각 17척, 양쪽 선문 안은 쇠로써 빗장을 설치하였다.
홍예의 덮개판 위는 3물로 하였고 두께는 3촌이며, 거기에다 안팎으로 장대 각 2층 홈통 각 2개를 더하였다. 안쪽은 평평한 여장으로 너비는 51척 높이가 4척 7촌 두께가 2척 1촌이다. 외면은 여장의 너비와 높이 두께는 모두 내면과 같다.
타구(口)는 6개[첩은 5개], 방안 총혈은 6개 [각각 사방 8촌 가운데 1첩은 구멍이 2개], 좌우의 여장은 각각 너비가 23척 높이가 5척 6촌 가운데에 작은 널판지 문을 설치하였는데 높이 6척 너비 5척 5촌이다.
장(墻)내에는 6간의 누를 세웠다[안팎 3포(三包)에 2익공(翼工)]. 정면의 간(間)은 너비가 16척 5촌인데 밑에 널판지를 깔았다[높이 1척]. 좌우의 협간은 각각 너비가 8척 5촌 모두 세로 2간이며 전체 길이는 16척이고 기둥의 높이는 7척 5촌이며 단확은 3토를 사용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으며 수문청은 3간으로 문안 북쪽 가장자리에 있다.
동쪽 옹성의 제도는 고제에서 한 쪽만을 연다는 뜻을 취하여 옹성을 쌓았다. 성문의 왼쪽에 이르러서는 원성과 연결되지 않고 외문을 설치하지 않아서 경성의 흥인문 옹성의 제도와 같게 하였다. 옹의 형태는 문의 오른쪽 6보 3척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문의 왼쪽 6 보 3 척 되는 곳 에서 끝난다. 성과 이어지지 않는 곳은 그 사이가 4보 1척이다.
옹의 높이는 9척 6촌이고 내 면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7척이고 정문과 거리는 28척이다. 외면은 벽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1척이고 아래 두께는 11척 5촌이며 위의 두께는 줄어서 10척 5촌이다. 내면은 벽돌로 된 누조[각각 직경 5촌] 4개를 설치하였다. 평평한 여장으로 둘렀는데 높이는 3척 두께는 2척 5촌이다. 바깥 면은 현안[각각 길이 8척 5촌 직경 1척] 셋을 뚫었다. 여장 4첩을 설치하였는데 높이는 4척 5촌이고 원총안과 근총안[매 첩마다 3개의 구멍 또 북쪽 끝 가로 첩에는 2개의 구멍] 14기를 뚫었다.
옹성 위에는 회다짐을 하고[3물을 혼합하여], 그 남쪽 끝에는 돌층계를 설치하여 위로 원성과 통하게 하였다.
장안문(경기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329)
장안문[편액은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이 썼다]은 성의 북문이다.
행궁의 왼쪽 편인데 동쪽으로 780보되는 곳에 사좌(巳坐) 해향(亥向)으로 앉았다. 문의 안과 밖은 홍예로 되어 있다. 안쪽 홍예는 높이 19척 너비 18척 2촌이고, 바깥 쪽 홍예는 높이 17척 5촌, 너비 16척 2 촌, 전체 두께는 40척이다.
안쪽의 좌우에 있는 무사(武砂)[성석이 크고 잘 다듬어진 것으로 문 옆의 석면(石面)이 된 것을 무사라 한다]는 각각 아래 너비가 67척 8촌, 높이가 23척 5촌, 왼쪽과 오른쪽의 와장대(臥長臺)는 각 32척 4촌, 섬돌은 각 23층 너비는 17척 2촌이다. 바깥쪽의 좌우 무사는 각각 너비가 41척 높이가 23척 5촌이다. 안팎의 홍예문 사이에 있는 좌우 무사의 높이는 각 21척, 양쪽 선문(扇門) 안은 철엽(鐵葉)으로 하고 빗장을 설치하였다. 홍예의 덮개 판에는 구름무늬를, 그리고 판 위에는 세 가지 물건[석회, 가는 모래, 황토]으로 쌓았는데, 두께는 4촌이다. 안팎의 홍예 위에는 장군 모양의 무사와 2층의 장대를 얹었으며 홈통[너비 1척 깊이 5촌]을 네 곳에 설치하였다.
안쪽의 평여장(平女墻)은 너비 88척 7촌, 높이 4척 3촌, 두께 2척 5촌이고 바깥 쪽 여장의 높이 두께도 같으나 너비는 동서장 밖으로 각각 7척 4촌이 나왔다. 이 부분에서는 높이가 6척이 되어 옹성 위의 작은 홍예와 연결되며 타구(口)는 10개[첩(堞)은 11개]를 벌여 놓았다. 그리고 네모진 총혈(銃穴) 12개[네모의 한 쪽 길이는 8촌이며, 첩마다 1 개를 뚫었고, 가운데에 있는 1개의 첩에는 2개의 총혈을 뚫었음]를 내었다. 동쪽과 서쪽의 여장은 너비 3척 5촌, 높이 5척 6촌, 중앙에 각각 작은 판자문을 두었는데 높이는 6척 5촌 너비는 6척이다. 장(墻) 안에는 2층의 누를 세웠는데 전체 높이는 32척 9촌, 아래 위 각각 10간(間), 가로 너비는 5간 세로 길이는 2간이다.
아래 층[안은 7포, 바깥은 5포] 정면 간의 너비는 22척 5촌인데, 바닥[높이 1척]에는 널빤지를 깔았다. 오른쪽과 왼쪽 각각 둘 씩 협간(夾間)이 있는데 너비는 모두 12척이며, 세로 길이 2 간이고 전체 길이가 24척이다.
서쪽 협간의 첫째 간과 동쪽 협간의 두 번째 간에는 각각 곡란층계(曲欄層階)를 설치하여 위층으로 통하게 하였다. 서쪽 층계는 북쪽에서 올라가며 동쪽 층계는 남쪽에서 올라간다[서쪽 층계 아래에 살문[箭門]이 있는데 잠가두었다가 임금이 오실 때에는 연다].
위층[안팎 모두 7포]은 정면의 간과 좌우 협간은 너비가 모두 하층과 같고 두 번째 협간은 각각 너비가 9척이며, 그 세로가 2간 전체 길이는 18척인데 모두 널빤지를 깔고, 사면에 널빤지 문을 달았다. 그리고 3면에는 모두 짐승의 얼굴을 그려 호로전안(葫蘆箭眼)[널판지마다 구멍이 하나씩 있는데 경(經)이 3촌 직봉(直縫) 역시 3촌이다]을 뚫었는데 안쪽에는 태극을 그렸다. 단확(丹)은 3토를 사용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으며 문 안 서쪽 가에는 수문청을 별도로 세웠다.[협도(夾刀) 넷을 세웠다]
북옹성은 장안문의 외성이다. 성서(城書)에는 옹성의 크기는 정성(正城)의 대소에 따르며 모양은 옹기를 반으로 나눈 것과 같다고 하였다. 문 위에 적루(敵樓)를 세우지 않는 것은 정성이 가로 세워져 있어 적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옹성은 정문 좌우의 무사에서 각각 7보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벽돌을 쌓아서 성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17척 안쪽 둘레는 159척 6촌 바깥 둘레는 209 척이고, 아래는 두께가 15척이고 위는 줄어들어서 12척이다.
바깥 쪽에 현안(懸眼) 16개를 뚫었다[각각 길이 2척, 지름 2척 2촌]. 안 쪽에 벽돌로 된 홈통 8개[지름 각 5촌]를 설치하였다. 옛 제도에는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한쪽 문만을 열었으나 지금은 사방으로 열리고 팔방으로 통한다는 뜻을 취하여 중앙에 문을 설치하여 정문과 마주하게 하였다. 양문의 사이는 10보 3척이며 돌로서 안팎으로 홍예를 만들었다.
안쪽의 홍예는 너비가 18척, 높이 19척이고 바깥 홍예는 너비가 16척 높이가 17척 5촌이며 안팎 홍예의 사이는 좌우 높이가 21척이고 양 선문(扇門) 안에는 쇠로서 빗장이 설치 된 것이 정문과 같다. 홍예의 덮개판 위는 세 가지 물건으로 쌓고, 다시 여러 장의 벽돌로 쌓았다. 그 위에 오성지(五星池)[『실정기(實政記)』에 이르기를 오성지는 모양이 구유같고 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크기는 되(升)만 하다. 적이 문을 불태우려 할 때 물을 내려보낼 수 있다]를 설치하였는데, 오성지 전체 길이는 14척 너비는 5척 깊이는 2척이고, 각 구멍의 지름은 1척이다. 오성지 위에는 성가퀴 9첩을 설치하였는데, 전체 너비 38 척이고, 그 좌우는 1층을 낯추어서 凸 모양의 성가퀴 7첩을 설치하였다. 너비는 각각 10척 2촌이며 높이는 모두 5척이다.
성과 만나는 곳에서 다시 凸의 반쪽 모양으로 층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9척으로 각기 총안을 1구멍씩 뚫었다. 안쪽은 둘레가 평평한 여장으로 높이는 3척 5촌, 두께는 모두 2척 6촌이다. 옹성 위는 모두 네모난 전을 깔고 좌우 끝에는 벽돌로 된 홍예에 작은 판문을 설치하여 성의 위와 통하게 하였다. 문의 양 옆은 평여장을 설치하였는데 높이는 10척 7촌이다.
북성의 적대는 2개로서, 각각 장안문의 좌우 53보 되는 곳에 있다. 옛 제도에는 70보 되는 곳에 1대를 세우고, 활화살 화창(火槍)을 대 위에 갖추어 둔다고 하였다.
성서에는 지금의 성은 화살과 탄환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 비록 창이나 선으로 위로 찌른다 해도 전체 높이가 여유가 있고, 대의 양쪽 가장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적이 곧 바로 성 아래로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또 포물선으로 날아오는 화살이나 비스듬히 날아오는 탄환도 대위에 있는 사람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 했다.
대략 이 제도대로 하면 대의 높이는 2척으로, 원성의 성가퀴와 나란하고 반은 성 밖으로 나오고 반은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깥쪽의 아래 너비는 26척이고, 위로는 줄어들어 너비가 21척이다.
현안(懸眼)[각각 길이는 20척이고, 지름은 5촌이다]이 3개 있다.
좌우의 아래 너비는 각각 29척이고 위로는 줄어들어 너비가 24척이다. 凸 모양의 성가퀴로 둘렀는데, 바깥 3면은 11첩(堞)이 있는데 높이는 5척이고 두께는 2척 8촌으로 각각 총안[사방 6촌]을 뚫었다. 내면은 좌우 평평한 성가퀴에 각각 1첩씩인데 높이는 8척 이고 가운데 5척은 속이 비게 하여 돌계단을 설치하여 대 위와 통하게 하였다.
수원 화성행궁(水原 華城行宮.사적 제478호)
신풍루(新豊樓)
화성행궁의 정문 신풍이란 '국왕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으로 정조대왕의 수원사랑을 보여준다.
수원 화성행궁(水原 華城行宮.사적 제478호.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번지)
원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성곽의 둘레는 약5.7㎞이고 성벽의 높이는 4~6m 정도인데 다산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며, 현재는 화성행궁과 내포사가 복원되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장안문·팔달문·화서문·창룡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수원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수원시청 자료)
좌익문(左翊門)
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으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道)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이다.
중양문(中陽門)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활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삼도(三道)
화성행궁의 정전 봉수당(奉壽堂)
나인처소
노래당(老來堂)
정조대왕이 왕위에서 물러나 수원에서 노후 생활을 꿈꾸며지는 건물이다.
낙남헌(洛南軒)
1795년 홍경궁 홍씨 회갑연 기간 중 과거 시험과 양로연 등의 여러 행사가 열렸던 곳이다.
득중정(得中亭)
정조대왕이 화성행궁 안에서 활을 쏘신 곳으로 모두 명중시켰다고하여 득중정이라 했다.
경룡관(景龍館)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누문 '경룡景龍'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으로 뜻한다.
장락당(長樂堂)
화상행궁의 침전으로 정조대왕이 혜경궁 홍씨의 만수무강을 빌며 직접 편액을 써서 걸었다.
복내당(福內堂)
화성행궁의 내당(內堂)으로 평상시에는 화성 유수의 가족들이 거쳐하던 곳이다.
유여택(維與宅)
정조대왕이 행차 중 잠시 머물며 신하들을 접견하던 곳이다.
비장청
서리청(書吏廳)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1795년 을묘원행시에는 수라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집사청(執事廳)
궁궐의 액정서(국왕이 쓰는 붓과 먹, 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권 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가지 설비, 비품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집사청에 마루에 전시된 여러 복식
수원 화령전(水原 華寧殿.사적 제115호)
수원 화령전(水原 華寧殿.사적 제115호.경기 수원시 팔달구 신풍로23번길 34 (신풍동))
수원 화령전은 1801년(순조 원년)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건물로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영전(影殿)이다. 영전은 보통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구별되는 건물로,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추모하던 곳이다. 화성에서 ‘화’자와『시경』의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歸寧父母]’라는 구절에서 ‘령’자를 따서 이름붙인 것이다. 화령전은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검소하면서도 품격있게 만든 조선시대의 대표적 영전이다.
운한각의 정조 영정
남군영(南軍營). 북군영(北軍營)
신풍루 좌우에 위치해 있으며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아는 건물이다.
용주사(龍珠寺)
용주사 대웅보전 앞 연등
용주사 호성전 앞 부모은중경탑
용주사(龍珠寺.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
지국천왕(持國天王). 증장천왕(增長天王)
광목천왕(廣目天王).다문천왕(多聞天王)
원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 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게 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불교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낙성식 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다. 전국 5규정소(糾正所: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곳) 중의 하나가 되어 승풍를 규정했으며,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했다.
또한 일찍이 31본산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수원, 용인, 안양 등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80여개의 말사,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현재 절의 신도는 약 7천여 세대에 달하며 정기, 비정기적으로 많은 법회가 이루어지고 또 법회를 통해 교화활동을 행하고 있다. 용주사는 이와 같은 수행자들이 모여 면벽참선하면서 진리를 찾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대중포교 활동을 통해 부처님의 지혜를 전하며, 또한 정조의 뜻을 받들어 효행교육원을 설립, 운영을 통해 불자교육을 서원으로 일반인도 누구든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효행교육으로 불교신행관과 인성교육을 사회로 회향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글 : 용주사 자료)
홍살문(홍살문(紅살門)은 능(陵)·원(園)·묘(廟)·궁전·관아 등의 정면에 세우던 붉은 칠을 한 문이다. 홍살문은 ‘붉은 화살 문’이라는 뜻으로 홍전문(紅箭門),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홍살문은 왕실의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의 입구에 붉은 칠을 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를 표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문이다.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었던 이유는 정조대왕께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護聖殿)을 건립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용주사에서는 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홍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일 년에 여섯 번의 재를 모셔 왔다 한다. 그러나 1907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로 중단되어 왔다. 100년 만에 사도세자 제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고, 호성전의 현판을 제막하는 것은 효찰대본산 용주사 창건 당시의 모습을 회복하여 우리나라 효문화를 선양하는 한편,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못 다한 혼정신성의 효를 사후에라도 실천하고자 하였던 뜻을 계승하고자 함이다 (글 : 용주사 자료)
삼문(三門 : 대궐이나 공해 앞에 있는 문. 정문(正門), 동협문(東夾門), 서협문(西夾門)의 셋이 있다)
절의 첫 입구인 일주문을 지나면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삼문을 맞게 된다. 마치 양반집 대가 같기도 한 이 건물은 좌우에 줄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양식으로 사도세자 현륭원의 재궁(齋宮)으로 지어진 절이기 때문에 이러한 건축양식을 지닌 것 같다.
동서의 옆문과 중앙의 대문에 각각 문이 나 있어 삼문이라 부르며 정면 도리 위에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의 글씨로 '龍珠寺'라는 현판이 자리하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글씨가 인상적이며 오른쪽 옆문에는 '中央禪院'의 현판이 세로로 걸려있다.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2호.화성시 송산동 188 용주로 136 (송산동))
삼문과 천보루 사이에는 효행박물관 앞의 5층석탑과 함께 또 하나의 5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다. 이 5층석탑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1702년에 성정(性淨)스님이 부처님의 진시 사리 2과를 사리병에 담아 석탑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세존사리탑으로 부르는 높이 4m의 이 탑은 전형적인 5층석탑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1층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차례로 올리고 상륜부에는 노반·복발·양화·보주를 모두 갖추었다. 기단의 면석과 탑신에는 우주(隅柱)가 모각되었으며 기단갑석 위에는 옥신고임으로 처리 되었다 .
옥개석은 처마끝선에서 약간 반전되었고, 옥개받침은 3단씩입니다. 전체적인 옥개석의 체감은 비율이 작아서 3층을 넘어서야 비로소 줄어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진시 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사리탑은 용주사를 참배하는 모든 불자들의 신앙의 귀의처가 되고 있다. (글 : 용주사 자료)
용주사천보루(龍珠寺天保樓.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 (송산동))
보천루 안쪽에 걸린 현판(홍제루 弘濟樓)
천보루는 절을 세울 당시에 지은 누각으로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짜맞춘 익공 양식이다. 좌우에 있는 요사채보다 앞쪽으로 나와 있으며, 2층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좌우 요사채 앞의 계단을 통해야 한다. 정면에서 보면 요사채 건물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 대웅보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천보루 아래를 통해야 한다.(문화재청)
삼문을 지나 절 경내에 들어서면 한 눈에 대규모의 누각이 정면에 나타난다. 1790년 절의 창간 당시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누각인데 도편수는 경상도 영천 은해사(銀海寺) 쾌성(快性)스님이 맡았고, 강원도 삼척영은사(靈隱寺)의 팔정(八定)스님이 단청을 하였다.
천보루의 아래층은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통로로써 여섯 개의 목조기둥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가 석조기둥과 같이 커다란 규모입니다. 대체로 사원건축에서는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고 이러한 석조기둥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된다. 절의 창건이 왕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해주는데, 대웅전을 정면에 두고 오른쪽 벽면에는 별석으로 부모은중경을 한글로 새겨 절을 찾는 참배객들에게 효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누각의 좌우로는 7칸씩의 회랑이 맞닿아 있고 동쪽에 나유타실(那由陀寮), 서쪽에 만수리실(曼殊利室)이 회랑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창건 당시 그대로의 모습인데 사원건축이라기 보다는 마치 대갓집을 연상케 한다.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모두 외정(外庭)으로 출입문이 나있고 또한 툇마루가 부속되어 있다. 외정 쪽의 방들은 외사랑에 해당하고 내정 건너 안채가 위치하는 이러한 구조는 민가(民家)의 건물양식 그대로이다. (글 : 용주사 자료)
용주사대웅보전(龍珠寺大雄寶殿.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5호.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 (송산동))
용주사의 가람구조에서 가장 중심되는 곳.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곳을 가리킨다.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부를 때 '대영웅 석가모니'라하고 줄여서 '대웅'이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이 계신 곳만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용주사는 '대영웅 석가모니불을 모신 보배로운 전각'이라는 뜻에서 대웅보전이라고 이름하였다. 대웅보전은 1790년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지어진 유서깊은 건물인데, 보경당(寶鏡堂) 사일(獅馹)스님이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를 맡아 대웅보전을 비롯한 145칸의 전각을 함께 지었다.
화성용주사대웅보전목조삼세불좌상(華城龍珠寺大雄寶殿木造三世佛坐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4호.화성시 송산동 188 용주로 136 (송산동))
대웅보전내의 삼세불상은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이다. 석가불을 주존으로 동쪽에 약사불과 서쪽에 아미타불이 협시하는 삼세불로서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었는데 재질은 목조이고 높이 110㎝로 2006년에 개금하였다.
서방아미타불은 전라도 지리산 파근사(波根寺) 통정 봉현(奉絃)이 조성하고, 동방약사여래는 강원도 간성 건봉사 통정 상식(尙植),석가여래는 전라도 정읍 내장사 통정 계초(戒初)가 각 조성하였다. 삼세불상은 이처럼 조각자가 다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는 비슷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석가여래와 아미타불은 상호가 네모졌고, 약사불은 둥근 형태를 지니고 있어 차이를 보이는데 각각 전라도와 강원도 조각승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모두 연화대좌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풍만한 얼굴에 짧은 목, 약간 앞으로 숙인 자세 등에서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나발에는 정상계주(頂上珠)와 중간계주(中間珠)가 크게 박혀있고 옷주름은 굵고 두터운 선으로 단순하게 처리되었다. 수인은 석가여래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마왕(魔王) 파순(波旬)을 물리치는 항마촉지인, 아미타불이 극락세계에서 대중에게 설법하는 설법인 그리고 약사여래는 오른손에 약그릇을 들고 왼손에 설법인을 쥐고있다.
한편 당시 대구 동화사(桐華寺) 승려였던 인악대사 의첨(義沾, 1746~1796)스님이 왕명으로 삼세불상의 복장문인 <용주사불복장봉안문(龍株寺佛腹藏奉安文)>을 지었는데, 국왕의 성은을 칭송하고 왕실의 안락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이 기록과 함께 스님이 찬한 <용주사제신장문(龍珠寺祭神將文)>,<경찬소(慶讚蔬)>가 《인악집(仁嶽集)》에 전하는데 정조가 이 글들을 읽고 경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석가, 약사, 아미타부처님은 우리나라 불교사의 흐름에서 보면 민중의 신앙으로서 꾸준히 신앙되어 왔다.
특히 약사신앙은 중생의 질병구제와 장수를 기원하고, 아미타신앙은 염불만으로도 서방극락왕생이 가능하다고 하는 이행도(易行道)로서 크게 신앙되었다. (글 : 용주사 자료)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龍珠寺大雄殿後佛幀畵.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호.경기 화성시 용주로 136 (송산동))
탱화란 불경에 관한 그림을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 형태로 만드는 것으로, 일반적으로는 절 내의 대웅전에 모시는 본존의 뒷벽에 자리한다.
용주사 대웅전 내의 불상 뒤에 있는 이 그림은 당시 연풍현감이던 단원 김홍도(1745∼?)가 그렸다고 하나, 그림의 하단에 기록이 적혀있지 않고 양식을 보아도 김홍도의 화풍과 차이가 있어 그의 작품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림은 길이 3.2m, 폭 2.7m 크기의 화면을 위아래 2단으로 나누어 그렸다. 상단은 중앙에 현재불인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왼쪽에 과거불인 약사불, 오른쪽에 미래불인 아미타불을 그려 놓았다. 하단에는 10대 보살 및 가섭과 아난, 그리고 나한과 사천왕 등을 배치하였는데, 그림 안의 여러 상들이 모두 상단의 삼세불을 향하여 시선을 집중하고 있어 원형 구도를 이루고 있다.
삼세불의 법의와 석가의 광배에 홍색을 칠하고, 대좌에는 청색의 연꽃을 표현하여 청과 홍의 대비를 보인다. 인물들의 얼굴과 드러난 신체 부위는 갈색 빛이 감도는 살색으로 처리하였다. 필선은 다소 딱딱한 편이나 모든 인물의 얼굴과 손에 서양화의 음영법을 구사하였는데, 이런 독특한 음영법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나타나는 특징으로, 이 시기 경기지역에서 활동한 경기파들의 작품에 보이는 표현수법이기도 하다. 또한 영주사 대웅전에도 똑같은 수법으로 그린 칠성탱화가 안치되어 있다.
따라서 이 탱화는 김홍도가 그렸던 원래의 그림이 아니라, 조선 후기에 다른 화승이 김홍도의 그림을 본 떠 새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문화재청)
대웅보전의 삼존상 뒤에 위치하는 삼세불의 후불탱화이다. 세로 440㎝, 가로 350㎝의 비단에 채색한 거대한 불화로 1790년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어졌다.
화면의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그 오른쪽에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이 협시한다.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동일하게 원형으로 두광·신광을 나타냈고 석가모니불만은 주형(舟形)으로 처리하였다. 화면의 하단에는 석가모니불 아래에 제자 아난과 가섭이 수학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바로 밑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시립하고 있다.
아미타불 아래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약사불 아래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각각 화려한 보관과 영락을 지니고 시립해 있고 하단의 좌우 가장자리에는 증장천왕(增長天王)과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숭엄한 부처님의 세계를 보호하고 있다. 한편 하단 중앙의 문수·보현보살 사이에 라는 은자서(銀字書)의 축원문이 적혀있어 후불탱화를 봉안함으로써 부처님의 가피가 왕실에 미치기를 기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상전하 수만세 (主上殿下 壽萬歲) 자궁저하 수만세 (慈宮邸下 壽萬歲)
왕비전하 수만세 (王妃殿下 壽萬歲) 세자저하 수만세 (世子邸下 壽萬歲)
화면의 상단 좌우 가장자리에는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역시 불법을 수호하고 중앙의 석가모니불 두광 좌우에는 화불(化佛)이 보이고 곳곳에 여러 제자와 천녀상이 위치하여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불화는 원칙적으로 한 치의 여백도 없이 꽉 찬 구도를 묘사하는데 이는 불법의 세계가 법과 지혜로 충만 된 완전의 공간이므로 이를 묘사한 불화는 마땅히 빈공간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불화의 전체적인 특징으로는 먼저 색조에 있어서 일반적인 불화의 주조색인 적색·녹색위주에서 벗어나 옅은 청색과 갈색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선의 처리는 다소 필력이 약하여 박진감과 생동감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조선시대 불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평면적, 도식적인 기법과는 거리가 멀다. 과장 없는 인체비례, 사실적인 얼굴표현, 침착한 설채법(設彩法) 등이 불화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인물이 표현에 음영법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즉 불화는 서양화법과 같은 원근법, 명암법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후불탱화의 인물표현에 음영을 나타냈다는 것은 불화를 그리는 전문적인 화승(畵僧)의 작품이 아니라 당시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은 문인화가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글 : 용주사 자료)
천불전(千佛殿.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188 용주로 136(송산동))
현재 천불전 자리는 과거에 노전(爐殿), 또는 향로전(香爐殿)이라고 불리던 건물이 있던 곳입니다. 이 자리에 최근 3년 동안 법당불사를 하여 93년 3월에 건물을 완성하고 천불전(千佛殿)이라 이름 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천개의 작은 불상을 봉안하였고 이 천불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한 것으로 주로 현재의 현겁천불을 이룬다.
건물은 석조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으며 팔작지붕을 올리고 그 내부에는 동쪽을 제외한 삼면에 마련된 9층의 단위에 천불이 봉안되었는데 그 마지막 아홉 번째 단은 건물의 평방도리를 이용하였다.
건물 내부의 중앙에는 석가모니, 비로자나 그리고 아미타여래의 삼세불을 봉안하였습니다. 이 삼세불은 대웅전에 모셔진 삼세불과 그 형식을 같이하여 조성한 것으로 머리 한가운데에는 붉은 계주를 넣었다(글 : 용주사 자료)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188 용주로 136(송산동))
대웅보전과 천불전 사이에 위치하는 전각으로 칠성, 산신, 독성이 탱화로 봉안되어 있다. 이 세 신앙은 불교를 신앙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불 수 없는 독특한 한국적 불교신앙으로 우리는 삼국시대에 불교를 수용하면서 불교이전의 재래 토착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조화롭게 수용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 재래신앙이 불교와 용합되면서 북두칠성을 신앙하는 칠성신앙과 스승 없이 혼자서 깨우침을 얻는 독성신앙, 그리고 산신신앙이 한국불교의 한 특성을 이루게 됐던 것이다.
칠성신과 독성, 산신을 모시는 전각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 존재한다. 각각의 신을 따로 모셔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이 별도로 존재하기도 하고 삼성각(三聖閣)이라고 하여 이들 세 신을 하나의 전각에 함께 봉안하기도 한다.
용주사의 시방칠등각은 세 신을 함께 모신 전각이다.
그런데 이 전각 이름은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매우 독특하다. 그 뜻을 살펴보면 먼저 시방(十方)이란 동·서·남·북, 동북·동남·서남·서북, 그리고 상·하의 열 곳으로서 무수한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한다. 칠등(七燈)이란 칠성, 즉 북두칠성을 가리키므로 시방칠등각은 결국 칠성각과 동일한 뜻이다. 이것은 절의 창건 당시 지금과 같은 시방칠등각이 아니라 칠성각이라는 전각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칠성각의 도편수는 경기도 안성 죽산 칠장사(七長寺)의 설잠(雪岑)스님이었고, 전각내에는 칠성여래사방칠성(七星如來四方七星幀)을 경옥(敬玉)·연홍(演弘)·설순(雪順)스님 등이 제작 봉안하였다. (글 : 용주사 자료)
화성 용주사 지장전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일괄(華城 龍珠寺 地藏殿木造地藏菩薩坐像과 十王像一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3호.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188 용주로 136(송산동))
지장전에 봉안된 이 목조각상 일괄은 원래 1894년 萬儀寺 지장전이 낡고 무너져서 이 곳용주사로 移安해 온 상들로서 이 중 목동자상 10구는 현재 용주사 효행박물관 전시실과 수장고에 나뉘어 소장되어 있다. 조선후기 목조각상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 작품들로서 명부세계의 존상 일괄을 잘 보존하고 있는 상들로서 의의가 있다. 총 31구는 지장삼존상3구, 시왕상10구, 귀왕상2구, 판관상2구, 사자상2구, 녹사상2구, 동자상10구이며 동자상을 제외한 나머지 21상은 지장전에 동자상은 용주사효행박물관에 있다(문화재청)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사찰의 건물을 명부전이라 한다. 그 내부에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어서 시왕전이라 하기도 하고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다고 해서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용주사에는 지장전이라고 이름 하여 지장보살 시왕, 판관 등을 봉안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지장전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모시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을 모시며 각 시왕 앞에는 동자상을 안치한다.
이밖에 판관(判官)·녹사(錄事), 그리고 입구에 장군(將軍) 등을 모시게 된다.지장보살은 석가여래이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몸을 육도(六道)에 나타내어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대자대비의 보살이다. 자신의 성불을 미루면서 악도에서 헤매거나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이 모두 성불하기까지 그 스스로가 성불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 보살이기에 대원본존(大願本尊)이라 이르기도 한다. 이 지장보살은 원래 천관을 쓰고 가사를 입으며, 왼손에는 연꽃을 쥐고 오른손에는 보주(寶珠)를 든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삭발한 머리에 석장(錫杖)을 짚고 여의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 많다.
지장보살상의 뒤편에 봉안되어있는 지장탱화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시립하고 이 두 보처를 중심으로 명부시왕·사자·판관·장군·사천왕·천녀를 도설 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7일마다 49일까지 일곱 번의 심판을 받고, 백일(白日)·소상(小祥)·대상(大祥)때가지 각각 한차례씩 모두 합쳐 10번을 10명의 대왕에게 생전의 죄업을 고백한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은 살아 생전 비록 죄업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열 번의 기회를 통해 가능한 한 구제 받도록 하는 자비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모든 중생을 하나도 남김없이 구제한 후에야 깨우침을 이루겠다는 지장보살의 대원력은 결국 저승의 세계가 아닌 이승의 세계에서 선근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글 : 용주사 자료)
호성전(護聖殿.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 용주사 (송산동))
정조대왕께서는 일반적인 제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던 듯 현륭원 옆에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용주사를 창건하고, 대웅보전 옆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각으로 호성전을 건립하였다. 호성전은 팔작지붕의 궁궐형식으로 지어진 전각으로서 사도제자의 위패를 모셔두고 매일 새벽, 한낮, 해질녘, 초저녁, 한밤중, 자정 이후 등 여섯 번의 재를 올렸다.
이후 호성전에는 정조대왕, 경의황후(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김씨(정조의 왕비)를 차례로 모시게 되는데 이때마다 49재(영산재)를 베풀 것은 물론 속절제와 기신제를 올려 극락왕생을 발원하였다. 호성전은 용주사 창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후 일반 맞배지붕으로 중건되었다.
용주사 동종(龍珠寺 銅鍾.국보 제120호.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 용주사 (송산동))
신라 종 양식을 보이는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범종으로, 높이1.44m, 입지름 0.87m, 무게 1.5톤이다.
종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 주는 용통이 있고,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몸을 들어 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어깨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는데, 아래 위 서로 어긋나게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꽃과 구슬무늬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4곳의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유두가 있는데, 남아 있는 것은 1곳 뿐이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三尊像)을 두었고,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두었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종 입구 부분의 넓은 띠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어깨띠와는 다르게 덩굴무늬를 두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종 몸체에 통일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조성된 것이라는 후대에 새긴 글이 있으나, 종의 형태와 문양이 그 시대와 일치되지 않아 학계에서는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통에 약간 금이 가고 유두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문화재청)
범종은 사원건물에서 쓰는 종을 가리킨다. 절에서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거나 모든 이에게 때를 알려주는 것이었다가 그 소리가 신묘하여 예불의식 등에 쓰이게 되었는데 범종의 소리는 중생의 마음속을 깊이 울려 어리석은 몸과 마음을 자비로운 부처님의 품으로 이끌게 한다. 이처럼 종소리만 들어도 번뇌가 없어지고 지혜가 자라난다고 하여 종소리 자체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범용통에 약간 금이 가고 유두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종을 살펴보면, 종의 정면 아래 부분에 연꽃을 아로새긴 당좌(唐座, 종을 치는 부분)와 종신의 양쪽 옆에 자리한 비천상을 대할 수 있다. 고려초기의 범종이라고 하지만 드물게 보는 큰 규모이며 신라시대의 범종 양식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다. 종의 정상부에는 신라 종에서 볼 수 있는 용뉴와 용통이 있다.
용머리는 종 정상부의 보주(寶珠)를 물어서 두발로 종의 정상부인 천판(天板)을 잡고 종 전체를 들어 올리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용통은 연주문(連珠紋)을 돌렸다. 여섯 단으로 구분을 하고 당초문(唐草紋)과 연꽃잎으로 장식하였다. 천판에는 아무 장식이 없고 상대와 하대의 무늬는 서로 다른 무늬를 하였다.
상대의 경우 신라 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원권(半圓圈) 아래위에 서로 교대로 배치하고, 그 사이 사이에 당초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종 밑에 돌린 하대에는 연속된 당초무늬로 장식하였다. 또 하대의 무늬에 당초가 한번 돌아 갈 때마다 그 중앙에 8엽 내지는 9엽의 연꽃무늬를 독립하여 배치하고 유곽의 문양대는 안쪽과 바깥쪽의 작은 띠 주변에 연주무늬를 두르고 그 가운데에 서로 연결되는 당초무늬 띠를 둘렀다. 유두는 둥근 연꽃잎 위에 도드라져 각 유곽마다 아홉 개씩 있다. 종신 아래 둥그런 당좌의 가운데 부분은 8엽의 연꽃무늬를 새기고 그 밖으로 연주무늬띠를 도렸다. 그리고 연주무늬를 다시 두르고 가장 바깥의 띠에도 연주무늬를 돌려 새김으로써 마무리 하였다.
종신에는 비천을 두 곳에 새겼고 그 사이 사이에는 연화좌위에 결가부좌한 삼존불상을 조각하였으며 보살의 천의(天衣)자락이 하늘을 향하고 있어 마치 천상세계에서 내려오는 듯한 형상을 보여준다. 종신의 비천상과 삼존불상의 사이에 추각(追刻)한 명문에 의하면 854년에 주조된 것이라 하는데, 이는 종의 형태가 고려양식이라는 점에서 일치하지 않고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황산(成皇山) 갈양사 범종 한 구 석(釋) 반야(般若)가 2만 5천근을 들여 조성하였다.
금상(今上) 16년 9월 일 사문 염거(廉居) 연기(緣起)
성황산(成皇山) 후신 화산(花山)의 갈양사 후신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 5월에 창건하였고, 동시에 이 범종을 주조하였다. 불기 2950년 7월 주지 석(釋) 송굴(松屈) 대련(大蓮)종의 크기는 총 높이 144㎝, 입지름 87㎝, 두께 5.8㎝ 상대너비 11㎝, 하대너비 12㎝, 당좌 지금 17㎝이며, 900여 년 전의 이른 새벽, 막 동터오는 화산(花山)에 울려 퍼졌을 그 우렁차고 은은한 소리는 아마도 무명에 헤매는 중생의 혼미한 잠을 일깨웠을 것이다. (글 : 용주사 자료)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佛說大報父母恩重經版.보물 제1754호.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0 (송산동, 용주사))
용주사의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佛說大報父母恩重經板)은 목판 42판, 동철판 7판, 석판 24판의 세 종류가 있다. 모두 73판으로 1796~1799년 사이에 조성되었다. 목판은 변상도, 과판(科判), 한문본, 국문본 등이 양면으로 양각되어 있으며, 동철판은 변상도 7판이 단면에 양각되어 있다. 특히 목판의 도각(刀刻)형태까지 동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석판은 과판과 한문본 등으로 단면에 음각되어 있다.
이 경판들은 정조의 명으로 조성되어 주자소에 내입(內入)되었다가 화성 용주사에 보내진 기록이『주자소응행절목(鑄字所應行節目)』에 수록되어 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은 매우 정교하고 장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변상도에는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의 화풍이 고스란히 살아남아 있으며 본문은 당대의 명필이던 오수(寤修) 황운조(黃運祚, 1730~1800) 서풍(書風)의 명품 경판(經版)이다.
오늘날 용주사 간행의『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전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것은 정조의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혼심을 쏟아 조성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 종류의 경판들은 당대 최고 장인들의 예술성까지 곁들여져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더욱이 보존상태가 온전하다는 점, 18세기 말의 국어사 자료가 된다는 점, 이전의 판화와는 달리 경판의 변상도는 공간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 등에서 가치가 충분하다. (글 : 용주사 자료)
전적수사본(典籍手寫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호.경기 화성시 용주로 136 (송산동))
조선 정조 19년(1795)에 왕이 내린 불교식 가사(歌辭)로, 손으로 옮겨 적은 본이다. 원래의 명칭은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인데, 화산의 용주사에 부처를 모시고 복을 기원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정조 13년(1789)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 배봉산(지금의 서울 청량리 일대)에서 화성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짓고 용주사를 건립하여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도록 하였다. 이 책은 바로 이때 용주사에 내린 것이다.
책은 전체 4부분으로 나뉘어 첫머리에 정조의 서문이 실려 있고, 초서 ·정종 ·결게 세부분에 불교 가사가 서술되어 있다. 각 조는 오언사구(五言四句)의 각 구절에 작은 글씨로 해석한 글이 붙어 있다.
용주사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수사본(손으로 베껴쓴 책)외에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어제화산용주산봉불기복게』가 소장되어 있다. 이 규장각 소장본은 태백산사고, 적성산사고, 오대산사고 등에 보관된 것으로, 용주사 소장본과는 약간 다르다. 규장각 소장본은 책이 아니라 31폭의 장첩으로(長帖:긴종이를 접어 책처럼 한 장씩 낱장으로 볼 수 있게 한 것), 글씨체도 다르게 보이며 한 행의 글자 수도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용주사 사본이 정조의 글씨인지 정밀조사가 요구된다.(문화재청)
어제 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御製花山龍珠寺奉佛祈福偈)는 1796년 5월 정조가 용주사 부처님을 받들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직접 쓴 게송이다.
가로 4.5㎝, 세로 68㎝로 닥종이에 먹으로 쓰여졌으며, 글씨는 해서이고 모두 두 권인데 어제본(御製本)답게 가장자리를 청동으로 제본하고 5개의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다.
내부는 붉은 선으로 굵게 경계선을 그리고 그 안에는 역시 붉은 색의 가는 선으로 칸을 나눠 글을 썼다. 글은 일종의 불교식 가사체로 먼저 절의 내력을 간략히 말한 후 ①초서분(初序分) ②정종분(正宗分) ③결게분(結偈分)으로 나누어 게송을 읊었다.
기복게를 짓는 취지를 "절은 현륭원의 재궁(齋宮)으로 건립하였다. 소자(정조)는 팔만 사천 법문의 경의(經義)를 베껴 쓰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삼가 게어(偈語)를 지어 삼업(三業)의 공양을 본받아 은혜에 보답하는 복전을 짓습니다."라 하고 부모에게는 길러주신 은혜가 있으니 공경으로써 공양하면 이것이 바로 보은의 길이라 하며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을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정조는 호문(好文)의 군주로 알려져 있을 만큼 그가 지은 각종 시·논·제문·찬 등은 무려 184권 100책에 달해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실려 전하며, 이 기복게는 정조의 수많은 글 중에서도 부처님에 대한 칭송과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잘 담고 있다.(글 : 용주사 자료)
용주사상량문(龍珠寺上樑文.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호. 경기 화성시 용주로 136 (송산동))
정조 14년(1790) 용주사를 건립할 때 정조의 명으로 채제공(1720∼1799)이 직접 짓고 글씨를 쓴 것이다.
정조 13년(1789)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을 양주 배봉산(지금의 서울 청량리 일대)에서 화성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이름 짓고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높혔다. 그리고 그 이듬해 용주사를 건립하여 아버지의 명복을 빌도록 하였다.
이 상량문은 중국의 소주지방에서 생산된 공단(두꺼운 비단 일종)에 쓰였는데 공단은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퇴색하지 않고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상량문의 내용은 용주사의 건립 내력과 공사날짜 등을 기록하고 있다.(문화재청)
1790년 용주사의 창건 무렵 채제공이 쓴 절의 상량문이다.
중국의 소주(蘇州)에서 직조한 주황색의 비단에 창사의 의미를 먹으로 썼는데 가로 약 15㎝,세로 94㎝의 크기에 유려한 필치와 문장으로 용주사 창건의 내용과 국왕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다.
구체적으로 상량문의 내용을 보면 "아름다운 염부(閻浮)의 나무가 있는 대지인 이곳 화산은 명산 속리산(俗離山)에서 지맥이 뻗어내려 북으로 오육백리 지점입니다. 지세의 변화는 마치 용이 꿈틀거리듯 조화롭게 서려있고 황홀히 구름을 타는 듯한 산천은 맑고 아름다움을 더합니다.
주상전하께서 지극한 효성을 다하여 선왕의 능침(陵寢)을 이곳에 정하고 상서로운 땅에 무한한 정성을 기울여서 절을 지어 자복사(資福寺)로 삼았습니다. 절이 완성된 후 영원토록 등불이 이어져 재해를 막고 나라에 복이 깃들며 길이 선침(仙寢)의 수호신이 될 것이며 아울러 국왕의 만수무강을 빈다"라고 하였다.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조선후기에 무신으로 벼슬에 올라 영조·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 채제공는 정조가 즉위한 이후 그는 여러 요직에 중용되었는데 절을 창건하던 1790년, 즉 상량문을 지었던 해에는 좌의정으로서 행정의 수반이 되었고 이후 3년 동안 왕과 독대(獨對)하면서 정사를 오로지 하였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을 무렵 왕의 명으로 지은 상량문은 당대의 세도가 다운 거침없는 필치와 활달한 문장으로 2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아름다운 구름무늬의 비단 위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글 : 용주사 자료)
용주사병풍(龍珠寺屛風.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호. 경기 화성시 용주로 136 (송산동))
풀과 나무의 모습을 채색하여 그린 4폭 병풍으로, 각 그림의 크기는 가로 65.5㎝, 세로 222.5㎝ 이다. 원래는 8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 폭에는 오동나무, 단풍나무, 매화, 모란 등 각기 다른 초목을 한 종류씩 그려 놓았는데, 오동나무를 제외하면, 각 폭마다 짙은 묵으로 그린 기이한 모습의 돌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어떤 폭은 푸른색의 바위와 붉은 꽃을 그려 색깔의 대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은 조선 후기인 19세기 궁중 가리개 등의 유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단원 김홍도(1745∼?)의 그림으로 정조가 용주사 창건시 하사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단원의 화풍과 많이 다르고, 19세기 화법도 일부 나타나고 있어 확실하지는 않다.
민화적 형식을 가진 특이한 작품으로, 그림의 화법이 매우 정교하여 우리나라 화단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문화재청)
용주사에는 대웅보전의 후불탱과 함께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진 4폭의 병풍에 그린 초목화가 소장되어 있다. 오래 전부터 그의 작품이라고 알려져왔으나 사실 이 병풍을 그린 화가가 김홍도냐 아니냐를 밝힐 수 있는 문헌적 자료는 없다.
전해져 내려오기로는 정조가 왕실에서 사용하던 것을 용주사에 하사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 화법이 정교하고 채색 또한 아름답다. 병풍의 크기는 가로 65.5㎝, 세로222.5㎝이며 종이에 채색한 작품이다.
조선후기를 대표했던 화원(畵員)인 단원 김홍도는 산수화와 인물화, 그리고 풍속화와 화조도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그림에 대한 재질을 유감없이 나타내었다. 당시 조선후기의 화풍은 남종화법과 그를 바탕으로 한 진경산수가 유행을 하던 시기였는데 그도 이러한 남종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산수화 등에 적용하였다.
병풍을 살펴보면 바위의 채색에 있어서 다른 작품들보다는 농묵을 사용하고 있으며 개성 있는 푸른색의 바위와 붉은 꽃으로 대비되는 표현이 눈에 띄는데 이러한 표현법은 19세기 궁중의 가리개와 같은 유물에서 불 수 있다. 이 초목화에서 사용된 수채화적인 채색법은 조선후기에 나타나는 이색화풍과의 관련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또한 바위나 초목에서 나타나는 구슬과 같은 둥글둥글한 원형의 점들 또한 19세기의 병풍이나 가리게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병풍의 각 폭에는 각기 다른 초목이 그려져 있다. 오동·단풍·매화·모란 등이 있는데 오동나무만 제외하고는 암갈색 혹은 푸른색의 바위를 안고 하늘을 오를 듯 피어 있다. 그 채색이 담담하여 수채화와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일반적인 민화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색채가 부드러워 현대인에게도 금방 친근감을 줄 수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글 : 용주사 자료)
금동향로(金銅香爐.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호. 경기 화성시 용주로 136 (송산동))
조선 정조(재위 1776∼1800)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용주사에 내려준 향로이다.
4면으로 된 몸체의 각 면에는 순금으로 덩굴무늬를 만들어 부쳤고, 사각으로 된 뚜껑에도 금 장식을 하였다. 뚜껑 꼭지 부분의 순금 장식물은 없어지고, 붙였던 흔적만 남아있다. 향로는 4개의 높다란 다리가 받치고 있으며 용모양이 조각되어있다.(문화재청)
형태나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명나라에서 만들어 진 것으로 추측된다.
지방 유형문화재 제11호로서 높이 40㎝, 가로 29㎝, 세로 20㎝의 방형(方形) 중국제 향로이다. 향(香)은 보통 입 냄새나 몸 냄새를 제거하고 집안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의 갖가지 취기를 없애기 위해 사용된다. 불교에서는 이 향이 마음의 때까지도 씻어준다고 하여 법회나 의식 등에 사용되었다.
일반적인 향로와는 달리 불교에서의 향로는 불보살에게 향을 공양할 때 쓰이는 것이며 2개의 촛대, 2개의 화병과 함께 오구족(五具足)이라 하여 불구(佛具)의 으뜸으로 친다.
불보살에게 향을 공양하기 위해 불단에 놓는 예배용 향로에는 부처님께 올리는 발원문을 새기고 은입사·선각·점각 등의 방법으로 제작연대·제작자·봉안사찰명 등을 기록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향로는 불보살에 대한 경배의 보조적인 역할 뿐만 아니라 향을 사름으로써 세속의 모든 번뇌망상을 사라지게 하고 청정한 법열의 삼매경으로 몰입하게 한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금동향로는 조선 초기에 왕실에서 사용되어 오던 것인데 정조가 절을 사도세자의 능침사찰로 조성하면서 청동향로와 함께 하사한 것이다. 네 마리의 용이 향로를 떠받들고 있는 형태로 향로의 몸체와 네 다리에는 금으로 당초무늬를 세공하여 붙임으로써 매우 화려해 보인다.
향로의 몸체 양쪽에는 역시 금으로 테를 두른 작은 손잡이가 있고, 향로 뚜껑도 금으로 테를 두르고 다시 중앙에 장방형의 테두리를 만들어 빗살무늬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네 귀퉁이에는 5엽의 금으로 된 국화무늬가 새겨져 있다. 정중앙에는 꼭지가 순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상부가 떨어져 나가고 중간의 보주형태를 한 손잡이 받침부분만이 남아있는데 사면에 순금장식이 있다.
그 아래에는 둥근 테두리 안에 8개의 꽃무늬가 장식되어있다. 전체적으로 향로 몸체의 무늬는 금판을 세밀히 가공한 후에 붙여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창건 당시에는 호성전(護聖殿)이라 하여 사도세자의 위패를 봉안한 전각이 있었는데, 바로 이 향로가 위패 앞에 안치되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글 : 용주사 자료)
청동향로(靑銅香爐.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호. 경기 화성시 용주로 136 (송산동))
높이 20㎝, 입지름 27㎝인 8각의 중국제 청동향로이다. 조선 정조(재위 1776∼1800)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용주사에 금동향로(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호)와 함께 하사한 청동향로이다.
몸체는 8각형으로 각 면마다 꽃모양의 창을 만들고 그 안에 산과 물, 나무들을 도드라지게 새겨 넣었다. 면과 면이 이어진 모서리에는 소용돌이 문양이 있는 판을 따로 만들어 붙여, 경계를 이루고 있다. 목 부분은 안으로 조금 들어 갔으며, 좁은 면사이에 ‘만세락(萬歲樂)’이란 글자를 새기고 덩굴로 장식하였다. 용모양이 조각된 반원모양의 손잡이가 2개 달려있다.
짧은 4개의 다리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밖으로 벌어져 안정된 모습을 하고 있다.
화성 용주사 삼장보살도(華城 龍珠寺 三臧菩薩圖.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5호. 화성시 송산동 188 용주로 136(송산동))
용주사 삼장보살도를 그린 불화승은 18세기 후반 전국을 무대로 활동한 인물로 설채법과 구도 및 필선 등은 18세기 후반 불화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왕실에서 발원한 의미성과 조선후기 불교회화사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화성 용주사 중종(華城 龍珠寺 中鐘.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6호. 화성시 송산동 188 용주로 136(송산동))
용주사 중종은 명문에 조성시기와 봉안처 및 불화승 등이 언급되어 있다. 중종의 형태와 문양 배치는 조선후기 전형적인 범종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불교공예사 연구에 중요한 작품이다.
화성 용주사 남무대성인로왕보살번(華城龍珠寺 南無大聖引路王菩薩幡.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7호. 화성시 송산동 188 용주로 136(송산동))
형태와 세부문양, 기법 등에서 최고급의 명품으로 볼 수 있으며 특히 오족룡이 문양으로 시문된 것을 보면 왕실과 직접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조선후기 섬유연구에 중요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 번(幡) : 불교에서 부처와 보살의 위덕을 나타내고 도량(道場)을 장엄, 공양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깃발.
화성 용주사 전답양안2건(龍珠寺田畓量案2件.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69호. 화성시 송산동 188 용주로 136(송산동))
일반적인 양안과는 달리 초록색 마포에 무쇠로 장정을 한 것은 이 양안이 일반적이지 않고 용주사의 토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 해당 지역의 사회경제사 연구 및 조선후기 사원전의 운영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가치인정.
화성 용주사 목조불패(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1호.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 (송산동, 용주사))
용주사 목조불패는 용주사 창건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주는 단서이며, 경기도내 목조불패 관련 상대편년 자료가 되는 작품이다.
화성 용주사 목조소대(華城龍珠寺木造疏臺.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2호.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 (송산동, 용주사))
목조소대는 전체적인 구조와 세부 문양이 매우 우수하여 용주사 창건시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 소대(疏臺) : 발원문發願文이나 소문疏文(부처님 앞이나 명부전(冥府殿) 앞에 죽은 이의 죄복(罪福)을 아뢰는 글)을 넣어두는 불전장엄구
화성 용주사 청동시루(華城龍珠寺 靑銅시루.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 (송산동, 용주사))
도내 청동시루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명문을 가진 청동시루와 비교하여 제작연대를 17-18세기로 추정할 수 있는 작품이다.
화성용주사오층석탑(華城龍珠寺 五層石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2호.화성시 송산동 188 용주로 136 (송산동))
용주사에는 모두 2개의 석탑이 있는데 그 하나가 효행박물관 쪽에 위치합니다. 전체높이 4.5m의 이 화강암 5층석탑은 부근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전한다. 우리나라 대개의 석탑이 가람의 입구나 법당 앞에 위치하는데 반해 이 석탑은 용주사 가람의 앞쪽에 자리하고 있어 역시 다른 곳에서 이전해 온 것임을 알게 한다.
제일 아래에 지대석이 있고 그 위에 하대석이 놓였는데, 지대석의 사방 각 면에는 귀꽃모양의 안상(眼象)을 3개씩 새겼고 그 위 기단면석에는 위패(位牌)형의 사각을 모각하였습니다. 1층 옥신에는 문비(門扉)가 새겨져 있고 1·2·3층의 옥개석 모두에는 4단씩의 옥개받침이 있으나 4층만은 2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5층의 옥개석과 맨 위의 상륜부는 하나의 돌로써 조성하여 간략화하였고 각 옥개석의 처마 끝에는 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전이 없는 수직으로 처리하였다. 이처럼 기단부에 안상이 있고 대체로 체감률이 적은 탑의 특징 등에서 고려시대의 석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강대종사 사리탑
전강대종사(1898~1975)는 현대 한국의 대표적 고승이자 용주사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합니다. 입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용주사 대중들에게 크게 추앙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스님의 행장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스님의 속성은 정(鄭)씨이며 전남 곡성출신으로 부친은 해룡(海龍), 모친은 황계수(黃桂秀)로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화상(霽山和尙)을 은사로, 응해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출가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습니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들어가 제산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고, 이후 예산 보덕사(報德寺), 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행에 전념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 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하며, 특히 100일 동안 자지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합니다.스님은 23세가 되던 1921년 드디어 크게 깨달은 후 오도송(悟道頌)을 남겼으며, 이후 당대의 선백들을 찾아가 인가(印可)를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의 한암(漢巖)스님을 찾아가자 한암스님이 믇기를 "육조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불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계속해서 용성(龍城)·혜월(慧月)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스님은 만공(滿空)스님을 찾아갔다가 더욱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스님은 처음에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지 못했다가 재발심을 하고 다시 정진하였으며, 마침내는 전법게(傳法偈)를 전수받으면서 선종 제 77대의 법맥을 계승하게 됩니다. 이후 33세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등 전국 유명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또한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을 차례로 지냈으며, 스님은 이후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15여년에 걸쳐 후학 지도에 전념하였습니다.
이러한 스님의 선풍은 제자 송담(松潭)스님이 용주사에서 오늘날까지 계승하고 있기도 합니다.1962년 대구 동화사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조계종 장로원 장로를 역임하였으며, 1969년 용주사에 중앙선원을 설립하고 용주사 선풍 진작에 크게 공헌 하였습니다. 끝으로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조실을 역임한 스님은 1975년 1월13일 앉은 채로 입적에 들었습니다. 스님은 특히 수행자들을 위한 수많은 설법 테이프를 남겨 놓았으며, 《전강법어집이 제자들에게 의해 출판됨으로써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글 : 용주사 자료)
전강스님 오도송(悟道頌)
昨夜月滿樓(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이 누각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창외노화추)
창 밖엔 갈대꽃 가을이로구나.
佛祖喪身命(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몸과 목숨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류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 구나.
만공스님 전법게(傳法偈) (글 : 용주사 자료)
示 田岡永信(시 전강영신)
佛祖未曾傳(불조미증전)
부처와 조사도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고
我亦無所得(아역무소득)
나 또한 얻은 바 없다네.
此日秋色暮(차일추색모)
오늘 가을 빛 저물어 가니
猿嘯在後峯(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뒷산 봉우리에 있구나.
鏡虛門人 滿空(경허문인 만공) (글 : 용주사 자료)
융릉·건릉(隆陵·健陵)
사도세자와 정조대왕 부자의 넋을 기리는 융릉·건릉(隆陵·健陵)
용주사를 지나 조금 더 가면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인 융릉과 건릉이 자리하고 있다. 200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융·건릉은 화성 8경 중에서도 미려함에서 으뜸으로 꼽힌다. 양지바른 곳에 놓인 두 개의 왕릉을 감싼 기품 있는 솔숲에는 정조에 관한 일화가 전해진다.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던 정조는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탄식했다. "네가 아무리 미물인 곤충이라지만 이리도 무엄하단 말이냐! 비통하게 사신 것도 마음 아픈데 어찌 너까지 괴롭히느냐"하고 그자리에서 송충이를 이로 깨물어 죽여버렸다. 당황한 시종들은 서둘러 송충이를 모두 없애버렸는데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도 능 주변에선 송충이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융·건릉을 둘러싸고 있는 솔숲과 참나무가 들어선 황톳길은 상쾌한 심호흡이 절로 나오는 향기로운 산책로다.
재실(齋室 : 능이
화성 융릉(華城 隆陵)
화성 융릉(華城 隆陵.사적 제206호.경기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안녕동))
융릉은 사도세자(장조의황제)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헌경의황후)의 무덤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장헌세자라 하였고, 1899년에 장조의황제로 추존하였다. 이때 혜경궁 홍씨도 헌경의황후로 추존하였다.
융릉은 원래 양주의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였다. 합장릉인 융릉은 병풍석을 세우고 모란과 연꽃무늬를 새겼다. 석등은 전기의 8각형과 숙종, 영조대에 등장한 4각형 석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이다. 문석인은 머리에 금관을 쓴 예가 나타나고 있어 19세기 이후의 무덤 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할 때 온갖 정성을 기울여 창의적으로 만들었다.(출처: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예감
곤신지(坤申池)
융릉주변에 조성된 원형 연못 곤신지(坤申池)는 융릉이 천장(遷葬)된 이듬해인 1790년에 조성되었으며, 곤신방(坤申方:남서방향)은 융릉의 생방(生方:풍수지리 용어로 묘지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물을 지칭)으로 이곳이 좋은곳(吉地)이기 때문에 판 연못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 장헌세자(추존 장조)의 왕이 되지못한 한을 풀어드리고자 융릉 풍수반룡농주형국을 보완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연못이다.
화성건릉 (華城 健陵)
화성건릉 (華城 健陵.사적 제206. 경기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안녕동))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그의 부인인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이다.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많은 인재를 등용하고, 조선 후기의 황금문화를 이룩하였다.
건릉은 현륭원의 동쪽 언덕에 있었으나 효의왕후가 죽자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하였다. 무덤은 한 언덕에 2개의 방을 갖추었으며 난간만 두르고 있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융릉의 예를 따랐다. 혼이 앉는 자리인 혼유석이 하나만 있으며, 융릉과 같이 8각형과 4각형을 조화시켜 석등을 세웠다.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참고물 : 문화재청 자료. 수원시청 자료>
첫댓글 예전 다 댕겨 왔지만 쪼르르 따라 댕길께요
또 복습 들어 갈려고 신청
하늘높은 장미의 계절
멋진 하루 만들어 갈께요
감사히 예습 했습니다
우와, 소빈님, 착한 생 답다. 우리 전주 李氏 조상님 참배 했다고 미기적 거리다가, 이번 참엔 후보자 자리에 등록 해 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