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이 다가온다며 지구 멸망을 걱정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2014년이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손편지는 1초도 안 돼 전송되는 문자메시지로 대체됐고, 하도 많이 펼쳐 봐서 꼬깃꼬깃하던 지도책은 네비게이션의 등장으로 자취를 감췄다. 어느 때보다 편리하고 합리적인 2014년이건만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허전하다. 불편하고 답답했지만 특유의 감성이 있었던 그때, 우리들의 20세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우리가 듣던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오면’이란 노래 가사를 좋아한다. 2014년 새해가 밝은 시점, 그 어떤 것보다 음악을 통해 나누던 정서적 공감대의 울림이 강했다는 것을 이 가사를 통해 다시 느낀다. ‘응답하라’나 ‘힐링’ 유의 드라마를 비롯해 각종 방송 프로그램, 영화 등의 영향도 컸다. TV와 인터넷, 각종 모바일 기기가 범람하는 요즘은, 누구나 쉽게 컴퓨터에서 음원 파일을 초고속으로 다운로드 받아 들을 수 있는 시대이자, 음악의 이름을 몰라도 굳이 DJ에게 물을 필요 없이 스마트폰에 조언을 구하는 시대다. 그럼에도 최근의 많은 이들은 DJ가 직접 음악을 고르거나 내가 직접 볼펜으로 적어 건넨 신청곡을 받아 틀어주는, 매우 아날로그적인 행위에 열광하는데, 그것은 마치 음식이 사람들이 음식에 있어 수제 버거나 수제 맥주에 열광하는 경향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즉 현대인은 ‘사람의 손길’ 자체가 그리운 것이다.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이란 말을 다시 한 번 실감하며 최근 주목받는 LP바들을 찾았다. 과거 ‘음악다방’을 연상시키는 올디스 팝과 가요가 흘러나오는 추억 속의 바에서부터 펑키한 스타일로 재해석된 펍에 이르기까지, 공간에서 풍기는 느낌과 그곳을 채우는 사람들의 연령은 달라도 LP 음악을 즐기며, 타인과 정서적인 공유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뜻을 같이하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추억으로, 또 어떤 이에게는 한없이 새로운 세상으로 다가올 LP바의 문을 바로 지금 열어보자.
대학 시험 보러 가는 길에 커피 한잔 마시러 들른 홍대 인근의 ‘카타리나’ 음악다방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The Doors의 ‘Hello I love you’에 심취해 DJ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는 오영길 대표. 고교 졸업 후 비교적 늦바람이 들어 음악을 좋아하게 됐다고 털어놓는 그는 현존하는 국내 LP바 시장에서 ‘큰형님’으로 통하는 인물이다. 음악다방과 막걸리집 DJ를 두루 거친 그는 2002년 신사동 가로수길 ‘트래픽’을 오픈해 강남권은 물론 물어물어 찾아오는 단골고객을 확보하며 승승장구하기에 이르렀고, 2012년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에 새로 둥지를 틀고 한층 더 쾌적한 환경의 LP바를 선보이고 있다. 몇 대를 이어 음식점 사업을 이어가는 일본처럼 자신의 아들 또한 그래 줄 것을 내심 바란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몇십 년 후 트래픽의 모습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LP바는 본래 위스키 판매가 주를 이루는 공간이지만 이곳에선 와인이 가장 많이 팔린다는 점도 이곳만의 이채로운 점이다. 팝과 가요의 비율은 대략적으로 8:2 비율로 크게 무리가 없다면 힙합을 제외하고는 장르의 제한을 두지 않는다며, 손님의 신청곡 또한 되도록 들려준다고 했다. 대신 다른 사람의 신청곡을 너그러이 함께 들어줄 수 있는 여유를 갖자고 당부했다.
LP 1만5000장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 LP바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인 신청곡. |
오영길 대표의 추천 뮤직
The Doors ‘Waiting for the sun’
도어스의 빅 팬이었다. 업장 이름 역시 ‘도어스’로 하고 싶었지만 당시 신촌에 도어스란 업장이 있었기에 ‘트래픽’이란 간판을 내걸게 됐다고 한다.
에디터 한마디
맥주 한잔하고 싶거나 와인 한잔하고 싶을 때 같은 값이면 이런 곳에서 마셔보는 게 어떨까. 젊은 세대라면 TV와 인터넷 외에도 LP바라는 아날로그적 쉼터에서 자신의 취향과 음악의 힘을 배워갈 수 있을 것이다.
BIZ HOUR 오후 7시~새벽 3시(일요일, 명절, 현충일 휴무)
ADD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48-5 지하 1층
TEL 02-3444-7359
PARKING 발레파킹
골목바이닐앤펍의 황세헌 대표는 DJ 출신도 레코드 가게를 운영한 적도 없지만 그야말로 LP판과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15년간 다니던 회사를 쿨하게 그만두고 지난해 8월 경리단 골목길에 가게를 오픈했다. 그렇게 이곳은 요즘 가장 핫하다고 불리는 LP바가 됐다. 사실 간판에는 ‘LP’, ‘바’란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서양에서 LP를 지칭할 때 통용되는 단어인 ‘바이닐(Vinyl)’과 맥주를 파는 ‘펍’을 섞어 ‘바이닐펍’이라 명명했다. 뭔가 LP바보다는 글로벌한 네이밍 센스가 엿보인다. ‘바’보다는 ‘펍’을 표방하기 때문에 인테리어에서도 자유로움이 묻어나며, 주인장이 한 장 한 장 정성껏 모은 LP와 CD, 각종 음악 잡지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거기에 LP바 중엔 흔치 않게 크래프트 비어, 트렌디한 느낌의 칵테일과 안주거리가 많아서인지 고객의 연령대도 30대가 많다. 어느 날은 영국, 어느 날은 방콕 같은 분위기가 연상된다는 한 외국인 손님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여러모로 매력적인 공간임이 틀림없다.
골목 어귀의 아지트 같은 느낌의 골목바이닐앤펍. | LP바로선 유일무이하게 크래프트 비어를 취급한다. |
황세헌 대표의 추천 뮤직
James Blake의 ‘Life Round Here’
추운 겨울, 집 안에서 히키코모리처럼 들을
수 있는 음악이라고 했다.
에디터 한마디
문을 열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 폴 벨몽도와 진세버그 주연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가 나오고 있었다. ‘누벨 바그’라 불린 새로운 흐름을 이끈 이 작품처럼 골목바이닐앤펍 역시 LP바를 이곳만의 스타일로 새롭게 재해석한 것 같다.
BIZ HOUR 월~금요일 오후 7시~새벽 2시, 토~일요일 오후 7시~새벽 3시(명절 당일 휴무)
ADD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557 2층
TEL 02-790-5979
PARKING 불가
발행 2014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