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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대금업자 반박
영원한 생명에 가까이 다다른, 완덕에 이른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면서,예언자는 그들의 고귀한 행위를 열거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그들은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놓지 않는다.” 성경은 많은 구절에서 고리대금을 단죄합니다. 에제키엘(참조: 에제 22,12; 18,8;18.13)은 이자를 받는 것이나,빌려준 것보다 더 많이 돌려받는 것을 가장 큰 죄에 속한다고 설명하며, 율법은 이런 관습을 엄하게 금지합니다. “너희는 네 친척과 이웃에게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신명 23.20-21 참조). 성경은 또 "거짓에 거짓을,이자에 이자를 더하고”(예레 9.5 칠십인역)라고 말하는가 하면, 많은 악이 넘쳐 나는 도시에 관해 시편은 이렇게 말하기까지 합니다. "고리대금과 거짓이 그 광장을 떠나지 않습니다”(시편 55,12 참조) [1]
기본적 인 생필품조차 없는 사람들이 목숨을 겨우 이어 가기 위해 돈을 꾸는데, 어떤 사람들은 원금을 돌려 받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의 불행을 이용하여 이익을 얻고 풍성한 수확을 거두려 하는 것은 더 없이 비 인간적인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1]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으로 우리에게 분명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한테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2 참조).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생계가 위험에 처한 사람이 그의 발 앞에 납작 엎드려 비굴할 정도로 간청하면서 뭐라고 말해도 전혀 자비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 본성을 무시하고, 그토록 간청하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고, 눈물로 호소해도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는 자신도 돈이 전혀 없어서 돈 꾸어 줄 사람을 찾아야 할 판이라며 맹세까지 함으로써 스스로 저주를 불러오고 맙니다. 그는 거짓말을 해 놓고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맹세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비인간성이라는 사악한 죄에다 덤으로 위증죄까지 범합니다. [1]
그대는 비참한 사람들의 불행을 이익 창출을 위한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마치 농부가 곡식을 많이 수확하기 위해서 비를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그대는 그대의 돈이 더 많은 돈을 벌어 오게끔 하기 위해서 가난과 궁핍에 찌든 사람들을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 그대의 고리대금은 거기서 얻는 이자 수익보다도 훨씬 더 많은 죄를 거두는 것 임을 모르겠습니까? 돈을 꾸려고 하는 사람은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생각하면서, 갚을 능력이 없어 절망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다급한 상황을 생각하며 그래도 돈을 꾸어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돈을 빌리는 사람은 빈곤에 굴복하고 머리 숙여 항복하고,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계약서와 담보물로 채권자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고 승리자가 되어 떠납니다. [1]
☕ 직업에 귀천은 없지만 영원한 생명에 걸림돌이 되는 직업도 있다.
“채권자와 채무자가 서로 만날 때, 주님께서 그들을 모두 방문하신다”(잠언 29,13 칠십인역). 한 사람은 사냥개처럼 달려가고,한 사람은 쫓기는 사냥감처럼 겁을 먹고 움츠립니다. 가난이 용기를 잃게 만든 것입니다. 두 사람 다 총액을 귀신처럼 외고 있습니다. 한쪽은 이자가 늘어나는 것이 즐거워서 그렇고, 다른 한쪽은 늘어나는 불행이 한탄스러워 그렇습니다. [2]
“네 저수 동굴에서 물을 마셔라”(잠언 5,15). 이 말은 그대 자신의 자산에만 눈을 두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우물로 가지 말고,그대 자신의 우물에서 생활의 안락함을 길어 올리십시오. 그대에게 청동 식기와 의복, 짐바리 짐승, 온갖 용도의 가구가 있습니까? 그것들을 모두 파십시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유를 선택하십시오. [2]
☕ 빚을 지는 것보다 자기가 가진 재산을 파는 것이 낫다.
“낯선 사람의 우물은 좁다”(잠언 23,27 칠십인역)는 말은 사실입니다. 부족한 것을 다른 사람의 돈으로 단번에 해결하려다가 그대의 재산마저 몽땅 잃는 것보다는,그대 자신의 돈으로 조금씩 해결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게다가 그 당시 그대한테 처분할 무엇이라도 있다면,왜 그걸 팔아 궁핍에서 벗어나지 않나요? 다른 한편으로,그대가 갚을 능력이 없는데 돈을 빌린다면,그것은 악을 악으로 치료하는 꼴이 됩니다. 고리대금업자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쫓기다가 사냥당하는 먹 잇감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2]
그대가 다른 사람의 재산으로 잠시는 즐겁겠지만, 나중에는 상속재산을 몽땅 잃게 될 것입니다. 지금 그대는 가난하지만 자유인입니다. 그런데 돈을 빌리면,그대는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넘기는 것입니다. 채무자는 채권자에게 하나의 노예입니다,[2]
그대의 가난이 달리기 선수처럼 그대를 따라잡을 것이고(잠언 24,34 참조), 그대는 다시 똑같은 궁핍에 빠질 것입니다. 아니, 더 가난해질 것입니다. 돈을 빌린다고 해서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난감한 상황에서 잠시 숨 돌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빈곤의 고통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견뎌 냅시다. 돈을 빌리지 않 으면,그대는 내일도 오늘처럼 가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돈 을 빌리면,이자 때문에 가난이 더 심해져 그대의 처지는 더 욱 나빠질 것입니다. 사실 아무도 그대가 가난하다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런 불행이 그대를 덮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이자를 주고 돈을 빌린다면,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모든 사람이 그대를 비난할 것입니다. [2]
분수에 맞게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희망을 믿고서 분명하고도 부정할 수 없는 악에 발을 들이는 것은 미성숙한 정신 상태라는 표시입니다. 어떻게 그 빚을 갚을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대가 빌린 돈으로 빚을 갚겠다고요? 그 돈으로는 가난에서 벗어나고 빌린 돈을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이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그 돈이 한편으로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고,다른 한편으로는 늘어나는 이자는 둘째 치고 원금이라도 갚을 수 있을 정도로 불어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그대가 빌린 돈으로는 그 빚을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인정합니다. [3]
실현 불가능한 그런 희망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미끼를 쫓는 물고기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물고기가 미끼 달린 낚싯바늘을 삼키는 것처럼,우리는 돈 때문에 이자라는 낚싯바늘에 걸려듭니다. 가난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부채의 치욕을 덮어씌웁니까? 아무도 더 큰 상처로 작은 상처를 치유할 수 없고,더 큰 악으로 작은 악을 없앨 수 없으며,고리대금으로 빈곤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3]
부자입니까? 그럼 돈 빌릴 일이 없겠군요. 가난합니까? 그럼 돈을 빌리지 마십시오. 잘살고 있다면,돈을 빌릴 필요가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면, 빌린 돈을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 돈을 빌리기 전을 행복했던 시절이라 여기는 일이 없도록,그대의 인생을 쓰라린 후회에 넘겨주지 마십시오. [3]
☕ 이자는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낚시바늘이다.
빚진 이는 가난한데도 걱정이 많고,밤에도 잠 못 들며, 날이 밝을 때까지 깨어 있고, 늘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3]
토끼는 새끼가 젖을 떼기도 전에 또 새끼를 낳는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대가 빌린 돈도 이자를 낳고,이자가 또 이자를 낳습니다. [3]
출산하는 사람이 출산의 고통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채무자는 약속한 상환 날짜를 마음에서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이자에 이자가 더해집니다. 사악한 부모에게서 사악한 자식이 태어납니다. 이자의 새끼를 ‘살무사의 새끼’라고도 합니다. 살무사가 어미를 갉아먹고 어미 태 밖으로 나오는 것처럼,고리대금은 빚진 사람의 집을 먹어 치우며 이자를 낳습니다. [3]
씨앗이 자라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동물이 어미가 되기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자는 오늘 태어나면 바로 번식을 하기 시작합니다. 어린 나이에 새끼를 낳기 시작한 동물은 출산 능력도 조기에 멈춥니다. 하지만 돈은 재빨리 이자를 낳기 시작해서 점점 더 많은 이자를 무한히 낳습니다. 그리고 모든 동물은 자신에게 맞는 적당한 크기까지 자라면 더 이상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욕심쟁이의 돈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결코 성장을 멈추지 않습니다. [3]
☕ 빚을 진다는 것은 죽음의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이다.
돈은 돈을 낳기 시작하면 새로 태어난 돈이 새끼를 낳고, 늙은 돈도 계속해서 새끼를 낳습니다. 이 괴물을 애당초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3]
☕ 현대 사회를 휘감고 있는 돈이라는 괴물.
그대에게는 두손이 있고 기술이 있습니다. 품괄이를 하든가 하인이 되든가 하십시오. 인생에는 많은 가능성과 기회가 있습니다. 일할 능력이 없습니까? 그럼 부자들을 찾아다니며 구걸하십시오. 구걸하는 것이 수치스럽습니까? 빌린 돈을 갚지 못한다면 훨씬 더 수치스러울 것입니다. [4]
☕ 돈을 빌려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구걸을 하는 편이 낫다.
개미는 구걸하거나 빌리지 않고도 자급자족할 수 있고, 꿀벌은 자신의 먹이 가운데 남은 것을 여왕벌에게 줍니다. 자연은 이런 생명체들에게 손도 기술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인간이고 창의력 있는 동물인데도,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수많은 방책들 가운데 단 한 가지도 찾아내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4]
돈을 빌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절제한 낭비와 쓸데없는 사치에 빠져든 사람들이고,여자들의 사치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노예가된 사람들입니다. [4]
“되돌려 받을 가망이 없는 이들에게 꾸어 주어라”(루카6,34 참조). 그러나 누군가는 “되돌려 받을 가망이 없는 대출이 대체 무슨 대출입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주님 말씀의 뜻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율법을 제정하신 분의 친절함에 놀랄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할 때, 그것은 선물이면서 동시에 대출입니다. 되돌려 받을 가망이 없기 때문에 선물이고,주님께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가난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그것을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에 대출입니다. 그분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조금 받으시지만,가난한 이들을 대신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되돌려 주십니다. “가
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하느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다” (잠언 19,17) [5]
☕ 가난한 이에게 베푸는 것을 하느님께서 갚아주신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통해서 이익을 챙기고,다른 사람의 눈물을 통해서 돈을 뽑아내고, 헐벗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때려 누릅니다. 그 어디에서도 자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친근감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그렇게 얻은 이윤을 인간 사랑의 혜택이라고 부릅니다! “불행하여라, 쓴 것을 단 것이라 부르고 단 것을 쓴 것으로 부르는 자들!”(이사 5,20 참조). 불행하여라,인간 혐오를 인간 사랑이라고 부르는 자들. 삼손이 자신의 술친구들에게 냈던,“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힘센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판관 14,14)라는 수수께끼도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5]
☕ 타인의 불행으로 자신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불행한 사람이다.
대줄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에게 사악한 행위입니다. 받는 사람은 재산을 망치고,주는 사람은 영혼을 망치기 때문입니다.[5]
첫댓글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하느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