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움'과 '강함'을 구족(具足)하기는 쉽지 않다. 대개의 경우 부드러우면 강하지 않고, 강하면 부드럽지 못하다. 안으론 수많은 시간을 자신의 절제에 쏟아야 되고, 밖으론 부딪히는 일마다 인욕(忍辱)해야만 부드러우면서 강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서울 성북구 삼성동 정각사(正覺寺)에서 2002년 6월25일 광우(光雨)스님을 만나 대담하는 동안 '부드러움'과 '강함'을 구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겐 엄격하고, 타인에겐 자비로운 구도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구니로서 동국대 불교학과 최초 졸업·정각사 창건·운문사 강원 원장·전국비구니회 회장 등 이력만 생각, 가까이 하기 힘든 스님으로 지레 짐작한 것이 잘못된 일임을 이내 깨달았다. 대화하는 동안 '친근함'에 살이 붙어 마침내는 '소탈한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광우스님이 지금처럼 부드러움과 강함을 겸비하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많은 수행·시간이 있었다. 일제강점말기·해방공간을 산 대부분의 스님처럼 광우스님도 14살에 상주 남장사 입산, 성문(性文)스님을 은사로 15살에 득도했다. 처음 입산한 남장사에서 들은 사미승의 염불소리가 그렇게 좋았단다. 입 속으로 가만히 따라 읊기만 했는데 저절로 외워졌고, <천수경>은 이틀만에 다 암송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출가하기 전의 광우(속명과 법명이 같음)에게 이상한 풍경이 목도됐다. 남장사 관음선원에서 수행·정진하는 선객(禪客)들, 벽만 보고 가만히 앉아있는 스님들 모습이 특이하게 보였다. 멋모르고 가까이 갔지만 종래에는 장난 끼가 발동, 정진하는 스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좌선하는 스님들이 갓 입산한 소녀 광우의 호기심을 발동시킨 것이다.
이런 행동을 눈여겨보던 관음선원 조실 혜봉(慧峰)스님이 방선(放禪)의 여가(餘暇)에 광우를 불렀다. "앞으로는 정진하는 스님들에게 그렇게 하지 마라." 자비로우면서도 엄한 조실스님의 말에 광우스님은 그제야 자신이 잘못했음을 알았다. 그리곤 "왜 하루종일 앉아 계신지요"하고 물었다.
그 때 혜봉스님이 갑자기 "광우야!"하고 불렀다. 깜짝 놀라 "네"하고 대답했다. "대답하는 그 놈이 무엇이냐?" "… …." "지금 선방에 앉아 있는 스님들은 바로 그것을 생각하는 거야."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것이 몰록 화두로 다가왔다. 머리칼을 자르지도 못했는데, 다음날부터 곧바로 관음선원 제일 하판에 앉아 정진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그렇게 참선하며 출가할 생각을 굳혔다.
출가 한 이래 광우스님은 동화사에서 <초발심자경문> <치문> 등을 배우고, 다시 남장사로 가 혜봉스님에게 <법화경>을 습득했다. <초발심자경문>을 뗀지 얼마 되지 않아 <법화경>을 익혔는데, 어느 날 혜봉스님이 '법화경해제'를 하루만에 다 외우라고 했다. 걱정이 태산같았지만, 고생 끝에 하루만에 다 외웠다. 당시 암기한 <법화경해제>는 지금도 그대로 기억하는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고 광우스님은 회고했다.
어찌됐건 이때 익힌 <법화경> 내용이 광우스님의 평생 지남(指南)이 되었다. 그러던 차 비구니스님들을 가르칠 강원이 없음을 안 혜봉스님이 관음선원을 관음강원으로 바꾸자, 그곳에서 근대 비구니계 3대 강백 중 한 사람인 수옥스님(1902∼1966)에게 <화엄경> 등을 전수 받았다.
강원 이력(履歷)을 마친 광우스님은 대학을 가고 싶었다. "대학가면 속퇴(俗退)하는 지름길"로 인식되던 시절. 그런데 은사 성문스님은 비구니임에도 대학가는 것을 지원해줬고, 광우스님의 평생 후원자 중 한 명이자 혜봉스님의 법상좌인 뇌허 김동화 박사(1902∼1980. 전 동국대 교수) 역시 "앞으로 시대는 대학을 가야한다"며 거들어 줬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전쟁으로 부산 대각사에 교사(校舍)를 차리고 있던 동국대학교에 입학했다. "법복(法服)입고 삭발한 채 대학 다니기 힘들다"는 말에 고민도 많았지만, 남장(男裝)하고 각 강의를 이수, 1956년 비구니스님으로서는 처음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을 마쳤다고 혜봉스님에게 인사하러 가니 스님이 "나는 지금까지 10년 동안 화엄경 산림법회를 했다. 이제부터는 네가 법화경 산림법회를 10년만 해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 아닌가. "아이고 스님 저는 아직 못합니다"며 버텼지만 결국 법회를 하게됐고, 하는 동안 <법화경>에 대한 이해·신심도 깊어져 "지금도 손에서 <법화경>을 놓지 못한다"고 스님은 설명했다.
'법화경 산림법회'는 1958년 포교에 원력을 세우고, 서울 성북구 삼성동에 창건한 정각사에서도 계속됐다. 한편에서는 일요법회, 어린이법회, 중·고등학생법회, 청년법회, 일반법회 등을 당시에는 처음으로 정각사에 개설, 직접 지도했다. 그리고 61년에는 최초의 사찰 포교지라 할 수 있는 <신행불교>를 창간, 문서포교에도 남 다른 힘을 쏟았다.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혜봉스님, 은사 성문스님, 김동화 박사의 후원 때문이었다.
정각사 창건 당시 김동화 박사는 '정신(正信)·정행(正行)'이라는 글을 써주었다. 사찰 이름도 '정각사'라고 직접 지어줬다. "바르게 믿고, 바르게 실천하자"는 이 글은 지금도 정각사의 슬로건이 돼 있다. 그래서 대웅전 안에는 부처님만 모셔져 있다. 김동화 박사는 또 거의 매번 일요법회에 나와 특강·법문을 해, 당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법음(法音)을 전파했다.
한편 삼성동 고개에서 도심 포교에 이바지하던 광우스님을 비구니계가 가만 놔두지 않았다. 운문사 강원 원장과 목동청소년회관 관장을 맡아 후학양성과 비구니스님들 위상 제고에 나서도록 했다. 그리곤 혜춘스님의 뒤를 이어 '전국비구니회' 회장 소임을 스님이 해야한다고 강요했다. 1968년 2월24일 발족된 '대한불교 비구니 우담발화회'가 1980년 개칭되면서 등장한 것이 지금의 전국비구니회. 95년 회장 소임을 맡은이래 스님이 가장 중점을 둔 불사는 전국비구니회관 건립 문제였다.
어렵사리 부지를 확보해 공사를 시작, 올 가을 낙성될 비구니회관은 전국 모든 비구니 스님들의 염원이 결집된 불사이자, 한국 비구니스님들의 위상을 한층 제고시킬 대 역사. 이것을 스님이 회장으로 있는 동안 많은 스님들의 도움의 받아 성공리에 회향시키게 된 것이다.
평생을 수행자로, 부처님 가르침의 전법자로 살아온 광우스님. 그런 스님에게 마지막으로 "불교가 무엇인지"를 질문했다. "자기를 성찰하는 것이 불교입니다"며 담담하게 답했다. 스님의 생평(生平)이 간단하면서도 진솔한 이 한마디에 스며들어 있는 듯 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근원을 찾고 자기를 성찰하면, 자기의 허물이 보인다. 허물이 보이면 참회하는 것, 이것이 부처님에게 나아가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말씀중인 광우스님>
● 광우스님과 전국비구니회관
98년 9월 기공식 거행
4년만인 올 가을 낙성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744번지 1천3백39평 일대에 올 가을 모습을 드러낼 전국비구니회관은 모든 비구니 스님·사찰의 총본산 역할을 하게된다. 중요한 의의·의미를 가진 비구니회관 건립이지만, 다른 모든 일이 그러하듯, 쉽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비구니회 출범 당시부터 '비원(悲願)'이었기에, 원력은 충천했지만, 원력을 구체화시키는데 적지 않은 지장이 있었다.
1989년 지금의 부지가 거론되자, 당시 집행부 측은 적격지로 판단하고, 서울시에 불하를 요청했다. 관계자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이 나왔다. 금방 타결 될 것 같은 '부지불하 협상'은 그러나 지리하게 시간을 끌었다. 3∼4년의 '길고 긴'(?) 협상 끝에 최종 결정이 났고, 서울시 도시개발공사로부터 계약을 '통고'받은 것이 91년 하반기.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부지에 대한 택지공급 협약이 92년 4월28일 체결, 회관 건립 부지가 이로써 확정됐다.
우여곡절 끝인 96년 12월31일 전국비구니회로 등기가 이전됐고, 설계업자를 선정해 설계를 진행했다. 수 차례의 설명회와 설계조정, 설계사무소 측 및 지역주민들과의 합의 등을 거쳐 97년 7월18일자로 건축허가가 떨어졌다. 마침내 98년 9월10일 기공식이 성대하게 거행됐고, 그로부터 4년 만에 대작불사가 완공돼 낙성식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95년 전국비구니회 회장에 취임한 이래 어려운 불사를 진두지휘한 광우스님은 "부처님의 가피와 전국 모든 비구니 스님들의 노력에 힘입어 불사가 원만하게 마무리 될 것 같다. 불사 과정에 도움 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며 "전국비구니회관은 앞으로 불법 홍포의 또 다른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