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키즈 풀 팬션에서/전성훈
한 달 전 예약한 키즈 팬션에 가는 3월의 마지막 주말, 이른 점심을 먹고 출발하려는데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다. 자동차 트렁크에 가져갈 짐을 넣고 갈 준비를 마치자, 손녀와 손자가 “할아버지 빨리 가요”라고 채근한다. 손주들의 설레는 마음을 보면서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하니 씁쓸한 미소만 떠오를 뿐이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부모님을 따라 가족이 함께 어딘가로 놀러갔던 기억이 전혀 없다.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그 때는 대부분 가정이 먹고 살기에 허덕이던 시절이다. 그렇기에 집을 떠나 어딘가로 바람을 쐬려간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만이 누리던 혜택이자 사치였다고 생각된다.
가평 가는 길은 오래전에 자주 다녔던 퇴계원에서 일동으로 가는 지방도로를 이용해서 간다. 때가 때인지라 토요일 오후인데도 그다지 길이 막히지 않는다. 키즈 팬션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있어 천천히 운전하며 달린다. 출발하고 잠시 동안 조잘조잘 떠들던 손주들이 어느 틈에 잠이 들어서 자동차 안이 조용하다. 조수석에 앉은 아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틀어놓더니 따라서 흥얼흥얼 읊조린다. 서파교차로에서 현리 방향으로 달리자 옛길은 어디로 가고 새롭게 만든 넓은 길이 나타난다. 신나게 달리는 자동차 차창에는 빗방울이 부딪쳐 떨어진다. 선잠이 깬 손녀가 “할아버지 얼마나 더 가면 되느냐”고 묻는다. 자동차 네비게이션은 10분 후에 목적지 숙소에 도착한다고 알려준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보니 숙소는 ‘아침고요수목원’부근에 있는 키즈 풀 팬션이다. 개별숙소에 조그마한 수영장이 딸려있고 부대 놀이시설로 미끄럼틀과 텀블링이 있어 팬션 이용료가 상당히 비싸다. 손주들이 수영장에 들어간다고 할아버지도 빨리 수영복으로 갈아입으라고 야단이다. 손주들 성화에 못 이겨 몇 년 만에 여름철도 아닌 봄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에 들어선다. 온수 이용료는 별도 비용을 냈다고 아내가 귀띔한다. 팬션 운영자는 돈 버는 방법을 잘 터득한 듯하다. 손주들과 따뜻한 물속에서 한 시간 가량 장난을 하고 났더니 힘이 빠지는 듯 한 기분이 든다. 목이 칼칼하여 평소에 마시지 않는 맥주 생각이 나서 숙소 매점으로 향한다. 매장은 무인점포이다. 어떻게 이용하는 줄 몰라 한참 동안 자동판매기 앞에서 서성거리며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본다. 사용법 글귀를 찬찬히 뜯어보면서 드디어 맥주 한 캔을 손에 쥐었을 때 느끼는 쾌감은 실제로 해 본 사람만이 알 것 같다. 능숙하게 무인점포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고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첨단 자동화기기 사용에 늘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끼는 나로서는 대단한 희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유리창 밖으로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면서 저녁 먹기 전에 맥주 한 컵을 비우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 요술 텀블링>
한 발짝으로 뛰면
요리 쿵
두 발로 폴짝 뛰면
저리 쿵
두발을 모아 거미줄처럼
팽팽한 그물망을 튕겨 오르면
몸이 하늘로 솟아오르네
엄마 여기 봐요
아빠 저기 봐요
이리저리 제멋대로
뒹굴고 옆으로 구르는
텀블링안에서
웃고 웃다가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이 아이가 도는
요술 텀블링
뱃속이 출출하여 삼겹살과 목살을 굽은 아이들 옆에 서서 분위기를 띄우려고 이런저런 내가 살아온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나니 더욱 더 한 잔 술이 생각난다. 농협하나로마트에서 구입한 25도 진로 두꺼비 소주, 한 잔을 털어 넣고 두 잔을 털어 붓고 세 잔을 입술에 당겨 입맞춤을 하고 나니 세상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진정한 술꾼도 아니면서 두주불사 술장사도 못되면서 술에 대한 연민을 잊지 못한다. 술을 늘 찾고 또 가까이 하려는 마음은 명월을 따라가는 짝 잃은 나그네의 생기 없는 발걸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술 몇 잔에 기분이 좋아져 잠시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형제 카톡방에 슬픈 소식이 하나 뜬다. 또 한 사람이 이승의 고통에 떠밀려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는 문자를 보며 다시 한 잔의 술을 기울인다. 세월은 가고 또 오겠지. 그러다보면 이번에는 내 차례가 오겠지. 누가 나를 기억할지, 누가 나를 위해 울어줄지 생각한들 무엇 하리. 길손은 갈 길을 가고 그가 떠나가면 또 다른 길손이 주막을 찾고, 주막집 아낙네는 가벼운 눈웃음을 짓고 농지거리를 치며 하루 장사를 마무리해야 하는 게 삶의 여정이 아닌지. 서산에 걸린 저물어져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살며시 웃음 짓고 손을 내저으면 그 또한 지나온 여정의 품삯을 내어놓는 게 아닐까.
다음 날 아침에 우산을 쓰고 팬션 밖으로 나가보니 어제 낮부터 비를 흠씬 맞은 대지가 봄빛이 완연하다. 팬션 건너편 산은 연두빛으로 옷을 갈아입고 ‘날 보러 와요.’라고 노래하는 듯 손짓을 한다. 1년 이상 고약한 코로나바이러스 탓에 숨죽이며 우울하게 살았던 사람들 마음에도 봄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 봄이 왔네, 봄이 왔어, 우리의 마음속에도 ....” (2021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