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說 허준(許浚) 第26話>
- 이은성 지음 / 소설 동의보감
出人 七年 第五
"어서 오게."
손씨가 방문 밖에 나타난 구일서의 아내 윤씨를 발견하고 환하게 말했다.
다희도 한지에 깨알같이 적은 글자의 내용을 시어머님께 읽어 드리고 있다가 구일서의 아내를 보자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윤씨는 방안에 어른이 계셔서 조심스러운지 선뜻 들어오려 않고 다희에게 말했다.
"홍진사댁 노마님께서 사람을 건너보내셨수. 새댁 바느질 솜씨 어디서 소문 들으시고 새 옷 한 벌 새로 지으시려나 보우."
"아이구, 이제 겨우 몇 벌이나 지었다고 소문이 났을라구. 다 이웃간에서 괜한 소문을 내준 탓이지."
손씨가 함빡 감사를 담아 대신 대답하자 아낙은 주근깨가 퍼진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괜한 소문은 왜 괜한 소문입니까요. 핑계대어 새 옷 해입는 사람들이 모두 보통 집안 사람들인가요. 다 이 고장에서는 내노라 하는 댁 안식구들인데 소문만 냈다가 솜씨가 안 따르고야 바느질삯은 고사하고 머리끄덩이 잡히기 십상이죠."
"지금 건너오라는 영이신가요."
다희가 묻자,
"집이 어딘 줄 자세히 얘기하고 사람은 돌아갔수. 박초시댁 별당마님 저고리감은 어찌 됐수."
"다 꾸미고 다림질만 남았습니다."
"그럼 이따 그거 전해주러 갈 때 홍진사댁에 거쳐오면 되겠네."
"좀 쉬어 쉬어 해야지. 홀몸도 아닌 터에 ..."
손씨가 며느리를 향해 애처로운 얼굴을 향하자
다희가 얼굴을 붉히며 문밖 구일서의 아낙에게 시선을 향했다.
"잠시 올라오셔요."
"그러게. 난 아들이 적어온 이거나 한번 들어보고 곧 나갈 터인즉."
그제야 아낙이 마지못한 체 들어와 앉으며 부러운 얼굴을 했다.
"새벽에 잠시 기척이 나더니 서방님께서 또 무얼 적어오셨나부지 ..."
"그랬어."
손씨가 대신 대답하며 불현듯 한숨 쉬었다.
"근자 유의원님께서 의원 시험차 한양에 가는 자제분께 여러 가질 가르치시는데 우리 이 사람이 더러 방문 밖에서 귀동냥하다간 이렇게 무얼 적어오군 한다우. 난 그 신기한 얘기들을, 이 아이가 읽어주는 걸 듣는게 요즘 낙이구."
"병을 낫게 하는 무슨 비방 같은 걸 적어오시나 부지요?"
"비방이 아니라 의원이 되려는 이가 알아놔야 할 그런 여러가지 얘기올시다."
"난 뭐 언문 몇 개도 모르는 까막눈이 돼서 ...
아무튼 새댁은 하늘에서 복받은 사람이우."
"제가요?"
"그렇잖구요. 여잔 삼씨 중에 한 씨만 타구나두 남편 사랑을 잃지 않는댔는데 새댁이야말루 삼씨 다 타구나구 어려운 글까지 다 아니."
"이런 진서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냥 ... 조금 뜻만 알 정도지요."
"삼씨라니 무슨 씨?"
손씨가 며느리 칭찬에 흐뭇해서 묻자,
"여자에게 씨가 따로 있나요. 후후. 마음씨, 솜씨, 맵시가 여자의 삼씨라구 한다던데요. 전 그중 하나도 못 가지고 태어난 쪽이구요. 어쨌든 전 새댁이 한땀 한땀 바느질하는 솜씨를 보면 마냥 황홀합니다."
"아이구 남의 소리 할 것 없어 ...
내 알기에 누구도 삼씨 갖춘 걸 아는 터니까는. 후후."
아낙이 극구 사양하는 소릴 했고 다희도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어디까지 들었누?"
손씨가 웃음 거두고 아낙이 나타나기 전까지 오가던,
새벽에 아들이 가져다놓은 한지의 내용을 채근했다.
유의태가 손잡아 자기 아들에게 직접 가르치는
그 의원 공부의 내용들을 기다리는 건 손씨만이 아니었다. 다희도 손씨 못지 않게 남편이 적어오는 그 내용들을 기다렸다.
모두 처음 듣는 얘기고 다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들이었으나 그 남편이 몰래 적어오는 한지가 열 장 스무 장 서른 장으로 불어나는 만큼 다희의 가슴에도 희망이 쌓여갔고 또 한편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도지의 공부방 밖 처마 밑에서 엿들어 적어오는 지식들이라는 데서 남편의 그 고군분투의 모습이 눈물겹고 감사했다.
어젯밤, 이미 4경이 지나 행여나 오실까 기다리던 남편이 오늘도 못 오시나보다 단념했을 때 밤길을 달려온 남편이 마당에서 기척을 냈다.
날 밝기 전에 다시 유의원 집에 돌아가야 할 그 남편과 뜨거운 포옹이 끝났을 때 그녀 또한 갈망해 마지않던 남편의 사랑 못지 않게 그녀의 가슴속에 방망이질친 건 오늘은 무엇을 적어 왔을까, 어서 그 내용을 보고 싶은 기대였다.
첫닭 울음소리를 들으며 남편이 돌아간 후 이미 세 번
네 번 읽은 내용을 다희가 시어머님께 다시 읽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내용은 우주와 인체를 비교한 신형장부론과 인간에게 의료라는 행위가 생기게 된 시원에 관한 것들이었다.
인간과 우주를 비긴 대목은 인간은 우주에서 가장 영귀한 존재로 보며 인간의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닳은 것이요. 발이 모난 것은 땅을 닳은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 사시가 있듯이 인간에게는 사지가 있고 하늘에 오행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으며 하늘에 육극이 있듯이 인간에게는 육부가 있다.
또 하늘에 구성이 존재하듯 인간에게는 구규(일명 구혈로 눈, 코, 입, 귀, 오줌구멍, 항문)가 있고 하늘에 십이시가 있듯 인간의 몸안에는 십이경맥이 뻗쳤으며 하늘에 이십사절기가 있듯이 인간에게는 이십사유가 있고 하늘이 삼백육십오도이듯이 인간에게는 삼백육십다섯골절이 있다 등이고.
의료의 시원에 대하여 적은 내용에서는,
의료란 애초 인간의 본능적 자구행위로서 제 몸에 가시가 박히면 그걸 손톱으로 집어뽑는 행위도 의료행위이며 그래서 신체의 부분이 저리면 주무르는일 부패한 음식을 먹고 속이 안 좋으면 토해내는 행위도 의료행위라는 것과, 그런 단순한 치료행위와 지혜가 점차 축적되는 속에서 인간들은 외상으로 다치는 일 외의 내부로부터의 병을 앓게 되는 원인은 입을 통한 음식행위 속에서 병이 몸속으로 묻어들어왔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 고통 속에서 애초 적절한 치료의 방법을 몰랐던 인간들은 어느덧 병의 침입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그 몸안의 역신을 몰아내기 위한 푸닥거리를 통해 빌어보다가 그도 효력이 미미하자 점차 그 귀신 따위보다 휠씬 위대하리라 믿는 신령이나 부처 심지어 또다른 힘을 지닌 귀신의 힘까지 동원하여 병의 접근을 예방하는 부적을 제 몸에 지니게 되었다는 것과,
이 무엇인가 몸에 걸치거나 지닌다는 행위를 복이라 하는데 그래서 약을 먹는 행위를 복약, 복용, 내복이라 이른다는 것하며, 또 약의 발생에 대해서는 그런 병고와 싸우던 인간들이 어느날 특수한 식물을 먹으면 그 작용으로 병의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후 그래서 풀을 먹으면 즐거워진다 편해진다는 뜻에서 약 약자가 만들어졌노란 그런 내용이었다.
유의태의 가르침에 비해 도지의 의원 공부는 적어도 아버지 유의태가 만족하거나 촉망하는 정도는 못 된 듯했다.
그래선지 한양에 올라만 가면 금방 입격할 듯이 서두르고 부추기는 어머니의 성화 속에 몸종삼아 장쇠를 데리고 상경하던 날 하직차 큰사랑에 나타난 그 아들에게 잘 다녀오라는 격려의 말 대신 "정 가려거든 세상구경이나 제대로 하고 오도록 해" 하는 차가운 한마디였다.
그리고 석 달, 유의태는 삼적대사와 함께 온다간다 말없이 집을 떠나 달포가 넘도록 집과 소식을 끊었다. 그러나 허준은 그 스승이 없건 있건 하루같이 지리산에 드나들었다.
유의태가 아들에게 가르치던 그 창밖에서 주야로 엿듣던 오묘한 의원의 세계에 차츰 눈을 뜨기 시작한 탓인지 약재창고 속에 찬 그 퀴퀴한 냄새가 이젠 허준에게 아내의 체온처럼 정다운 것이 되어갔고 이젠 허준 스스로 양질의 약재와 하질의 약재를 구분할 만큼 되었다.
그리고 그 욕심은 스스로 양질의 약재를 손수 캐고 싶다는 의욕으로 발전, 허준의 발자국은 당일치기 산행이 아닌 사흘, 닷새, 길어서 이레의 노정으로 늘어갔다.
남쪽의 주봉인 노고단에서 최북단의 천왕봉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헤매고 다니는 허준의 발자국은 직전 계곡(피아골), 반야봉, 불일폭포 등에까지 이르렀고 약재를 구하는 데는 큰 수확이 없어도 그 열성이 점차 오씨의 귀에 들어갔다.
스승이 안 계신다고 그 해방감에서 살판난 듯이 주막에서 외상술에 취해 게걸거리는 꺽새, 영달들에 비해 스스로 산속을 헤매며 약초의 생생한 모습을 익히고 다니는 허준의 열성은 다른 사람 아닌 허준의 뒤통수를 장작개비로 갈기던 황초잡이 임오근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 어느날, 석 달 허락받아 떠난 도지가 넉 달째 접어들어도 소식이 없던 늦가을의 어느날 허준이 약재창고를 맡은 지 실로 7개월이나 되어서 처음으로 유의태가 약재창고에 나타난 것이다.
아! 나타난 것이 아니라 허준이 지리산 산행에서 돌아오자 약재창고 안에 뜻밖에 유의태가 허준이 정리한 물목장부를 뒤적이고 있었다.
계속 ~~
[著者 放送作家 李恩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