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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영! 짧은 말로 잘 표현한 지난세기 음악의 대가 나운영 선생의 글 한토막을 인용한다.
"우리나라 가곡의 효시는 '봉선화'가 아니라 안기영 작곡의 '오늘도 조약돌을' '산고개' '진달래꽃'이라는 것을 극력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가 현제명 작곡의 '춘향전'(1950 년작)이 아니고 안기영 작곡의'콩쥐팥쥐'라는 것도 아울러 주장한다. 그의 작품은 1988년 10월27일에 해금되었으나 민속적 색채가 진한데도 별로 연주되지 않으니 기현상이다."
음악가 안기영 인물 발표회, 발표 : 안기영의 생질 이화옥
안기영에 관한 발표회가 2014년 5월 16일 한국인물전기학회 (회장 최종고 - Korean Biographical Society)주최로 열렸다. 이날의 주제발표는 어린시절 안기영선생을 보아왔고 오랜세월 그의 노래를 불러왔으며 안기영의 가족들과 주변사람 들로부터 얘기를 들으며 안기영을 생각 해왔던 안기영의 생질 올해 80세의 이화옥여사로 그의 생애와 음악활동 등 전반적인 발표를 해 주셨고 참여자들의 토론과 안기영 작곡 "그리운 강남", "마의 태자" 노래를 부르는 등 안기영에 관한 전반적인 조명이 있었다.
안기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春園 石松노래의 作曲과 나의 苦心" 이란 제목이 붙은 1930년 7월 1일자 삼천리지에 실린 梨花專門學校 敎授 安基永의 글 원문을 올리고 이화옥여사의 발표문이 다소 길어도 안기영을 연구하는 분들에게는 큰 도음이 될 것으로 생각되어 원문을 가감없이 올린다. 아울러 끝 부분에 그동안 춘하두동방송에 올린 글을 연결했다. "그리운 강남"은 석송 (김형원)작사, 안기영작곡으로 왕수복, 김용환, 윤건영이 1930년대에 불러 취입한 노래가 전해온다.
안기영선생님 글 (원문) 1930년 7월 1일 삼천리지
내가 조선에 도라와서 처음 작곡하여 발표하여 본 것이 가요협회에서 보낸 李光洙씨의 『우리 애기날』과 金炯元(호는 石松)씨의 「그리운 江南」 이란 두 가지엇슴니다. 고심끗헤 작곡하여 노코 내가 책임을 마터서 지도하는 聲友會員을 잇글고 작년 가을에 처음 公會堂에서 음악연주를 하엿든 것이외다. 그때 나는 의외에 이 두 작곡에 찬사를 보내어 주는 여러분이 잇는 것을 발견하고 붓그럽다할만치 감격에 찻든 것이외다. 그 뒤로 늘 게속하여 處處의 연주회에서 혹은 독창으로 혹은 합창으로 불럿은데 그때마다 간데 족족 호의를 표하여 주는데는 한쪽으로 수집으면서 깁분 마음을 금할 길이 업섯슴니다.
그런데 엇든 음악비평가 한 분이 「그리운 강남」과 「우리 아깃날」을 이러케 비평하여 줍데다.「그리운 江南」은 조선 사람의 심금을 가장 몹시 울니는 아리랑조을 醇化식혀 논 것으로 그 곡조가 野卑하지 안코 淸新하며 또 알기 시워서 어린 애들로부터 나먹은 어른들까지 부르게 된 것이 장점이라고요. 또 한가지 「우리 애기날」에 대하여는 樂句가 부드럽게 홀너서 마치 봄날가튼 후눅후눅한 風情이 잇다고 합데다.
이 비평이 가장 나의 마음을 붓잡는다할 것이외다. 그런데 「그리운 江曲」의 작곡은 몬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하는 후렴부터 생각하여 지엇든 것이외다. 그 동기는 나는 내 집이 서대문밧 애오개 넘어에 잇는데 학교에서 일을 다 마치고 석양을 등지고 하로는 무심히 그 고개를 훨훨 너머가다가 「라라라...하는 詞를 생각하고서 한참 그 고개에 안져 소리를 내어 불너 보앗지요. 그랫드니 자신이 醉하리 만치 맬로듸-가 생겨 집데다. 그 길로 곳 집에 가서 曲譜를 써 두어서 지은 것이 이것엇슴니다. 그러고 春園의 「우리 애기날」은 여러날 고심하엿슴니다. 내 딴으로는 예술적 가치를 집어 너흐려 애써서 거이 여러 날을 허비하엿든 것이외다. 처녀작곡의 上演 그는 작곡가로 안저 퍽으나 아름다운 기억이 될 것이외다. 그런데 나는 以上 2곡을 모다 호평아래에 발표한 것을 한끗 만족하게 생각함니다.〈55〉
이화옥 여사님 발표내용 전문
安基永의 생애 (성악가, 작곡가)
안기영은 한국에서 최초로 미국에 유학하여 양악을 전공한 음악가로 귀국 후 예술가곡 분야를 위시하여 한국 민요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민족 음악운동으로 향토가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형식을 개척했다. 그는 동요와 신 민요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탄생시키는데 기여가 컸고 광복 후 음악 교과서에는 그의 작곡이 가장 많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는 돈독한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는 소심하고 양심적인 인물이라고 하겠다. 일제하에서는 형제들이 모두 요시찰 인물로 형무소에 드나들었다. 돌이켜 보건대 그는 일생을 운명적으로 주어진 여건하에서 민족을 위하여 하느님이 주신 음악적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며 살았다고 보는 것이 공평한 판단이라고 보겠다. 안기영을 알자면 그의 가족배경이 중요하다
아버님 안석호씨는 고향이 서울이고 대대로 중국사신을 지냈던 양반 집안 출신이다. 안 진사는 구한말에 일본의 국권침략이 가중하자 서울을 떠나 충남 청양읍 적곡리, 칠갑산 밑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라 걱정에 금식도 하며 나날을 보내던 중, 하루는 서울을 방문하는 길에 장터에 몰린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어라, 거듭나야 한다, 생명의 길이 여기 있다”는 양인의 전도를 한국의 젊은이(윤성열목사로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공주 영명학교의 영어 선생으로 있으며 서양 선교사의 통역을 하며 전도를 했는데 후에 안 진사는 장녀 안덕희씨의 정혼자리를 깨면서까지 윤목사를 맏사위로 맞아 드렸다.) 이가 통역하는 것을 듣고 여러 날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나라의 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이 마당에 기독교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게 되어 공주에 수소문한 끝에 안 진사의 사랑에는 야소교 전도사가 들락거리며 성경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집안에 있는 사당에 들어가면 일본인이 나막신을 달락 거리며 안 진사에게 달려드는 망상으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안 진사는 찬송을 크게 부르기 시작하였고 그 소리가 담 밖을 나가니 마을의 유림은 상놈들 앞에서 양반의 체면이 서지 않아 창피 하다고 야단들이었다.
그러자 안 진사는 십계명의 첫번째인 “내 앞에 다른 신을 믿지말라” 라는 구절을 읽고는 큰 아들 사영과 청지기를 데리고 사당에 있는 신주를 보에 싸가지고 칠갑산에 올라가 불에 태워버리니 “개종하고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는” 안 진사는 양반이 아니라고 마을에서 쫓아내려고 한다는 정보를 가지고 청지기가 달려와서 안 진사는 부인과 큰 며느리, 아들 다섯과 딸 둘을 집에 둔 채 큰 아들 사영만 데리고 청지기를 앞세워 공주로 피하였고 그 소식을 접한 동리 무당의 아들이 소작인들을 유혹, 협박하여 복면을 시키고 칼과 창으로 무장시켜 인솔하고 잠겨 있는 진사 댁 대문을 부수고 처 들어와서 가산을 노략질 하고 “이제는 양반이 아니니 후에 딸들을 잡아 가겠다”고 엄포를 놓고 떠났다.
겁에 질린 식구들은 큰 아드님 친구인 양주삼씨의 주선으로 관부의 도움을 받으며 당시 입은 체로 그날로 공주로 떠났다. 안 진사는 가족을 공주에 정착시킨 후 약장을 짜서 들여논 후 한의사를 집으로 데려다가 한의학 공부를 하고 악사들을 불러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향토음악을 배운 것이 후에 장남이 세브란스를 졸업하여 의사가 되고 차남이 음악가로 성장하는데 영향을 주었다고 보겠다. 그 후 온 신구가 서울로 이사하여 여섯 아들들은 배재학당, 연희전문, 딸 셋은 결혼한 윤성열 목사 부인 덕희를 빼고는 이화학당을 졸업했다. 안 진사는 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쳤고 조그만 수첩에 깨알 같은 글씨로 성경구절을 베끼어 외우고 다니며 동대문 교회, 새문안교회, 상동교회 등에서 전도사로 일하였다. 막내딸 안창희가 이화학당 입학시 "너희 아버님은 무얼하시니"라는 질문에 얼른 "우리아버지는 새벽 기도 다니세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형제들의 얘기꺼리이다.
安基永은
1923년에 결혼한 부인 이성규와 함께 한 안기영.
안기영의 월북 경위
안기영 장녀 안영식(소프라노 김영미 모친) 장남 충식 차녀 안화식
6.25 직후 안기영은 명동 시공관에서 예술공연을 준비하다가 틈을 보아 점심때 잠깐씩 명동에 있는 안마리아를 찾아왔는데 없는 중에도 오빠를 대접하려고 어머님이 애를 쓰셨다. 그러다가 9월 26일경에 오셔서 “누이 보는 것도 마지막이 될 것 같아. 오늘 오후에 예술단이 모두 트럭에 실려 이북으로 간다”고 했을 때 동생이 “피하실 수는 없으세요?” 하니 “현순 이가 북아현에 사는 이대 동창들을 괴롭힌 일도 있고 하니 남아 있을 수도 없지” 하시며 얼른 돌아서신 것이 내가 본 삼촌 안기영의 마지막 모습이다. 6.25가 나자 김현순은 본 부인이 이혼을 거부하여 첩으로 살았던 굴욕을 풀려고 여맹 회원이 되어 북아현 일대에 살던 백낙준씨 부인을 위시한 이대 동창들을 괴롭혔던 것이다.
둘째부인 김현순과 김현순이 낳은 세째 딸 안남식이 함께 한사진이다. 안남식은 북한에서 공훈배우 칭호를 받는 등 활발한 음악활동을 전개했다.
김현순은 인물도 좋고 머리도 좋고 노래도 잘하고 필체도 훌륭한 빠질데가 없는 부잣집 2녀로 이화전문 다닐때는 동아일보 기자 홍종인씨등을 위시한 연대생을 위시한 주위의 남학생의 흠모의 대상이었다. 1931년 이대 문과를 졸업하고 다시 음악과에 편입하여 1934년에 졸업하고 처자가 있는 음악교수요 국내 굴지의 테너인 안기영교수와 중국으로 사랑의 도주행각을 벌리다가 1935년에 장녀 남식이 태어난 후 일본을 이대 교수직을 버리고 중국으로 갔다가 그곳까지 따라 온 김현순을 만나 사랑의 도피생황을 했고 남식이 태어난 후 1936년에 귀국하여서는 4남매를 더 두며 북아현에 살림을 차렸다. 이 무렵 영국에서는 "King Edward Vlll"가 미국 출신의 이혼녀 "Wallis Simpson" 부인과 결혼하려고 대영제국의 왕관을 벗어버려 온 세계가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scene은 다음과 같다.
이화옥의 어머니 안복희(마리아)와 안기영의 둘째부인 김현순, 옥인찬은 남녀혼성 합창단 성우회 회원이었다,
중년부인 둘이 학창시절로 돌아가서 이중창은 잠시나마 전쟁의 현실을 망각하도록 듣기에 아름다웠다. 그날, 밤이 늦어지는데 멀리서 총소리가 마구 들리자 우리는 돈암동 종점에 있는 일가 집으로 피신하였다가 뜬 눈으로 밤을 새고 으로는 처음 중국에 가서 기행문을 쓴 남편의 친구 현 웅 (Peter Hyun)에게서 받은 김현순 오빠의 연락처를 가지고 천진에 사는 현순의 올케와 연락이 되어 그녀의 주선으로 북경에서 천진행 열차를 타고 France 구역에 사는 현순 오빠의 집으로 갔다. 점심을 대접받고 부인의 안내로 입원중인 현순의 오빠를 병원으로 방문하였다. 그는 당시 천진 시에서 건축중인 거대한 병원을 병상에 누어 총지휘하는 유망한 한국인 출신 의사였다. 막대한 수의 한족을 중공군으로 투입하였고 그도 군의관으로 연변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이남에서 온 여동생이 수용소에서 찾고있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가서 면회를 신청했더니 “수속절차로 시일이 걸리겠다”는 말만 듣고 돌아왔는데 그날 밤에 면회가 허락됐다는 통지를 받고 월북자들을 한데 모아놓은
김현순 오빠와 중국인 올캐 (천진 병원에서)
나중에 들은 말로는 오누이의 얼굴이 지나서 중국에 오겠다고 하여 수속을 하여 보냈는데 그 후 소식이 끊어졌다고 한다. 중국여자로 인물과 체격도 좋은 올케는 영양사이데 중국의 대 은행가의 딸로 자기도 아버지의 반대 의사를 무시하고 한국의사와 결혼을 감행한 정열파이다. 갓 결혼을 했을 때 김현순과 안기영이 중국에서 만나 자기네 집으로 왔다 한다. 당시 의학도이던 오빠는 같은 의과대학에서 공부하는 오스트리아의 의학생을 통해 김현순이 이대를 졸업하는 대로 비엔나에 있는 음악학교로 유학을 가도록 수속을 밟는 중이었는데 별안간 처자가 있는 음악교수를 데리고 나타나서는 둘이 같이 비엔나의 음악학교로 유학을 가게 해 달라고 울어대는 소동이 벌어졌다 한다. 도망했던 곳)로 가고 김현순은 비엔나행을 마다하고 며칠을 떨어져서 울기만 하다가 안기영을 쫓아 갔다 한다. 할머님댁 잔치에 갔다가 중국 만두를 예쁘게 빚는 법을 삼촌에게서 배웠는데 상해에 있을 때 식당에서 일하며 배웠다고 하셨다. 한국 갑부인 친정아버지는 중국에 있는 아들에게서 딸 소식을 듣자 해결책으로 일본으로 가면 피아노를 사 줄 터이니 그곳에서 음악활동을 하도록 제안하였고 그들은 장녀 남식을 데리고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가 귀국하여 북아현에 정착하게 되었다. 가면 본 부인 이성규가 항상 먼저 아이들을 데리고 할머니댁에 와서 지키고 앉아 있어서 안기영과 김현순이 아이들과 데리고 대문에 들어서다가는 이성규 아주머니를 보고 온 가족이 황급히 후퇴하는 광경도 나는 목격했다.
1953년에 촬영한 안기영 가족사진이다. 이때 안기영은 북한에 있었다.
여기서 안기영 형제를 소개하자면 의무감으로 근무하다가 무관학교가 해체되자 만주에서 안동병원을 차려 독립군의 치료, 군자금 확보에 주력했는데 당시 이효재씨의 고모가 그 병원의 간호원으로 일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여생을 대전형무소 의무감으로 보냈다. 삼촌이 서울에 들를 때는 우리 집에 계셨는데 “만주에서 총상을 치료해 준 자기 차남 안기영 밟는 동안 안기영이 이북에서 집필한 “조선음악사”를 발견하였다. 장녀 안영식의 딸이 소프라노 김영미이다. 차녀 안화식의 남편은 5.16 후에 국회의원으로 민주당 총무를 지낸 김형일 장군이고 장남 김인준은 하바드 대학 박사로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을 역임했고 큰며누리는 이대 사범대학 장을 지냈고 맏손자 김진호는 현직 검사로 콜럼비아 Law School을 나온 미국 변호사 자격의 소유자이다. 3째 며느리는 organist로 이대 음대교수로 있으며 학교 행사 때면 안기영 작곡인 교가를 반주하고 있다. 사위 박태호는 외교통상부 본부장, 서울대국제대학원장을 지냈다. 3남 안신영 안신영은 3.1운동에 참여하는등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고 출옥 후 공주 영명학교 교사를 지내던 시절에도 요시찰인으로 형무소 출입이 빈번했던 분이다.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배재 중ᆞ고등학교 교장, 재단법인 은평천사원 이사장, CBS기독교방송국 국장, 태화기독교사회관 이사장. 이화여자대학교 재단이사 등 을 역임했고. 장남 안광식은 콜럼비아 대학 졸업후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를 지냈고 며느리 임숙자 박사는 이대 가정대학장을 역임했다. 안신영 의 장손이자 안광식 의 장남 안세현은 미국 죠지타운 대학교 외교대학원과 런던 정경대에서 국제정치학으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러시아 국립자원대학에서 수학, 현제 서울시립대 국제교육원장 겸 국제관계학과 교수 이기도하다. 미국 싱크탱크 아시아 문제연구소(NBR) 한국인 초대 선임 자문위원이며, 중국 외교부 산하 중국 국제문제연구원 초대 한국인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손녀 안미현은 모스코바 국립음악원에서 연주자 과정을 마친 피아노 soloist로 현제 성신여대 기악과 교수로 있으며 금년 5월 7일 세계 정상급의 연주 회장인 모스크바의 볼쇼이 홀 에서 열린 한중러 친선 음악회에서 International Philharmonic Orchestra와 베토벤 트리플 콘체르트를 협연하였다.
모이면 서울대 동창회를 이룬다. 장남 이후철 박사는 서울대 공대 금속학과 교수로 은퇴, 장학생 박사들이다.
윤성덕목사의 부인으로 결혼 후 바느질 싻을 팔아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호랑이가 드나드는 시골에서 목사님은 전도를 나갈때 마다 방에다 신부를 위하여 음식과 요강을 들여 놓고 밖으로 자물쇄를 채우고 다녔다는 어머님의 말씀이 기억난다.그러다가 목사님이 전국을 순회하던 중 금강산 온정리를 발견하고 그곳에 외국 선교사를 위한 여름 휴양처로 금강여관을 시작한것이 피서 겸 기독교 수양회 관계로 외국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여 여관은 날로 번창하였다. 목사부인의 뛰어난 음식 솜씨와 후한 인심은 원래 일인이 경영하던 숙박 시설의 문을 닫게 하는데 이르렀고 외국인의 빈번한 출입은 벌어들이는 돈을 독립군자금으로 반출하는 데 한 몫을 하였다. 슬하에 3남5녀를 두었는데 3남은 6.25 전쟁 때 전사했고 3녀 정옥은 이대 영문과교수로 은퇴 후 이효재와 함께 “한국정신대 문제대책협의회” 공동 대표를 역임하였고 4녀 윤정은은 이대 영문과 교수로 은퇴 후 재소자방문, 그들의 출옥후의 임시 숙소 마련등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였다.
둘째딸 : 안복희 (9남매중 5째) 당시 이화학당에 다니던 복희(어머니)는 정동의 이화학당 담을 넘어 광화문까지 뛰어가서 시위를 하고 집에 돌아오니 연대생인 안기영, 안신영 두 오빠들이 잡혀갔고 늙으신 부모님과 동생 넷만 남아서 학교를 2년 휴학하고 살림을 맡았고 할머님과 큰 이모님께서는 매일 형무소 출근을 하셨다 한다. 어머님은 3.1만세 때 소매 하나가 뜯긴 옷을 입고 도망치던 일본 여자 생각을 하며 웃으셨다.
시위중에 같이 몸싸움을 하던 이화학당 친구의 손에 쥐여져 있던 일본 옷 소매 하나가 생각났던 것이다. 당시 수시로 있던 경찰의 가택수색 때문에 안마리아는 혼자의 힘으로 부엌에 있는 큰 물독을 들어내고 그 밑을 파서 오빠들이 사용하던 등사기등을 묻고 다시 그 독을 제자리에 놓아 잠시 일경의 눈을 속였으나 시도 때도 없이 닥쳐드는 그들은 결국 독 밑에 묻은 물건까지 가져가고 말았다.
국민학교 5학년때 해방을 맞은 발표자는 거의 안기영 작곡을 노래하며 학창시절을 지냈다. 삼촌은 가사없이 작곡을 먼저 한 적이 많다고 하였다. 본인은 해방후 삼촌이 반도가극단을 지휘할 때면 열심히 따라다녔다.
조카 이화옥은 교가를 위시하여 안기영 작곡을 부르며 학창시절을 보냈고 안씨네 모임은 안기영 음악회로 끝났다.특히 즐겨 부르던 곡은 "우리 아기 날”, 작별”과“마의태자”였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동 요
“조선의 꽃”
거친 산등성이 골짜기로 Do do do mi mi mi sol mi la sol mi, 견우곁에서 떠나려 하자, 관련글 더 보기 영문자 클릭
작곡가 안기영선생님 최초로 공개되는 가족사진 http://blog.daum.net/jc21th/17781531
김형원 작사(김석송), 안기영 작곡 그리운 강남, 노래 왕수복, 김용환, 윤건영 (원곡) http://blog.daum.net/jc21th/17781172
안기영(安基永)과 소프라노 김영미 열린음악회 1000회
그리운 강남, (정이월 다가고) 작사 김형원(김석송), 작곡 안기영, 노래 김수진 http://blog.daum.net/jc21th/17780828
유경환(유카리나)선생님 글
여행일정이 겹쳐서 귀한 기회를
놓치게되어 아쉬웠는데, 국장님께서 이렇게 자세히 블로그에 올려 주시니 다시한번 안기영 선생님에 대해 읽고 배우게되니 감사한 마음 드립니다.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시대에 따라 그때 그때 닥치는 풍파를 면할 수는 없는 것인가봅니다.지식인은 지식인대로, 상류층은 상류층대로의 처한 사회에서 힘들고 어려운 생을 살아가게 되는데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는군요.
김준태 선생님 글
저는 충남 공주시 공주제일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하며 공주대학교의 교수로 재직 중에 있습니다. 안기영, 안신영에 대하여 우리 교회에 세워진 박물관에 문화 선각자요 애국자로 소개하고자 하는 차에 귀한 자료를 대하게 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저희 교회 황인식박사님과 함께 애국가를 교회에서 부르다가 공 주, 평양에서 일경에 잡혀 고초를 겪으셨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신앙 이야기 100선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답 글
고맙습니다. 이 글을 이화옥 여사님께 전하겠습니다. 보내주시면 춘하추동방송 에 함께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소원성취 하심을 빕니다.
복영수(청양) 복영수 선생님
저는 안기영선생의 고향인 칠갑산 아래 청양에 살고 있는 복영수 입니다. 그동안 안기영 선생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고 '안기영음악회'를 개최 하기도 했었습니다.좋은 의견과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십습니다. 연락 전화 010- 3453- 0633
화 보
안기영 인물전을 발표하는 이화옥 삼일여성동지회 회장 (안기영 생질)안기영 생애에 관해 구체적이고 생생한 발표로 훌륭한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아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장을 지낸 최종고교수다. 한국인물전기학회 회장으로 안기영 인물발표전은 98번째가 된다. 필자는 정신의학계의 태두 유석진박사, 영화배우 윤인자 인물발표전에 참여한적이 있다
김성보 영락교회집사
김윤열 (KSUNIPAR대표), 안기영 조카 사위
이
이장춘이 올리는 글
오늘 배경음악은천재성악가 김천애의 목소리로 듣는다. 일제강점기때 봉선화를 불러 선풍을 일으킨 김천애는 당대 최고의 성악가로 해방공간에서 이 노래를 불러 방송전파를 탔다. 그리운 강남 작사자 석송 김형원은 문학가이자 언론인이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기전 편집국장을 지냈고 해방되어 초대내각 공보처 차장을 지냈지만 6.25때 납북 되었다. 1934년 이 노래를 처음 부른 왕수복은 당대 최고의 가수였다. 노천명의 약혼자 김광진과 결혼했고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 대를 이어 영웅 대접을 받으며 활약 했으며 북한의 열사묘에 안장되었다. 아래 사진은 왕수복과 그리운 강남을 함께 부른 가수 김용환과, 윤건영, 왕수복이다. 김용환은 눈물젖은 두만강을 부른 김정구의 친형으로 당대 최고 반열에 있던 가수이고 작곡가며 연기인이다. 윤건영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모가수에 응모했다가 마지막 단계에서낙선 했지만 계속 노래를 불렀다. 대학을 나온 학사가수다.
안기영 후손들과 배동인 교수등 여러분이 안기영선생의 노래를 불렀다. 위 사진은 조카 성식 진식 이후경 이후복이 노래부르는 장면이다. 이후복의 두 딸은 장학생 M.I.T. 박사들이다.
위 사진은 배동인 전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와 전 중앙여자고등학교 영어선생님으로 이정수님, 지금은 3.1여성동지회원님이고 아래는 유영진, 배은석. 이정수님이다.
아래 그림은 위에서 노래 부르는 유영진여사님의 32회 국전 문인화 입선작품 "봄소식"이다.
보관문화훈장을 받은 소프라노 김영미는 안기영의 외손녀다. 위 사진은 KBS열린음악회 1000번째 특집방송 공연 장면이다.
피아니스트 안미현이 2014년 5월 7일 세계 정상급 연주 회장인 모스크바의 볼쇼이 홀에서 열린 한중러 친선 음악회에서 International Philharmonic Orchestra와 베토벤 트리플 콘체르트를 협연한 장면이다. 안미현은 안기영의 동생 안신영의 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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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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