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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사색인의 十戒命
----제3계: 신의 권위도 인정하지 말라
----제4계: 사상의 신전을 짓고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라
반 경 환
나는 종교는 ‘최고급의 지혜의 저장소’라고 말해 왔는 데, 왜냐하면 종교에는 어느 특정한 개인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최초에는 종교창시자의 지혜가 절대적이었겠지만, 그 이후에는 그의 제자들이 더욱더 그 종교의 사상들을 가다듬고 완성시키게 된다. 더없이 가난하고 선량했지만, 매우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민중들의 삶을 발견하고 그 민중들을 구원할 수 있는 진리(사상)를 발견해 냈던 부처, 유태교도들의 무자비한 탄압과 억압에 시달리고 있는 민중들의 삶을 발견하고 그 민중들을 구원할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해 냈던 예수----, 이처럼 부처와 예수는 다같이 지배계급의 종교에 맞서서, 부의 공정한 분배와 만인평등사상을 정립해 냈던 성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비록, 그들은 지배계급의 인사들, 즉 힌두교도와 유태교도들의 손에 의해서 그 비극적인 삶을 살다가 갔지만, 그들이 연출해 냈던 진리(사상)의 말씀들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종교의 생성의 기원을 따져보면, 그것은 세 가지 차원에 걸처져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첫 번째는 사상의 차원이며, 두 번째는 예배의 차원이고, 세 번째는 조직의 차원이다. 첫 번째는 부처와 예수처럼 어느 특정한 시대의 민중들의 삶을 발견하고 그들을 구원해낼 수 있는 사상을 정립해 내는 것이며, 두 번째는 그 사상의 경전에 따라서 때와 장소를 규정하고 그 신전에서 부처나 예수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종교의 교리를 전파하고 그 신도들의 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거대한 조직체를 결성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유태교를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서 종교의 창시자보다 더 뛰어난 사람은 없으며, 그 종교인들의 결속력보다 더 힘 있는 조직체는 없는 것 같다. 종교는 시대와 민족과 인종의 편견을 뛰어넘어서 모든 인간들에게 그 진리의 말씀을 전파해 주고 있으며, 오늘날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영원불멸의 삶과 그 행복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 낙천주의자(신성모독자)로서의 나의 변함없는 신념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며 타인의 권위와 신의 권위를 무조건 인정을 하게 되면, 모든 가치가 쇠락하게 되고 어떠한 전통도 썩어버리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 혹은 아버지의 존재 자체가 조건없이 성화되기만 하면, 더 이상의 우리 인간들의 삶은 기대할 수가 없게 된다. 날이면 날마다 수많은 성전들이 세워지고 절대적인 복종과 예배와 찬송만이 있는 삶을 생각해 보고, 언제, 어느 때나 옛세대가 신세대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는 삶을 생각해 보아라! 바로 그 자리에는 어떠한 역사의 발걸음이나 그 힘찬 새싹도 돋아나지 않을 것이며, 그 주체자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바보나 얼간이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부처와 예수가 지배계급의 모든 가치관을 전복시켜 버리고 그 성자의 삶을 살다가 갔듯이, 오늘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성전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는 일일 것이다.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죄를 짓는다는 것이며,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존재(삶)를 포기하는 것과도 같다. 생명이 생명을 먹는다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며,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민족만을 사랑하는 것도 죄를 짓는 일이다. 또한 어느 특정한 종교와 그 사상만을 편애하는 것도 죄를 짓는 일이며,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도, 스승을 사랑하는 것도 죄를 짓는 일이다. 또한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스승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죄를 짓는 일이며, 죄를 짓지 않으면 우리 인간들의 삶이 없게 된다. 가령, 예컨대, “나는 나의 친구들과 나의 제자들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다. 나는 무신론자이며, 따라서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유태교와 기독교 등의 종교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인 니체는 철학자이며, 나는 낙천주의 사상의 창시자로서 행복의 깊이라는 저서를 모든 인류에게 선사한 바가 있다”라고, 내가 소리높여 외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생각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랑한다는 말과 존경한다는 말은 타인들을 배제하는 말들이기 때문이며, 또한 무신론자라는 말은 그만큼 도발적이면서도, 영원히 구제받지 못할 죄인처럼 생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낙천주의자는 염세주의자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하고, 염세주의자는 낙천주의자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한다. 따라서 나의 행복의 깊이는 한 줄기의 서광은 커녕, 다만, 쓰레기더미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 말이란 이처럼 선악의 양면을 지니고 있고, 또한 그만큼 무서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랑은 혐오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있고, 혐오는 사랑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나는 신성모독을 범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나의 존재론을 더욱더 밀고 나간다면, ‘세계는 나의 범죄의 표상이다, 고로 행복하다’라는 나의 행복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신성모독자는 으뜸가는 문화의 육성자이며, 최고급의 사상의 신전의 건축가이다. 따라서 그가 비록, 제일급의 사상가이고 신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권위를 인정하기 이전에 그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미 불교와 기독교 사상의 치명적인 약점들에 대하여 가장 날카롭고 예리하게 그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 바가 있다.
제3계: 신의 권위도 인정하지 말라;
신은 우리 인간들에게 무조건의 예배와 복종을 강요하지만 나는 그가 발기부전증의 환자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동정녀 마리아와의 간통으로 예수를 얻었지만, 바로 그때 치명적인 매독으로 성 기능의 장애를 입었다는 것을 우리 신성모독자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예수 이후, 하나님이 아들을 얻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神正論은 우리 인간들을 개나 돼지처럼 학대하는 관점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단 하나뿐인 하나님의 아들이 동정녀 마리아의 뱃 속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도 웃기는 일이지만, 그의 부활과 영생불사의 삶이 약속되어 있는데도 ‘오 하나님 아버지, 오 하나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가장 예수답지 않은 말을 했다는 것도 예수의 탄생과 부활 자체가 하나의 가공적인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 우리 인간들의 해탈의 길을 열어놓은 것은 부처의 공적일 수도 있지만, 바로 그 해탈 속에는 우리 인간들의 ‘삶의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무욕망, 무집착, 즉 부처의 해탈은 고통의 회피이며 생명부정에의 의지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와 예수는 그들이 다함께 신성모독자----성자, 즉 고통스러운 삶의 해방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의 삶을 헐뜯고 비방하고 기만했던 최대의 사기꾼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성자와 죄인은 우리 인간들의 두 모습이며, 성자의 얼굴로 죄인의 얼굴을 은폐할 수는 없다. 요컨대 부처와 예수는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민중들의 삶을 구원할 수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 수많은 종교전쟁이나 이민족의 삶을 압살했던 죄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신의 권위도 인정하지 말라!’ 나는 이 계율을 유념하면서,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희랍희극, 현암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정치적, 도덕적 보수주의자로서 神正論의 관점을 유지하고 있지만, 인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를 가장 더럽고 추악하게 타락한 인물로 희화화시켜 놓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대지에서는 올바로 사색을 할 수가 없어서 공중에다가 바구니를 매달아 놓고 사색하는 소피스트이며, 약한 이론(邪論)으로 올바른 이론(正論)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변론술의 대가이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비록, 오늘날과도 같은 민주주의는 아니었지만----가 꽃을 피웠고, 그 결과, 출신성분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들을 뽑아서 등용을 시켰다고 한다. 따라서 돈을 받고 지식을 가르쳐 주는 직업교사단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 직업교사단의 무리들을 소피스트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소피스트들은 스스로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칭하게 되었고, 도덕이나 종교 따위는 전적으로 무시한 채, 실용적인 학문들----변론술과 웅변술, 그리고 수사학----만을 중요시했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소피스트들로는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히피아스, 트라시마코프 등이 있고, 오늘날도 그들의 이름과 함께, 수많은 일화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따라서 소피스트들은 자칭,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명칭과는 다르게, 돈만을 아는 궤변론자이며 사악한 이론의 대가들이라는 불명예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제일급의 소피스트이며, 돈만을 지불하면 邪論으로 正論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변론술의 대가이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제우스를 비롯한 그리스의 신들을 믿지 않고 있는 신성모독자이며, 구름의 여신을 믿고 있는 이교도일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제우스라고? 멍청한 소리, 제우스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라고 말하며, 그 제우스의 옥좌에 구름의 여신을 앉혀 놓는다. 그 구름의 여신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는 비를 주재하며, 다양한 형태로 우리 인간들의 형상을 만들어 낸다. 즉 공금횡령자인 시몬을 보면 그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갑자기 늑대의 모습으로 변신을 하고, 창과 방패를 던지고 달아난 클레오뉴모스를 보았을 때는 나약한 사슴의 모습으로 변신을 한다. 야만인을 만나면 그 야만인의 미친 수작을 놀려주기 위해 ‘반신반마’인 켄타우르스의 모습으로 변신을 하고, 아무튼 구름의 여신은 자유 자재로 그 형상을 바꾸어 보여주게 된다. 그 구름의 여신은 “건달 신사들을 돌보는” 여신이며, “판단, 대화법, 이성을 우리에게 주시고, 또한 허풍선이 위압법, 완곡법, 분쇄술에 파악술”을 가르쳐 주시는 여신이다. 그 구름의 여신을 믿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전혀 터무니가 없는 궤변으로 설득술만을 중요시하는 변론술의 대가인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의 주인공인 스트레프시아데스는 항상 명랑하고 행복했던 시골 신사이었지만, 어느 덧 ‘승마도락’에 빠진 그의 아들, 페이딥피데스 때문에 막대한 부채를 떠안게 된다. “하지만 한심스럽게도 잠이 오지 않는다. 여기 이 아들 덕택으로 낭비에 어이없는 빚투성이. 그런데 이 놈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말을 타고 다닌다, 쌍두마차를 몰고 다닌다, 심지어는 꿈 속에서도 말을 타고 다니거든. 그런데 나는 파산지경, 초생달이 그믐달이 되면 이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다.” 따라서 스트레프시아데스는 “요 밑에서도 집달리가 기어 나오는 파산상태를 모면”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소크라테스의 학원에 입문시키고자 한다. 소크라테스의 학원은 ‘현명한 영혼을 가꾸는 학원’인데, 왜냐하면 돈만을 지불하면 邪論으로 正論을 물리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변론술의 대전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 페이딥피데스는 “흥 악당들이죠. 알고 있습니다. 그 허풍선이들, 창백한 얼굴에 맨발로 다니는 작자들, 저 어이없는 소크라테스와 카이레폰의 패거리들 말이죠”라고,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게 되고, 따라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늙고 건망증이 심한 몸으로 소크라테스의 학원에 입문을 하게 된다.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제우스 신은 우리에게 통용되지 않는 화폐라는 것을 배우고, 구름의 여신을 추종하게 된다. 또한 그는 소크라테스를 따라 三位, 즉 허공과 구름의 여신과 혓바닥을 믿으며, 벼룩이 우글거리는 모피를 뒤집어 쓰고 ‘미꾸라지 수법’과 ‘사기적 수법’을 배워보지만, 그의 우둔하고 멍청한 머리, 즉 “잠깐 외우기도 전에 잊어버리는” 두뇌 때문에 파문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소크라테스 잠꼬대 같은 소리. 꺼져! 이제 가르치는 것도 진저리난다!
스트레프시아데스 왜? 신의 이름에 걸고 부탁이야,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그대는 배우면 그게 즉시 엉덩이로 빠져버리거든. 자, 지금 금방 배운 게 뭔가 말해 봐.
스트레프시아데스 응! 처음엔 뭐더라? 처음엔? 그 속에서 밀가루를 반죽하는 것이 뭐더라? 이건 야단인데...... 뭐더라?
소크라테스 뻗어라 제발! 까먹기 대장인 바보 늙은이.
스트레프시아데스 아 이건 슬프다. 나는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혀를 놀리는 재주를 배우지 않으면 나는 파멸이야. 오 구름의 여신이여, 좋은 지혜를 내려 주십시오
라고, 탄식을 하게 되고, 마침내 그의 아들 페이딥피데스를 설득시켜서 소크라테스의 학원에 입문을 시키게 된다. 페이딥피데스는 그 아버지에게 언젠가 사론을 배우게 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페이딥피데스가 소크라테스 학원에 입문하게 된 것만을 고마워한다. 페이딥피데스는 소크라테스 학원에서 ‘정의는 이 세상에 없다’라는 명제를 통하여 “재판의 회피와 소환, 역습적인 반박”을 집중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 학원에서는 정론과 사론으로 분장한 두 논객이 자주 등장을 하고, 그 두 논객의 싸움을 통해서 “지혜 싸움의 대모험”, 즉 ‘勸惡懲善의 변론법’을 배우게 된다. 우월한 이론인 정론을 배우면 엄격한 예의범절을 지키며 복된 생활을 할 수도 있지만, 열등한 이론인 사론을 배우면 ‘수치를 선으로 생각하고 한 번 붙으면 떨어질 줄 모르는 비열한 소송’만을 일삼게 된다. 하지만 실제 그 싸움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은 사론인데, 왜냐하면 그가 제일 먼저 “법률과 규칙을 반박하는 법을 생각”해 냈기 때문이다. 사론은 지혜로운 자이며, 그는 “열등한 이론을 선택하고도 이긴다는 것은 一萬의 금화보다도 더 값이 있다”고 믿고 있는 자이다.
1. 邪論 정의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고 단언할 수 있지.
正論 뭐라고?
邪論 그럼 어디 있지?
正論 제신들께 있지.
邪論 그럼 정의가 있는데 제우스가 자기 아버지를 묶어놓고 망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지.
正論 야, 이건 못 견디겠는 걸. 구토가 날 지경, 대야를 빨리 가져와.
2. 正論 펠레우스는 절조의 덕택으로 테티스 여신과 결혼했다.
邪論 그런데 여신은 그 자리를 버리고 달아났다 이거지. 그것도 그가 오입장이가 아니어서 이불 속에서 밤이 새도록 기분좋게 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지. 여자란 거칠게 다루는 게 좋은 거야. 노망한 친구.
(페이딥피데스에게)
젊은이 절조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잘 보지. 모든 쾌락을 뺏기고, 소년, 여자, 콧타포스, 맛있는 요리, 술, 슬금슬금 웃는 웃음, 이런 것들이 없어 가지고 산 보람이 있단 말인가.
자, 이제부터 자연의 피할 수 없는 하나의 필연을 설명하지. 잘못을 범하고, 사랑을 하고, 간통, 그리고 붙들린다. 파멸이지. 그러나 그건 언변이 좋지 못해서지. 그러나 나를 따르면 멋대로 뛰어 놀고 웃고 무엇이든 수치로 생각하지 않는다. 姦夫로 붙들리면 이렇게 반박하거든. 아무런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제우스의 예를 들어 신도 사랑과 여자의 노예가 되었거늘 인간이 어떻게 신을 이겨낼 수 있느냐고.
3. 邪論 호색한이 뭐가 나쁘지?
正論 이보다 흉칙한 말이 있으랴.
邪論 만약 이 토론에서 내가 이기면 너는 뭐라고 하지?
正論 입을 다물어야 하지.
邪論 자 그럼 대답을 해봐. 어떤 종류의 인간에게서 변호사가 나오지?
正論 호색한에서
邪論 나도 같은 의견이야. 그럼 비극작가는?
正論 호색한에서.
邪論 그렇지, 그럼 연설가는?
正論 호색한에서.
邪論 그럼 너는 네 잘못을 인정하지? 구경꾼 여러분 중에 어느 쪽이 많은가 보란 말이야.
正論 안 되겠어. 훨씬 많은 걸 호색한이. (손가락질하며) 이 사내다, 그리고 저 사내, 그리고 여기 있는 머리 긴 사내.
邪論 어때?
正論 졌어. 침대 위의 운동가들, 제발 내 망토를 받으라. (망토를 벗어던지고 학원쪽을 향해서) 내편으로 달아나야겠다.
이와도 같이, 1, 2, 3의 예문들에서처럼, 정론과 사론의 싸움은 사론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게 된다. 정론이 정의가 있다고 말하면, 사론은 제우스 신의 예----아버지 살해----를 들면서 정의가 없다고 말한다. 정론이 목욕은 젊은이들을 씨름판에서 몰아내고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말하면, 사론은 그렇다면 왜 헤라클레스----정론이 가장 존경하는 헤라클레스----의 목욕탕이 있는가라고 반박을 한다. 또, 그리고 펠레우스는 그의 절조 덕택으로 테티스 여신과 결혼을 했다고 정론이 말하면 테티스 여신은 펠레우스의 남성 능력 때문에 그를 버리고 달아났다고 사론이 반박을 한다. 또, 그리고 호색한은 나쁜 사람이라고 정론이 말하면, 제우스 신도 사랑의 노예가 되었듯이, 왜 호색한이 나쁜 사람이냐고 사론이 반박을 한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론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통 등의 잘못을 범하면 파멸을 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 파멸은 언변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역설을 하게 된다. ‘사론 대 정론’, 그러나 이 ‘지혜 싸움의 대모험’은 아리스토파네스가 희화화시킨 문맥 속에서는 사론이 ‘백전백승’의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페이딥피데스는 그 ‘권악징선의 변론법’----이 ‘권악징선의 변론법’은 내가 명명해본 용어이다---을 익히게 되고, 그 ‘무적의 이론’으로 그의 아버지의 채권자들을 모조리 쫓아버리게 된다. 따라서 스트레프시아데스는 그 “쌍칼에 빛나는 혀를 가진 나의 戰士, 우리 집의 구세주”를 더없이 자랑스러워하게 되고, “복된 스트레프시아데스, 그대의 지혜는 뛰어나고 그대가 기른 아들의 지혜는 더욱더 뛰어나도다”라고 그 행복에 겨운 노래를 부를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행복했던 생활도 잠시 잠깐 동안이었고, 스트레프시아데스는 그의 아들에게 무척이나 두둘겨 맞게 된다. 요컨대 그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파탄의 원인은 아주 사소한 말다툼에서 비롯되었는 데, 왜냐하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시모니데스의 승려가 된 염소의 노래”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 아들은 “술좌석에서 리라를 켜고 노래를 하는 것은 방앗간 처녀와 같이 아주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거절을 하고, 또 아버지가 아이스퀼로스의 시, 한 편을 낭송해 달라고 하자, “아이스퀼로스는 시인 중에서도 제일가는 떠벌이, 잡음투성이에 허풍선이, 과장을 좋아하는 엉터리”라고 면박을 주게 된다. 그리고 또다시 스트레프시아데스가 페이딥피데스에게 “요즈음 유행의 신식 이론 하나”를 이야기해 달라고 하자, 그 아들은 ‘오빠가 여동생을 꾀었다는 에우리피데스의 노래’를 부르게 되고, 따라서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한 아버지가 욕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그 화를 참지 못해서 “아버지를 때리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꾸짖으면 “어릴 때 아버지가 나를 때렸기 때문”이라고 말 대답을 한다. 아버지가 그것은 “너를 위해,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때린 것이다”라고 말하면, “나도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를 사랑했기 때문에 때린 것이다”라고 그 아들 역시도 그 정당성을 역설한다. 그러면 너도 네 아들을 낳아서 때리면 된다고 아버지가 말하면, 만일 내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나만이 손해라고 그 아들은 반박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아들, 페이딥피데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아버지처럼 어머니도 때려주고 열등한 이론, 즉 사론의 정당성을 입증해 보이겠다고 선언을 하게 된다. 따라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스트레프시아데스는 악덕에 몸을 맡긴 자의 비극을 예견하고, 소크라테스의 학원에 불을 지르게 된다. 스트레프시아데스의 비극은 악덕에 몸을 맡긴 채 모든 제신들을 모독하고, 또 타인의 채무에 대한 변제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독실한 신자이고 소크라테스는 신성모독자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권선징악의 윤리주의자이고, 소크라테스는 권악징선의 반윤리주의자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비극작가 아이스퀼로스를 옹호하고 소크라테스는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를 옹호한다. 플라톤의 「향연」에는,
그러자 그 이야기의 요점은 동일한 한 사람이 희극도 지을 수 있고 비극도 지을 수 있으며, 희극 시인의 재주를 가진 사람은 또한 비극 시인의 재주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소크라테스가 그 두 사람으로 하여금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었던 거래. 이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서 그들은 잘 납득도 가지 않는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하더니, 먼저 아리스토파네스가 깊이 잠들고 다음에 날이 다 밝아서 아가톤도 잠들었대. 소크라테스는 그들을 편안이 눕히고는 일어섰는데, 아리스토데모스는 다른 때처럼 그 뒤를 따랐대. 소크라테스는 뤼케이온으로 가서 목욕을 하고, 평소와 같이 그날 하루를 보내고는 저녁에 집으로 가서 취침했다더군.
----플라톤, 플라톤과의 대화, 종로서적, 1981
라는 것처럼,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스가 상당한 친분이 있었던 인물들로 묘사되고 있지만,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에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이 소크라테스를 처형시킨 전거가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은 소크라테스가 “수많은 청년들을 부패시키고, 국가가 신봉하는 신들을 믿지 않는다”라는 죄목으로 처형되기 24년 전, 그러니까 B.C 423년에 상연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먼저, 오오 아테나이 사람들이여, 저는 저에 대한 처음의 거짓된 고소와 처음의 고소자들에 대하여 변명하여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두 번째 고소와 고소자들에 대하여 변명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저를 고소하는 사람이 많고, 또 그들은 벌써 여러 해에 걸쳐, 진실이라고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고소하고 있는 때문입니다. 저는 이 사람들을 아뉘토스와 그 일파의 사람들보다 더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 사람들은 더 두려운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여러분의 대부분을 아이 적부터 손아귀에 넣고, “소크라테스란 사나이가 있는데, 그는 하늘에 있는 것들을 살피고,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을 탐구하며, 약한 논의를 강하게 하는 묘한 지혜를 가지고 있소(아리스토파네스, 「구름」)”라고 조금도 진실이 들어 있지 않은 말을 하여 여러분에게 저를 그릇되이 고소하게 해왔습니다. 이런 소문을 퍼뜨린 이 사람들이야말로, 오오 아테나이 사람들이여, 저를 고소하고 있는 두려운 사람들입니다.
----플라톤, 플라톤의 대화, 종로서적, 1981
하지만 왜 아리스토파네스는 그리스 최고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궤변론자)로 치부하고, 그를 그처럼 사악하고 추악한 신성모독자로 고발해야만 되었던 것일까? 소크라테스가 진정으로 수많은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제우스 신을 믿지 않고 다이몬이라는 색다른 신을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일까? 왜 그처럼 가난하게 살아갔던 소크라테스를 돈을 받고 지혜를 팔아먹은 소피스트라고 치부해야만 되었던 것이고, 또한 왜 그를 끝끝내 한 사발의 독배를 마시고 사라져 가게 해야만 했던 것일까? 첫 번째는 소크라테스가 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며, 두 번째는 아테네 사회의 제일급의 인사들, 즉 타인들의 권위 따위는 여지없이 짓밟아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에 의하면 신은 지혜롭지도 않고 무식하지도 않다. 더욱이 신은 아름답지도 않고 추하지도 않으며, 또한 신은 가난하지도 않고 부유하지도 않다. 요컨대 신은 어디까지나 반신적인 존재라는 것이 「향연」 속의 소크라테스의 주장인 셈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선악의 이분법’에 기초해 있으며, 철두철미하게 ‘이성중심주의’에 기초해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의 국가론은 천재생산의 교수법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그 교수법을 통하여 미래의 백만두뇌를 생산해 내고, 이 세상에서 진정한 ‘이상국가’를 건설해 보고 싶었던 것이 그의 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인간들을 세 계급으로 분류해 놓고 있는 데, 첫 번째는 민중 계급이고, 두 번째는 무사(군인)계급이며, 세 번째는 통치자(철학자) 계급이다. 소크라테스는 최초의 공산주의자로서 아이들마저도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양육을 하자고 주장한 바가 있으며, 따라서 출신성분에 관계없이 그 인간의 능력에 맞게끔, 그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한다고 말한다. 학문에 소질이 없는 자는 기층 민중으로, 어느 정도 학문에 소질이 있는 자는 무사계급으로, 그리고 그 무사계급 중에서 철학자의 天分을 타고난 자는 통치자가 되어 한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사상적인 신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철학자는 결혼은 물론, 가정 생활을 해서는 안 되며, 오로지 그 백성들을 위하여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철학자는 신적인 것, 또는 질서 있는 것과 생활을 같이 하므로 인간으로서는 가장 신적인 존재가 될걸세”(플라톤, 플라톤의 국가론, 집문당, 1995)라고, 소크라테스가 역설한 바가 있듯이, 철학자라는 보다 더 완전한 존재, 즉 신적인 존재가 그 이상국가(공산국가)를 이끌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소크라테스는 ‘우리 인간들이 죄를 짓는 것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 무지만을 없앨 수가 있다면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라고, 말한 바가 있지만, 그의 이성중심주의의 오류는 제우스 신을 더없이 깎아내리고 자기 자신을 신적인 존재, 즉 다이몬으로 끌어 올리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그 이성중심주의를 통하여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를 양식화시키고, 그리스의 제일급의 인사들, 즉 타인들의 권위를 여지없이 짓밟아 버렸던 것이다. 이성이 미덕이 되고 행복이 될 때, 아름답고 풍요로운 그리스 신화와 예술이 질식을 하게 되고, 또한 이성이 미덕이 되고 행복이 될 때, 반신적인 다이몬과 기계론적인 철학만이 득세를 하게 된다. 철학자로서의 소크라테스의 위대성은 그의 이성중심주의를 통하여 신과 타인들의 권위를 여지없이 짓밟아 버리고, 인류의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사상의 신전’(이상국가)을 완성하게 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1,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유명한 사람들의 슬픈 노래를 삭제하여 그것을 여자나 혹은 비굴한 남자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좋겠네. 그리하여 우리 나라의 기둥이 되려고 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매우 비겁한 행위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하네.
아데이만토스 그것은 옳은 말씀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면 다시 호머나 그밖의 시인들에게 여신의 아들인 아킬레스를 이와 같은 자로 묘사하지 말도록 부탁해야겠네.
때로는 가로 눕고 때로는 바로 눕고 또 때로는 엎드려 있다가
다시 일어나 거친 바다 기슭을 따라 미친 사람처럼 배를 젓다가
두 손으로 먼지를 움켜쥐고 머리 위에 뿌리는 자(일리어드)
그밖에 호머가 묘사한 것과 같은 여러 가지 기분에 따라 탄식하고 울부짖는 것들을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야 하네. 그리고 다른 신들의 친척인 아모스에게
진흙 속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각자의 이름을 소리높이 부르며, 기도도 하고 애원도 하고(일리어드)
라고 쓰지 못하게 해야 하네. 또한 이보다 더 강경하게 부탁해야 할 것은 모든 사건에 있어서 신들이
아, 슬프도다. 비참하기 짝이 없는 나, 훌륭한 아이를 낳은 불행한 어머니(일리어드)
하며 한탄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플라톤, 플라톤의 국가론, 집문당, 1995
2, 소크라테스 현재와 과거의 모든 법률의 귀결인 새로운 법률은 다음과 같네. 즉 “우리들의 아내나 자식들은 공동소유로 하여야 한다. 양친은 자기 자식을 알 수 없으며, 자식 또한 그 양친을 알 수 없다”는 것이네.
글라우콘 과연 그것은 큰 풍랑입니다. 이런 법률의 가능성과 공리성은 큰 의문이 아닐 수 없군요.
소크라테스 나는 처자를 공유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그 위대한 공리성에 대하여 어떤 커다란 논쟁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그 가능성에 대하여는 상당한 논쟁이 벌어질 테지만...... ----앞의 책에서
3, 소크라테스 참된 수호자란 앞에서 말한 조건과 방금 말한 조건, 즉 재산의 공동소유와 가족의 공동소유를 겸해야 한다는 말이네. 다시 말해서 이 양자에 있어서 똑같이 내 것과 내 것 아닌 것으로 구별하는 것을 방지하여 나라를 분열시키는 일, 즉 각자가 개별적인 처자와 개별적인 쾌락과 고통을 지니고 있는 개별적인 집에 각각 자기 소유를 갖고 감으로써 나라를 분열시키는 일이 없을 걸세. 따라서 그렇게 되려면 내 것에 대한 모든 사람의 견해가 같아야 하네. 이와 같이 내 것에 대한 견해가 일치된다면 자연히 기쁨이나 괴로움도 공동으로 느끼게 될 걸세. 이에 대하여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글라우콘 사실 그렇게 되는 것으로 믿습니다. ----앞의 책에서
4, 글라우콘 그건 더욱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용사가 이쪽 진중에 있을 경우에 누가 키스를 하고 싶어하면 상대방은 누구를 막론하고 거절할 수 없게 하는 게 좋겠지요. 남자건 여자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경우에 더욱 용감해 지고 무훈을 세우기 위해 힘쓸 테니까요.
소크라테스 좋은 생각이네. 용감하고 훌륭한 사람에게서 더욱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 테니까.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동침할 기회가 더 많이 주어져야 하며 또 자주 뽑혀서 동침하게 되겠지. 이것은 앞서 우리가 이미 동의한 걸세. ----앞의 책에서
소크라테스는 아이들마저도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양육을 하자고 말한 바가 있었다. 그 아이들은 자기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아서도 안 되며, 음악과 체육, 그리고 철학 공부를 통하여 미래의 통치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그 아이들이 전승의 용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둡고 음산한 지옥이나, 신들의 부정한 짓, 그리고 또, 한없이 비겁하고 비굴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들려줘서는 안 되며, 따라서 호머를 비롯한 비극 시인들의 시는 노예나 아녀자들에게만 들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 혼전의 자유 연애는 허용을 하되 근친상간은 엄격하게 막아야만 하고, 가능하면 뛰어난 전공을 세운 병사에게만 성교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참된 철학자는 진실을 사랑하는 자이며, 그의 이타적인 사랑과 조국애에 의하여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러한 사상을 갖고 아테네 사회의 제일급의 인사들을 모조리 베어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는 아리스토파네스가 묘사한 것처럼, 그렇게 반윤리적인 신성모독자는 아니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절대로 돈을 받고 ‘권악징선의 변론술’을 가르친 적도 없고, 허풍장이나 궤변론의 대명사인 구름의 여신을 신봉한 적도 없다. 하지만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이상국가를 하나의 가공적이며 뜬구름의 세계로 보았던 것이고, 그것이 전혀 터무니 없는 인신공격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수많은 청년들을 부패시키고 국가가 신봉하는 신을 믿지 않은 소크라테스, 저 돈만을 밝히며 邪論으로 正論을 무너뜨리는 ‘권악징선의 대가’인 소크라테스, 그의 존재와 사상은 모조리 불을 질러서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의 전언이었던 셈인 것이다.
스트레프시아데스 (지붕 위에서) 오, 횃불이여, 타오르는 불길을 뿜는 것이 네 의무다!
제자 1 야, 뭘 하나?
스트레프시아데스 뭘 하느냐고? 다름 아니라, 너희 집 서까래와 토론을 하고 있는 거지.
제자 2 큰일이다. 집에 불을 지른 건 누구야?
스트레프시아데스 네가 망토를 훔친 그 사내지?
제자3 살인자, 실인자.
스트레프시아데스 그게 내 소원이야. 이 갈퀴가 내 뜻을 어기지 않고 내가 먼저 굴러 떨어져서 머리를 부수지 않는다면.
소크라테스 (집에서 나온다) 야, 지붕 위에 있는 자, 뭘하지?
스트레프시아데스 하늘을 거닐며 태양을 관찰하는 거지.
소크라테스 이크 야단이다. 숨이 막히는데.
카이레폰 (집에서 달려 나오며) 사람 살려, 타죽는다, 타죽는다.
스트레프시아데스 왜 제신을 업신 여기고 달님의 위치를 후비고 귀찮게 굴었지. 쫓아가서 때리고 후려 갈겨라. 이유야 어떻든 신을 모독한 죄가 제일 무겁다.
이미 앞에서 시사한 바가 있듯이, 아리스토파네스는 매우 보수적인 인물로서 소크라테스의 신성모독적인 일과 그의 반윤리적인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를 ‘권악징선의 패륜아’로 희화화시켜 놓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신성모독은 삶의 본능의 옹호이며 고급문화의 원동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죄를 짓는다는 것이며,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존재(삶)를 포기하는 것과도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만인들의 심금을 사로잡고 있으며, 그의 이상국가는 우리 인간들의 지상낙원으로서 영원히 그 빛을 발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매우 보수적이며 반동적인 인물로서 소크라테스에게 한 잔의 毒杯를 들게하고 그의 목숨을 빼앗아가 버렸지만, 그러나 그의 사상의 신전만은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소크라테스의 위대성을 다 인정해 주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그의 이성중심주의에 반대하는 지식인으로서 좀 더 날카롭고 예리하게 그를 비판해 본다면, 소크라테스는 다만, 추악한 괴물일 뿐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 같다. 그는 ‘선의 기원이 악이고 악의 기원이 선’이라는 것을 이해하지도 못했던 자이며,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죄를 제거해낼 수 있다는 이상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인간들은 대부분이 그 지적(이성) 수준이 높을수록 너무나도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죄를 짓고 있으며, 또 그것을 더욱더 교활하고 세련되게 합법의 틀로 가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선은 악과 함께 있고, 악은 선과 함께 있다. 이제 어느 누구도 무지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고, 자기 자신만의 사상의 신전을 짓기 위하여 수많은 신전들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아리스토파네스도 마찬가지이지만----는 범죄의 생산성과 범죄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도 못했던 판단력의 어릿광대이며, 또한 그만큼 지지리도 못나고 추악한 괴물이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신의 권위도 인정하지 말라! 만일 그렇다면 권위란 무엇이며, 우리는 그 권위 앞에서 어떻게 복종을 해야 하고, 또 어떻게 그 권위를 극복하고 새로운 권위를 창출해낼 것이란 말인가? 주지하다시피, 그가 가진 권력의 토대 위에서 권위의 새싹이 움트고, 그 권위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문화적인 표정이 된다. 권력이 그만큼 노골적인 힘의 크기를 드러내고 있다면, 권위는 그 권력의 야만성을 가리고 있는 문화적인 옷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무리를 짓는 동물들로서 권력에의 의지를 갖고 있으며, 그 권력에의 의지를 통하여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권력은 삶의 본능의 옹호이며, 도덕과 법과 질서와, 그리고 온갖 제도적인 장치들은 그 권력에 대한 예배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국가, 정당, 단체, 학교, 병원, 군대, 가정 등은 그 권력의 토대 위에서 세워지고 있는 것이며, 그 권력의 토대가 약화되면 어떠한 조직체도 그 수명을 연장해낼 수가 없게 된다. 권력이란 물리적인 힘(폭력)이며, 지배자(강자)가 피지배자(약자)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사회적인 힘으로써 작용을 하게 된다. 국가의 권력, 정당의 권력, 학자의 권력, 시인의 권력, 소설가의 권력, 판사와 검사의 권력, 신문기자의 권력 등, 그 권력의 양상들은 다종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또 그 권력의 행사 역시도 수많은 형태로 아주 복잡하고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가 있다. 전제군주의 공포정치와 군사독재정권의 야만적인 탄압과 억압의 정치, 민주주의 사회의 합리적인 대의정치와 싸늘하고 이기적인 권력, 또, 그리고 한없이 너그럽고 인자한 권력과 지배자가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피지배자들을 설득해 나가는 방식의 문화적 권력 등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앎은 권력을 생산해 내고 권력은 앎을 생산해 낸다. 알렉산더 대왕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찬란하고 화려한 문화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세계정복운동에 나섰던 것이며, 나폴레옹 황제 역시도 인류의 역사상 가장 찬란하고 화려한 유럽연방을 건설하기 위하여 세계정복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부처와 예수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그들의 앎(지혜)을 통하여, 그것이 극락의 세계이든, 천국의 세계이든, 아니면 거대한 문화의 제국이든 간에, 그들의 사상의 신전을 세웠던 것이며, 그들은 그들의 업적을 통하여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를 신적인 존재로 끌어 올렸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부처, 예수, 알렉산더, 나폴레옹, 소크라테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마르크스, 니체, 호머, 셰익스피어, 괴테 등은 언어 자체의 기원을 소유한 최초의 명명자이며, 자기 자신들의 사상의 신전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인간은 앎을 통하여 그의 두 발에 날개를 달아주고, 그는 그 두 발의 날개를 이용하여 자기 자신을 높이 높이, 더욱더 높이, 끌어 올리게 된다. 그는 최초의 사물에 최초의 이름을 부여하고, 그 명명자의 힘으로 전제군주적인 황금의 왕관을 쓰고, 그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발밑으로 내려다 보게 된다. 앎의 세계에서는 만인평등사상이 통용되지를 않으며, 어떠한 앎도, 마치 무주공산처럼, 그 소유권을 잃어본 적이 없다. 앎은 권력을 생산하고 권력은 앎을 생산한다. 하지만 그 권력을 가진 자는 자기 자신의 한계와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를 극복한 자이며, 비록, 그 업적이 아주 짧고 일시적인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라도, 우리 인간들의 지상낙원(유토피아)에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극락의 세계와 천국의 세계에서, 그 문화적인 제국의 삶을 향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역사는 앎의 투쟁의 역사이며, 앎의 투쟁의 역사는 권력 투쟁의 역사이다. 따라서 권력의 행사 자체가 안정되고 순조롭게 진행되면 그 사회의 평화와 삶의 풍요로움이 이루어지지만, 권력의 행사 자체가 안정되지 못하고 위태롭게 진행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삶의 빈곤화가 진행되기 마련인 것이다. 권력은 삶의 본능의 옹호이며, 모든 민주주의 형식들은 반권력적인 생명부정에의 의지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 어느 때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사상의 칼날을 지닌 자가 그보다 못한 자에게 패배를 하고 면종복배를 한 적이 있었으며, 또한 언제, 어느 때 그 권력(앎)의 무모함을 역설하면서, 그토록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교육제도를 폐기한 적이 있었던가? 앎과 권력은 오직 불평등 속에 기초해 있으며 폭력적인 서열제도만을 확대 재생산해 내게 된다. 일류와 삼류,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문화선진국과 문화후진국, 선과 악, 우와 열, 백인과 흑인, 고귀함과 비천함, 좋음과 나쁨, 강대국과 약소국, 주인과 노예, 자본가와 노동자, 남과 녀, 상사와 부하, 장군과 병졸, 대통령과 국민 등, 이 모든 관계들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권력은 노골적인 힘을 드러내고, 권위는 그 노골적인 힘을 은폐한다. 권력은 야만적인 나체주의자이며, 권위는 문화적인 장식주의자이다. 예컨대, 그는 ‘권력자로서, 학자로서, 회장님으로서, 시인으로서, 소설가로서, 그리고 변호사로서의 권위가 있다’고 할 때나, 또는 그 반대 방향에서, 그는 ‘권력자로서, 학자로서, 회장님으로서, 시인으로서, 소설가로서, 그리고 변호사로서의 권위가 없다’고 할 때의 그 권위는 바로 그의 옷이며 문화적인 표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의 권위란 그에 대한 세간의 정평을 뜻하게 된다. 삶의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는 자는 권위를 세울 수가 있지만, 삶의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는 자는 권위를 세울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가 그 권위에 복종하게 될 때에는,
이렇게 작가는 조잡하고도 미숙한 펜으로 힘에 겨운 이야기를 여기까지 끌고 왔습니다. 이렇게도 작은 공간 속에 그렇게도 위대한 인물들을 가두어 놓고, 그들의 영광스러운 자취를 띠엄띠엄 생각나는 대로 적어온 셈입니다. 짧은 사이, 그 짧은 사이를 잉글란드의 샛별인 헨리왕은 그토록 위대하게 살았습니다. 운명이 이 왕의 검을 만들었습니다. 그 검으로 그는 세계의 가장 아름다운 뜰, 프랑스를 정복하고, 그리고 자기의 아들에게 그 지배권을 물려주었습니다.
----셰익스피어, 「헨리5세」(셰익스피어 전집 4, 휘문출판사, 1971) 에서
라고, 셰익스피어가 「헨리5세」를 노래할 때처럼, 찬양, 존경, 경의, 경배 등의 송가가 울려 퍼지게 되지만, 그 반면에 타인의 권위 앞에서 맹목적으로 복종하게 될 때에는,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지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랴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복종」 전문
라는 한용운의 「복종」에서처럼, 그 주체자가 자유를 잃고 바보나 얼간이나 팔푼이와도 같이 인간 이하의 짐승들로 타락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타인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것에 복종을 하게 될 때에도 인간적인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한다. 영어와 영국인의 영광을 위하여 글을 쓰고, 그 장중하고 울림이 큰 문체 하나로 세계적인 대작가가 된 셰익스피어,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미화하고 성화시킨 ‘헨리 5세’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뜰인 프랑스를 정복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게 대단한 인물은 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 우리는 세계적인 대작가인 셰익스피어의 권위만을 인정하고 있으며, 오늘도 그에게는 수많은 존경과 경의의 꽃다발이 바쳐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문화적 영웅에게는 경의를 표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가차없이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진정한 문화적 영웅을 위하여 경의를 표할 때조차도 인간의 주체성과 그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되고,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는 바보나 얼간이나 팔푼이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한용운의 「복종」이 바로 그러한 대표적인 예에 해당된다. 그의 부처에 대한 복종은 불가의 수도승으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 같지만, 그는 아버지 살해(부처의 살해)를 망각한 못난 제자이며, 가장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이기는 커녕, 더 이상의 교정이 불가능한 배 부른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아버지 살해는 문화를 움직여 가는 힘이며, 내가 ‘나’로서 설 수 있는 근본적인 전제조건이다. 나는 나로서 존재해야 하며, 그 어느 누구에게도 나의 자유와 주체성을 양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의 권위도 인정하지 말라!’ 나의 「사색인의 십계명」 제3계는 ‘범죄의 생산성’과 그 ‘범죄의 아름다움’을 꿰뚫어본 낙천주의자의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짐승의 무리 중에서 많은 짐승들을 꾀어내기 위해----그러기 위해 나는 왔다. 군중과 짐승의 무리들은 내게 화를 내리라. 목자들에겐 짜라투스트라는 강도라고 불리우리라.
나는 목자들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선한 자, 의로운 자들이라고 부른다. 나는 목자들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올바른 신앙을 가진 신도들이라고 부른다.
보라, 저 선한 자들, 의로운 자들을! 그들이 가장 미워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그들의 가치표를 부수는 자, 파괴자, 범죄자이다. ----허나 그는 창조하는 자인 것이다.
보라, 온갖 신앙을 가진 신도들을! 그들이 가장 미워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그들의 가치표를 부수는 자, 파괴자, 범죄자이다. 허나 그는 창조하는 자인 것이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구한다. 시체를 구하는 게 아니고 또한 짐승의 무리나 신도들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표에 새로운 가치를 써넣을, 함께 창조하는 자를 구한다.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청하, 1984)에서
리처드 왕 노오포크는 어서 내버리오. 짐의 명령이오. 거절해도 쓸데 없오.
모브레이 폐하! 어명이라면 이 일신이라도 폐하의 발 아래 내던져 버리겠습니다. 이 일신은 폐하의 것입니다. 그렇지만 비록 군병이라 할지라도 치욕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사후까지 무덤 위에 살아 남을 명예는 국왕의 명령이라 해도 더럽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모욕받고, 탄핵당하고, 창피당하고 무고의 독창毒槍으로 영혼을 꿰뚫린 이상, 그 독을 뿜어낸 저 자의 심장의 피가 아니고서는 이 상처를 낫게 할 고약은 없습니다.
리처드 왕 분노는 참아야 마땅하오. 그 결투 표시물을 이리 내 놓소. 표범은 사자에게는 복종하는 법이오.
모브레이 하지만 설마 반점斑點까지 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누명을 씻어 주신다면 이 결투 표시물은 내버리겠습니다. 폐하! 이 인생이 가진 최상의 보물은 오점 없는 미명입니다. 그 미명이 없어지면, 인간은 금분을 칠한 인형이나 채색한 염토에 불과합니다. 충신의 가슴 속에 깃들어 있는 용맹한 정신이야 말로 열 겹의 궤 속에 비장한 보석입니다. 명예는 저의 생명입니다. 생명과 명예는 하나입니다. 명예를 잃으면 생명도 잃고 맙니다.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셰익스피어 전집 4, 휘문출판사, 1971) 에서
나는 그리스 신화 속의 악티온과 에릭직톤이라는 두 인물들에게 입을 맞춰본다. 악티온은 숲 속의 사냥꾼으로서 아르테미스 여신의 나체를 훔쳐보다가 한 마리의 사슴이 되어 그의 사냥게에게 물려죽은 인물이며, 에릭직톤은 숲의 여신의 神木을 베어버린 결과, 그 굶주림을 참지 못해서 자기 자신의 몸을 뜯어먹다가 죽어버린 인물이다.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사회적인 금기를 깨뜨린 인물들이며, 그 신성모독적인 범죄 행위 때문에, 그 비극적인 일생을 마친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여신의 아름다운 나체를 훔쳐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 인간들을 신적인 존재로 끌어올릴 수가 있겠으며, 또한 우리가 그 여신의 神木을 베어버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문명과 문화를 건설할 수가 있겠는가? 신성모독은 삶의 본능의 옹호이며 고급문화의 원동력이다. 나는 「외디프스 신화의 수용 양상과 재해석」(비판, 비판 그리고 또 비판, 새미출판사)이라는 글에서, ‘아버지 살해’의 본질적인 국면들을 매우 독창적으로 분석해낸 바가 있지만, 범죄의 생산성과 범죄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신성모독적인 행위들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젊은 왕은 그의 예언자적 지성과 총명한 두뇌로써 문명과 문화의 건설에 이바지하게 되지만, 늙은 왕은 그의 낡아빠진 사고방식과 그 두뇌 때문에 온갖 사회적인 재앙만을 가중시키게 된다. 젊은 왕은 이로운 존재이며 늙은 왕은 해로운 존재이다. 부처, 예수, 악티온, 에릭직톤, 외디프스 신화 역시도 범죄의 생산성과 범죄의 아름다움에 맞닿아 있고, 이처럼, 신과 타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만의 사상의 신전을 건축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니체는 신성모독자로서 기독교인들을 ‘짐승의 무리’라고 폄하를 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자 한다. 그 기독교인들은 선한 자와 의로운 자들이 아니라 짐승의 무리에 불과하며, 니체의 ‘초인 사상’으로 개종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죽었고, 우리 인간들은 초극해야 될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초인’이란 이상 세계가 아닌, 현실의 삶에 충실한 인간을 말하며, 이 땅에 두 발을 튼튼히 내-딛고 있는 인간을 말한다. 따라서 니체는 그 초인 사상으로 기독교 사상의 근간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범죄자가 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범죄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창조자이며, 니체의 초인의 사상은 범죄의 생산성과 범죄의 아름다움의 극치에 해당된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니체는 신성모독자이자 낙천주의자이다. 신성모독자는 절대로 ‘건강한 염세주의자’----니체는 스스로를 ‘건강한 염세주의자’라고 칭하는, 너무나도 유치한 수준에서의 오류를 범하기는 했지만----가 될 수가 없으며, 그 범죄의 아름다움 속에는 언제, 어느 때나 우리 인간들의 삶에 대한 낙천주의적인 새싹이 자라나게 된다. 나는 니체의 제자로서, 그러나 이제는 니체의 손을 잡고, 그를 나의 사상의 신전으로 초대(인도)를 하고자 한다. 아버지, 혹은 신의 존재 자체가 조건없이 성화되기만 하면 더 이상 우리 인간들의 삶을 기대할 수가 없게 되지만, 두 눈을 딱 감고 아버지, 혹은 신의 존재를 단 칼에 베어버리면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고 화려한 문명과 문화가 꽃 피어나게 된다. 아아, 오점이 없는 명예!----. 아아, 그 오점이 없는 명예는 ‘아버지를 살해’한 자의 명예이며, 나의 사상의 신전은 그 명예로 둘러싸여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나의 스승인 프리드리히 니체의 손을 잡고 낙천주의 사상의 신전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자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프러시아 삭손州 뢰켄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일생내내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정신으로, 모든 가치들의 전복을 기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너희에게 초인超人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할 그 무엇이다”라고 그가 부르짖었을 때, 바로 그 부르짖음 속에는 ‘신의 사망선고’가 내려져 있었던 것이며, 따라서 그의 반기독교주의와 반형이상학주의, 그리고 그의 반이상주의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가 있는 것이다. 초인은 신을 섬기지 않은 사람이며, 하늘 나라의 이상적인 천국도 믿지 않는 사람이다. 초인은 우리 인간들의 미래의 인간이며, 그는 이 땅에 두 발을 튼튼히 내리고 있는 짜라투스트라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삶의 본능의 옹호자이며, 그는 그의 일생내내 우리 인간들의 삶을 비방하고 헐뜯고 부정하는 기독교와 염세주의 사상에 맞서 싸워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가령, 예컨대,
나는 필연적으로 내일의 인간, 모레의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철학자가 항시 스스로를 오늘과 상반되는 존재로 생각해 왔고, 또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기분을 점점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의 적은 오늘의 이상이었다. 철학자라는 이름의 인간의 육성자, 이 비범한 존재들은 이제까지 스스로를 지혜의 친구라기보다는 위험스러운 물음표, 불쾌한 바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대의 불쾌한 양심이 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자각해 왔다. 그러한 사명은 수행하기도 어렵고 달갑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회피할 수도 없는 것이었고, 그러면서도 궁극적으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시대의 미덕의 심장에다가 메스를 댐으로써 그들의 비밀한 과업이 무엇인가 드러냈다. 즉 인간의 새로운 위대함을 인식하고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전인미답의 새 길을 탐구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때마다 그들은 당대의 가장 찬양받는 도덕들 속에 얼마나 많은 위선과 안일, 나태, 타락, 허위 등이 숨겨져 있는가를, 그리고 당대의 미덕이 얼마나 낡은 것인가를 폭로해 왔다. 그들은 항시 다음과 같이 말해왔다. ‘우리들은 오늘날 그대들이 가장 불편스러워하는 곳으로, 그러한 길로 가야만 한다.
라는, 선악을 넘어서(청하, 1982)에서처럼, 니체의 철학은 철두철미하게 비판철학이며, 다른 한편,
내가 ‘비극적인’이라는 말의 개념과 비극의 심리학에 관한 궁극적인 지식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가를 우상의 황혼에서 최근에 설명한 바 있다. ‘인생의 가장 풀기 어렵고 가혹한 문제에 당해서도 생을 긍정한다는 것, 비견할 바 없는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무한한 즐거움을 느끼는 생의 의미----그것이 이른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나는 그것을 비극적 시인의 심리에 도달하기 위한 교량 역할로서 파악하였다. 시인이 비극을 쓰는 것은 공포나 연민을 제거하기 위함이 아니요, 공포와 연민의 맹렬한 폭발로부터 생기는 하나의 위험한 영향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함도 아니다.----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점에서 오해한 바 없지 않다.----그것은 모든 공포와 연민을 초월하여 생성이라는 영원한 기쁨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나 자신을 최초의 ‘비극적 철학자’로 이해할 만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즉 염세적 철학가의 정반대되는 철학자로서 말이다. 나 이전에는 이와같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하나의 비극적 파토스로 인식한 자는 없었다. 즉 비극적 지혜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라는 이 사람을 보라(청하, 1982)에서처럼, 니체의 철학은 생의 철학, 즉 비극철학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비극철학은 그의 목표이며, 비판철학은 그의 수단이다. 그는 그 디오니소스적인 세계, 즉 짜라투스트라적인 초인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하여, 기독교와 형이상학, 그리고 이상주의의 심장에다가 그의 메스를 들이댔던 것이고, 그 결과, 그는 ‘만인 대 일인의 싸움’에서 패배를 하여, 그 광대와도 같은 짜라투스트라의 삶을 살다가 갔던 것이다. 고독, 정적, 병, 短命이라는 운명, 너무나도 울고 싶을 때에도 익살스러운 광대가 되어야만 했던 그의 삶은 얼마나 쓰디 쓰고 처절했던 것이며, 다른 한편, 대학사회와 출판사, 그리고 언론사와 그의 조국인 독일에서의 홀대와 멸시의 아픔 등은 또한 얼마나 쓰디 쓰고 처절했던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는 비극철학자답게 그 비판철학의 건강함으로 우리 인간들의 삶의 본능을 옹호하고, 이 땅에 두 발을 튼튼히 내린 ‘초인의 사상’을 완성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니체의 ‘초인 사상’은 ‘위험스러운 물음표’와 ‘불쾌한 바보’가 되어야만 했던 그의 비판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며, 그 사상의 신전에는 다음과 같은 경구가 씌어져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은 불멸하기 위해서는 비싼 대가를 치뤄야 한다. 사람은 불멸하기 위해서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이 사람을 보라).
니체의 사상의 신전에는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 선악을 넘어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즐거운 지식, 도덕의 계보, 권력에의 의지, 반그리스도, 서광, 니체 대 바그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상의 황혼 등의 저서들이 그 빛을 발하고 있고, 그 빛 속에는 하이데거, 데리다, 미셸 푸코, 들뢰즈 등, 그의 후학들이자 세계적인 석학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직, 단 한 사람 뿐이었고 고문받는 순교자에 지나지 않았을 때, 니체는 “괴테도, 셰익스피어도, 단테도, 짜라투스트라에 비교하면 단순한 하나의 신봉자에 불과하며”, “베다의 시인들 역시도 짜라투스트라의 구두끈도 풀어줄 만한 가치도 없는 자들”(이 사람을 보라)이라고 혹평을 하며, 마치 자기 자신을 人神의 높이로까지 끌어올린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니체 철학의 최대의 약점은 기독교에 대한 혐오가 지나치다 못해서, 모든 형이상학과 우리 인간들의 이상마저도 극단적으로 부정하고 매장을 시켜버리려고 했다는 사실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나와도 같고 니체와도 같은 신성모독자들은 오늘날 무척이나 많이 늘어났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역사의 종말을 맞이한 것도 아니고, 또한 형이상학과 이상이 그 종적을 감춘 것도 아니다. 기독교와 형이상학, 그리고 이상 역시도 삶의 본능의 옹호이며, 그리고 그것들이 종적을 감추게 되면, 니체의 초인 사상도 그 설 땅을 잃어버리게 된다. 니체는 선악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다같이 바라보고 그 진정한 의미를 밝히려고 했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의 극단적인 사고방식만은 교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할 그 무엇이다”라는 초인 사상은 예수(신)와도 같은 인물을 지칭하며, 그 초월성 때문에 이상주의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인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따지고 보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가 기독교적인 예수에 지나지 않으며,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형이상학적(이상적)인 인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니체는 기독교, 형이상학, 이상주의, 그 어느 것도 뛰어넘지 못했으며, 그처럼 불가능하고 무모한 싸움을 수행해야만 되었던 어릿광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너희가 이상적인 것을 볼 때 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을 본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청하, 1982)라는 그의 명제 역시도 하나의 횡설수설에 불과하며, 오히려 거꾸로 “너희가 인간적인 것을 볼 때 나는 신적인 너무나 신적인 것을 본다”라는 형이상학적인 명제를 가능케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니체의 비극의 개념과 그 의미에 대한 정의는 매우 섬세하고 정교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의 독창적인 이론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이론은 그의 무지와 몰이해의 소산에 불과하며, 한 마디로 말해서, 비극은 유한한 존재자인 우리 인간들의 자기 초월의 문제와도 매우 깊숙이 결부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극이란 우리 인간들의 비참한 사건과 그 불행들을 지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주체자들이 처절한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는 것을 뜻한다. 요컨대 비극이란 말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말이며, 그 비극의 주인공이 더없이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갔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비극의 기원은 무엇이며, 왜 비극이 그토록 오랫동안 그처럼 중대한 문제로 회자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인간들이 불완전한 존재이며, 그 삶의 조건이 비극적이기 때문인 것이다. 신은 전지전능하며 영생불사의 존재인데 반하여, 우리 인간들은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은 애정의 결핍과 재화의 결핍, 그리고 능력의 결핍과 존재의 결핍 등과도 같은 비극적인 조건들 속에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그 비극적인 삶의 조건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프로메테우스와도 같은 무모한 고행을 되풀이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인간들의 불완전성이 비극의 기원이며, 그토록 오랫동안 비극이 중대한 문제로 회자되고 있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삶의 조건이 ‘비극적인 것’으로만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버지----힌두교의 브라만과 유태교의 하나님----를 상징적으로 살해하고 민중들을 구원해 냈던 부처와 예수, 살부와 근친상간을 범하고 테베 사회를 구원해 냈던 외디프스, 문명과 문화의 원동력인 불을 발명하고 그 댓가로 카우카소스의 바윗산에 묶여서 제우스의 신조인 독수리에게 하염없이 간을 쪼아 먹혀야만 했던 프로메테우스, 지동설을 역설했다가 화형을 당한 조르다노 브루노, 그의 스승인 헤겔의 절대정신을 비판하고 염세주의를 역설했던 쇼펜하우어, 이제까지의 모든 가치들의 전복을 기도하고 마침내 신의 사망증명서를 발급해 주었던 니체 등의 삶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 준다. 우리 인간들은 유한하지만 ‘인간이라는 종’은 영원하다. 또한 우리 인간들 개, 개인은 더없이 어리석고 약하지만, 이러한 문화적 영웅들이 이룩해낸 업적은 그들의 사상의 신전에서 더없이 거룩하고 위대하게 그 빛을 발한다. 모든 문명과 문화는 고귀한 것, 거룩한 것, 위대한 것을 위하여 이처럼 목숨을 바쳤던 영웅들의 성과에 의해서 구축된 것이며, 이러한 점에 있어서 우리 인간들의 비극적인 삶의 조건들은 그때 그때마다 슬기롭게 극복되어 왔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포와 연민을 몰아내기 위해서 비극을 보는 것도 아니며, 또한 공포와 연민의 위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비극을 보는 것도 아니다. 비극은 삶의 조건이며, 삶 자체이다. 따라서 우리는 삶(비극)이라는 거대한 장애물 앞에서 쓰러져 가고 있는 사람들과, 그리고 비록 일시적이고 잠정적이긴 하지만, 그 장애물을 극복해낸 문화적 영웅들에게 자기 자신을 일체화시키고 있는 것이지,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 비극을 보는 것은 아니다. 비극의 주인공들에게는 그 비극적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적인 과제이며, 공포와 연민의 감정은 매우 진부하고 방관자적인 관객의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이론’은 비극의 주인공들(모든 인간들)에 대한 모독이며 불필요한 감정의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비극의 주인공들과, 그 주인공들의 삶과 일체화된 관객들은 모두가 다같이 삶이라는 거대한 장애물 앞에 쓰러져서 아주 처절한 고통과 그 아픔에 신음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하고 상상할 수조차도 없었던 그 장애물들을 극복해 내가며, 하늘을 찌를듯한 환희에의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왜냐하면 배우와 관객들이 모두가 다같이 하나가 되어, 자기 자신과 인간이라는 삶의 문제에 몰두해 있기 때문이다. 비극은 연극이 아니라 삶 자체이며, 우리 인간들은 그 비극을 극복해 나가는 데서, 삶의 즐거움을 느끼고, 또 그 비극 앞에서 장렬하게 전사(순교)해간 선인들의 업적과 그 숨결을 통해서 삶의 아름다움과 그 경건함을 체득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비극을 삶의 본능의 옹호와 그 찬가로 바라본 니체의 정의는 매우 정확하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비극에 대한 니체의 정의는 그가 그토록 부정하고 비판했던 ‘자기 초월’의 문제와 직결될 수밖에 없게 된다. 부처, 예수, 프로메테우스, 디오니소스, 조르다노 브루노,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우리 인간들의 미래의 이상형이며,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인신의 경지로까지 올라간 문화적 영웅들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그토록 기독교와 형이상학에 반대하고 플라톤의 이상주의에 반대했던 니체의 ‘초인 사상’이 그들과 너무나도 똑같이 닮아 있다는 것은 이상 야릇한 역설이 아닐 수가 없다. 하나의 신전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신전들이 파괴되어야만 한다는 진리가 이처럼 정확하게 들어맞은 일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니체만이 자기 자신을 최초로 ‘비극철학자’로 인식할 만한 권리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니체 이전에, 부처, 예수, 호머, 프로메테우스, 소크라테스 등의 수많은 문화적 영웅들이 우리 인간이라는 종의 건강과 그 문명과 문화의 삶을 위하여, 자기 자신들의 단 하나 뿐인 생명을, 마치 한 자루의 촛불처럼 소진시켜 나갔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자기 초월, 즉 불사에 도전함으로써 영원불멸의 삶을 획득한 문화적 영웅들이며, 이러한 점에 있어서, “사람들은 불멸하기 위하여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니체의 통찰은 꼭 들어맞는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니체가 자기 자신을 최초로 ‘비극철학자’라고 명명한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그만큼 침소봉대되어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니체의 손을 이끌고 나의 ‘사색인의 십계명’ 중 제4계를 소리높여 낭송해 본다.
제4계: 사상의 신전을 짓고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라;
우리는 자기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놓을 필요가 있다.
나는 낙천주의자로서 ‘세계는 나의 범죄의 표상이다’라고 역설한 바가 있다. 이 말은 나의 범죄 행위가 있고, 그 다음에 세계가 있다라는 뜻이다.
創字에는 칼 도刀 자字가 들어 있다.
나의 사상의 신전, 낙천주의 속에는 우리 인간들의 꿈과 행복이 들어 있고, 언제나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짓고 있다.
낙천주의는 내가 최초로 명명한 용어는 아니지만, 나는 그 낙천주의라는 용어 속에다가, 이제까지 그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최고급의 지혜를 담아보려고 노력해 왔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낙천주의는 쇼펜하우어가 이해했던 것처럼 “종교에서는 물론 철학에서도 진리를 가로막는 근본적인 오류”(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집문당, 1994)도 아니고, 또한 니체가 이해했던 것처럼 “일단 비극 속에 침투해 들어가면 비극의 디오니소스 영역을 점차 잠식”(니체, 비극의 탄생, 청하, 1982) 해버리는 것도 아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비판하고 있는 낙천주의는 이제까지의 통속적인 낙천주의이지, 신성모독자로서의 내가 주창하고 있는 낙천주의가 아니다. 너무나도 쉽고 안이한 결말과 가짜 화해, 그리고 모든 비극적인 사건들과 그 원인들을 외면하고 무사안일 속의 쾌락만을 추구하고 있는 낙천주의자들은, 좀 더 명확하게 말한다면,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퇴폐주의자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덕이 도덕인 것은 공동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것들을 규정하고 그것이 사회적인 힘으로써 강제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퇴폐주의자들은 근본적으로 도덕을 부정하고 그가 소속된 공동체 사회를 붕괴시키고 있는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비판하고 있는 낙천주의는 더 이상 내가 주창하고 있는 낙천주의가 아니며, 그것은 하루바삐 퇴폐주의로 폐기처분해 버려야 할 쓰레기 더미에 지나지 않는다. 낙천주의는 이 세상과 우리 인간들의 삶을 즐겁고 기쁘게 긍정하는 사상이다. 낙천주의는 불쾌를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사상이며, 궁극적으로는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사상이다. 나의 사상의 신전, 낙천주의 속에는 우리 인간들의 꿈과 행복이 들어 있고, 언제나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짓고 있다.
스승은 남보다 앞서서 도道나 사물의 이치를 깨달은 선각자이며, 우리 인간들은 그 스승의 가르침에 의해서 문맹의 탈을 벗어던지고,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지혜인’의 옷을 입게 된다. 아버지와 스승이 다같이 옥살이를 하고 있다면 스승을 먼저 꺼내와야 한다는 탈무드의 교훈이 있듯이, 우리 인간들은 그 스승에 의해서 유한성을 극복하고 人神으로서의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승은 신들 중의 신(제우스)이며, 그의 은혜는 오늘도 이 지구를 밝혀주고 있는 태양처럼 크나 크기만 하다. 그러나 그 스승의 지위도 영원한 것이 아니며, 때때로 시대의 변모와 함께, 수많은 제자들에 의하혀 엄청난 도전과 시련에 처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스승이 스승이라는 이름과 지위만으로 제자들의 발목을 움켜쥐고 자기 자신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스승은 하늘의 태양과도 같지만, 그렇지 못한 스승은 이내 그 수명을 다해버리는 촛불과도 같다. ‘네, 그렇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의 스승은 기분이 좋아지고 어느 덧 우쭐해 진다. ‘네, 그렇습니다’라는 말은 스승에 대한 긍정과 그리고 그 긍정을 넘어선 존경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의 스승은 기분이 나빠지고 어느 덧 모욕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라는 말은 스승에 대한 존경은 커녕, 스승의 존재에 대한 강한 부정과 그 부정을 넘어서서 경멸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고귀하고 위대한 스승은 간이 크고 대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반박할 수 있는 제자만을 사랑해야 하고,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통해서 가장 화려하고 찬란한 문화의 새싹들을 길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 ‘네, 그렇습니다’만을 듣기 좋아하는 스승은 자기 자신의 손바닥만한 권위와 행복을 위해서 제자들의 장래를 갉아먹는 기생충에 불과하지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를 듣기 좋아하는 스승은 자기 자신의 육체를 희생하여 제자들의 미래의 희망을 길러내는 순교자라고 할 수가 있다. ‘네, 그렇습니다’의 제자들은 별 다른 재능, 별 다른 특징이 없는 조약돌에 불과하고,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의 제자들은 저마다의 개성과 독창성을 지닌 문화적 영웅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를 사랑하는 스승만이 참다운 스승이며 영원한 스승이라고 할 수가 있다. 참다운 스승이 없는 민족은 이민족의 지배를 받고 소멸해 가는 민족이며, 마침내, 우리 한국인들은 오천 년의 역사를 백척간두의 위기로 몰아 넣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아버지 살해)를 통해서 모든 인류의 스승이 된 사람이며, 나 역시도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를 통해서 참다운 스승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니체의 ‘건강한 염세주의’와 그의 ‘반기독교’와 ‘반형이상학’과 ‘반이상주의’를 단 칼에 베어버렸고, 또, 그리고, 자기 자신만이 ‘참다운 비극철학자’라는 니체의 오만방자함을 단 칼에 베어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니체와 나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통해서 참다운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며, 이제부터 나는 니체의 손을 잡고 ‘愛知의 숲’을 거닐면서, 그 참다운 스승에게 나의 낙천주의 사상을 설명해 주고자 한다.
나는 낙천주의 사상가로서 행복의 깊이1, 2, 3권을 출간한 바가 있다. 행복의 깊이 제1권은 우리 인간들의 삶의 본능을 옹호하면서 낙천주의자의 ‘삶의 양식’을 천착해본 것이고, 행복의 깊이 제2권은 ‘영원불멸의 삶’을 옹호하면서 낙천주의자의 ‘삶의 의지’를 천착해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행복의 깊이 제3권은 낙천주의자로서 내가 가장 즐겁고 기쁘게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세목들에 대하여 천착을 해본 것이다. 나는 지혜의 여신의 총애를 받고 있는 사람이며, 죄를 짓고 죄악을 정당화할 수 있을만큼 득죄의 수련을 쌓은 신성모독자이고, 또한 나는 고귀한 것, 거룩한 것, 위대한 것, 즉 문화적 영웅에 대한 사랑으로, 그 목표를 추구해 나가고 있는 낙천주의자이다.
나의 행복은 신성모독 속에서 꽃 피어나고, 그 꽃의 아름다움은 천세불변의 사상의 신전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
靑蓮이 있대요
파랗게 핀대요
파아란 연기같이 오른대요
아름다운 靑蓮
희귀한 핏줄
불러줘 데려다 줘
내 청년으로 삼고 말거야
아름다운 내 청년
어디에 사나요
蓮도래지 남쪽바다 휘허한 옛 甲國
그림자 없는 無影池 그런 나라에
먼 청년
내 靑蓮
떠도는 소문 깊이
저 세상으로 깊이
白蓮이 피면
그 이름을 따로 불렀습니다
부를 수 없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靑蓮
희고지고희고지고희고지어서
흰빛의 목숨이 그만 끊기는 거기
파아란
내 청년은 깃들어 ----이진명, 「청련, 청년, 백련」 전문
이진명의 「청련, 청년, 백련」은 아름답고 절묘한 말의 울림과 함께, 언어의 마술사로서 그녀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이진명의 ‘靑蓮’은 상상 속의 꽃이며, 그녀는 그 파아란 청련을 통해서 아름다운 ‘靑年’을 연상해 낸다. 그 청년은 그녀의 마음 속의 이상형이며, 그와의 사랑을 통하여 “蓮도래지 남쪽바다 휘허한 옛 甲國/ 그림자 없는 無影池”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간직하게 된다. “아름다운 내 靑年/ 어디에 사나요”라는 시구가 바로 그것이며, 따라서 「청련, 청년, 백련」은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삶’을 노래한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름다운 靑蓮”도 아름다운 인간의 행복을 자라나게 하고 있고, “아름다운 내 靑年”도 아름다운 인간의 행복을 자라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삶’은 이 시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죽음’으로 자연스럽게 시적인 승화를 이룩하게 된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靑蓮’과 ‘아름다운 내 靑年’이 살고 있는 ‘蓮도래지 남쪽바다 휘허한 옛 甲國’은 ‘白蓮’이 피는 죽음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련’이 피는 죽음의 나라는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죽음’의 나라로 지칭되는 데, 왜냐하면 그 행복한 죽음의 나라는 “파아란 내 靑年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백련’은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의 상징이며, 머나 먼 하늘 나라의 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삶’이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죽음’이며, 그것은 곧바로 우리 인간들의 행복으로 승화된다. 「청련, 청년, 백련」은 삶과 죽음이, 마치 자웅동체처럼 육화되어 있는 시이며, 한국현대문학사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낙천주의의 목표는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삶’과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죽음’이다.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삶’은 삶의 완성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고,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죽음’은 죽음의 완성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삶과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죽음, 즉, 그 낙천주의자의 실천방법은 ‘나는 신성모독을 범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세계는 나의 범죄의 표상이다, 고로 행복하다’라는 두 개의 명제 속에 극단적으로 드러나 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나는 신성모독을 범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나의 존재론이며, 그 존재론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면 ‘세계는 나의 범죄의 표상이다, 고로 행복하다’라는 나의 행복론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낙천주의자는 신성모독자이고, 신성모독자는 낙천주의자이다. 부처, 예수, 프로메테우스, 외디프스, 소크라테스, 칸트, 헤겔, 니체, 쇼펜하우어,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갈릴레오, 뉴턴, 아인시타인, 반경환 등은 모두가 ‘아버지 살해자’이며, 그 아버지 살해자가 낙천주의의 목표를 잃고 이 세상의 삶을 향유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최초의 명명자이자 최초의 입법자로서, 마치 수천 년을 찍어누르듯이, 낙천주의의 명제를 나의 사상의 신전에 새겨둔 바가 있다.
우리 인간들은 죽어갈 수가 있어서 행복하고, 또다시 태어날 수가 있어서 행복하다.
호머가 전지전능한 신들과 맞서서, 우리 인간들의 인문주의를 옹호한 바가 있듯이, 죽음을 모르는 인간은 권태에 사로잡혀 있는 자이며, 불행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또, 그리고, 다만, 죽어갈 뿐, 또다시 태어날 수 없는 인간은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자이며, 불행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가고 모든 것이 되돌아 온다. 그러나 나는 이 불교의 윤회사상과 영겁회귀사상을 발밑으로 깔아 뭉개버리면서 나의 낙천주의 사상의 명제들을 더욱 더 정교하고 세련되게 정식화시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 여자는 죽었다
죽은 여자의 얼굴에 生生히 살아 있는 검버섯
죽은 여자는 흰꽃무당버섯의 훌륭한 정원이 된다
죽은 여자, 딱딱하게 닫혀 있던
음부와 젖가슴이 활짝 열리며
희고 고운 가루가 흰나비 분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반짝거리는 알들
내 죽은 담에는 늬들 선산에 묻히지 않을란다
깨끗이 화장해서 찹쌀 석 되 곱게 빻아
뼛가루에 섞어달라시는 엄마 바람 좋은 날
시루봉 너럭바위 위에 흩뿌려달라시는
들짐승 날짐승들 꺼려할지 몰라
찹쌀가루 섞어주면 그네들 적당히 잡순 후에
나머진 바람에 실려 천 지 사 방 훨 훨
가볍게 날으고 싶다는
찹쌀 석 되라니! 도대체 언제부터
엄마는 이 괴상한 소망을 품게 된 걸까
저 여자, 흰꽃무당버섯의 정원이 되어가는
버석거리는 몸을 뒤척여
가벼운 흰 알들을 낳고 있는 엄마는
아기 하나 낳을 때마다 서 말 피를 쏟는다는
세상의 모든 엄마들처럼
수의 한 벌과 참쌀 석 되
벽장 속에 모셔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기다려온 것이다
----김선우, 「엄마의 뼈와 찹쌀 석 되」 전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이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며, 또한 무엇이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이란 말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낙천주의자----‘삶은 죽음의 완성’이며,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낙천주의자----만이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의 경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진명의 「청련, 청년, 백련」이라는 시도 그렇지만, 김선우의 「엄마의 뼈와 찹쌀 석 되」 역시도 ‘아름답고 행복한 삶’과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자기 자신의 ‘뼛가루’와 ‘찹쌀 석 되’를 섞어서 ‘들짐승과 날짐승’의 밥이 되게 해달라는 어머니가 어떻게 죽음의 공포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인간일 수가 있겠으며, 이 세상의 삶을 마친 뒤에도 ‘천지사방’으로 가볍게 훨훨 날아다니고 싶다는 어머니가 또한 어떻게 삶의 공포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인간일 수가 있겠는가? 죽음은 탄생의 결과이며, 삶은 죽음의 결과이다.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생각하면 죽음의 공포가 없어지고, 삶을 죽음의 완성이라고 생각하면 삶의 공포가 없어지게 된다.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우리 인간들의 한계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이며, 삶의 완성으로써 언제나 열려 있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고 삶은 죽음의 완성이다. 그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삶’을 배운 인간이 삶의 공포(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 등)와 죽음의 공포(육체와 영혼의 소멸과 지옥으로의 추락 등) 앞에서, 미리부터 오줌을 질질 싸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삶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해낸 인간은 보다 나은 인간, 보다 완전한 인간, 즉 신적인 인간을 위하여 두 눈 하나 껌뻑하지 않고 ‘아버지 살해’를 감행하게 된다. 하지만 외디프스콤플렉스는 나의 상승 욕망이지, 성적 욕망이 아니다.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은 보다 나은 인간, 보다 완전한 인간, 즉 신적인 인간을 위한 나의 상승 욕망 앞에, 더 이상의 저항없이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해 가을 나는 아무에게도 便紙 보내지 않았지만
늙어 軍人 간 친구의 便紙 몇 통을 받았다 세상 나무들은
어김없이 동시에 물들었고 풀빛을 지우며 집들은 언덕을
뻗어나가 하늘에 이르렀다 그해 가을 濟州産 5년생 말은
제 주인에게 대드는 자가용 운전사를 물어뜯었고 어느
유명 작가는 南美紀行文을 연재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여기 계실 줄 몰랐어요
그해 가을 소꿉장난은 國産映畵보다 시들했으며 길게
하품하는 입은 더 깊고 울창했다 깃발을 올리거나 내릴
때마다 말뚝처럼 사람들은 든든하게 박혔지만 햄머
휘두르는 소리, 들리지 않았다 그해 가을 모래내 앞
샛강에 젊은 뱀장어가 떠오를 때 파헤쳐진 샛강도 둥둥
떠올랐고 高架道路 공사장의 한 사내는 새 깃털과 같은
속도로 떨어져내렸다 그해 가을 개들이 털갈이 할 때
지난 여름 번데기 사 먹고 죽은 아이들의 어머니는 후미진
골목길을 서성이고 실성한 늙은이와 天賦의 白痴는
서울역이나 창경원에 버려졌다 그해 가을 한 승려는
人骨로 만든 피리를 불며 密敎僧이 되어 돌아왔고 내가
만날 시간을 정하려 할 때 그 여자는 침을 뱉고 돌아섰다
아버지, 새벽에 나가 꿈 속에 돌아오던 아버지,
여기 묻혀 있을 줄이야
그해 가을 나는 세상에서 재미 못 봤다는 투의 말버릇은
버리기로 결심했지만 이 결심도 농담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떨어진 은행잎이나 나둥그러진 매미를 주워
성냥갑 속에 모아두고 나도 누이도 房門을 안으로
잠갔다 그해 가을 나는 어떤 가을도 그해의 것이
아님을 알았으며 아무 것도 美化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卑下시키지도 않는 法을 배워야 했다
아버지, 아버지! 네가 아버지냐
그해 가을 나는 살아 온 날들과 살아 갈 날들을 다 살아
버렸지만 壁에 맺힌 물방울 같은 또 한 女子를 만났다
그 여자가 흩어지기 전까지 세상 모든 눈들이 감기지
않을 것을 나는 알았고 그래서 그레고르 잠자의 家族들이
埋葬을 끝내고 소풍 갈 준비를 하는 것을 이해했다
아버지, 아버지.......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그해 가을, 假面 뒤의 얼굴은 假面이었다
----이성복, 「그해 가을」 전문
아버지 살해, 즉 신성모독은 모든 문화를 움직여 가는 근본적인 힘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처럼 거창한 것도 아니고, 도덕적인 패륜아들만이 저지르게 되는 반인륜적인 범죄 행위도 아니다. 신성모독은 강물이 흘러가듯이, 매우 자연스러운 삶의 이치이며, 그 행위가 대단한 사건처럼 보이는 것은 그 인공적인 댐들----도덕, 법, 질서, 풍습의 미덕들----이 삽시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건설자로서의 아버지는 자기 자신의 이타성과 그 업적을 강조하게 되지만, 아들은 그 아버지에게 전인미답의 칼날을 들이대며 새로운 도덕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한다. 역사와 전통은 아버지의 傳家의 寶刀이며, 새로운 역사와 전통은 아들의 傳家의 寶刀이다. 전자는 범죄적이고 후자는 모독적이다. 그러나 그 아버지와 아들과의 싸움은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이론으로 무장한 아들의 승리로 끝나게 되고, 그 아들은 어느 새 아버지가 되어서 어떠한 아들의 도전도 물리칠 수 있는 사상의 신전을 짓고자 오늘도 두 눈에 핏발을 세우며 긴, 긴 밤을 지새우게 된다. “아버지, 아버지.......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이것이 천세불변의 진리이며, 최고급의 격세유전인 것이다. 아버지 살해의 전제 조건은 홀로서기이며, 홀로서기는 가장 위대한 인간, 즉 문화적 영웅의 전제조건이다. 홀로서기는 그 주체자의 인간 관계----부모형제, 친구, 스승, 선배----를 청산한다는 점에서 ‘밖으로부터 안으로의 운동’(내재성의 확립)이기도 하고, 또 인간 관계의 사회적 장을 떠나서 떠돌이와도 같은 주변인으로 밀려난다는 점에서 ‘안으로부터 밖으로의 운동’(외재성의 확립)이기도 하다. 이 안과 밖, 즉 내재성과 외재성이 상호 겹쳐지는 운동이 바로 ‘홀로서기’(주체성의 확립)이며, 우리는 이 홀로서기를 통해서 우리 인간들의 생사의 운명을 좌우하는 지상 최대의 모험을 감행하게 된다. 모험은 끊임없이 위험하게 사는 것이며, 모든 문화적 영웅들의 생명의 실핏줄이다. 멋진 고통, 우아한 고통, 생살이 찢어지고 모든 뼈마디가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 그리고 그 고통들 속으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몰아넣으며 우리 인간들의 삶을 옹호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낙천주의자의 삶의 양식인 것이다. 싸움(신성모독)은 으뜸가는 문화의 원동력이며, 최고급의 사상의 신전의 건축가이다. 나는 행복의 깊이 제1권, 제5장, 「포효하는 삶」에서 그 싸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역설한 바가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자들은 고귀하고 위대한 것을 한없이 깎아내리고 우리 인간들의 삶을 생기없게 만들고 있지만, 권력을 부정한다는 것은 삶을 부정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생명부정에의 의지’에 지나지 않는다. 지배하는 자, 명령하는 자, 그리고 모든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들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 프로이트, 보드리야르, 미셸 푸코, 들뢰즈/ 가타리, 데리다, 부르디외 등은 인간 쓰레기와도 같은 지배자 혐오주의자들이며, 현대 민주주의의 광신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권력은 삶의 본능의 옹호이며, 수많은 권력 투쟁과 다양한 투쟁 전략이 끊임없이 생성- 전개되고 있다는 것은 ‘인간 사회’라는 유기체가 매우 싱싱하게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역설한 바가 있지만, 정복자는 이웃 민족국가의 영토를 빼앗고 그 원주민들을 노예로 거느리게 되고, 피정복자는 자기 영토를 빼앗기고 이민족을 하나님과도 같은 주인으로 섬기지 않으면 안 된다. 힘이 있으면 그것은 선이 되고, 힘이 없으면 그것은 악이 된다. 이것이 모든 유기체들의 생존이라는 게임의 법칙인 것이다. 힘을 잃고 약화된 민족은 반드시 소멸하게 되어 있는 반면, 힘에 힘을 더하고 강력해진 민족은 그 물리적인 힘의 토대 위에서 그것을 은폐한 채, 고급문화인으로서의 미소를 띠고, 제법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으로 자유와 평등과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다. 모든 싸움은 ‘도덕적 선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싸움이며,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이 대부분의 인간들을 지배해야 된다는 것이 그 싸움의 전제 조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상, 이념, 고급문화, 영원한 제국, 이 모든 것들은 그 권력자들의 ‘포효하는 삶’이 미화하고 합리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철학 예술가로서 나는 이 세상의 삶을 향유하는 데 그 무엇보다도 관심이 있고, 또, 그것은 낙천주의자로서의 나의 행복론으로 나타난 바가 있다. 따라서 나의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나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절대 긍정을 위한 비판이다. 나는 가능하면 가장 어렵고 힘들고, 그 어느 누구도 하지 않으려는 것, 그러나 누군가가 꼭 해야만 하는 일에 관심을 보여왔고, 그것으로 인하여 염세주의, 기독교, 불교, 공산주의, 현대 민주주의, 그리고 그 어중이 떠중이들과는 상반되는 길을 걸어왔던 셈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 어중이 떠중이들을 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을 자청하게 된 것이며, 단 한 명의 원군이나 우군도 없이 가장 강력한 적들과의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을 걸만큼 충분히 강하고, 생사의 문제를 헐리우드의 전쟁 영화처럼 가볍게 여길 줄도 알고 있다. 싸움은 인간을 비정하고 잔인하게 만들고, 또한 그것은 인간을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싸움은 싸움의 목적을 분명하게 만들고, 그 싸움의 결과가 승리일 때는 최고의 희열을, 그렇지 않을 때는 목숨까지도 빼앗기게 되는 비참한 상실감을 미리부터 맛보게 한다. 어떤 싸움이든 그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승리이며, 그 승리의 축배는 돈, 명예, 권력, 그밖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나는 천성적으로 호전적이고 전투적이지만, 나는 나의 싸움에 관한 실천 원칙을 갖고 있다. 나의 싸움은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이며, 이제까지의 그 싸움이 만인들의 횡포에 견디지 못한 일인의 싸움에 불과했다면, 나는 그 ‘원한 맺힌 저주 감정’ 없이 만인들의 어리석음을 문제삼고, 그들 모두가 자기 자신들도 모르게, 나의 적이 될 수밖에 없도록 몰아 부쳤던 것이 그 특징적이다. 나의 욕망은 상승 욕망이며, 그 상승 욕망은 니체의 권력 욕망이나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을 하위 개념으로, 혹은 종속 개념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보다 나은 인간, 보다 완전한 인간, 그 신적인 인간이 나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우리 인간들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내가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 즉, 저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 학자들은 신문과 대중매체, 넋 잃은 독자와 그 옹호자들에 둘러싸여 매우 보잘 것 없고 아주 작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기가 십상이지만, 나의 승리는 가장 처절하고 비참한 패배에 둘러싸여 그 승리의 의미도 퇴색해 버리고, 이내 그 몸 둘 곳을 몰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면적인 양상일 뿐, 그 깊은 곳에서는 언젠가는 새로운 태양처럼 떠오르게 될 에너지로 충만해 있는 것이다. 높이 높이 날아오른 새가 잘 보이지 않듯이, 깊이 깊이 내면으로 스며든 나의 승리가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에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을 수행하고 있으며, 그 궁극적인 목표는 낙천주의자의 신전의 건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을 통하여 그의 이상적인 공화국을 연출해 냈고, 예수와 부처는 그 싸움을 통하여 그들의 이상적인 천국을 연출해 냈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 싸움을 통하여 ‘문화의 제국’을 연출해 냈고, 나폴레옹은 그 싸움을 통하여 유럽연방을 연출해냈다. 그리고 또한, 임마뉴엘 칸트는 그 싸움을 통하여 그의 도덕 왕국을 연출해 냈고, 마르크스는 그 싸움을 통하여 그의 공산주의를 연출해 냈다.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그 주체성의 확립(홀로서기)을 통하여 타자성의 완성(세계 영역의 확대), 즉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사상의 신전을 건축해 놓았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신성모독자는 낙천주의자이며 낙천주의자는 신성모독자이다. 낙천주의자는 죄를 짓고 죄악을 정당화하면서 이 세상을 더욱더 아름답고 넓고 풍요롭게 바라다 보게 된다. 낙천주의자는 으뜸가는 문화의 육성자이며 최고급의 사상의 신전의 건축가이다. 그리고 그는 그 싸움을 통해서 늙음도 죽음도 모르는 어린 아이처럼 그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나는 이제까지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삶’과 ‘아름다운 인간--행복한 죽음’, 즉 낙천주의의 목표와 그 실천 방법들, 그리고 낙천주의의 명제들---- 행복의 깊이 제1권을 통하여----을 역설하면서, 나의 스승인 니체에게, 또는 여러 독자들에게 그것을 설명하고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나의 행복의 깊이 제2권은 낙천주의자의 네 의지를 천착해본 저서라고 할 수가 있다. 모든 의지는 삶의 의지이지만, 나는 그 삶의 의지를 ‘앎에의 의지’, ‘무지에의 의지’, ‘진실에의 의지’, ‘거짓에의 의지’로 분류해본 바가 있다. 의지란 생각하고 선택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며, 또한 어떤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또한 의지란 힘에의 의지이며, 최고의 권력자(주체자)의 감정 상태를 말한다. 그는 예언자적 지성과 총명한 두뇌를 갖고 있는 인간이며, 재빠르고 민첩한 동물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 인간이다. 그는 황소와도 같이 우직하고 성실한 근면함을 갖고 있는 인간이며,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백절불굴의 용기와 독자적인 사상과 독자적인 판단 능력을 갖고 있는 인간이다. 그는 낙천주의자이며, 문화적 영웅이고, 니체의 ‘초인’을 뛰어넘는 미래의 인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첫 번째로 앎에 의지하고, 두 번째로 무지에 의지하며, 세 번째로 진실에 의지하고,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로 거짓에 의지한다. 마르크스는 토대가 상부구조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짓는다는 유물사관을 통하여 자본주의 사상을 비판하고, 부의 공정한 분배와 만인평등사상에 기초한 공산주의 사상을 역설한 바가 있다. 하지만 그의 결정적인 오류는 위대한 공산주의의 혁명이 만인평등사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전체주의적이며 부패한 관료 계급을 낳게 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에 의하여 패배를 하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연구했던 사상인만큼 그의 앎에의 의지의 소산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그의 무지에의 의지의 소산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가 지니고 있는 수많은 약점들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또 무지했기 때문에, 시골목사의 순진성을 가지고 공산주의의 혁명을 꿈꿨던 것이며, 또한 그의 순진함은 그 순진했던만큼, 그의 진실에의 의지가 되어주기도 했던 것이다. 순진한 자는 진실한 자이며, 진실한 자는 순진한 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 역시도 그 이상적인 공산주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의 진실에의 의지는 거짓에의 의지가 된다. 지혜로운 사람은 거짓말을 잘하고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은 지혜롭다. 앎에의 의지는 무지에의 의지가 되고, 무지에의 의지는 진실에의 의지가 된다. 진실에의 의지는 거짓에의 의지가 되고, 거짓에의 의지는 앎에의 의지가 된다. 앎에의 의지, 무지에의 의지, 진실에의 의지, 거짓에의 의지는 우리 인간들의 삶의 의지를 떠받쳐 주는 네 의지로써 끊임없이 그 원형적인 순환 고리를 형성하게 된다. 앎에의 의지, 무지에의 의지, 진실에의 의지, 거짓에의 의지는 나의 사색의 힘에 의해서 탄생되었고, 우리 인간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네 의지에 의지하지 않으면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게 된다. 마치, 우리가 우리 인간들의 삶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것처럼----.
나는 지난 10여 년 동안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듯한 심정으로 글을 써왔고, 앞으로도 그러한 ‘愛知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고 화려한 사상의 신전을 건축한다는 것이 나의 지상 최대의 목표이며, 바로 그때에는 우리 한국인들은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이라고 불리우게 될 것이다. 행복의 깊이 제3권은 내가 가장 즐겁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세목들에 대하여 매우 깊이 있게 천착을 하고 있으며, 이 ‘사색인의 십계명’ 역시도 그 저서의 독창적인 산물이라는 점을 밝혀두고자 한다. 「독서에 대하여」, 「산책에 대하여」, 「일에 대하여」, 「술에 대하여」, 「연애에 대하여」, 「우정에 대하여」 등의 여섯 개의 장이 바로 그것이다. 요컨대 그 책이 얼마만큼 독창적이냐 하면,
그러나 나는 ‘연재를 시작하면서’라는 글에서, “때때로 디오니소스의 신전을 방문하고 그 황홀한 정원에서 절대 군주가 되는 황홀함을 맛보기도 한다”라고 시사를 한 바가 있듯이, 이 장은 술에 대한 찬가에 바쳐진 글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신의 노여움을 달랠 때에도 술이 필요하고,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에도 술이 필요하다. 공동체 사회의 재앙과 질병을 쫓아낼 때에도 술이 필요하고, 너와 내가 관계를 맺을 때에도 술이 필요하다. 벼와 곡식을 심을 때에도 술이 필요하고, 추수를 할 때에도 술이 필요하다. 장례식에도, 결혼식에도 술이 필요하고, 마음이 기쁘거나 슬플 때에도 술이 필요하다. 우울하고 쓸쓸할 때에도 술이 필요하고, 괴로울 때에도, 자살을 결행할 때에도 술이 필요하다. 출판기념회나 상을 받을 때에도 술이 필요하고, 매매계약을 하거나 재판절차를 마쳤을 때에도 술이 필요하다. 상상력이 고갈되거나 새로운 앎의 출구가 막혔을 때에도 술이 필요하고, 새로운 지혜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였을 때에도 술이 필요하다. 술은 우리 인간들의 생명이며, 피 자체이다. 술의 기원에는 우리 인간들의 생명이 있고, 피가 있다. 시, 신화가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라면, 술은 그 낙천주의자의 생명이며, 피 자체이다. 금주법은 우리 인간들에게 반자연의 악법이며, 우리 인간들의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들은 술이 없으면 이 세상을 살아 갈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술의 기원에는 우리 인간들의 생명이 있고 피가 있다라는 말에 입을 맞추면서, ‘술에 대한 열 가지의 질문과 답변’을 마련해 보고자 한다.
술에 대한 열 가지의 질문과 답변
1, 술은 왜 취하게 만드는가?
알코올 성분이 들어 있어서 마시면 취하기 때문이다.
2, 술은 왜 횡설수설하게 만드는가?
우리 인간들의 무의식을 풀어놓고 제멋대로 말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3, 우리는 왜 술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가?
쓸쓸하고 외로워서----.
4, 술은 왜 잠을 불러 일으키는가?
효능에 의해서----.
5, 술은 왜 범죄를 유발시키는가?
두려움과 공포를 없애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기 때문이다.
6, 술은 왜 기쁨을 유발시키는가?
황홀하게 취하게 만들기 때문에----.
7, 술은 왜 여자의 유방을 더듬고 성교를 하고 싶게 만드는가?
성스러운 기피이며, 이유불문의 금지인 도덕 명령을 무시하고 성적 욕망에 따라서 행동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8, 시인은 왜 술을 좋아하는가?
때때로 상상을 초월한 영감을 부여해 주고 불후의 명작을 쓸 수 있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9, 술은 우리 인간들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술은 우리 인간들의 생명이며, 피 자체이다. 인생이 예술이라고 할 때, 모든 인간은 술 취한 자와도 같다.
10, 황홀한 도취의 상태란 어떠한 상태인가?
모든 인과의 법칙이 제거된 상태이며,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고 신적인 상태로 수직적인 초월을 이룩한 상태를 말한다
라는, 제4장 「술에 대하여」와, 그리고
내가 사귀고 있는 최고급의 친구들을 살펴보면 이렇다.
호머 전지 전능한 신들을 창조하고 그 신들과의 싸움을 통해 우리 인간들의 삶을 찬양하고 옹호했던 휴머니스트.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최초의 시인이자 최후의 시인.
소크라테스 한 마리의 등에처럼, 아테네 사회의 제일급의 인사들의 ‘無知’를 일깨워주고 ‘너 자신을 알라’라는 철학적 명제를 양식화시켰던 인물. 그의 앎과 행동이 일치된 ‘愛知’의 철학을 배우되, 언제나 내가 논쟁을 해보고 싶은 위대한 스승.
플라톤 그의 이상 국가를 방문하고, 내가 시와 예술의 진수를 가르쳐 주고 싶은 인간.
아리스토텔레스 그와 함께 시와 예술을 논하고 그의 중용의 미덕을 배워보고 싶은 인간, 그러나 내가 중용의 미덕의 약점을 지적하고 혁명가의 날쌘 검술을 가르쳐 주고 싶은 위대한 스승.
셰익스피어 아직도 그의 언어와 문체 속에서, 마냥, 그대로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은 세계적인 대작가. 내가 더없이 초라해 지고 더없이 행복해 지는 위대한 스승.
쇼펜하우어 나에게 최초로 염세주의를 가르쳐 주고 염세주의자도 그처럼 학문과 예술을 사랑할 수가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 준 위대한 스승. 니체에게 철학적인 진실과 명랑함과 항상성을 가르쳐 준 위대한 스승. 그러나 내가 나의 ‘낙천주의’를 꼭 가르쳐 주고 싶은 위대한 스승.
니체 좀 더 강력하고 위대한 적을 찾아서 언제나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정신을 가다듬었던 디오니소스 유형의 철학자. 그러나 내가 나의 ‘낙천주의’를 꼭 가르쳐 주고 싶은,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최초의 스승이자 모든 인류의 영원한 스승.
프로이트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운 집중력으로 그의 학문에 정진했던 유태인. 내가 그의 외디프스콤플렉스의 망령을 잠재우고 시와 예술의 진수를 가르쳐 주고 싶은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괴테 그토록 오만방자하고 시건방진 니체와 쇼펜하우어가 수십 번씩, 수백 번씩 인용을 해먹고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던 세계적인 대작가. 내가 그의 파우스트를 수십 번씩 되풀이 읽어가면서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인용한 구절들을 체크해 보기도 했지만, 아직도 내 스스로 분석을 하고 판단을 내릴 수가 없는 세계적인 대작가. 내가 다시 태어나면 독일어와 라틴어를 공부하고 파우스트의 원전을 다시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세계적인 대작가.
오딧세우스 그의 뛰어난 지혜와 강인한 정신을 배워보고 싶은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
헤라클레스 건강, 힘, 용기, 그의 열두 가지 노역을 마다하지 않던 대담성과 용기를 배워보고 싶은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
보들레르, 랭보 그들의 저주받은 운명을 배워보고 싶은 시인들.
반고호, 폴 고갱 가난, 광기, 백만 분의 일의 가능성에 매달렸던 위대한 예술가들.
김수영 건강, 정직, 성실, 용기, 그리고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정신의 소유자. 그의 미완의 가능성 앞에서, 아아! 라는 탄식의 말로 대신할 수밖에 없는 내가 존경하는 최초의 한국인이자 최후의 한국인.
내가 사귀고 싶어하지 않는 우리 한국인들은 다음과 같다.
유ㅇㅇ 여자처럼 나약하고 언제나 줏대가 없는 인간.
김ㅇㅇ 재승후덕의 탈을 썼으나 다독의 폐해에 젖어서 정신의 탄력성을 몽탕 잃어버린 인간. 사상이 무엇인지, 문학 이론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프랑스비평사라는 엉터리 책을 써낸 천하의 사기꾼. 그의 행복한 책읽기는 ‘나는 아무 것도 사유하지 않았소!’라는 그의 묘비명.
백ㅇㅇ 언제나 쩨쩨하고 가부장적인 권위만을 내세우는 인간. 창작과 비평 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무런 학문적 연구 주제도 갖지 못한 민족주의적인 괴물.
김ㅇㅇ 언제나 서구의 사유인들에 대한 노예적인 복종 태도와 함께, 문학과 예술에 대한 감수성도 전혀 없는 인간.
고ㅇㅇ 염세주의자에서 민족주의자로 변신한 사기꾼. 그리고 민족 시인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 20세기 말의 최대의 사기꾼.
이ㅇㅇ 반인반수인 미노타우르스와도 같은 괴물. 대한민국의 모든 작가들을 다 잡아먹고 텅텅 빈 관악산 기슭에서 그 배고픔을 참지 못해 오늘도 울부짖고 있다. “아아, 대한민국의 작가들은 고작 이것 뿐이란 말인가! 아아, 이 요상한 괴물 미노타우르스의 운명도 여기서 끝장이란 말인가! 나는 단 한 줄의 소설도 쓰지 않고 노벨문학상을 타려고 했는데, 여기서 굶어 죽다니...... 스웨덴의 한림원이여! 이제는 그 수상 제도를 개선하여 아무 소설도 쓰지 못하고 굶어죽은 이 미노타우르스에게도 그 상을 수여해 다오!”라고, 오늘도 그 미노타우르스는 그렇게 간절하게 강청을 하고 있다.
김ㅇㅇ 루카치를 베껴먹고, 일본인 학자들의 논문을 베껴먹고, 도둑의 신인 헤르메스를 신봉하는 사기꾼. 서울대학교라는 폐허의 신전에서 가짜의 왕관을 쓴 채, 교육시장의 개방과 정년 퇴직을 두려워하여 오줌을 질금질금 싸는 사기꾼.
정ㅇㅇ 스승 앞에서는 언제나 여자처럼 유약하고 용기가 없는 나약한 인간. 그의 화려한 수사는 사상의 빈곤을 은폐하고, 그의 불성실을 은폐하는 아주 유치한 화장도구에 불과하다.
(이상 공히, 사상의 신전이 아닌 권력의 신전을 세운 대한민국의 제일급의 인사들. 이미, 나의 사상의 칼날을 맞고 조용히 죽어가고 있는 괴물들)
이라는, 제6장 「우정에 대하여」를 살펴보아도 금방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나의 행복의 깊이 제3권은 자기고백적인 에세이 문체로, 나 자신만의 ‘독서’와 ‘산책’과 ‘일’과 ‘술’과 ‘연애’와 ‘우정’에 대한 秘法이 구축되어 있으며, 그 비법들은 나 자신의 고통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들의 행복의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가난한 산지기 움막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재래시장의 싸구려 상품처럼 팔려나간 바가 있었다. 꿈과 낭만도 사치에 지나지 않았고, 자유와 선택마저도 나의 젊음을 움켜쥐고 짓눌러 버리는 악마의 손짓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도 어렵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행복했고, 또한 나는 너무나도 불행했고, 또 불행했기 때문에 행복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진정으로 불행한 사람이고, 진정으로 불행한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나의 낙천주의는 너무나도 가난하고, 고통스러웠고, 불행했기 때문에 그 불행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나의 행복론이라고 할 수가 있다. ‘독서’, ‘산책’, ‘일’, ‘술’, ‘연애’, ‘우정’ 등은 나와 너무나도 가깝고, 내가 나의 삶을 언제나 즐겁고 기쁘게 향유할 수 있는 ‘삶의 세목들’일 뿐이다. 제1장, 「독서에 대하여」, 제2장, 「산책에 대하여」, 제3장, 「일에 대하여」, 제4장, 「술에 대하여」, 제5장, 「연애에 대하여」, 제6장, 「우정에 대하여」 등은 우리 인간들의 ‘삶의 세목들’이며, 나의 행복론의 第三位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삶의 양식’을 살펴보고 있는 {행복의 깊이} 제1권과 우리 인간들의 ‘삶의 의지’를 살펴보고 있는 행복의 깊이 제2권과 우리 인간들이 ‘삶의 세목들’을 살펴보고 있는 행복의 깊이 제3권은 나의 낙천주의 사상의 三位一體가 되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경환, 「자기 해설의 시도」(행복의 깊이 제3권)에서
‘사상의 신전을 짓고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라!’ 최초의 사물에 대한 이해인 개념, 그 개념들의 토대 위에서 하나의 합리적인 사유체계를 드러내고 있는 이론, 그리고 그 이론들의 수많은 집적을 통해서 매우 세련되고 정교하게 이 세상의 삶과 그 이치들을 드러내고 있는 사상----. 나는 이러한 사상을 ‘그 어떤 것보다도 고귀한 명예이며, 삶의 완성이며, 보다 완전한 인간의 표지’라고 역설한 바가 있다. 나는 나의 스승인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나의 행복의 깊이 1, 2, 3권을 통하여 나의 낙천주의 사상을 설명하고 가르쳐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덧 나는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낙천주의 사상을 가르쳐 준 스승이 되었던 것이며, 나의 ‘愛知의 숲’은 모든 인류에게 맑은 공기와 수많은 식물들을 제공해 주는 자연(사상)의 생산공장이 되어갔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사상이라는 고산지대’에는 수많은 산봉우리와 그 골짜기들이 펼쳐져 있고, 이름 모를 골짜기와 그 벼랑길에는 사시사철 만년설의 마음이 녹아 흐르고 있다. 또한 수많은 동물들과 산새들이 지저귀고 있고, 울창한 원시림과 수많은 야생화들이 사시사철 피어나고 있다. 새로운 말들의 정원과 새로운 개념의 동식물들, 우뚝우뚝 그대들의 남근처럼 솟아 있는 이론들과 이 산봉우리에서 저 산봉우리까지, 시대와 인종과 환경을 뛰어넘고 우주 끝까지 그 거대한 산맥을 형성하고 있는 사상들----. 사상은 가장 찬란하고 화려한 인식의 제전의 산물이며, 최고급의 지혜의 저장소이다. 아니, 사상은 모든 동식물들을 다 받아들이고도 부족함이 없는 우주이며, 수많은 지혜의 꽃다발들(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현실주의, 초현실주의, 실존주의, 구조주의, 탈구조주의, 염세주의, 회의주의, 공산주의, 낙천주의 등, 그 사상가의 길은 비록, 형극의 가시밭길 뿐일지라도 우리 인간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목적지이자 영원불멸의 삶의 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상은 우주이며, 우리 인간들의 삶의 터전이다. 우리 인간들은 외롭고 쓸쓸할 때에도 사상에 의존하고, 즐겁고 기쁠 때에도 사상에 의존한다. 천재지변을 만날 때에도 사상에 의존하고, 외부의 적들이 침입해 왔을 때에도 사상에 의존한다. 이민족의 영토를 짓밟고 정복자의 궤변을 늘어놓을 때에도 ‘인간해방’과 ‘세계평화’라는 사상에 의존하고, 그 식민주의자의 억압에 맞서서 테러리스트의 삶을 살아갈 때에도 ‘주체성’, ‘자주’, ‘독립’, ‘민족해방’이라는 사상에 의존한다. 사상은 우리 인간들의 일용할 양식이며, 생명 그 자체이다. 사상의 신전만이 영원하고 또 영원하다. 이 세상의 사상가들은 늙음도 죽음도 모르는 人神들이며, 언제, 어느 때나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서양의 사상과 이론들만을 무자비하게 베껴먹으면서 그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인간 이하의 짐승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 독서를 통하여 살아 있는 교육을 가르치지 못하고 출세 위주의 암기 교육만을 가르치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 학교마다 길거리마다 쓰레기들이 넘쳐나고 있는 데도, 오로지, 자나깨나, 사색의 당쟁만을 일삼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 대학생도, 대학원생도, 대학교수도, 대학총장도, 교육부장관도, 국회의원도, 법무부장관도, 외무부장관도, 문화부장관도, 대통령도, 이문열도, 황석영도, 모두가 다같이 표절의 공화국만을 외치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 그러나, 그러나, 언젠가, 어느 때는 이 세계 속의 변방인 대한민국에서도 나의 낙천주의 사상만은 돼지우리 속의 진주처럼 그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나는 오늘도 ‘愛知의 숲’을 거닐면서, 모두 네 차례에 걸쳐서 서른 다섯 번의 턱걸이를 했다. 제1회에는 열 한 번, 제2회에는 아홉 번, 제3회에는 여덟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4회에는 일곱 번이 바로 그것이었다. 모든 운동들이 다 그럴 테지만, 턱걸이는 팔과 어깨의 근육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단 한 번도 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나의 최고 기록은 고작 열 한 번에 불과하지만, 체조부문의 선수들은 단 번에 1백회 이상을 거뜬하게 해치울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단 한 번에 기껏해야 열 한 번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스무 번이나 서른 번 이상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신기록이자 이상적인 기적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단 한 번에 1백 번 이상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도 더 쉬운 일이며, 땅 집고 헤엄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턱걸이 실력은 아직도 초보적이며 어린 아이의 수준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나는 死神의 맏형님이며, 그 모든 고통들을 나의 신하들로 거느리고 있다. 나의 신하들은 단 번에 1백회 이상의 턱걸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예의바르고 정중하게 경의를 표하지만, 기껏해야 스무 번 이하의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에게는 백수의 왕인 호랑이처럼 사납게 덤벼들어서, 단 한 번에 그들의 숨통을 끊어 놓는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고통을 이길 수가 없지만, 죽음을 거느리고 있는 자는 고통을, 마치, 자기 자신의 신하처럼 거느릴 수가 있다. 고통은 왕 중의 왕인 호랑이며, 그는 死神의 맏형님의 충직한 경호대장이다. 고통은 고통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더욱더 사납게 덤벼들지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一刀必殺의 용기로 무장되어 있는 死神의 맏형님에게는 어느 덧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고통을 ‘악’이라고 규정하지 않고 하나의 ‘재앙’, 즉, 화禍라고 표현한 바가 있다. 고통이 악이라면 그것은 기피의 대상이지만, 고통이 재앙이라면 그것은 피할 수가 없는 어떤 것일 뿐이다. 고통을 천재지변과도 같은 재앙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긍정한 것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의 대단한 삶의 지혜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자기 체념적인 견인주의에는 찬성할 수가 없다. 따라서, 만일, 이 세상의 삶이 고통의 연속이고 그 고통과의 싸움이 우리 인간들의 삶의 과정이라면, 나는 이 고통을 ‘최고의 선’이며 ‘삶의 쾌락’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고통이 없으면 삶의 긴장이 없어지고, 모든 일들이 지나치게 권태롭고 짜증나게 진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고통이 있기 때문에 삶의 기쁨과 삶의 쾌락이 있는 것이다. 요컨대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 고통을 자기 자신의 신하로 더욱더 크게 끌어 안는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며, 그는 진정으로 낙천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봄밤이 무르익다
누군가의 자전거가 세워져 있다
자전거를 슬쩍 타보고 싶은 거다
복사꽃과 달빛을 누비며 달리고 싶은 거다
자전거에 냉큼 올라가서는 핸들을 모으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은빛 페달을 신나게 밟아보는 거다
꽃나무를 사이사이 빠지며
달 모퉁이에서 핸들을 냅다 꺾기도 하면서
그리고 불현듯 급정거도 해보는 거다
공회전하다
자전거에 올라탄 채 공회전하다
뒷바퀴에 복사꽃 하르르 날리며
달빛 자르르 깔려들며
자르르 하르르.
----신현정, 「자전거 도둑」 전문
고통을 극복한 사람은 선악을 넘어서서, 신현정의 「자전거 도둑」에서처럼, 이 지상낙원에서의 삶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된다. 그는 “자전거에 냉큼 올라가서는 핸들을 모으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은빛 페달을 신나게 밟아”보기도 하고, “꽃나무를 사이사이 빠지며/ 달 모퉁이에서 핸들을 냅다 꺾기도 하면서/ 그리고 불현듯 급정거도 해보기”도 한다. 또한 그는 “자전거에 올라탄 채 공회전하다/ 뒷바퀴에 복사꽃 하르르 날리며/ 달빛 자르르 깔려들며/ 자르르 하르르”라고, 그의 神技에 가까운 재주를 마음껏 구사해 보기도 하고, 그리고 ‘자전거 도둑’의 길을 넘어서서, 제일급의 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만의 지상낙원(사상의 신전)을 연출해 보이기도 한다. 신현정은 나와 함께, 死神의 맏형님이며, 모든 고통들의 제왕이다. 따라서 고통은 사상가에게는 명약(충신)이 되고,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에게는 치명적인 독약(모반자)이 된다. 사상의 신전은 지상낙원 속에 있고, 그 지상낙원에는 모든 고통들이 충직한 근위병들로 오늘도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나는 너희들에게 나의 낙천주의 사상을 가르쳐 주고자 한다. 낙천주의 사상은 너희들을 위한 구원의 말씀이며, 너희들은 행복하고, 또 행복하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만일, 너희들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오늘도 너희들 곁에서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고통들과 마주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은 어느 새 그 고통들을 위한 가장 맛있고, 영양가가 풍부한 먹이감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아아, 사상의 신전을 짓고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라!
너희들은 도덕을 숭배하며, 도덕의 군자로서 죽어간다.
그러나 삶은 도덕 너머에 있고, 그 도덕 너머의 삶은 어떠한 침략전쟁마저도 신성화시킨다.
나는 너희들에게 낙천주의를 가르쳐 주고 싶다.
우리는 죽어갈 수가 있어서 권태롭지 않고 또다시 태어날 수가 있어서 허무하지 않다.
----{행복의 깊이} 제4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