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은 사방이 멧부리로 둘러싸인 땅이다. 드나듦이 수월치 않다. 그러나 사람 발길은 끊어지지 않는다. 법보사찰인 해인사가 있어서다. 그래서 합천은 오랜 세월 해인사의 땅이었다. 1990년대 어느 날, 황매산이 해인사 밖의 또 다른 합천으로 떠올랐다. 붉게 달뜬 철쭉 완상하려고 상춘객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또 10년, 그 땅을 동서로 말없이 흐르던 강이 기나긴 무명의 잠에서 깨어났다. 그 땅과 그 땅 둘레 땅 사람들이 여름 명소로 찾았다. 이제 합천은 그
강의 땅으로 불린다. 황강 이야기다.
황강은 한낱 피서지가 아니다. 대야성 전투, 합천 의병, 수몰민, 그리고 수상레포츠. 신라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까지 제가 무심히 지켜봤던 옛것과 하루가 다른 새것을 챙겨 흐른다. 합천군청 김광식 주무관은 "황강
역사가 합천 역사"라 했다. 물길 폭이 좁아도 그 땅 사람들에게 황강은 언제나 품이 넓고 넉넉한 강이었다. 황강의 '황'자는 크다는 뜻을 담고 있다.
수중 마라톤·바나나보트·래프팅으로 인기
처마 물 곧장 강에 떨어지는 함벽루 '이채'
봄 벚꽃·여름 노을·가을 억새·겨울 물안개
합천호와 주변 풍경, 한 폭의 그림 같아■연호사와 함벽루거창군 덕유산에서 발원한 황강은 합천댐에서 합천창녕보를 거쳐 낙동강과 합류한다. 황강은 남강이기도 했다. 합천 남쪽을 휘돌아 흘러서였다. 황강 중간쯤에 취적산이 자리했다. 해발고도 90m의 야트막한 산. 이 산은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백제군 막는 길목이라 신라는 토석성을 쌓았다. 옛 지명을 빌려 대야성이라 했다.
642년, 여기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다. 백제의 1만 대군이 성을 포위했다. 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장수 죽죽이 앞장서 저항했다. 죽죽(竹竹). 꺾여도 굴하지 않는 그였기에 그의 군사와 함께 죽어야 끝날 싸움이었다. 중과부적이었고 승리는 백제의 것이었다. 이듬해
와우선사가 그들의 원혼 달래는 연호사를 세웠다. 황강 굽어보는 명당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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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장수 죽죽의 원혼을 달래는 연호사. |
죽죽이 지키려 했던 대야성은 삼국통일 후 쓰임새를 잃어 허물어지고 내려앉았다. 지금은 그 흔적마저 분별이 쉽지 않다. 연호사가 핏빛 전투를 기억할 따름이다.
연호사 밑에 함벽루가 앉았다. 1321년 창건돼 수차례 중건된 2층 누각이다. 황강변에 바짝 붙어 처마 물이 곧장 강물에 떨어지는
건물구조가 이채롭다. 함벽(涵碧), 황강 푸름에 젖어선지, 황강 푸름을 적셔선지는 모를 일이다. 시인묵객들이 수많은 편액을 남겼다. 뒤쪽 암벽에 '함벽루' 세 글자가 각자됐다. 우암 송시열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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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벽루 뒤쪽 암각자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 |
합천이 고향인 남명 조식도 편액에 글을 보탰다. 벼슬길 마다했던 남명은 여기서도 마음 비우는 붓을 들었다.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한 점 바람에 흔들렸다 한다. '뜬구름의 일을 배우고자 하나/오히려 높다란 바람이 흩어 버리네.'
함벽루는 화려하지 않다. 고고함이나 선경과도 멀다. 여느 정자처럼 탈속과 세속의 경계에서 서성이지도 않는다. 수더분하니 세속 쪽으로 기울어 있다. 기둥과 단청은 새 옷 입어 지내 온 세월이 희미하다. 이끼 꽃 잔뜩 핀 바위가 오래됐음을 알린다. 아침 나절 보슬비로 이끼 꽃이 파릇했고 촉촉한 바람에 풋내가 더 짙었다.
■합천댐과 창의사함벽루에서 합천댐까지는 멀지 않다. 차로 20분 남짓 거리. 가는 길은 백리벚꽃길이다. 봄이 오면 하얀 세상이 이곳에 열릴 터. 댐 들머리에 창의사가 있다. 임진왜란 의병장 내암 정인홍과 합천 의병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내암은 합천의 큰 인물이었다. 남명 수제자였던 그는 엄격했다. 비리를 따짐에 있어 지위고하 없었고 국법 펼침에 추상같았다. 광해군 시절 산림 정승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던 그는 인조반정 후 참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철저히 부정당했다. 여파는 그의 땅에도 미쳤다. 반역향으로 낙인 찍혔고 그 땅 선비들의 출사길이 막혔다. 내암은 250년이 넘어서야 간신히
복권됐다. 후세의 평가는 여전히 분분하다. 그의 땅에서조차 논란 많은 의병장에 가깝다.
합천호는 요즘 물이 많이 빠졌다. 장마철을 앞둬 그런게다. "미리 물을 빼 둬야죠." 합천호 주변에서
황태찜 파는 김정대 씨 설명이다.
합천호는 1988년 완공된 합천댐이 만든 인공호수다. 당시 1천700세대가 마을을 잃었다. 김 씨도 수몰민이었다. 그가 난 땅은 합천호 중간 어디쯤이었고, 그가 다녔던 초등학교도 물에 잠겼다. 유년 더듬던 그는 합천호가 아름답다 했다. 봄 벚꽃, 여름 노을빛, 가을 억새, 겨울 물안개를 자랑했다.
합천댐은 여러가지를 바꿔 놨다. 홍수 탓에 산자락보다 쌌던 평지 땅값이 치솟았다. 황강 지류인 아천천 배후습지로 유명한 정양늪은 생태 변화를 겪었다. 물살 느리고 바닥 얕아져 2011년 복원작업을 벌여야 했다.
출사지도 생겨났다. 합천댐 아래 보조댐 부근이다. 입구에 수변생태탐방로
간판을 단 그곳의 물줄기는 멈춘 듯 흐른다. 흔들림 없는
수면 위 바깥 세상 그림자는 참으로 고요하고 아름답다. "물안개 잔뜩 내려앉은 강물에 아침 햇살이 엷게 비추고 겨울 철새가 점점이 날 땐 몽환적입니다."(김 주무관) 한 폭 그림에 취해 한동안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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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사객들이 몰리는 합천보조댐 수변생태탐방로. |
■황강레포츠공원황강은 바닥 경사가 심하다. 물줄기가 부려 놓은 모래는 물굽이마다 고운 백사장을 쌓곤 했다. 그러나 합천댐과 농경용 수중보가
건설되면서 세찼던 물줄기가 힘을 잃고 새 모래를 예전만큼 실어오지 못했다. 수중보에 갇힌 강물은 맑음을 잃어갔다. 대신 적잖은 넓이의 소가 형성됐다. 이 소가 황강레포츠공원으로 꾸며졌다.
햇볕이 가장 뜨거운 칠월, 황강레포츠공원에선 여름이 활짝 열린다. 수중마라톤대회,
바나나보트, 웨이크보드, 모터보트로 떠들썩하다. 상류 쪽은 래프팅 장소로 인기가 높다. 보조댐에서부터 용주교까지 적당한 급류와 완만한 곡선이 이어진다.
합천은 더운 땅이다. 한여름 평균 기온이 부산이나 창원보다 2~5도 높다. 땅은 뜨겁고 그 땅을 낀 강은 차다. 그래서 황강의 아침은 늘 물안개다. 온종일 세상 뿌옇게 덮을 듯 위세였던 물안개는 해가 고도를 높이면서 점점 허망해진다. 땅 달구던 한낮도 오래가지 않는다. 밤이 찾아오고 또 한 번의 아침이 열린다. 그 아래로 황강은 삼켜 견디듯 무심히 나아간다. '흘러가는 것은 이와 같아서 밤낮으로 쉬지 않는구나.'
글·사진=임태섭 기자 tslim@busan.com
TIP
■둘러볼 곳
황계폭포(055-930-4171·사진)는 합천 8경 중 하나다. 합천댐에서 차로 10분 거리다. 상·하단부로 나눠 떨어지는 물소리가 더위를 식힌다. 지난해 진입로가 정비됐다. 어르신도 걷기에 무리가 없는 평지 길이다.
합천영상테마파크(055-930-3744)는 2003년 영화 '
태극기를 휘날리며'가 제작될 때 조성됐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영화 촬영지. 1920년대 경성 시절부터 1980년대 서울의 풍경 재현.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즐겁다. 여름철 개장시간과 요금은 오전 9시~오후 6시, 어른 3천 원.
정양늪 생태공원(055-930-3313)은 함벽루에서 차로 5분 거리. 황톳길·토삿길·덱(deck)을 따라 걷는 3.2㎞는 사색 길이다. 물풀이 무성히 자라 청보리밭처럼 녹색 들판이다. 이맘때 청둥오리가 무리를 짓고 있는 옆자리에서 샛노란 꽃잎의 수련꽃을 볼 수 있다.
■교통자가용:남해고속도로 군북IC를 빠져나와 대의교차로(의령군 대의면)에서 합천 방면으로 우회전한 뒤 직진하면 함벽루에 닿는다. 부산에서 2시간 30분 안팎 거리다.
대중교통: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1577-8301)에서 합천시외버스터미널(055-931-0142)까지 2시간이 걸린다.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 40분까지 운행, 배차 간격은 50분 안팎, 요금은 1만 1천300원. 함벽루와 황강레포츠공원은 합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합천댐과 보조댐 수변생태탐방로로 가려면 합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병면 방면 버스를 타면 된다. 합천댐까지는 약 25분 거리. 요금은 기본 1천150원에 1㎞ 추가 시 50원 정도가 가산된다. 합천댐까지는 2천 원 안팎. 문의는 1688-4460.
■먹을 곳합천호 일대에 북어
요리를 하는 집이 많다. '북어촌'(055-932-2012)은 수몰민이 운영하는
음식점이다. 밑반찬이 단출했지만 황태구이가 입에 맞았다. 작은 것 기준으로 황태구이 2만 원, 황태버섯전골 3만 원. 임태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