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六組檀經)》, 《전등록(傳燈錄)》 등 선문(禪門)의 조사(祖師) 어록을 중심으로 많은 법어를 이루었는데 관념의 도그마(dogma)에[2] 빠지지 말 것과 견성(見性)의 체험을 강조하였다. 1993년 해인사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저서로 《돈오입도요문강설》(1986) 등이 있다.
성철
성철스님은 서기 1912년 임자년 4월 10일에 경남 산청군 단성 면 묵곡리의 합천 이씨 가문에서 탄생하였다. 부친의 이름은 이상언이고 모친은 진주 강씨였으며 아명은 영주(英柱)라 하였다. 스님의 집안은 대대로 부농이었다. 비록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한 이후라 시절인연이 암울했다고는 하지만 스님은 어린 시절을 비교적 유족하게 보낼 수 있었으며, 장남으로서 부모님은 물론이요 집안의 기대와 귀염을 한 몸에 받으며 자라났다. 스님은 천성이 명민하고 상호가 수특(秀特)하여 더욱 총애를 받으셨다. 3세에 글자를 알고 읽기 시작했고, 5세에는 김시습처럼 글을 짓고 시를 지을 만큼 자질이 뛰어났으며, 이미 열살 무렵에 사서삼경 등 유서를 읽고 모든 경서를 독파하였으니 인근에서는 신동이 났다 하여 소문이 자자하였는가 하면 더 가르칠 선생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청소년기에 이르자 그 명민한 두뇌는 더 이상 낡은 세계에 머물지 않고 좀 더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당시 물밀 듯이 들어오던 신학문과 철학과 종교 등 여러 학문에 대해 지나치리만 큼 열정을 가지고 독서와 관심을 쏟았으나 그 모두가 참다운 진리의 문에 들어가는 길이 아님을 자각하고 그중 「장자」를 읽고 소요유(逍遙遊)하려고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지나가던 노승으로부터 영가(永嘉)대사의 「증도가(證道歌)」를 받아 읽고 이제까지 찾아 헤매던 구도의 길이 거기에 있음을 발견하니, 홀연히 심안이 밝아짐을 느껴 거듭 읽고 그 깊은 뜻을 밝히게 되었다. 그 한권의 책이 불교의 전적을 대하게 되는계기가 된 것이다. 그후 스님은 책만 읽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참 구도의 길은 수행정진에 있음을 알고 거사(居士)의 몸으로 양식을 짊어지고 덕산 대원사 탑전에 들어가 불철주야 용맹정진을 하였고,그후 제방선원에서 안거하는 등 그 수도 정진의 구도열이 이미 승려 이상의 진척을 보였다. 이에 주위의 많은 스님들이 출가를 권고하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스스로 출가를 결심하고, 모든 세속적인 인연을 끊고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출가시(出家詩)를 승문(僧門)에 들었다. 하늘에 넘치는 큰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모든 것 다 버리고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그리고 용맹정진으로 스님은 해인사 백련암에서 하동산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해인사에서 수계득도하였다. 이로부터 10년간 천하제방(諸方)선원에 안거하면서 용맹정진을 단행하였는데, 음식은 언제나 생식(生食)과 현미밥과 담식(淡食)으로 일관하였다. 그리고 의복은 24세에 만든 누더기를 일 생 깁고 또 기워 입으셨다. 금강산의 마하연선원, 수덕사의 정혜선원, 천성산의 내원선원, 통도사 백련선원 등 모든 선원에서 안거를 할 때마다 스님의 철저한 정진력에 누구나 감복하였고, 그밖에 고성 안정 토굴의 정진이나 파계사 성전암에서의 용맹정진은 승가 내에서 그 본보기가 되었다. 세속적인 모든 것을 끊기 위해 토굴 주위에 가시철망을 쳤던 이야기며, 신도들이나 친지가수행을 방해할까봐 사람들이 오는 길목 쪽으로 돌을 굴렸다는 극단적인 이야기 등에서 스님 의 수행 정진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부단한 수행중, 29세가 되던 해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정진을 하던 때였다. 스님은 확연하게 일대사(一大事)인연을 了達하시고는 오도송(悟道頌)을 읊으셨다.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 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리도다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구름 속에 섰네. 黃河西流崑崙頂 日月無光大地沈 遽然一笑回首立 靑山依舊白雲中 오도를 하신 후에도 스님의 삶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수행자의 삶 그대로 견지하셨다. 스님의 삶의 태도는 너무나 엄격해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으셨다. 나이 일흔이 되실 때까지도 손수 양말을 기워 신었으며 한 겨울이라도 땔감의 양을 결코 지나치게 하는 일은 한번도 없으셨다. 평생을 바루 하나 옷 한벌의 전형적인 수도자의 삶을 보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