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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
7. 한몸 2001뉴욕집회
7. 한몸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2:24-25).
사람은 남녀간에 서로 부끄러워 하지만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벌거벗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말씀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모양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벌거벗어서 아무 것도 없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만족한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지만 부족한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으면 사람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이다. 사람이 아무 것도 없으면 부끄러운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하신가? 하나님도 부끄러운 것이 있겠는가? 왕은 나라가 없으면 부끄럽다. 임금이면서도 나라가 없으면 임금의 수치인 것이다.
남자에게 아내가 없는 것은 남자의 수치로 “오죽 못났으면 마누라도 없을까?” 하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남자가 결혼을 해서 아내를 얻으면 당당해져서 ‘나도 이제 어른이다.’라고 자랑하게 된다. 하물며 나라가 없는 임금의 부끄러움이 어떠하겠는가! 월남이 패망한 뒤에 대통령이었던 티우가 미국의 대학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대학생들이 “나라도 없는 대통령이 무슨 강연을 할 자격이 있느냐?”고 하면서 보이콧을 해서 강연을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미국의 대통령과 한국의 대통령을 비교하면 개인적으로는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이 훨씬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계 무대에 나가면 부시 대통령은 맨 앞에 서고 김대중 대통령은 중간 쯤에 서게 된다. 국력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부시의 자랑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있는 것이다. 개인의 자랑이 아니라 나라로 인한 자랑이다. 중국의 장쩌민 주석은 세계 어디를 가도 당당하다.
우리는 독재자, 공산주의자 하는 생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장쩌민은 부시도 무시할 수 없다. 미국이 여러 가지 첨단 분야에서 훨씬 앞서 있지만 중국만은 무시할 수 없는 나라인 것이다. 미국은 다른 나라와 협상을 할 때 미리 그림을 그려 놓고 다른 나라에게 그 그림에 동의하라는 식이다. 서로 의논을 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그린 그림대로 따르라는 것이다. 그런 미국도 중국과 협상을 할 때는 정반대로 오히려 중국에서 미리 그림을 그려 놓고 미국에게 그대로 따르라고 한다. 그만큼 미국이 중국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싫으면 그만 두라.”고 한다는 것이다. 냉전체제에서 소련은 미국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전략무기에서 앞서 있었지만 미국에 대해 큰 소리를 칠 수 없었던 것은 양식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밀가루 공급을 끊어 버리면 방법이 없다. 소련에서 아무리 첨단 무기를 개발해 봤자 어쩔 수 없이 미국에게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가 일어난 것도 양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양식이 무진장 풍부한 나라라서 미국이 어찌할 방법이 없다. 비록 공산주의 하에서 뒤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먹을 것이 풍부하고 1차 산업 기반이 넉넉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내수 시장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외국에 수출을 하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나라인 것이다. 유일하게 미국이 큰 소리를 치지 못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머지 않아 중국이 세계를 제패할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장쩌민이나 주룽지 같은 사람들이 당당한 것은 나라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임금은 나라가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라를 다 얻지 못하셨다. 사탄은 나라를 가지고 있다. 사탄은 거대한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 거대한 나라를 세우지 못했으니 부끄러운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개인적으로는 사탄을 능히 이기는 분이었다. 그러나 단체적으로는 나라가 없기 때문에 아직 이기지 못하고 있다. 왜 그분은 십자가로 몰려서 죽게 되었는가?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을 때 “그렇다.”고 대답하셨지만, “네 나라가 있다면 네 백성이 너를 옹호할 것이 아니냐? 너를 옹호하는 백성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지금은 여기에 속해 있지 않다는 말과 같다. 그분이 세상에 왔을 때 외롭고 부끄러웠던 것은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 하셨던 것이다. 그 나라가 땅에 임하기를 기도하라 하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가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천당에 가는 것은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소원은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지금 나라가 없어서 부끄러운 상태에 있는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천당에 가려고 하고 있으니 사탄의 계략에 말려 있는 것이다. 사탄은 땅 위에서는 자기가 왕노릇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 천당으로 올려 보내 버리려고 한다. “너희는 이 땅에 있을 때는 나그네처럼 천당에 가기 위한 준비만 하라.”고 속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A.D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여 모든 백성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비록 자기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그렇게 하였지만, 그들이 나라가 되면 자기는 자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이 땅 위에서 왕노릇하려고 기독교인들을 천당에 가기 위한 준비생으로 만들어 버렸다. 로마 가톨릭의 역사는 황제와 교황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다툼을 되풀이하는 역사다. 어느 때는 황제가 교황을 지배할 때가 있었고, 어느 때는 반대로 교황이 황제를 지배할 때도 있었다. 전쟁에 패한 황제가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한 적도 있었다. 서로 나라를 차지하려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갈망은 자기의 형상을 갖는 것이다. 자기의 산혼, 자기의 사람, 자기의 배필로써의 인간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 나라 때문이다. 인간 자체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라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옛날에는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다. 오동나무를 심었던 이유는 딸이 시집갈 때 농을 짜 주려는 것이다. 오동나무를 심는 아버지의 깊은 심정에는 딸에 대한 배려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으로써 사람을 필요로 하시는 이유는 나라를 얻기 위한 것이다. 나라가 없으면 하나님은 부끄러운 것이다. 하나님과 사탄과의 전쟁은 나라를 둔 전쟁이다. 누가 나라를 갖느냐 하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에게 선악과를 먹일 때 자기의 나라를 얻으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선악을 아는 사람이 되어 사탄이 원하는 사탄의 왕국의 요소가 되었다. 선악과를 먹고 선악과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사탄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판단을 하고 비판을 하고, 분쟁을 일으키고 싸움을 한다. 모든 것을 비판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까지 판단을 하게 되었다. 사탄의 본성을 그대로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인류는 좋은 면으로는 문명을 건설하고 있고, 나쁜 면으로는 전쟁을 하고 있다. 문명과 전쟁은 기차의 레일처럼 같이 간다. 이번에 아프간 전쟁을 하고 나면 미국의 과학 문명은 한 단계 더 높아지게 될 것이다. 과학 문명은 전쟁을 통해서 발전하였다. 문명은 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엄청난 모순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모순을 계속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라는 요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다. 끝없는 모순을 계속 낳고 있을 뿐이다. 한 사람은 말하기를 “이 창은 천하에 어떤 방패도 뚫지 못할 방패가 없습니다.”라고 하는데, 한 사람은 말하기를 “이 방패는 천하에 어떤 창으로도 뚫지 못합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순(矛盾)이다. 세상이 그렇게 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창을, 한쪽에서는 방패를 만들고 있다. 좋지 않은 것들을 왜 그냥 두고 있는가? 국가에서는 왜 그런 것들을 오히려 조장하고 있을까? 술집이나 담배 집, 나이트 클럽 같은 것을 다 없애버리면 조용하고 살기 좋을 텐데 왜 없애지 않는 것일까? 그런 것이 없으면 자본주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돈을 쓰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돈을 벌려고 하지 않고, 그렇게 되면 자본주의가 안된다. 술을 마시기 위해 돈을 버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나이트 클럽에 가기 위해 돈을 번다.
사람마다 돈을 쓰는 재미를 느끼는 곳이 다르니까 그런 다양한 욕구를 이루어주기 위해서는 그런 것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 것이고, 돈을 벌어야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에서 은근히 그런 것들을 허용하고 극단적으로만 가지 않으면 그냥 두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마약과의 전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마약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 정말로 마약을 없앨 수 없어서 그런가? 그렇지 않다. 없애려고 하면 없앨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약을 안하면 살 의미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적당히 없애고 적당히 놓아 두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세상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라는 요소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그 요소들이 가지고 있는 본성과 욕구가 충족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에게 선악과를 먹였고 자기 나라를 갖게 되었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사탄의 편이 돼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금이 있고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되는데 사람이 사탄의 편에 섰기 때문에 사탄의 왕국이 건설되고 만 것이다. 성경은 그 왕국의 특성을 바벨론으로 표현하였다. 고대국가에서 가장 찬란했던 문명을 가지고 있던 나라가 바벨론이었다. 그들은 모여서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였고, 망대를 높이 세우면서 “하늘에 오르자.”고 하였으며, “우리 이름을 빛내자.”고 하였다. 이것이 세상의 목표다. 모든 인간, 모든 나라의 목표다. 그런 나라가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라가 없다. 사탄은 나라가 있지만 하나님은 나라가 없다. 하나님은 그 나라를 시작하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그리고 그 나라의 씨를 만들려고 그에게서 이삭을 낳으셨다. 이삭은 그 나라의 씨인 것이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창21:12).” 하신 것은 이삭의 생명의 원리를 따라서 나온 구성 요소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야곱을 통해서 열두 지파로 확산되었지만, 씨는 이삭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이삭이라는 씨로 오신 것이다. 이삭이라는 씨는 육신적인 상징과 예표로써 온 것이므로 이스라엘이라는 육신적인 국가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치 못했다. 형상은 되지만 실재가 없기 때문에 온전치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그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 새로운 씨로 오신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종교적인 경배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예수님이 씨가 되어 퍼지려고 하는데 그 씨를 박물관에 잘 보관해 놓고 계속 그 씨를 노래하고 찬양하고 경배하고 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실상이다. 겉으로 보면 예수를 높이고 있고 찬송가 구절마다 예수를 찬양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분이 씨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씨는 찬송을 받고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퍼져야 되는 것이다. 그 씨가 퍼지는 것이 찬양을 받는 것이다. 한 알의 밀이 한 알 그대로 있으면 찬양을 받는다 한들 무슨 영광이 있겠는가? 그런데 한 알의 밀이 30배 60배 100배가 되어 온 땅에 충만하게 되면 아무도 노래를 안해도 저절로 찬송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데 인간들이 자기를 선반 위에 올려 놓고 절만 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시겠는가! 누가 이렇게 했겠는가? 우주 안에서 누가 그렇게 하도록 조종해 놓았겠는가? 사탄이 그렇게 한 것이다. 사탄은 사람 속에 들어와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조종하는 것이 아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여 놓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렇게 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 속에 자기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생명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사탄은 뒷전에 앉아서 구경만 하면 되는 것이다. 술주정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해서 술주정하는 사람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술집 주인이 그렇게 하라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지 않아도 술만 먹여 놓으면 저절로 미친 짓을 한다. 만일 술집 주인이 술주정꾼을 훈련을 시켜서 만들어 놓았다면 당장 잡혀 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술집 주인은 쇠고랑을 차지 않는 것은 술을 팔았을 뿐이지 개병질을 하라고 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탄의 수법이다. 고단수인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사탄이 와서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생각한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잘못하다가는 자기가 잡혀갈 텐데 그런 어리석은 짓을 누가 하고 있겠는가? 내가 살던 곳은 섬 지방으로 소주를 많이 먹는 곳인데, 소주를 담은 술독을 배에 싣고 오면 창고로 운반해서 보관해 두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술독을 지고 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미친놈이 열 개 가는구나.”라고 하였다. 술 한독이면 미친 사람을 열 명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누구라도 소주를 한되 마시면 미친 사람이 안될 수 없을 것이다. 사탄은 선악과라는 소주를 먹여서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싸우고 분열하게 만들었고, 예수를 선반 위에 올려 놓고 경배하게 만들었다. 경배하고 기도하고 성가대를 만들어서 우렁차게 노래하도록 만든 것이다. 겉으로 볼 때 그 씨는 영광을 받는 것 같은데 사실은 죽고 있는 것이다. 나라가 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이 땅에 기독교가 전파된지 2000년이 넘었는데 왜 아직 하나님 나라가 없는가? 씨가 퍼지지 않고 경배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탄의 전술은 ‘개인적으로 예수를 믿는 것은 좋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도 좋다. 모두 다 좋다. 그러나 그 나라만은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이 땅에서 임금 노릇을 하려면 다른 나라는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다. 왕은 어떤 경우에도 역모만은 용서하지 않는다. 조선 왕조 시대에는 역모를 다스리는 법이 가혹했다. 역모에 가담한 자는 능지처참하였고, 그 삼족을 멸하였다. 그리고 살던 집은 파서 우물을 만들었다. 역모는 완전히 씨를 말려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임금이든지 마찬가지였다. 좋은 임금도 나쁜 임금도 다 그렇게 했던 것이다. 자기 아들이라도 역모에 가담했다면 죽여버렸다. 영조대왕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굶겨 죽였다. 이것이 임금의 특성으로 나라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부자지간이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다 허용하지만 나라만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수법이 교묘하다. 그를 높이는 척 하면서 그 나라가 세워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하나님은 나라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지 20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수없이 늘어 그 인구가 10억이 넘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나라는 없다. 사람들은 단지 ‘천당에 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종말론적인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지면서 이 땅위에 천지개벽이 일어나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때 세상 나라는 박살나고 하나님 나라가 우뚝 솟을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유치원 아이들이나 들을 법한 동화 같은 것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러니 얼마나 사탄에게 깊이 속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갖기 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갈망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갈망은 당신의 형상으로서의 배필을 갖는 것이고, 최종적인 갈망은 나라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라에 대한 개념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고 기도하라 하셨다.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1:13)”,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히12:28)”,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11)”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사람들에게 천당에 간다거나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개념이 생긴 것 같다. 그런데 “옮기셨다.”는 말도, “받았다.”는 말도, “주셨다.”는 말도 우리가 그 나라의 구성요소가 된다는 뜻이다. 어디로 들어가고 물건을 받듯이 받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 들어올 때 통관을 하듯이 들어오거나 선물을 받듯이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나라의 구성 요소가 된다는 뜻이다. 영원히 그 나라를 받으려면 그 나라의 구성요소라야 된다. 그 나라에 영원히 들어가려면 그 나라의 구성 요소라야 되는 것이다. 방주를 보면 여러 개의 판자 조각으로 이어져서 만들어졌다. 판자 조각 하나 하나는 방주 안으로 들어간 것이고, 방주를 받은 것이고, 방주 안으로 옮겨진 것이다. 방주로 들어갔다는 말은 방주가 되었다는 것이고, 방주를 받았다는 말은 ‘나’라는 판자 조각이 방주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며, 방주 안으로 옮겨졌다는 말은 방주 속에 들어가서 방주의 구성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말도,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다는 말도, 영원한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도 그런 의미인 것이다. 미국에 오듯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듯이 간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원리이다. 구약에서는 시공간적이고 물질적인 표현밖에 없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치 못한 것이었다. 분명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라고 알았는데 막상 가 보니까 별 것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는가? 그것은 하나의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약은 가나안 땅에 가듯이 시공간적으로 물질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나안 땅이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3-4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셨다. 이 말씀을 구약의 개념으로 들으면 ‘처소’라는 공간이 있고, 시간적으로 가서 그것을 예비하여, 다시 시간적으로 와서 너희를 데리고 가겠다는 말로 들린다. 그런데 도마가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길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빌립은 다시 묻기를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고 보니까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처소도, 길도, 아버지도 없어져 버렸다. 남은 것은 그들의 앞에 있는 그분만 남았다. 그래서 제자들은 황당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의 시간적이고 공간적이고 물질적인 개념 안에서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런 상태에 있다. 유대인들과 같은 시공간적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알아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겨우 천당에 간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은 후에 영혼이 어디론가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절에 가면 극락전이라는 곳이 있는데, 공중에 나무로 배를 만들어서 걸어 놓았다. 죽은 다음에 그 배를 타고 극락으로 건너간다는 상징이다. 어리석고 우매한 사람들은 ‘내가 죽으면 저런 배를 타고 가는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나, 그것을 만들어서 걸어 놓은 스님들은 우매한 백성들을 위해서 상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렇게밖에 알아듣지 못하니까, 배를 타고 간다고 해야 알아듣지 그렇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니까 그런 것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그와 같은 짓을 머리 좋은 박사들이 모여서 만든 신학, 그리고 거기서 만들어진 교회에서도 하고 있다. 여전히 배를 타고 간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옛날 찬송가 곡 중에 그런 노래가 있었다. “저 배는 천당 길 띠 띄고 간다.”, 이런 것이 불교적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시공간적으로 있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격적인 나라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인격 안에 있는 나라인 것이다. 그 인격 안에 있는 어떤 세계인 것이다. 물고기라는 생명 속에 있는 세계가 있고, 날짐승의 생명 속에 있는 세계가 있다. 물고기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세계가 날짐승에게 있고, 날짐승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세계가 물고기에게 있는 것이다. 생명마다 어떤 세계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인격마다 어떤 세계가 있게 되어 있다. 그 세계를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언어로 말하려니까 들어간다고밖에 할 수 없어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 나라가 된다고 할 수도 있다. 새 예루살렘 성은 정금 바닥에 진주문, 그리고 보석으로 싸인 성곽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말로는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하였는데 성은 도시, 사회를 의미한다. 새 예루살렘이라는 사회는 진주, 보석, 정금이라는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씨 이씨 박씨들이 모여서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석과 진주와 정금이라는 성분들로 구성되어진 사회가 새 예루살렘 성, 새 예루살렘 사회다.
교회는 정금과 진주와 보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그런 것으로 구성되어져 가고 있다. 그와 동시에 진주는 더욱 커지고, 보석은 더욱 빛나게 되고 있다. 압력을 받을수록 다이아몬드는 더욱 더 강해진다. 지금은 교회의 문이 녹두알만한 크기라도 점점 커서 영롱한 반지가 될만큼 커질 것이다. 보석 역시 점점 더 빛이 나게 강화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그런 성분으로 구성되고, 자라나고, 연마되고 있다. 작년에 보았던 뉴욕 교회와 금년에 보는 뉴욕 교회가 다른 이유는 자라기 때문이다. 진주는 더 커지고 보석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다. 하나님은 이러한 요소를 만드시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의 표본, 씨는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분은 정금과 진주와 보석이다. 그 성분을 하나씩 맡아서 어떤 사람은 빨간 보석으로, 어떤 사람은 파란 보석으로, 어떤 사람은 노란 보석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 성분이 확산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은 DNA가 차츰 커 가면서 손도 생기고 발도 생긴다. 손은 손으로 자라고 발은 발로 자라서 적당한 크기에 이를 때까지 자란다.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DNA는 우리 속에 와서 자라고 있다. 보석으로 자라기도 하고, 진주로 자라기도 하고, 정금으로 자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분의 DNA의 확산이다. 이것이 자라고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분의 나라다. 그분은 이 나라를 얻기 위해서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세상에 나와서 처음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 하는 말이 었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다. 그분은 죄인을 회개시키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전파하러 오신 것이다. 회개는 그 나라가 왔기 때문에 가던 길에서 돌아서라는 것이다. 우리 나라가 해방되기 직전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일본은 ‘내선일체’라 하여 모든 것을 통일시켜서 우리 나라를 일본화 시키려 하였다. 처음 단계에서는 저항하기도 하고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해도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망명을 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교육 입국론을 부르짖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나라를 회복하려는 희망이 없어져 버렸고, 결국은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나 애국적인 민족주의자들도 하나씩 친일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춘원 이광수도 도장을 찍고 말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희망이 없으니까 더 이상 버텨 봤자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 도장을 찍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참았으면 될 텐데 참지 못했기 때문에 해방 후에 그들은 친일파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게 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어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되고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니까 그때 나온 말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는 말이다. 사실은 그 이전에도 라디오 방송에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미국 방송을 들었던 사람들은 해방이 되기 전에 이미 일본이 패망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때 이미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춘원 이광수는 “돌아서라. 대한민국이 곧 오고 있다.”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 영어를 몰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도장을 찍었던 것이다. 그 말만 들었더라면 애국자가 되었을 텐데 도장 한번 잘못 찍는 바람에 시도 소설도 모두 헛일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이 처음 세상에 방송을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가 왔으니까 가던 길에서 돌아서라는 것이다. ‘회개’는 가던 길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물론 죄지은 것이나 잘못된 것은 당연히 고쳐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그 나라를 위한 것이다. 그 나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니까 이 나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매국노 짓을 하지 말고 이제 곧 일본이 망하니까 돌아오라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착한 생활을 해도 그 나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은 회개한 것이 아니다. 한국 사람이 일본에 가서도 착하게 살 수 있다. 일본 신민으로 양심적으로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 수 있다. 그런데 그 나라를 놓고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은 매국노인 것이다. 일본에 가서 아무리 착한 사람으로 살았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이 나라로 돌아서지 않으면 회개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분명하게 회개해야 한다. 가던 길을 돌아서야 한다. 선악과를 먹고 사탄의 왕국을 위해서 섬기고 살던 우리의 길을 돌이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나라를 세우고 있으니까 그 나라로 들어가야 한다. 그 나라는 이미 2000년 전에 선포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 나라는 자라고 있다. 겉으로 볼 때는 사탄에게 넘어가 버렸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지하에 흐르는 생명수처럼 명백을 유지하면서 자라고 있었다. 큰 세상과 대결하기 위해서 더 맑게 자라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나면 누런 강물이 흘러 내려 가는데 사람들은 그것만 보고 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땅 속 깊은 데 저장된 수정과
같이 맑은 물이 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린다. 지하에서 흐르던 생명수는 이것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날라리들이 누런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는 세계에서 어떤 성도들을 통해서 지하수처럼 준비되어 어느 시대에 폭발하기도 하고 잠적하기도 하며 그 날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올지 모르겠다. 이 땅위에는 그런 나라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할만 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 나라를 준비하고 계신다. 이 나라에 대한 개념을 잘못 가졌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 나라가 선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문예 부흥이 일어나서 종교적인 암흑기가 지나고, 인간의 자유가 오고, 산업 혁명이 일어나면서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인권을 찾을 수 있는 시대가 돌아오자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오는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대로 인간이 점점 발전해 간다면 이 땅은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영국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나서 술집이 문을 닫고 극장이 폐쇠되는 일이 발생했었다. 요한 웨슬레가 부흥 운동을 일으키고 구세군의 푸드 대장이 나와서 해적떼들을 회개 시키자 사람들은 머지 않아 좋은 나라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천국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1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자 인간의 잔악함이 드러났고 거기서부터 회의가 생기게 되었다. 인간이 선한 쪽으로 발전할 줄 알았는데 전쟁을 하는데 보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거기서 인간의 모든 잔악함이 그대로 드러났고, 거기서 기독교 신학자들은 절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땅 위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될 수 없다.’는 흐름이 생기게 되었다. 거기서 나온 것이 종말론이다. 하나님이 수직적으로 직접 관여하시지 않는 한 인간의 역사가 발전해서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다. 단지 술, 담배, 극장이 없어지고 싸움이 없는 나라를 상상하고 있다가 그럴 희망이 사라지자 종말론이 생긴 것이다. 그 후로 도처에서 종말론 사상이 불거져 나왔다. 산에 올라서 기다리는 사람들과, 흰옷을 입고 휴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수없이 나오고 들어가기를 되풀이하였다. 한국에서도 92년에 그런 태풍이 지나갔다. 한번 그런 일이 벌어졌으면 틀렸는 줄 알고 그만 둘 텐데 그렇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그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해답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밖에는 해답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일을 수백년 동안 지구 상에서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른다. 그 날을 대비해야 한다.”고 하며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 그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적당히 믿는 날라리들은 그렇게 못하지만 열성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쪽으로 가게 된다. 예수를 만나야 하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바라니까 그쪽으로 빠져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가 발전해서 되는 나라가 아니다. 선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른 씨가 전파되어 다른 씨가 자라는 나라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씨가 퍼져서 자라는 나라다. 예수는 선한 사람인가, 예수는 점잖은 사람인가, 예수는 문명인인가? 그런 문제가 아니다.
예수는 다른 씨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씨가 다르다. 이스마엘이 나쁜 사람이고 이삭은 선한 사람인가? 그런 문제가 아니다. 씨가 다르다는 것이지 선하든 악하든 그것은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에는 선악의 개념이 없다. 당연히 죄라는 개념도 없다. 그 시대에는 죄라는 단어가 없다. 그러므로 문제는 씨에 있는 것이다. 이스마엘이냐 이삭이냐, 에서냐 야곱이냐 하는 것은 씨의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다. 씨의 문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다른 씨가 이 땅위에 퍼져서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콩을 심으면 콩밭이 되고 녹두를 심으면 녹두밭이 된다. 부수적인 결과는 선한 것이 될지 착한 것이 될지 술, 담배가 없는 것이 될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씨가 자라야 되는 것이지, 그런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 씨를 뿌려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은 씨뿌리는 전쟁이다. 누가 씨를 뿌리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로 말씀하셨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라고 하셨다(마13:24-28). 밭은 하나인데 농부가 둘이다. 밭은 사람이다. 그 밭에 하나님도 씨를 뿌리시고 사탄도 씨를 뿌리는 것이다. 씨가 전혀 다른 것이다. 씨의 전쟁이고, 밭을 장악하려는 전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못하면 사탄의 밭이 되고 만다. 원래 우리는 밭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탄이 사용하면 사탄의 밭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하나님의 밭이 되는 것이다. 포도를 심으면 포도밭이 되고 엉겅퀴를 심으면 엉겅퀴 밭이 되는 것이다. 사람을 놓고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우주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 하면 본의 아니게 사탄의 밭이 되어 사탄의 수확물을 생산해 주게 된다. 내 인생 자체가 전체적으로 그렇게 되고 만다.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저 사람 속에서 하나님이라는 곡식이 나와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 밭에서 포도를 거둬야 할 텐데 엉겅퀴가 나고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씨를 뿌려서 당신의 나라를 거두시려고 하신다. 우리는 그 나라를 얻고, 그 나라로 옮기고, 그 나라로 들어가야 한다. 얻는 것이나 옮기는 것이나 들어가는 것이 하나다. 그 나라는 우리 자신을 요소로 해서 이루어지는 나라다. 내가 없는데도 그 나라가 만들어져서 내가 들어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른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지옥도 나와 다른 지옥이 없고 천당도 나와 다른 천당이 없다. 내가 지옥의 요소가 되면 나는 지옥으로 옮겨진 사람이고, 지옥을 받은 사람이고, 지옥으로 들어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가 천당의 요소가 되면 나는 천당으로 옮겨진 사람이고, 천당을 받은 사람이고, 천당으로 들어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장 6절에는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하였다. 우리를 나라로 삼으셨으며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라고 하였다. 우리를 보고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라는 것이다. ‘옮겨졌다.’. ‘받았다.’. ‘들어갔다.’는 것이 점점 개념이 변하면서 “너희를 나라로 삼으셨다.”, “너희가 나라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없는 나라는 없다.
백성이 없는 나라는 있을 수 없다. 대한민국이라는 땅 덩어리에 한국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대한민국도 없는 것이다. 이름만 있을 뿐이다. 또한 대한민국 백성이 없는 대통령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라가 될 때 그분은 왕이 되신다. 그때 그분은 부끄럽지 않게 된다. 그분만 부끄럽지 않은 것이 아니고 우리도 또한 부끄럽지 않게 된다. 임금이 없는 백성은 부끄러운 백성이다. 고종 황제가 나라를 빼앗기고 나니까 우리는 임금이 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부끄러운 백성이 되어 일본 천황 밑에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임금이 없어져 버렸으니까 신사참배를 하라면 해야 했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황국신민이 어쩌구 직무오호와 어쩌니 하는 소리를 했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따라 했었다. 결국 백성이나 임금이나 나라가 안되면 서로가 부끄러운 것이다. 나라가 되면 서로가 부끄러움이 없어지게 된다.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이것은 나라를 향한 것이다. 두 사람의 연합은 한 나라를 향한 씨인 것이다. 이 씨가 발전해서 왕 같은 제사장과 나라가 되는 것이다. 혼자서는 나라가 안되니까 둘이 합해서 한 몸을 이룰 때 나라가 시작된다. 그래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나라! 임금은 임금 노릇을 하고 백성은 백성 노릇을 하는 나라! 이 나라가 이루어진다. 요한계시록 21장 3-4절에는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지나갔음이라.”고 하였다.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완전히 부끄럽지 않게 된 것이다.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하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된 것 같이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어로 남자(이쉬)와 여자(이솨)는 음이 비슷하다. 아가서에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묘사하였는데, 술람미라는 말은 솔로몬의 여성형 명사다. 같은 말인데 남성을 솔로몬이라 하고 여성을 술람미라 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다. 남자(이쉬)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이솨)라 하고, 솔로몬에서 취하였은즉 술람미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이런 사이다. 이 우주 안에서 틈을 비집고 들어갈 데가 없는 가장 완전한 사랑의 관계인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는 서로 없으면 안되는 사이다. 하나님도 그 백성이 없으면 안되고, 그 백성도 하나님이 없으면 안되는 사이인 것이다. 이 보다 더 완전한 사이는 없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절대적으로 없으면 안될 사이라면 죽자 사자 하고 붙어 살 것이다. ‘네가 없어도 나는 살 수 있다.’고 하면 삐걱거릴 수밖에 없지만, ‘이 사람이 없으면 못산다.’고 알면 죽자 사자 매달릴 것이다. 젊었을 때는 폭군처럼 밥상을 뒤엎기도 하던 사람이라도 늙어서 병이 들면 마누라를 붙잡고 매달린다. 없으면 안되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없으면 절대로 안되는 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렵게 생각할 이유가 없는 것은 그분은 우리가 없으면 안되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분이 없으면 안되지만 그분도 우리가 없으면 안되는 분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나라가 돼야 그분이 부끄럽지 않게 된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우리도 영광을 받게 된다. 영광은 그 나라 자체가 받는 것이 아니고 임금이 받는 것이다. 그런데 임금이 받는 영광은 그 백성에게로 돌아온다. 대한민국이 높아지면 대통령이 영광을 받는다. 지금은 국제무대에서 우리 대통령이 G5, G7 뒤쪽 어디에 서 있지만, 나라가 점점 왕성해지면 서열이 올라갈 것이다. G7이 모여서 사진을 찍은 것을 보면 서양 사람들만 있는 자리에 일본 사람이 끼어 있다. 서양 사람만 있으면 자기들끼리 모였으려니 하고 말겠는데 우리 보다 못하고 볼품도 없는 일본 사람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보기에 눈꼴 사나워도 돈이 많으니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우리도 일본만큼 돈이 많으면 그 자리에 들어갈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나라가 부강해지면 그 영광을 우리의 대표자가 받는다. 그런데 그 영광은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그 영화가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겠는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우리가 나라가 돼야 한다. 나라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영화롭게 하려고 해도 안된다.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다.”고 했는데, 임금의 영광은 나라로 나타나고, 백성의 사랑은 제사장으로 표현된다. 나라는 임금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고, 제사장은 백성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고 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한다.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명령을 하고, 제사장은 사람을 대신하여 양을 잡고 떡을 드려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은 한 면으로는 왕이고, 한 면으로는 제사장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는 왕이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제사장이다. 예수님은 왕 같은 제사장이다. 우리에게는 왕이고, 하나님께는 제사장이다. 이 한 인격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자리가 이렇게 고귀한 자리이다. 왕이 될 수도 있고 제사장도 될 수 있는 자리이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리에 설 수도 있고 인간을 대신하는 자리에 설 수도 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간을 대신하는 자리에 섰다. 그래서 그분은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옮겨주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다.
인간을 대표하는 자리에, 제사장으로 서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 앞에 왕으로 보였고, 어느 때는 제사장으로 보였다. 우리의 위치가 바로 이런 위치인 것이다. 이 나라가 하나님 나라다. 그 나라에 들어가면 전부 왕들이기도 하고 백성이기도 하다. 요한계시록 20장에는 천년 왕국이 나오는데 천년 왕국은 왕들의 나라다. 어떻게 왕들의 나라가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왕이니까 그분은 왕 중의 왕인 것이다. 천년 동안 사탄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가두고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린양이 사탄을 누르고 승리했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는 승리자만 있지 패배자는 없다. 천년 왕국은 왕들의 나라다. 이기는 자가 아니면 왕이 되지 못한다. 그 나라에는 전부 이기는 자만 있는 것이다. ‘천년’이라 해서 숫자적으로 천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유대인들의 개념에 천년은 아주 긴 시간이다.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한 것을 천 년을 하루로 계산하라는 뜻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천년은 아주 긴 기간을 의미한다. 우리의 ‘만날 해 보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천년 만년 살고 지고’라는 말을 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다. 천년 왕국이라는 말은 아주 오랜 동안 왕노릇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기는 자들이 있으니까, 왕들이 되었으니까 아주 오랜 동안 왕노릇할 것이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기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다. 적든지 크든지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한편으로는 왕이고, 한편으로는 제사장이다. 세상에 나가 보면 우리는 분명히 왕이고 승리자다. 사탄의 올무에 묶여서 꼼짝 못하고 있는 세계에 가면 우리는 왕들이다. 우리는 사탄을 이기고 나온 사람들이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하는 자리를 이기고 나왔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하는 자리를 이기고 나온 사람들이다. 왕이다. 그 자리에 매인 사람들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려고 땀을 흘리고 있다. 어떻게 하면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을까 하며 연구하고 있다. 떨어지면 부끄러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서 이기고 나왔다. 우리는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나온 사람들이다. 왕들이다. 예수 안에서, 그분 안에서 우리는 담대하게 이기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분이 이기는 것을 보니까, 그분의 운명이 이기는 것을 보니까 우리의 운명으로 넉넉히 이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넉넉한 왕이다. 우리 앞에서 사탄은 인봉되어 있다. 우리가 집회를 하는 동안에 사탄은 무저갱에 인봉되어 있다. 그는 나오지 못한다. 더 이상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할 수 없다. 갇혀서 꼼짝을 못하게 되었다.
인봉된 것이다. 어찌 그가 우리 앞에 와서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그의 정체를 아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할 텐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사탄은 입만 봉해 놓으면 아무 능력이 없다. 이것이 무저갱에, 밑없는 구멍에 인봉한 것이다. 우리는 왕들이다. 그리고 제사장들이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입니다.” 하며 바치고 있다. 양으로, 송아지로, 밀가루로 바치고 있다. 우리는 날마다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영 단번에 제사를 드리셨다. 그분 자신이 제물이니까 영 단번에 제사를 드린 것이다. 날마다 제사 의식을 행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도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제물이 되고 있다. 우리는 제사장들이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상징적인 제사장이었다. 자기는 제물이 아니고 제물을 갖다 드리는 자였다. 그러나 실제적인 제사장은 자기를 드린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참 제사장이다. 레위의 후손들은 제사장의 형식을 갖춘 제사장들이었는데, 예수님은 참 제사장이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왕이고 하나님께는 제사장들이다.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이에게 영원토록 경배와 찬양을 드린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다. 우리 자신이 거룩한 나라, 하나님이 구별하신 나라다. 겉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만 하나님이 나라로 구별해 놓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복음이라는 것을 따로 전파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와 제사장인, 왕 같은 제사장들인 우리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다. 우리가 왕이고 제사장이므로 우리를 뿌리고 전파하는 것이다. 개가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가 또 새끼를 낳는다. 자기를 자꾸 낳고 있는 것이다. 개는 계속 개를 낳고, 왕은 계속 왕을 낳고, 제사장은 계속 제사장을 낳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낳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다. 복음이라는 것을 전파한다면 남의 것을 전파하는 것이지만, 복음이라는 것이 따로 있지 않다. 우리는 나라를 전파하고 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는 것은 내게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예수님에게로 돌아 오라. 예수님의 왕국이 왔으니 돌아 오라.”고 해 놓고 생각해 보면 “나에게로 돌아 오라.”고 한 것이다. 이 나라는 참으로 신기한 나라다. 우리가 그 나라니까 “예수님 나라로 오라.”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 오라는 것이다. 이 나라는 영원 무궁할 것이다. 다시는 부끄러움이 없는 나라 안으로 우리는 들어왔다. 그 나라가 될 때 우리는 부끄러움이 없는 백성이 되고, 우리가 그 나라가 될 때 그분은 부끄러움이 없는 왕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부끄러움을 빨리 씻고 우주적인 신랑으로 오셔서 이 땅 위에서 혼인 잔치가 벌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그분이 모든 부끄러움을 다 씻고 혼인 잔치에 참여하실 것이다. 총각의 부끄러움을 씻고, 아내 없는 홀아비의 부끄러움을 다 씻고 우주적인 신랑이 되신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신부가 왜 단장을 하겠는가? 남편에게 잘 보이려고 단장하는 것이다. 신부는 자기 일생에서 가장 예쁘게 보이도록 화장을 한다. 왜 그렇게 하겠는가? 그 신랑이 영광스럽고 영광스러운 신랑이 되셨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왕들의 나라에서 아내와 남편의 나라로 최종 완성된다. 왕은 이겨야 하므로 칼을 차고 다니며 전쟁을 한다. 그런데 신랑은 갑옷을 다 벗어놓고 신방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안식은 그분이 신랑이 되시는 것이다. 인간에게 최종적인 축복도 그분이 완전한 신랑이 되시는 것이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진흙 속에서 당신의 빚으심을 인해서 창조된 자들인데 이렇게도 과정을 거쳐서 영광스러운 자리로 당신의 신부가 되는 자리로 우리를 옮겨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를 당신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실 뿐 아니라 당신의 신부로 삼으셔서 당신과 최종적인 평안 가운데 최종적인 안식 가운데 이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만나지 못할 때 안식이 없었고 당신도 우리를 만나지 못할 때 안식이 없어서 서로 부끄러운 자였는데 우리가 서로 만나서 부끄럽지 않은 자가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더 정결하고 더 아름다운 신부가 되어 우주적인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새 예루살렘으로 단장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