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중에 밤낮 길이가 같은 절기 춘분이 지났으니 바야흐로 야외활동 하기에도 제격인 계절이다. 일출시간에 미치지 않은 시각에 집을 나섰다. 이매역에서 06:32발 여주행 경강선 전철에 올랐다. 여주 여강길 11개 코스 가운데 여주전철역에서 명성황후 생가터에 이르는 제5코스를 걸어볼 요량이다.
전철은 영장산 아래 터널 등 터널과 지상을 오가며 삼동역, 경기광주역, 초월역을 차례로 지났다. 다시 지상으로 올나선 전철 창밖으로 보이는 흰 스카프처럼 흰 눈을 걸치고 있는 곤지암스키장 슬로프가 아직도 겨울이 다 물러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곤지암역과 신둔도예촌역을 지나 이천 땅으로 들어서면 대지는 툭 트여 시야가 시원스럽다. 넓은 논밭 사이에 둔턱처럼 낮은 산야가 군데군데 자리할 뿐 높은 산이란 산은 모두 아득히 멀리 물러나 앉았다.
부발역에서는 KTX열차로 갈아탈 수 있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KTX-이음은 판교와 충주를 연결하는 중부내륙선을 비롯해서 서울에서 강릉·안동·동해로 각각 연결되는 강릉선·중앙선·영동선이 운행되고 있다.
이천역과 부발역을 지나고 여주의 진산(鎭山)이자 세종과 효종 두 왕과 왕후의 능인 영릉(英陵)과 녕릉(寧陵)의 주산(主山)인 북성산 아래로 뚫린 터널을 지나 종착역 여주역에 도착했다. 정확히 시간표 상의 예정 시각인 07:19이다. 여주의 지세 또한 이천처럼 드넓고 쾌활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여주를 지나는 남한강의 애칭이 여강(驪江)이다. 여강길은 2000년 초부터 경기도가 추진한 남한강 골재채취 사업에 맞서 시민단체들 중심으로 여강 지키기의 일환으로 여강의 아름다움을 알리려고 시작된 여강가 걷기 운동이 그 탄생의 원초가 되었다고 한다.
여강길은 11개 코스로 총 118.8km 이루어졌는데, 제5코스 '황학산길'은 여주역에서 출발하여 세종초교, 황학산산림욕장, 황학산수목원, 황학산정상을 지나 명성황후 생가까지 이어지는 6.5km로 다른 코스에 비해 짧은 편이다.
1931년 12월 수려선 개통과 함께 홍문동에 문을 열었던 여주역은 1972년 4월 수려선과 함께 폐지되었다가 2016년 9월 24일 경강선 개통으로 이곳 교동에서 새롭게 자리 잡게 되었다. 훈민정음 자모로 장식된 역사 내 여객 통로 벽면, 도자기 모형이 반영된 건물과 내부 장식 등에는 민족 성군 세종대왕이 잠들어 있는 고장이자 우리나라 생활 자기의 60%를 생산하는 도자기 도시로서의 자부심이 배어 있다.
깨끗하고 산뜻한 역사를 빠져나오니 주변 역세권개발구역은 너른 빈 택지와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아파트 단지들이 듬성듬성 솟아있다.
여강길 앱을 켜고 제5코스 노선을 따라 세종초교 쪽으로 발을 옮긴다. 휴일이라 학교는 인적 없이 텅 비었고 교문 위에 걸린 "세종대왕님이 보고 계신다! 세종인은 예쁜 말 쓴다."라는 플래카드 글귀가 눈에 띈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신문 등 언론에서 총선을 앞둔 요즘 정치판을 "온통 상대 진영을 비방하고 깎아내리는 비수 같은 날카로운 말이 넘치고 감언이설로 표를 훔치려 한다"라고 우려하는 칼럼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수긍이 가는 부분이 적지 않다.
초교 앞을 지나 세종로를 만나 좌측으로 꺾이는 길목에 식물원 가게 하나가 자리하는데 가게 밖 보도 위에 내놓은 화초들이 발길을 잡는다.
꽃잎이 나비 날개를 닮은 비올라 팬지, 얼룩무늬 잎새의 제라늄, 어떤 향이었나 향기가 궁금한 로즈메리, 쥐방울처럼 앙증맞은 꽃송이의 사계국화, 난쟁이 수국을 닮은 사피니아, 손톱 크기 꽃이 수북한 피나타, 꽃잎이 스페인 플라멩코 무희 치마를 닮은 페라고늄, '냉담'이나 '바람둥이'라는 꽃말의 수국, 은하수처럼 잔꽃들이 수북한 은간초, 오월의 꽃 카네이션,...
그 밖에도 백왕수선화, 크로커스, 눈향, 울마, 너도부추, 무수가리, 버베나, 올리브 묘목, 네위시아, 애니시다, 양골담초, 춘절국, 목마가렛, 바늘꽃 등 생소하고 이색적인 많은 꽃을 접하는 호사를 누린다. 화분 속 꽃과 푯말의 꽃이름을 찬찬히 살피며 잠시 그 색채와 향기의 향연에 온 감각이 흠뻑 젖었다 빠져나왔다.
여강길은 세종로를 따라 한 블록 지나서 우회전하여 여원로와 황학산 북변을 각각 좌우에 끼고 진행하다가 이내 황학산 산림욕장으로 들어선다. 산자락 한편에 용도를 다한 자전거, 컴퓨터 등 폐품이 널브러져 있고, 길가 개나리들은 잎새를 틔우기 전에 노란 꽃잎부터 내밀었다.
산림욕장으로 들어서서 느슨하고 아늑한 얕은 경사의 길이 100미터 남짓 오르니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제각기 다른 모양새의 소나무들이 어우러진 숲 사이로 길게 늘어져 있다. 선홍색 점퍼 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여성 한 분을 앞질러 가고 마주 오는 등짐 진 어르신 한 분과 스쳐 지났다. 능선마루 곳곳에는 여러 갈래 산책길이 나있어 서너 번 '여강길 앱'에 의지해서 잘못 든 길을 바른 길로 고쳐 잡았다.
이어지던 능선길은 황학산수목원 정문 앞쪽으로 살짝 내려선다. 오전 9시에 개장하는 수목원을 십여 분을 기다려 입장했다. 수목원에는 산림박물관, 연구온실, 난대식물원, 매룡리 고분, 풀향기정원, 양화소록원, 채원, 강돌정원, 항아리정원, 나이테광장, 산열매원, 석정원, 미로원, 산야초원, 습지원 등 다양한 공간이 있는데 박물관만 둘러보기로 했다.
정문을 들어서니 매룡지 연못이 맞이한다. 박물관으로 오르는 길옆 화단에는 리아트리스, 갯기름나물, 타래붓꽃 등 화초 이름을 적은 푯말만 보여 '저들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땅속에서 줄기를 틔우고 꽃을 피울 무르익은 봄이나 가을에 오면 제격이지 싶다. 박물관 옆 화단의 영춘화 만이 이미 봄이 왔다고 알리듯 거친 가지덩굴 사이로 샛노란 꽃을 피워 놓았다.
박물관 문으로 들어서니 안내 데스크의 나이 지긋한 여성분이 어서 오라며 먼저 인사를 건넨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오르니 전시실 초입에서 고생대~신생대의 식물 화석들이 맞이한다.
5억 7천 년~2억 4500년 전 고생대의 석송류와 종자고사리잎 화석, 2억 4500년~6천500년 전 중생대의 빗방울과 새발자국, 은행잎 화석, 6천5백만 년~1만 년 전 신생대의 버드나무과, 단풍나무과, 감나무과 , 종자고사리류, 스트로마톨라이트, 구목과의 잎, 수엽류, 유절류, 송엽난류 등이 억겁 세월의 수많은 얘기를 품고 한 자리에 모여 있다.
그중 중생대의 빗방울과 새발자국 화석은 세련된 현대작가의 추상화 앞에 선 듯 억겁 세월의 수많은 얘기를 품고 있는 듯 오묘하기만 하다. 신생대의 화석은 암흑색의 고생대나 중생대 화석과 달리 분첩을 바른 듯 화사한 색상이 단아한 백자를 닮았다. 또 꽃잎 문양이 또렷한 추엽류 화석은 뤄양 용문석굴 탐방 때 접했던 매화석과 흡사해 보였다 .
그 옆 전시 코너에서는 모란, 홀아비꽃대, 도둑놈의갈고리, 깽깽이풀, 왕원추리, 어수리, 촛대승마, 율무, 범부재, 남천, 산비장이, 꽃범의꼬리, 구릿대, 수세미오이, 용머리, 설악초, 큰뱀무, 쥐꼬리새, 목화 등 각종 화초의 그림과 씨앗 실물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두더지, 너구리, 고라니 등 각종 화초 수목의 씨앗을 나르는 숙주 동물들과 호랑지빠귀, 되지빠귀, 오색딱따구리, 청 딱따구리, 쇠떡따구리, 다람쥐, 족제비, 멧돼지, 말똥가리, 까마귀 등 숲에 깃들어 사는 동물들의 박제와 그림을 곁들인 산림 생태계 먹이사슬도는 자연학습 교육자료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말벌, 사향제비나비, 사마귀, 물결박각시, 무당벌레, 풍뎅이 등 숲 속 곤충들 설명자료와 나뭇잎나비, 네발나비과, 호랑나비과, 흰나비과, 박각시과, 부전나비과, 팔랑나비과, 산누에나방과 등 종류별 화려한 무늬의 각종 나비 표본들도 볼만하다. 이렇듯 수많은 종류의 나비들을 어디서 다 채집했을까 하는 감탄을 자아낸다.
박물관 3층에서는 초롱꽃, 동자꽃, 쇠물푸레, 매발톱, 털중나리, 미나리아재비, 으름덩굴, 참나리, 장구채, 각시붓꽃, 미스김라일락, 깽깽이풀, 히어리, 피나물, 산꼬리풀, 구절초, 터리풀, 엘레지, 물봉선, 쑥부쟁이, 산조팝, 금낭화, 은꿩의다리, 병꽃, 산수국, 노루귀, 더덕꽃, 복수초, 며느리밥풀, 동의나물 등 표본이 인상 깊다.
그중 뿌리를 포함해서 한 포기 전체를 고스란히 아크릴 액자 속에 담은 각시붓꽃 표본은 화선지에 멋들어지게 친 난 그림을 보는 듯 격조가 있다. 단아한 쑥부쟁이와 구절초 표본은 고흐의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해바라기' 그림과는 달리 동양의 여백미를 물씬 풍긴다.
쑥, 백리향, 소나무, 재스민, 장미, 라벤더, 박하 등 향기를 체험할 수 있게 한 코너와 그 맞은편에 버튼을 눌러 호랑쥐빠귀, 오색딱따구리, 꾀꼬리, 수리부엉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게 조성해 놓은 '황학산의 새소리' 코너는 독창성이 돋보인다.
안내 데스크의 여성분에게 다양한 전시물과 볼거리가 많다고 엄지를 추켜세워 보이며 한 시간여 만에 박물관을 나섰다.
수목원 정문 앞에서 다시 황학산 정상 쪽으로 난 여강길을 따라 발길을 재촉했다.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식물원 좌측 가장자리를 따라 난 나무데크길을 오르자니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봄의 교향곡인양 귀를 간지럽힌다.
길옆 진달래 한 그루가 수줍은 듯 꽃망울을 터트렸고, 날씨가 푸근하여 느린 경사의 오르막에도 금세 몸에 땀이 배인다. 능선 쪽에서 내려오며 스쳐 지나는 트레커 한분은 점퍼를 벗어 손에 든 반팔차림이고 평탄한 능선길의 노인 한 분은 맨발이다.
능선에서 비껴 앉은 맷돌바위 위에 한 번 올라섰다가 지척에 있는 해발 175미터 황학산 정상으로 올라서니 종아리 높이의 다소 초라해 보이는 정상 표지석이 맞이한다. 정상 북쪽 능선 지척에 자리한 툭 트인 2층 누각 전망대에 조망한 좌우 경관은 여주의 평탄한 지형인 탓에 다소 밋밋해 보인다.
산정을 뒤로하고 남쪽으로 여러 갈래 뻗어 내린 줄기 가운데 여강길로 접어들었다. 능선마루 바위무덤 봉우리를 지나 명성황후 생가 쪽으로 이어진 내리막길은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앞서 맨발로 산길을 내려가는 장년 남성 한 분이 있어 인사를 건넸다. 그는 두어 달 전부터 시작한 맨발 걷기로 만성적인 불면증과 요통이 없어졌다고 했다. 근무지인 포항 영일대 해변에서도 맨발로 걷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었고, 최근 40여 년만에 다시 만난 중학교 동창도 맨발 걷기 마니아가 되었다고 하니 그 효험이 빈말은 아니지 싶다.
지난주 두통과 채기가 있어 약국에 들렀었다. 칠십이 넘어 보이는 노 약사가 증상을 듣더니 단박에 "요즘 신경 쓰이는 일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약국 문을 나서기 전에 과립 1포를 드링크에 삼켰더니 거짓말처럼 증상이 사라졌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지만 '마음 또한 건강에 강한 영향을 미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행이나 걷기를 하면서 일상의 시름을 잠시나마 벗어나는 것이 정신과 신체의 건강에 이로운 영향을 미치는 이치는 자명해 보인다.
황학산길 막바지 산기슭 밭 가장자리에 자리한 약수터가 손짓한다. 밭에는 농부 한 분이 춘경에 손길이 분주하다. 마을 쪽에서 올라온 아주머니 세 분 중 한 분이 막걸리잔을 닮은 양은그릇에 약수를 떠서 먼저 동료에게 주고 내게도 건넨다. 이처럼 깨끗하고 개운한 물맛을 잃지 않은 약수터가 남아 있어 반갑기 그지없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국의 '음용불가'라는 경고 팻말을 달고 있는 여러 산 약수터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던 터였다.
황학산에서 내리 뻗은 여러 산줄기들은 자세를 한껏 낮추며 마을로 내려앉았고 그 사이사이로 깊숙이 파고든 논밭이 펼쳐져 있다. 마을 입구 너른 밭에서 베트남 전통 피라미드 모형의 고깔인 '농'을 쓴 스무여 명의 여인네들이 줄지어 서서 느린 동작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특이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황학산 줄기에서 토리마을로 내려설 즈음 배터리가 간당거리던 휴대폰이 숨을 죽여 화면이 보이질 않아 그 경관을 휴대폰에 담을 수 없어 마음이 안절부절이다. 마을 주민센터와 교회 등 몇 곳을 두리번거리던 끝에 가슴 높이 펜스 너머 마당에서 캠핑용 바비큐 그릴을 조립하고 있는 중년의 부부에게 부탁해서 휴대폰을 이십여 분 충전할 수 있었다.
지나왔던 길을 되짚어 올라가니 외국인 용병 농군들은 밭일을 거의 마무리하려 하고 있다. 황학산 산길에서 잠시 인사를 주고받았던 여성 두 분이 다가오며 저들은 베트남 등 외국인 일꾼들로 도라지 파종을 위해 고용한 일용 노역자라고 귀띔을 한다. 바야흐로 전국의 중소도시나 농촌은 외국인 일손 없이는 생산의 동력을 잃어버리게 된 시대다. 이런 추세라면 한국인이 소멸된 지방을 외국인들이 모두 차지하는 현실이 먼 미래의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는 끊어질 듯 길게 이어지며 자세를 낮춘 황학산 줄기 끝 평지에 자리한다. 생가 왼편에 멀찍이 떨어져 자리한 감고당의 어깨 높이 담장을 끼고 돌아가니 '감고당(感古堂)' 현판이 걸린 대문이 맞이한다.
감고당은 조선 왕조의 두 왕비가 기거했던 건물이다. 민 씨(閔氏) 문중으로 숙종의 계비였던 인현왕후(1667-1701)가 희빈 장 씨와의 갈등으로 물러났다가 복위될 때까지 5년여 동안 살았고, 명성황후(1851-1895.10.8)는 8살 때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라와서 1866년 왕비로 간택되기까지 머물렀다.
원래는 서울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위치하던 것을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겼다가 2006년 명성황후 생가 성역화사업에 따라 현 위치로 이건 했다고 한다. 행랑채, 사랑채, 중문채를 지나서 마당 뒤로 대청, 건넌방, 윗방, 다락, 부엌 등으로 구성된 번듯한 안채가 옛 왕성 내 대갓집의 전형을 보여 준다.
감고당에서 오른편으로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명성황후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명성황후는 8세 때 부친이 타계한 뒤 어머니와 함께 서울의 감고당으로 옮겨 갔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생가, 기념관, 추모비, 순국숭모비, 민유중(1630-1687) 신도비 등을 차례로 참배했다.
"세계 강대국과 그 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섬세한 감각을 가진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반대세력의 허를 찌르는 데 능했다. 따뜻한 온정과 어린이들에게 부드러운 사랑을 주었다. "
의사이자 선교사로 명성황후의 시의(侍醫)였던 언더우드 부인(Lillias H. Underwood, 1851-1921)의 <조선 견문록>에서 명성황후의 진면목 일부를 엿볼 수 있다.
권력의 중심에서 개화와 척사수구 세력들의 권력 다툼과 밀려오는 제국주의 침탈로 풍전등화처럼 국운이 위태로운 시대를 살다가 간 비운의 왕후, 사후인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성립과 고종 황제 즉위로 명성황후로 책봉된 그녀, '조선의 국모'로 기억되는 그녀는 대한민국 오늘의 모습에 미소짓고 있을까! 그녀의 명복을 빌며 무거운 발길을 돌린다.
여강길 황학산길 코스 걷기를 마치니 다시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되었고 기다리는 버스는 언제 올지 기약 없다.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서 배낭 속 계란과 토마토로 허기를 달래던 중 지나가는 빈 택시가 있어 용수철 튀기듯 뛰쳐나가 손을 들었다.
여주역까지는 지척이다. 택시 기사분은 인구 12만 여주지역의 팍팍한 경기를 걱정했다. 여기저기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지만 입주하지 않은 빈집이 많다고도 했다. 2-30여 분마다 출발하는 판교행 경강선 전철에 올랐다. 여주역을 출발한 전철이 몇 분 뒤 선로 위에 정차했다. 철로 위로 바람에 날려온 농사용 비닐을 제거한 후에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 뒤따랐다.
여유롭고 더디게 가는 경강선 전철처럼 올 듯 말 듯 더디게 찾아온 이 봄도 천천히 지나가면 좋겠다. 03-24
#여주#여강길#명성황후#황학산#산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