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재발견, 옛 지명 간성군(杆城郡)을 살펴본다. 인터넷에서 ‘고성군’을 제대로 검색하려면 ‘강원 고성군’으로 광역표기를 해야 한다. 물론 통합검색에서는 접속 위치에 따라 ‘IP주소 기반’으로 강원 ‘고성군’을 찾아주지만, 뉴스검색은 ‘강원 고성군’과 ‘경남 고성군’ 기사들이 혼재해 올라온다. ‘경남 고성군’의 뉴스빈도가 인구에 비례해서 많다.
그래서 필자는 검색어를 읍면단위로 한다. ‘토성면’, ‘죽왕면’, ‘현내면’, ‘간성읍’, ‘거진읍’ 또는 ‘고성+토성’과 같은 검색어 조합을 사용한다. 그렇게 하더라도 고성군 일부 정보는 놓치기 마련이다. 검색의 불편 때문이 아니고, 이번 학기 ‘지역의 재발견 역사문화탐방’ 아카데미가 계기가 되어 고성군의 옛 지명 간성군에 관한 문헌을 살펴보게 되었다.
현재의 강원도 고성군은 삼국시대 이래 간성지방과 고성지방이 분리와 통합을 거듭해왔다. 간성지방은 고구려 때 수성군(䢘城郡) 또는 가라홀(加羅忽)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때 수성군(守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성지방은 달홀(達忽)로 불리었다. 그래서 고성군 축제를 ‘수성문화제’로, 전통주를 ‘달홀주’라 한 것이다. 1018년(고려 현종9) 수성현이 간성현으로 개칭되었고, 1389년(고려 공양왕 원년)에 간성군이 되었다. 고성현은 늦게 1432년(조선 세종14)에 고성군이 되었다. 1799년 정조실록에 당시 간성군의 민가는 580호라 하였다.
이처럼 고려시대 이후 줄곧 간성군과 고성군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속되어 왔다. 그러다가 20세기에 접어들어 1914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령에 의한 군·면 통폐합으로 간성군이 고성군을 합병하면서 간성군이 되었으나, 다시 1919년 고성면으로 군청을 이전하면서 고성군으로 개칭하였다. 이때 토성면과 죽왕면(동호리를 제외)이 양양군에 이관되었다. 광복이후 38선 중심으로 1945년 9월 2일 소련군정 관할 공산치하에 있었으나, 6.25 전쟁을 거치면서 1914년 이전의 간성군 지역을 전부 대한민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일제에 의해 고성군과 간성군이 강제 합병되기 이전인 1914년의 고성군은 지금의 북한 고성군이고, 간성군은 지금의 남한 고성군 영역과 똑같지는 않지만 대략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다만 간성군의 남쪽경계는 현재의 속초시 장사동까지 포함되었다. 따라서 간성군은 1018년부터 1919년까지 1천년이 넘도록 사용되었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지명이다.
역사문화탐방에서 쉽게 발견하게 되는 몇몇의 사료(史料)에서도 간성군의 기록은 명확하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1861), 여지도서(輿地圖書, 1757~1765), 해동지도(海東地圖, 18세기), 1916년 조선총독부 발행 토지조사부에도 간성군 죽왕면 공현진리로 되어 있다. 선유담 한시를 남긴 최립(崔岦, 1539~1612), 구음(具崟, 1614~1683)이 간성군수를 지냈다. 간성군읍지(杆城郡邑誌)가 1633년 간성현감 택당 이식(李植)에 의해 최초로 수성지(水城誌)로 편찬되었고, 김광우(金光遇, 1748) 간성군수가 새로 작업하였다. 1953년에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차간성청간정운(次杆城淸澗亭韻)이라는 청간정 한시를 남겼다. 제목이 고성 청간정이 아니고 간성 청간정이다. ‘통고지설(通高之雪)’과 ‘양간지풍(襄杆之風)’은 두 지역의 구분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지역은 역사와 문화유산으로 볼 때 간성군에 속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주민 정서와는 무관하게 행정편의주의로 고성군으로 개칭되어버린 것이다. 우리 지역의 지명 역사로 보면 간성군은 1천년이고, 고성군은 1백년에 불과하다. 이러한 필자의 생각을 분단 조국의 고착화 시각이라고 덧씌우면 억지다.
필자의 생각이 생소할 수 있다. 그래서 주민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공론화로 수렴하는 과정이 있으면 바람직할 것이다. 지금은 지역 특성화가 경쟁력이다. 그래서 강원특별자치도 특별법이 제정된 것이 아닌가? 지역의 미래 발전을 바라보는 너른 시각으로 접근해보자. 동서고속철도, 동해북부선 착공으로 서울 접근성 개선의 기대감 때문인지 우리 지역이 급부상하고 있다. 이런 좋은 기회가 지역 인구 증가로 이어지길 소망한다. 옛 지명 ‘간성군’의 재발견이 지역의 변화를 이끄는 참신한 시작점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최철재
경동대 평생교육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