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할 자신이 생겼다*
정해영
아침에 눈을 뜨면
밭이랑의 고추모종처럼
슬픔이 자라 있다
백년 전에 뿌린 씨앗도
자라 있다
어젯밤에 심은 낱알도
싹이 보인다
할머니는 해가 뜨면
밭고랑에 납작 붙었다
종일 엎드린 기도로
가지며 호박이며 고추를
가꾸었다
어느 날은 바람 속에서
어느 날은 햇빛 아래서
손발이 저리도록 가꾸는 일은
거두어들이게 하는 일
오래 가꾼 이 일은
할머니 농사와 같아
가꾸는 손놀림에 신귀가 붙어
반질하다
슬픔도 오래 가꾸면
거두어들이는 것이 있어
한들한들
비바람 앞에서도
가볍게 흔들리다
꼭두서니 빛으로 온 하늘을
물들인다
*최문자 시집 자서에서 차용
반질한 슬픔
-정해영, 「슬퍼할 자신이 생겼다」
슬픔에도 역사가 있다. 아득한 옛적 신의 창조 이래로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 슬픔이라는 낙인을 찍고 살아야 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부지기수한 원인들이 있을 터이다. 욕망이든 시기 질투든 혹은 신의 장난이든 어찌 되었든 간에 인간은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 종내에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어찌 말할 수 없는 슬픔의 진화 또는 슬픔의 다양화일 것이다. 아픔, 고통, 쓰라림, 비탄, 애절, 속절없음, 허무, 고난, 괴로움 등등 온갖 슬픔의 변주들이 인간의 역사를 빚어냈고 빚어낼 것이다.
인간의 슬픔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 본색을 드러내지만, 그 씨앗은 이미 인간 내면에 심어져 있다. 기독교적 원죄의 무게도, 불교적 해탈의 대상도, 유교적 인(仁)의 절제도 마음속에 내재된 슬픔의 씨앗과 관계된 무겁고 도리 없는 정언명령의 이음동의어들이다. 문학의 할 일은 우리에게 내재된 슬픔의 ‘씨앗’을 싹틔우는 일일 것이다. 특히 서정시는 ‘해가 뜨면/ 밭고랑에 납작 붙’어 ‘종일 엎드린 기도로’ 슬픔의 ‘가지며 호박이며 고추를/ 가꾸’듯이 ‘어느 날은 바람 속에서/ 어느 날은 햇빛 아래서/ 손발이 저리도록 가꾸는 일’이다. 보잘것없거나 부정탈 일은 숨기고 보는 인간의 습성과 정반대의 것으로서 문학 또는 서정시는 그 자체로 삶의 텃밭에 뿌려진 슬픔의 ‘모종’인 셈이다. 흔히 일회성 문학과 대별 되는 문학의 미학은 ‘슬픔’의 유무로 그 가부를 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 <애지가 선정한 이 한 편 의 시>에는 정해영 시인의 「슬퍼할 자신이 생겼다」가 선정되었다. 이 시는 슬픔의 사변성, 슬픔의 체계를 득도한 시인의 언사이다. 헤겔이 인간 이성에 대한 특유의 긍정적 전망을 생물학적 정합성으로 체계화시켰듯이, 「슬퍼할 자신이 생겼다」는 ‘백년 전에 뿌린 씨앗’과 ‘어젯밤에 심은 낱알’의 ‘싹’을 통해 슬픔의 역사를 체계화시킨다. 헤겔은 그의 철학을 유기체 또는 생명체로 비유하는데,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이 역사라는 거대한 리듬 안에서 원환적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강조한다. 태어남과 소멸에 이르기까지를 ‘씨앗에서 씨앗으로’ 대별하면, 한 삶이 또 다른 한 삶으로 얽혀 들어가는 관계가 형성된다. 그 속에서 다시금 자기로 복귀하려는 인간의 본성 자체를 ‘삶’이라 할 수 있다. 정해영의 시를 두고 이야기하자면, ‘오래 가꾼’ ‘할머니 농사와 같’이 대를 이어져 내려온 우리 삶에 내재된 슬픔의 씨앗을 어떻게 가꿀 것이냐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 헤겔 철학의 문학적 설파가 될 수 있겠다.
흔히 우리네 역사를 ‘한(恨)’의 역사라 한다. 그러니까 슬픔이 역사적 굴레가 되면 민족적 ‘한’의 정서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한’이라는 단어는 기실 역사상 그리 오래된 어휘는 아니다. 구한말 이후 우리네 비극적 상황을 극적인 뉘앙스로 표현한 말이라 여겨지는데, ‘마음(忄)이 멈춰(艮)있다’는 것은 결코 긍정적일 수 없을뿐더러 한 민족의 성향을 단정 짓는 단어로 쓰일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 체한 상태, 가슴에 돌덩이가 얹혀 있어 가슴팍을 내려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슬픔에 수렴되거나 종속되는 부정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기에 반해 정해영의 시는 삶이라는 텃밭에 뿌려진 슬픔의 씨앗을 두고 ‘신귀가 붙어/ 반질’하게 가꾸어 보는 것이 어떠하냐고 묻는다. ‘슬픔이 자라 있다’로 시작되는 시적 발견은 ‘밭고랑에 납작 붙’어 있는 ‘할머니’라는 원환적 시간성을 통해 ‘슬픔도 오래 가꾸면/ 거두어들이는 것이 있’다는 통찰로 나아간다. 그러한 생물학적 정합성에 기반한 깨달음은 곧 ‘슬퍼할 자신이 생겼다’와 같은 자기 복귀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슬퍼하고 있는 나’와 ‘슬픔을 반질하게 가꾸는 나’를 구분하여 슬픔의 역사 속에서 오롯이 한 마디를 이루게 한다.
‘한’이 아니라 ‘슬픔의 가꿈’을 노래하는 정해영의 「슬퍼할 자신이 생겼다」는 어떠한 삶의 이론도 철학도 종교도 무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것은 ‘슬픔이 자라난다’는 것을 넘어 가꾸고 거두어들임으로써 ‘꼭두서니 빛으로 온 하늘을/ 물들’이는 대자연의 체계 또는 순리에 닿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있다. 어쩌면 슬픔 자체를 유기체로 이해한다는 것은 ‘슬픔 이후에 치유’라는 단순한 삶의 이치가 반영된 시선일 것이다. 슬픔의 시학이 곧 치유의 시학이다.
권혁웅의 「코네티컷 이야기」와 기혁의 「술래잡기」, 길상호의 「쌍둥이」와 같은 수작이 <애지가 선정한 이 한 편의 시>에서 경합을 벌였는데, 문학적 결실로만 따지자면 정해영의 「슬퍼할 자신이 생겼다」보다 더 눈에 띄는 시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해영의 시를 선정한 것은 슬픔보다는 분노로, 슬픔보다는 비난으로 점철된 작금의 시대를 위로하는 측면이 있어 <애지>로서는 귀하게 대접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슬픔을 억누르고 말살하고 가두는 일은 문학에서는 불경에 해당한다. 슬픔 없는 문학은 가볍다. 슬픔 없는 문학은 되레 가슴에 돌덩이처럼 얹혀서 변기통을 부여잡고 토악질을 하게 만든다. 슬픔이라는 백신을 맞고 슬픔이라는 음식을 먹는 일이 시의 일이다. 슬퍼할 일은 숨길 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일은 그대로 삶의 일이라고, 그리하여 슬퍼할 자신이 생기자고 <애지>는 기어코 권유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