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산8-1에 위치한 산이다. 두륜산(703m)은 해남의 영봉이며 여덟개의 높고 낮은 연봉으로 이루어진 규모있는 산이다. 북서쪽으로 경사가 완만하고 빼어난 경관을 이루며 산행코스가 험하지 않아 2~3시간 정도면 가련봉 정상에 오를 수 있다.
8개 암봉이 이룬 연꽃형 산세를 이루고 있다. 두륜산은 가련봉(703m)을 비롯해 두륜봉(630m), 고계봉(638m), 노승봉(능허대 685m), 도솔봉(672m), 혈망봉(379m), 향로 봉(469m), 연화봉(613m)의 8개 봉우리로 능선을 이루었다. 이 여덟 봉우리는 둥근 원형으로, 마치 거인이 남해를 향해 오른손을 모아 든 듯한 형상이다.오른 손을 가지런히 펴고 엄지를 집게손가락에 붙인 다음 손가락 끝을 당겨 오목하게 물을 받을 듯 만들면 영락없는 두륜산의 지세가 된다.
두륜산은 대둔산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산이란 뜻의 '듬'에 크다는 뜻의 관형어 '한'이 붙어 한듬→대듬→대둔으로 변한 것으로 풀이한다. 때문에 과거 대둔사는 한듬절로 불리기도 했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두륜산은 중국 곤륜산의 '륜'과 백두산의 '두'자를 따서 두륜산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두륜산으로 변했다고 한다.
두륜산행은 여러 고승 대덕의 발자취를 뒤따라 적당히 땀을 흘리며 산봉을 오르면 되는 산행이라기보다는 유유자적한 소요에 가까운 행위가 된다. 사계절 언제 찾아도 좋은 산이기도 하다. 이른 봄은 지천으로 핀 동백, 여름에는 울창한 수림과 맑은 계류가 가을에는 찬란한 단풍이 길손을 맞아준다.
관광안내
교통/입장료
- 버스 이용 : 광주까지 가서 10~2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해남행 버스를 갈아타면 된다.(96Km, 2시간 소요). 해남 버스 터미널에서 대흥사 입구행 군내버스가 06:30부터 20:00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12Km, 15분 소요).
- 자가용 이용 : 해남읍에서 완도 방면 13번 국도를 따라간다. 해남 읍내를 벗어나면 왼쪽으로 대흥사 가는 806번 지방도로가 나온다. 이 지방도로로 가다 보면 신기리에서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 806번 지방도로로 계속 가면 대흥사 집단시설지구와 주차장이 있다.
문화재관람료
- 어 른 : 2500원 - 청소년/군인 : 1500원 - 어 린 이 : 1000원
대흥사는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에 위치한 유서깊은 사찰로 신라 진흥왕 5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 문화재 자료 제 78호 지정되어 있는 대흥사는 13대종사 와 13대강사 를 배출한 우리나라 31본산의 하나로 조선후기 불교 문화권의 산실이었다.
지금은 대한 불교 조계종 제22교구본사로 해남 · 목포 · 영암 · 무안 · 신안 · 진도 · 완도 등 8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한다. 백두산의 영맥이 남으로 뻗어내려 소백산맥 자락에 지리산을 만들더니 영암의 월출산을 지나 한반도의 최남단에 이르러서 융기한 두륜산 중턱에 이 가람이 있다.
<참고문헌> - 해남(한반도의 땅끝을 찾아서), 해남군 문화공보실, 해남군, 1996. - 대둔사의 역사와 문화, 황도훈, 해남문화원, 1998. - 대흥사(대둔사), 목정배, 이응묵, 이완우, 주식회사 대원사, 1994. - 한반도의 최남단 땅끝 관광해남, 해남군청 문화관광과, 해남군, 2001.
대흥사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는 『죽미기(竹迷記)』·『만일암고기(挽日庵古記)』·『북암기(北庵記)』등이 있다. 이러한 옛 기록들을 종합하여 쓴 책이『대둔사지』로 수룡(袖龍)이성, 초의(草衣)의순이 편집하고 기어(騎魚)자홍, 호의(縞衣)시오가 교정한 것으로 1823년(순조23)에 간행되었다.
이러한 옛 자료를 토대로 대흥사의 창건과 관련한 기록을 살펴보면 『만일암고기』에는 백제구이신왕 7년(426)에 신라의 정관존자가 만일암을 창건하고 그후 백제무령왕 8년(508)에 이름을 전하지 않은 선행비구가 중건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고기(古記)에는 통일신라시대인 헌강왕1년(875)에 도선국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500개의 사찰을 짓는 게 좋겠다고 하여 지은 절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흥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대흥사의 창건에 관한 여러 기록이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대흥사를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보고있다.
신라말의 창건이후 대흥사가 고려시대에 어떠한 변천을 해왔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리고 조선시대 전기까지도 사찰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점으로 보아 당시에는 그다지 번성하지 않은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흥사가 역사상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조선후기에 와서이다. 서산대사의 유품을 이곳 대흥사에 봉안하게 되고 서산대사를 기리는 표충사(表忠祠)를 세우면서 절은 크게 번창한다. 대흥사는 넓은 산간분지에 크게 네 곳으로 나누어져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원, 중앙에 넓게 자리한 천불전 일원, 서산대사의 사당과 유물관이 있는 표충사 일원, 그리고 중심사역 뒷편에 있는 대광명전 일원이다.
이중 표충사와 대광명전 일원은 대흥사와 관련이 있는 스님들에 의해 후대에 조성되어 별원(別院)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흥사의 옛 모습은 침계루 앞 계곡을 중심으로 남원과 북원 일대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고있다.
절이 처음에 어느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지금과 같은 모습은 조선시대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며 「대둔사지」에서는 「죽미기」에 대흥사가 해탈문을 지나는 시냇물을 중심으로 남원과 북원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인용하고 있어 초창기 가람의 모습을 추정해볼 수 있다.
대흥사는 피안교를 건너면서 본격적인 절의 경내로 진입한다. 서편제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유선여관을 지나 속세와 사찰의 경계라고 하는 ‘피안교’를 건너면 속세에 찌든 속인들은 잠시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된다.
울창한 숲 사이로 마음을 가다듬고 걷다보면 일주문을 바로 앞에 두고 한쌍의 장승이 서있다. 천하대장군과 금귀대장으로 보통 절을 수호하는 수호신으로 사찰 앞에 서있는 장승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50여기의 부도와 14기의 탑비가 모셔져 있는 부도전이 나온다. 부도전은 스님들의 집단묘소로 이곳에는 임란이후 대흥사를 중흥시킨 청허당(서산대사)을 비롯하여 풍담, 취여, 월저, 설봉, 연담, 초의 등 대흥사의 불법을 크게 일으킨 대종사 스님들과 만해, 연해, 영파, 운담, 벽담, 완호, 상월 등의 강사스님, 기타 고승대덕의 스님들이 모셔져 있다. 대개 조선 중·후기에 대흥사에서 활약했던 스님들이다. 이곳의 부도들 중에 단연 으뜸은 서산대사 부도로 정교한 조각이 일품이며 현재 도 유형문화재 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학교를 지나 약간 오르면 해탈문이 나온다. 해탈문에는 사천왕상이 없다. 일설에 의하면 대흥사에 사천왕상이 없는 이유는 북으로는 영암 월출산, 남으로는 송지 달마산, 동으로는 장흥 천관산, 서로는 화산 선은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취하고 있어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지 않다고 한다.
대흥사의 대웅보전은 대흥사의 중심 건물로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놓여 있는 심진교를 건너 침계루를 지나면 나타난다.
침계루를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현판에 붙어있는 글씨다. 용틀임을 하고 있는 듯한 이 서체는 한눈에 봐도 명필임을 알 수 있다. 대웅보전의 힘찬 서체와 함께 조선 정조시대의 명필인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다.
대웅보전의 현판글씨가 남게된 데에는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추사 김정희는 1840년(헌종6) 제주도로 귀양가는 길에 이곳 대흥사에 기거하고 있는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 대흥사에 들렀다. 그리고 이광사가 써준 대웅전 현판을 보고 조선의 필체를 망가뜨리는 글씨라며 직접 자신이 대웅보전의 현판을 써주고 갔다.
그후 추사는 유배지에서 깨우침을 얻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렀다. 그리고 이광사의 현판 글씨가 아직도 보관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자신의 아집을 사과 드리며 다시 내다 걸게 하였다. 그리고 대신 대웅전 왼편 백설당에 ‘무량수각(無量壽閣)’의 현판을 써주었다 한다.
당시 이곳 대흥사에는 추사와 절친하였던 초의선사가 기거하고 있어 추사 김정희와의 교류가 이어지며 이웃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다산 정약용과도 교류 관계가 이어져 대흥사를 중심으로 한 이들 석학들의 차와 학문·시·서화 등 예술의 교류는 한때 새로운 문화의 꽃을 피우게 한다.
대웅보전 안에는 목조로 된 석가삼존불과 16라한이 봉안되어 있고 삼존불 뒤에는 영산, 약사, 미타의 삼불회도 후불탱화가 그려져 있다.
대웅보전 오른편으로 가면 응진전 앞에 신라말에 조성된 삼층석탑(보물 320호)이 있다. 대흥사에 있는 유물 중 가장 앞선 시기의 유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산라대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다.
대웅보전을 나오면 맨 먼저 마주치는 것이 천불전이다. 한마리의 용이 천장에서 날아가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가허루를 들어서면 옥으로 만든 천개의 불상이 있는 천불전이 나온다. 남원 중심곽의 가장 안정된 곳에 자리잡은 법당으로 대둔사지에는 이 건물이 1811년(순조11년)에 소실된 뒤 2년 후에 완호스님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완호는 초의대사의 전법(傳法)스승으로서 천불전 중건에 주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 천불전의 편액도 대웅보전을 쓴 이광사의 글씨이며 법당 앞문에 치장한 국화문양, 연화문, 무궁화 문양의 꽃창살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어 채색된 문양의 화려함을 자랑한다.
천불전의 전설
천불전에 봉안된 옥으로 만든 천불은 조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이 옥불은 처음 완호스님 등이 천불전을 짓고 경주에서 생산되는 옥석으로 열사람이 6년간에 걸쳐 조성했다 한다.
불상이 완성되자 옥불을 3척의 배에 싣고 경주에서 울산을 거쳐 부산 앞 바다를 지나 대흥사로 향했다. 그러나 한 척의 배가 울산진(蔚山津)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결국 닿은 곳이 일본의 장기현(長崎縣)이었다. 일인들은 옥불을 보고 기쁜 마음에 서둘러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려 했다.
그러나 일인들의 꿈에 이 불상들이 나타나 우리들은 지금 조선국 해남의 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하면 안된다고 말하였다. 일인들은 이 꿈을 꾸고 나서 옥불들을 거두어 배에 실어 해남 대흥사로 보냈으며 일본을 거쳐 온 불상들은 불상을 분칠할 때 밑바닥에 <日> 자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무염지(無染池)를 지나면 서산대사를 모신 표충사가 나온다. 표충사는 오늘날 대흥사의 사격(寺格)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건물로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국란극복에 공훈을 세운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과 처영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호국정신이 서린 유서 깊은 건물이다.
서산대사는 입적하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죽은 뒤에 의발(衣鉢)을 두륜산 대흥사에 전하여 제삿날에 재를 받게 하라고 부탁한다. 그는 두륜산은 모통이에 치우쳐 있어 명산은 아니지만 기이한 화초가 언제나 아름답고 옷감과 곡식이 넉넉한 곳이며 왕의 교화가 제대로 미치기 힘든 먼 곳이지만 어리석고 아둔한 풍속을 깨우칠 수 있으며 처영 등 여러 제자들이 남방에 있으므로 종통(宗統)이 돌아갈 곳은 바로 대흥사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제자들은 삼년상을 치른 후 서산대사의 유물을 챙겨 대흥사로 모여들었다. 먼저 영잠(靈岑)대사가 1607년(선조40) 스승의 유품인 금의(錦衣)와 벽옥발(碧玉鉢)등을 절로 가지고 왔으며 이듬해 기일(忌日)에는 이 유물들을 받들어 놓고 재를 올렸다. 이어 진영을 모시는 영각을 짓고 1631(인조9)에는 당대의 명문장가 장유(張維)가 지은 서산대사의 비문을 새겨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1655년(효종6)에 묘향산에 있던 서산대사의 발우와 신발, 가사 등을 절로 가져 왔다고 한다.
이렇게 서산대사의 유품과 진영이 봉안되고 비석이 세워지면서 절은 서산의 문도들이 모이는 중심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표충사는 1669년(현종10)에 건립되었다. 1788년(정조12)에 표충사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이듬해 사당과 영정이 이루어지자 정조는 사액을 내리고 제문을 지어 보냈다. 이리하여 대흥사는 조정으로부터 면세 혜택과 더불어 제수도 공급받았으며 서원사찰로서 인근 유생들의 침탈도 모면할 수 있게되어 인근 선암사나 송광사와 당당하게 사격을 겨룰 만큼 그 지위가 향상되었다.
표충사 편액은 정조대왕의 친필이다. 표충사와 어서각 현판이 함께 걸린 본전에는 서산, 사명, 처영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옆의 조사전에는 대흥사 역대 고승들의 영정이 있으며 표충비각에는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현재 서선대사의 유물인 금란가사, 발우 등의 유품과 정조임금이 하사한 금병풍등 유물들이 표충사 아래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서산대사
서산대사(1519~1604)는 호가 청허이며 법명이 휴정이고 속성은 최씨이다. 오랫동안 묘향산에 살았으므로 사람들이 서산대사라고 불렀다. 서산대사는 안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는데 고을 군수의 도움으로 한양에 올라와 공부하였다.
15살 때 진사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여행길에 올랐는데 지리산에서 승인장로를 만나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일선화상으로부터 계를 받고 부용 영관에게서 법을 배웠다. 이후 오대산과 금강산 등의 명산을 구름처럼 떠돌다가 33세 때에 문정왕후와 보우선사에 의하여 부활된 승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36세에 판교종사와 판선종사가 되었고 이어서 선교양종판사라는 최고의 승직에 까지 올라갔으나 곧 이를 버리고 금강산 두륜산 묘향산 등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옥에 갇혔으나 결백이 밝혀져 선조의 명으로 석방되었다. 3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이 패퇴하고 임금마저 의주로 피난하였는데, 73세의 휴정은 선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팔도도총섭이 되어 전국의 모든 승려들이 총궐기하여 싸움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서산대사 문도가 중심이 되어 전국 각지에서 의승군이 일어나니 그 수가 5000여명이 되었다. 이듬해 승군은 휴정의 지휘로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다. 왕이 환도한 후에는 늙었다는 핑계로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총섭의 일을 부탁하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는 스님에게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 大禪師 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존호를 드렸다. 1604년(선조 37)에 세속 나이 85세로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하니 보현사와 안심사 등에 부도를 세웠고, 스님의 유촉에 따라 금란가사와 발우 등은 부도와 함께 대흥사에 봉안된다.
서산대사의 제자 중 유정, 언기, 태능, 일선 네 사람이 유명하며 서산 문하의 4대파라 일컫는다.
성보박물관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승병(僧兵)을 모집하여 왜적을 물리친 공로로 사액사당을 대흥사 경내에 건립했던 것이 표충사이다. 이와 함께 1978년에는 서산대사유물관이 건립돼 선조, 정조대왕의 하사품(下賜品)과 대사의 유언에 따라 대흥사에 간직해 오던 여러 유물들이 보존 전시되고 있다.
서산대사 유물관에는 서산대사가 사용하던 바리대, 칠보염주, 신발을 비롯해 승병활동때 사용한 승군단 표지와 소라나팔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서산대사의 교지와 대사의 친필이 기록된 서적, 대사가 남긴 금 병풍등을 볼 수 있다. 그외에도 보물 제88호로 지정되어 있는 탑산사동종(塔山寺銅鍾)이 있는데 고려시대 후기양식으로 용뉴에서 부터 상대 유곽 하대 및 당하에 이르기까지 그 조식방법이 매우 섬세한 종(鍾)이다. 용뉴는 정교하게 처리되어 박력있는 용두(龍頭)를 갖추고 있고 앞으로 뻗은 왼발에는 여의주를, 2개의 파염무늬는 용통을 감싸고 있다.
이 종은 원래 탑산사(塔山寺)에 있던 종이나 해남읍의 일본 헌병수비대와 만일암 등을 전전하다가 현재 대흥사에 보관하게 되었다.
유물이 소장하고 있는 또 하나의 태극무늬 동종은 높이 36cm, 하구경 28.5cm로 소형이긴 하지만 조선시대 전형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종에서 보인 태극무늬 괘의 순서는 국기와는 달리 역순으로 있어 독특함을 보인다. 제작시기는 조선시대 말기로 추정하고 있다.
대흥사는 13대종사와 13대강사의 뛰어난 스님들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모두 서산대사의 문도와 법손이다.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어받은 문도 들은 크게 4파로 나누어진다. 송운 유정계와 편양 언기계, 소요 태능계, 정관 일선계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대흥사에 있었던 13명의 대종사와 13명의 대강사는 법손이 가장 번성했던 편양 언기계와 소요 태능계 승려들이었다.
표충사 약간 뒷편에 있는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대광명전(동국선원)이다. 이곳 대광명전 일원에서 초의선사가 머물면서 다선일매의 선(禪) 생활을 하며 쇠미해 가던 대둔사를 다시 중흥케 했다 한다. 중심법전인 대광명전(비로전)을 1841년에 초의스님이 짓고 단청했다는 상량문이 발견되기도 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두륜산 노승봉 아래에는 마애미륵불이 조성되어 있는 북미륵암과 남미륵암이 있다. 하나는 북쪽에 있다하여 북미륵, 다른 하나는 남쪽에 있다하여 남미륵이라 부른다. 이 두 암자는 창건에 관한 기록이 없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대둔사지」에는 1754년에 온곡영탁(溫谷永鐸)대사가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서는 북미륵암이 북암으로 불려졌음을 알 수 있으며 근세에 염담 유일(蓮潭有一), 벽담행인(碧潭幸仁), 아암혜장(兒庵惠藏)같은 고승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북미륵암은 용화전, 요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용화전은 마애여래좌상을 봉안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이곳에 신중탱화와 산신탱화와 1987년에 조성한 중종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대둔사지」에는 ‘두륜봉 아래 남미륵암에 있는 미륵불은 전실(前室)이 없어 이끼가 끼어 있다’라는 남미륵암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실제로 남미륵암은 지금도 전실이 없이 밖으로 노출되어 있어 바위틈새로 난 이끼를 볼 수가 있다.
북미륵암이 볼록하게 도드라져 올라오게 하는 양각의 조각수법임에 비해 남미륵암은 평평한 곳에 선을 이용해 그린 음각의 조각형식을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두 미륵은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조성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북미륵암 조성전설
구전에 의하면 음각의 남미륵은 남자가 조성했고 양각의 북미륵은 여자가 조성했다 하며 이들은 모두 제석천이 하강하여 남북에 각각 조성한 것으로 음양각으로 한 것은 음양의 조화를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북미륵은 완성되어 현재 보물 제 48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남미륵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채 남미륵암 터에는 초라한 전각만 남아있다.
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은 높이가 4.2m에 달하는 마애불로 마애불의 얼굴과 각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반기인 11세기 무렵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북미륵암과 남미륵암은 조성과 관련한 전설이 내려온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에 하늘에서 죄를 짓고 쫏겨 난 천동과 천녀가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다시 하늘에 다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하루만에 바위에다 불상을 조각해야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하루만에 불상을 조각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해가 지지 못하도록 천년수 나무에다 해를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천동은 남쪽 바위에다 입상의 불상을 조각하였고 천녀는 북쪽 바위에 좌상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그런데 천녀는 앉아있는 좌상의 불상을 조각하였기 때문에 입상의 모습을 조각한 천동보다 먼저 조각할 수 있었다.
불상의 조각을 다 마친 천녀는 먼저 하늘에 올라가고 싶은 욕심이 생겨 그만 해를 매달아 놓은 끈을 잘라 버렸다. 해가 지자 천동은 더 이상 불상을 조각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하늘에도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는 얘기다.
북암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도중에 천년수와 함께 만일암터가 나온다. 만일암터에는 오층석탑을 비롯하여 석등부재들이 흩어져 있으며 5.4m의 탑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만일암의 만일(挽日)은 해를 잡아맨다는 뜻으로 북미륵과 남미륵 조성전설과 관련하여 천년수에 해를 매달았다는 이야기와의 연관성을 말해준다.
만일암은 대흥사의 첫 터라고도 말한다. 대흥사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만일암고기」에는 백제 구이신왕 7년(426)에 신라정관존자가 만일암을 창건하고, 백제 무령왕 8년(508)에 이름을 정하지 않은 선행비구가 중건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만일암의 역사가 매우 오래됨을 알려주고 있다.
만일암에서는 만화원오(萬化圓悟), 연해공열(燕海廣悅), 금하우한(錦河優閒), 금봉희영(禽峰僖永), 백화찬영(白花贊英), 지월정희(智月鼎熙), 응성민훈(應星旻訓) 등의 여러 고승들이 머물렀다.
암자터 주변에는 오층석탑, 연자맷돌, 석등, 샘터 등이 남아있다.『만일암지』에는 7층 석탑이 있으며 그 탑은 아육왕이 세웠기 때문에 아육왕탑 이라고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5층의 석탑은 석등의 옥개석을 상륜부에 올려놓은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정관존자가 만일암을 창건할 때 암자보다 탑을 먼저 세웠다고 한다. 탑을 완성한 후 암자를 지으려니까 해가 서산 넘어로 기울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해가지지 못하게 탑에 묶어두고 암자 세우는 작업을 계속했는데 암자를 완공한 후에 암자명을 잡을 만(挽)자와 해 일(日)을 써서 만일암(挽日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아주 옛날 옥황상제가 사는 천상에 천동과 천녀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어느 날 천상의 계율을 어겨 하늘에서 쫓겨나게 되는 무서운 벌을 받게 되었다.
이들이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그것은 하루 만에 바위에다 불상을 조각해야 하는 일이었다.
지상으로 쫓겨난 천동과 천녀는 하루 만에 불상을 조각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해가 지지 못하도록 천년수 나무에다 끈으로 해를 매달아 놓고 천녀는 북쪽바위인 북암에 좌상의 불상을 천동은 남쪽바위인 남암에 입상의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천녀는 앉은 모습의 미륵불을 조각하였기 때문에 서있는 모습의 미륵불을 조각하는 천동보다 먼저 불상을 조각하였다.
미륵불을 완성해놓고 한참을 기다려도 완성하지 못하는 천동을 기다리다 못한 천녀는 빨리 올라가고 싶은 욕심으로 그만 해를 매달아 놓은 끈을 자라버리고 혼자서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이로 인해 천동은 영원히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이 미륵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수목이다.
북미륵암의 조성시기가 고려시대 전반기인 11세기경이며 여러 구전과 수목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천년수의 수령은 1,200 ~ 1,500년인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에서 700m가량 정상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 조선후기 대표적 선승가운데 한 사람이며 우리나라의 다성(茶聖)으로 추앙 받는 초의선사가 그의 ‘다선일여(茶禪一如)’사상을 생활화하기 위해 꾸민 다원(茶苑)인 일지암이 나온다.
초의선사는 일지암을 39세 때인 1824년(순조24)에 중건하였으며 1866년(고종3) 81세로 입적할 때까지 40여년 간 이곳에서 독처지관(獨處止觀)을 한 유서 깊은 암자이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유명한「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펴냈고, 선다일여의 가풍을 드날리며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와 같은 석학, 예인들과 교류하며 쇠퇴해 가는 차문화의 중흥을 도모해 일지암은 한국차의 성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이곳에는 옛 정취가 그대로 살아 숨쉬는 차나무가 심어져 있고 선다를 음미했던 다정(茶亭)이 있으며 집 뒤의 바위틈에서 솟는 물이 나무대롱에 연결된 돌물확(수조)에 담겨져 흐른다. 이 다천(茶泉)과 돌물확, 차를 끓이던 다조(돌부엌), 그리고 위아래의 연못과 좌선석(坐禪石)등은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일지암’ 편액이 붙어 있는 정자는 1980년 한국다인회 회원들이 다도의 중흥조 초의가 기거했던 일지암을 기념하기 위해 복원하여 놓은 것이다.
이 초정(草亭)은 가운데에 방 한칸을 두고 사면에 툇마루를 두른 4평 규모의 띠집이다.
그리고 일지암 본당은 윗 연못에 평석을 쌓아올린 4개의 돌기둥이 누마루를 받치게 하여 독특한 운치를 자아내게 한다.
연못에 잉어가 한가로이 노니고 누마루에서 구름 낀 산경을 멀리 내려다보는 다회(茶會)와 선유(仙遊)는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음미하게 할만하다. 그래서 초의의 시(詩)·선(禪)·다(茶)의 경지가 한데 어우러진 차 문화의 산실이 됐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초정과 연못 사이에 축조된 석축에는 ‘다감(茶龕)’이라 새겨진 평평한 면석이 끼여 있고 그 앞에는 이보다 넓은 판석이 하나 놓여 있다. 이 돌 평상은 차를 마시며 선을 하던 좌선석으로 보기도 한다.
초의선사는 대흥사의 13대종사로 일찍이 이곳에 기거하며 다도를 중흥시킨다. 그는「동다송」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를 저술하고 차를 재배하여 널리 펴는 등 다도의 이론적인 면이나 실제적인 면을 크게 정리하고 닦음으로서 다도의 중흥조로 추앙 받고 있다.
당시 대흥사 가까이에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유명한 다인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초의와 차를 통하여 더욱 두텁게 교유하였다. 다산은 이곳과 가까운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대흥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추사 또한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 까닭에 대흥사와의 관계를 맺게되고 초의와도 남다른 친교를 가졌다. 이런 까닭으로 19세기초 대흥사를 중심으로 한 다도는 다시 한번 중흥을 이루게 된다.
또한 소치 허련(허유)이 이곳에서 초의선사의 그림공부 지도를 받았고 초의선사를 통해 추사 김정희라는 스승을 만나게 된 곳으로 당시 조선후기 일지암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학문과 예술의 활동은 이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곳은 조선말의 대 석학들이라 할 수 있는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 그리고 초의선사가 교류한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때문에 대흥사 일지암은 우리나라 다도의 요람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매년 음력 8월1일 초의의 열반일을 기해 추모행사인 초의제를 거행하고 있다.
초의선사
초의선사(1786~1866)는 무안출신으로 속가에서 성은 장씨였고 법명은 의순(意恂)이며 초의(草衣)는 호이다. 대흥사의 13대 종사의 한 사람인 대선사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시켜 다성(茶聖)으로 불린다.
강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진 것을 지나가던 스님이 건져 준 일이 인연이 되어 6세 때 나주 운흥사에서 출가했다. 그 후 각지로 다니며 운수행각 하다가 대흥사 10대강사인 완호윤우(琓虎 尹佑)스님의 법을 받고 초의라는 법호를 얻었다.
초의선사는 불문에 몸담고 있었으나 그 테두리에 그치지 않고 유학, 도교 등 당대의 여러 지식을 섭렵하며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같은 학자나 사대부들과 폭넓게 사귀었고 범패와 서예, 시, 문장에도 능했다.
그는 조용한 곳을 찾아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만이 선이 아니었으며 현실의 일상 생활과 선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차(茶)와 선(禪)을 하나로 보아 ‘동다송’에서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초의선사는 차 한잔을 마시는 데서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고 하였으며 차는 그 성품에 삿됨이 없어서 어떠한 욕심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것이며 때묻지 않은 본래의 원천과 같은 것이라 하여 ‘무착바라밀(無着波羅蜜)’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가 지은 ‘동다송’은 동다(東茶) 즉 우리나라 차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는 것으로 차의 효능과 산지에 따른 품질, 만들고 마시는 법 등을 적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관한 책이다.
차는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주로 불가의 학승들을 중심으로 발달했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과 영남지방은 차나무가 자라는데 풍토가 알맞았으므로 우리나라 차의 본고장이 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와 불교가 밀려나면서 다도도 쇠퇴하여 겨우 명맥만 이어지고 있었다.
초의선사는 차와 선이 한가지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을 바탕으로 다도의 이론을 정리하고 차를 만들어 널리 폄으로써 전래의 차 문화를 중흥시켰다. 24세 연상이어서 스승으로 모셨던 정약용과 동갑으로 승속과 유불의 경계를 넘어 누구보다도 친밀한 정을 나누었던 김정희와의 사귐에서도 학문과 예술, 차의 향기가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초의선사는 귀양살이하는 김정희를 만나러 제주도를 다녀오기도 했을 만큼 서로 터놓고 도탑게 지냈다. 김정희가 말년에 초의선사가 보낸 차를 받고 써 보낸 걸작 ‘명선(茗禪)’이 대흥사에 전해온다.
초의선사는 중년이후 큰절의 번거로움을 피해 일지암을 짓고 40여년간 은거하며 차와 더불어 지관(止觀)에 전념하다가 81세로 입적했다.
진불암은 서산대사의 영정이 모셔진 표충사를 옆으로 계곡을 따라 약 1km 가량 올라가는 두륜산 중턱에 자리잡은 대흥사의 암자이다. 진불암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수백년 된 은행나무가 암자의 역사를 묵묵히 말해주며 정성스레 쌓아올린 돌탑 하나가 찾는 이의 눈길을 끈다.
진불암은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지 못한다.「대둔사지」에는 1630년(인조8)에 수월 극현(水月克玄)대사와 덕호(德浩)가 함께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보다 훨씬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693년(숙종19)에 이홍록(李弘錄)이 덕탄(德坦)과 함께 중건했고, 1750년(영조26)에는 북미륵암을 중수한바 있는 온곡대사(溫谷大師)와 함께 우일(宇一)장로가 진불암을 중수했다. 또한 채미대사(採薇大師)의 글에는 영곡(靈谷) · 영파(影波) · 만화(萬化) · 운담(雲潭) · 아암(兒庵)등의 승려가 이 암자에 거쳐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진불암은 조선중기 이후 여러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현재 진불암은 응진당, 향적당,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응진당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안에는 불상으로 석가부처님과 28나한상, 문관상이 있다. 또한 불화로는 삼세후불탱화를 비롯해서 칠성탱화 · 신중탱화 · 산신탱화가 있다.
한편「대둔사지」에는 고진불암과 16나한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진불암은 현재의 진불암 근처에 있다. 옛날 기록에 말하기를 강진의 백도방(白道坊)에 서씨라는 어부가 있었는데 하루는 바다 한 가운데서 고기를 잡다가 서쪽 나라의 배를 만났다고 한다. 배 안에는 16대아라한상이 실려 있어 ‘그것을 두륜산방(頭輪山房)에 봉안하고 편액을 진불(眞佛)이라 한다’ 했다 한다. 진불은 곧 응진(應眞)으로서 나한을 뜻하는 것이다. 그 후에 정사(精舍)를 산방(山房)곁에 건립하여 이름을 진불이라 했으며 또 달리 고진불(古眞佛)이라 했다. 1740년에 위일장로(位一長老)가 중건했으며 또 1791년에 정능선로(定能禪老)가 중건했으니 전후 다섯번을 중건했다.」
고승들 부도(浮屠) 한자리에
부도(浮屠)는 큰 스님의 사리(舍利)나 유골(遺骨)을 모신 탑이며 그분의 행적(行跡)을 살필 수 있어 당시의 사회상(社會相)이나 역사적 사실까지도 알아낼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보통사람들은 한문에 밝지 않아 알아보기 힘들고 재미없어 지나치거나 겉 모습만 훑어 보기 십상이다.
이곳 대흥사 부도전(大興寺 浮屠殿)에는 호국의병대사인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그의 문도들 중 초의 · 호암 · 상월 등 13분의 대종사(大宗師)와 만화 · 원호 · 연예 · 광열 등 13분의 대강사를 위시하여 그 외 고승들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대흥사 입구 일주문을(一住門)을 막 지나면 오른편을 부도 54기와 탑비 27기가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17세기 말에서 19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대흥사 부도전에 많은 부도가 자리잡은 것은 그 만큼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후기(朝鮮時代 後期) 고승들을 숭상(崇尙)하는 세력과 절 분위기가 일치한 때문이다.
이곳은 1974년 12월 26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석조물) 제57호로 지정된 서산대사 부도가 위치하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서산대사 부도(浮屠)는 총고(總高) 260cm로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는데 서산대사 비 보다 앞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입적(入寂)한 후인 1631년(宣祖)에 세워진 이 부도는 청허당 서산대사비(西山大師碑)의 뒷편에서 약 5m 떨어져 있는데 팔각당식(八角堂式) 부도의 계통을 이은 재미있는 작품이다.
상륜부(相輪部) 받침에는 용의 머리(龍頭)를 새기었고 옥개석팔각(屋蓋石八角)의 귀꽃 위치에는 용(龍) 여섯마리, 쥐 한마리를 부각(浮刻) 하였다. 그리고 지반(地盤)위의 하대석 받침은 가늘고 긴 안상(眼象)과 복연(伏蓮)의 연화(蓮花)를 새기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 조각수법은 장흥보림사(長興寶林寺)의 서부도(西浮屠)(보물 156호 고려시대)와 같은 계통의 작품이다.
이 부도는 표현양식(表現樣式)이 매우 사실적이며 조각기법에 있어 이곳 부도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대흥사 부도전은 40여년전 영국 왕립 고고학회 회원 1백 20여명이 찾아와 역사적 가치와 예술성에 탄복했을 정도의 뛰어남을 자랑하지만 부도와 탑비의 연대별 배치나 성격별 분류가 안돼 아쉽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곳의 탑비(塔碑)들은 대부분 부도의 주인 공에 해당되며 그 외에 이곳에 시주했거나 다산 정약용등 도움을 준 사람들의 비(碑)가 주를 이룬 곳이다. 이곳 탑비 중에서 대흥사 창건연유(創建緣由)와 내력을 소상하게 기록한 대흥사 사적비가 자리하고 있는데 조각의 정교함과 크기로 이름나 있다.
이 곳의 탑비(塔碑)들은 대부분 부도의 주인 공에 해당되며 그 외에 이곳에 시주했거나 다산 정약용등 도움을 준 사람들의 비(碑)가 주를 이룬 곳이다. 이곳 탑비 중에서 대흥사 창건연유(創建緣由)와 내력을 소상하게 기록한 대흥사 사적비가 자리하고 있는데 조각의 정교함과 크기로 이름나 있다.
대흥사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1347호)
부도는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모셔 놓은 일종의 무덤이다.
이 부도는 임진왜란 당시에 승병을 이끌고 왜군을 무찌르는데 앞장 선 서산대사의 부도로 현재 대흥사 부도밭에 자리하고 있다. 탑에는 ‘청허당’이라는 당호가 뚜렷이 남아있어 이 부도의 주인공이 서산대사임을 확실히 밝혀준다. 전체적으로 아주 세련된 형태로 한눈에 보더라도 매우 정성을 다하여 만들어 졌음을 알 수 있다. 건립연대는 청허당의 건립이 조선 인조 25년(1647) 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 시기를 전후로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전체의 높이는 2.6m로 1974년 12월 26일에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남도의 아름다운 사계를 배경으로 소리꾼 일가의 애달픈 삶과 득음(得音)에 대한 집념을 그린 영화 서편제가 우리나라 영화사상 2백만명의 관객동원이라는 성공을 거두면서 서편제의 촬영지 또한 많은 관심을 모았다. 해남은 여러 곳에서 서편제 영화가 촬영되었는데 그중 가장 많은 촬영을 하였던 곳이 대흥사다.
대흥사는 소리고개를 비롯하여 유선여관에서 서편제의 주요장면이 비중 있게 촬영되었다. 두륜산 중턱 해발 500m 지점의 공터에 위치한 곳에 소리재에 오픈 셋트가 지어지고 이곳에서 수려한 두륜산을 배경으로 소리를 하는 송화(오정해역)의 애절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한 유선여관에서는 대가집 잔치에서 유봉(김명곤역)이 어사출도(춘향가)대목을 부르는 장면, 북치는 법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 등이 촬영되었다. 잔치집의 흥에 겹고 술렁이는 분위기가 이 촬영될 때 해남의 주민들이 직접 엑스트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유선여관은 예전부터 국악인들이 자주 모여 산공부를 하거나 소리판을 벌였던 해남 국악의 유서 깊은 곳으로도 의미가 깊다.
다도해를 한눈에 바라볼수 있는 곳, 한라산까지 보이는 멋진 경관, 국내 최장거리 케이블카, 일출과 일몰의 아름다움을 한자리에서 보실 수 있는곳! 땅끝 해남 두륜산 케이블카! 두륜산의 수려한 사계와 천연고목등 볼거리가 많은 곳!
두륜산 케이블카 안내
- 해발 638m 정상 - 선로길이 1600m - 승차인원 50명 - 운행속도 3.6m/초 - 소요시간 8분
운행시간
계절별
운행시간
비고
동절기
07:45 ~ 18:00
일출조망객(단체)은 미리 예약바랍니다.
하절기
07:30 ~ 19:00
요금안내
(단위 : 원, 왕복)
대인
소인(3~12세 미만)
대인 단체할인(30인이상)
8,000
5,000
7,000
※ 보다 나은 서비스를 위해 산책로와 전망대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함과 아울러 물가 인상요인이 발생해 부득이 하게 요금을 인상하게 된 점 널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저희 두륜산케이블카는 보다 나은 서비스로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