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두 남자
프랑스어 / 프랑스, 캐나다 / Alex Beaupain, Pierre Lapointe
열정에 지친 남자.
남자가 여느 때와 같이 퇴근 후 혼자서 자주 가는 식당에 들어갔을 때 식당 TV에서는 신인 가수 선발 프로그램인 슈퍼스타 K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출연자들은 심사위원들에게 자신의 가창력을 최대한 끌어내 보일 수 있도록 애드리브가 돋보이는 곡들을 절규하며 뜨겁게 뿜어내고 있었다. 내용은 대개 뜨거운 사랑의 다짐과 한 맺힌 사랑의 오열이었다. 그 주제에서 벗어난 곡들은 이미 예선에서 탈락한 듯하다. 식당의 손님들은 그 절규가 익숙한 듯 눈과 귀를 TV에 고정하고 있으면서도 음식들의 위치를 기억하는 듯 식탁을 안 보고도 젓가락은 정확히 그릇의 반찬을 집어 먹고 있었다. 모두 뛰어난 다중감각의 진화된 인간들이었다.
남자는 감각이 무딘 것인지 몇 번인가 젓가락의 헛발질을 하여 음식을 흘린 후에는 TV에서 눈을 떼어 귀로만 듣기로 했다. 그러자 우열을 가리기 힘든 출연자들의 불타는 목소리들이 어느새 한 사람의 가수처럼 각각 구분할 수 없게 되었고 같은 노래가 중복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남자는 그 반복하여 쥐어짜는 노래들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모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TV 소리를 끌 수도 줄일 수도 없이 무방비하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있자니 남자는 갑자기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매운 국물에 사래가 들어버려 얼굴이 빨개지면서 숨쉬기 조차 힘들어졌다. 공공의 공간에서 큰소리로 기침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뛰쳐나와 숨 가쁜 기침을 해댔다.
그때 마침 애인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남자는 전화를 받을 기분이 아니어서 받지 않았다. 만약 전화를 받았더라면 객관적이지 못한 이 남자의 분노를 알 길 없는 그녀와 분명 이유 없이 싸웠을 것이다. 남자는 식당을 나오며 우선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아니 과도하게 절규하는 이 뜨거운 도시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남자는 주차장에서 차를 꺼내어 집을 향해 운전하면서도 오늘따라 오디오는 켜지 않았다. 새삼 조용함이 그리워진 것일까. 한동안 차내의 고요를 즐기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 달콤한 고요는 오래가지 못했다. 애인에게서 또다시 전화가 왔다. 충분히 진화되지 않은 그의 가슴은 전화를 받을 수 없었고 몇 분 간격으로 전화벨이 울리자 그는 평소 좋아하는 곡으로 지정해 놓은 전화기의 벨소리마저 갑자기 지겨워졌고 나중에는 그 멜로디가 공포의 소음으로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메시지 알람음이 시작되었다.
남자는 메시지를 확인할 때마다 차를 갓길에 세워야 했다. 그녀의 메시지에는 화를 누르면서 쓴 것으로 느껴지는 문자들로 어제의 감상, 오늘의 의문, 내일의 계획에 대한 추궁 같은 것들로 가득했다. 그러면서 어제 데이트 때 찍었던 사진들을 줄지어 보내왔다. 그렇게 여러 장의 사진들을 단번에 보낼 때의 알람음은 마치 연속 발사되는 다연발 기관총 소리처럼 남자의 가슴을 벌집처럼 뚤어놓았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전화기를 끄고야 말았다.
문득 남자는 사회로부터 욕망과 열정을 강요당하는 현실이 피부에 와닿았고 그것을 감시하는 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위력이 두려워지자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차 안에서 혼자 운전하여 길을 가고 있지만 옆자리와 뒷자리에는 수많은 상식들이 동승해 있었다. 그는 곧 창문을 모두 열고 엑셀을 깊이 밟아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차창으로 들어오는 세찬 바람에 눌러앉아있던 상식들이 창밖으로 날아가 버리고 빠른 속력에 불필요한 상식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포와 슬픔에 얼룩진 그의 상기된 뺨은 아무도 없을 텅 빈 집이 벌써부터 사무치게 그리워지고 있었다.
Alex Beaupain / Je te supplie
Alex Beaupain & Camélia Jordana / Avant la Haine
최근 언론에서 성폭력에 관련된 기사들이 자주 나오고 폭력 남성의 사회적 계층의 상하를 막론한 광범위한 분포와 데이트 폭력, 근친 성폭력, 묻지 마 폭력 등 엽기 접인 시도와 방법 등, 이런 기사들을 보면 언젠가부터 남성들의 짐승적인 성적 욕구가 점점 광폭해지는 듯하여 새삼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이것을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 보면 어쩌면 문화흐름으로서의 유행? 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남성들의 성적 욕구가 유행한다는 것은 아니고 언론의 상업화에 의한 부작용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종이가 아닌 인터넷망이 뉴스의 기반이 된 이후 언론은 마치 광고처럼 한 줄의 카피와 사진만으로 시청을 유도하여야만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가 되었다. 그래서 좀 더 자극적인 내용의 기사들이 필요한 것이다. 넘치는 뉴스의 바다에서는 뜨겁고 감각적인 기사 만이 부상할 수 있는 것이다. 훈훈하고 푸근하며 부드러운 기사들은 결국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묻혀있는 것이다. 이렇게 날카로운 에지만 눈에 보이는 세상에는 반대로 가족의 해체로 인해 개인으로 살아가는 인류의 새롭게 형성된 생활 문화의 흐름 등은 중요한 이슈지만 자극적이지 못해서 떠오르지 않고 그 다양성은 점점 침잠되고 있다. 오직 오락적인 정치와 경제, 자극적으로 돌출되는 사회문제 만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리하여 이런 현상을 표현하는 말로서 ’ 세상이 점점 각박해져 간다 ‘, ’ 말세로 치닫고 있다 ‘라고들 한다. 고대로부터 지속되었던 이런 흐름을 인류의 진화과정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진화와 퇴화가 반복되는 역사일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최근 문화예술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정신적인 질의 깊이와는 관계없이 양적 시청률로 등급이 결정되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규모, 지나친 절규와 과장된 개성이 아니고서는 예술계에서도 존립하기 힘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원흉은 역시 거대 포털, 유튜브, 문어발 SNS, 글로벌 쇼핑몰 같은 것들이겠지. 그야말로 말세로군...
음악을 소개하려는데 서두가 지나치게 길어졌다. 여기 젊은 두 명의 닮은 남자 뮤지션이 있다.
캐나다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Pierre Lapointe(삐에르 라뿌앙뜨, 1981 캐나다 퀘벡)과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Alex Beaupain(알렉스 보팽, 1974, 프랑스 Besançon)이다. 이 둘은 뭔가 비슷한 표정과 분위기를 넘어서 음악의 감성이 매우 닮았다. 둘 다 피아노를 주로 다루고 있고 가창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으며 내성적이고 고독을 즐기는 듯한 조용함의 매력이 있다. 또한 모두 혼자 살고 있고 개인 음악뿐 아니라 영화의 음악에 참여하는 싱어송라이터들이다. 다만 삐에르 라뿌앙뜨는 동성애자여서 남자가 있고 알렉스 보팽은 연인이 있지만 상대인 9살 연상의 여성 소설가(Kéthévane Davrichewy)와는 이제 연인을 넘어 친구에 더 가까워진 이상적인 관계가 되었다.
이들의 사생활은 일반적이지 않은 것 같지만 어쩌면 개별 유목민의 시대인 지금에서는 특별하지 않은, 그래서 오히려 일반적인 남자 인류이다. 외로움은 공동체와 가족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외로움이 분열되고 승화되어 생긴 고독의 달콤함을 잘 알고 있는 이 남자들의 음악은 그래서 더욱 피부에 와닿는 현실의 이야기이다. 이 남자들이 고독을 어떻게 풀어가는지 들어보자.
Pierre Lapointe / Le mal de vivre
Pierre Lapointe & Clara Luciani / Qu'est-ce qu'on y peut ?
[앨범전곡듣기]
Alex Beaupain / Après moi le déluge
(2013년, 네 번째 앨범)
[앨범전곡듣기]
Pierre Lapointe / Paris Tristesse
(2014년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발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