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사랑 : 외디푸스 서사의 전유 – 운명에 휘둘리는 남성 주체의 신화에서, 여성 주체의 포용의 서사로>
이 연극에 무언가 더 보탠다는 것은 사족일 것이다. 순전히 내 개인적인 기록의 이유에서 남기는 것이며, 내용 스포가 포함되어 있으니 혹시 나중에라도 이 연극이나 영화를 보시려는 분은 이 부분은 감안하시기를. 3시간 30분이 넘는 긴 이야기다.
유언집행인 르벨이 쌍동이 남매 잔느와 시몽 앞으로 남겨진 둘의 어머니 나왈의 유언을 집행하는 것으로 극은 시작한다. 이미 5년 가까이 침묵하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두 쌍둥이 남매의 감정은 좋지 않다. 특히 아들 시몽의 엄마에 대한 불만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심하다. 간단한 재산 분배에 이은 유언에서 나왈은 침묵하는 자는 묘비를 가질 자격이 없다면서 자신은 진실에 대해 침묵했기에 무덤을 가질 수도 묘비에 이름을 새길 수도 없다고 한다. 그저 얼굴을 땅을 향해 묻으라고 하면서, 두 사람에게는 더 놀라운 비밀을 밝힌다. 두 사람의 아버지가 살아있는 것은 물론 (시몽의) 형이자 (잔느의) 오빠도 있다는 것, 그러니 그들을 찾아 각각 편지를 전해달라는 유언과 함께 편지를 남겨 놓았다. 잔느는 아버지에게, 시몽은 형에게. 유언의 내용을 들은 잔느와 시몽, 두 쌍둥이의 태도와 성격은 대조적이다. 잔느는 말없이 받아들이는 반면, 시몽은 극단적으로 반발한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이 두 사람의 성격과 모습에 그들 부모가 각각 그대로 투영되는 부분은 기억할 만하다.
이제 극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현실과 회상을 동시에 보여주며 과거의 이야기 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왈의 젊은(어린) 시절, 첫사랑 와합과의 사랑으로 결혼도 하기 전 아들을 잉태하지만, 난민인 와합은 죽임을 당하고 나왈의 아이는 낳자마자 고아원으로 보내지는 비극을 겪는다. 그때 아이의 손에 쥐어준 것이 와합의 선물인 삐에로 빨간 코. (나중에 이 코는 둘로 나뉜 깨진 거울 역할을 한다.)
나왈의 할머니 나지라는 여성들에게 대물림되는 비극의 원인이 여성들의 무지 때문이라고 여기는 듯 나왈에게 나가서 글과 셈을, 생각하는 법을 배우라는 당부를 한다. (어린 나왈의—정황상 10대 초반쯤 되었을까—임신, 그리고 독립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은 한편으로는 이러한 중동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마을을 떠났던 나왈은 할머니의 부탁대로 글과 셈을 배워 돌아와 할머니의 묘비에 이름을 새겨주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아이를 찾으러 길을 나선다. 그런 그녀 앞에 노래를 잘 하는 사루다라는 난민촌 여성이 나타나 글을 가르쳐 달라며 따라온다. 둘은 함께 동행하며 사루다는 결국 글을 다 배운다. 이 둘의 관계는 이 극이 중동지역의 열악한 여성 주체들의 위치에 대한 각성의 필요성과 성취를 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극의 중간 두 사람이 길게 나누는 대화는 이 극에서 유일하게 다소 지루하게 싶을 정도지만, 이런 면에서 보면 그 이유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아이를 찾아다니던 과정에 나왈은 민병대와 난민이 서로에 대한 증오심으로 서로를 죽고 죽이며 아이들을 납치하고, 부녀자들을 강간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난민촌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던 나왈은 민병대들이 버스에 탄 모든 사람들을 학살하고 현장에 불을 지르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이렇게 과거가 보여지는 과정 중간중간 엄마의 흔적과 아버지를 찾아다니는 잔느의 모습이 같이 연기되며 현재와 과거가 겹쳐진다.
버스 학살 이후 세월이 흘러 나왈과 사우다는 신문과 전단을 통해 서로에게 자행하는 학살의 부당함을 알리러 다니면서 양측 모두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 있다. 그러던 중 한 민병대에게 붙잡힌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사우다가 그를 살해하게 되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사실 사우다의 증오는 단지 그 한 명의 민병대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이들, 부녀자들 가릴 것 없이 학살하고 강간을 일삼는 민병대들를 직접 목격하며 쌓인 그녀의 증오심은 사우다로 하여금 글 대신 총을 들고 학살하는 존재로 변하도록 만들었으며, 나왈은 그런 그녀를 막을 수 없다. 결국 나왈은 이런 증오의 되풀이를 막는 길은 민병대장을 없애는 길이라 생각하고 위장 잠입하여 실행에 옮긴 후 포로로 잡혀 감옥에 구금된다. 그리고 이어진 끔찍한 고문과 성폭행에 대한 증언은 잔느가 찾아가 만난 당시의 간수를 통해 전해진다.
고문과 성폭행의 과정에서 나왈이 아이를 잉태하고, 강물이 얼어 그 아이를 버리지 못한 간수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양치기에게 아이를 맡기는데, 감옥에서 아이를 낳은 이야기는 나왈이 유품으로 남긴 빨간 수첩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 아이들이 나중에 출소한 나왈에게 다시 돌려보내졌으며, 그들이 다름아닌 두 쌍둥이, 잔느와 시몽, 자신들임을 비로소 둘은 알게 된다. 그들의 출생의 비밀을. 나왈을 고문하고 성폭행 했던 인물, ‘아부타렉’이라는 인물이 그들의 아버지였다.
다른 장면. 유언집행인 르벨과 형을 찾아나선 시몽은 르벨의 생각대로 ‘삼셰딘’이라는 부족장을 찾아 형의 행방을 알아보기로 한다. 그들이 만난 ‘삼셰딘’은 ‘니하드’라는 저격수를 키웠으며, 그가 어릴 때 버려졌던 나왈의 아들이라고. 시몽이 드디어 형도 찾은 것이다. 아버지 ‘아부타랍’과 형 ‘니하드’ 둘을 모두 찾았지만 마지막 반전과 비극이 남아 있다. 샴셰딘은 저격수로 활약하던 니하드가 새로지은 감옥의 관리자로 변신하면서 이름까지 바꾸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아부타렉’으로. 니하드가 곧 아부타렉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왈은 5년 전 범죄자 재판과정에서 아부타렉 앞에서 그의 죄에 대해 증언을 하고, 그의 반론을 듣는 과정에서 이미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니하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자신이 버려질 때 가지고 있던 부모의 징표라며 빨간 삐에로 코를 꺼내 쓰면서 재판정을 비웃는다. 나왈이 첫사랑 와합이 서커스 단에서 훔쳐 나왈에게 주었던 사랑의 징표, 바로 그것이었다. 그 이후 나왈은 말을 잃어버렸고, 그 모든 이야기를 유언으로 남겨 두 쌍둥이와 니하드, 아니 아부타렉, 자신의 아들이자 자기가 낳은 아이들의 아버지인 그에게도 알게 해 준 것이었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잔느와 시몽, 그리고 니하드(아부타렉). 그리고 그들에게 들려오는 나할의 편지글. 자신을 고문하고 성폭행 했던 증오의 대상인 남편 아부타렉에게는 분노를, 온 길을 그를 찾기 위해 걸었던 자신의 아들인 니하드에게는 사랑을, 그리고 이 모든 끔찍한 진실 앞에 선 두 쌍둥이에게는 분노와 공포의 이면에 존재했던 사랑을 기억해 달라는 그녀의 심장에서 울리는 목소리. 니하드(아부타렉)는 자신이 나왈의 아들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조용히 사라진다. 외디푸스가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테베를 떠나듯. 시몽이 엄마의 침묵의 소리를 듣고 싶다며 테이프를 찾아 듣는 마지막 장면은 그 고통스러운 과정 끝에 비로소 찾아온 나왈과 두 오누이의 이해와 화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야기만으로도 길다. 빠트린 장면도 있을 것이다. 특히 잔느와 시몽이 니하드(아부타렉)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얽힌 이야기들, 사루다와 나할의 동행 장면, 니하드의 개인적 이야기, 등도 짧지만 충분히 극의 얼개에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큰 이야기의 틀에 대체로 연결된 듯 하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내용을 다 합쳐도 일인다역을 능숙하게 해 낸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와 책상 역할을 하던 긴 탁자와 의자 둘뿐 텅 빈 무대를 놀랍도록 가득 채울 수 있도록 동선과 인물들을 연출한 연출자의 놀라운 솜씨를 넘어설 순 없을 것이다. 무대는 비었으나 꽉 찼고, 세 시간 삼십 분이라는 긴 공연 시간 동안 단 한 순간도 긴장의 풀어짐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이야기의 전개는 탄탄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장면들이 어지럽지 않고 자연스러웠으며, 일인다역을 하는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 연결도 관객들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었다. 르벨 역의 남명렬 배우가 르벨에서 말락을 연기할 때, 이진경 배우가 나지라에서 사우디로 바뀌어 등장할 때, 우범진 배우가 몇 가지 역할을 따로따로 연기할 때, 이원석 배우가 와합에서 시몽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각자의 다른 인물들이었다. 잔느 역의 이세인 배우는 대사는 적었지만 몸으로 말보다 더 깊은 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주영 배우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특히 어린시절의 나왈보다는 비극적 사건 이후 후반의 나왈인 그녀에게. 정확하게 말하면, 목소리에 귀를 뗄 수 없었다. 목이 아니라 가슴과 배와 단전에서 울려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고저의 진폭은 크지 않았으나 깊이가 주는 울림이 끝이 없었다. 특히, 나는 재판정에서 마이크를 앞에 두고 증언의 독백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두 손으로 내 마음을 꼭 움켜쥐며 전율했다. 나는 안다. 그런 목소리가 마이크와 만나면 어떤 울림을 갖는지를. 게다가 그 감정의 조율과 미세한 떨림과 낮고 묵직하면서도 단단하게 아래를 받치며 또박또박 끝없이 낮게 조용히 속삭이는 듯 분노와 연민을 삼키며 나오는 그 소리! 낮으나 천둥 같고, 조용하고 느릿하나 번개 같은 그 소리!
목소리만 아니었다. 왼쪽 중간쯤 앉은 내 객석에서 나는 그녀와 정면으로 두세 번쯤 볼 수 있었다. 내가 측면으로 본 것은 빼고서도. 그때, 무대 정면을 향하거나 조금 왼쪽을 시선을 돌리고 대사를 하는, 아니 나왈이 되어 신이라도 있을 허공을 향해 나지막하지만 힘 있게 선 그녀의 눈에 반짝이던 눈물! 연기자이니까. 그러나 연기도 진짜 극 속의 인물이 되어 하면 더 이상 연기가 아닌 것이다. 나는 지난 몇달 사이 처음으로 극이 끝나고 그녀가 나올 때 벌떡 일어서 그녀가 들어갈 때까지 박수를 쳤다. 많은 관객들이 그랬다.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모두에게, 그리고 이주영 배우에게!
<생각할 점>
1. 중동—원작의 배경이 레바논이라고 했다—의 참혹한 현상.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서로에게 가하는 끔찍한 폭행과 살해의 되풀이에 대한 비판
2. 나지드 할머니의 대사에서 보이는 (중동) 여성들의 억압적 상황에 대한 성찰. 여성 교육과 주체적 사고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3. 글보다 총이 앞서는 폭력의 되풀이. 특히 노래를 부르고 글을 깨우쳤던 사루다가 살인자로 변하고 마침내 폭탄 테러를 하는 상황까지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의 극악함.
4. 감옥(이라는 명목)이라는 공간의 비인간적 상황에 대한 고발.
5. 그 모든 비극적 상황이 얽혀 낳은 마지막 비극, 아들에 의한 어머니 고문과 성폭행, 그리고 그로 인한 비극적 존재들의 출생.
6. 외디푸스 이야기에서 남성인 외디푸스가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면, 이 연극의 구조에서는 외디푸스(니하드)가 아니라 여성 주체인 이오카스테(나왈)가 전체 이야기의 핵이며 주인공이다. 외디푸스 신화는 이리하여 여성의 이야기로 다시 쓰인다. 가해자인 남성 주체의 자책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중의 피해자인 여성 주체의 포용의 이야기로!
7. 하여, 다시 그 모든 비극을 다 감싸 안을 수 있는 근원은 결국 사랑. 마치 이 모든 비극의 근원을 찾아가면 결국 사랑이라던 나왈의 말처럼.
아들 니하드에게 전하는 나왈의 말.
“너는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란다.”
두 쌍둥이 잔느와 시몽에게 전하는 나왈의 말.
“너희는 공포와 증오로 태어났지만 그 근원에는 사랑이 있단다. 그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1+1이 2가 아닌” 끔찍한 비극적 순간을 겪고, “다각형의 균형이 무너지는” 혼란도 겪었지만 그럼에도 모두 “함께 할 수 있으니 있으니 이젠 아무것도 문제될 게 없어”진, 하여 마침내 나왈의 침묵이 풀리고, 묘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길 수 있게 된 순간, 남겨진 두 쌍둥이는 어떤 시간을 맞이하게 될까.
운명의 맹목에 휘둘리던 고대 외디푸스의 비극적 서사가 이제 운명조차도 인간의 의지와 사랑으로 바꿔낸 더 깊은 포용의 서사로 다시 태어났다.
(생각할 점을 글로 만드는 일은 나중에 조금 더 살을 붙여 볼 생각이다. 지금은 그저 여기까지만....)